1 |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자공이 말했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셨다.
○ 諂, 卑屈也. 驕, 矜肆也. 常人溺於貧富之中, 而不知所以自守, 故必有二者之病. 無諂無驕, 則知自守矣, 而未能超乎貧富之外也. 諂은 낮게 굽힌다는 말이다. 驕는 뽐내고 방자하다는 말이다. 보통 사람은 빈부 안에 빠져버려서,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에, 반드시 이 두 가지의 병폐가 있는 것이다. 아첨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면, 스스로 지킬 줄은 알지만, 아직 빈부 밖으로 뛰어나오지는 못한 것이다.
慶源輔氏曰 爲貧所困 則氣隨以歉而爲卑屈 故多求而諂 爲富所張 則氣隨以盈而爲矜肆 故有悖而驕 경원보씨가 말하길, “가난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면, 기운이 그에 따라 부족해져 비굴하게 되기 때문에, 많이 구하면서 아첨하게 된다. 부유함에 의해 펼쳐지면, 기운이 그에 따라 넘쳐서 뽐내고 방자하게 되기 때문에, 어긋남과 교만함이 있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凡曰可者, 僅可而有所未盡之辭也. 樂則心廣體胖而忘其貧, 好禮則安處善, 樂循理, 亦不自知其富矣. 子貢貨殖, 蓋先貧後富, 而嘗用力於自守者, 故以此爲問. 而夫子答之如此, 蓋許其所已能, 而勉其所未至也. 무릇 可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괜찮을 뿐 미진한 곳이 있다는 말이다. 즐거워하면 곧 마음이 넓어지고 몸도 여유가 있어 그 가난함을 잊어버리고, 예를 좋아하면 곧 선에 처함을 편안하게 여기고 이치에 따름을 즐거워하여 또한 스스로 그 부유함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공은 재물을 불리면서 아마도 가난함을 앞에 두고 부유함을 뒤로 하여 일찍이 스스로 지키는 것에 힘을 쏟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으로써 질문을 삼은 것이다. 그런데 공자님께서 이와 같이 대답하신 것은 아마도 그가 이미 잘하는 것을 인정해주면서도, 그가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을 권면하신 것 같다. 漢董仲舒策 孔子云 天地之性 人爲貴 明於天性 知自貴於物 知自貴於物然後 知仁義 知仁義然後 重禮節 重禮節然後 安處善 安處善然後 樂循理 樂循理然後謂君子 한서 동중서 책에 공자가 말하길, 천지의 본성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데, 천성에 밝으면 스스로가 외물보다 귀함을 알게 되고, 자신이 외물보다 귀함을 알게 된 연후에 仁義를 알며, 仁義를 알게 된 연후에 예절을 중하게 여기고, 예절을 중하게 여기게 된 연후에 善에 거처함을 편안하게 여기며, 善에 거처함을 편안하게 여기게 된 연후에 이치에 따름을 즐거워하는 것이니, 이치에 따름을 즐거워한 연후에 군자라고 일컫는 것이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心廣體胖者 指其樂之之象 安處善 樂循理者 論其好禮之實 경원보씨가 말하길, “心廣體胖(마음이 넓고 몸도 여유 있음)이라는 것은 그 즐거워하는 형상을 가리킨 것이고, 安處善과 樂循理라는 것은 예를 좋아하는 그 실질을 논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忘其貧不自知其富 則超乎貧富之外矣 신안진씨가 말하길, “자기의 가난함을 잊고 자기의 부유함도 스스로 알지 못한다면, 빈부의 밖으로 초월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東陽許氏曰 樂與好禮 皆是心上言 故上面說心廣 下面說樂循理 心旣廣大寬平 則體自然舒泰 此由內以達外 行事安於處善 皆旣心樂於循理也 此由外以原內也 樂一字全是心 故先言內 禮有節文於事上 見其好之則在心也 故先言外 然體旣安舒 烏得有卑屈 心旣樂循理 烏得有矜肆 却暗關上兩句 見得未若兩字意 동양허씨가 말하길, “樂과 好禮는 모두 마음 위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위에서 心廣(마음이 넓음)을 말한 것이고, 아래에서 樂循理(이치에 따름을 즐거워함)를 말한 것이다. 