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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A.D. | 간지 | 왕력 제일 | 가락국기 | ||||
중국 | 신라 | 고구려 | 백제 | 가락국 | |||
521 | 신축 | 양 고조 보통 2년 | 23. 법흥왕 재위 8년 | 22. 안장왕 재위 3년 | 25. 무령왕 재위 21년 | 10. 구형왕 재위 1년 | 겸지왕 재위 30년 구형왕 재위 1년 |
(33) 구형왕은 김씨로 정광 2년(521)에 즉위하여 42년 동안 다스렸다(521∼562).
제10 구형왕은 겸지(왕)의 아들로 어머니는 숙녀이다. 신축(521)에 즉위하여 43년 동안 다스렸다(521∼563).
“교수님. 위의 기록은 어떤 관점에서 검토해보는 것이 좋을까요.(김태유)”
“글쎄요. 앞에서 검토한 (31)―㉯에서는 겸지왕의 왕비는 출충각간의 딸인 숙이며, 겸지왕이 왕자 구형을 낳았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위에 제시한 왕력에서는 구형왕을 겸지왕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어머니는 숙녀라고 한 점에 차이가 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구형왕대 가락국이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는 아래 자료를 통해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법흥왕) 재위 9년(522; 구형왕 재위 2년) 봄 3월에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였으므로, 왕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그에게 보냈다.
재위 11년(524; 구형왕 4년) 가을 9월에 왕이 남쪽 변방의 새로 넓힌 지역을 두루 돌아보았는데, 이때 가야국 왕이 찾아왔으므로 만났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법흥왕 재위 9년 및 11년조.
위의 기록에서 주목되는 점은 가야국의 왕이 신라 법흥왕에게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함에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보내준 사실 및 신라 법흥왕이 남쪽 변방 지역을 둘러 볼 때, 가야국 왕이 찾아와 만났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위의 기록에 보이는 가야국의 왕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이다.
우선 위의 기록에 보이는 비조부는 뒤에서 다시 검토할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고령현 건치연혁조에 인용되어 있는 최치원의 석순응전(釋順應傳)에 보이는 비지배(比枝輩)와 동일한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때 신라에 혼인을 요청한 가야왕은 대가야의 이뇌왕(異腦王)이다.
그렇다면 법흥왕을 찾아온 가야왕은 누구였는지도 궁금하다. 이 당시 가야왕을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당시 후기가야연맹을 주도하던 대표세력인 대가야왕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때 법흥왕과 대가야의 왕이 서로 만난 것은 신라와 후기가야연맹의 미묘한 영역의 경계를 서로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당시 가락국의 구형왕의 위상은 신라와 대가야가 서로 협력하려는 분위기 속에서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고 보여진다.
한편 아래 자료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숙왕이 훙서하니 아들인 양왕 구형을 세웠다.
위의 기록을 통해, 구형왕은 나라를 신라에 양보하였다는 의미를 갖는 양왕으로 불려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교수님. 앞에서 검토한 왕들은 모두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형왕은 언제 세상을 떠나셨나요.(허경진)”
“아. 미쳐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부분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경진이가 질문을 했으니 무언가 합리적인 해답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뒤에 검토할 아래 자료를 이곳에서 먼저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40)―㉯ 그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이후 용삭 원년 신유(661)까지 60년 사이(601∼661)에 이 수로왕묘의 의례를 지내는 것은 간혹 빠뜨리기도 하였다.
위의 기록에 의하면, 구형왕은 왕위를 잃은 뒤에 나라를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 ‘나라를 떠났다[거국(去國)]’라는 표현은, 구형왕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구형왕이 김해 지역을 떠난 시기가 언제인지 궁금하다. 왕력의 가락국에서는 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구형왕이 43년 동안(563)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반해 가락국기에서는 42년 동안(562)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두 기록에는 1년의 차이가 나고 있는데, 어떤 기록이 옳은 지는 현재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이 무렵에 구형왕이 나라를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측면과 관련해서는, 비록 후대의 자료이기는 하지만 아래의 내용이 참고된다.
신라가 강성해져서 자주 침벌하여 백성들이 사망하였다. 양왕이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기르기 위한 토지로써 사람을 해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종사(宗社)가 나로부터 끊어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라고 하면서, 왕의 동생인 구해(仇亥)에게 왕위를 양위(讓位)하였다. 그리고 태자와 비빈(妃嬪)을 거느리고 제기(祭器)와 문물(文物)을 가지고 방장산 안의 태왕궁으로 은둔하였다.
위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그대로 믿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위의 기록에서는 양왕(讓王)으로 일컬어지는 구형왕이 동생인 구해(仇亥)에게 왕위를 양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구형왕이 바로 구해(仇亥)라는 사실은 다양한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한편 구형왕이 나라를 떠나 어딘가로 은둔하였던 것은 사실로 보여진다.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의 언덕에는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 특이한 형태의 돌무덤이 있다. 이러한 구형왕릉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돌을 계단식으로 쌓아 올린 한국식 피라미드 형태의 왕릉으로 이끼나 풀이 자라지 않고 낙엽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돌무덤을 중심으로 같은 잡석으로 높이 1m 내외의 담을 쌓고 있다. 전면 중앙에는 ‘가락국 양왕릉(駕洛國 讓王陵)’이라고 새긴 석비가 있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간재(艮齋) 홍의영(洪儀泳; 1750∼1815)의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 처음으로 보인다. 양왕릉의 서쪽에 있는 왕산사(王山寺)에 전해오는 왕산사기(王山寺記)에 구형왕릉이라고 기록되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조 정조 17년(1793)에 왕산사에서 대대로 전해오던 나무상자 안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와 옷 및 활 등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덕양전(德讓殿)이라는 전각을 건립하고, 지금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러한 구형왕릉은 잔돌들을 이용해 사각 형태의 단을 이루는 피라미드 모양을 하고 있다. 앞에서 보면 일곱 단을 쌓아 올렸으며 정상은 타원형의 형태로 되어 있다. 또한 네 번째 단에는 정사각형 모양의 감실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1 「산음현 산천」조에는, “왕산(王山)은 현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산중에 돌을 포개서 만든 둔덕이 있고, 사면은 모두 층계로 되어 있는데 왕릉이라는 전설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구형왕릉과 관련해서는 조선 정조때의 호조판서 조진관(趙鎭寬; 1739∼1808)이 쓴 「산청현(山淸縣) 왕산왕릉비명병서(王山王陵碑銘幷序)」와 같은 시기 예조판서 이병정(李秉鼎; 1742∼1804)이 쓴 「산청현 왕산구형왕화상비명(王山仇衡王畵像碑銘)」이 전한다.
한편 이도학은 전(傳) 구형왕릉의 성격을 분석하기 위해, 왕릉설의 근거와 관련된 자료를 검토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왕산사기(王山寺記)」와 「현판기(懸板記)」의 발견 경위를 살펴보면서 관련 자료를 분석하고 검토하였다. 또한 지금은 도난이 되어 그 소재가 파악되고 있지 않은 구형왕 초상화의 제작 시기 및 전(傳) 구형왕릉 조영의 역사적 배경을 학문적으로 접근하고 있음은 주목할만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성과를 토대로 권덕영은 산청군의 관련 유적이 어떤 과정을 통해 구형왕릉으로 알려지게 되었는가라는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이러한 기존 연구 성과를 토대로 구형왕릉과 관련된 역사 유적 및 관련 기록에 대한 좀더 세밀한 분석은 현지 답사를 하면서 좀더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