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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전원은 수목과 농작물과 심지어 잡풀들 같은 푸른 식물들의 천국이다. 주말에 다시 가곤 하는 농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우리 부부를 맞이하는 것은 주인이 없는 마당에서 마음 놓고 주인 행세를 하며 살고 있는 온갖 잡풀들이다. 야생초의 삶의 터에는 흔하디흔한 쇠비름을 위시하여 강아지풀, 명아주, 매듭풀 등이 쫙 깔려 있다. 뒤뜰의 채소밭을 한 바퀴 돌고 대문 앞 텃밭을 나가 본다. 폴리 멀칭을 한 고구마밭 고랑과 이랑 사이의 좁은 통로에는, 나지막한 키의 쇠비름이 촘촘하게 진을 치고 있고, 여뀌도 고구마순 사이에 숨어 있다. 부추는 아예 강아지풀, 달개비, 참비름과 공생하고 있다. 뒤 뜰 담벼락 밑 둔 턱에는 줄기에 가시가 촘촘한 며느리밑씻개와 박주가리 덩굴, 닭의덩굴이 잡목의 목을 감고 늘어져 있다. 풀 뽑기는 이른 새벽부터 서둘러야 한다. 한여름의 들판은 마치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삼나무가 있는 밀밭‘ 풍경____ 태양을 그리지 않았어도, 빙글빙글 돌듯이 그린 하늘과, 넘치는 기운으로 꿈틀대는 들판과, 마치 승천이라도 할 듯 한 용트림의 삼나무로 이글이글 작열하는 한여름의 태양과 더위를 절묘하게 표현한 ___ 이미지 같아서 정수리에 바로 내리꽂히는 뜨거운 열기를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도 작업량이 많아 어쩔 수 없이 한낮에 밭에 서 있노라면 온 몸이 뜨거운 냄비처럼 달아오르면서 숨이 턱 막혀 버린다. 비지땀을 흘리는 남편에게 나는 수돗간 지하수를 물바가지에 떠 와서 건네고, 내가 땀을 빠작빠작 흘리며 얼굴이 벌게지면 이번에는 남편이 바가지 채 물을 떠 와서 건네준다. ‘뻐꾹, 뻐뻐꾹 ,뻐뻐꾹 뻐꾹.….’ 몸빼 차림으로 쪼그리고 앉아서 땀 흘리며 호미질을 하고 있는데 문득 들려오는 뻐꾹새의 울음소리는 그야말로 청정법음이다. 한없이 맑아지는 머릿속과 환희심으로 벅차오르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어 쳐다보는 여름 하늘은 너무나 눈부시다. 여름 내내 풀과의 전쟁을 하면서도 전원생활은 무공해 푸성귀들의 수확으로 마냥 즐겁다. 전원생활의 초기에는 신바람이 나서 농가로 친척, 지인, 직장동료들을 초대하였다. 오글오글한 적록색 상추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 향긋한 깻잎, 쑥갓, 신선초, 셀러리도 따다 얹고, 밥 한 숟가락, 양념 된장, 참치 살을 얹어 입속에 넣으면 입이 터질 듯하다. 오래오래 씹은 후 목구멍으로 꿀꺽 넘기면 그 고순 맛을 어떻게 표현하랴! 밭에서 갓 뜯은 푸성귀로 상차림을 하여 온통 뱃속을 염소마냥 풀잎들로 채우고는 행복해했다. 오곡백과의 결실은 당연히 가을이지만 푸성귀의 전성기는 주로 여름철이다. 농작물 중에서 수확의 재미가 쏠쏠한 것은 덩이뿌리인 감자와 고구마를 캐는 일이다. 가만히 서서 힘 안들이고 따기만 하는 되는 고추, 토마토, 가지보다, 비록 힘이 들지만 엎드려서 호미로 흙을 파 헤쳐서 캐는 고구마나 감자 캐기가 더 재미나고 흥미로운 것은 캐면서부터 줄줄이 나오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얼마만큼 큰 놈이 나올까, 어떤 모양을 한 놈이 나올까에 대한 기대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리라. 옥수수는 따는 즉시 설탕이나 소금을 넣지 않고 삶는다. 일단 수확 후 시간의 경과에 따라 당분이 감소해가는 특성 때문이다. 한꺼번에 열 개라도 먹어치울 수 있을 만큼 기가 막힌 감칠맛이 있다. 따 놓은 지 오래된 옥수수에 가미를 해서 찐 옥수수를 시중에서 사다 먹는 사람은 갓 따서 찐 자연의 그 은근한 옥수수의 맛을 구별할 재간이 없음은 당연하다. 일손을 거두어야 하는 찌는 듯 한 한낮. 마루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뜨락을 바라본다. 뜨락에 앉은 화초와 잡풀은 우리를 말끄러미 쳐다본다. 바람은 키 큰 나무들의 끝자락에서 가끔 간지럽게 서성거릴 뿐, 골목을 걸어가는 농부의 자취도, 담 밖으로 들려오던 그들의 대화도 끊어지고, 이름 모를 새의 지저귐만이 하얀 도화지 같은 한낮의 정적을 가끔 깨뜨릴 뿐이다. 마을 입구에 아름드리 큰 느티나무 아래는 한낮에는 마을 주민들의 휴식터다. 