마음이 이미 광대하고 너그럽고 평화롭다면, 몸도 자연히 여유 있고 태평할 것이니, 이것은 안을 말미암아 밖으로 도달한 것이다. 일을 행하면서 善에 거처하는 것을 편안해하는 것은 모두 이미 마음이 이치에 따름을 기뻐하는 것이다. 이는 밖을 말미암아 안으로 推原(근원지로 미루어 나감)한 것이다. 樂이란 한 글자가 전부가 다 마음이니, 그러므로 먼저 안을 말한 것이다. 禮는 일 위에서 節文을 갖고 있지만, 그 좋아하는 원칙은 마음에 있음을 알기 때문에, 밖을 먼저 말한 것이다. 그러나 몸이 이미 편안하고 여유롭다면, 어찌 비굴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마음이 이미 이치를 따르는 것을 즐거워한다면, 어찌 뽐내고 방자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도리어 몰래 위의 두 구절을 연관해보면, 未若(아직 ~만은 못하다)이라는 두 글자의 뜻을 알아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家語子貢家富累千金 好販與時轉貨 註云 買賤賣貴以殖其貨 공자가어에 이르길, 자공은 집안이 부유하여 천금을 쌓아두고 있었고, 재물을 사서 때에 맞추어 굴리기를 좋아하였다고 하였다. 주석에 이르길, 낮은 가격에 사서 높은 가격으로 파는 방식으로 그 재물을 불렸다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可也是許其已能自守而無諂無驕 신안진씨가 말하길, “可也(괜찮다)라고 말한 것은 그가 이미 능히 스스로를 지키면서 아첨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을 인정해준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勉其更進於樂與好禮 신안진씨가 말하길, “그에게 즐거워함과 예를 좋아함에 더 나아가도록 권면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龜山楊氏曰 貧而無諂 則貧不至於濫 富而無驕 則富不至於溢 與夫貧而諂富而驕 蓋有間矣 然孔子可之而未善也 故又以貧而樂富而好禮告之 구산양씨가 말하길,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는다면 가난이 넘치는 지경에 이르지 않은 것이고,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는다면 부유함이 넘치는 지경에 이르지 않은 것이다. 이는 저 가난하면 아첨하고 부유하면 교만한 것과 더불어 대체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께서는 그것을 괜찮다고는 여겼지만, 아직 善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시 가난하지만 즐거워하고, 부유하지만 예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 주셨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富無驕貧無諂 分量皆可著力 如不向此上立得定 是入門 便差了 주자가 말하길, “부유하지만 교만함이 없고 가난하지만 아첨함이 없는 것은, 그 분량이 모두 힘쓸만한 것들이다. 만약 늘상 이것들 위에서 굳건히 서지 않는다면, 문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차질이 생길 것이다.”라고 하였다.
