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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빠짤라 비구니와 마라 빠삐만의 대화 8
시수빠짤라(Sīsupacālā) 비구니는 사리뿟다 존자의 세 번째 여동생이다. 힌두교도인 어머니를 빼고는 남자 형제 네 분이 모두 비구가 되었고 여자 자매 세 분도 모두 비구니가 되었다. 이곳에서 마라 빠삐만과 대화하고 있는 비구니 세 분인 짤라 비구니와 우빠짤라 비구니와 시수빠짤라 비구니가 모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한 아라한이 되었다. 아라한이 되어 몸과 마음을 가지고 열반에 이를 때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한 열반에 이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업의 수명이 다해 다시 태어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할 때는 오온이 소멸한 반열반에 이른다.
사리뿟다 존자의 가족 모두가 출가를 했지만 브라흐만 계급인 어머님은 힌두교로 남았다는 사실이 인연의 중요함을 느끼게 한다. 더구나 사리뿟다 존자의 어머님이라는 사실이 주는 의미가 남다르다. 그러므로 가족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사실은 흉이 될 수 없는 일이다. 사리뿟다 존자의 어머님께서 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 존자께서 일주일 휴가를 내서 어머님의 임종을 보살피셨다. 이때 어머님께서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이 세상과 하직해서 비로소 가족 모두가 붓다의 가르침에 귀의했다.
어느 날 시수빠짤라 비구니가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탁발하기 위해 사왓티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왓티에서 탁발을 해서 공양을 마친 뒤에 홀로 있기 위해 눈먼 숲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눈먼 숲 깊숙이 들어가서 한 나무 밑에 앉았다. 이때 마라 빠삐만이 시수빠짤라 비구니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시수빠짤라 비구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구니여, 그대는 어떤 이교도의 견해를 좋아하는가?” 이 말을 들은 시수빠짤라 비구니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벗이여, 나는 어떤 이교도의 견해도 좋아하지 않는다.”
인도에서는 모든 수행자들이 걸식을 한다. 이때 걸식을 하는 수행자를 처음에는 비구라고 했다. 비구는 빨리어 빅쿠(bhikkhu)를 소리 나는 대로 음사한 말이다. 이처럼 빅쿠는 처음에는 걸식하는 수행자를 말했지만 나중에 불교에서 계를 받고 출가해서 탁발하는 비구로 바뀌었다. 계를 받지 않고 걸식하는 걸사는 주지 않아도 받기를 원하는 자다. 그러나 계를 받고 출가한 비구는 배가 고파도 주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 붓다께서는 탁발을 나갔지만 신도들이 공양을 올리지 않아서 일주일 동안 굶으신 적이 있었다. 비구와 비구니는 사대품을 보시 받아서 생활하는데 음식, 가사, 약품, 거주처다.
시수빠짤라 비구니가 이교도의 견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견해는 상대에게 강요하는 의미가 있지만 붓다의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라도 단지 삼가는 뜻으로 말한다. 예를 들면 ‘도둑질을 하지마라’가 아니고 ‘도둑질을 하는 것을 삼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붓다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으로 말하기 때문에 남의 견해를 함부로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설령 삿된 견해라고해서 절대 깔보지 않는다. 그들은 아직 붓다의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들의 견해를 집착할 뿐인 것이다.
여기서 이교도의 견해를 빨리어로 빠산다(pāsaṇḍa)라고 한다. 빠산다는 이교도의 가르침을 뜻하는 말이면서 올가미라는 뜻도 있다. ‘빠상 덴띠(pāsaṃ denti)’라고 했을 때는 ‘덫을 놓다’는 뜻으로 올가미를 설치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존재들의 마음에 사견의 덫을 놓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덫에 걸린 이교도들이 견해는 오직 붓다의 가르침으로 풀 수 있다. 이때 붓다의 가르침은 이교도의 견해라고 하지 않는다. 오직 이교도들의 견해를 빠산다라고 한다.
인도에서는 붓다 당시에 여섯 가지 이교도들의 교리가 있었다. 이것을 외도(外道)라고도 하는데 붓다의 가르침이 아닌 다른 스승의 가르침을 말하기 때문에 불교의 입장에서는 외도라는 표현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외도라고 했을 때는 잘못된 견해라거나 삿된 견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붓다는 자신의 견해만 옳고 다른 견해를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견해를 갖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런 견해를 갖는 것은 저마다의 정신적 상태와 인연에 따라 다른 것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따질 일이 아니다.
