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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下第一을 가리는 比武大會
갑자기 들려온 그 불호소리는 사방팔방에서 들린 듯한데
또한 그 소리의 멀고 가까움을 알지 못할 정도였다.
종리탁은 그 음성을 듣고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육난대사! 육난대사다. 그가 이곳에 오다니... 설마하니 나를 쫓아왔단 말인가?)
음성의 주인은 종리탁이 들은 바 있는 소림사 장경각주인 육난대사였다.
종리탁이 주설봉을 힐끗 보는데 주설봉의 안색 또한 변해있었다
. 그녀 또한 소림사에서 동정을 살피고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나직하게 내뱉는다.
"소림사의 고승께서 깊은 밤에 여자의 뒤나 좇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요."
내공이 깃들어 머리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음성이다.
어디선가 다시 불호가 들려왔다.
"아미타불! 본의 아니게 세분 시주를 밤늦게 찾아뵙게 되었구려.
소승은 주문주를 좇아온게 아니라 앞서 왔으니 결례를 했다고는 생각지 않소이다."
주설봉이 문을 열고 나가면서 말했다.
"육난대사께서 소녀와 겨루어보기를 원하십니까?
기꺼이 상대해드리겠어요."
황폐한 전각의 앞뜰에는 한 노승이 합장을 하고 서있었다.
손에는 목어를 들었으며 선장은 보이지 않는다.
왼쪽 겨드랑이에는 한 권의 경서가 끼워져 있는데 틀림없는 소림사 장경각주 육난대사다.
이때 종리탁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육난대사는 아마도 나를 뒤쫓아 온 모양이다.
그의 무공이 실로 대단하구나.
내가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
한데, 주설봉은 이해할 수가 없구나.
파풍문주라면 그 일초를 받아낸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녀가 방금 손을 쓸 때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단 말인가?
더욱 이상한 것은 그녀는 대막의 패주인데도
어째서 중원의 말을 저토록 능숙하게 구사한단 말인가? )
종리탁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주설봉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당돌한 백리만강은 벌써 주설봉의 곁으로 해서 달려나간 후다.
육난대사가 입을 열었다.
"주문주를 상대할 고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소이다.
소승이 이곳에 온 것은 저 종리시주에게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외다."
"그랬군요. 제가 소림사에서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는데
대사께서 저를 좇아오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했겠습니다."
종리탁이 말했다.
육난대사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밖에서 열린 귀에 들리기를 종리시주께서는 청도에서 오셨다고 하시는 것같던데...
사문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구려. "
"무공을 배운 곳은 두 곳이 있지만 제게 사문은 없습니다.
대사의 질문에 애석하게 답해드리지 못하겠군요."
"그럼 사존(師尊)은 어떤 고인이신지..."
육난대사가 다시 물었다.
종리탁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대사께 실망을 드려 죄송하군요.
제겐 사부 또한 없습니다.
사문이 없는데 스승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 백리만강이 말했다.
"난 스님이 뭘 알고 싶은지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에 대해 답해줄 수도 있어요."
육난대사는 눈이 반짝했고 종리탁은 당황하여 백리만강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육난대사는 고개를 저었다.
"궂이 어린아이의 입을 빌려서 까지 알고 싶은 생각은 없소이다.
하지만 종리시주께 소승이 외람되이 한마디 부탁하고자 하오."
"말씀하십시오."
"종리시주의 기상은 출중하고 정기는 얼굴 가득 충만하오.
하지만 교유가 그릇되면 본바탕을 잃을 수도 있으니 부디 사귐을 조심하기 바라오.
소승은 종리시주가 무림의 큰 재목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소이다."
종리탁은 그 말이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 같아서 쓴 웃음을 지었다.
주설봉이 대노하여 외쳤다.
"대사께선 나를 빗대어 욕하는 것입니까? 머리만 반지르하면 아무 소리나해도 됩니까?"
"아미타불! 소승은 사람을 지칭하지 않았소이다."
"교활한 늙은 중!"
주설봉이 욕을 했다.
그리고,
"당신을 그냥 보내 주진 않겠어."
벼락같이 외치며 우수를 뻗었다.
순간,
촤아앙!
갑자기 그녀의 우수에서 푸른 빛이 번쩍이며 육난대사가 푸른빛에 휘감겼다.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었다. 종리탁이 미처 만류할 틈도 없었다.
