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오래전에 주고받은 빛바랜 편지들을 공개합니다. 1960년대 병역 의무를 수행하는 동안 틈틈이 쓴 군사우편이 아내의 옷장 속에 차곡차곡 모아져 오늘 이렇게 얼굴을 내 밉니다. 아들 딸 4남매가 가 이 없는 부모님 은혜를 생각하며 극진한 효성을 다짐했던 부모님전 상서가 심금을 울립니다.
버리기 아깝고 혼자 보기 아쉬운 그 때 그 편지들을 다시 보며 격동의 한 시대를 살아온 삶의 궤적들을 돌이켜 봅니다. 행간 행간마다 진솔한 사랑과 한시대의 아픔이 아롱거립니다. 80중반의 나이가 돼서야 깨닫는 회한의 눈물이 부끄럽습니다. 생각의 옳고 그름을 떠나 엄혹했던 시대를 바라본 한 젊은이의 시국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부끄럽지만 가감 없이 내 놓는 그 때 그 편지들을 읽는 분들에게 잠시나마 생각을 깊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2019년 여름 정 운 종
제1부 사랑 실은 군사우편
0- 아내 될 사람에게 보낸 첫 편지
자연의 아름다움과 삼라만상의 조화는 자연미를 극치로 장식하였고 인간생활의 윤리적 자연법칙과 사회생활의 규범적 도덕관념은 이러한 자연적 조화에 아랑 곳 없이 항상 당위의 법칙 속에 인간미를 음미하면서 고유한 동양적 미풍양속에 기틀을 세워 깨끗한 명맥을 유지하여 왔습니다. 항상 인간생활의 무시할 수 없는 상대적 인간관계는 우리에게도 예외 없이 적응되려하고 있으며 그래서 오늘 이렇게 한 번도 전혀 만나보지 못한 여성에게 외람되이 글을 쓰게 합니다. 이미 결정된 운명의 사슬에 묶여 무례한 행위인줄을 알면서도 벅찬 가슴을 안고 글을 올리오니 관대하신 아량과 용서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성하의 삼복경열(三伏庚熱)에 귀체 평안 하시 오며 댁내 대소제절이 일향만강 하시 온지 궁금하오며 지난날 지나친 후대(厚待)를 받고 오신 양친을 대신하여 삼가 죄송함과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머지않아 우리들 생애에 닥칠 수많은 기쁨과 괴로움을 같이 나누며 즐거워하고 슬퍼할 운명의 여정 앞에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를 따라 참된 인화(人和)를 조성하고 싶은 희망과 안타깝도록 그립고 지나치도록 궁금한 마음에 애타게 상상하며 젊은 가슴 용솟음치는 정열을 담아 진정한 신념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이 모두가 앞으로의 생활에 거리낌 없는 마음을 제공하고 눈앞에 전개될 행복의 조건을 거두어 맞보며 만복의 근원을 찾고자 하는 희망의 신념을 공고히 하고자 함이니 경솔한 소행이라 질책하지 마시고 난필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내 박덕(薄德)과 비재(非才)를 힐책해 주시고 화풍경운(和風耕耘)과 서엄침중(瑞嚴沈重)하신 그 성덕으로 우리생애를 책임지실 분을 모시게 되는 기쁨 자못 큼니다. 아울러 저는 이 순간 무거운 짐을 나누어 고락을 같이 할 반 여자를 얻는 흐믓 한 가슴으로 희망이 벅차오름을 느낍니다. 의사가 어떠한지 듣지도 않고 경솔히 생각함을 사과드립니다. 주위 환경이야 어떠하든 남이 무슨 소릴 하던 우리가 할일을 말없이 실천해 가는 확고부동한 주관을 살려 인생행로를 멋지게 설계해 보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방학이 되면 필히 상면하여 그동안 남모르게 간직한 쌓이고 쌓인 회포를 풀어 가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 하여 낯을 붉혀보고자 하였으나 이러한 순진한 미련은 현실에 당한 의무감 때문에 몇 달 남지 않은 싶판의 날을 재촉하며 때 묻어 검푸른 책자를 안고 심산사찰(深山寺刹)로 발을 옮기고자 하니 한편으로 착잡한 심회를 진정하기 어렵습니다.
10월 4일부터 실시될 고시가 종료되면 상면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주어진 환경을 무시하고 가도(家道)에 어긋난다면 자칫 인륜을 망각할까 두려워 심사숙고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정정탁월(亭亭卓越)하심과 도량이 관대하심은 물론이고 여공재봉(女工裁縫)이 민첩신이(敏捷神異)하시며 성덕이 유화천영(宥和天然)하시며 덕행예절(德行禮節)과 효행(孝行)이 특출하시다는 말씀은 이미 들어 사모하오며 이같은 사실이 모두 진실일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원만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분이라 확신하며 우리들에게 지워진 책임인 명랑한 가정, 애정이 깃든 가정, 이해성 있는 생활로 엮어진 행복한 가정을 만들 의무는 어느 한쪽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각자가 쌓은 인애(仁愛)와 조화(調和)에 맡끼기로 하고 결합하는 그날 까지 함께 노력해 보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노력의 댓가가 참되게 나타나 영광이 얻어지는 날 즐겨 반겨줄 수먾은 인간 중에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큰 사랑의 성좌(星座)에 앉아 주실 것을 굳게 믿으면서 우리들에게 지워진 운명의 현실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것을 약속드리며 두서없이 이만 무례(無禮)한 붓을 놓습니다.
단기 4293년 7월 서울에서 정운종 올림
0-몰래 쓴 아내의 답장편지
초면에 실례가 많습니다.
귀하신 몸으로 추한 길을 불구하고 찾아주신 것은 감사하오나 오늘날에 만족을 드리지 못 하와 죄송 불민함을 무어라 말씀 드릴른지 송구스럽기 그지없사오며 제대로 살펴드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애처러이 필을 들게 된 것입니다.
수일 전에 전하신 서한을 회답지 못하여 죄송함과 불찰이 많은 줄 알면서도 전하지 못 하였슴을 천지와 같이 양해해 주시기 바라오며 아무쪼록 오늘의 부족함을 무릎 밑에 접어 두실 줄 믿고 앞날에 미래를 꿈꾸며 행복을 누리기를 축원하면서 이만 무례히 필을 놓습니다.
불손한 필을 용서 합소서.
0- 역시 편지로 답장을 보내다
무조건 죄송할 뿐입니다.
다만 지엄하신 가훈에 순종할 뿐이겠지요.
우리들의 꿈이 실현되는 날 다시 만날 날을 약속해 봅니다.
결정적인 운명 앞에 실례되는 줄 알면서 배방하온 소생의 경솔한 행동에 아량과 관용이 있으시기 바라며 새로운 생활의 넓고 높은 계획을 가져보며 후일을 기약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리라 믿습니다.
많은 불만과 미흡한 점을 용서하여 주시기 빌면서 옆에 두고 그리는 안타까운 심회 피차 상통하리라 믿습니다.
이심전심 그것이 중요합니다. 만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 또 듣고 싶은 말씀 모두가 마음과 마음의 조화 상통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허구많은 남성 중에 유독히 저와 같은 부족한 사람이 남편의 역할을 다 할수 있으려면 유덕하신 양의 편달이 극중하리라 믿어 크게 기대를 가져봅니다.
오늘 우리가 편지로나마 나눈 이 만족한 회포를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을 전해드립니다. 저의 무례한 행동은 훗날 다시 사과드리기로 하고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댁내 평안하심을 거듭 기원하오며 총총히 돌아갑니다.
종종 편지 기다리겠습니다.
운 종
0- 대학 졸업식에 왔다 간 아내에게
당신에게
바람과 같이 나타났다 가버린 당신을 그리며 오늘도 내 굳은 신념을 실천하고 있소. 물론 귀성제절이 별고 없으며 봉양지성이 놀라우리라 믿어 감사한 마음뿐 홀로 도리를 다하느라 고생하는 당신에게 미안할 따름이오. 하지만 현실이 여의치 못하니 내일을 기약할 수밖에---
여기 사랑스런 얼굴들이 실려 있는 사진이 있소. 하나하나 볼적 마다 다정히 거닐던 서울거리가 다시금 새롭고 쏜살같은 시간의 흐름에 아쉬움을 느끼게 하는구려.
좀더 만족스러운 시간을 가지게 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 금할수 없소. 그러나 언제까지나 시들어 가는 그늘 밑에 잡초로만 있으라는 이유는 없는 것이지요.
언제고 밝은 태양아래서 무성한 꽃잎을 자랑하며 활개를 치고 살아 갈 우리들을 반길 장밋빛 미래는 오고야 말 것이라 믿고 기다리는 것이지요. 당신을 보내고 난 지금까지 비록 값없는 시간을 보내고는 있지만 대학원 입학금 마련으로 동분서주, 가끔 책과 벗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소.
집안의 혼정성신하는 자식의 도리를 당신에게 부탁하고 난 지금 어깨가 가벼운 것 같지만 나에게 지워진 무거운 책임 그것은 꼭 성공하여 부모님과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임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소. 오늘도 여기 서울거리는 아우성치는 생존경쟁의 도가니 속에서 헐뜯고 발버둥치는 가련한 군상들이 싸우고 있소. 자기가 살기위해서는 남의 생활은 헌신짝처럼 취급하는 허구 많은 무리들을 뛰어넘어 성공하는 것만이 나에게 지워진 책임인 것을 왜 모르겠어요.
머지 않아 부름을 받아 입대할 때까지 시간을 아껴 실력을 배양하고 기회있을 때마다 노력하는 것만이 상책임을 이해할줄 믿으오.
사랑하는 아내 춘향을 그리며 이를 악물고 공부하여 성공한 이도령의 애틋한 정서에 도취되고 오직 이몽룡을 위한 춘향의 일편담심 가련한 모습이 생생한 그날 밤 명보극장 성춘향 관람은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일깨워 주었소. 한갓 영화에 나타난 묘사지만 성춘향 영화가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사랑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의지력이 그런 성공을 이끌어 주었다는 교훈으로 지금의 내처지가 바로 당신을 위한 이도령의 심정임을 솔직히 고백하고 싶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즐거이 학교 전경을 구경하고 어린동생과 창경원을 돌며 경복궁 궁전 파고다공원 덕수궁 곳곳마다 감격에 찬 환희를 맛본 우리들 모습이 여기 그대로 영사되어 있구려. 그렇게도 복잡한 거리를 우리들 세상인양 나란히 활개 치며 걷는 모습이며 엷은 미소로서 인생의 환락을 표현해 보든 그 모습 그 정경! 모두가 대자연의 섭리이자 인간의 예술적 창조가 아니겠소. 누구나 서울을 동경하고 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을 나는 불쾌하게 느끼지만 때로는 이처럼 물 끓듯 소용돌이치는 서울을 요리해 보고 싶은 충동이 불길처럼 솟아나기도 한답니다.
마침 서울에서 찍은 사진을 보냅니다마는 덕수궁에서 찍은 몇 장의 사진은 현상부주의로 빼질 못하고 나머지를 보내니 간수하기 바라오. 음 2월 초순께 다녀 올 예정이며 종종 소식 전하겠소. 충주에는 며칠 전 종훈에게만 몇자 소식 알렸고 봄 방학이 되면 집에 놀러 오라고 하였으니 오게 되면 나 없더라도 잘 대해 주기 부탁하오. 부디 건강하기 바라며
3월 21일 운 종 올림
0-이원석 교수 님 댁으로 이사와서
예정대로 16일 선생님 댁으로 이사를 하였소.
짐이라야 책 몇권과 이불뿐이니 친구들의 협조로 쉽게 운반했고 아담한 방에 혼자 누워있으려니 집 생각도 생각이려니와 특별한 이해관계도 없이 도움을 받는 자신이 두려울 정도로 고마움을 느끼었구려. 선생님 옆에 있으니 공부는 하지 않을 수 없게끔 되겠고 더구나 새로 말쑥이 차린 방에서 책을 보는 기분은 형언할 수 없이 명쾌하지만 자꾸 이상한 느낌이 드는군. 이렇게 인간적으로 사귈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고---이 때 끼지 4개 성상을 한 결 같이 지도와 편달을 아끼지 않고 친동생처럼 극진히 사랑해주는 선생님을 위시한 할머니 그리고 사모님의 친절에 뜨거운 감사의 눈물이 옷깃을 적실 때가 있소. 열심히 노력하여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만이 이 은혜를 보답하는 길이 아니겠는지? 물질적으로 갚기엔 불가능 하고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오. 취직은 아직 미정이오. 머지않아 군에 억매일 몸 굳이 애써볼 기력도 없고 학교 일은 금명간 맡게 될 것 같으니 그리 알고 마음은 집에 가 있는 나의 생활은 하루도 몇 번씩 삶의 보람과 희망에 찬 가슴이 부풀어 있는 느낌이오. 그것은 오직 이 세상에 오직 하나 사랑을 간직한 당신이 있기 때문이요. 나를 극진히 생각해주는 은사가 있기 때문이요, 무엇하나 이상이 없는 현실에 충실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지금 형편 봐서는 열사흘 전에 집에 갈 것 같지 않고 오늘부터 아이들 공부도 시작되었으니 더욱 어려울 것 같소. 아버님 담은 좀 어떠신지 뜻대로만 되면 양력 5월 초순께 다녀 올 작정이오. 시간 관계로 이만 줄이니 몸 건강히 잘 있기 바라오.
4월 18일 서울에서
0- 서울서 5·16 군사혁명을 맞이하며
당신에게
오늘도 이렇게 당신을 그리며 뒤숭숭한 시국에 몇 자 안부를 전하오.
그립고 아쉬운 오늘 따라 알 수 없는 세상은 뒤바뀌고 사랑하는 당신 곁에 있고만 싶은 심정이 더해가는 군요. 얼마나 집에서 궁금 들 하실까 하고 생각하면 객지 생활이 원망스럽고 죽이 되나 밥이 되나 온 식구가 한데 있고 싶어지는 생각이 굴뚝같아요.
정치란 때로 무서운 고통도 있고 때로는 동요도 있는 법이라 정국을 원망할 입장은 아니지만 시달리는 국민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오. 서울에 도착하는 즉시 편지 하려 했으나 마침 학교 공부가 밀려서 시간이 없었소.
부부란 참 이상한 존재인가 보오. 언제부터 하느님이 그렇게 마련하였는지 무척 감사드리고 싶은 것이 요즘의 내 심경이라오. 우리 가정의 모든 행복의 열쇠를 나누어 가졌다고 생각하니 나의 짐이 한결 가볍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루 밤 사이에 무너지고 만 장 정권과 무장군대로 시가를 뒤덮은 군사혁명이라는 시국사태는 우리들 사랑, 우리들 가정과 아무 관계없는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소. 내가 나 할일을 충실히 하는데 누가 뭐라 하며 올바른 정신을 좀먹을 자 누구겠소. 아무 걱정 말기 바라오. 형편 봐서 공부가 안될 것 같으면 내려가리다. 충주엔 오늘 같이 편지 드렸으니 그리 아오.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어렵고 고통스런 이 현실을 참고 견디어 봅시다. 좀더 용기를 얻고 힘을 내서 우리 주변에 불편을 없애 봅시다. 그것만이 나의 현실을 알고 내 머리를 정돈시키는 것이라 생각하오.
어렵고 답답한 가슴이 올때 그래도 당신을 생각하면 용기가 나고 힘을 얻게 되지요. 그래서 귀엽게 들려주는 사랑의 달콤한 속삭임이 귓전을 때릴때 허전한 이불자락이 살 전을 스쳐 갈 때면 언제나 당신의 아름다운 마음씨에 나 전부를 맡겨보고 싶은 충정에 밤잠을 설치곤 합니다. 어느 누가 신혼의 단꿈을 이루려 하지 않는 자 있으리오마는 이미 당신과 나는 내일의 더 좋은 삶을 위해 현재의 고통과 불편을 참고 견디기로 맹서한 몸이라 일시적 감성에 끌려 현실을 도피할 순 없는 노릇이 아닐까요. 우리의 내일이 비록 뜻과 같지 않다 할지라도 우리들 마음 속 깊이 간직한 사랑과 믿음은 절대로 변하거나 식어 지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유일한 희망 유일한 행복 오로지 우리 가족만의 세계를 이룩 하가위해 노력하는 것 이것이 삶의 보람을 찾는 길이라 생각하오.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잠자리에 누워 그날을 희망하노라면 의례히 같은 시간에 나를 생각하며 홀로 누운 당신 생각에 나도 몰래 한숨짓기 일쑤오. 요즘엔 이상 할이 만큼 당신이 꿈에 보여 미칠 것만 같소. 머지않아 단락한 날이 오기를 고대하며 힘차게 살아갈 결심을 다짐하고 있소. 사소한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큰 뜻을 펴는 그날까지 참고 명랑한 하루를 보내 주기 바라오.
되도록 책과 가까워졌으면 하오. 틈 있는 대로 공부하는 것도 잊지 마오. 공부란 다른게 아니고 무엇이고 보아서 알아두는 상식이니 하나하나 알아나가면 그것이 곧 공부인 것입니다. 괴로운 시간에 책이라도 읽으면 잊어지지 않을까요. 몹시 그립고 생각 날 때면 펜을 들고 새로운 희망을 꿈꾸며 미래를 설계 해 보는 것도 시간을 유익하게 보내는 지혜라 생각되오. 시간관계로 이만 줄이니 건강에 유의하고 신상무고하기 바라오.
4294년 5월 16일 당신의 허스밴드로부터 .
0-흉년을 걱정하며
심한 장마와 흉흉한 시국에 모시고 몸이나 별고 없는지 그간 소식 없어 궁금하구려. 일전 아버님 편지애 대략 안부는 전해 들었소 마는 지루한 장마로 재해 막심 하다니 걱정이오. 올 같은 흉년에 설상가상 격으로 보리농사 마져 폐농을 하고 어찌 식량을 대는지 부모님 병환 나실까 걱정이오. 어머님 근력 여전하시며 동생들 탈 없이 공부 잘 하고 순이도 근실한지 궁금한 마음 어이 끊일 날 있겠소. 외가댁 형편도 말이 아닐 텐데 더구나 큰일을 겸사하였으니 그 뒤 연명 호구책에 당신 속 무척 썩는 모습 눈에 선하여 잠이 오질 않는구려. 부디 몸이나 건강하기 비오. 그동안 바쁜 철기에 가서 조력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왠 일인지 겹치고 겹친 업무관계와 과중한 책임 때문에 뜻대로 잘 안되는구려. 다만 몸 편히 있는 것만 다행으로 알기 바라오. 그리고 수 일전 충주 종철 처남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서울에서 부쳤는데 아마 내문제로 상경한듯하며 되도록 부탁하여 가부결정을 해준다고 하였으니 그리 알기 바라며 실상 뜻대로 될 것 같지 않아 믿고 싶지 않으나 여러 가지로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소. 충주에서도 소식이 왔는데 종훈이 군에 보내놓으시고 근심 걱정태산이고, 크게 수해는 없으신 모양이나 마음 편할 날이 없는듯하오. 세월도 세월이지만 이런 때일수록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것이니 굳은 신념과 용기로서 고난을 극복하길 부탁 합니다. 아무쪼록 시봉제절 무양하기 축원하오.
당신의 당신 운종
0- 논산 훈련소에서 아내에게
당신에게
집 떠 난지 월여가 경과 되었구려. 그간 아버님께서 보내주신 하서를 봉독하여 집안 대소가가 두루 안녕들 하시고 당신 신상에도 이상이 없는 줄 아오마는 인편이 있어 몇 자 전하오.
