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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
동학 설화소설
제16화 _부안 위도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복 이야기
채길순_ 소설가, 명지전문대학교 교수
무쇠 솥에는 아직 미미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복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섬뜩섬뜩한 한기가
몸을 찌르고 지나갔다. 날은 이미 밝아 있었다.
복은 목이 타서 솥뚜껑을 밀어 바가지에 물을 떠서
몇 모금을 넘겼다. 미지근한 물이 창자를 타고
넘어가자, 흐리던 눈앞이 조금씩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썰렁한 겨울 햇살이 텅빈 황토밭을
점령하고 있었다.
세상이 적막하다고 깨닫는 순간 복의 귓가로 천둥이 스쳐 지나가고, 눈앞에 어른거리던 겨울 햇살이 한순간에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아! 복은 마루 밑 군불 부엌을 기어 나와 재각 마당으로 나왔다. 네 칸 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댓돌에 그 많던 신발도 모두 사라졌고, 마당 한쪽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밥을 지어먹던 솥도 뚜껑이 열린 채 텅 비어 있었다.
복은 재실 대문을 나와 언덕에 올라갔다. 스무 살이나 된 복은 마치 어미젖을 떼지 못한 아이처럼 사람들을 따라붙어야겠다고 작정했다. 가물가물 내려다보이는 길은 텅 비었고, 붉은 흙 언덕으로 찬바람이 불어가고 있었다. 하늘로 새 떼가 활 모양으로 날아 그 마저도 가뭇없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이제 정말 나 혼자 남았구나! 이를 깨닫는 순간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고, 무너지듯이 스르르 주저앉았다, 당장 사는 길은 부뚜막 온기에 기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 엉금엉금 기어서 다시 재각 군불 부뚜막 솜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불 속에 들어가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자리를 잡으려할 때, 문득 작은 염낭 하나가 등허리 쪽에 걸렸다.
아, 어머니! 이번에는 울컥 울음이 목젖을 타고 올라왔다. 복이 어머니가 살 가망이 없는 자식을 버리고 남은 동생들을 데리고 떠나면서 두고 간 돈이었다. 만일 복이 알았더라면 돈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곧 죽을 몸인데 돈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복의 집은 해주 성을 막 벗어난 곳에 있었다. 복의 몸에 이상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여기 저기 타작마당이 한창이던 늦가을 무렵이었다. 며칠 정신없이 기침을 하다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폐암 말기! 성 밖 양의원에서 내린 진단이었다. 양의사가 복이 듣는 데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어머니에게는 데리고 가서 며칠 먹고 싶은 것 해먹이고 떠나보내라고 했다.
병원에서 돌아온 그날부터 복은 골방에 홀로 지내게 되었다. 양의사가 미군 부대를 통해서 나오는 약도 소용없다고 주지 않았다. 복의 어머니가 양의사에게 통사정해서 며칠 치 약을 받아와서 먹었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마치 저승사자의 발자국처럼 멀리서 포성이 뚜벅뚜벅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난여름에는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가 한반도 해방에 대구와 부산만을 남겨놓았다고 들떠 선전했다. 그런데 미군과 남측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이번에는 인민군이 속수무책으로 밀려서 평양까지 내줬다. 그렇지만 중국 인민군 개입으로 인민군이 다시 밀고 내려오는 중이라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이기라도 하 듯 점차 포성이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날 밤에 어머니가 다급하게 말했다.
“피난을 가야 살 수 있단다. 복이 너 우리를 따라나설 수 있겠니?”
어머니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복이 혼자 여기에 남아 있겠다고 말하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복이는 솜이불을 두르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따라 피난 통통배에 올랐다. 배 안에는 사람들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배가 떠나던 첫날은 복이 무사했지만 갑자기 기침이 다시 시작되면서 사람들 앞에서 피를 토하는 바람에 폐병이 들통 났다. 이제 숨길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복이는 누에꼬치처럼 이불에 말려서 바람 부는 갑판으로 홀로 버려지는 신세가 되었다.
“아이고! 이 애가 아비 없는 불쌍한 아이예요. 비록 죽어도 내 눈으로 봐야지 어떻게 혼자 버려두고 온단 말이에요!”
복이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울면서 하소연했지만 배를 탄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냉정했다.
“아주머니의 처지가 딱한 줄은 알지만, 그 애 때문에 아주머니와 애들, 우리 모두 죽을 수 있는 건 왜 생각 못 하세요?”
