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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
염려 외 4편
유자효
무섭지
가슴을 빠개는 고통
심장을 세우는 공포
혈관을 자르는 두려움
그러나
혼자가 아냐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어
이 자리를 거쳐 간 사람들
거쳐 가는 사람들
거쳐 갈 사람들이 무수하단다
너를 살리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이제 맡겨둬
염려하지마
아픔
만지지 말아다오
스치는 바람결에도
자지러지게 아프니
손대지 말아다오
세상은 아픔 투성이
아픔은 무섭지만
정말 싫지만
아픔을 모르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하니
아픔과 함께 가야할 밖에
쳐다보지 말아다오
이제는 눈길에도 참 아프구나
윤회
신령한 기운이 있어 윤회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 두뇌를 그대로 갖고 나지 않으니 부질없는 일입니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 아닌 내가 다른 몸을 받아 태어난다 하더라도 지금의 나와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조상의 그늘을 내가 입고 내가 하는 일이 나의 미래와 내 후손의 그늘이 된다는 것이 설득력 있는 말이겠지요
설령 윤회의 바퀴 위에 얹힌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다른 세상의 질서인고로 지금의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 있을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이 시간만이 나에게는 오로지 알파이자 오메가
그래서 지금 이 삶이 윤회의 전체를 아우르는 무게를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속도
속도를 늦추었다
세상이 넓어졌다
속도를 더 늦추었다
세상이 더 넓어졌다
아예 서 버렸다
세상이 환해졌다
마라토너
그는 달린다
가슴이 터질듯한 고통
숨이 끊어질듯한 공포
포기하고 싶다
걷고 싶다
쉬고 싶다
눕고 싶다
시시각각
끊임없이 밀려오는
강렬한 유혹을 억누르며
그는 달린다
우리의 인생을 위해
그는 달린다
유자효/ 1947년 부산 출생. 1968년 〈신아일보〉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주머니 속의 여자』 『전철을 타고 히말라야를 넘다』 『여행의 끝』 『성자가 된 개』, 산문집 『나는 희망을 보았다』 『다시 볼 수 없어 더욱 그립다』 등. 현대불교문학상, 유심작품상, 정지용문학상 등 수상. 국제 펜 한국본부 부이사장. 지용회장.
<신작시 특집 해설>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 나오기장영우
유자효(柳子孝) 시인의 이력은 독특하다. 서울대 사범대 불어과를 졸업한 그는 KBS 기자로 파리특파원까지 역임했고, 이후 SBS 논설위원 실장을 지내고 이사로 사임할 때까지 30년 동안 방송인으로 일해 왔다. 그는 훤칠한 키에 서구적 외모를 지닌 데다 웬만한 성우 뺨칠 미성美聲의 소유자여서 5척 단신 동년배나 선후배 문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그가 〈불교신문〉과 〈신아일보〉 신춘문예에서 하필이면 시조로 등단한 것은 하나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외모로나 대학전공으로나 한국 토종과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이던 그가 시조에 관심을 보일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는 1968년 약관의 나이로 시조시인이 되었으나, 문인으로서의 활동은 미미했다. 그것은 서울대 불어과 재학생이라는 독특한 신분과 KBS 기자라는 직업에서 연유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960년대 서울대에서는 창작을 희망하는 학생들에게 교수들이 “시나 소설을 쓰려면 서라벌예대 문창과나 동국대 국문과에 갈 것이지 왜 여기 왔느냐?”고 핀잔을 주었다고 전해지거니와, 유자효도 그런 분위기에서 썩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졸업 후 방송사에 취직하면서 더욱 문학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십년 넘게 뚜벅뚜벅 시를 발표해 온 현역시인이다. 세련되지만 다소 이기적으로 보이는 외모와 달리 은근한 뚝심은 그가 토종 한국 사내임을 명백히 증거하고 있다.