웬일인지 요즘 날씨가 몹시 차군요. 제법 흰눈이 펄펄 날리고 오늘 따라 진눈 개비가 옷을 적시는데 아버님 생신을 맞아 어찌 시봉제반이 무양한지 궁금하오. 어린것도 충실 한지 역시 산후에 몸조리는 잘 하였는지 궁금하고 미안 할뿐이오.
한창 바쁜 일철을 당해 신역이 무척 고되리라 생각 되오 마는 모두가 우리들의 운명이니 참고 견디라는 말 밖에 다른 할 말이 없군요.
충주서도 다들 별고 없으시다는 소식이 종 종 있으니 염려 말기 바라오. 논산 훈련기간도 불과 십여 일 밖에 안 남았구려. 가끔 서울서도 편지는 오나 어찌 믿을 수 있겠소. 그저 운수에 맞길 수밖에 --
훈련은 비교적 고된 것이 없고 젊은이 치고 한번씩 당해 봄직한 일이지요. 다만 여가가 있다면 나느니 집 생각, 당신의 포근한 사랑이 속을 태울 뿐이지. 진정 그립고 아쉬운 심정을 어찌 이 글에 다 표현 하리까.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랑하는 애인을 그리며 두고 온 아내의 따뜻한 사랑을 찾아 꿈길을 헤 메는 이곳 논산으로 따사로운 태양이여 비치옵소서” 이렇게 울부짖는 멋진 친구가 밤잠을 설치게 하는구려.
꿈만이 아니라 조금의 틈이라도 나면 마음은 당신을 그리고 아늑한 고향 하늘과 벗하는 심정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소. 모두가 그리움에 차 있습니다. 바쁘고 신역이 고되더라도 참고 견디는 것 뿐 비록 이 몸은 군에 있지만 나 이상으로 시봉제절을 두루 갖춰 양당 봉양지심을 부탁드립니다.
아무쪼록 몸 건강하기를 빌면서
당신의 남편 운종
0-군에서 영화 두 편을 보고
부대에 온 후 세 번째 전하는 편지인가 보오. 어렵고 괴로운 가운데서도 오직 참고 말없이 실천하고 있소.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갖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을 스스로 절제하며 불만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이 안 될 리 있겠어요. 분주한 당신 귀여운 순, 그리고 어린 동생들 모습이 달빛에 어는 듯 대낮 같이 밝은 달을 보며 홀로 소식을 묻고 있소.
많은 농사일로 피곤한 집안 식구들의 맥 풀린 모습이 아롱거려 이 밤이 서럽도록 가슴을 애이게 하는 구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여기 지난 열흘 동안 학교에서 구경한 영화 몇 편을 소개할까하오. 보기 싫은 것은 고사하고 본 것도 보라면 또 보아야 하는 게 군대니까 -- 먼저 ‘돈 바람 님 바람’ 이란 영화이야기: 거짓과 공갈로 체면도 없이 남을 괴롭히고 착한 부인 마져 속이면서 오입, 방탕, 주정으로 세월을 보내든 첨지(김승호 역)에게 돈 5천량으로 생일잔치 박물을 평양서 사오라는 명이 내렸겠다 얼시 구나 좋다고 평양에 들어선 첨지는 하라는 박물은 살 생각도 않고 요염한 평양기생에게 몽땅 돈을 바치고 거지가 되어 기생집 문전에서 하인 노릇으로 걸식하는 신세가 되어버렸어요. 이 소식을 들은 부인 마음이 천사인지라 아무런 내색도 없이 남복 차림으로 평양에 당도하여 관가에 남편을 불러들여 크게 혼내주고 남편의 품안에 흐느껴 우는 모습이 장관이었소. 역시 아내의 따뜻한 사랑과 이해성 많은 지혜 덕분으로 지난 잘못을 회개하고 달콤한 살림을 꾸민다는 구수한 이야기야. 무슨 짓을 하건 말없이 순종하며 남편을 고이 받드는 부인이 지금 세월에도 있을까 하고 거짓말 같은 영화를 보며 미소를 지어보았소.
다른 영화 한편은 ‘로맨스 빠 빠’라고 전에 본 영화지만 군에서 보는 느낌이 달랐어요.
식구마다 다른 성격 때문에 제멋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가정에 오직 너그럽고 이해성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녀들을 인도하는 코메디 같은 가정이야기가 펼쳐지는 영화. 가정이란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 없이는 평화로울 수 없다는 교훈을 느끼게 했소. 처음에는 오직 자기 것만 알던 5남매 자식들도 뒤늦게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시 세워 부모님을 공경하려는 갸륵한 효심에다. 맏딸 첫날 밤 이야기 등 언제 보아도 신선한 충격을 느끼게 하는 영화라오. 늙어서 직장을 쫓겨 나온 뒤에도 장성한 자식들이 벌어드리는 돈으로 더 화목한 가정을 갖게 된다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관객들을 사로잡는 영화지요.
여기서 나는 이런 것을 느꼈어요. 남편은 남편대로 권위와 위엄이있어야하고 부인은 부인대로 남편과 자식에 대한 화목과 자애가 있어야 한다고. 진정한 가정의 화목과 평화는 서로 믿고 이해하는 가운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오. 한때 곤란하다고 또 고생이 된다고 해서 영영 발전이 없으란 법은 없지 않겠소. 밤이 오래되었구려. 이만 난필을 줄이니 다음 열흘 동안 몸 건강히 시봉 평안하기 바라오.
그럼 안녕. 조 서방 올 때 안부 전하도록 부탁드려요.
10월 30일 운 종 서
0- 아내의 진솔한 사랑 고백
그동안 안녕 하세요
추운 날씨에 객지로 떠난 당신 소식이 궁금하던 차에 편지를 받고 또 시 동생 한 테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마음조차 편치 않으면서 제자들 대리고 큰 음성을 내면서 공부 가르치는 모습이 눈에 선하고 음성이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의택이 감기 기침은 오늘까지 계속되어 걱정이 되나 당신이 보내준 약을 들면 낫겠지요. 여기는 눈이 많이 왔어요 . 눈이 그치자 날씨가 매우 쌀쌀해 졌구먼요. 내복 있는 것이나마 더 쪄 입으셔요. 잠자리가 춥거든 이불을 올려다 덥도록 하세요.
그리고 백필 먼지에 몸조심 하시고 너무 상심 마셔요. 마음만 변함이 없으면 배추장사도 해먹고 산다니까 되는대로 순하게 살아가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네요.
나는 맹세했어요.. 당신 없어서 답답한 가슴을 갖지 않으려고 맹세했어요. 자신도 모르게 속 썩여 드려서 미안해요. 아버님은 1월 5일 날 평창 가셔서 안 오셨어요. 궁금하네요. 오래계실 아버님이 아니신데요. 내 의장 농속에 있던 졸업증 호적등본 신원증명서 등을 부쳤아오니 그리 아시고 받았다는 소식 전해 주세요.
할 말은 많으나 이 만 두서없이 필을 놓으니 용서 하세요. 내내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공부하는 제자들 입학시험에 합격하기를 축원 합니다.
1965년 1월 11일 의택 모 서
0-결혼반지를 팔겠다는 아내에게
오랫동안 소식 없어 궁금하던 차에 당신 본 듯 반가운 소식 들으니 무척 기쁘오. 더구나 고향 양친 기력 만강하시고 동생들 충실히 공부 잘 하고 당신도 시봉제절이 무고하다니 객황 군문에서 이 이상 무엇을 더 바라겠소. 여러모로 걱정 고생 많이 하는 당신에게 미안 할 따름이오. 조석 찬바람 매운 서리가 겨울이 옴을 재촉하는데 늦가을 궂은비는 왜 이토록 줄기차게 내리는지 땅에 떨어져 뒹구는 외로운 낙엽은 소슬한 가을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이리 저리 휘날리니 오늘 하루도 당신을 그리는 내 마음 고향을 달리고 있소. 진정 내 이토록 그리울 양이면 아예 생각을 말 것을 하면서도 깊어만 가는 안타까운 이 밤이 야속하게만 느껴지는 구려. 못 잊어 애태우는 이 내 심정 어서 빨리 세월이어 가라고 외치고 싶소.
날 일기 고르지 못하고 농사 또한 흉작이라는데 방아다리 논은 벌서 수확을 했다니 그래도 세월은 물같이 흘러가는 모양이구려. 당신의 그 갸륵한 심정 모르는바 아니지만 내 어찌 당신에게 바친 조그만 사랑의 징표를 팔라 할 수 있겠소. 그런 생각 추호도 하지 말고 어른 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 도리일 듯하오. 당신이 그렇게 지나치도록 근심 하게 되면 오히려 우리가 큰 불효를 저지르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두렵소. 마음속으로 죄송함을 느끼며 근심을 덜어 들인다고 지나치게 과도한 일을 하게 되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 올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서 경솔하게 처신 하지 않도록 부탁하오. 실제로 몇 푼 안 되는 돈을 보태드린다고 무슨 큰 힘이 되는 것도 아닌데 부모님도 물론 허락 하지 않으실 줄 믿지만 조그만 반지지만 우리가 백년을 기약하면서 주고받은 선물을 그만한 정도의 곤란에서 소홀히 다루어서야 되겠소.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던 나는 반대요. 그 반지가 어떤 반지인데-- 우리가 백년을 기약한 큰 힘이 실려 있고 서로 사랑할 의무와 책임이 담긴 소중한 보배가 아니오.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 영원히 간직해야할 의무가 당신에게 있다고 나는 생각하오.
부모님이 빚에 졸려 고민하신다고 몇 푼 안 되는 것 팔아서 빚에 보탠다고 합시다.. 그래서 빚을 완전히 청산한다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않은 상황에 소중한 사랑의 징표를 팔아 버리면 그것이 지닌 고귀한 뜻을 어디서 다시 회복할 수 있겠소. 나중에 다시 장만 하면 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물건이 어찌 같을 수 있으며 한번 팔아버린 그와 똑같은 물건을 다시 찾는 다는 것도 불가능하니 더욱 안 되는 일이지요. 아무쪼록 지나친 걱정은 말고 다른 방법으로 부모님 마음 위로해 드릴 궁리를 해 보는 게 좋을 듯 하오.
건너 마을 조서방도 영장이 나왔다는데 칠십 층 층 시하에 처제가 걱정이구려. 겨울이 닥치니 당신 말대로 운완의 학교문제가 큰 걱정이구려. 복안이 있으시겠지만 그 다리를 이끌고 30 리 통학길이란 불가능하니 다른 방도가 있다면 뉘 집에 기숙을 시키는 것이 상책일 텐데 걱정이오.
이곳은 요즘 날마다 겨울준비에 여념이 없소. 날마다 탄 나르기, 난로 불쏘시게 장만하기, 제시간에 사무보기, 밤이면 보초서기, 한 몸으로 몇 가지 일을 해야 하니 눈코 뜰 새 없이 시간은 잘도 가오. 그러나 최전방에서는 영하 13도의 혹한 속에서 언제 적으로부터 기습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험한 산길을 오르내려야 하는 병사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정말 호강 하고 있는 느낌이오. 아무쪼록 내 걱정은 말고 고민이 있어도 참고 견디기 바라오. 궁금하지 않을 정도로 또 편지 하리다.
반지를 팔겠다는 말은 없었던 일로 하고 이만 붓을 놓는 바이오.
11. 7 광주에서 순이 아빠가 .
0-아버님 생신을 앞두고
그간 무고 하며 어린 것 충실하고 동생들 학교에 별 탈 없이 잘 다니는지 서로 상면한지 순여에 벌써 몇 달이 지난 기분이오. 친가엔 친후 양당만안하시며 경사에 대소 제 댁이 마음껏 흡족 하였을 텐데 군문에 메인 몸이라서 뜻과 같지 못하니 여러 가지로 면목도 없고 일전 외구하서에 대략 안후는 들었오마는 공연히 애들만 쓰시는 것 같아 송구하기 짝이 없소.
올 때도 소회를 전 하였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윤리적 숙명이기에 우리는 우리할 도리를 해야겠고 스스로 고난을 참고 운명을 개척해 가지 않으면 안 되리라 생각하오. 정말로 아쉽고 그리운 생각 때문에 불안한 현실을 조급하게 여기고 복받치는 가슴을 진정하는 쓰디쓴 인내는 우리를 위해 있는 것이요 내일의 운명이 결정지어 줄 문제라 믿으오.
조급한 세상을 산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소망이 이루어 질수도 없는 것이기에 구테어 답답해하며 속 태울 필요도 없지 않겠소.
아버님 생신을 며칠 앞두고 조용히 우리가 할일 우리의 의무를 반성하며 해마다 이날이 올 때마다 우리가 생겨남을 인식하게 되고 하늘과 같은 은혜에 머리가 숙여짐은 어쩔 수 없는 천명이 아니리요. 기왕 잘못 된 일은 가버린 일로 치고 비록 누가 무슨 소리를 하던 우리는 우리 숙명적 운명에 복종하는 방법뿐이 없다고 굳게 다짐해야 되리라 생각하오. 세상은 봄 볓처럼 항상 따사로울 수만은 없는 것이니까. 굴곡이 있는 세상을 조심해서 살아갑시다.
이상한 인연으로 조 서방을 이곳에서 상명하게 되었소. 역시 세상은 넓고도 좁은듯하오 며칠 후면 한 20리 떨어지겠지만 아직까진 가까이 있어 자주 만나 졸병생활 불문가지 또 소식 전 하리다. 부디 모시고 건승하기 부탁 하요.
광주에서
0-육촌동서가 부대를 방문하다.
보내준 편지 반가이 잘 받아 보았소. 외숙모님 병환 위중하시다니 금심 되고 절기 따라 농사에 구김 없다니 다행이오. 벌서 집에 소식 전한지가 보름이 넘는 것 갔구려. 변화가 많은 세상이라 뒤숭숭하여 집 생각 할 겨를도 없는가 보오. 구중중한 날씨 갑자기 웅크린 일기가 밉도록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오늘이군요.
어제는 남성이 외출을 나와 나를 방문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소. 같이 내무반에서 구린내 나는 침구를 덮고 자고 나서 오랜만에 광주 시내로 기분을 내보았지만 둘이서 걷는 옆에 당신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니 더욱 허전하게만 느껴진 하루였소. 광주 사직공원으로 옮겨 대화를 나누며 인생설계도 해 보았지만 당장 제대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신세라 실감이 안날 수 밖에--
더욱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던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집안 살림 하느라 마음고생이 심할 당신이 눈에 아른 거려 나 혼자만의 시간이 무료하게만 느껴졌지요. 어린 것 충실한지 제법 걸음마를 할 때도 되지 않았나 궁금하오. 운완은 충실히 학교엘 다니는지 남과 같지 않은 성질 머리에 신경질이나 안 부리는지 당신을 속상하게 하는 일은 없는지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오. 너그러운 당신의 아량으로 모든 난관을 해결해 가리라 믿으오. 사람이 불만을 갖기 시작하면 한이 없는 것 같소. 듣자니 이곳보다 군대생활이 수월한 곳도 드문 모양인데 더 편한 곳을 찾으니 사람의 욕심이란 한이 없는 것 같소. 더 이상 염려 말기 바라오. 어쩌면 백부님 소기엔 상면하게 될듯하나 매인 몸이니 그때 가봐야 알겠지. 급하신 성품에 살림걱정 농사 걱정으로 이것저것 재촉하시는 어머님 모습 눈에 선하며 되도록 많이 참고 순종해 주리라 믿소. 몸 건강히 안녕
4. 22 당신의 영원으로부터
0-섣달 세모에 부대에서 아내를 그리며
사랑하는 아내에게
구테어 사랑한다고 표현하기 전에 얼마나 내 자신이 당신에게 사랑을 줄 자격이 있는지, 웬일인지 궁금한 마음에다 허전한 마음 온통 당신생각뿐이오. 정초를 지나고 또 순이 돌도 지나고 지칠 때로 지친 당신 모습 보지 않아도 알만 하오. 역시 고통을 참고 세대를 달리한 젊은이로서 느껴야 하는 마음도 아량으로 해석하면서 내일을 위해 용기를 가져야 할 오늘이라 생각하고 있소. 부부란 이런가보오. 사랑이란 이처럼 강한 모양이야.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면 시들하고 --
무슨 유행가 가사처럼 부부란 이런 건가. 미칠 듯이 그리워하는 정 나도 모르겠소. 떳떳한 아들이요 남편이요 아버지가 되기 위해 남보다 충실한 어느 누구 보다도 아내를 사랑하고 아껴줄 줄 아는 남편이 되기 위해 그리고 누구에 못지않게 부모님을 모시고 孝를 다하는 아들과 며느리가 되어야할 의무와 책임을 새해 아침에 굳게 다짐하였지.
그리고 어제 맑은 달을 보면서 그 속에 내 자신을 반성하고 무의미한 하루가 보람 되기 위해 굳게 마음먹었소.
우리가 이처럼 괴롭고 아쉬운 정을 참아야 하는 게 다 내일의 보람 있고 복된 삶을 위해서라 생각 하오 그렇지 않겠소? 그처럼 시간이 흐르는 것을 미워하고 안타까이 여기는 지난날과는 달리 그저 해가 바뀌기만 고대하는 심정이 되어버렸구려. 하루속히 자유의 몸이 되도록 고대함이겠지. 비록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의 놀라움이 있고 참기 어려운 모욕이 있다손 치더라도 나를 위해서 기꺼이 듣고 나를 대신해 아들의 도리로서 웃음을 주오. 다 세대가 다른 까닭에 갖는 고민이 아니겠소. 또 눈이 나리네뇨.. 80년 이래 처음 맞는 눈사태라니 무시 못 할 일기 몸조심하기 바라오..
입춘도 지나고 겨울도 이제 발악해 보았자 오는 봄을 어이 막겠소. 환절기엔 알아서 건강에 유의하기 바라며 또 놓기 시른 붓을 놓아야 하는가 보오. 붓을 들고 보면 만리장서 복받치는 정회를 털어 놓고 또 한없이 무엇인가 당신을 그려보고 싶지만 막상 이렇게 별로 할 얘기가 없구려. 입버릇처럼 외우는 시봉평안하기를 비는 마음도 가내 고루 평안하시고 충실한 삶을 비는 마음도 다 잔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기를 바라오. 지금 나는 당신을 만난지가 몇 년이 지난 것 같은 기분이오. 참 사진은 잘 받았는지 답장을 고대하며 부디 건강하길 비오.
12.10 광주에서 당신의 영원한 사랑으로부터
0-어느 비 오는 날 밤에
淳에 게
붓을 든 지도 오래 되었구려. 그간 시봉에 별고 없는지. 그칠 줄 모르는 비가 전국 각처에 서 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평화로운 가정을 파괴시키고 있는 모양이오. 이번 장마에 집안 두루 평안하시고 전답 간 피해나 없는지 궁금하오. 보리농사도 대흉이라는데 식량곤란도 불문가지라 심란하오.,더구나 보리가 익지도 않은 때에 비가 억수같이 내려 썩은 햇 보리밥을 잘못 먹고 병든 사람이 많다고 매일 신문에 대서특필 인데 조심해서 요량하기 바라오.
어린 것 트집이나 안 느는지 동생들 충실하고 운완이 탈 없이 통학 잘하는지 장마에 궁금한 마음은 고향 집을 맴돌고 있소. 나는 당신이 주야로 염려해 주는 덕분으로 몸 건강히 군무에 종사하니 안심하기 바라며 조 서방 편에 내 안부 대충 들었으리라 아 오마는 휴가 갈 땐 상면도 못해서 자세한 소식 못 전 했구려. 바쁜 때 마침 잘 되였는데 요즘 각종 검열도 있고 하필 여러 가지로 일 꺼리가 많이 생겨 좀처럼 귀성하기 어렵게 되었소. 너무 고대하지 말기 바라며 부디 내 걱정 말고 어른 하시는 대로 순응하도록 하고 너무 애쓰는 일 없도록 부탁하오. 비가 그치면 몹시 무더울 것 같소. 더위에 조심하고 모기에 물리지 말고 건강에 항시 유의하기 바라오.
