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간[162.4]
신앙 체험수기
종교는 무형의 지배자
예은당 이애준_성동교구장
나의 친정아버님은
목은 선생님의 직계直系 23대손代孫이시다.
6.25 이전까지 17대를 이어 살던 고향을 잃고
실향민으로 80대를 바라보니 망향의 쓰라린 심정은
옛날의 평화롭던 유년시절이 그리울 뿐이다.
지금은 군사분계선으로 가로 막혀 있지만,
철책선에 서면
고향집의 집터가 눈앞에 보여도 들어갈 수는 없다.
그 땅은 이성계가 고려를 배신하고
새로운 나라 이씨조선을 건립하려할 때
牧隱(목은 이색)선생을 회유하여 동조시키려 했지만,
불사이군不事二君을 고집하면서 불응 하자
세거지歲居地로 하사한 36정보의 산야山野이다.
36정보를 평수로 환산하면 10만 8천 평이다.
세거지歲居地는 대를 이어 살아도 된다는 뜻이다.
그 덕분에 선조들은 농지를 활용하며
대를 이어 풍요한 삶을 이어 오며 살았다.
이성계의 억불정책으로
조선은 유교가 국교화 되어 가정의례는
유교의례를 따라 행하게 되었고,
아버님께서는 제사를 지내실 때
제주祭酒를 술이 아닌 청수를 사용하셨고,
조상부터 부리던 노복奴僕은 땅 일부를 떼어주어
독립 가정을 갖게 하시고
농번기가 되면 불러다 품삯을 주고
일을 시켰던 것으로 기억된다.
할아버님은 삼형제셨는데 작은 할아버님 두 분은
일본유학을 하셔서 해방이 되면서 귀국하셨다.
제사는 보통
자시(11시부터 새벽1시를 말함)지내셨는데
어느 때 부터인가 새벽 인시(3시부터 5시)에 드렸다.
그것은 새벽 5시 기도식에
맞추려 하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당시 나는 병약한 체질이라
학질, 감기, 홍역, 천연두 등으로
학교를 한 달여간씩 결석을 하곤 했다.
내가 아파 누워있으면
할머님께서 까만 염주를 손에 쥐시고
주문을 하셨던 것으로 생각난다.
내겐 언니 두 분이 계셨고
나보다 세 살 위인 오빠도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작고 하셨다.
오빠는 해방되기 전 해에
초등학교 취학 연령이었지만,
아버님께서 왜놈학교는 보내지 않는다 하시고
서당엘 보내셔서
나도 오빠를 따라 서당엘 쫓아다녔다.
봄이 되면 뒷동산에
진달래꽃이 온 산을 붉게 뒤덮으며 피어났다.
어느 봄날 나보다 여섯 살 아래인 남동생이
할머님 등에 업혀 지낼 때였다.
할머님 따라 진달래가 피어있는 뒷동산에 가서
곱게 핀 진달래꽃을 한줌 가득 꺾으면,
할머니는 내게 말씀을 해주셨다.
“꽃을 꺾을 때 ‘톡’, 하는 소리 들었지?
그 소리가 꽃나무가
‘아야’ 하며 아프다고 내는 소리란다.” 하시며
생 순을 꺾지 말라는
스승님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도록 일러주셨다.
이러한 말씀들이 내 삶의 토대가 되었고,
한국동란으로 중단되었던
천도교에 대한 나의 유년시절,
옛날이야기처럼 들었던 말씀들이,
새록새록 생각는 것들이,
내가 천도교를 하게 하는 바탕이 되어준다.
그리고 아버님께서는
내게 최보따리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 기억을 더듬어
해월신사님에 대한 시 한수를 지어보았다.)
경모해월신사敬慕海月神師
海月精靈慕念園해월정령모념원
해월신사님의 정령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동산에 이르니
乾坤淸氣撫孤魂건곤청기무고혼
천지가 맑은 기운으로 가득 차 있어
외로운 영혼 위로하네.
裂肝碎首眞彛秉열간쇄수진이병
끔찍한 화를 당하시면 서도 참된 진리 지키시고
寒餒藏身避竄奔한뢰장신피찬분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참된 진리 지키셨네.