방송인으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비로소 본격적 시인이 된 그의 새로운 스케줄은 모두 문학과 관련된 일로 짜여져 있다. 방송사 퇴직 후 그는 국제 펜(PEN) 한국본부 부이사장 및 지용회 회장 일을 맡아 예전 못지않게 바쁘게 지내고 있으며, ‘유심작품상’을 비롯해 ‘정지용문학상’·‘현대불교문학상(시조 부문)’ 등 굵직굵직한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시인으로서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외모가 단정하고 매너 또한 세련된 그의 언행은 서구적 의미의 ‘신사’의 풍모가 어떤 것인지를 몸 전체로 알려준다. 이순을 훌쩍 넘긴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동년배 문인들의 행태와 구별되는 것은 그가 파리특파원으로 지내며 체득한 문화적 감각과 방송인으로 지내면서 습관화된 절제 탓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글에서는 독한 박래향이나 느끼한 서구문화의 현학이 감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하필이면 한국 토종의 시조를 쓰는 데다, 문학과 삶의 바탕에 불교적 사상과 진리가 깊게 배어있기 때문일 터이다.
유자효의 근작시는 육체적 고통으로 인한 신음으로 흥건하다. 그러나 그 고통과 신음은 삶의 절망적 순간에 빠진 자의 단말마적 절규가 아니라 육체가 갈라지고 찢기는 아픔을 이겨내며 새로운 삶을 획득한 자의 고고지성呱呱之聲과 닮아 있다.
무섭지
가슴을 빠개는 고통
심장을 세우는 공포
혈관을 자르는 두려움
그러나
혼자가 아냐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어
이 자리를 거쳐 간 사람들
거쳐 가는 사람들
거쳐 갈 사람들이 무수하단다
너를 살리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이제 맡겨둬
염려하지마
―「염려」 전문
화자는 아마도 큰 수술을 받기 전의 환자인 모양이다. 그는 “가슴을 빠개”고 “심장을 세우”며 “혈관을 자르는” 대수술을 받아야 할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 정도의 수술을 하려면 전신마취를 할 터이므로 환자는 아무 고통도 느끼지 못하겠지만,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의 공포와 두려움은 어떤 방법으로도 잊거나 지워버릴 수 없다. 그런데 화자는 스스로를 달랜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나를 도와주고 살리려는 사람이 저토록 많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자신의 병든 육체와 나약한 마음을 다독거리고 있는 것이다(그것은 화자의 자위일 수도 있고 가족이나 의사의 위로일 수도 있다). “이 자리를 거쳐 간 사람들/거쳐 가는 사람들/거쳐 갈 사람들이 무수하”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만 명의 환자의 생사가 수술대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모든 의료진과 환자의 보호자가 그를 살리려 최선을 다 한다는 점을 깨닫고 안도한다. 많은 사람들이 다행히도 이와 같은 대수술을 받지 않고 지내지만, 이 시의 화자는 특별한 체험을 통해 세상과 새로운 교감을 한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자기만의 것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무수한 사람들의 관심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의 확인이다.
만지지 말아다오
스치는 바람결에도
자지러지게 아프니
손대지 말아다오
세상은 아픔 투성이
아픔은 무섭지만
정말 싫지만
아픔을 모르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니
아픔과 함께 가야할밖에
쳐다보지 말아다오
이제는 눈길에도 참 아프구나
―「아픔」 전문
통풍痛風이란 병은, 발가락에 바람만 스쳐도 찌를 듯한 동통疼痛을 수반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위 시에서 “스치는 바람결에도/자지러지게 아프니”라고 호소하는 화자는 마치 통풍환자처럼 자신과 관련된 사소한 인연에도 아파한다. 그러므로 화자가 손대거나 만지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화자가 심각한 외상外傷을 입어서라기보다 스쳐가는 인연과의 작은 이별이나 불화에도 마음에 상처를 받는 여린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에서 이 세상을 ‘고해苦海’라 비유한 데서 알 수 있듯 우리의 일상적 삶은 온통 “아픔 투성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믿음과 배신…… 등의 행위가 하나같이 고통 아닌 것이 없다. 이별과 죽음의 고통이 너무 크고 깊어 피하고 싶지만 사랑과 삶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이기도 하다. 사정이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과 삶의 기회를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사랑과 삶의 즐거움만 선택적으로 수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른 상처와 고통까지 모두 포용하겠다는 적극적이고 대승적인 삶의 인식태도이다.