6.21 순이 아빠로부터
0-집 안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다
그렇게도 그리움을 참아야 하는 것이 군대며 헤어지기 싫어 아쉬워하는 심정을 참아야 하는 것도 군인인가 봐요. 사람이 바람과 같이 만났다 이렇게 천 여리 밖에서 당신을 그리는 情을 참아가야 하는 군인. 이러한 남편 앞에 나대신 자식의 도리를 해야 하는 당신의 심정 너무도 잘 아오.
졸병의 설음을 참고 견디며 미칠 듯 그리운 심정을 눌러가며 밤늦게까지 책상머리에 앉아 군대 행정을 봐야하는 지금 이 순간 이게 정말 군대인가 하는 생각이 드오. 어떻게 3년을 날지 한심스럽기 그지없소. 모두들 졸병 땐 다 고생이라니 나도 그 축에서 못 빠지는가 보오. 식사당번 불침번 게다가 보초 까지 겸해야 하는 바쁜 세상 이 데로 한세상 사노라면 제대 하겠지 하는 위로로 오늘도 집 생각에 속만 타오. .운희 팔은 좀 어떤지 뒤에 이상은 없겠는지 근심이요. 편지 받는 즉시 소식 알려요. 너무 근심 말고 가뜩이나 속상하시는 부모님 마음 힘 있는 데까지 위로해 드리기 부탁 하오.
우리는 어디까지나 참고 살아야 하는 몸 우리가 우리 할일을 해 가자면 언젠가 희망이 있고 빛이 있지 않겠소. 날로 더워가는 일기에 건강에 조심하고...모내기는 어찌 되었는지?
다음 기회 시간 있는 데로 소식 알리리다.
잘 있기 바라고 특히 공주님 건강에 조심 하도록..
부디 몸 건강하기를 기원하며 이만 총총 줄이오
6.23 순이 아빠가
(편지할 때 아래주소로 할 것)
군우 158-상무대
육군 기갑학교 인사행정과
일병 정 운 종 앞
0-광주 금남로 거리를 거닐고 나서
내 영원한 사랑 淳 母에게
떠나 온지 불과 일 개월 도 안 되는데 심정은 십년을 지난 것 같군요.
제법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니 겨울은 목전에 당도한 듯 엄동설한을 객지 군문에서 지날 생각을 하니 걱정이 태산 같구려.
날로 월동준비에 분망한 이때 고당 양친께옵서는 기력이 강령하신지 항상 죄송한 마음 다 전 할 수 없소. 동생들 충실히 공부하며 어린 淳이 재롱은 늘었는지 궁금한 심회 이를 데 없소. 더구나 한창 추수기에 손포가 딸리는 때 손수 고생이 자심하실 양친생각 주야 불효된 심정이로다. 모든 것을 세운에 맡기어 아들을 대신하게 하니 혼정성신을 모름지기 기쁜 얼굴과 즐거운 빛으로 할 것을 구태 어 말하지 않아도 잘 이행하리라 생각하오.
역시 우리의 굳은 정념과 백년이 하로 갈을 사랑이 변할 리 없고 이토록 아쉬움에 젖은 낯선 밤공기나..외로이 공방에 애태울 당신의 모습이나 어찌 비중을 견줄 수 있겠소.
철없는 동생들 건사하며 범백가무를 한결같이 점검, 모든 것을 유감없이 처리해가고 있는 당신이 있어 마음이 든든하오. 비록 국가의 부름을 받아 용약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는 이 마당에 어찌 편안함을 바라며 어찌 하고 싶은 생각만 할 수 있겠소. 찬 바람이 살을 애 이는 듯 쥐죽은 듯 고요한 심야의 정경을 홀로 감수하면서 북쪽 하늘 반짝이는 별을 헤어 보는 것도, 터질듯한 불만을 참고 눈 거슬린 일을 감내해야 함도 모두가 겪고 행함에 거짓이 아닐세라 누구나 집 떠난 이라면 느끼는 감정이겠지만 이토록 무거운 짐을 진 사람에겐 감회가 더욱 깊을 수밖에...
가끔 번화가 광주시내를 걸을 때 마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부자유스럽고 불쌍하도록 자신을 잃은 인간으로 만들었는지 의심할 때도 있소. 눈에 보이는 것마다 이 세상 아닌 별천지 같고 이토록 휘황찬란한 거리를 혼자 걸어가기 너무도 쓸쓸 한 느낌이었소. 어쩌면 당신을 불러 멋진 러브의 포옹을 하고 싶은 충동 때문에 그냥 집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 참을 길 없어 멋없는 웃음 쓰디쓴 미소로 벗과 어울리며 시간 가는 줄을 몰랐소.
조용히 더듬어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면 너무 내 자신이 미약한 심정과 무엇 하나 누구를 위해 뚜렷한 보람도 없이 정말 산 다는 게 무엇인지를 스스로 책망도 하고 반성도하지 않고는 못 베길 심정이었소, 그러나 아직도 살길은 많고 또 우리가 겪어야 할 행복이 머지않아 우리를 기다리기에 꾹 참고 견디는 것이 생 책이라는 신념을 잊지 않고 있소.
우리가 나라를 위해 이토록 전선에서 희생하는 동안 우리 고향 내 나라의 평화가 지켜지는 것 아니겠소. 결국 내가 군인의 몸이 되였기 때문에 당신 역시 그래도 불편하나마 낮선 고향을 지키기에 유감이 없으리라 믿소. 요즘 국제정세는 날로 험악하여 격발일로의 위기감 속에 싸늘한 냉전이 계속되는 때 조금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시기라 생각되오. 그렇다고 너무 동요하지 말기 바라오. 벌써 전방 방호 속에는 영하 빙점을 오르내리기에 손발이 얼고 머지않아 눈보라 치는 진지를 굳게 지키면서 맹 열히 훈련하는 장병들을 생각하면 나는 너무 편한 생활이야. 人命은 在天 이라 하늘이 준 목숨 하늘이 마음대로 하는 데야 누가 원망하겠는가. 하루속히 조국이 통일 되는 날 이토록 두려움이나 아쉬움도 없이 우리 서로 포근한 잠자리를 계속할 기회는 오리라 생각하오. 그때까지 우리 괴로움도 아쉬움도 참고 견딥시다. 우리 서로 지금 당한 의무를 다 하는 게 상책이 아니겠소. 당신이 집에서 해야 할 일 내가 군에서 해야 할 일 우리 서로 불만 없이 웃는 얼굴로 현실에 적응합시다., 오늘이 음력 9월 그믐이니 이 밤이 지나면 10월이라. 언제고 일평생 잊지 못할 10월 20일 서로 백년가약을 맺은 애정의 날 우리 들 만의 날, 10월은 확실히 당신과 나의 달이라 생각 하오. 그러고 보니 벌써 만 2年이란 세월이 꿈같이 지났구려 .
그동안 우리들의 사랑이 준 귀여운 선물 淳의 재롱은 우리 생애에 큰 기쁨이 아니겠소. 사랑스런 재롱과 밉도록 귀여운 모습이 그립소. 날씨도 차지는데 몸이나 성한지 한창 바쁜 일 때문에 손이 덜 가는 일은 없는지 이유 없이 신경질을 부리는 일은 없는지 날로 고된 일에 피곤하드라도 미운 재롱을 무시하는 일 없도록 바라오. 이달에 정성이 깃든 우리들 백년가약이 꼭 백가지 복으로 변하기 서로 약속합시다. 10월이 가고 또 두어 달 지나면 금년 나이는 또 덧없이 먹는 게라 .지금 심정 같아선 속히 나이가 먹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래야 이 푸른 제복을 벗을 날이 가까울 테니까.
무어라 횡설수설 그렸는지 시봉제절 부디 당신 몸 건강하기 바라는 마음뿐이오. 아무쪼록 다가오는 추위에 건강에 조심하기 재삼 바라면서 이만 줄이요
음력 9월 그믐날 밤에 당신의 허스밴드로부터
0-아내의 젖유종을 걱정하며
순이 엄마!
바쁘고 고생스런 가운데도 정성껏 보내준 당신 편지 반가이 받았고 이제야 붓을 드니 미안한 마음 금할 수 없소 .그 간도 신상이나 무고한지 고생이야 불문가지겠지만 어떻게 상처는 다 아물었으며 몸에 별 이상은 없는지 몹시 궁금하오.
아버님 기체 만안 하시고 어머님 근력이 강령하시며 동생들 충실히 학교에 잘 다니는지 어린 것은 보채지나 않으며 덴 데는 별 지장이 없겠는지 주야 근심걱정 어찌 다 전 하리요.
더구나 젖유종으로 고생이 무척 심하였다니 가슴이 메이는 듯 참아 그립고 아쉬운 마음 미칠 것 만 같소. 남쪽하늘 따사로운 봄빛이 고향을 부르고 검푸른 물결이 거울처럼 당신을 비추는데 한주일 피로를 풀고 때 묻은 속옷 세탁에 바쁜 일요일 하루도 벌써 한낮이 지났구려. 조약 돌 같은 자갈밭에 엎드려 글을 쓰노라니 내 앞에 당신이 속삭이는 듯 귓전을 소근 대고 어느새 당신의 천사와 같은 마음이 내 몸을 포근히 꿈나라로 인도 하는구려.
밤마다 꿈마다 찾아주는 그리움이여 사랑의 천사여. 이토록 그리울 줄은 예전엔 정말 몰랐다오. 저마다 두고 온 사랑과 미련을 그리면서 돌밭 강변에 엎드려 혹은 누어서 노래를 부르고 사색에 잠긴 모습들을 가만히 연상해 보오. 그 옆엔 체 때가 다 가지 않은 세탁물이 놓여 있고 멀리 과수원 꽃은 만발하여 더욱 봄을 장식하고 있소. 모두가 웃지 못 할 현실의 운명 앞에 우리는 젊음을 보내고 있고 피할 수 없는 자기 생활에 몸을 마껴야 하는 운명이 아니겠소.
우리는 괴롭고 아쉬웠든 과거보다도 좀더 아름다운 내일을 위해 현실의 괴로움을 참아야 하는 것으로 믿으오. 이제 7주가 지나면 아마도 서로 상면하게 되리라 믿소. 매주 일요일이면 외출이 허락 되여 모두들 즐거이 시내로 몰려가는데 북쪽하늘 고향을 그리면서 가지 못하는 마음만이 안타까울 뿐. 그래도 억 메인 일과를 벗어나 자유로운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이 다행한 일이지. 때가되면 식사당번으로 밥 나르기 국 나르기에 재미를 붓치고 밤이 오면 아름다운 꿈나라로--
확실히 재미있는 생활이지. 아무 걱정 말고 되는 데로 해야지 너무 근심할 필요 없어요. 억지로 된다면야 세상사람 고생할 사람 누가 있겠소. 모두가 정해진 운명이니 우리라고 매양 요 모양 요 꼴로 살아가라는 법칙이 있겠소. 틈이 나는 대로 집 소식이나 자주 전해주고 시봉에 유감이 없도록 부탁하는 바이요
외가 여러 어른들께도 안부를 전해 드리고 따로 편지 못함 사과 드려요 그리고 충주 집 소식은 한번 듣고 아직 못 들어 궁금하나 이곳에서 집 편지와 함께 보냈으니 그리 알기 바라며 할머니 생신 때 가고 싶으면 말씀 드려요
더구나 귀여운 순의 사진을 보는 心情 객황 군문에서 맞보는 이 기쁨 어찌 다 기필하리요. 방긋 피어나는 어린 재롱이 눈에 보이는 듯 지금쯤 하루의 피곤한 몸을 꿈속에 쉬면서 한 없는 그리움에 차 있을 당신을 생각하니 고요한 이 밤 나 역시 그립고 용솟음치는 사랑의 마음을 참을 길 없구려. 추석에도 매인 몸 객지에서 심회 울적하였으며 더구나 집에 모시고 명절을 보냈는지 자식 된 마음 불효 막급이었소. 참 친가 조모님 근력은 어떠시며 부모님 양 외분께서도 기체후 일향만강하시며 외가댁을 위시하여 대소 가내 제절이 균안하신지 궁금하오.
별로 기쁜 소식도 없이 홀로 친가에 가서 여러 가지로 근심걱정 끼쳐드려 당신마음 심난하였을 것 같소. 물론 세사 억지론 안 되는 일이라 묵묵히 참고 현실에 충실 하는 도리밖에 없겠지만 여러모로 면목이 없소. 홀로 어린 것을 업고 쓸쓸히 귀가하든 모습 눈에 어리는 듯 하오. 아무쪼록 용기를 내요. 복받치는 심정 이것저것 허전함과 애틋한 정이야 여기서 다시 묻지 않더라도 짐작이 가는 일, 내일의 행복이 우리를 기다리는데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할일이 너무나 많더라도 한 가지 한 가지 의무를 이행하는 동안 기쁨은 가까워 오고, 비록 이토록 불만이 많은 현실이건만 웃으며 사는 동안 보다 강한 우리들 사랑이 더욱 굳어 질것이며 자연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는 유일한 길이 열리리라 믿는 바이오.
집 생각 그리울 때면 순의 재롱스럽고 귀여운 사진을 놓고 당신을 그리며 아기자기한 속삭임을 듣는 듯 분망한 하루 피곤을 잊는 다오. 벌써 조석으로 찬바람 옷깃을 여미게 하니 그윽한 향수심이 날로 더하고 멀리 전답이 황색 오곡으로 무르익는데 언제 또 회포를 나눌 런지...
아무쪼록 나야 군문에 면식이 무양이니 걱정 말고 재삼 건강을 축원하면서 바쁘더라도 종종 소식 전 하오 1962. 9. 22
0- 불침번을 서며
쥐 죽은 듯이 고요한 밤공기를 뚫고 아빠를 부르는 순의 귀여운 목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듯하오. 와야 할 겨울은 제 발로 오는데 가고 싶은 마음은 깊은 잠에 깰 줄을 모르는구려.
이처럼 고요한 밤 당신은 잠에 취해 있을까 멍하니 들창 너머로 검은 그림자만 오락가락 하는구려. 고르지 못한 날씨에 모시고 건강한지 동생들 몸 성히 공부 잘하며 집안 대소제절이 두루 평안하신지 궁금한 마음 여전하오.
김장도 해야 할 시기고 겨울을 보낼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되였는지 마음의 각오가 중요할 시기인 것 같소. 금년 겨울엔 물길이 가까워 좋겠지만 약한 체질에 감기 들려 어른들 걱정 시키지 말고 몸조심하기 바라오.
요즘 나는 생활의 큰 변화가 왔다오. 밤 12시까지는 자서는 안 될 내 스스로 택한 책임 앞에 시간을 이용하고 있소. 말하자면 합법적인 시간의 이용이란 말이요. 야간 보초를 깨워 교대시키고 기회를 봐서 순찰을 하는 일이야. 이 시간을 이용해서 밤 12시까지 잃어버린 실력을 다시 찾고자 책과 씨름해야 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있다오.
머지않아 사회에 진출하는 날 군에서 썩을 대로 썩은 두뇌, 모든 기억조차 희미한 머리를 가지고 어떻게 남과 싸워 이길 수 있겠소. 정말 이처럼 군에서 책과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며 이를 알선해주신 장교에게 감사한 마음 금치 못할 뿐이요
굳은 결심은 아무도 막을 수 없고 내 이 각오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오. 내일의 복된 삶을 위해서는 밤 12시가 문제 아니라 밤을 새운들 꺼리 낄 바 없다고 생각하오.
부디 건강을 비오
9 .19 심야
0-새해 아침
해를 넘기는 기분도 가지가지인가 보오. 스스로 느끼고 계획하는 희망이 부풀고 허전한 마음을 메 꾸기 위해 저마다 가슴을 조이는 순간 당신의 시봉평안을 비는 마음 이외에 또 무슨 바람이 있겠소. 새해에는 그래도 우리에게 빛이 있겠지. 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 꺾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우리는 참고 닦고 용기와 신념으로 굳게 고통을 참아야 하오
충주는 다녀왔는지? 무사히 귀대하여 몸성히 근무하고 있으니 근심말기 바라며 순이의 재롱 띤 모습이 눈에 밟혀 잠을 이룰 수 없구려. 또 다시 계획된 시간과 함께 우리들의 내일을 위해 밤늦도록 공부하고 있소. 설마 우리라고 언제까지나 시골 벽촌에서 고생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얼마든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복된 삶을 누릴 방법이 있다고 생각 하오. 아무쪼록 건강을 위해 몸조심하기 바라며 어린 것 감기 들지 않도록 하고 부모님 기쁘게 해드려요
일이 바쁘지 않으면 새해에 다녀오리다.
그럼 외가댁을 위시하여 대소댁에 안부전하기 바라며 우선 귀대하여 간단히 안부만 전 하오
12월 20일 광주에 와서
0- 휴가를 다녀와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지금도 보내기 아쉬워 헤어지기 안타까워 망설이든 당신의 모습이 눈에 어려 마음이 산란케 하오 마치 2. 3일이 지난 오늘에도 산마루터에서 시름없이 서있는 것만 같은 이 심회를 안정시키기엔 너무 그리움이 앞서는 구려. 헤어지기 싫어도 헤어져야 하고, 오고 보내기 싫어도 가고 와야 하는 게 야속한 군복의 탓이라 생각하니 공연히 허무한 생각뿐이오
서울에서 10일 9시 반차로 광주에 오니 오후 8시 반 막상 돌아오고 보니 새로 군대 생활을 하는 것 같아 서먹서먹한 기분 금할 길 없으며 근 한달 가깝도록 무엇 하나 가사에 조력한 것도 없이 총총히 떠난 마음 죄송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착잡한 심회 여기 다 표현키 어렵소.
그러나 괴로운 현실을 참아야 하는 게 우리들 약속이 아니리요. 용기와 신념을 변치 말도록 또 부탁 하오. 몸이 몹시 불편한 모양이 어서 마음을 놓지 못하겠소. 어려워 말고 약이라도 지여 달래요 이제 당신은 나의 아내요 순의 어머니이기 전에 우리 집 부모님의 딸자식처럼 허물이 없지 않아. 가정의 화목과 평화는 당신의 책임인 것처럼 당신은 웃음과 명랑한 생활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 하오. 오든 날 저녁엔 공연히 불쾌한 말을 해서 미안 하오.그러나 내가 한 말을 명심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갈 줄 알며 너무 애쓰지 말고 건강에 조심하도록 바라오. 이곳 광주는 아직 서리도 안 오고 온갖 곡식이 싱싱한 대로 있고 조석으로 약간 찬 공기가 돌뿐 입고 온 세타를 벗어던질 정도니까 염려 말기를 바라며 기회 있는 대로 가끔 집 소식 전해주기 잊지 말도록,
그리고 여기 우표 몇 장 보내니 종훈이 한태고 소식 연락하기 바라오. 가끔 서울 사모님께도 소식 전하고 바쁜 일철 몸조심 축수하면서 이만 줄이오.
10.11
(우표 6매 보냅니다)
0-바쁜 농사철을 걱정하며
날로 농사일 바쁜 절기에 시봉 일신이 무고하며 어린 것 충실한지 궁금하오.