맞는 말이었다. 그나마 복이를 당장 바다에 던져버리자는 말이 나오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게 시간이 흘러 배가 부안 줄포 항에 들어왔다. 그래도 배 안에는 천도교인들이 많아서 옛적부터 동학쟁이들이 많았던 부안 줄포를 선택한 것이다. 육지에 내려서자 사람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어디로 갈까 오래 망설이던 사람들은 부안의 천도교인들이 소개해 준 영월 신 씨 재각에 묵었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포함하여 많은 천도교인들이 들어왔다. 부안의 천도교인들이 마당에 솥을 걸어주고 양식도 추렴해줬다. 여기까지는 부안 천도교도의 덕을 본 셈이었다.
그렇지만 복은 여기서 다시 군불 부뚜막으로 내쳐졌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사정에서인지 어머니와 동생들이 사람들과 함께 감쪽같이 떠나버린 것이다.
홀로 남은 복에게 세상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제 초저녁에 토한 피가 검은 피 떡이 되어 사방으로 얼룩져 있었다. 어머니도 더 심해진 복의 병세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이제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한다는 생각에 이르렀지만 고작 복이 할 수 있는 일이 솥뚜껑을 열어 바가지에 물을 퍼 마시는 일뿐이었다.
그래도 세상의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눈앞에 말라붙은 검은 피떡이 얼룩진 뜨락을 넘어 마당에 하얀 대나무 화살촉에 흰 수숫대 화살이 날아와 땅에 꽂혔다. 저 화살이 어디서 날아왔을까 싶었을 때 흰옷을 입은 아이가 불쑥 나타났다. 아이가 엎드려 화살을 뽑아 드는 순간, 아이와 복의 눈이 마주쳤다. 아이가 봉두난발인 복의 행색에 조금도 놀라는 기색도 없이 물었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누구냐고 묻는 너는 누구냐?”
“히히히, 아저씨는 엉터리! 내가 먼저 물었으니 아저씨가 먼저 대답해야지요.”
“나는 멀리 황해도 해주에서 온 복이라는 폐병환자다. 이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니 가까이 오지 마라.”
“나는 요 너머 줄포에 사는 동이라오.”
“너는 내가 무섭지 않으냐?”
“하나도 안 무섭소. 그나저나 여기서 뭐하고 계시오? 살려면 어서 여기를 떠나 섬으로 가시오.”
“섬으로 가라니? 이런 몸으로 어디를 간단 말이냐?”
“여기서 하루 길 떨어진 곳에 격포가 있소. 오늘 저녁 저물녘이 물이 차는 시각이니 거기로 오시오. 내가 배를 대어 위도라는 외딴 섬에 데려다 줄 테니 거기서 49일 수도를 하시오. 당신의 병은 당신 스스로 만들었으니 스스로 수도하여 병을 고치시오.”
이 말 끝에 아이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아니, 애초부터 아이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복이 잠시 헛것을 본 것 같기도 했다. 복은 마치 무언가에 호되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복이 천도교를 믿는다면서 어째서 주문을 외어 수도할 생각을 하지 못했단 말인가? 복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무슨 병에 들었는지 꼿꼿이 앉아서 늘 주문을 외고 있었다. 그러다 앉았던 몸이 약간 기울어져 세상을 뜬 모습을 보았다. 어쩌면 복도 그렇게 세상을 뜰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복은 아까 아이의 말대로 격포로 갈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지낼 것인가 잠깐 망설였다. 만일 하룻길 격포로 갔다가 아이를 만나지 못하면 먼 길을 되돌아와야 한다. 복은 길을 나서기로 작정했다.
머리맡에 놓인 며칠 식량과 이불과 입성을 챙기자 제법 묵직한 보따리가 되었다.
힘든 걸음을 옮겨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이르렀을 때 해가 설핏했고, 언덕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하자 갑자기 기침이 일고 왈칵 피 한 덩어리를 토해냈다. 그 순간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와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피 묻은 입술을 닦고 다시 달라붙은 기침을 진정시켰다. 복이 천천히 일어나 더듬듯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내리는 포구에 닿았을 때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고, 황포돛배가 물결에 실려 일렁이고 있었다. 잠시 헛것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흰옷 입은 아이가 배 앞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머리를 흰 수건으로 질끈 동여 매 머나 먼 섬도 거뜬히 들어갈 만큼 든든해 보였다.
섬으로 들어간다면 먹고 지낼 양식이 필요하고, 이를 상의하고 싶은데, 아이는 장승같이 뻣뻣이 선 채 말이 없었다. 어쩌면 아이는 나를 섬에다 내다버리는 일을 맡았는지도 모른다.