일반적으로 통증은 사물과의 직접적 접촉에서 발생하는 감각이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는 “스치는 바람결에도/자지러지게 아프”다는 차원을 넘어 “눈길에도 참 아프”다고 느끼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있다. 말하자면 그의 통증은 촉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각과 의식[眼耳鼻舌身意 色聲香味觸法], 즉 몸과 마음 전체로 느끼는 것이다. 이 세상이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인식하면서 그 고통을 몸과 마음 전체로 느낀다는 것은 결국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거기에 순치되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삶이란 원래 고통스러운 것이며, 고통이 없는 삶은 곧 죽음과 다를 바 없다는 깨달음은 말 그대로 죽음에 이를 정도의 고통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다. 이렇듯, 삶을 고통 그 자체로 받아들이면서 나와 인연을 맺은 모든 것이 더욱 사랑스럽고 안타깝게 여겨진다. 주지하듯, 그러한 마음을 불가에서는 흔히 ‘자비’라 일컫는다.
대수술을 받기 전까지 화자의 삶은 앞만 보고 질주하는 마라토너의 맹목성을 닮았는지 모른다. 마라톤은 흔히 길고 험난한 인생 그 자체로 비유되거니와, 그 과정은 “가슴이 터질 듯한 고통/숨이 끊어질 듯한 공포”(「마라토너」)의 연속이어서 체력과 의지가 약한 사람은 완주完走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축구나 야구와 같은 구기 종목이나 권투 등 격투기 등 대부분의 스포츠에는 선수를 격려하고 도와주는 감독이나 코치가 있게 마련이지만, 마라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자신만을 믿고 의지하며 달려야 한다. 그런 점에서 마라토너의 최대의 적은 끊임없이 뛰지 말고 걷거나 쉬고, 아예 누워 버리라고 꼬드기는 내면의 유혹일 것이다. 달리기를 멈추는 순간 육체적 고통과 공포는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고, 중간에 포기했다고 하여 사회적 책임을 지거나 신체적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달리기를 멈추라는 내면의 꼬드김은 우리가 삶의 중대한 고비에서 항상 마주치곤 하는 실패나 좌절을 뜻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부정한 세력과의 은밀한 거래나 결탁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신체적 고통과 내면적 유혹과 싸우며 달리는 마라토너는 가장 정직하고 순결한 정신의 소유자라 할 수 있으며, 마라톤이란 그런 점에서 우리 자신의 인생을 위한 달리기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
시시각각
끊임없이 밀려오는
강렬한 유혹을 억누르며
그는 달린다
우리의 인생을 위해
그는 달린다
―「마라토너」 부분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달리기를 포기하라는 내부의 끈질긴 유혹을 이겨내고 완주하는 마라토너의 태도는 삶의 고통에 순응하면서 작은 인연에도 가슴 아파하는 마음과 완전하게 일치한다. 이 시의 화자는 마라토너가 아니라 마라톤 경주에 참가한 선수를 바라보는 관찰자이지만, 마라토너와 철저하게 동일화되어 있다. 화자는 자신이 마치 마라토너가 된 것처럼 격심한 고통과 공포를 느끼며 포기하려는 유혹에 저항한다. 그 마음이야말로 중생이 병들어 있으므로 자신도 병을 앓겠다던 각자覺者의 마음과 통하는 것이다.
근대 과학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예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속도의 세계를 살게 되었다. 속도의 체험은 우리에게 경이와 쾌감, 전율과 공포라는 이중적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관과 가치관의 근본적 변화를 초래하였다. 근대 이전에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데 한 달이란 시간이 소요되었으나 지금은 KTX로 세 시간이 채 안 걸린다. 그것은 서울과 부산 간의 거리에 변화가 생겨서가 아니라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기차가 시간과 공간을 단축시킨 것이다. 속도는 우리의 일상적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매사를 그것과 연관시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속도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충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충격이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현대인은 스스로 속도를 지배하지 못하고 그것에 지배당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최근 일부 지식인이나 종교에서 ‘느림의 철학’을 새로운 삶의 화두로 삼은 것도 그러한 사정과 관련된다.