그토록 지루하든 장마도 이젠 멎은 듯 하오 마는 곡물 피해가 말이 아닌 모양이라 가뜩이나 궁핍을 면치 못 할 살림에 걱정이 한두까지 아니구려. 이토록 세상 물정을 모르고 사는 인생 한편생각하면 사는 것 같지도 않고 매일 되풀이되는 동일한 일과에 어떻게 시간이 흐르는지 조차 모르는 생활이 한심할 뿐이오. 금년 보리농사 장마에 피해얼마며 그동안 땀 흘리며 고생하신 보람이 헛되지나 않을지 밤낮 말로만 걱정한들 소용없는 일이나 식량곤란은 안되는지 곤란이 심할 집 소식 애처럽도록 가슴이 메이오.
사람이 부족함이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문제일지 이제 반 정도 보내고 난 군 생활 아직도 어제 입대할 쩍 기분 그대로요. 외로운 생활 고민과 쓰라린 현실 속에서도 서로 믿고 의지 하며 굳건히 변할 수 없는 사랑이 삶의 의욕을 북 돋아주고 고생을 낙으로 즐길 수 있는 힘을 갖게 하는 구려.
늦게까지 흙과 싸우며 고생해야하는 가난한 농촌 삶 속에서 도리를 찾고 윤리를 지켜야 할 우리들이기에 양심이 있고 투지가 있는 인간이기에 참아야 할 진리가 한두 가지가 아닌가 보오. 새벽일찍 일어나 하루 종일 동동대다 보면 또 밤새껏 애와 씨름해야 하는 당신에게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말이 없소. 내 언제고 당부하듯 희망을 잃지 말고 용기와 인내심으로 생활해주오. 미칠 듯 그리운 정 못 잊어 생각하는 허전한 마음 언제나 포근한 품속으로 모든 정열을 불태우고 우리들이 사는 보람을 떳떳이 자랑할 수 있는 내일을 위한 준비에 헛되지 맙시다.
그 속에 우리가 살고 그로 인해 삶의 보람을 찾는 날까지 비록 지금 지나친 고생과 시끄러운 집음이 귀를 괴롭히더라도 우리가 진 운명이라 자위하면서 복잡한 생활을 되풀이 하는 수밖에 무슨 도리가 있겠소. 당신 그처럼 안타까이 염려해주는 학교 문제 백 번이고 생각해볼 때 쉬운 문제가 아닐뿐더러 공연히 많은 돈을 부모님께 말씀해서 그간 불민한 마음 참을 길 없었소. 제대하고 차차 살아가면서 해결할 문제라 생각하오.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라 점점 불효만 저지르는 결과가 되겠기에 학교 복학문제는 군대 있는 동안 단념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면으로 순조로울 것 같소. 아무 걱정 말고 가사에나 충실하기 부탁하는 바이요. 제대 후에도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지 다닐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소식이 왔으니 안심 하오. 혼자만이 겪는 일도 아니고 사나이라면 누구나 지나가야할 인생 주막이기에 세월이 가면 자연 해결되리라 굳게 자신하고 있소. 당신 성의에 정말 가슴이 벅차도록 고맙소. 서울 친지와 벗들의 소식마다 앞으로 내가 개척할 직업 전선에 희망을 갖게 하는 편이니 너무 조급히 생각 않더라도 잘 될 것 같으오
그리고 큰 외숙 가내 사장은 어떠하며 지내는 형편이 궁금하오. 애로가 있더라도 가끔 집 소식 전해주기 바라며 시간 없어 이만 줄이니 아무쪼록 몸 건강하기 축수하는 바이요
순 부
0-담양군 지곡리에서
마침 안창 댁 아주머님 전갈로 이곳 지곡리에 와서 시간이 있기로 몇 자 전하오.
벌써 기다리든 10일이 꿈결에 갔구려. 그러나 그동안 얼마나 지루하였는지...일전 소식은 들었으리라 믿고 계속 건투를 비오. 이곳 광주는 아직 들판에 곡식이 그냥 있을 정도로 일기가 따뜻하니 철수가 한 보름은 늦는가 보오. 제법 아침저녁으로 찬 바람이 일고 있으나 비교적 따뜻한 편이요 그간 양친께서도 강령하시며 가내 별고 없는지? 물론 분주한 일들은 보지 않아도 직접 당하는 기분이오. 다녀온 뒤로 순이의 재롱이 눈에 밟혀 미칠 것만 같소. 기침은 좀 어떠며 밥은 잘 먹는지 추위에 감기 들지 않도록 주의 하고 한창 말썽 부릴 때라 항시 조심해야 될 것 갔소.
운완이는 아직 통학을 하는지 아니면 기식을 시키는지 궁금하오.
재미있는 소식 많이 전 하고자 막상 붓을 들었으나 그리움과 궁금한 생각에 무엇을 먼저 전할지 모르겠구려. 그저 지금도 당신 고개 마루에 서있는 것만 같아서...
그리고 이곳 지곡리에선 태직이를 양자할 의향이 없어진 모양이오.
제천에서 파양 수속을 마음대로 하여 이곳으로 전해달라니 도장이 필요하면 새겨서라도 속히 수속을 해 달라니 그리 전하오. 따로 안창 댁에 편지 냈으니 그리 알고 만나면 전하도록 하오. 물고 뜯던 선거전도 끝나고 기대하였던 결과와는 달라진 정국을 안정시키고 수습하기엔 많은 국민의 노력이 필요할 것 같으오.
그럼 바쁜 추수기에 부디 시봉 평안하고 건강한 나날을 빌며 이만 줄이오.
10월 20일 광주에서
(그리고 남성에게 전하는 편지도 잘 전했다고 말씀드려요)
0-제대를 앞두고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지루한 것인지 3년을 어떻게 참았든가 싶소. 바쁜 하루가 지나고 잠자리에 누워 여러 가지 생각에 잠 못 이루는 이 순간이 왜 그리 괴로운지 모르겠소.
편지 볼 시간도 없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동 동 거리는 당신에 비하면 얼마나 편한 세월이었던가 3년을 하루같이 참고 성실히 시봉제절을 지켜온 당신의 거룩한 생활신념은 나에게 강한 힘과 교훈을 주었소.
아무 사고 없이 지루한 열차가 나를 실어다준 이곳 호남 들판에는 오곡이 무르익어가고 당신의 정성어린 편지를 다시 읽어보는 이 순간 그처럼 속을 썩이고 괴로워하였음에도 한마디의 불평도 없는 그저 고운 마음씨 그대로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하였는가 보오. 모든 액운과 괴로운 운명은 군 생활 3년과 더불어 멀리 가버릴 것이요
이제 우리는 밝은 새벽 별처럼 빛을 찾고 생기를 얻은 듯 기쁜 마음으로 10월을 맞을 것이오. 하늘을 날을 듯한 이 가슴 이 마음 전할 수 있어 기쁘오. 어떠한 고민이 있어도 어떠한 고생이 있더라도 누가 무슨 소리를 하던 참고 일하고 우리의 임무를 위해 모든 것을 받칩시다. 지금 나로서 당신에게 무엇을 더 바라겠소.
당신의 말없는 순수성은 오히려 내가 해야 할 책임을 강하게 일깨워 줄 뿐이오
9월 24일
무사히 돌아와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0-서울에 왔다 간 아내에게
의택 엄마에게
무사히 귀성하였다는 소식 반가웠소. 다행이 좌석을 얻어 앉아 갔다니 마음이 놓이나 와서 고생만 하고 마음도 편치 못한 당신을 보내는 내 가슴 찢어질 것만 같아 어린애처럼 울고 싶은 심정을 억지로 참고 발길을 돌렸소.
이 내 마음 안타까운 심정을 이해하여주는 당신만의 사랑이 그 얼마나 행복스러웠든지 그저 꿈처럼 만났다 살아진 당신을 그리는 마음만 점점 더 간절할 뿐이오. 더구나 매정한 세상 사람들 틈에서 보잘 것 없는 인간이나마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많은 격려와 지도를 아끼지 않는 사람과 평생을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감사하오.
서울에서 잠시나마 우리의 정을 나눌 기회를 베풀어준 고마움을 잊을 길 없구려.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어떠한 고생이 와도 더구나 참을 수 없는 굴욕이 와도 우린 좀더 참아야 한다고 복받치는 눈물을 흘리며 약속하든 밤을 다시 생각하며 오늘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과 나를 위해 참고 고난을 겪는 당신 앞에 부디 복된 행운이 오기를 빌고 또 빌었소.
친구와 상의해서 결정 되는대로 새로운 소식을 전하기로 하고 오늘 이만 줄이오. 약도 오늘 먹으면 다 먹게 되나 혼자 다리다보니 두첩이나 태워버렸구려 .그리고 당신 가든 날 일중이 외숙이 찾아 왔었소. 충주 외출 갔다가 당신 편지 주소를 보고 안부를 전하러 왔다하며 충주도 대소가가 두루 평안들 하시다니 안심하기 바라오.
사모님 말씀하시든 식모아이 염탐해 보았는지 가부간 곧 알리기 바라오.
몸 건강하기 축원하오.
음 3월 13일 아빠가.
제2부 다시 보는 부모님전 상서
0-밤새워 社說 쓰시던 아버지,
-큰 딸이 대한 언론인회보에 기고한 글
대한언론인회보에 실리기로 했으니 네가 아버지에 대한 글을 좀 써 보라는 말씀을 듣고 얼마나 망서렸는지 모른다. 어떻게 우리 아버지 이야기를 원고지 몇장에 다 쓸 수 있겠는가. 간단한 隨想이라고는 하지만 글재주도 없는 주재에 자칫 아버지께 누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고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정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생각해 보니 내 나이 벌써 마흔 한 살, 35년 전 여섯 살 때 남동생을 등에 업은 어머니 손을 잡고 서울로 올라 온 때가 엊그제 같다. 단칸방에서 생활하다보니 나는 항상 책상 밑에서 자기 일쑤였지만 무슨 글을 그토록 많이 쓰시는지 밤새워 열심히 무엇인가 쓰고 계시던 그 옛날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초등학교 몇 학년 때인지는 모르나 학교에서 써오라는 생활기록부 학부모 직업난에 '모신문사 논설위원'이라고 적으시며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신문사 社說 쓰는 일이라고 설명해 주셨지만 논설위원이 어떻고 사설이 무엇인지를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내 아래로 남동생 둘 여동생 하나, 모두들 시집 장가들어 아들딸 낳고 잘 살고 있지만 우리 4남매는 아버지 직업이 언론인이었고 평생 동안 하신 일이 사설 쓰는 일이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아버지가 그 어려웠던 올챙이 기자 시절 가계부 적자를 줄이시겠다고 대학생 때의 가정교사 경험을 살려 학생들을 가르쳤던 일,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틈틈이 보세공장에서 나오는 일거리를 맡아 밤새워 실을 감고 때로는 신문지를 잘라 봉투를 접어 시장에 내다 팔곤 하셨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나는 오늘의 우리 집이 이만큼이나마 살게 된 것은 모두가 부모님의 억척같은 생활력 덕분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흔히들 그때는 다 그렇게 어렵사리 살았노라고 말할지 모르나 신문사 논설위원이란 사람이 온돌도 없는 창고 마루방에서 살았다면 과연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지, 苦盡甘來라 했던가, 열심히 사신 보람 있어 무허가 판잣집에서나마 우리들 4남매가 따로 따로 책상을 차지 할 수 있었던 그 기쁨은 내 나이 또래 세대들이면 거의가 비슷하게 느껴본 희열일 것이다.
더욱 감격적인 일은 아버지께서 신문사 논설위원직에서 물러나신 직후 '논설위원 30년'이란 책을 출판하신 일이다. 저서를 처음 내신 것도 자랑스러웠지만 언제 그 많은 장장 5천 6백여 편의 사설들을 집필하시고 그것을 모두 스크랩했다가 책으로 엮으실 결심을 하게 되셨는지 아버지의 그 정력과 치밀함에 놀랐고 많은 원로 언론인들과 친지 분들이 참석한 가운데 출판기념회를 성대히 개최 하니 자식 된 입장에서 정말 아버지가 존경스럽고 참석하신 하객 여러분께도 감사한 마음을 잊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날 열심히 살아오신 아버지를 새삼 알게 되었고 입추의 여지도 없이 참석해준 하객들로부터 자랑스런 아버지 모습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장문의 편지(자전 에세이)를 자식들에게 우송하심으로써 나를 감동 시키셨다.
아버지의 自傳 에세이를 밤새워 읽으며 눈물을 펑펑 쏟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우리들 4남매에 대한 아버지의 깊고 짙은 사랑에 감읍했기 때문이다. 큰 동생이 대학 재학 중 아버지에게 쓴 장문의 편지를 버리지 않고 그대로 옮겨 실은 것도 놀라웠지만 우리 집 家門과 부모님 결혼에 얽힌 이야기며 가족들 하나하나에 대한 자상한 보살핌에 부모님의 은혜가 하해와 같다는 것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제삿날은 왜 그리 자주 돌아오는지 내가 출가하기 전만 해도 일년에 아홉 번 제사(4대 봉사)에다 설 추석명절 차례상을 불평한마디 없이 경건하게 모셔온 어머니는 마치 가문의 명예를 위해 태어나신 듯 宗家 집 맏며느리 몫을 훌륭하게 감내하고 계신다. 내가 시집가는 날 "네 엄마를 닮으라" 고 당부하신 아버지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고 아무리 바쁘셔도 일찍 귀가하셔서 제사를 모시는 아버지, 장가들어 살림을 나갔다가 부모님을 모시겠다고 들어간 큰 동생 내외가 대견스럽게 느껴지는 오늘이다. 한달에 한번은 4남매가 돌아가며 회식을 책임지고 그때마다 家和萬事成을 강조하시는 아버지 앞에서 힘차게 화잇팅을 외치며 진하고 달콤하기만 한 가족 사랑의 진수를 만끽하곤 한다. 이젠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침침한 시력이 되셨지만 젊은이들에게 뒤질새라 열심히 또닥또닥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시고, E-Mail을 보내시고, 홈페이지를 조심스럽게 메꾸시는가 하면 30 여년동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북방송을 하시는 그 열정이 정말 자랑스럽고 건강하신 아버지가 고맙다. 언젠가 '세상에서 가장 강하면서도 훌륭한 남자가 바로 아버지' 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나지만 주위의 환경과 자신의 처지가 아무리 나빠도 그것에 상관치 않으시고 매사에 성실히 삶을 살아가시는 아버지의 모습. 난 이런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가정의 미래가 한없이 밝고 풍요할 것임을 자신 있게 내다보는 기쁨에 오늘도 살맛나는 세상을 살고 있다.(필자: 鄭雲宗논설위원 장녀)
0 대학시절 큰 아들의 편지에서
(1) 허위에 가득한 위선자들에 대해 진실로 맞서는 삶이 진정 기쁘고 행복한 삶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하시고 오직 성실과 책임의식으로 살아오셨던 아버지 안녕하신지요. 저 때문에 많은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저는 조그만 방에서 하루의 반을 책을 보면서 지나온 생활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집안 걱정이 한시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저 때문에 걱정하고 계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을 생각하면 심히 괴롭습니다. 그동안 아버지와 깊은 대화 한번 못하고 소신이 없는 놈처럼, 삶에 자신이 없는 놈처럼 보여서 아버지와의 신뢰를 갖지 못했음이 저의 불찰임을 통감합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버지와의 신뢰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 신뢰란 제가 정말로 떳떳하고 자신 있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획득되리라 생각합니다. 불의한 것보다는 바른 것을 추구하고 나태함보다는 성실함을 추구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삶 속에서 정의와 민주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올 것이고 이속에서 아버지의 아들로서 자랑스러움이 나타나리라 느껴집니다. 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완성을 향한 끊임없는 과정으로서 자기를 비우고 他者를 위해 헌신하고 사랑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환경과 상황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시대와 역사의 주체자로서 창조적이고 개척자적인 정신으로 환경과 상황을 변형시킴과 동시에 자신의 삶을 변형시킴이 고난이 아니라 기쁨으로 여길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러한 삶을 살아오셨기에 아버지에 대한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누가 뭐라 고해도 나의 아버지는 전 생애를 진실과 성실로 주변의 조건을 새롭게 창출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근검과 절약의 정신이 아버지의 삶을 규정하기에 자랑스럽습니다. 저 또한 자랑스런 아버지의 자랑스런 자식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제자신을 채찍질 하겠습니다. 참다운 기쁨을 갖기 위해 고난을 극복해내는 삶을 살겠습니다. 선하고 진실한 사람이 최종적으로는 승리한다는 진리가 옳음을 알면서도 현실은 선하고 진실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에 많은 사람이 진리를 포기합니다. 이들은 승리는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향한 부단한 몸짓이 전제되어야만 승리는 획득되어짐을 모르거나 승리를 향한 고난에 실천적 참여를 하길 거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승리는 이를 막고 있는 제반 사회 구조 뿐만 아니라 부정과 불의를 행하는 자에게 진실과 정의로 싸워 나가야 함에 대한 정당성이 나타납니다. 아버지, 허위에 가득한 위선자들에 대해 진실로 맞서는 삶이 진정 기쁘고 행복한 삶이라 느낍니다. 역사의 바른 방향에 서서 역사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는 끊임없는 과정만이 현재의 모순을 타파할 수 있고 이데오로기에 감염되어 있는 현재의 소련과 북한의 허위가 극복되리라 믿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모두가 기쁘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위해 노력함이 저의 행복이고 기쁨입니다. 저에 대해 너무 걱정 마시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로해 주십시오. 용성이는 공부 열심히 하도록 신경써 주십시오. 제가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 부탁드림을 용서 하세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1986. 10. 10 의택 올림 (2) 정의는 불의를 극복했을 때 가치가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따사로운 햇빛이 나의 온몸을 감싸고 하루를 활기차게 살아가게 합니다. 길가의 돌 하나하나와 거리의 나무 한그루 한그루가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만인을 위해 살아갈 때에 진정 기쁘고 충만한 행복을 느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조그마한 일 하나도 하지 못했던, 그리고 하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안타까움만 듭니다. 어머니의 병세는 어떠한지, 차도는 있는지 걱정됩니다. 저로 인하여 얻으신 병이기에 더욱 근심스럽습니다. 아버지 저는 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기쁨은 불행을 통해서 빛나고 정의는 불의를 극복했을 때 가치가 있음을 느낍니다. 또한 빛은 어둠 가운데 있을 때 의미가 있음을 느껴봅니다. 마음속에서 일고 있는 편안하고 안일하고자 하는 마음은 끝없이 정의와 진리로 극복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고, 부정한 현실에 진리의 등불을 밝히는 방법은 많은 사람에 의해 호도되고 오용되고 있음을 생각해봅니다. 가난 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의 모습은 기쁘고 즐거운 모습은 아니지만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부유하고 환대받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우리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되어야함이 진리일 것 같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진정 느낄 수 없음을 아는 학생의 고뇌일 것 같아요. 아버지. 지난주에는 용성이의 생일이 있었는데 그 어느 때보다 축하의 마음을 느껴 봤습니다. 그리고 용성이가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살길 바람니다. 껍데기뿐인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대학가서 취직하고 부유하게 사는 삶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만인의 도움을 주고 세상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진리와 참됨을 배우길 바랍니다.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의 칼을 가지고 진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게 해주십시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1986. 10. 26. 의택 올림
(3) 어떠한 이념이나 사상도 인간과 인간사이의 정은 끊을 수 없어