한데 청광(靑光)이 번쩍이는 가운데서 돌연 담담한 노을 빛 금광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청광도 사라지고 금광도 사라졌다.
"음!"
주설봉은 낮은 신음을 뱉으며 한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약간의 내상을 입었는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육난대사는 그녀의 사장 앞에 서있는데 오른쪽 소매자락이 길게 베어져 펄럭이고 있었다.
그는 합장을 한번 하고는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더니 허깨비 처럼 사라져버렸다.
이미 밤은 깊어도 한참 깊었다.
문득 백리만강이 방으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초식은 별 것도 아닌데 다 내공으로 밀어부친다 말이야.
내공을 들여다 볼수도 없고...
내공에 대해서 한가지만 알아도 웬만큼은 알 수 있을 텐데..."
*
"내상은 괜찮소?"
종리탁은 주설봉이 운기행공을 마치고 눈을 뜨자 물었다.
주설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하다가 물었다.
"내가 대막의 청검마녀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내게 잘 대해주는 거죠?"
"소저는 주설봉이지 않소?"
종리탁이 말했다.
그 말은 자신이 아는 것은 주설봉이란 한 소녀일 뿐
악명을 떨치고 있는 청검마녀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종리탁은 주설봉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주설봉이 안도하는 듯한 표정으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짧은 만남이지만 이미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애뜻한 정이 자라고 있었다.
백리만강은 이불을 감고 한쪽에서 깊이 잠들어있다.
두사람은 마주 앉은 채 서로의 가쁜 숨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가슴은 급하게 쿵쿵 뛰었고 서로의 작은 움직임 하나도 느끼고 있었다.
마음이 서로 이어졌는지 서로의 생각도 감정도 바로바로 느끼고 있었다.
비록 손도 잡지 않고 마주 앉아 있지만 깊은 교감이 서로간에 오갔다.
날이 밝아왔다.
밤이 다 지나가면서 그들은 긴꿈에서 깨어나는 것같았다.
밝은 햇살이 창너머로 들어와 눈을 부시게 했을 때
그들은 무엇보다 소중한 시간을 보낸 것같은 기쁨을 느꼈다.
벅찬 희열에 손을 꼭 잡았다.
*
"종리시주! 밤새 안녕하셨소?"
육난대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종리탁은 얼굴을 붉히고 말했다.
"대사께선 가사를 갈아입으셨군요."
한마디로 그가 어젯 밤에 주설봉에게 소매를 짤렸다는 것을 비웃은 것이다.
"허허헛!"
육난대사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지나 단상으로 가버렸다.
종리탁과 백리만강은 소림사의 나한전에 들어와 있었다.
원래 오늘은 바로 비무대회를 열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장문인 육고대사에게로 갑자기 전달된 파풍문주의 서찰이 있었기에
그것을 공개하기 위해 뭇 군웅들이 나한전으로 몰려든 것이다.
그러다가 뜻밖에도 단상으로 가는 도중에 있던 육난대사를 만났던 것이다.
시간은 이미 사시(巳時)다. 밖에는 햇살이 온묘롭게 내리 쬔다.
군웅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육고대사가 단상에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육고대사는 몇 차례 인사말을 한 후에 입을 열었다.
"어젯밤, 우리가 모두 잠들었을 때 아마도 파풍문주가 다녀간 듯하오이다."
"아니, 그럴 수가?"
"소림사의 경계가 엄중하기 이를 데 없는데 어떻게..."
여기저기서 놀라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실상 파풍문주 주설봉은 어젯밤에 소림사에 와서 편지를 갖다 놓고
맞은 편에 있는 태실산으로 갔던 것이다.
육고대사가 편지를 읽었다.
<...본좌 청검마녀는 중원의 영웅호걸들에게 감히 도전하는 바이다.
본좌는 태실봉의 옛 행궁에서 그대들을 맞이하고자 했다.
신분이 어떠 한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 누구든지 본좌와 겨루고 싶은자는 나서라.
대막의 무공이 결코 중원의 무공에 뒤지지 않음을 보여주리라.
기간은 삼일 간이다.
이날 까지 행궁으로 오는 자가 없다면
본좌는 그대들이 기꺼이 굴복했다고 간주하고
파풍문의 사천 제자들과 함께 이곳 태실산에 정착하겠다.>
"개소리!"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누군가가 덩달아 소리쳤다.