속도를 늦추었다
세상이 넓어졌다
속도를 더 늦추었다
세상이 더 넓어졌다
아예 서 버렸다
세상이 환해졌다
―「속도」 전문
KTX에서는 원경遠景을 바라볼 수 있을지 몰라도 가까운 것은 보지 못한다. 그러나 완행열차를 타거나 아예 걸으면 길섶의 작은 들꽃이나 시냇물에서 튀어 오르는 송사리를 볼 수 있다. 아예 걷기를 멈추고 서거나 앉으면 들꽃의 모양과 냄새를 확인할 수 있고, 시냇물 돌틈에 사는 가재도 발견할 수 있다.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우리의 삶이 한결 편리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 때문에 잃은 정신적 여유나 한가閑暇의 가치 또한 결코 간과될 만한 게 아니다. 위 시는 불과 여섯 행의 짧은 내용에 똑같은 단어의 반복적 사용과 변주를 통해 ‘느림의 철학’의 정수精髓를 꿰뚫고 있다. ‘속도’·‘세상’이란 가장 기본적인 어휘와 ‘늦추다’·‘버리다’란 동사의 적절한 활용을 통해 ‘넓어지다’·‘환해지다’란 놀라운 결과를 창조하는 언어의 마술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속도만을 추구하면 목표에 도달하는 시간은 단축할 수 있을지 모르그보다 소중한 것을 잃을 우려가 더 많다. 세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 끝이 좋으면 다 좋다(All’s Well that Ends Well)는 제목의 희곡이 있거니와, 이 말은 때로 과정보다 결과만을 중요시하는(The End justifies the means) 목적론 혹은 공리주의에 대한 변호의 논리로 이용된다. 서구 근대철학은 행위의 도덕적 평가 기준을 ‘동기’에서 찾으려는 I. 칸트 철학과 ‘결과’에서 찾으려는 J. 벤담 및 J.S. 밀의 철학이 선명하게 구분되는데, 속도를 늦춤으로써 보다 넓고 큰 세계를 발견한 위 시의 화자는 칸트의 관점에 보다 근접한 사고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속도를 늦추고 늦추다 마침내 정지한다는 것은 일상적 삶의 경쟁에서 한 발 물러나거나 아예 경쟁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으로 읽힐 수 있다. 경쟁에 뒤처지거나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물질적 손해를 입을지라도 정신적 풍요와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결코 밑지는 일이 아니다. 화자가 속도를 늦춘 뒤 세상이 보다 넓고 환해졌다고 인식하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 아름답고 살만한 곳이라는 점을 알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유자효의 근작시는 대체로 모어의 기층基層을 이루는 어휘들로 씌어져 독자들에게 친숙한 호소력을 갖는다. 또한 기상천외한 상상력이나 기발한 반전을 의도하지 않고 다소 진부하기까지 한 점층과 대조, 나열의 기법을 통해 잔잔하고 진한 공감을 유발한다. 이를테면 「아픔」에서는 ‘아프다’라는 어감의 단어가 모두 다섯 번(‘아픔’ 4, ‘아프다’ 1) 나오고, 「속도」는 ‘속도를 늦추다’/‘세상이 넓어지다’라는 진술의 반복으로 한 편의 시가 완성된다. 이러한 단순하고 질박한 언술이 의외로 커다란 공감을 유발하는 것은 행간行間에 숨겨진 삶에 대한 통찰과 지혜가 그만큼 넓깊기 때문이라 보인다. 우리가 어려서 배워 결코 잊을 수 없는 기본어휘들로 삶의 고통과 아픔,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고 순화하는 지혜를 질박하게 노래한 시편들에 비해 「윤회」는 다소 사변적이고 설명적이다.