날마다 저 때문에 온 가족과 친지 분들께서 근심과 불안 속에서 시름하고 계시다니 저 자신은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곳에 온 이후로 많은 아저씨들께서 새로운 사실들을 깨우쳐 주시고 보살펴 주셔서 생활하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으나 저 때문에 상처 받으셨을 가족들을 생각하면 한시도 편하지 않습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만하더라도 평생을 두고 갚지 못하거늘, 하물며 부모님의 뜻을 거역하고 제가 하고자 했던 일만을 고집하고 온 집안을 고통과 파멸로 이끌었으니 어찌 저의 죄가 사해질수 있겠습니까. 별로 아는 것도 없고 책 몇 권 읽고 사물의 일면만 파악하고 부질없이 날뛰었던 것도 후회되며, 설사 옳은 생각이라 할지라도 부모님을 설득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감정과 흥분으로 일관하여 행했던 과거가 몹시 후회스럽습니다. 특히 제가 해야 할 도리와 의무를 망각하고 눈앞에 보이는 것만 쫓으려는 것은 크게 잘못되었음을 느낍니다. 또한 어떠한 이념이나 사상도 인간과 인간사이의 정은 끊을 수 없으며 특히 부모님과 자식 간의 정은 더욱 더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 매를 들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는 것도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증거이며 자식의 앞날을 걱정해서 하시는 행동임을 느낍니다. 며칠사이 부모님께서 제게 보여 주셨던 모습은 바로 자식사랑에 기초하셨음을 깊이 통감합니다. 함께 울기도하고 이야기도 하고 했지만 저 자신은 부모님의 뜻과 정을 너무도 모르고 철없이 굴었음을 회고해 볼 때 어떠한 벌이라도 달게 받아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저 부모님께 용서만 빌 뿐입니다. 다시 집에 돌아가면 먼저 자식으로서 부모님의 뜻을 받들고 성실하게 생활함은 물론이거니와 여유를 가지고 깊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그동안 소홀했던 학과 공부와 함께 세상을 넓게 보고 아버지와 대화도 자주하면서 저의 삶을 재정립하고 싶습니다. 무모한 행동을 하면 삶을 그르침을 깊이 느꼈기에 항상 깊이 사고하고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자세를 기르겠습니다. 인생을 길게 내다보며 삶의 여유를 가지면서 먼저 주어진 일에 성실하고, 차차 영역을 넓혀가야 하리라 생각이 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목표와 이상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하기위해 노력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환경에 의해 좌우 받을 뿐만 아니라 자연이나 환경을 인간의 삶에 유용하게 변화시키고 창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사람의 삶은 무미하고 아무 의미도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장미 빛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기에 현재의 어려움을 참고 극복하는 가운데 희망찬 미래가 다가옴을 느끼고 여기서 보람을 느끼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 미래는 물론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지금의 학생운동의 근본이 바로 총체적인 인간의 인간됨을 지향하고 있지만, 이를 이루려는 방법은 매우 문제가 많음을 느낍니다. 대부분의 학생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가 폭력을 쓰고 싶어 하겠습니까. 학문의 전당이요 사회의 상아탑이 되어야할 현재의 대학이 대화와 타협은 차단 된 채 극단으로만 달리는 것도 물론 학생들 자체의 문제가 매우 큽니다만 학생의 의견을 수렴하고 진지한 대화의 창구로 이끌지 못했던 기성세대의 잘못도 역시 있다고 봅니다. 제가 대학 3년 동안 느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현재 학생들의 고민하는 문제에 대한 길잡이가 되어주시지 못했습니다. 다만 자신의 가지고 있는 지식만을 학생에게 전달해주는 기능만 했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시는 분은 매우 적었습니다. 각 학문의 전문성이나 특수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현재 대학에서 나타나는 많은 문제에 대한 언급이 너무도 없었고 학생들의 질문을 받으면 솔직하게 대답해주시지 않고 회피해 버리기 일 수였습니다. 학생이라 함은 아무 편견 없이 학문을 연구하고 진리를 탐구해야 하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면서 금기시되는 사항만 강조되기에 학생 자체적으로 연구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편협 된 생각만 쌓였던 것 같습니다. 이념과 체제를 떠나서 올바르게 연구할 수 있는 조건과 기성세대와 대화할수 있는 공간, 시간이 확보되어야 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대부분은 북한 괴뢰에 대해 동조하지 않습니다. 또한 현재의 공산국가의 문제성 또한 연구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은연중에 친 북괴 발언이나 체제전복의 문 귀가 나오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이용당하가나 체제문제로 학생들의 의견이 무조건 묵살되기에 반항으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극단으로 치닫고 결국 대학가에는 화염병과 최루탄이 뒤덮는 것이고, 국민들은 여기에서 왜 학생들이 시위를 하는지와 의견은 무엇인지 모르고 소외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문제만 바라보니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제 학생들에게 무조건 안 된다는 식의 방법은 학생들을 선도할수 없음을 느낍니다. 모두가 국가를 생각하고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출발했지만 너무 다른 양상이 펼쳐짐을 통탄합니다. 서로가 화해로서 문제를 해결하고 양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학생운동의 방향도 이에 토대를 두고 국민적 의식과 공감대속의 운동이 되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국가의 주인이 모든 국민이듯이 국민 모두는 새로운 국가관으로 무장하여 발언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와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획득하고 이의 기회를 넓혀가야 하리라 생각해봅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바뀌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가의 경제력이 상승되고 국민의식이 점점 높아지면 가능하리라 느낍니다. 저는 이제 집에 돌아가면 과거의 일면만 파악한 것을 극복하고 보다 많은 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무모한 행동으로 가정을 파멸로 이끌지 않겠음을 맹세합니다. 아주 작은 부분부터 성실하게 생활하겠습니다. 과거의 인식부족과 무모한 행동과 감정과 흥분으로 부모님께 누를 끼쳐 드렸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 화기애애한 가정의 모습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1986. 11. 7
0-둘째딸이 어버이날에
엄마 아빠 보셔요. 제 나이 벌써 17세가 되었군요. 엄마 아빠의 헌신적 희생 없이는 자랄수 없었고 엄마 아빠의 뒷받침이 없었으면 저는 이렇게 고교 시절도 남기지 못했을 거예요. 엄마 아빠의 그 무한한 사랑을 저희는 소홀히 했던 것 같아요. 매년 반성하는 나지만 잘 되지 않는 군요. 시집 올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못한 체 서울로 올라와 어린 나를 데리고 여러 가지 궂은일을 다 하신 엄마. 아빠의 적은 월급에도 막론하고 꾸준히 저축하여 돈에 돈을 낳고 낳은 결과 지금은 손이 엉망이지만 남부럽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게 한 엄마 이렇게 엄마의 정성에 우리는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왔어요. 아빠도 그에 못지않게 열심히 노력하셨구요.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는 물 불을 가리지 않는 엄마 아빠 정말 무어라 말 할수 없이 고마워요. 그 어느 무엇을 바라지도 않고 그 무엇의 댓 가도 아닌 엄마 아빠의 무한한 사랑에 너는 지금까지 엄마 아빠께 무엇을 해드렸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아무 대답도 못할 거예요. 저는 오히려 잘못이 더 많으니까요. 부모님의 사랑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바다보다도 깊고 하늘보다도 높은 사랑이기에 저희는 보답할 수 없었나 봐요. 그러나 몇 만 분의 아니 몇십 만 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는 길은 학생으로서 공부에 최선을 다하는 것인 것도 알고 있어요. 어버이날도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군요. 어버이 날이라 해서 특정한 날을 정해 그날만 효도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고등학생으로서 더 잘 알고 있어요. 일 년 내 내 부모님께 효도를 해야 하는데 저희는 그렇게 못한 것 같군요. 그래서 이날 하루만이라도 효도할 기회를 갖게 되어 저는 한없이 기뻐요. 저는 엄마 아빠께 효도하는 것은 오직 학식을 쌓고 참된 사람이 되어 어디에 비교해도 남보다 월등한 딸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어요.약속은 절대로 깨트릴 수 없는 것인 줄 알고 약속드려요. 엄마 아빠! 정말 고마워요. 1984년 5월 최선을 다하겠다는 둘째딸 희택 올림 0- 막내아들 우택이 어버이날에 어머님 아버님! 1학년 때 까지도 게으름 피우든 제가 어느 듯 중학교 2학년이 되었어요. 저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생각이 깊을 만큼 자랐고 어머님께 짜증을 부리거나 걱정시켜 드리지도 않았으며 부모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을 나이도 되었어요. 저는 이 편지로나마 여태까지의 불효를 반성해 보고 앞날을 계획해 보렵니다. 저는 여태껏 아버님께서 깨워 주셔야만 일어났고 어머님 말씀도 가끔 거역하며 행동한 적도 때로는 있었어요. 매일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 저에게는 있는 것 같아요. 또 형이나 누나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아 다툰 적도 많이 있었던 것 같아요. 작년에도 이러한 계획을 세웠으나 철이 없어서 그랬는지 잘 지켜지지 않았어요. 그러나 저는 이제 2학년이에요. 철도 나고 부모님께 사랑이 무엇인지도 깨달았으니 이런 것들은 지킬 수 있을 거여요. 그리고 저는 여태껏 어리석게도 ‘바보상자’란 텔레비전에 매달려 하루 종일 시간을 낭비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은사님의 가르침에 따라 내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허무하게 평생 한 순간밖에 없는 시간 시간들을 보내지 않기로 했어요. 앞으로는 텔레비전 매달려 하루 종일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저에게 유익한 프로그램만 보기로 하겠어요. 그리고 한거지 저에게 중요한 것은 성적에 관한 것이어요. 작년까지만 해도 10등 정도에서 맴돌았지만 마지막 시험에 1등을 한 것처럼 노력하겠어요. 뛰어나게 잘 하지도 않고 또 못하지도 않은 학생이 되겠어요. 그러나 한 가지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노력한다는 것이어요. 어머님 기대이하로 못할 수도 있겠지만 항상 노력하여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 하겠어요. 또 노력하면서 건강을 지키겠어요. 이런 모든 것들이 저에게는 꼭 이루어지는 학생이 되겠어요. 그리고 앞으로 나의 미래도 생각해 보고 야망과 이상을 가지고 후퇴하지 않고 앞으로 계속 전진해 나가겠어요. 그리고 부모님께 효도 하며 공부에 열중하겠어요. 앞으로 어머님께서 저를 늘 지켜 봐 주셔요. 잘 못된 점이 있으면 꾸짖어 주시고 잘 된 점이 있으면 칭찬을 해주셔요. 그럼 이만 펜을 놓겠어요. 1983년 5월 3일 (화) 우택 올림 .
요. 1983년 5월 3일 (화) 우택 올림 .
0-아! 악몽의 산본중심상가 화재현장
-다함께 전화위복을 기원하며
막내아들 우택이 경영해오던 음식점이 원인모를 빌딩화재로 소실되는 위기에서도 침착 잃지 않고 입주민들을 대피시킨 일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
꿈만 같고 어이없는 악몽의 그날도 3주가 지나갔다. 이젠 기억이 잊혀 지기 전에 그날의 일들을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2020년 5월 26일.
그날의 오전은 큰 아이의 캐나다 UT (University of Toronto)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COVID-19 pandemic 으로 공식적으로 취소한다는 메일을 접한 날이기도 했다. 어쩌다 바이러스가 온 세계를 덮어버려서 시기적으로 참 운도 없구나 체념하며, 다른 계획을 잘 세우길 바라는 마음으로 보내고 있을 때였다.
오후 6시 조금 넘어서,
직원이 건물 뒤편 환풍구로 부터 타는 냄새가 들어온다는 얘길 한다. 나도 환풍구 쪽으로 냄새를 확인했는데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수년전에 담배 불로(?) 인하여 화재가 났었던 일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땐 조기진압을 했었지만..
나는 일단 환풍기를 끄고 뛰어나가서 건물 뒷 편을 확인했다.
그곳은 4개의 건물이 모여 있고, 건물과 건물사이에 에어컨 실 외기들이 쌓여있는 매우 좁은 공간이다.
그렇게 건물과 건물사이의 비좁은 공간인데도 불구하고 불기둥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불기둥을 목격하고 건물 안으로 한걸음에 달려 들어가서, 휴대전화기를 들고 다시 화재 현장 쪽으로 나왔다.
"아!! 빨리 119"
"여보세요.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여긴 산본 중심상가 ㅇㅇ 프라자입니다. 불길이 심상치 않습니다. 혹시 이미 신고가 들어갔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디라고요? 신고자 번호 위치 추적 하겠습니다.
아~~ 이제 여러 곳에서 신고 전화가 들어오네요."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불기둥이 어마 어마합니다. 아~~~ 가스가 새고 터지는 소리도 들리네요"
그래도 당황한 나보다 침착한 119대원은
"진정하시고 건물 안 사람먼저 대피 시키십시오"
'아 그렇지~~~'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 1층 사람들을 건물 밖으로 나가라고 고지하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가면서 "불이야~~ 대피 하세요" 외치기 시작했다.
1층은 바로 문 밖으로 뛰어 나오면 되고, 2층은 사람이 많지 않은 공간이고, 3층은.....
짧은 시간 주마등같이 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3층으로 4층으로 또 뛰었다.
"불이야~~~ 대피 하세요~~~"
학생들이 계단으로 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나중에 안 상황이지만 6층의 영어 학원 학생들이었다.
문제는 5층과 7층이다. 5층과 7층은 오피스텔인지 고시원인지 양쪽으로 문을 마주보고 있는 아주 좁은 공간의 주거 공간이다.
5층에 도달한 나는 문을 두드리며 불이야 를 외쳤다. 그 때 옷을 입으며 어리둥절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뒷 편의 불길을 보아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번 져 오르는 불길이 매우 컸고, 작은 폭발음까지 들었기 때문이다.
왼 주먹 오른 주먹을 이용하여 양쪽으로 일렬로 나열해 있는 문들을 세차게 두드리며 "불이야!! 대피해요!"를 외쳤다.
그리고 다시 6층으로~~
학생들이 계속해서 계단으로 뛰어나오고 있었고 성인으로 보이는 남자분을 확인했다.
"불 났습니다. 학생들 대피 좀 시켜주세요!"
누군지도 모르는 그에게 6층을 부탁하고,
7층에 도달했다. 이미 전기는 나갔고, 7층 건물 안은 연기로 가득했다. 그 앞에서 '금동아~~ 금동아' 를 외치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금동이가 누구예요?"
어둠과 시꺼먼 연기가 가득한 곳으로 들어가려는 아주머니를 말렸다.
좀 더 건강한 내가 7층 안쪽을 진입하려고 했지만,
어둠과 연기, 열기는 나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려는 아주머니를 말리며,
"안에 사람 있어요??? 안에 사람 있어요???"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여러 번을 외치며 인기척을 느끼려했으나 나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 순간 소방관이 소방호수를 들고 올라오고 있었다. 일단 나는 여기서 철수 할 수밖에 없었다.
1층으로 내려오니 이미 건물 사방은 Fire line이 쳐 저 있고 소방차와 엠브런스가 도착해 있었다. 그렇게 소리치고 다녔는데도 7층에서 도와달라는 사람 손이 보인다. 다행히 소방관이 사다리를 이용해서 유리창을 깨고 사람을 구했다.
주변 4개 건물 모두 Fire Line으로 둘러졌다.
주변엔 소방 상황실이 만들어 졌고,
나는 소방관에게 화재 목격 1차 진술을 하고, 전화번호를 남겨 두었다.
이미 카메라를 둘러멘 기자 또한 몰려들었다.
기자로 보이는 자가 나를 불러 세웠다.
"어떻게 된 상황인가요?" 기자가 묻는다.
"지금 인터뷰 할 상황은 아닌 것 같네요. 나중에 합시다."
지위가 높아 보이는 사람도 나와서 사진도 찍는다.
그걸 본 한 시민은 (나중에 안 상황이지만 4층 입주민 이었다)
"야! 이 새끼야! 너 누구야? 누군데 이 상황에서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냐?" 소리를 지른다.
"불이 나서 입주민은 애가 타는데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사진을 찍으려는 자들은 아무말 못하고 소방관, 경찰관 무리 사이로 숨어버린다
'아~~ 세상에. 너무한다. 아직도 세월호 초기 대응하는 것 같은 상황이....'
뒤늦게 연락받은 와이프가 산본으로 왔다.
우선 새까맣게 변해버린 내 마스크를 바꿔주고,
위에 걸칠수 있는 바람막이를 사와서 내게 주웠다.
건물은 봉쇄됐고, 화재진압은 어느 정도 되었다.
7시 30분정도 되어 불길이 잡혔고,
어두운 9시까지도 계속해서 건물 안 조사가 이루어졌다. 건물은 여전히 봉쇄 상태다.
전화벨이 울렸다. 경찰서였다.
늦게라도 군포경찰서로 나와서 진술서를 쓰자고 한다. 일단 알았다고 얘기한 후 건물 안 조사가 끝나길 기다렸다.
밤 9시 30분이 되서야 소방관이 입주민들에게 하는 간단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1층, 2층, 3층은 일부 전소, 7층은 완전 전소되었고.....'
간단한 브리핑이 끝난 후 소방관 입회하에 입주민 대표 1명씩 들어가서 귀중품을 꺼내올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나 또한 소방관 입회하에 1층 건물을 들어갔다. 어둠속에서 휴대폰 후레쉬 불빛을 통해서 황당하고 어이없는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1층 우리 매장 건물안쪽이 모두 타버렸다. 천장 에어컨까지 불길에 녹아 내려 버렸다. 모든 시설과 집기가 새까맣게 변해 버렸다. 일단 중요한 몇 가지 물건만 들고 나왔다. 많은 것들이 이미 재로 변해 버렸고 물에 젖어 버려서 들고 나올 것도 별로 없었다.
망연자실하며 일단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에서 1시간 30분간 추측성 없이 목격 사실 그대로 진술하고 진술서 리뷰하고 지장 찍고
조서를 마쳤다. 형사에게 전해들은 사항은 7층에서 1명의 사망자가 나왔다고 한다.
아~~ 혹시 그 사망자가 금동이??
나중에 알게 된 상황이지만 사망자 1명은 30대 남성이며, 금동이는 애타게 부르던 아주머니의 반려견인데, 금동이 또한 죽었다고 한다.
경찰 조서까지 마치니 밤 12시가 넘었다.
몸도 아파오고, 주먹도 아프고 특히 목이 아프고 잔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단 가까운 응급실로 향했다.
약간의 미열이 있어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의심으로 응급실 안으로 바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격리된 시설로 안내되어 체온이 좀 내려가는지 확인한 후에 혈액의 일산화탄소 농도 측정과 X-ray를 찍었고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는 소견을 들었다. 다만 인후 통이 계속되면 식도 내시경을 받으라는 의사의 충고를 듣고 응급실을 나왔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었다.
화재가 발생된 건물은 화재조사가 완료되기 전까지 출입이 통제되었다. Police Line과 Fire Line 둘다 건물에 둘러졌다.
화재 발생 3일 후에나 건물 안 출입은 자유로워 졌으나, 화재발생 지역인 건물 뒷 편쪽은 Police Line으로 여전히 통제했다.
국과수, 경찰관, 소방서 입회하에 실외기 몇 점을 수거해 가야지만 Police Line이 해제된다고 한다. 약 일주일 후 에어컨 실외기 4점, 환풍기 모터 3점이 증거물로 수거되었고, 건물 뒷편도 접근이 가능해졌다. 수거된 증거물은 국과수의 정밀 조사를 위한 물건이라고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은 회수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위안하면서도 만일 하나라도 나의 물건으로 인하여 화재가 발생된 상황은 아니었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고통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하지 않아도 되는 경험을 하고 말았다.