“섬에 들어간다면 양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복의 말에 아이는 말 대신 배 위에 실린 가마니를 가리켰다. 복이 배에 오르자 아이는 서둘러 닻을 올리고 밧줄을 풀고 노를 잡았다. 모든 과정이 능숙한 어른 사공처럼 익숙했다.
돛에 순풍을 먹은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서 멀어졌고, 빠르게 어둠이 몰려왔다. 갑자기 복의 몸에 한기가 몰려오고 다시 기침이 시작되었다. 배가 심하게 출렁대면서 속이 뒤집어지고 멀미가 났다. 황해도 몽금포에서 며칠 배를 타고 내려올 때도 하지 않던 배 멀미였다. 그렇다면 병이 깊어져 몸이 더 쇠약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속이 울렁거리면서 먹은 것도 없는데 연신 쓴 물을 토해냈다. 그래도 아이는 말없이 노를 저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복이 지쳐서 배 바닥에 드러누워 이리저리 몸을 굴리고 있었다. 문득 별들이 총총한 하얀 밤하늘이 복의 눈에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하늘에 별들이 복이를 향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아! 하늘의 기운이 복의 몸속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이윽고 배가 섬에 닿았다. 아이가 배를 대고 말없이 곡식 가마니를 바닷가에 내려놓았다.
“나는 바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이는 닿을 내릴 틈도 없이 뱃머리를 돌렸다. 복이 뭐라 말을 하려고 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덜컥! 이제 죽음의 땅에 홀로 버려졌다는 현실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복의 입에서 주문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여태 잊고 있던 주문 암송이었다. 주문을 외면서 하늘의 별빛을 따라 바닷가 바위굴을 찾아 나섰다. 당장 몸을 눕혀 잠 잘 곳을 찾아야 한다. 바위를 더듬어 한참을 헤매고 있을 때 간신히 굴 하나를 찾았다. 안도의 숨을 내쉬는 순간, 토끼 몇 마리가 굴을 빠져나가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곧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 세상에 나 홀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생물이 곁에 있다는 것이 안심 되었다.
밤에 찾은 바위굴은 밝은 낮에 보아도 살아가기 맞춤한 곳이었다.
그날부터 복은 주문을 소리 내어 암송했다.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주문은 바윗굴을 빠져나가 먼 바다로 먼 하늘로 퍼져나갔다. 몸 안에 빼곡하게 들어있던 어둠이 차츰 몸 밖으로 조금씩 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복의 몸은 차츰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몇날 며칠이 흘렀을까, 한 밤중이었는데 잠속인지 생시인지, 아니면 꿈속에서인지 정신이 아득하게 어지럽고 몸이 허공으로 부유(浮遊)하듯이 어디론가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몸이 흐르는 동안 복은 정신을 수습하지 못한 채, 몸이 방류된 채 어디론가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곳에서 부유하는 몸을 멈추고 싶은데, 미처 자기 자신의 몸을 스스로 수습할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에 몸이 머물러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세상이 온통 눈부시게 희었고, 금빛 햇살이 강하게 내려쏘고 있었다. 갑자기 몸이 몹시 섬뜩하고 떨렸으며, 밖으로부터는 신령의 기운이 접했으며, 안에서는 한울님의 말씀이 내려왔다.
“들어라. 내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니라. 부디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의심치 말고 의심치 말라. 너는 이미 무궁하고 무궁한 도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도를 잘 닦고 익혀서 글을 지어 사람을 널리 가르치고 법을 만들어 덕을 펴라. 그러면 너로 하여금 장생케 하여 세상에서 빛나게 하리라.”
복의 눈에 들어온 세상은 금빛이었다. 마당에는 푸른 풀들이 돋아있고 멀리 아지랑이 너머로 아득하게 보이는 산은 푸르렀다.
이제 두꺼운 솜이불이 무거운 절기가 되어서 반듯하게 개어 놓았다.
이때 푸른 풀 위로 대나무 촉을 한 화살 하나가 날아와 꽂혔다. 흰옷을 입은 아이가 달려와 화살을 집어 들었다. 머리에 흰 수건을 이미 동여매고 있어서 전날 같으면 금방이라도 돛배의 노를 저어갈 차림이었다.
복은 다시 만난 아이가 반가워서 말을 걸었다.
“이 얘, 지금 돛배는 어디다 뒀느냐?”
“돛배라니요? 이런 뭍에서 무슨 배란 말이오?”
그제야 복은 모든 정황을 한꺼번에 알아차리고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여 물었다.
“너는 나를 처음 보느냐?”