신령한 기운이 있어 윤회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 두뇌를 그대로 갖고 나지 않으니 부질없는 일입니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 아닌 내가 다른 몸을 받아 태어난다 하더라도 지금의 나와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조상의 그늘을 내가 입고 내가 하는 일이 나의 미래와 내 후손의 그늘이 된다는 것이 설득력 있는 말이겠지요
설령 윤회의 바퀴 위에 얹힌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다른 세상의 질서인 고로 지금의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 있을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이 시간만이 나에게는 오로지 알파이자 오메가
그래서 지금 이 삶이 윤회의 전체를 아우르는 무게를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윤회」 전문
가슴을 빠개고 심장을 세우는 큰 수술을 받고난 뒤 이 시인은 현세의 삶과 내세의 삶, 즉 윤회에 대해 새삼스러운 성찰을 하게 된 걸까. 사바세계의 모든 중생이 현세의 생을 다하면 그 업業에 따라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여섯 가지 세상에 번갈아 태어난다는 윤회 사상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 가운데 하나다. 윤회는 철저하게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인과관계의 지배를 받으며 육도윤회를 반복하는 것이어서 이 또한 괴로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불교의 궁극적 가르침은 극락왕생이 아니라 육도윤회에서의 완전한 탈출, 즉 해탈을 목표로 한다. 이 시의 화자는 설령 자신이 죽어 내생에 좋은 곳에 태어난다고 해도 그와 자신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현생의 삶과 완전히 단절된 내생의 삶은 그 자체로 새로운 생이므로 현생의 나로서는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생에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선업을 쌓기보다 내 현생의 다소 안락하고 평안한 삶이 조상의 선업 덕분이라 여겨, 후손들에게 덕이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착하게 살아간다는 의식이 소중하다고 이 시의 화자는 생각한다. 이러한 현세주의는 ‘지금-여기’에서의 삶이 가장 소중하다는 불교적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운문 화상이 소참법문小參法門 때 대중에게 물었다.
“보름 전의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다. 보름 이후의 일에 대해 한 마리 일러보라.”
대중이 모두 침묵하자 화상이 스스로 대답했다.
“날마다 좋은 날이로다.”
擧 , 雲門垂語云 十五日已前 不問汝 十五日已後 道將一句來. (自代云) 日日是好日
―벽암록 제6칙, ‘雲門日日好日’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은 원래 백여덟 공안 가운데 하나지만, 그 뜻이 워낙 좋아 요즘은 일반인에게도 널리 회자되고 있는 구절이다. 그것은 과거에 연연하지도 말고 앞날을 미리 걱정하지도 말며 오직 오늘 하루의 삶에 충실하라는 가르침이다. 오늘이 좋으면 어제가 좋은 것이고 내일도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다. 오늘은 어제의 내일이고 내일의 어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을 충실히 산다는 것은 결국 전체 삶을 보람차게 살아간다는 의미로 환치된다. 이 시의 화자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이 시간만이 나에게는 오로지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지금-여기’에서의 삶에 충실할 것을 다짐한다. 지금까지 우리 모어의 가장 기본적인 어휘로 웅숭깊은 삶의 오의奧義를 형상화해 온 시인이 이 대목에서 ‘알파·오메가’란 외래어(단순한 외래어가 아니라 기독교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란 예술의 선언을 연상케 하는) 구절을 쓴 것이 다소 어색하거니와(이런 지적도 시인의 보다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분별심에서 나온 것일지 모르나), 그 정신은 운문 화상의 ‘날마다 좋은 날’이란 법어의 요체를 정확히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유자효는 과묵하고 굼뜬 걸음으로 사십 년 넘는 세월 동안 시조를 써온 ‘현역’이다. 그는 평균 십 년에 한 권 꼴로 시집을 내면서 시인으로서의 명맥을 가까스로 이어왔으나, 직장에서 자유로운 몸이 된 이후로는 괄목할 정도로 시업詩業에 빠져들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몇 년 동안의 과도한 열정과 몰두 이후 그는 근작시를 통해 속도를 다소 늦춰 세상을 넓게 바라보면서도 삶을 위해 일정한 보폭과 속도의 달리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러한 절제와 지속의 균형감각이야말로 유자효의 근작시가 이뤄낸 정신적 성취일 것이다. 그는 현생에서의 삶이 고통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곳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천천히, 쉬지 않고 유영遊泳한다. 그리고 그 유영의 시간이 현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시인인 것이다.
장영우/ 본지 편집 주간. 현대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