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몽골의 침입-5 : 강화도 천도
04.09.18
개경이 몽골군에게 포위되면서 1231년 (고종 18년) 12월 1일 몽골과 화친 논의가 시작되었다. 다음날 안북도호부(평남 안주)에 지휘부를 두고 있던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이가 보낸 사신 3명이 개경에 도착했다. 오는 시간을 감안하면 이 몽골 사신은 화친 논의가 시작되기 전에 출발했을것이다.
몽골 사신은 고종을 대면하는 대관전에서 털가죽 군복 차림에 활과 칼까지 차고 들어가려다 조정 대신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임금이 몽골 사신을 대하는 것은, 10여년 전 거란족을 물리친 후 전례가 있어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국왕 접견 때마다 의례 문제로 인해 소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살리타이가 보낸 사신의 첩문에 의하면, 그들은 몽골 사신 저고여의 피살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왔다고 밝히고 항복을 요구하고 있었다.
또 서신에서 살리타이는 말 2만 필, 처녀 총각 수천 명, 붉은 옷감 1만 필, 수달가죽 1만 령을 요구하고, 따로 군사들을 옷까지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고려는 몽골 사자에게 우선 황금 70근, 백금 1천 3백근, 옷 1천 벌, 말 170필을 주어 보냈다. 이어 황금 19근, 백금 460근, 은병 116구, 비단옷, 안장, 말 150필, 명주옷 2천벌, 수달가죽 75령을 살리타이에게 보냈다. 또 황금 49근, 백금 1420근, 은병 120구, 모시, 수달 가죽, 말 따위의 물품도 휘하 장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따로 챙겨 보냈다. 그외에도 정확하게 통계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건을 보내주었다.
12월 29일, 조정에서는 몽골에 항복해 사신으로 개경에 왔던 조숙창에게 대장군 직함을 주고 다시 정식 사신으로 삼아 몽골 사신과 함께 살리타이에게로 보냈다. 조숙창은 예전 거란 유민들이 침입하였을 때 도와줘서 감사하며, 저고여 살해 사건은 몽골과 고려를 이간질시키려는 동진의 소행이며, 앞으로 몽골 황제를 받들면서 지성을 다하겠다는 내용을 적은 국서를 들고 몽골 군영으로 찾아갔다.
이제 고려 조정은 사실상 몽골군에게 항복한 셈이 되었다. 살리타이는 항복의 표시로 점령한 주와 군에 다로가치 72명을 두어 그 지방을 행정을 실제로 관활하게 하였다. 이렇게 마무리를 지은 뒤인 1232년 1월 11일, 고려를 침략한 지 6개월 만에 다로가치를 도와줄 소수의 주둔군을 남겨놓고 군사를 거두어 몽골로 귀환했다. 어찌 보면 매우 신속한 철수였다.
몽골군이 철수한 후, 이어서 1월 23일 개경에 내려졌던 계엄령이 해제되고, 2월 1일에는 출정하였던 방어군이 회군하여 돌아왔다. 화친 성립에 대한 후속조처가 신속하게 진행된 것이다.
이 무렵부터 천도에 대한 논의가 공식적으로 제기되었다.
1231년 12월 중순경, 승천부(경기 개풍군)의 부사 윤인과 녹사 박문의가 최이를 찾아와서, 강화도는 피난하기에 좋은 곳이라는 말을 했다. 이것이 천도와 관련된 최초의 이야기다.
이 두 사람은 몽골군이 개경까지 밀고 내려올 때, 자기 가족과 재산을 강화도로 빼돌리고 있었다. 이들이 강화도를 거론한 것은 그런 사정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강화도는 승천부와 바로 마주보고 있으며 수도인 개경에서 가까우면서도 바다로 둘러싸여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한 곳이다. 그래서 몽골군의 남하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강화도로 피난 가 있었고 개경에서도 강화도로 피난을 간 사람이 적지 않았다.
몽골군의 침략에 대한 대응책을 두고 고심하던 최이는 강화도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다.
1232년 2월 20일, 마침내 최이는 전목사에 재상들을 모이게 하여 천도 문제를 논의토록 하였다. 이때는 몽골 사신 도단이란 자가 도성에 들어와 도통고려국사라 칭하며 감시의 눈길을 보내고 있을 때라 비밀에 부친 회의였다. 비밀회의였지만 이것이 최초의 공식 논의이다. 여기서 모든 재상들은 몽골과의 화친 성립과 재침략의 두려움을 들어 반대했다. 최이는 천도를 단행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러던 와중, 몽골 사신 도단은 사신 접대를 관장하는 관리 한 명을 자신에게 소홀히 한다 하여 타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천도를 결심하고 있던 최이에게 이런 사건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몽골의 흉폭함을 들어 천도쪽으로 여론을 몰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232년 5월 21일, 최이는 선경전에 재상들을 모이게 해 몽골에 대한 방어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천도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재상들은 천도를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최이는 할 수 없이 이틀 후인 5월 23일, 다시 모임을 가졌다. 이번에는 4품 이상의 모든 문무관리들을 모이게 했다. 이번에도 몽골에 대한 방어책을 논의했는데, 대부분의 관리들은 야전을 극구 회피하고 수성전만 이야기할 뿐이었다. 동선역과 안북성 전투에서 몽골군과 야전으로 맞섰다 대패한 경험때문에 그리 했으리라.