화살을 손에 든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면 이 재각에 머물던 사람들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혹시 들었느냐?”
“아하! 쩌어기 황해도에서 통통배를 타고 줄포항에 내려온 사람들 말씀이지요?”
“그래 맞다!”
“우리 아버지가 그러는데 태인 김제 전주 익산 사방으로 흩어져 갔다고 해요.”
“그러냐? 너 혹시 천도교를 믿느냐?”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주문 외는 교 말이오?”
“그래, 맞다. 좋은 교이니 지성으로 믿어라.”
“아저씨는 여기서 혼자 뭘 하셨어요?”
“너, 혹시 주문 외는 소리를 듣지 못했느냐?”
“들었어요! 가끔 비 오는 날이나 바람이 부는 날이면 멀리서 주문 외는 소리가 들려왔지요.”
복은 서둘러 봇짐을 싸기 시작했다.
“여기서 익산까지는 얼마나 머냐?”
“잘 모르기는 해도 전주 익산이 거기서 거기인께 백오십 리 길이요.”
“잘 알았다. 인연이 되면 다시 볼 날이 있겠지.”
복은 짐을 거뜬히 봇짐을 지고 길을 나서려다 뒤돌아보며 물었다.
“여기가 어디냐?”
“전에도 묻더니 또 물어요? 여기는 줄포 영월 신 씨네 재각인디요, 옛적에 동학쟁이들이 여기 모여서 주문을 외고, 싸움에 나섰던 곳이라고 했어요.”
“너 지금, 전에 너를 만났다고 했느냐?”
복이 잠시 머리를 갸우뚱했지만, 어차피 말로 해명되지 않은 기이한 일들이 엉켜 있는 터라 이것저것 헤아리지 않기로 했다. 어쨌거나 복은 한겨울 격포항에서 위도로 들어가 49일 기도 끝에 다시 여기까지 밀려 나왔고, 복의 몸은 지금 줄포에 와 있다.
“이 얘, 하나 더 물어보자. 너 혹시 내 망건을 보지 못했느냐? 분명히 머리맡에 뒀는데 보이지 않는구나.”
“히히히, 아저씨는 바보, 망건 쓰고 망건을 찾아요.”
“응? 하하하. 그렇구나. 내가 정말 바보로구나.”
복이 얼른 머리에 쓴 망건을 반듯하게 고쳐 썼다.
“망건 아저씨, 어디로 가요?”
“나는 익산 사자암으로 간다. 거기는 옛적에 동학 2세 교주 해월 선생이 49일 기도를 올린 곳이란다.”
“그 말은 저도 아버지한테 들었어요.”
“그래, 인연이 있으면 또 보자.”
“예, 망건 아저씨 안녕히 가세요.”
말끝에 아이가 활에 화살을 먹여 화살을 쏘아 올렸다. 화살이 푸른 하늘로 아득히 멀어졌다. 복과 아이의 눈이 까만 점으로 멀어지는 화살의 궤적을 쫓았다. 화살은 황토 언덕 푸른 보리밭에 떨어졌다. 화살이 떨어진 보리밭에 봄바람이 불어 바닷물처럼 일렁였고, 그 위로 배뱃종! 종달새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아이가 화살을 줍기 위해 뛰어갔고, 복은 봇짐을 지고 길을 나섰다.
복이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복은 옛적에 책에서 읽었던 창도주 수운의 득도 후의 심경을 노래한 가사 구절이 생각나서 흥얼흥얼 읊조렸다.
“좋을시구 좋을시구 이내 신명 좋을 시구, 구미산수 좋은 풍경 물형으로 생겼다가 이내 운수 맞혔도다. 지지엽엽 좋은 풍경 군자 낙지 아닐런가.……아무리 좋다 해도 내아니면 이러하며 내아니면 이런 산수 아동방(我東方) 있을소냐. 나도 또한 신선이라 비상천(飛上天) 한다 해도 이내 선경 구미 용담 다시 보기 어렵도다.“
복 앞에 펼쳐진 세상은 어제 보던 하늘과 땅, 산과 시냇물, 나무와 풀이 아니었다. 온 세상은 일순간에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산천, 선경이 되어 있었다.
복은 몸과 마음이 구름을 탄 듯 가벼워져서 익산 사자암에 들어 49일 기도를 새롭게 시작했다.
복이 수도를 하는 동안 수련으로 폐병을 고쳤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천도교에 입도했다고 전한다. 복의 수련법은 영험하기로 소문이 나서 유방암 말기 환자와 폐병 환자가 치유되는 이적이 많았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