露宿風餐堪脆弱노숙풍찬감취약
풍찬노숙 견디시면서 심신이 연약하셨어도
天經地緯布華繁천경지위포화번
영원히 변치 않을 떳떳한 이치 화려하게 펼치셨네.
德高望重師懷志덕고망중사회지
높은 인격과 덕망 갖추시었던 스승님 뜻
가슴에 품으시고
至聖悽如願雪寃지성처여원설원
성인께 미친 억울한 누명 벗기시려 소원하셨네.
貪財黷貨誅求吏탐재독화주구리
백성들의 재산을 탐내고 강제로 빼앗는 관리로 인해
貢物貧窮愍抗論공물빈궁민항론
공물로 가난해진 백성을 불쌍히 여겨 항변하셨고
被治者權呼喝引피치자권호갈인
지배받는 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꾸짖고 이끄셨네.
保民政策力行諠보민정책력행훤
백성을 보호하는 정책을 힘써 펴라 외치셨고
守心正氣衷誠敎수심정기충성교
수심정기를 진심으로 정성 다해 가르치시고
結意儀風篤敬元결의의풍독경원
예의범절 굳은 뜻은
독실히 공경함의 으뜸이라 하셨네.
極稱頌繼優殊洽극칭송계우수흡
님의뜻 칭송으로 이어받아
특별함을 넓게 미치도록 하여
萬世崇嚴仰奉尊만세숭엄앙봉존
영원히 존엄함을 우러르며 숭배하여 모시어야 하네.
나의 고향집은 3.8선 접경으로
6.25 한국동란에는 피란도 못하고
전쟁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한반도는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한 1.4후퇴 당시에도
마침 아버님께서는 서울 효자동 집에 계셔서
어머님 혼자 식솔을 끌고 피란길에 오르실 때
18,19세였던 머슴을 아버님께서 동생으로 삼으시고
“삼촌”이라 부르라 하셨다.
그 머슴 덕에 어머니, 언니, 오빠, 동생은
소달구지를 타고 무작정 피란길에 오르셨다.
할머님께선 연로하셔서
“나는 집을 지키고 있을 테니
피란을 하고 오라”고 하시며
극구 피란에 동참을 거부하셨다.
그 당시 나는 할머님과 함께 고향집에 남아있었다.
중공군들이 남하하면서
밤낮 없는 유엔군의 공습은 천지를 진동시켜,
온 마을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마을이 초토화될 때 나는 극심한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중공군은
군인 개개인의 무기도 없었고,
나무를 총 모양으로 깎아 만든 목총을
사랑채가 있는 부엌에 짚단으로 감추었다가
출동할 때 갖고 갔다.
그들은 유엔군의 공습을 피해
새벽에 우리 집에 들어와 가마솥에 밥을 지어먹고
저녁에 모두 떠나갔다.
할머님께선 대청마루에 있던 성미항아리를
방공호 속으로 옮겨놓으시고
가마떼기로 덮어 숨겨놓으셨다.
나는 축축한 방공호 속으로 쫓겨나서 생활을 했다.
배가 고플 때는
중공군들이 비상식량으로 갖고 다니는
건빵을 얻어먹으면서 연명을 했다.
유엔군의 공습공격이 끝나고 나면
포탄 파편이
안마당에도 안방 이불 곁에, 대청마루에도
드문드문 흩어져 있고,
논 가운데 연못은 둑이 터져 흔적도 없고,
물고기들이 빈 논바닥에서 팔딱거렸다.
아름드리 밤나무는 밭 가운데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집중 포격이 피해가서
나와 할머님은 털끝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때 할머님은 “한울님이 도우셨다”라고 하셨는데,
나는 “한울님”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휴전으로 접어들었고,
판문점에서 정전회담을 할 때
부모님께서는 임진강을 도강하셔서
나와 할머님을 데리러 오셨다.
정전회담 당시 낮에는 국군들이 우리 집을 수색하고,
밤에는 중공군이 수색을 하는데,
그때마다 대문을 내가 열어주어야만 했다.
대문을 열면, 그들은 나를 무조건 돌려세우고
총구를 내 등에 붙이고 온 집안을 수색했다.