貧則易諂 富則易驕 無諂無驕 是知得驕諂不好而不爲之耳 樂是他自樂了 不自知其爲貧也 好禮是他所好者禮而已 亦不自知其爲富也 가난하면 아첨하기 쉽고, 부유하면 교만하기 쉽다. 아첨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다는 것은, 이는 교만과 아첨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서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일 따름이다. 그러나 즐긴다는 것은 그 스스로 즐거워한다는 것으로서, 자신이 가난하다는 것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禮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가 좋아하는 것이 禮일 뿐이라는 것이니, 이 또한 자신이 부유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自無諂無驕者言之 須更樂與好禮 方爲精極 不可道樂與好禮 須要從無諂無驕上做去 蓋有人資質合下便在樂與好禮地位 不可更回來做無諂無驕底工夫 孔子意做兩人說 謂一般人無諂無驕 不若那一般人樂與好禮 較勝他 子貢意做一人說 謂無諂無驕 不若更樂與好禮 又曰 今人未能無諂無驕 却便要到貧而樂富而好禮 如何得 子貢却盡得無諂無驕底了 聖人更進得他貧而樂富而好禮地位 아첨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는 것으로부터 말하자면, 모름지기 더 나아가 즐거워하고 禮를 좋아해야만 비로소 정밀하고 지극한 것이 된다. 그러나 즐거워하고 禮를 좋아하는 것은 모름지기 아첨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는 것에서부터 해나가야만 한다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대개 자질이 원래(合下)부터 곧장 즐거워하고 예를 좋아하는 경지에 있기에, 다시 돌아가서 아첨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는 공부를 하게 해서는 안 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공자님의 뜻은 두 사람으로 나누어서 말한 것이다. 한 종류의 사람은 아첨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는데, 저쪽 한 종류의 사람이 즐거워하고 禮를 좋아하는 것이 그들보다 나은 것만 못하다고 말한 것이다. 자공의 뜻은 한 사람으로 해서 말한 것인데, 아첨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는 것은 더 나아가 즐거워하고 예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고 말한 것이다. 또 말하길, “지금 사람들은 아첨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는 것도 해내지 못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곧장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경지에 이르도록 한다면,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자공은 도리어 아첨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는 것은 모두 다 해낼 수 있었고, 성인께서는 더 나아가 저 가난하지만 즐거워하고 부유하지만 예를 좋아하는 경지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子貢問貧無諂富無驕 伊川諸說 大抵謂其貨殖非若後人之豊財 但此心未忘耳 今集註謂 其先貧後富 則是亦嘗如後世生産作業矣 曰 聖人旣說貨殖 須是有些如此 看來子貢初年亦是把貧富煞當事了 누군가 묻기를, “자공이 가난하지만 아첨함이 없고 부유하지만 교만함이 없는 것에 대해 물었는데, 정이천의 여러 말씀은 대저 자공의 재물 불림은 후세사람의 豊財(재물을 넉넉히 함)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다만 이 마음을 잊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 집주에서는 자공이 먼저 가난하였다가 나중에 부유하게 되었으니, 이는 곧 역시 후세 사람들의 생산 작업과 같았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성인께서 이미 貨殖(재물 불림)이라 말씀하셨으니, 모름지기 다소 이와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자공이 초년에 역시 貧富를 매우(煞) 대단한 일로 삼았었던 것 같다.”라고 하였다.
厚齋馮氏曰 無諂無驕則知自守矣 然猶有所用力焉 力少不逮 則諂驕復形 樂且好禮 則貧富兩忘矣 蓋知樂天循理而無復事於人事也 후재풍씨가 말하길, “아첨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다면, 스스로를 지킬 줄 아는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여기에 힘을 쓰는 것이 있으니, 힘이 조금이라도 이르지 않는다면, 아첨과 교만함이 다시 형성될 것이다. 즐거워하고 또 예를 좋아한다면, 가난함과 부유함을 둘 다 잊어 버리는 것이다. 대체로 하늘을 즐거워하고 이치를 따를 줄 알아서 더이상 사람의 일을 일삼음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
2 |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자공이 말하기를, “시경(詩經)에 ‘절단한 뒤에 다시 그것을 간 듯하며, 쪼은 뒤에 다시 그것을 간 듯하다.’ 하였으니,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니,
○ 『詩』衛風「淇澳」之篇, 言治骨角者, 旣切之而復磋之; 治玉石者, 旣琢之而復磨之, 治之已精, 而益求其精也. 子貢自以無諂無驕爲至矣, 聞夫子之言, 又知義理之無窮, 雖有得焉, 而未可遽自足也, 故引是詩以明之. 시경 위풍 기오 편이다. 뼈나 뿔을 가공하는 자는 자른 다음 다시 갈고, 옥돌을 가공하는 자는 쫀 다음 다시 갈아주는데, 가공함이 이미 정밀했음에도 그 정밀함을 더욱 구한다는 말이다. 자공은 스스로 아첨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음을 지극한 것으로 여겼지만, 공자님의 말씀을 듣고서 다시 의리가 무궁하니, 비록 터득한 바가 있더라도, 이에 갑자기 스스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시를 인용하여 그것을 밝힌 것이다.