다행히 보험은 들어서 복구비용의 일부는 보상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많은 것을 잃었지만 다시 용기를 내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전화위복이 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 2020년 6월 글 정우택>
제3부 충절의향 제천 자랑
0-한 눈에 보는 금성면 우리 마을 - 금성면지 발간에 부쳐
금성면이 고향인 우리들에게 금성면지 발간은 무엇보다 반갑고 기쁜 소식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만저 금성면 지를 출판함에 힘을 실어주신 서병열 금성면장님과 금성면지 발간을 위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편집진 여러분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며 불철주야 고향 발전을 위해 헌신 봉사해 오신 금성면 공직자 여러분께 충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금성면지 발간은 우리 고장 금성면의 과거와 현재를 기술하여 우리 면의 유구한 역사를 보존함은 물론 조상의 발자취를 계승, 이를 바탕으로 후손들의 애향심을 드높이고 우리 금성면을 새로운 미래로 개척해 나가자는데 그 목적이 있다하겠습니다. 이번에 발간된 금성면지는 그런 의미에서 금성면의 유구한 역사문화와 선현들의 발자취가 집대성되어 있어 금성면민 모두가 금성면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후손들에게 소중한 유산으로 남겨줄 수 있게 되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금성 면지 편찬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신 관계자 여러분의 빛나는 업적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하며 금성면의 모든 것을 정확히 집대성한 이 값진 자료가 우리 금성면을 보다 좋은 마을로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자 견인차로 자리매김 하기를 기대합니다. 이 책에 실린 자료 중에는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많은 내용들이 사진과 함께 실려 있고. 금성면의 발전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들이 많아 금성면민 모두의 자긍심을 한층 드높이게 될 것입니다. 정말 혼자만 보기엔 너무 아까운 우리들의 이야기가 듬 북 실려 있는 금성면지 발간을 거듭 축하드리며 금성 가족 여러분의 가정에 항상 축복과 영광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0-계향산 정기 어린 금성면 월림리
나는 가끔 지인을 만날 때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제천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곤 한다. 청풍명월의 본향이요, 산자수명, 의병의 고장, 충절의향인 제천에서 태어난 것은 하늘이 준 선물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제천은 금성 면을 비롯해 청풍 수산 한수 덕산 송학 봉양 백운 등 어쩌면 그토록 하나같이 아름다운 지명이 모였는지 제천시가 내세운 자연치유도시가 결코 과장된 캣치프레이스가 아님을 실감한다. 지명에 얽힌 유래를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지명 그대로만 가지고도 병이 절로 낫는 기분이다. 더하여 금성(錦城)이란 이름은 또 어떤가. 구룡 진리 적덕 사곡 활산 중전 포전 월림 위림 양화 대장 동막, 그리고 일부지역이 청풍호로 수몰된 월굴 성내리와 제천 시로 편입된 산곡 명지 강제리 등 모든 지명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다. 이런 지명 탓인지 우리 금성이 고향인 분들은 심성 또한 고와서 어디를 가나 순박한 제천사람의 티를 벗어나지 못해 다정다감함이 넘쳐난다. 금성면은 예로부터 금수산을 주산으로 섬겨왔다. 제천 10경의 하나인 금수산은 글자그대로 비단처럼 곱고 아름다움이 빼어난 명산이다. 이처럼. 비단금(錦)자에 함축된 의미도 아름답지만 월림리(月林里) 또한 그 지명이 뜻하는 대로 달(月)과 수풀(林)이 어우러진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마을이다. 마을 등 뒤로 계향산(桂香山)이 병풍처럼 둘러 쳐졌으니 이 또한 신비스런 장관이 아닌가. 계향산은 계수나무가 우거진 산, 그 계수나무 숲속(桂林)이 바로 월림(月林)이란 이름으로 태어난 것이다.
중국에는 달과 계수나무에 대한 설화가 많이 있다고 한다. 이름난 관광지인 계림(桂林)의 계수나무에 얽힌 설화를 떠 올리지 않더라도 월림리 뒷산 계향산은 바로 그 계수나무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산이 아닌가 싶다. 영일정씨 집성촌이었던 이 마을 한학자 계산(桂山) 정원태(鄭元泰)선생이 제천에 학교를 세우면서 교명을 계림중학교(지금의 대제중학교)라 한 연유가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월림 하면 포옹(抱翁) 정 양鄭 瀁)의 묘소와 의병장 송운(松雲) 정운경(鄭雲慶) 선생의 묘소가 있는 마을로 유명하다. 포옹 정양 선생은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거성 송강(松江) 정철(鄭澈) 선생의 손자로 태백오현(잠은 강 흡, 각금당 심장세, 두곡 홍 석, 손우당 홍우정, 포옹 정 양)중의 한분으로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치욕을 분하게 여긴 나머지 경북 봉화에 은거하며 위국충절을 불태웠던 선비들이다. 송운 정운경 선생은 1895년 일본군에 의해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고 뒤이어 단발령이 반포되자 의암 유인석(柳麟錫)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유인석의 호좌의병진(湖左義兵陣)의 전군장으로 활약했던 분으로, 두 분 모두 월림 자존심의 상징적 인물로 손꼽힌다.
위국충절 선대의 유훈 자랑스러워 나는 또 1950년대 제천문학회가 태동할 무렵 이 마을 청년 고 정승민(鄭承旼) 씨가 심혈을 기울려 만들었던 계봉(桂峰)이란 문학지를 소개하지 않고 나의 어린 시절을 회상할 수 없다. 나도 이 문학지에 글을 실었고 이 마을 선배 청년들이 멋지게 선 보인 ‘복남이의 서름’이란 신파극에서 내가 그 복남이 역을 맡아 화제가 되었던 일이 엊그제 같다. 자랑 같아서 쑥스럽지만 동네 한문서당에서 千字文과 童蒙先習을 글자 한자 틀리지 않게 줄줄 외우고 앞서 말한 계산(桂山)선생의 문하에서 통감(通鑑)을 읽었던 일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값진 추억이다.. 이런 한문서당의 학구적 분위기 탓이었는지 모르나 완고하기만 했던 이 마을에 대학생이 여러 명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여기엔 논 밭 몇 마지기를 물려주는 것 보다 가르치는 것이 백번 낫다며 고생고생 하신 부모님의 자식 사랑과 남다른 교육열이 정말 존경스럽다. 어린 시절 고향을 생각 하면서 6.25 한국전쟁을 겪은 수난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도 우리시대의 아픔이다. 1950년 6월 북한 공산군의 불법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되고 아군이 낙동강 까지 후퇴했을 때 우리 마을 월림리도 공산치하에 있었다. 1.4후퇴 때는 피난길에 올랐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집에가 편안히 죽자 시며 발길을 되돌리신 아버님을 따라 집에 와 보니 제천서 피난 온 친척들이 머물고 있어 피난처를 놔두고 공연히 피난을 갔구나 하는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해 여름 敵치하에선 인민군가를 강제로 배워야 했고 농사지은 낱알을 세고 애써지은 농산물을 몽땅 바치라는 통에 어안이 벙벙해 하시던 마을 어른들이 부역이다 뭐다 해서 시달리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다시 인민군이 후퇴를 하면서 여기 저기 버려진 발싸개며 수류탄, 이름 모를 탄피들이 논밭에 뒹굴고 있을 때 초등학교 동창 한명은 버려진 수류탄을 분해하다 변을 당해 팔 한쪽을 잃기 까지 했으니 생각만 해도 가슴 아픈 6.25의 상처라 아니할 수 없다. 누구나 고향을 그리며 향수에 젖곤 하지만 내 고향 금성면 월림리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 고향을 위해 과연 무엇을 했는지, 말로만 고향 사랑이었지 80평생 무엇하나 보람 있는 일을 하지 못한 것이 정말 부끄러울 뿐이다.<2018년 발행 금성면지 글 정운종>
0- 의암 유인석선생과 안중근 의사 - 한말 독립운동사의 재조명
의암 유인석 선생 안중근 의사 의암 유인석은 한말 의병운동의 대표적 인물로 의병 운동 전기에 있어서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던 제천의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처신 범절이 단정하고 기개가 굳고 넓었으며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로 명망이 높았다. 유인석은 헌종 8년(1842) 1월 27일 춘천에서 출생하여 집안 아저씨가 되는 성재 유중교(조선조 말 대유학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889년 8월 성재와 같이 제천 봉양면 공전리 장담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14세에 이미 도학 문장이 특출하여 세인의 추앙을 받았다. 일찍이 병자 수호조약(1876)을 반대하는데 앞장섰고 화서 이항로,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등 당대의 명망 있는 유학자들을 따라 배웠으며 유중교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성재 문하의 많은 동학들이 그를 성재 대신 스승으로 모셨을 만큼 학문과 덕행이 타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일본군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1895)이 일어나자 문하의 유생들을 강학처인 제천 장담에 모아 놓고 “선비로서 취할 길은 첫째 의병을 일으켜 원수들을 몰아내는 길, 둘째 고국을 떠나 해외로 나가 유학자로서의 대의를 지키는 길, 셋째 자결하여 깨끗이 목숨을 바치는 길 등 세 가지의 길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각기 알아서 갈 길을 가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자신은 마침 어머니의 상중이므로 유학자로서의 대의를 지키는 길을 취하여 멀리 해외로 나가 학문을 닦으며 여생을 보낼 예정으로 주용규 박정수 등 여러 사람과 함께 행장을 수습하였으나 그의 마음은 차마 고국을 떠날 수 없다고 생각해 진로를 바꿔 의병운동에 뛰어 들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친일 내각이 조직되자 국정이 날로 어지러워짐을 통분한 나머지 1895년 5월 15일 각도의 선비들을 소집한 후 의병창의를 제안, 의병대장에 추대되고 전국적으로 의병진을 편성하여 일군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전세 불리로 만주 회인현으로 망명, 고종의 유지로 한때 귀국했다가 1898년에 다시 연해주를 거쳐 1909년 5월 블라디보스톡에서 10도의군도총재에 추대되어 두만강 연안으로 진격하는 등 맹렬하게 전투를 벌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연해주 한국 의병 창의대장으로 활약한 金斗星이 유인석의 가명이며 그 휘하 참모장이 바로 안중근 의사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돼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최근 출판된 ‘柳麟錫과 安重根의 독립운동’(전 세명대 대학원장 정우택 박사지음)에 따르면 일본 伊藤博文을 저격하여 살해한 安重根 의사는 교육구국의 웅지를 국내에서 펴다가 큰 이상을 가지고 만주로 건너가 연해주 한국의병의 모체인 同義會의 창설에 가담했는데. 1908년 5월에 창립된 동의회는 그 해 6월 하순경 연해주의병 창의의 핵심이고 연해주 의병 창의대장 김두성의 실체는 바로 강원도 출신 의병장 유인석이라고 주장했다. 1908년 6월 하순경 김두성과 유인석이 같은 연해주에서 창의한 것을 규명하여 同一人임을 확인했고 유인석과 안중근 의사가 독립운동을 함께 한 사실을 밝혀 낸 것이다. 독립운동을 함께한 사실만이 아니라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를 도운 김두성이 바로 의암 유인석이라는 사실을 여러 자료를 통해 고증하고 있어 주목된다. 창의대장 유인석 휘하의 참모중장 안중근의 활약 중에는 1908년 6월 말 경 많은 전투에서 승패를 거듭하며 7월 19일 함경북도 회령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연해주의병의 재건을 위해 모금ㆍ유세 등의 방법으로 선두에서 활약한 사실도 들어났다. 중국인이 쓴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자료에도 안중근의 독립운동은 유인석의 여향을 많이 받았음이 들어난다. 안중근 하얼빈의거 배후에 유인석괴 이진용(유인석의 문인으로 유인석을 따라 연해주에서 함께 의병활동을 함)의 지원 및 찬조가 있었다는 자료가 그것이다. 이진용은 안중근이 伊藤博文을 저격할 때 두 번에 걸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첫 번째 도운일은 현금 100원을 지원한 일이고 두 번째는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저격할 때 사용한 권총이다. 이 권총은 본디 유인석의 문인 이진용의 권총이었다. 유인석도 그의 문집에서 조심스럽게 안중근을 간접 지원했음을 밝히고 있다. 1971년 유인석의 문인들이 스승의 유고를 모아 편집한 기록에 보면 유인석은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에 관해 자신의 연관관계를 기술한 기록이 나온다. 유인석은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소식을 듣고 ‘만고의협의 우두머리’라고 크게 칭송하고 안중근 구호 운동에 자금을 내어 동참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등박문은 한국인에게는 물론 침략의 원흉이었지만 중국인에게도 천추의 원수로 부각되어 있다. 하얼빈 의거 후 많은 중국의 명사들이 여러 방법으로 안중근을 찬양한 근거와 중국의 유수한 신문들이 보도한 내용이 그 같은 중국인의 생각을 대변한다. 결론적으로 연해주 의병총대장 김두성은 유인석의 가명이고 안중근의 연해주의병 활동에서 지휘자는 유인석이며 안중근의 하얼빈의거는 유인석이 지휘한 근거가 명백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유인석과 안중근이 그의 자서전과 여순 옥중에서 진술한 김두성은 동일인이며 안중근은 결국 유인석의 지휘 하에 독립운동을 했고 하얼빈 의거에도 유인석이 깊숙이 관여했다는 점에 무게가 실린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의거 후 일본경찰 신문에서 안중근은 그가 수행한 의거의 배후인물로 총대장 김두성을 지목했다. 김두성이 유인석의 가명으로서의 창의대장이라면 안중근은 당연히 유인석의 휘하 참모중장이 분명해 진다. 안중근이 연해주 의병 창의대장 유인석의 지휘를 받고 의병 활동을 한 것과 연속하여 하얼빈의거에서도 또한 유인석의 가명인 김두성의 지휘를 받고 특파독립대장으로 이 쾌거를 수행했음이 입증된 것이다. 그렇다면 안중근은 연해주 의병 활동과 하얼빈의거 모두에서 창의대장 유인석의 지휘 아래 독립운동을 한 것이 된다. 안중근의 하얼빈의거는 그가 옥중에서 시종일관 진술한 사실과 같이 총대장 김두성의 지휘를 받는 대장 직속 특파독립대장의 직책으로 수행한 의거였다. 그렇다면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김두성의 지휘를 받은 의병활동의 연속선상에서의 독립운동임이 분명해진다. 이처럼 안중근 의사와 김두성(유인석의 가명) 두 사람의 관계는 한국독립운동사를 새롭게 써야할 중차대한 과제를 던져준다. 따라서 제천 의병사(義兵史)를 연구함에 있어서도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할 것이며 의병대장 유인석의 행적을 통해 안중근의 하얼빈의거를 재조명 하는 한편으로 지금까지 밝혀진 한국독립운동사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푸른제천 2017. 7월호>
0-8.15 광복과 제천의병 1945년 8·15광복은 일제침략에 항거하여 한민족의 독립을 수호·쟁취하려는 거족적인 항일독립운동이 거둔 결과였다. 8.15 광복 72주년의 오늘 한말 제천 의병의 성격과 활동양상을 돌이켜 본다. 1895년(고종 32) 8월 20일에 있었던 일본군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일명 을미사변)과 그해 연말에 발표된 친일 내각의 단발령은 국민적 분노를 사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제천의 장담서사(長潭書社 : 개항기 제천의 성리학자였던 성재 유중교(柳重敎)가 봉양읍 공전리의 장담마을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에서는 의암 류인석을 중심으로 많은 선비들이 모여 들었다. 제천 군수가 단발을 재촉하던 1896년(고종 33) 1월 중순, 지평의 포군들도 이곳으로 달려왔다. 이때 이춘영(李春永)과 김백선(金伯善)이 이끄는 의병 부대와 장담에서 강학하던 화서학파 젊은 선비들이 연합하여 이필희(李弼熙)를 대장으로 제천의진을 결성했다. 그 후 지평 출신의 포군들의 이탈하자 제천의진(堤川義陣)의 유인석을 대장으로 하여 새로이 의병부대를 구성한 것이 바로 ‘호좌의진’(湖左義陣)이다. 산발적으로 움직이든 의병이 조직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편성도 류인석 의병대장을 수장으로 중군장 이춘영, 전군장 안승우, 후군장 신지수(申芝秀), 선봉장 김백선(金百先), 좌군장 원규상(元奎常), 우군장 안성해(安成海), 참모 박주순(朴胄淳), 사객(司客) 장충식(張忠植), 종사 이조승(李肇承)·홍선표(洪善杓)·이기진(李起振)·정화용(鄭華鎔)을 각 각 배치하니 바로 한말 최초 의병부대의 출현이다. 제천 의병은 이 호좌의진의 기치 아래 하나로 뭉쳐서 싸우게 된다. 대규모 연합의진의 진용을 갖춘 호좌의진은 수안보와 가흥의 일제 병참 기지를 수차례 공격하며 명성을 떨친 기록이 전해 온다. 우선 일제에 대항하기를 머뭇거리는 의성 군수와 예천 군수의 목을 베고, 천안 군수까지도 죄를 물어 처단 하자 친일 관료들에게는 이 호좌의진이 공포의 대상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호좌의진의 의병들은 의기충천하여 충주관찰부를 점령하여 명성을 떨쳤는가 하면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들도 이러한 호좌의진의 명성을 듣고 제천으로 모여 들었다. 호좌의진의 맹장이었던 제천의 이강년(李康秊)은 충청도와 강원도, 경상도, 경기도 일대의 산악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하며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호좌의진은 이렇듯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던 대규모 연합 의병의 모습을 갖추고 13도 창의군(十三道 倡義軍)의 서울 진공 작전 때는 경기도 양주까지 진출하여 서울 입성을 노리기까지 했다. 을미의병당시 용맹을 떨쳤던 원용팔(元容八)과 정운경(鄭雲慶)도 호좌의진의 맹장이었다. 그러나 원용팔과 정운경이 일본군에 체포되고 청풍 금수산에서 이강년이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체포되면서 호좌의진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강년의 뒤를 이어 김상태(金尙台)가 잔여 병력을 이끌고 끝까지 항전했지만 1911년 9월 그도 일군에 붙잡혀 옥사하고 말았다. 이 때 제천은 일본군의 만행으로 전 시내가 초토화 됐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메켄지(F·A . Mckenzie)는 1907년 ‘1개월 전 까지만 해도 유복했던 시가와 촌락이 완전히 잿더미로 변했다. 나는 일찍이 이 같이 처절한 파괴 상을 보지 못했다.’ 고 당시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일제에 피해를 많이 입은 곳이 제천이었음을 말해준다. * 류인석의 ‘처변삼사’(處變三事),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 의암 류인석은 제천의 장담에서 의병의 핵심적 인물들을 향해 행동강령으로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시했다. 1.거의소청(擧義掃淸) :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하는 일, 2. 거지수구(去之守舊) : 국외로 망명해서 대의를 지키는 일, 3. 자정치명(自靖治命): 의리를 간직한 채 목숨 바쳐 싸우는 일이 그것이다. 이러한 행동강령에 따라 이필희 안승우는 거의(擧義)를 주장했고 양두환 이하 몇 사람은 자정(自靖)을 결심했다. 류인석은 이때 거지수구(去之守舊)를 택했다. 그 까닭은 당시 그의 양어머니인 덕수 이씨 부인이 세상을 떠나 상중이라 처신하는데 일정한 제약이 따른 것으로 보인다. 류인석은 이 같은 행동 강령에 따라 의병을 진두지휘했다. “아아 ! 우리 8역(域)의 동포들이어! 나라가 모두 죽게 된 이 판국에 5백년 조정 이 나라의 백성이 아닌 이가 없는데 어찌하여 한 두 사람의 의사(義士)도 없는 것인가. 슬프고 한탄스럽구나.(중략) 참으로 위급 존망의 시기이니 각자가 거적자리에서 자고 창을 배게 삼으며 또한 모두 끓는 물에도 나가고 불에라도 뛰어들어서 이 나라의 재조(再造)를 기약하고 천일이 다시 밝아짐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후에 혹시라도 영을 어기고 도망가거나 태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곧 역적의 무리와 같은 것인즉 단연 군사를 옮겨 먼저 토벌할 것이니 각자 명심하여 후회하는 일 없게 하고 적은 성의나마 다하여 함께 대의(大義)를 펴게 할 지어다” (류인석의 ‘檄告八道列邑’’중에서) 류인석이 전국 의병들에게 보낸 ‘격고팔도열읍’(檄告 八道列邑)과 ‘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은 그의 우국충정을 극명하게 대변해 준다. 1896년 4월 13일 류인석 의병부대는 제천전투에서 크게 패하는 불운에 봉착한다. 제천 남산성이 함락당하고 안승우와 그의 제자 홍사구가 전사하였다. 류인석은 제천 근방의 지곡에 머물면서 다시 일어날 계획을 세웠다. 이 때 전군장 정운경, 좌군장 이희두, 우군 종군 윤영훈, 별영장 이인영, 참모장 한동직 등이 류인석을 따랐다. 제천을 잃은 유인석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인근 지역을 전전하다가 재기를 위해 서행(西行) 길에 올랐지만, 결국 압록강을 건너가서는 의진을 해산하고 만다. 안으로 동일한 부대 이름을 내걸고 강한 결집력을 과시한 의병조직 호좌의진, 이 호좌의진을 진두지휘해 전과를 올리고 국외에 항일 운동의 기지를 건설해 항일 독립구국운동을 선도한 류인석, 8.15 광복 72년의 오늘 그 거룩한 행적에 머리가 숙여진다. <푸른제천 2017년 8월호>
0- 제천의병의 특징과 역사적 평가
한국 근대사에서 볼 때 우리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의 잔악한 식민정책으로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했다. 이에 우리 선열들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분연히 궐기했다. 그 첫 단계가 의병이요 다음은 독립군 광복군으로 이어졌다. 조선말기 의병 활동은 1895년부터 약 10년간 집중적으로 또는 산발적으로 전국에서 펼쳐졌다. 의병단체는 전국에 걸쳐 약 600여개 이르고 병력도 6000명 정도에 이르렀다. 의병의 조직화, 적재적소 인물배치 조선말기 제천에서 궐기한 제천의병도 일제의 천인공노할 침략 마수에 항거한 순수 민간항쟁의 구국운동이었다. 앞에서(푸른제천 2017년 8월호) 한말 제천의병의 모습과 활동양상을 살펴보았지만 제천의병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과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전국최초로 조직화된 면모를 갖춘 점이다. 영월 원주 등에 흩어져있던 의병들이 제천 장담에 모여들어 의암 류인석을 중심으로 호좌의진(湖左義陣)을 조직한 것이 그것이다. 류인석은 의병대장에 오르자마자 중군장, 전군장 후군장 선봉장 좌군장 우군장 참모 사객(司客) 종사(從事)등으로 전열을 정비, 적재적소에 인물을 배치해 지휘체계를 일사불란하게 구축했다. 이처럼 조직적으로 의병을 편성한 것은 제천의병이 최초였다. 둘째, 어느 누구의 강요에 의해 모인 의병조직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무장 항쟁한 군사집단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당시 의병에 참여한 인물들은 유명한 성리학자와 유생들을 비롯해 전 현직 관료, 농민, 보부상, 해산군인, 머슴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다. 이들 모두가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계급과 신분을 초월하여 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매우 크다 하겠다. 셋째로 높이 평가해야 할 점은 제천의병이 보여준 생즉사사즉생(生卽死死卽生)의 투혼이다. 제천의병의 이 같은 결사항전의 투지는 1895년 음력 11월 28일 이춘영과 안승우가 김백선의 포병을 주축으로 제천을 공격, 군수 김익진을 몰아낸 데서 절정에 달했다. 류인석 제천의병은 여세를 몰아 일거에 충주성을 함락시키고 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하니 오직 충성심 하나로 뭉쳐 싸운 제천 의병들의 위대한 승전보 그것이었다. 이 때 제천의병의 활동무대는 제천·청풍· 단양 ·영춘의 사군(四郡) 지역은 물론이고 영월 원주 등 강원도 영서 지역, 그리고 영남 북부지역을 포함하는 광범한 것이었다. 한때는 경기도 양주까지 진출하여 서울입성을 노리기도 했다.