그러자 마라 빠삐만이 다시 물었다. “누구를 스승으로 삼아 머리를 삭발했는가? 그대는 비구니처럼 보이는데 이교도의 견해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무엇 때문에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가?” 이와 같은 마라 빠삐만의 질문은 매우 단도직입적이고 핵심적인 질문에 해당한다. 도대체 당신은 이교도들의 견해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어떤 누구의 가르침 때문에 출가를 해서 이 고생을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한 것이다.
이에 시수빠짤라 비구니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교도들의 견해는 이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들은 삿된 것을 집착한다. 나는 그들의 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법에 능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수빠짤라 비구니는 다른 견해라고 해서 깔보는 의미로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몰라서 집착하는 것이므로 단지 나는 이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일 뿐이라는 의미다. 아직 붓다의 견해를 다 모르는데 어찌 다 알수 있겠는가하고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말했다. 누구나 그냥 아는 것과 달리 지혜가 있어야 법을 능숙하게 안다. 예를 들어 학교에 다니면 졸업은 하지만 진리를 다 알고 졸업하는 자는 아닌 것이다. 누구나 안다고 말하지만 아는 것에 대한 지혜의 차이는 있기 마련이다. 능숙하다는 것은 깨끗한 마음의 작용인 오온의 행에 속한다. 능숙하면 수행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있고, 능숙하지 못하면 수행을 실천하는 힘이 없다.
계속해서 시수빠짤라 비구니가 말했다. “석가족의 가문에서 태어나신 붓다께서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으니, 모든 것을 극복하고 마라를 정복하신 분, 모든 것에서 해탈하신 분, 집착하지 않는 분, 눈이 있는 자로서 모든 것은 보시네. 모든 업에서 벗어나고 집착을 부수어서 벗어나신 분. 세상에서 존경받는 분은 나의 스승이시니, 나는 그분의 가르침을 좋아하노라.” 이상의 시수빠짤라 비구니의 답변은 붓다를 소개하는 내용이며 붓다에 대한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시수빠짤라 비구니는 아라한으로서 붓다의 가르침을 모두 꿰뚫어서 아는 지혜를 가지고 한 말이다. 이때의 마라는 죽음을 의미한다. 붓다는 반열반에 드셨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지 않아 다시 죽을 일이 없어져서 죽음을 극복하신 분이시다.
여기서 ‘모든 것’은 삽바타(sabbattha)라고 하는데 모든, 일체의, 전부라는 뜻이다. 이때의 모든 것은 여섯 가지를 의미한다. 여섯 가지는 오온, 12처, 18계, 생성, 태어남, 감을 말한다. 첫 번째, 오온은 칸다(khandha)로 몸과 마음의 다섯 가지 무더기인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을 의미한다. 두 번째, 12처는 아야따나(āyatana)로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여섯 가지 감각대상이 접촉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장소를 의미하면 12처는 육문과 육경을 말한다. 인간이 살고 있는 것은 이 육문과 육경의 접촉을 통해서다. 인간의 괴로움과 즐거움이 모두 12가지 장소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일어난 곳에서 사라진다. 그러므로 육문에서 알아차림이 있으면 번뇌가 들어오지 않아 청정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육문을 지키는 알아차림이 없으면 번뇌가 들어와서 주인행세를 한다. 그런 의미에서 12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 번째, 18계는 다뚜(dhātu)로 요소, 계(界) 하나의 세계를 말한다.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인 12처에 다시 여섯 가지 아는 마음을 포함하여 18계라고 한다. 붓다의 가르침에서는 18계를 하나의 세계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세계라고 할 때는 공간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와 인과의 세계로 나누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한 인간의 오온을 세계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간의 몸과 마음인 오온을 다뚜(dhātu)라고 할 때는 오온의 요소, 또는 오온의 계(界)를 말한다. 다뚜(dhātu)는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요소, 구성성분, 요소의 세계, 자연적 조건, 세계, 경험의 세계를 말하기도 하며 다른 뜻으로는 속성, 감각기관, 사리, 유골 등을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물의 성립이나 효력 등에 필요불가결한 성분을 뜻한다. 또는 근본적인 조건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오온을 모양이나 형태로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구성요소로 보거나 하나의 세계로 보는 견해다. 오온이나 이 세계를 모양이나 형태로 보지 않고 구성하고 있는 요소로 볼 때 대상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아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관념으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보아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얻는다.
네 번째, 생성은 바와(bhava)로 존재, 유(有), 생성(生成), 됨, 윤회하고 싶은 마음을 의미한다. 12연기에서 업의 생성을 원인으로 생(生)이란 태어남이 있다고 할 때의 생성이다. 이 말은 되다, 존재가 되게 하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다섯 번째, 태어남은 요니(yoni)로 태어남, 생(生), 탄생의 길이며, 생이라는 뜻의 자띠(jati)와 동의어다. 여섯 번째, 감은 가띠(gati)로 감, 진행, 다른 존재로 나아감, 태어나는 곳을 의미한다. 가띠(gati)는 죽은 뒤에 다른 세계로 태어나기 위해서 가는 것을 말한다. 이때 세 가지인 생성과 태어남과 감은 윤회하는 형태를 의미한다.