朱子曰 所謂義理無窮 不是說 樂與好禮 自是說 切磋琢磨 精而益精耳 주자가 말하길, “이른바 의리가 무궁하다는 것은 樂과 好禮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切磋琢磨하여 정밀한 것을 더욱 정밀하게 하는 것을 말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子貢問無諂無驕 夫子以爲僅可 然未若樂與好禮 此其淺深高下亦自分明 子貢便說切磋琢磨 方是知義理之無窮也 자공은 아첨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는 것에 대해 물었는데, 공자께서는 그저 괜찮을 뿐이지만 즐거워하고 예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기셨던 것이다. 여기서 그 얕고 깊음과 높고 낮음이 또한 스스로 분명하였기에, 자공이 즉시 切磋琢磨를 말하였는데, 바야흐로 의리의 무궁함을 알았던 것이다.
無諂無驕 隨事知戒足以自守也 然未見其於全體用功而有自得處也 樂與好禮 乃見其心之所存 有非貧富之所能累者 此子貢所以有切磋琢磨之譬也 治骨角者 旣切之而復磋之 治玉石者旣琢之而復磨之 皆先略而後詳 先粗而後精之意 아첨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으면, 일에 따라 경계할 줄 알아서 족히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온전한 體에 힘을 써서 스스로 터득할 곳이 있음을 아직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즐거워하고 禮를 좋아하면, 마침내 그 마음이 보존된 바에 貧富가 능히 연루시킬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공이 切磋琢磨의 비유를 가질 수 있었던 까닭이다. 뼈와 뿔을 가공하는 자는 이미 잘라놓고서 다시 갈고, 옥석을 다스리는 자는 이미 쪼아놓고서 다시 갈아주는 것이다. 이 모두가 대략 하는 것을 먼저 하고 상세하게 하는 것은 나중에 하며, 거친 것을 먼저 하고 정밀한 것은 나중에 한다는 뜻이다.
子貢擧詩之意 不是專以此爲貧而樂富而好禮底工夫 蓋見得一切事皆合如此 不可安於小成而不自勉也 자공이 이 시를 비유로 들었던 뜻은 오로지 이를 가지고 가난하지만 즐거워하고 부유하지만 禮를 좋아하는 공부로 삼고자 한 것이 아니다. 대체로 모든 일이 전부 부합하기가 이와 같으니, 작은 성공에 안주하여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아서 알아보았던 것이다.
或問大學傳引此時以道學自修釋之 與此不同 何也 曰 古人引詩斷章取義 姑以發己之志 或疎或密或同或異 蓋不能齊也 혹자가 묻기를, “대학의 傳에서 이 시를 인용하여 道學(말하고 학문함)과 自修로써 풀이하였는데, 이것과 다른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옛사람은 시를 인용할 적에 문장을 끊어서 뜻을 취했으니, 잠시 이로써 자신의 뜻을 드러냈기 때문에, 혹은 소략하기도 하고 혹은 조밀하기도 하며, 혹은 같고 혹은 다르기도 하였다. 대체로 가지런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勉齋黃氏曰 若謂無諂無驕爲如切如琢 樂好禮爲如磋如磨 則告往知來一句 便說不得 子貢言無諂驕 夫子言未若樂與好禮 子貢便知義理無窮 人須就學問上做工夫 不可少有得而遽止 詩所謂如切磋琢磨治之已精而益致其精者 其此之謂與 면재황씨가 말하길, “만약 아첨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는 것을 일컬어 如切如琢(자르듯이 쪼듯이 함)이라고 말하고, 즐거워하고 예를 좋아함을 일컬어 如磋如磨(갈아주듯이 함)라고 말하였다면, 지나간 것을 알려주니 다가올 것을 안다는 이 한 구절을 곧바로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공은 아첨과 교만함이 없다고 말하였고, 공자께서는 즐거워하고 예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고 말하였는데, 자공은 곧바로 의리가 무궁하니, 사람은 모름지기 학문 위에 나아가 공부를 해야 하고, 조금 터득함이 있다고 갑자기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시에서 말한 이른바 ‘자르고 갈고 쪼고 갈아주듯이 하여 다스리되 이미 정밀하지만 더욱 그 정밀함을 지극히 한다는 것’은 어쩌면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하였다.