생즉사사즉생(生卽死死卽生)의 투혼 ‘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총을 보았다. 여섯 명이 가지고 있는 총 중에 다섯 개가 제각기 다른 종류였으며, 그중 하나도 성한 것이 없었다. 그들은 전혀 희망 없는 전쟁에서 이미 죽음이 확실해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동포들에게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었다.‘ 제천을 불태워 폐허로 만든 일본의 만행을 취재 보도하였던 영국기자 맥켄지가 자신의 눈에 비친 제천의병을 묘사한 대목이다. 메켄지 기자가 본대로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분노해 궐기한 제천의병들은 이처럼 불타는 애국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결사항전의 의지가 없었다면 충주성 함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천의병은 수안보전투나 남산전투에서 보듯이 결사항전의 기개가 하늘에 닿았다. 무기래야 화승총이 고작이었고 한 달이 넘도록 관군과 대치하는 동안 갑작스런 비바람으로 화승총이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이에 구애받지 않고 생즉사사즉생(生卽死死卽生)의 투혼을 불살랐으니 정말 장하다 아니할 수 없다. 남산성에서 전투를 독려하던 중군장 안승우는 두루마기를 입고 군사를 진두지휘하다 장렬히 전사했고 홍사구도 이 전투에서 피신하지 않고 결연히 의를 부르짖다가 죽음을 당했다. 이때 이강년은 병력을 정비하려고 다시 제천 쪽으로 이동하였다가 작성산전투에서 부상으로 체포되어 교수형을 받고 순국했다. 그러나 이강년의 순국은 제천의병의 끝이 아니었다. 이강년과 연대하며 항일활동을 해나가던 수많은 의병부대가 있었으며, 이강년의 동지였던 김상태도 제천의병의 서슬 푸른 깃발을 나라가 망한 이후까지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저항 정신은 그들이 순국한 이후에도 연면히 이어 갔다.
제천 의병정신 조국광복운동으로 승화 넷째, 제천의병의 줄기찬 항일구국투쟁이 독립군운동·광복군운동으로 이어진 점이다. 한말 제천의병들의 눈부신 활약은 전국에 산재한 의병들의 사기를 진작시켰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대한광복회, 의열단, 애국단, 광복군에 이르기 까지 항일독립운동의 모체가 된 것은 제천 의병이 갖는 역사적 의의와도 맥을 같이 한다. 제천 의병은 따라서 일본의 식민지정책과 제국주의에 항거한 민중저항운동의 기본 정신이 되었고 민족의 정기를 높인 계기가 되었다. 그 뒤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인해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지하로 잠적하거나 해외로 망명 독립군으로 편성되어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의거도 류인석이 배후라면 제천 의병은 바로 항일독립운동의 모체였다는 것을 극명하게 대변해준다. 제천의병이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푸른제천 2017년 9월호)
0-제천의병정신의 계승과 선양
제천은 구한말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목숨을 걸고 분연히 일어난 의병 봉기의 진원지이며 해외 항일운동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의병 도시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895년 을미의병 당시 류인석(柳麟錫) 장군이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에 팔도 유림을 모아 항일 무장투쟁을 벌이자 전국의 의병들이 호좌의진(湖左義陣)의 기치아래 구국의 휏 불을 높이드니 제천이 바로 한말 의병 봉기의 진원지이자 해외 항일운동의 전초기지가 된 연유다. 제천시는 그동안 제천의병의 숭고한 위국헌신의 나라사랑 정신을 현재와 미래의 범국민적 애국애족 정신으로 승화시키고자 많은 사업을 기울여 왔다. 1995년 처음 거행한 의병제가 2017년 올해로 22회째가 되지만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이 다투어 나름대로 의병제를 열고 있는 것도 제천의병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아 틀림이 없다. 제천이 다른 지자체 보다 먼저 의병정신을 선양하고자한 일은 의병제만이 아니라 을미의병 창의 120주년을 맞이한 2015년에 전국 39개 시군이 참여한 ‘대한민국의병도시협의회’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점을 빼 놓을 수 없다. 제천이 주도한 제1회 전국의병도시협의회의 독도방문을 비롯해 의병 도시간의 자매결연, 자전거 순례 등의 사업과 관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제천 의병학교 운영도 두드러진 제천의병정신 선양사업으로 손꼽힌다. 자전거 순례사업은 의병도시 간 협력, 소통, 화합을 통해 의병정신을 전국적으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의병도시 시민간의 교류 협력 확대라는 차원에서 사회적 대 통합의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는 사업이라 하겠다.
의병정신은 곧 국가안보의 정신적 자산 제천시는 이밖에도 의병도서관을 의병정신의 요람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동영상실, 상설전시실, 의병열람실 마련은 물론이고 각종 강의 및 세미나 등을 통해 의병정신 함양에 기여토록 하고 있으며 의병전투 격전지 순방, 의병 사료 토론회, 의병 관련 독후감 공모 등을 통해 학생 및 일반 시민들에게 의병정신을 체득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한편 제천의병의 발상지와 항일구국 투쟁의 현장을 제천시 관내 주요 관광지 방문과 연계, 관광 코스 화 하여 관광객 유치 및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로 활용하도록 하고 있다. 제천의병도서관은 제천시립도서관, 제천여성도서관, 봉양도서관, 기적의도서관 등 지역의 여러 도서관과 연계하여 운영함으로써 제천 시민의 정신적ㆍ 문화적 중추로서의 역할을 다해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제천시가 몇 년 전 전개한 일본 약탈 문화재 반환 운동도 제천의병의 의미를 되살리고, 그 역사성과 사상적 토대를 새롭게 열어 가는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 받았다. 돌이켜 보면 일본이 임진왜란 이후부터 2차 대전에서 패망하기까지 한반도 곳곳에서 최소한 100만점이상의 문화재를 약탈해갔으나 아직도 반환은 요원하기만 한 것이 현실이다. 과거 임진왜란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약탈자들과 관변 고고학자들이 조상의의 무덤을 파헤쳐 금 세공품과 옥 장식, 청자, 돌조각품, 탑등 유물을 닥치는 대로 약탈해간 것은 물론, 사찰들에서 값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귀한 사리함들을, 도서관에서는 수만 점의 서책들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실어 나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천시가 제천의병정신을 약탈문화재 반환 운동으로 승화 발전시키려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제천의병정신의 범국민적 확산 제천시민 모두가 제천의병의 후손이라는 자긍심과 명예를 소중히 여긴다면 제천의병의 소중한 기록들을 부단히 발굴하는 작업도 게을리 할 수 없다. 제천의병들이 주검을 무릅쓰고 일제와 싸운 거룩한 역사의 현장을 범국민적 안보교육장으로 새롭게 단장하는 일도 전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와 아울러 제천에서 희생된 수많은 의병들의 희생정신을 선양하기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개발을 비롯하여 자랑스런 의병 후손들을 위한 위안의 밤을 갖는 것도 의병정신을 교육적 사회적으로 선양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구한말 호좌의병진의 의병활동과 정미의병활동의 중심지였던 제천에는 의병 관련 사적지가 많이 남아있다. 제천향교와 아사봉 뿐만 아니라 의병전시관, 의병골- 의병 7인 묘역, 영호정(제천의병장 집결지)등 많은 의병 관련 사적지가 널리 홍보되고 학생들이 자주 찾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도 제천의병전신을 교육적으로 선양하는 길이 될 것이다. 의병 정신의 올바른 인식과 계승은 시대적 요청이며 국가적 안보관이 절실한 시기에서 볼 때 시대와 지역을 뛰어 넘은 의병의 희생, 호국 정신은 그 자체가 국가 안보의 정신적 자산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오는 10월 19일부터 사흘간 의병광장, 자양영단, 순국선열묘역 등 제천시 일원에서는 제천의병 창의 122주년 제천의병제가 열린다. 고유제, 혼불채화 봉송, 한시백일장, 기념식, 제천의병 학술세미나, 의병사료 전시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될 제천의병제에 제천 시민들은 물론 전국의 많은 국민들이 제천의병제의 의미를 이해 하고 체험 할 수 있도록 제천인 모두가 홍보대사라는 인식에서 참여하고 성원할 것이 바라진다. <푸른제천 2017.10월호>
0-충절의향(忠節義鄕)의 표상 제천학맥(學脈)
제천은 오래 전 부터 ‘의향(義鄕)’ 이라 불려왔다. 동학농민운동과 의병항쟁의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만이 아니라 인물사적으로 볼 때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거유(巨儒)가 제천에서 났고 그 제자들의 충절이 또한 제천을 중심으로 구현됐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 볼 때도 의림지 본래의 이름은 ‘임지(林池)’였으나 고려 성종 대 제천이 ‘의원현(義原縣)’ 또는 ‘의천(義川)’이라 불렸던 것을 보면 제천과 ‘義’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제천의 학맥을 살펴보면 더욱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제천의 학맥을 말할 때 학자들은 주로 조선시대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중심으로 이어져 왔다고 보고 있다. 기호학파의 성립은 영남학파와 관련이 있지만 영남학파가 퇴계 이 황과 조식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형성된 것에 비해, 기호학파는 서인(西人)들이 중심이 되어 결집돼 왔다고 볼 수 있다. 기호학파를 이끈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수제자인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는 제천 청풍에 은거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조선 성종조의 문신이며 성리학의 대가였던 조위를 배향한 송계서원, 김식(金湜), 김육(金堉) 등을 배향한 봉강서원(鳳岡書院), 권상하를 배향한 사액서원인 황강서원(黃江書院), 불천위 정익하(鄭益河), 남당서원(南塘書院)에 배향한 강유(姜裕), 임호사(林湖祠)의 박수검(朴守儉)등 모두가 제천의 위상을 드높인 학자들이다. 조선 숙종·영조 때 시조와 가사 작품을 남긴 문인 옥소 권 섭,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김순명,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임응용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도 제천의 인물이다. 병자호란 당시 굴욕적인 패전과 불의의 정국에 항거하며 봉화지방에 낙향, 오직 국가의 존망과 장래를 걱정하는 우국충정의 일념으로 은둔의 한 세상을 살다간 태백오현 중 한사람인 포옹 정 양(鄭 瀁)은 송강 정철의 손자로 금성면 월림리에 묘소가 있다.
후진 양성에 힘쓴 성제 유중교(柳重敎) 제천의 학맥은 조선후기 성리학자인 성제 유중교(柳重敎)에 의해 더욱 뿌리를 굳혔다. 그는 조선 고종 때의 학자로 1821년 (순조21)에 태어나 화서 이항로(李恒老)와 중암 김평묵(金平默)에게 학문을 전수받았다. 1881년 (고종18년)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여론이 일어나자 김평묵과 함께 척양척왜(斥洋斥倭)와 구법보수(舊法保守)를 열렬히 주장했다. 1889년 춘천에서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로 이사하여 자양서사(자양영당의 전신)를 세워 후진 양성에 힘썼다. 자양영당은 바로 유중교가 후진을 양성했던 곳으로 1895년(고종 32)에는 의병장 유인석(柳麟錫)이 팔도 유림들을 모아 비밀회의를 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에는 주자, 송시열, 이항로, 유중교, 유인석, 이소응의 영정을 모시고 있어 조선조 제천의 학맥을 이해할 수 있는 산 교육장이 되고 있다. 화서 이항로(李恒老, 1792∼1868)는 화서학파의 거두로 한말 제천 학맥의 근간이 되었다. 일찍부터 주자학을 집중 탐구하고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논리를 체득한 화서는 우암 송시열을 주자(朱子) 이후의 정통으로 삼았다. 화서 이항로를 따르는 학자들은 위정척사를 주창하며 충효·도학·절의·문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제자를 배출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 상해임시정부, 광복군을 이끌었다.
위정척사(衛正斥邪)를 항일의병운동으로 계승한 유인석(柳麟錫) 제천의병 창의대장 유인석(柳麟錫, 1842∼1915)도 14세 때 당숙 성제 유중교를 따라 이항로 문하에 들어갔다. 유인석은 유중교를 최후까지 수종하며 유중교 문하의 탄탄한 인적 기반을 토대로 1895년 말 이래 20여 년간 장기 지속적인 의병 항전을 수행했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유인석은 1908년 망명길에 올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이범윤 등과 항일세력을 규합한다. 그 결과 1910년 6월 연해주 의병세력의 통합체인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하고 도총재에 추대됐다. 1915년 의암 유인석은 비록 독립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낯선 이국땅에서 순국했지만 연해주에서 안중근 의사와 함께 펼친 항일구국투쟁은 이후 대한광복군의 성립과 독립무장투쟁의 발판이 됐다. 한말의병의 선봉장이었던 이강년 정운경 안승우 홍사구 등도 의암 유인석과 함께 제천의 충절이다.
