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3]
탐방
세 가지 기쁜 일과 한 가지 슬픈 일
편집실
지난 2월 신인간사는
올해로 백세를 맞이하신 이영복 종법사 댁을 방문했다.
거의 평생을 천도교인의 삶을 우선으로 하셨던
종법사님께서 느끼는 백세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여쭤 봤다.
사전에 미처 알려드리지도 않고 불쑥 질문을 던졌는데,
그 이유는 평상시의 생각이 듣고 싶어서였다.
종법사님은
흐트러짐 없이 단번에 질문에 대답해주신다.
먼저, 천도교를 믿지 않았으면
내가 백세를 살 수 있었을까, 생각을 합니다.
왜냐? 잘 믿었건 못 믿었건
한평생 한울님을 모시겠다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한울님의 감응, 스승님의 은덕이 있어서
그래도 백세를 살지 않았겠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다음은, 어느 부모님이든 그렇겠지만,
우리 부모님이 저를 건강하게 낳아주셨고
키워주신 은덕이 작용했겠지요.
또 늘 마음속에 생각을 하고 있지만,
66년을 우리 성수당과 같이 살았습니다.
제가 교회에 교령으로 재직할 때나 아닐 때나
성수당이 내조를 참 잘했어요.
감사한 것은 일 년 365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삼시세끼를 더운 음식으로 대접을 해줬습니다.
상당히 고마운 일입니다.
이런 점들이 모여서 오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고인이 된 성수당은 당신이 80세,
제가 90세가 될 때까지 살기를 원했습니다.
우리 고인이 된 사람은 87세에 돌아가셨으니까
원했던 나이에서 7년을 더 사셨고,
저는 소원하는 나이에서 10년을 더 살고 있습니다.
100세를 살면서 생각해 보니까,
저는 천도교 이외는 딴 데 나가 본적이 없습니다.
천도교를 위해
조금이라도 무엇을 바쳤나? 생각을 해보았더니,
먼저 후회가 막급합니다.
젊었을 때 조금 더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을 때,
교회에 정성을 다해서 교회 일을 했더라면,
100세가 왔을 때 후회가 없을 텐데 하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도 제가 기쁘게 생각하는 것은,
용담성지가 천도교 소유로 돌아온 것입니다.
제가 교령 때, 시천교하고 어려웠던 소송 건이
완전히 끝나서 용담 성지가 천도교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많은 분들, 최덕신, 최익환 선배님들도
많이 노력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생각나는 분이 재단 사무국장으로 계시던
박도현 아버지 박춘억, 그분이
시천교의 대도사하고 여러 가지로 합세를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고생하신 분이
지금 중앙도서관장으로 있는 이창번 씨입니다.
애 참 많이 썼습니다.
많은 분들이 노력을 참 많이 했습니다.
나는 별로 힘을 보태지 못했지만,
제가 교령을 할 때 와서
천도교 소유로 돌아왔다는 것이 제일 기쁩니다.
그리고 그 용담성지에 수도원을 지은 것입니다.
그때는 용담성지에 잘 곳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제가 취임해서 처음 관리사무실을 만들고,
성지에 수도원이 없으면 되는가,
해서 수도원을 지었습니다.
지금까지 연속적으로
교인들이 수도를 하러 다녀간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천도교가 경제단체도 노동단체도 아닌데,
종교인이 신앙이 없으면 되겠습니까,
그 일이 또 기쁩니다.
그리고 해월신사 묘소의 묘비건립입니다.
해월신사님은 그동안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분입니다.
그런데 묘소에 묘비 하나가 없었습니다.
그곳에 묘비를 건립했다고 하는 것,
그것도 생각이 납니다.
그래도 생각이 있었구나, 합니다.
그리고 연성수련입니다.
그때까지 우리 교회는 연성을 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을 못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동의를 하셔서 수도연성을 시작했습니다.
제 임기 6년 동안에 수도연성을 가장 많이 했습니다.
자화자찬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것은
생각이 있어서 했구나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살아오고 있는데,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젊었을 때 해야 하는데, 100세가 되면 뭐합니까,
그것은 자랑이 될 게 없습니다.
죽지 않으면 100세를 사는 것입니다.
과정이 중요하지요.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가느냐가 문제입니다.
후회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젊은이들이여! 젊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 젊은 때를 잘 활용하세요.”