평상에 둥글게 앉아서 자신들의 논밭을 바라보며 올 농사의 작황과 날씨를 염려하고, 동네 대소사를 의논하고, 세상사를 논하곤 한다. 건너편 논 사이에 있는 작은 저수지에는 한밤중 두꺼비 떼의 굵고 낮은 울음소리가 깊어가는 농촌의 여름밤을 깊은 수렁 속으로 빨아들이곤 한다. 달 밝은 밤이면 저수지를 사방으로 에워 싼 둑길이 휘영청 달빛 속에 무척이나 유혹스럽다. 한없이 걷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은 다 늙은 여자에게 아직도 소녀 같은 낭만과 감성의 여지가 남아 있는 걸까? 아니면 자연과의 동화일까? 여름의 전원은 낭만만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전원생활인이 느끼는 고뇌 중의 하나는 식물을 자연으로 키운다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든다는 점이다. 심기만 하면 다 싹이 트는 것,. 저절로 자라주는 것도, 더더구나 충실하게 열매를 맺어주는 것도 아니었다. 파종, 모종 이식 때부터 아니, 파종 전부터 밑거름이 필요했고 성장기에 김매기, 웃거름, 농약 살포가 뒤따라만 제대로 된 결실을 볼 수 있었다. 내가 구가하는 전원생활은 최상품이나 특대품의 농산품 수확이 아니지 않은가? 재배작물들은 파종기에서 성장기까지는 대체적으로 잘 자라준다. 그런데 수확기에 접어들면 어김없이 벌레가 생기고 병이 들고 잡초는 더 기승을 부린다. 이 때 나는 갈등을 겪는다. 농약을 치느냐? 마느냐? 병충해에 시달리고 괴로워하는 작물들의 신음소리가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잡초도 엄연한 생명체다. 마땅히 존중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잡초라고 이름 지어 놓고서는 재배작물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싹쓸이로 죽여도 된다는 발상은 인간 위주의 사고다. 무엇을 살리는 것이 중생구제며, 무엇을 죽이는 것이 살생이란 말인가? 또 하나의 화두는 인간 농사가 바로 농작물 재배와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루소는 인간의 자연 감정과 자유사상을 중시하고 자연적으로 성장해가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교육의 참된 이치로 보았다. 노자 또한 무위자연의 중요성을 갈파하였건만 요즘 같은 최첨단 지식정보화시대와 고도로 발달된 문명사회에서 어디 먹혀 들어갈 만한 학설일까?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다워지거나 인격 완성체가 저절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재배작물에 있어 비료 같은 영양제, 농약 같은 극약 처방이 불가피하듯, 시공간까지 탑재하고 마냥 냅다 달리는 교육현장에서도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교육환경 조성이 인간 창조와 개조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게 하는 수단이 되어 버린 세상인 것이다. 나는 텃밭에서 봄에 씨앗을 심고, 여름에 잡초를 뽑아 주고 가꾸면서 가을의 수확을 예비하고 있다. 이제 그것처럼 나는 어제 교육의 씨앗을 뿌렸고, 오늘은 열악한 교육환경과 맞싸우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래도 내일에는 비료와 농약을 치지 않고도 제대로 된 최상품 인간을 기대하며 이 성하의 계절을 보내려고 한다. |
첫댓글 찬사를 보냅니다."내일에는 비료와 농약을 치지 않고도 제대로 된 최상품 인간을 기대하며" 아주 감동적인 표현입니다
그림이나오네요.일주일에 한번 들른 전원의 풍경이. 나도 어릴 땐 부모님 농사를 도운 적이 있는데 지심중에 쇠비름, 바랭이풀등이 제일 극성이던데. 어쨌거나 일궈놓고 그 생활을 즐기심이 부럽군요.
경남아 건강하게 잘 지내자
존경하고 또 존경한다 경남아 이나라의 어린 새주인을 튼튼한 거목으로 인격체를 교육으로 다듬어 완성시키고 주말에는 농장에 달려가서 몸빼입고 호미들고 이 한여름 땡볕에 시간이 부족하여 조금이라도 일을 더많이 해놓고 올려고 제대로 쉬지도 않고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너무나 열심히 사는 너의모습 풋성귀 처름 싱그럽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