西山眞氏曰 凡製物爲器 須切琢成形質了 方可磋磨 旣切琢了 若不磋磨 如何得他精細潤澤 서산진씨가 말하길, “무릇 사물을 가지고 그릇을 만들 적에는 모름지기 자르고 쪼아서 형질을 이룬 다음에 바야흐로 갈아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미 자르고 쪼았더라도 만약 갈아주지 않는다면, 어찌 그 정밀하고 세세하며 윤택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
3 |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賜, 자공)와는 이제 시(詩)를 말할 만하구나. 이미 지나간 것을 말해 주자, 앞으로 말해 줄 것까지 아는구나.” 라고 하셨다. 往者, 其所已言者. 來者, 其所未言者. 지나간 것이란 이미 말한 것이고, 오는 것이란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이다.
朱子曰 所已言 謂處貧富之道 所未言 謂學問之功 주자가 말하길, “이미 말한 바란 貧富에 대처하는 道를 말하고, 아직 말하지 않은 바란 학문의 功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勉齋黃氏曰 此章須是見得切磋琢磨在無諂無驕樂與好禮之外 方曉得所已言所未言 前之問答 蓋言德之淺深 此之引詩乃言學之疎密 면재황씨가 말하길, “이 장은 모름지기 切磋琢磨가 無諂無驕樂與好禮의 밖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바야흐로 이미 말한 바와 아직 말하지 않은 바를 깨우칠 수 있는 것이다. 이전에 한 문답은 대체로 덕의 깊고 얕음을 말한 것이지만, 여기서 시를 인용한 것은 마침내 학문의 소략함과 치밀함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愚按: 此章問答, 其淺深高下, 固不待辨說而明矣. 然不切則磋無所施, 不琢則磨無所措. 故學者雖不可安於小成而不求造道之極致; 亦不可騖於虛遠而不察切己之實病也.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장의 문답은 그 얕고 깊음과 높고 낮음이 본래 분별하여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명확하다. 그러나 잘라놓지 않으면 가는(磋) 것을 펼칠 곳이 없고, 쪼아놓지 않으면 붙잡고 갈(磨) 곳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은 비록 작은 성취에 안주하여 도의 극치에 나아감을 추구하지 않아서는 안 되지만, 또한 헛되고 고원한 것에만 치달려서 자신에게 간절한 실제 병폐를 살피지 않는 것도 안 되는 것이다.
雲峯胡氏曰 常人二者之病與學者切己之實病 當看兩病字 若只就貧富上說 貧者病諂 富者病驕 必除諂驕之病然後 可到樂與好禮地步 若就義理學問上說 則學者之病固多 必先除切己之實病然後 可求造道之極致也 운봉호씨가 말하길, “일반 사람들의 두 가지 병폐(貧諂富驕)는 배우는 자의 실제적 병폐와 더불어서 마땅히 두 개의 病자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그저 貧富 위로 나아가 말한다면, 가난한 자의 병폐는 아첨하는 것이고, 부유한 자의 병폐는 교만한 것인데, 반드시 아첨함과 교만함의 병폐를 제거한 연후에야 즐거워하고 예를 좋아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義理와 학문 위로 나아가 말한다면, 배우는 자의 병폐는 본래 많지만, 반드시 먼저 자신에게 절실한 실제적 병폐를 제거한 연후에 비로소 道의 극치에 나아감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切必貴磋 琢必貴磨 此正意也 必切方可加磋 必琢方可加磨 此餘意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자르는 것은 반드시 갈아줌을 귀하게 여기고, 쪼는 것은 반드시 갈아줌을 귀하게 여기는데, 이것이 바로 올바른 뜻이다. 반드시 잘라야만 비로소 갈아주는 것을 더할 수 있고, 반드시 쪼아야만 비로소 갈아주는 것을 더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그 나머지 뜻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