오직 두 사람, 최이의 최측근인 대집성과 정무만이 천도를 주장했다.
마음은 조급한데 여론이 자기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자 최이는 마지막 비상 수단을 동원했다. 바로 무력이었다.
1232년 6월 16일 아침, 최이는 자신의 사택에 재상들을 모두 모이게 했다. 사병들을 동원하여 회의장을 철저하게 둘러싸게 한 후, 재상들을 소집했다. 들어오는 재상들 모두 위압적인 분위기에 벌써부터 겁을 먹고 있었다.
최이는 직접 회의를 주재하며 일방적으로 천도의 당위성을 피력해나갔다. 모두 최이가 두려워 눈치를 살피며 한 마디도 말을 못하고 있을 때, 참지정사(정 2품)를 지내고 있는 유승단이 나서서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김은 당연한 일이다. 예의로써 섬기고 신의로써 사귀면 저들(몽골)이무슨 명분으로 우리를 괴롭히겠는가? 성곽을 버리고 종묘사직을 돌아보지 않으면서 섬 안에 엎드려 구차하게 세월만 보내면, 변방의 백성들은 장정이 되어 칼날에 쓰러지고, 노약자들은 끌려가 포로나 노예가 될 것이니, 이것을 어찌 국가의 좋은 계책이라 하겠는가?"
유승단의 이런 생각은 천도를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기도 했으며, 천도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최이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다.
천도 반대론은 최이의 의중을 정확이 꿰뚫어 본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관료들은 최이가 무서워 유승단의 의견에 동조하지 못했다. 최이는 유승단의 발언을 무시하고 기필코 천도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강력히 드러냈다.
그때, 회의장 밖에서 돌발 사태가 발생했다. 야별초 지유(중간급 지휘관) 김세충이 회의장 문을 박차고 들어와 최이를 힐난하면서 대들었다.
"개경은 태조 대왕때부터 지켜내려와 무려 3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성이 견고하고 군사와 양식이 풍족하니 진실로 힘을 합하면 사직을 지켜낼 수 있는데, 이곳을 버리고 장차 어디로 도읍하겠다는 것입니까?"
김세충의 생각은 조금 막연하긴 했지만, 개경을 고수해야 한다는 확실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최이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사병인 야별초 지휘관이 회의장에 불쑥 들어와 자신의 주장에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는 것 자체가 최이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노기가 치솟은 최이가 김세충에게, 그럼 개경을 지킬 구체적인 방도가 뭐냐고 되물었다. 흥분해 있던 김세충이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최이의 심복인 어사대부 대집성이 나섰다.
"김세충이 아녀자의 말을 따라 감히 국가 중대사를 그르치려고 하니 그를 참수하여 다시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응양군 상장군 김현보도 대집성의 말에 동조하고 나서자 최이는 명을 내려 김세충을 참수케 했다. 소신있게 의견을 털어놓은 김세충은 바로 군사들의 손에 붙들려 회의장 밖으로 끌려나와 그 자리에서 참수되고 말았다. 이렇게 조성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천도에 반대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천도를 작정하고 회의를 강압적으로 몰아가던 최이에게 김세충은 언행은 오히려 반전의 호기였다. 어차피 누군가는 희생양이 되어야 했을 테니까.
김세충을 참수한 그날, 1232년 6월 16일, 최이는 천도를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국왕 이하 모든 관리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최이는 고종을 협박하여 강화도로 옮길 것을 요구했지만 왕은 망설이고 있었다. 이에 개의치 않고 최이는 곡식 운반용 수레 1백여개를 강제 동원하여 자신의 재산과 가재도구부터 강화도로 옮겼다. 천도를 선포한 바로 그날이다. 이때 그의 친족들과 다수의 측근들도 최이와 함께 행동을 햇는데, 이는 고종을 압박하는 효과가 있었다.
최이는 여러 관부에 명령하여 보름 내에 도성 안의 모든 백성들을 내보내게 했다. 즉시 도성 안 곳곳에 다음과 같은 살벌한 방문이 나붙었다.
'지체하여 출발할 기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이어 여러 지방에도 사람을 보내 강제로 백성들을 가까운 섬이나 산성으로 옮기도록 했다. 다음날 6월 17일, 2천명의 군사들을 징발하여 강화도에서 새 궁궐의 조영에 들어갔다.
이런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고종이 천도에 선뜻 나서지 않자 최이는 자연도(영종도)에 유배가 있던 전왕 희종을 다시 불러들였다. 전왕 희종은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오히려 최충헌에게 폐위당하여 1211년 쫓겨났던 왕이다.
최이가 전왕 희종을 다시 개경으로 모셔온 것은 현 국왕 고종에 대한 위협이었다. 만약 고종이 천도에 끝까지 반대하여 고집을 꺾지 않는다면 폐위시키고 전왕을 옹립하겠다는 의도였다. 고종은 천도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천도가 최이의 의도대로 전격 단행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권력이 앞으로 더욱 강성해 지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천도한 강화도를 강도라 부르는데, 이 강도는 최씨 왕조의 왕도나 다름없었다. 강화 천도는 어쩌면 진정한 최씨 왕조의 시작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