"개소리!"
이번에는 여기저기서 동시에 사람들이 소리쳤다.
"개소리!"
개소리...
개소리라고 외치는 소리가 점점 높아갔다.
소림사엔 때아닌 개소리로 온 절이 떠들썩 했다.
숭산은 중원의 오악 중에 중악이다.
오악(五岳)은 다음과 같다.
동태산(東泰山),
서화산(西華山),
남형산(南衡山),
북항상(北恒山),
중숭산(中嵩山),
이렇듯 숭산은 오악 가운데서도 중악(中岳)이다.
태실봉에 자리를 튼다는 것은 한마디로 중원을 짓밟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군웅들이 겉잡을 수 없이 분노하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육고대사는 가까스로 흥분한 군웅들을 무마하고
연무장에 설치된 비무대로 그들을 이끌어 냈다.
비무가 시작된 것은 이미 오시(午時)가 넘어서였다. 점심도 거르고 시작된 것이다.
제비를 뽑은 결과 먼저 겨룰 자는 흑풍전과 무영신개로 정해졌다.
하지만 정작 무영신개를 알아보는 사람은 소림사의 몇 몇 인물들 밖에 없었다.
휘익!
흑풍전은 무려 이십 장이나 날아서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는 여전히 녹색모자를 쓰고 있는 멋쟁이 차림새였다.
"와아!"
군웅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흑풍전은 근자에 부쩍 명성을 날리는 고수인 것이다.
그는 사방으로 포권을 해보이고 한 쪽에 가서 섰다.
한데 무영신개는 언제 올라왔는지 그의 맞은 편 쪽에 조용히 서있었다.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흑풍전이 올라가기 전에는 분명히 비무대가 비어있었다.
그런데 흑풍전이 올라갔을 때 어느새 무영신개가 있다.
이것은 그의 신법이 이미 신기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같은 장면은 어제 저녁에도 연출되었던 바 있는데...
무영신개는 단지 무명객이라고만 자신을 밝혔었다.
얼굴이 푸르죽죽한 그는 일견 귀신같은 분위기를 풍겨
사람들이 두번 보기를 꺼려할 정도다.
종리탁은 무영신개의 신법에 대해서 속으로 끝없이 경탄했다.
(천하에 아마 저보다 더 빠른 경공신법은 없을 것이다.
저 사람의 경공은 내가 아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오랜 옛날 부터 비밀리에 전해오는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창안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때 그의 귓전을 두드리는 맑은 소리가 있었다.
"엄마! 저 사람은 귀신이지? 얼굴도 시퍼렇잖아."
고개를 돌려보니 한 부인의 곁에 예닐곱 살 정도 된 계집아이가 앉아있다
. 종리탁과 백리산이 있는 곳으로 부터 불과 몇 자 정도 떨어진 거리다.
계집아이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사람을 홀린 듯한 미태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인은 그야말로 화용월태라고 할 만한 미모였다.
그녀는 온화한 표정으로 아이를 다독거린다.
(안면이 있는데...)
종리탁은 그녀의 얼굴이 무척 낮이 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지는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계집아이의 왼쪽에 앉아있는 사나이를 보고는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랐다.
그는 바로 이 비무대회의 출전자 중의 한사람인 묵검천패(墨劍天覇) 강백주였던 것이다.
(그렇군! 저 부인은 그때 그 겁먹었던 여인...
요화천패 설부영이군.
두 사람이 결혼해서 저 아이가 있는 거로군. )
종리탁은 고개를 끄덕였다.
힐끔 옆에 있는 백리만강을 본다.
백리만강은 비무대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묵검천패 강백주가 자신의 원수 중 하나라는 것을 그는 아직도 모르고 있다.
종리탁은 비무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양설선생의 말을 회상하고 있었다.
-소림사엔 분명히 강백주도 올거야.
넌 무슨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만강이를 그자의 제자로 들여보내야 했다
. 그리고, 만강이에게는 어떤 것도 알려선 안된다.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이루어지도록 해야했다.
종리탁은 품안에 있는 이화금환을 슬그머니 쥐었다.
(이곳에 오면 강백주를 만날 줄은 알고 있었다
. 하지만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구나.
백리아저씨와의 친분을 생각한다면 내가 저자를 죽이는 것도 좋다.