제천학맥의 숭고한 정신을 제천발전의 원동력으로 끝으로 ‘인사동 신령님’으로 통했던 한학자 계산 정원태(포옹 정 양의 종손), 제천시 청풍면 출신으로 동아, 조선, 한국 등 중요 신문사에서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역임하고 사학자로서 한국사의 정립에 크게 이바지한 천관우도 제천 학맥을 이어준 인물로 손색이 없다. 그는 1980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제천시와 제원군이 분리될 당시‘제천시민헌장’을 지어 제천시민이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해 준 제천의 인물로 ‘서서 죽을지언정 무릎 끓고 살지 않겠다.’ 고 스스럼없이 말했던 그의 올곧은 선비정신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8.15 광복해방 이후 학제가 개편되고 국.공립 사립대학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면서 제천출신 석학들이 기라성처럼 배출됐다. 이들이 뚜렷한 학파를 형성하지는 않았지만 역사적으로 제천을 빛낸 인물들의 충절의향 정신만은 잊지 않고 있으리라 믿는다. 어떻든 의향 제천정신의 표상인 제천 학맥의 거룩하고 숭고한 행적은 제천인 모두의 자긍심을 드높이는 정신적 자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제천 학맥을 통해 표출된 충절과 의로운 기상을 제천 발전의 원동력으로 승화시키는 일은 분명 제천인 모두의 몫이요 책무다. <푸른제천 2017. 11월호>
0- 아! 그 이름도 거룩한 '태백오현의 생애와 사상'
제3회 봉화 역사인물 학술발표회의가 지난 9월 27일 오후2시 경북 봉화문화원에서 태백오현 후손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됐다. 봉화 역사인물 학술발표회의는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과거와의 소통을 통해 달라진 우리시대에 과거의 어른들을 조명하고 이를 통해 우리의 문화를 발전시키자는 취지에서 개최돼왔으며 올해는 그 세 번째로 ’태백오현의 생애와 사상‘을 주제로 학자들의 강연이 있었따. ‘詩文을 통해본 각금당 심장세의 현실인식“(동양대 강구울 교수), 두곡 홍우정의 삶과 출처의식’(한국국학 진흥원 권진호 연구부장), ‘포옹 정양의 생애와 그 의의’(숭실대 김태완 박사), ‘잠은 강흡의 저술에 비친 그의 삶과 교류의 특징(한국국학진흥원 최은주 책임연구위원), ’손우당 홍석의 생애와 예학사상‘(한국국학진흥원 남재주)을 주제로 각각 15분 동안의 강연과 질의응답 순으로 진행됐다. 태백오현은 병자호란때 삼전도의 치욕에 비분강개한 나머지 일국의 신하가 어찌 청을 섬길 수 있느냐 하는 대명 절의와 올곧은 선비의 정신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태백산 아래 봉화군 일대(춘양.법전.봉성.명호면 등)에서 각각 은거하며 학문과 덕을 쌓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우려 대대로 추앙받던 잠은(潛隱) 강흡(姜恰), 각금당(覺今堂) 심장세(沈長世) 포옹(抱翁) 정양(鄭瀁) 손우당(遜愚堂) 홍석(洪錫),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으로, 잠은은 법전의 버쟁이에 은거했으며 각금당은 모래골에, 포옹은 춘양 도심촌에, 손우당은 춘양 소도리에, 두곡은 봉성 뒤디물에 은거하였는데 그들이 은거 하던 곳의 거리는 서로 10리에서 30리 안 밖이었다. 시간이 흘러 정조 14년에 왕명으로 발간된 ‘존주록배신열전’은 이들 다섯 선비를 일컬어 태백오현(太白五賢)이라 칭했다. 태백오현은 이렇듯 굴욕적인 패전과 불의의 정국에 항거하며 선비의 곧은 은둔의 성향에 따라 유향(儒鄕)이라 하는 봉화지방에 낙향, 오직 국가의 존망과 장래를 걱정하는 우국충정의 일념으로 한 세상 살다간 거룩한 분들이다. 이날 발표를 맡은 학자들은 한결같이 태백오현의 생애를 돌이켜 보며 태백오현의 올곧은 선비정신과 대명절의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질의응답 시간에는 2, 3명 정도가 태백오현의 삶과 사상에 대해 궁금한 점을 질문 했고 특히 제천 포옹 정양 문중에서 참석한 정운종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포옹 10대손)은 "‘충효의 얼과 옛 전통이 살아 있는 고장 봉화에서 개최된 이번 학술발표회의가 태백오현의 생애와 사상을 주제로 한 것은 여러모로 큰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번 학술회의를 통해 훌륭한 태백오현을 조상으로 둔 자손 된 입장에서 감사의 마음과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하고 "이번 학술발표회의를 계기로 옛 선조들이 매년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던 전통을 살리면서 테백오현의 진충일념의 우국충정과 대명절의의 정신을 귀감삼고 이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봉화군이 매년 ’태백오현의 날‘을 정해 이날을 기념한다면 봉화군의 역사와 인물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봉화문화원을 비롯한 봉화군당국에 이를 정중히 건의해 참석자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봉화문화원이 개최하는 역사인물 학술발표회의는 봉화지역의 역사와 선현을 재조명하여 봉화군의 전통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학술발표회의를 끝까지 관심 깊게 지켜본 많은 참석자들은 이번 태백오현 관련 학술발표회의가 1회성 행사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논객, 아르바이트은행 부장, 명(名)사무총장, 산악인, 영화애호가, 사회주의자…. 경향사우회 회원이라면 두세 번째 키워드쯤에서 정운종 원로회우를 떠올려야 정상이다. 50여 년 언론외길을 걸었으니 논객이란 타이틀은 당연하다치더라도 대학생아르바이트은행 부장이나 명사무총장 같은 직함은 정 선배가 아니면 붙일 수 없다. 더구나 대한언론인회 상임이사 겸 사무총장은 여러분 계셨어도 명(名)자를 붙일 수 있는 분은 정 선배가 유일하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본다. 정 선배가 팔순을 맞아 낸 회고록 《夕陽(석양)에 노을진 旅程(여정)》에는 언론인으로 살아온 선배의 인생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부제도 〈나의 삶 言論행로〉이다. 1998년 낸 《논설위원 30년》 이후 인터넷신문 〈뉴스앤 피플〉과 몇몇 정기간행물에 기고한 글에서 골라 실었다. 정 선배는 성균관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신아일보 조사부기자로 출발해 곧장 논설위원으로 발탁되어 경향신문과의 통합 후에도 논설위원으로 근속했다. 정 선배는 논설위원 데뷔작이 ‘식모도 가족의 한사람으로’라고 밝혔다. 대부분의 언론인이 처음 쓴 사설이나 칼럼을 기억하지 못하는 점을 고려하면 정 선배의 세심함과 성실함, 기록성까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역 은퇴후에도 KBS 사회교육방송 비상임 전문위원, 국방일보 객원 논설위원, 한국청소년 금연운동연합 상임이사 등을 역임했다. 지금은 자신이 설립한 시사문제연구소 대표로 시사평론을 집필하면서 (사)재외동포신문편집인협회 감사, 재외동포저널 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회고록은 정 선배의 고향이 충북 제천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자나 깨나 松江(송강) 자손’임을 밝히는데서 시작한다. 이어 선배의 오늘을 형성케한 교육현장인 모교 제천중·고와 성균관대를 소개하고 나서는 경향신문의 대학생아르바이트은행의 추억을 비롯해 《신아일보 社史》 《대한언론인회 30년사》 편찬 같은 굵직한 사업들을 소개한다. 이것들이 말하자면 정 선배의 근원이나 정체성을 밝히는 제1장 동분서주 언론행보의 내용이다. ‘가이없는 부모님 은혜’ ‘큰 딸이 본 우리 아버지’(글 장녀 순택씨) ‘우리집 버팀목 아내의 절약정신’ 등 훈훈한 가족 사랑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경향신문에서는 13년간 논설위원실과 대학생아르바이트은행, 정경연구소, 심의실에서 일했습니다. 아르바이트은행과의 인연은 짧지만 평생 잊지 못할 값지고 보람 있는 추억을 남겼어요. 6년간 대학생 32만명에게 일자리를 알선했습니다. 이 은행을 벤치마킹해 경향사우회에 취업부서의 신설도 고려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교육문제나 아르바이트 관련 통 사설을 도맡아 쓴데다 정경문화 좌담토론에 나가 대학생 아르바이트에 대해 열변을 토한 행적 등이 참작돼 논설위원실에서 아르바이트은행 부장으로 전보된 것 같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정 선배는 대학에 갓 입학해 가정교사로 숙식과 등록금을 해결했고, 3, 4학년 때는 대학 근로장학회의 인쇄부에서 밤새워 필경과 제본을 하면서 근로 면학을 체험해 대학생 아르바이트와는 누구보다 가까이 근접해 있었다. 회고록은 이어 2장 고맙고 소중한 인연, 3장 世事時評, 4장 내가 찾은 명산 ·명소, 그리고 화보 등으로 구성됐다. 정 선배가 인연만으로 한 챕터를 꾸민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인연을 중시하고 소중하게 간직하며 관리했는지 알 수 있다. 대한언론인회 상임이사를 6년간 맡을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신아일보를 창간한 장기봉 사장이 소중한 인연 언론인 1호로 꼽혔다. 경향 선배로는 세 분이 정 선배와의 인연의 끈으로 한 편씩 글이 올라있다. “지용우 선배는 전천후 논객이었습니다. 이강걸 논설위원은 정의감이 강하고 인정이 많았어요. 김은구 대한언론인회 회장은 발군의 역량에 다정다감한 성격과 남다른 친화력으로 어딜 가나 존경과 신뢰를 받았지요. 경향에서 만난 윤상철 주필, 손광식 주간, 이광훈 주필, 김은우 이성호 이형균 조규진 최용길 이춘송 강용자 최낙동 김용술 박노경 양동안 오동환 구건서 오익환 박석흥 백선기 성정홍 이원창 김세환 유재철(무순) 의원 등은 모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논객들입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새삼 인생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정 선배가 밝힌 논설위원실 에피소드 한 토막. 1988년 6월 28일 본지 1면 의 짧은 시사칼럼 신문고(申聞鼓)에 ‘가믐 극심 농작물 피해 막심. 온다던 장마전선 삼천포로 빠졌나’이 실렸다. 가판이 나오자 “삼천포를 비하했다”며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위원들은 숙의 끝에 이틀 후 ‘바캉스 시즌 개막. 풍치 좋고 인심 좋은 삼천포 한려수도로 갑시다’를 실어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웠다고 한다. 정 선배는 “아들딸 4남매를 경향신문에 근무할 때 모두 결혼시켰다. 그만큼 경향은 나에게 고맙고 소중한 직장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참 일할 나이 쉰다섯에 정년퇴임한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고 했다. 마지막 직함은 조사연구실 심의위원. 1993년 11월 30일. 사장실에서 정년퇴임식을 갖고 최종률 사장과 오찬이 예정돼있었다. 그러나 그날 사주인 김승연 회장이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되어 회사는 그야말로 초상집분위기로 변하는 바람에 점심 약속은 취소되었다. “비는 처량하게 내렸어요. 최상완 김화 조양진 임귀옥 사우의 송별 오찬을 들고 문화체육관쪽 정문에서 작별을 고하니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더군요. 최 실장이 챙겨준 내 의자 방석을 옆에 끼고 버스로 귀가할 때의 심정은 어땠을지 상상에 맡깁니다.” 그래도 일주일 뒤 파일박스 4개 분량의 자료를 가져다 정성스레 풀었다. 그리고 286 컴퓨터를 공부하며 디지털시대의 글쓰기에 도전한다. 시사문제연구소도 설립했다. 연구소의 이름을 짓기위해 찾았던 김봉수 작명가와도 각별한 인연을 맺어 오래 교류했으니 범인들은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인연 화합의 연속이다. 우송(又松)이란 호와 우방(佑邦)시사문제연구소 이름도 이때 지었다. 경향 퇴임 후 쓴 시평·논설에서는 보수 논객으로서의 소신이 도드라진다. ‘탄핵정국 편승한 체제전복세력’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총체적 국가파탄’ ‘전교조에 2세교육 맡길 수 없다’ ‘반미 종북대통령은 안 된다’를 통해 국가 정체성 문제를 지적하며 안보와 남북관계까지 다루고 있다. 정 선배는 이같은 소신을 회고록 머리말에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절대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대한민국 그 국가정체성은 어떤 일이 있어도 훼손되어선 안 된다는 것을 추호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이미 밝혀둔 바 있다.
정 선배는 요즘, 정확히는 작년 하반기 이후 언론 행태에 대한 일침도 빠뜨리지 않는다. ‘허위 왜곡 보도로 지탄받는 언론’이란 글이 그렇다. 정 회우는 언론계 선배의 말을 빌어 “기자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는 말까지 꺼내들었다. 허위 날조된 기사를 쓴다는 것은 기자의 양심을 헌신짝처럼 팽개친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유에서다. 첼로의 성자로 불리는 파블로 카잘스(1876~1973)의 “나는 우선 사람이고, 둘째로 음악가이며, 셋째로 첼리스트다”라는 명언을 기자버전으로 만들어본다. “나는 우선 인간이고, 둘째로 지식인이며, 셋째로 언론인이다.” 4장 명산·명소는 산행기와 답사기, 탐방기, 참관기 등으로 이뤄져 있다. 어린 시절부터 왕복 60리 통학길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6년을 달린 ‘건각’덕분에 산에만 오르면 절로 나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건강 관리의 가장 큰 수단을 자연스레 산에서 찾은 것이다. “주말이면 거의 산으로 출근해요. 그러다보니 평 회원으로 궂은 일을 도맡아해야하는 총무직에다 회장이란 직책도 맡아보았어요. 제천산악회, 경향 OB산악회, 대한언론인회 산악회 회장을 역임한 것을 비롯해 충북협회산악회는 원로급 감투로 고문직을 맡아 매월 새벽공기를 만끽하는 즐거움이 쏠쏠합니다.”
경북 봉화 와선정(臥仙亭), 설악산 흘림골, 강화도 마니산, 중국 곤유산, 문경 주흘산 산행기와 안중근 의사 수국유적지 여순, 제천지역 문화탐방기 등이 읽을수록 맛깔스럽다. 정 선배의 회고록이 더욱 돋보이는 것은 부록으로 붙인 연보(年譜) 때문이다. 연보는 인물을 이해하는데 1차 자료가 된다. 한 인물의 평생을 시간에 따라 선후를 명확하게 기록했기에 한 눈에 파악하기 쉽다.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연보에 대한 관심이 약한 편이다. 선배는 1938년 3월 13일 출생부터 2017년 2월 (사)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감사까지 180여 항목을 5쪽에 걸쳐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일을 워낙 폭넓게, 부지런히 많이 했으므로 추가 보완할 항목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가계보도 친절하게 함께 붙였다. 회고록에 나와 있지 않은 ‘사회주의자’에 대해 물었다. “1996년 4월 3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역사적인 경향사우회 창립총회에서 사회를 보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경향사우회나 경향 OB산악회, 대한언론인회 등 각종 모임에서 사회를 도맡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김경래 사우회 초대회장께서 붙여주신 별명입니다. 그러니 경향사우회 공식 별명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이따금 ‘영원한 사회주의자’로 자신을 소개하기도 한다. 글과 말 모두에서 재치와 유머가 번득이고 구수한 정감이 묻어난다. ,<글 이 용 편집위원> <2017년 12월 1일자 경향사우회보>
논설 30년의 원로 신문기자가 팔순기념으로 회고록 ‘夕陽의 노을진 旅程’ 이란 이름으로 발행했다. 부제가 나의 삶 언론행로‘ 현역시절은 물론 은퇴 후 8순에 이르기까지 언론인의 길을 걷고 있다는 외길 인생을 말해준다.
꼼꼼한 기록성 회고 567페이지 저자 정운종은 성대 법정대학 법률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신앙일보 조사부 기자로 출발하여 곧장 논설위원으로 발탁되고 뒤에 경향신문과 통합후에도 계속 논설위원으로 근속했다. 도 현역 은퇴후에도 KBS 사회교육방송 비상임 논설위원 국방일보 객원논설위원 한국청소년금연운동연합 상임이사 (사) 대한언론인회 상임이사 및 사무총장으로 언론인 길목을 지켜왔다. 회고록에 따르면 저자는 지금도 시사문제연구소 대표로 시사칼럼을 집필하고 9사) 재외동포저널 논설위원으로 활약한다. 회고록은 저자의 고향 충북제천을 청풍명월의 고향이라는 자랑으로 시작하여 고맙고 소중한 인연들 세사시평 단평 단상 내가 찾은 명산 명소 및 장기간 활동사진을 담은 화보로 엮어 567페이지에 이른다. 조사부 기자 출신의 논객으로 일관한 저자의 꼼꼼하고 기록적인 성품이 회고록 뒷면의 정운종 연보에 잘 나타난다. 그의 연보는 1938년 3월 출생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움직임을 무려 5폐이지 180여 항목으로 촘촘하게 나열했으니 참으로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자나 깨나 송강 정철가문이라는 가계보도 자세한 그림으로 표시했다.
신아일보 창간 장기봉 사장 추모
저자가 고맙고 소중한 인연으로 기록한 분이 37명에 이른다. 모교인 제천중고 설립자인 한필수 선생을 비롯한 중고교시절 여러 스승님들 각계로 진출한 동기 동창들이 다수이고 1962년 2월에 입대한 육군기갑학교의 전우들도 소중한 인연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평생 천직이 언론인이니 언론계 사람들이 가장 많을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꼽은 분이 첫 직장인 신아일보 창간 사주인 장기봉 사장이다. 고 장 사장은 저자기 입사 직후부터 각별한 사랑을 베풀어 조사부 기자에서 곧장 논설위원으로 발탁했으니 평생 논객의 길을 인도한 분이다. 장 사장은 대구공고 만주법정대학을 졸업하고 8.15 후 대동신문기자로 출발하여 돈암장을 출입하며 이승만 박사를 취재했다. 이어 여러신문사를 거쳐 하바드 대학원 2년 연수과정을 밟은 후 잠시 유엔대표부 근무경력을 쌓고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서울신문사장으로 임명되어 언론경영을 경험했다. 이를 기반으로 장기영 회장이 창간한 코리아타임스 부사장을 맡았다가 한국일보 편집국장을 겸직하기도 했고 동화통신 전무를 거쳐 신아일보를 창간 매우 진취적인 기상으로 언론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다가 세월이 잘못되어 언론통폐합 태풍이 불어 왔을 때 강제 종간으로 문을 닫고 통한의 세월에 신음하다 별세한 불운의 언론사주로 기록됐다는 이야기다.
고마운 인연 논객들과 존경정치인
이밖에 저자가 소중한 인연으로 기록한 논객들은 신아일보 시절의 김경룡 정도현 임승준 호영진 임영 송병호 김상현 정육수 임덕규 홍진태등 무수하다. 또 1980년 경향신문의 흡수 이후에는 주필 윤상철 손광식 주간 이규행 실장 지용우 이광훈 및 김은우 이강걸 이성호 이형균 조규진등 수없이 줄줄이다. 논설 30년간 인연을 쌓은 언론인들을 일일이 다 기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유독 기록성이 뛰어난 저자이기에 이 같은 명단이 작성될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대한언론인회 사무총장으로 근속하며 대한언론인회 30년사 대표집필자로서도 기록성을 남겼다. 이 책 속에 제재형 홍원기 김은구 회장등과의 인연도 나오고 6.25학도병으로 낙동강전투에 참가한 지용우 위원, 춘천전투에 참전한 박기병 6.25참전언론인회 회장 경향 동아일보를 거쳐 KBS 해설위원으로 활약한 이혜복 회장등에 관한 회고담도 기록했다. 정치인중에는 야당 거물로 일관한 소석 이철승 전 국회부의장을 존경한 것으로 기록했고 제천고 육사 14기의 신군부 소속 이춘구 전 국회부의장은 청렴 강직 9급 공무원으로 출발하여 고등고시를 거쳐 충북지사 서울시장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한 이원종 씨는 행정의 달인으로 추앙했다.
대한민국 국가정체성 위기 통탄
논설 시평 편에는 보수논객으로 걸어온 저자의 언행일치가 그대로 나타난다. 최근에 집필한 칼럼으로는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 위기, 탄핵정국에 편승한 체제전복세력 종북 이적단체의 방치는 대통령 직무유기 친북 좌편향 역사교과서 문제, ‘전교조에 2세교육 맡길 수 없다‘. ‘반미 종북 대통령 안 된다‘ 등등. 또한 평생 몸담고 온 언론계에 대해 빛과 그림자를 낱낱이 지벅하며 촛불과 태극기 집회를 비교 분석한 후 허위 왜곡보도로 지탄받는 언론이라는 강력비판을 숨기지 않았다. <경제풍월 2017년 5월호>
이 글을 읽으신분들의 소감이 어떠신지도 모르고 뒷편에 필자를 소개한 글을 추가해 더욱 부끄럽습니다. 혹자는 책으로 엮으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차후 생각해보기로 하고 우선 카페에 싣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아뫃든 그때 그편지가 버려지지 않고 남아있다는게 놀라워 감히 세상에 내놓는 무례를 용서바랍니다. 정운종 후기
첫댓글 1960년대에 주고받은 빛바랜 편지가 책장속에 묻혀 있어 옮겨 본 것인데 부끄럽지만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해서 감히 카페에 실었습니다.
정운종
벌서 100분이나 이 글을 보셨네요. 한 시대를살며 겪었던 애환이 행간에 아른거리지만 어찌보면 우리들 80대 노인들이 흔히 경험했던옛날 이야기입니다. 너그럽게 보아주신것으로 알고 감사드립니다. 정운종
이 글을 읽으신분들의 소감이 어떠신지도 모르고 뒷편에 필자를 소개한 글을 추가해 더욱 부끄럽습니다. 혹자는 책으로 엮으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차후 생각해보기로 하고 우선 카페에 싣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아뫃든 그때 그편지가 버려지지 않고 남아있다는게 놀라워 감히 세상에 내놓는 무례를 용서바랍니다. 정운종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