하다못해 장독대 빈항아리까지 열어보고
부엌에 나무를 쌓아놓은 곳을
대검으로 찔러 보기까지 했다.
부모님의 동리 사람들을 불러 모아
살림 집기를 져내려던 계획은
한밤중 중공군이 모두 잡아가서 수포로 돌아갔고,
부모님은 다락에 숨어 계셔서 위기를 모면하셨다.
아버님은 할머님을 위해 장만했던 수의를 지시고
어머니는 재봉틀만을 머리에 이시고
임진강나루까지 걷고 걸어
밀선을 타고 김포나루에 도착하여
실향민, 피란민이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그때부터는 종교를 잊고 살았고
식량 배급과 원조물자, 구제품 옷가지로
의식주를 해결해야 했다.
지금 사는 집 거실에서
북한산 인수봉이 바라다 보인다.
내가 천도교에 포덕 135년도에 입교를 하였으니,
천도교의 경력이 3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천도교 합창단이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인수봉을 등산할 때인데
나는 숨이 차서 도저히 일행을 따라가지 못하고
중도에 하산을 하게 되었다.
병원의 진단결과는
관상동맥이 좁아져서 심장이 커져있다고 하면서
관상동맥 확장수술을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일주일 후 수술 예약을 하고 있을 때
여성회본부의 동계합동수련이 있으니
함께 하자는 권유를 받고 동행하였다.
당시 여성회장님의 권유의 말은
수련을 하면 다 나을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때 강원도 쪽에는 눈이 많이 와서
마음속으로는 눈 구경이나 실컷 하고
병원 예약 날까지 집에 오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원장님께서
수련을 처음 온 사람은 맨 앞에 앉아야 한다고 하셔서
맨 앞줄에 앉아 수련을 시작했지만,
수련이 시작되자 주문소리가 시끄럽게만 들려
뒤를 돌아보며 구경을 하면서
적당히 시간만 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3일 정도가 지나고나니
온몸이 뒤틀리고 공연히 왔다는 생각을 하면서
건성으로 일정에 따르고 있었다.
나는 절대로 떨지도 않고 울지도 않을 것이다,
굳게 마음을 다져먹고
수련의 흉내만 내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그 당시의 솔직한 나의 심정이었다.
그런데 삼일이 지나고 나서 새벽수련이 시작될 때
가슴에 통증이 오기 시작하였다.
그 통증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능가했다.
(6.25 전쟁 때 인민군 부상병의
관통상을 입은 넓적다리를 마취제 없이
군도로 살을 자르고
톱으로 뼈를 자르는 것을 본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는 아픔을 견디다 못해 졸도까지 하였지만
저녁때가 되자 들것도 없이 한 다리와 두 팔로 기어서
후퇴하는 일행을 따라가는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수련을 가기 전
병원에서 나는 심장 엑스레이를 찍어놓았다.
여성회장님의 말이 생각나서
수련 때 가슴 통증이 무엇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
수련을 마치고와 다시 엑스레이를 찍었다.
그리고 병원 예약 당일,
담당의사에게 통증이 있었다는 말을 하니
“심근경색은 10분 만에 운명을 달리할 수 있는데
굉장히 위험한 순간을 잘 넘기셨네요.”하며
사진을 보자고 하여
두 가지 사진을 함께 보게 되었다.
그 엑스레이 사진은
내가 보아도 확연히 다르게 보였다.
사진을 본 담당의사는
“어~ 다 완치가 되셨네요.” 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나는 관상동맥확장수술은 하지 않고
지금까지 숨이 차거나 하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성의 없던
나의 첫 번째 수련 결과를 입증하기 위해서
합창단과 함께했던 북한산 인수봉 등산을
나 혼자 올라 보기로 하고 단독 등산을 감행하였다.
그런데 도봉동 버스 주차장에서부터
인수봉 근처에 있는 천축사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숨도 차지 않고 오를 수 있었다.
진심이 내재 되어있지 않던 나의 첫 번째 수련으로도
한울님의 감응이 내 몸에 모셔져 있었다는 것에
감탄을 금할 수 없으면서
나 자신이 스승님께
얼마나 오만 방자했었는지를 참회하면서
진실한 천도교인으로 다시 태어난 인생의 황혼을
참되게 살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