하지만, 어젯밤 육난대사의 말처럼 강백주는 옛날의 강백주가 아니다.
아마도 삼절혈죽편(三節血竹片)의 검편(劍片)을 완전히 익힌 모양이다.)
그는 이화금환을 손에서 놓았다.
(그래 원래 두분의 계획대로 복수는 만강이 손에 남겨 놓도록하자.
뿌린 대로 거두는 복수를...
하지만 강백주... 무척 단란해 보이는 구나.
백리아저씨 부부는 복수의 일념으로 하루도 편안히 지내는 날이 없는데...)
그는 속으로 긴 한숨을 쉬었다.
강백주, 그리고 설부영 부부와 그들의 딸은 너무도 행복해 보였다.
그 행복을 깨뜨린다는 것 자체가 죄악처럼 느껴질 정도로...
비무대에는 두 사람이 격돌하고 있었다.
"형, 누가 이길 것같애?"
옆에서 백리만강이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종리탁의 눈에 흑풍전이 공격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영신개는 흑풍전의 발그림자에 휩싸여 있다.
풍차처럼 몸을 돌리며 퇴영을 날리는 흑풍전의 수법에 걸려든 것이다.
하지만 종리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 괴인이 이겼다."
그가 괴인이라고 말한 사람은 무영신개다.
괴인이라고만 했지만 백리만강은 단번에 알아듣는다.
"별로 대단할 것같지 않은데? 저 위에선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어."
"완전히 멈춘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완전히 멈출 줄 아는 사람이 움직임에 있어서 군더더기가 있을리 없다.
아마 작은 동작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둘거야."
"완전 ...완전...완전...전부 완전이야?"
백리만강이 움직이지 않는 괴인이 시시해보이는 지 불만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비무대 위에서 무영신개의 몸이 번득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마치 환상과도 같은 장면이 무대에서 펼쳐졌다.
흑풍전의 무수한 발그림자를 스며들듯 뚫고 들어가며
무영신개의 소매속에서 빠져나온 우수가 수도(手刀)로 변해
흑풍전의 미간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너무도 깨끗하고 또한 빠른 것이었지만
그 단순함 때문에 뭇 군웅들은 생생하게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군웅들이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흑풍전은 눈앞으로 떨어지는 수도를 보면서도 피하거나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세상에 그런 수법이 존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를 악물고 비장의 수법인 장심뇌(掌心雷)를 쏘았다.
최소한 당하기만 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의 양 손이 다 뻗어나가기도 전에
눈앞의 괴인은 좌수로 그의 양 손목을 슬쩍 눌렀다.
손바닥으로는 왼 손목을 누르고 팔꿈치로는 오른 손목을 누른 것이다.
그 별 것아닌 동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영신개는 흑풍전의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려버렸다.
흑풍전의 몸이 기우뚱 했다.
그 짧은 시간에 흘러내린 땀이 발끝을 타고 흘러 비무대를 적셨다.
무영신개의 수도는 그의 미간에 닿아있었다
. 흑풍전은 손가락하나 꼼짝하지 못했다.
그는 탄식하며 말했다.
"노형이 이겼소. 이 흑풍전은 노형에 도저히 미치지 못하오.
내가 패했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당금 무림에 노형을 능가할 인물은 거의 없을 것이오. "
"과찬이오."
무영신개는 손을 거두고 말했다.
그제서야 군웅들은 안도하며 자리에 앉았다.
흑풍전의 그 당당하던 어깨가 축 쳐졌다.
그리고 그의 멋있는 녹색 모자는 이미 무영신개의 수도에 반으로 베어져 나풀거린다.
하지만 흑풍전은 당당히 포권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이 흑풍전은 비록 패했지만
, 노형이 중원의 적인 파풍문을 몰아내는데 협조를 아끼지 않겠소."
무영신개가 마주 포권을 했다.
"와아!"
군웅들이 흑풍전의 당당한 태도에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육난대사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군.
저 사람은 지금은 몰라도 앞으로 더욱 발전할 것이다."
종리탁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옆에서 백리만강이 물었다.
"형, 방금 그런 수법을 사용하는 것은
아무래도 바늘 구멍으로 통과할 수 있는 재주가 있어야만 하겠는데."
"눈이 제법 밝구나. 옳은 말이다.