100세를 살면서 그 바탕 위에서 호소합니다.
우리가 천도교에 입문을 해서 너나할 것 없이
천도교인으로 자처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사님 「권도문」에 보면
아무리 천도교에 입문을 해서 살아간다고 해도
천도교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천도교인이라고 해도 한울님이 간섭치 못하고
한울님이 간섭치 아니하면
썼다가도 죽고 앉았다가도 죽음이 닥치는 것입니다.
천도교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한울님이 용서한다고 해도
자기가 용서를 못하는 것입니다.
수련을 안 하면 안 된다하는 말씀입니다.
천도교인이라면
다른 것보다 서로 화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합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상대방과 하나가 되려고 애를 써야지,
상대방이 내게 들어와서
화합을 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대신사님이 ‘제서’에
득난구난得難求難 실시비난實是非難,
얻기도 어렵고 구하기도 어려우나
실은 이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로 어려운 것은 기운이 화하여
봄기운에 만물이 화하는 것처럼 되는 것,
이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화합은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상대방한테 들어가야 상대방도 나에게 온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지켜서
천도교인들은 화합을 해나가야
열세를 면할 수 있고 또 포덕을 할 수 있습니다.
나만 옳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의 잘못만 생각하면 어렵습니다.
제가 좋은 경험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교령으로 들어오니까
구파교인들이 용담연원이라 해서
천도교중앙총부랑은 딱 선을 긋고
성미, 시일도 따로 냈습니다.
그 원인은 최덕신 교령님이 계실 때
감사원에서 8도정을 출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파가 갈렸습니다.
그런데 구파 두목 이종해 종법사가,
이영복이가 교령이 됐으니까,
용담연원을 해체하고
중앙총부로 돌아간다고 하면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이 헤어지는 것은 쉬워도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상대방에게 마음을 주지 않고 내 권력만 믿고 말하면,
우리 교회뿐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법칙이 다 그렇습니다.
‘너 그럴래?’ 하면서 경이원지만 하려고 들면
차츰 멀어졌지 가까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천도교인들은
간부건 교역자건 교인이건 이렇게 나가야 합니다.
대신사님이
상대의 작은 허물을 캐려고 하지 말고
내 것을 상대방에게 주라(他人細過 勿論我心
我心小慧 以施於人)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 된 사람이
스승님들의 말씀을 마음속 깊이 두고
실천을 못하면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천도교의 기품이
남을 탓하는 쪽으로 마음이 가면,
동덕애라는 것이 희박해집니다.
동덕이라고 하면 덕을 같이한다는 것인데,
이게 멀어지자고 동덕입니까,
가까워지자고 동덕입니다.
대신사님께서 합기덕 정기심이라고 했습니다.
한울님의 덕과도 합해져야 한다고 했고
한울님 자리에 내 마음이 가야 된다고도 했습니다.
그렇게 동덕이라는 말은 하면서,
사인여천 한다는 말을 하면서.... 사인여천이 뭐여요?
상대방을 한울님처럼 섬길 수 있게
내 마음이 되어져야 섬기는 것이지,
상대방이 나를 사인여천 해달라고... 그건
모순이 되도 그런 모순이 없잖아요.
이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많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 기풍이 살아나야
성사님 때 같이, 신사님 때 같이,
서로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유대가 형성이 되서
이 근본이 발전되어 나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것을 잘하는 사람이냐,
잘 못하지만 생각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면서 내가 잘못했을 때, 후회를 하면서
내가 잘못했구나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슬픈 일이 있는데 고향입니다.
제가 평안북도 태천사람입니다.
고치강의 노래로 유명한 곳입니다.
동학혁명 때 많은 사람들이 고치강물에 빠져서
산 사람이 영혼이 된 곳입니다.
교세도 센 곳인데, 제가 고향을 떠난 지
70여년이 되도록 고향엘 가보지 못하고
소식도 못 듣고 있습니다.
제일 슬프고 제일 한스럽고
인간적으로 제일 마음에 걸립니다.
고향 땅, 부모님, 가족들 한번 만나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100세가 되었구나 하는 여한은
누구보다 강합니다.
그러나 어떡합니까. 사람은 늙어가고 세월은 갑니다.
세월을 묶어둘 수는 없습니다.
**
이북에 고향을 둔 분들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세월은 무심히 흘러갑니다.
종법사님의 간절한 소원이
꼭 이루어지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