존재의 세계에 태어남인 요니(yoni)는 네 가지가 있는데 태생, 난생, 화생, 습생이다. 인간으로 태어날 때는 태생이다. 축생은 태생이 있고 난생도 있다. 화생은 지옥, 아귀, 아수라, 욕계, 색계, 무색계의 태어남이다. 다음으로 간다는 뜻의 나아감이라고 할 때의 가띠(gati)는 네 가지 세계로 나누어서 간다. 첫째, 사악처인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가 있다. 둘째, 인간계가 있다. 셋째, 욕계 여섯 개의 천상이 있다. 네 번째, 범천인 색계, 무색계가 있다. 이상 31개의 존재의 세계 외에는 살아있는 생명의 윤회가 미치지 않는 곳이다.
윤회를 삼사라(saṃsāra)라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재생이라고 하고 힌두교에서는 환생이라고 한다. 재생은 오온이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이며 나라고 할 만한 자아가 없기 때문에 새로운 태어남이라서 재생이라고 한다. 하지만 힌두교는 항상 하는 존재를 인정하는 자아가 있기 때문에 마음이 몸만 바꾸어서 환생이라고 한다. 불교에도 깨달음이 있고 힌두교에도 깨달음이 있고 다른 이교들에게도 깨달음이 있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은 오직 무아를 주장하는 붓다의 가르침과는 차이가 있다.
불교에서 윤회를 삼사라(saṃsāra)라고 하는데 병에 걸린 사람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윤회하는 생명은 몸의 병뿐만 아니라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란 마음의 병에 걸린 자다. 그래서 생로병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윤회를 한다. 병에 걸린 자는 계속 약을 먹어야 하는데 그 중에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약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다. 오직 사성제와 사성제 중에서 도성제인 팔정도 위빠사나 수행으로 병을 치유할 수 있다. 위빠사나의 또 다른 뜻은 무상, 고, 무아를 말한다. 오직 이 세 가지 특성의 지혜가 날 때 집착을 끊어져 해탈에 이른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있는 세간과 무상, 고, 무아가 있는 출세간으로 나뉜다.
이상의 여섯 가지는 몸과 마음을 모두 합쳐서 일컫는 말로 이것을 세계, 일체, 전부,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 붓다께서 내가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할 때의 모든 것은 이상의 여섯 가지를 모두 안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란 한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알았다는 말은 우주 전체의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 붓다의 가르침은 인간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한 깨달음이기 때문에 오직 한 인간의 몸과 마음에 관한 것이 전부다. 나의 깨달음은 팔정도로 실현이 가능해도 남의 깨달음은 내가 전혀 개입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나를 의지처로 삼지 말고 법을 의지처로 삼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의지처로 삼으라고 하셨다. 이때의 몸과 마음은 알아차릴 대상으로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네 가지다.
시수빠짤라 비구니가 한 말 중에 ‘모든 업에서 벗어나고 집착을 부수어서 벗어나신 분’이라는 뜻은 모든 업이 소멸하여 집착이 끊어져 열반에 이르신 분을 말한다. 이때의 집착은 태어남을 일으킨 갈애와 집착을 의미하며 갈애와 집착으로 업을 생성하여 미래의 태어남이 생기는 과정을 말한다. 이처럼 모든 업에서 벗어나고 집착을 부수고 열반을 성취하는 분은 붓다를 말한다. 붓다는 오신통과 누진통까지 얻으신 분으로 스스로 깨달음을 얻으셨으며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셔서 정등각이라고 한다. 이를 빨리어로는 삼마 삼붓다(sammā sambuddha)라고 한다. 지금까지 여기에 나온 비구니들은 모두 붓다의 가르침으로 아라한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같이 붓다의 가르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지만 저마다 다르게 드러내고 있다.
이때 시수빠짤라 비구니의 말을 들은 마라 빠삐만은 “시수빠짤라 비구니가 나를 알아버렸구나.”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면서 바로 그곳에서 사라졌다. 이 순간에 시수빠짤라 비구니의 망상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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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기 기록은 상윳따니까야를 공부하면서 담마끼띠스님께서 하신 말씀을 모아서 보충한 내용입니다. 스님께서는 그냥 경전에 있는 내용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경전을 배경으로 한 다양한 내용을 주석서에 근거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냥 흘려버리기가 아까운 내용이 많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