그 엄밀한 공세를 뚫고 들어가는데는 그런 재주가 필요하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다음에 알게 될 것이다."
종리탁은 말해주지 않았다.
잠시 후 비무대에선 또 다른 두 사람이 올라서서 대치했다
. 묵검천패 강백주와 한 사람의 청년이었다.
한데 청년의 외모는 너무도 특이하여 한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모습이다.
얼굴은 아주 미남이었지만 머리는 마치 감자처럼 울퉁불퉁하다.
가만히 서있는 그 몸에서 풍겨나는 웅장한 기도는 사면을 압도할 만하다.
그 신위가 정말 뛰어나 한마디로 군계일학이라고 할만하다.
누구나 찬탄을 금하지 않는다.
강백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황산에 있는 강백주라고 하오."
"신운(申雲)이오."
강백주는 신운이란 청년의 되바라진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내 말했다.
"시작하세."
그가 묵검의 자루를 잡았다.
신운은 두 손을 가슴앞에 모으고 강백주를 노려보았다.
기이하게도 비무를 가리는 이 자리에 괴이한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
휘이익!
야산을 귀신처럼 빠르게 날아넘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좇아가는 10여 개의 붉은 그림자도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좀처럼 앞에가는 백영과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이곳은 숭산이 멀지 않은 곳, 낙양(洛陽)에서 이백 여 리 정도 떨어진 곳이다.
백영은 삼십 장에 가까운 넓은 내를 한 달음에 날아서 넘어버렸다.
그리고 숲속으로 들어가 추적자들의 눈에서 사라져버렸다.
홍영들은 숲 앞에서 일단 멈추었다.
휘휙휙!
열한 명의 붉은 옷을 입은 여인들,
그들은 놀랍게도 모두 젊어 많은 여인은 삼십 여 세,
그리고 적은 여인은 십팔세 정도로 밖엔 보이지 않는다.
손에는 날이 새파란 검을 들고 있는데
그 검들의 손잡이 끝에는 해골의 모양을 하고 있는 장식이 달려있다.
다른 여인들 과는 달리 얼굴을 면사로 가리고 있는 여인이 소리쳤다.
"흩어져서 찾아라. 상처를 입었으니 멀리는 못갈 것이다
. 발견하면 즉시 신호를 하고 부딪히지는 말아라.
놈은 그래도 호랑이다."
"존명!"
여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숲을 에워쌌다.
면사여인도 숲으로 걸어들어 간다.
"끈질긴 자. 루주님의 일격에 맞고도 오백리를 도망치다니...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이다.
네놈이 보물을 지니고 있는 것이 목숨을 단축시켰다."
검이 햇살에 새파랗게 번득였다.
숲속,
크다란 고목이 갈래져 뻗어오른 아래 백의를 입은 한 장한이 옷을 찢어 어깨를 싸매고 있다.
"대단한 계집...! 방심했다고는 하지만 내 어깨를 찌르다니..."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그는 삼십대 초반의 인물이었다.
등에는 두 자루의 검을 매고 있는데 두 자루 모두 마포로 둘둘 말려있었다.
굴강한 얼굴은 고집스런 일면이 보이고 손마디는 거친 일을 하는 사람인양 굵고 터실터실하다.
"대체 어떤 계집들이기에 이같은 악독하단 말인가?"
"본녀를 그렇게 욕하는 건 생명을 재촉할 뿐이다."
문득 그의 전면에서 황의를 입은, 그야말로 한떨기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걸어나왔다.
손에는 들기에도 힘에 겹다는 듯이 늘어뜨린 장검이 쥐어져 있고
가는 허리는 걸을 때마다 하느작 거리며 사람의 시선을 잡아 끈다.
백의인이 흠칫하더니 일어서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어깨에 일검을 선사한 사람도 잊어버렸는가?"
황의여인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갑자기 백의인이 광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황의여인이 눈을 찌푸리며 듣기 싫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백의인이 말했다.
"잘됐군 잘됐어. 하마터면 복수도 못할 줄 알고 걱정했는데...
맹세를 어기는 한이 있어도 검을 뽑지 않을 수 없군."
그가 어깨에 있는 두 자루의 검 중에서 하나를 잡았다.
황의여인은 의외라는 듯이 바라본다.
"맹세?"
"강백주와 독고우가 아니면 검을 뽑지 않으리라 맹세했건만...
하나, 검을 뽑은 이상 내 손에서 살아날 생각은 마라.
나를 분노케 한 것은 바로 너니까."
백의인이 살기어린 음성으로 내뱉었다.
그 기세가 너무도 강인하여 황의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강백주는 천중삼패의 일인인 묵검천패이고
독고우라면 바로 사대비세의 하나인 염왕부의 주인이 아닌가?
촤앙!
백의인이 검을 뽑았다.
한데 그 순간 황의여인의 안색이 대변했다.
"너 너는 순천..."
그녀의 말이 두려움에 떨려나왔다.
백의인의 몸이 번쩍했다.
파앗!
그의 손에 들려있던 검이 실날같은 틈을 타고 여인의 가슴에 와닿았다.
실로 전광석화같은 검법이었다.
그리고 그 검, 그것은 거무튀튀한 돌로 만들어진 석검(石劒)이었다.
백의인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순천원을 아는 너는 누구냐? 어떻게 순천원을 아느냐?"
그의 음성은 터질 것같은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
홍의여인은 꼼짝할 수도 없었다.
간밤에 기습으로 그의 어깨를 찔렀는데
이번에는 그 기습에 자신이 제압당하고 만 것이다.
그때,
"물러서라!"
여인의 차가운 교갈이 백의인의 뒤에서 들려왔다.
면사녀가 수풀을 헤치고 걸어나오고 있었다.
휙휙휙!
사방에서 홍의를 입의 여인들이 날아왔다.
그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들고 있었지만 쉽게 접근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면사녀가 소리쳤다.
"루주(樓主)님을 조금이라도 다치게 한다면 지옥끝까지 네놈을 쫓아가 죽일 것이다."
사실 백의인은 순천원의 오검(五劒) 중의 석검(石劒)이었다.
석검은 나부산에서 염왕부의 기습을 받았을 때 천(天)노사에 의해 기적적으로 살아났었다.
그는 동살비(同殺匕) 아래에서 살아난 최초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천노사는 그에게 한 자루의 동살비를 주었었고
그리고 위기의 순간에 붕검(崩劒)의 수법으로 바위를 무너뜨려 그를 덮어버림으로써
그가 고통은 받았지만 살 수 있게 해주었다.
석검은 그 당시 천노사가 자신에게 동살비를 준 의미를
단지 자신의 무공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천노사는 그에게 있는 다른 능력을 높이 사고 있었던 것이다.
석검은 원래 대장간을 하던 집안에서 자란 사람으로
쇠를 다루는 일에 능숙할 뿐만 아니라
정교함과 임기응변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 보다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석검은 정신을 차리고 바위를 헤친 후에 밖으로 나왔었다.
그 후 그는 그 악마의 병기인 동살비들을 하나씩 주워모았다.
그리하여 모두 스물 아홉 개의 동살비를 그는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동시에 순천원의 아홉고수들의 시체를 자기 손으로 묻어야만 했다.
하지만 순천원으로 돌아왔을 때 순천원은 이미 멸망되어 버렸고,
석검은 산속에 은신하여 복수를 위한 방법을 차기에 고심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들을 유인했던 인물이
다름 아닌 강백주라는 사실을 우연히 생각해 내게 되었고
그를 염왕부와 함게 원수로 생각했다.
석검은 자신의 무공 만으로는 염왕부의 독고우를 상대할 수 없다는 생각에
동살비를 모두 녹여서 한자루의 검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지금 그의 등에 걸려있는 또 하나의 검이다.
한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소림사로 가는 도중에 여인들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그 여인들이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자들로 바로 남창(南昌) 홍분루(紅粉樓)의 기녀들이다.
하지만 석검은 그녀들의 정체를 알리가 없다.
자신을 위협하는 여인이 가소로울 뿐이었다.
석검은 황의여인, 즉 천소홍(千蘇紅)의 가슴에 더욱 검을 들이 밀면서 독촉했다.
"순천원을 아는 너는 누구냐?
말하지 않는다면 내 수단이 악독하다고 원망하게 될 것이다."
"순천원의 석검인 줄 미리 알았다면 좇지도 않았을 것이다."
천소홍이 냉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라."
석검은 검을 슬쩍 들어올렸다.
스슷!
순간 천소홍의 가슴 옷자락이 베어지고 검은 그녀의 인후(咽喉)에 닿았다
. 그녀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석검은 얼음보다 더 차가운 눈으로,
그리고 북풍처럼 차가운 말로 소리친다.
"코를 베어버리겠다."
그러나 천소홍은 뭐라고 말할 수가 없다.
자신이 순천원의 아홉고수들을 죽이기 위해
염왕부와 반호풍을 움직였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친구! 지금 물러선다면 아무 것도 따지지 않겠다."
허무한 듯 기운없는 음성이 숲의 한쪽에서 들려왔다.
석검은 자신을 향해서 쏘아지는 무형의 살기에 깜짝 놀라며 빙글 돌아 천소홍의 뒤에 섰다.
한데도 살기는 여전히 자신의 등으로 쏘아지고 있었다.
(이런 고수라면...대체... 누구... )
석검은 식은 땀을 흘렸다.
"누구냐?"
"난 주정뱅일세. 다만 자네에게 한가지 부탁만 하고 싶을 뿐이네. 그녀를 놓아주게."
석검의 삼장 앞,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술병을 입에 물고 서있는 사람이 있었다.
옷은 허름하다 못해 거지 꼴이고
술은 얼마나 마셨는지 냄새가 석검의 코를 찌를 정도로 강렬했다.
바로 반호풍이다.
반호풍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킨 후에 더러운 소매로 입을 쓱 문질렀다.
"부탁일세. 아무 것도 묻지 말고 그녀를 놓아주게."
"댓가는?"
"자네의 목숨이네. 자네가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한번 구해주겠네."
석검은 형형한 눈으로 반호풍을 노려보았다.
반호풍...
그 초라한 형색에도 불구하고 석검은 그에게 숨어있는 엄청난 거력을 옅볼 수 있었다
. 도저히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자이다.
석검은 천소홍의 목에서 검을 떼며 말했다.
"내 목을 노리지나 말았으면 좋겠소."
"껄껄걸! 자네는 확실히 뭔가를 아는 친구로군. 내눈이 틀리지 않았어. "
반호풍은 대소를 터뜨렸다.
석검은 그를 다시 한번 눈여겨 본 후에 몸을 날렸다.
"친구 잘가게. 껄껄껄..."
반호풍은 손을 흔들면서 웃었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반호풍은 빙글 돌아서 천소홍을 바라보았다.
천소홍을 제외한 모든 여인들은 그를 향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천소홍은 가슴을 여미며 입을 열었다.
"당신의 도움을 받았군요. 순천원의 생존자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반호풍은 그녀의 옥같은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말했다.
"소홍! 복수 때문에 일을 너무 많이 벌리지 마라.
천하에 고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 곧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고 마는 것이 무림이다.
강하면 강한대로, 약하면 약한 대로..."
천소홍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자는 신검(神劒)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탐심 때문에 너는 죽을 뻔했다
. 외물에 관심을 갖지 말고 자신의 내면을 닦는 것이 소중하다.
신검은 네 몸속에도 있다."
"당신의 말은 다 이해할 수 없어요
. 하지만, 그자가 지니고 있던 신검은 정말 보통 것이 아니예요."
"그만 하시오."
반호풍은 더이상 듣기 싫다는 듯이 소리쳤다.
천소홍은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반호풍이 그녀를 향해 화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잠시 있다가 물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요?"
"독고우는 이미 염왕부에 없다. 그는 염왕부를 떠난 지 오래였다."
"그럼 염왕부를 멸망시켰나요?"
"아니다."
"왜?"
"소홍의 원수는 독고우지 염왕부가 아니잖느냐?"
"독고우가 바로 염왕부예요."
천소홍은 독기서린 음성으로 소리쳤다.
반호풍이 그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 보다가 술을 들이켰다.
벌컥벌컥!
"소홍... 나를 괴롭게 하지 마라. 네가 미워질까 두렵다."
천소홍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녀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처량한 음성으로 말했다.
"홍분루로 돌아가요."
복수를 위하여 진정한 사랑을 잃을 수는 없다.
복수는 과거에 남은 것이지만 앞으로 남을 것은
진정한 사랑 외에는 있을 것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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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미진진하여 독하고있읍니다.싸.
잘봅니다..^^
잘봅니다
감사 드립니다
즐독했습니다.
감사ㅎ
감사합니다
즐독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