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2. 울산두레교회 수요기도회
형제들아 자매들아(살전 5:23-28)
친구가 담임 목회자로 있는 장애인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가 다른 장애인 교회들과 다르게 특별한 것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장애가 없는 사람들도 함께 모이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전체 교인수가 100명쯤 되는데 약 60명이 장애인이고, 40명이 비장애인입니다.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 같은 동네에서 이웃하고 있었던 적이 있기 때문에 그 교회 사정을 잘 압니다. 그때는 대부분 20-30대의 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목도 가누지 못하고, 의사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장애인들의 형편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젊거나, 나이가 많거나 동일합니다.
전체 교인 중에 소수지만 형제가 장애인이어서 함께 출석하는 사람들도 있고, 장애인과 결혼한 사람들도 있고,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이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장애인들을 모임에 데려오고, 앉히고, 식사준비를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밥을 떠 먹여주고, 승강기도 없는 아파트계단을 업고 올라가서 데려다 주는 일들은 모두 비장애인들의 몫입니다. 몇 해 전에는 제주도에도 함께 다녀왔다고 하는데, 도로나 계단이나 장애인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거의 없던 과거에는 일 년에 한두 번 야외에 나갈 때 온갖 불편한 일들을 함께 겪어야 합니다. 이 교회 성도들은 30년 가까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이라서 마음은 천사 같을까? 도움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해서 늘 고맙게 생각할까? 사람의 심성은 장애를 가졌거나 장애가 없거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개척교회를 시작했다가 도중에 힘들거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교회를 떠나간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도 30년 가까이 교회로 함께 모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 사람들이 날개 없는 천사들이겠습니까? 그러면 뭘까? 이들은 어떤 이유로 함께 교회로 모일까? 그 해답을 찾는다면, 그분들은 서로에 대한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구분합니다. 섬김을 주는 사람과 섬김을 받는 사람으로 나눕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 여기는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형제라면, 자매라면 장애가 있다고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섬김을 받는 대상이라고 귀찮아 할 수 있겠습니까?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내 형제 내 자매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더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더 사랑하고, 더 이해하고 품으려고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서로 얼굴을 붉힐 일이 생기더라도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것이 형제 자매간에서 흔히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속으로 설교니까 그렇게 말씀하지... “그래도 우리는 형제가 아니고 자매가 아니야”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내 아버지가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면, 함께 교회로 모이는 모든 사람들을 내 형제요, 내 자매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사람, 내 아버지를 믿는 사람”이 형제요, 자매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하나님의 가족이며, 형제요 자매로 여겼습니다. 사도바울에게 다른 가족이 있었고, 다른 형제가 있었는지는 편지에 나타나지 않지만 분명히 바울은 교회의 성도들을 자신의 형제요 자매로 표현했던 많은 부분들이 편지 속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라야만 교회 안에서 가지는 모든 관계들이 변화가 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형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가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경쟁하거나 갈등하는 관계 속에서 지냈던 형제자매에 대한 우리의 이전 경험들 또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만나는 진정한 형제자매로써 함께 나누어야 할 축복을 이렇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1. 거룩한 삶을 소망합니다.
23절에서 사도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룩한 삶을 말함에 있어서 영혼만을 거룩하게 되기를 바란다거나, 몸만을 거룩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전체로써 거룩하게 되기를 바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또 사람은 영과 혼과 몸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데 근거를 제공해 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형제자매로서 서로의 거룩함을 이루는데 이바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거룩한 삶이 바리새인들의 거룩한 삶과 구별되는 것은 이런 점에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적이고 개인적이고 배타적인 거룩함만을 추구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를 거룩한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자신만 거룩하게 살면 된다는 것이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정죄함으로서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과연 바리새인들은 세리나 창기들을 자신의 형제자매로 생각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한 가족처럼 지내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요 먹보”라고 비난하는 것도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도 하나님의 가족이요 형제자매라고 생각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형제자매가 죄인으로 비난받고 있다면, 이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인 것을 사람들 앞에서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모른척하거나 숨기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도 거룩한 삶에 초청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거룩해지려면 직업을 바꾸거나, 하는 일을 당장 그만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들이 형제 자매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그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닌 것처럼 예수님은 그들을 변화시키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가까이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만 있는 그대로, 진리대로 “너희들도 하나님의 자녀다, 너희들도 나의 형제자매다”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든지 변화는 스스로에게 주어지는 과제이지, 우리가 억지로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다른 사람에게 거룩한 삶을 강요하기 이전에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깨끗한 수건에 때가 잘 닦이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들과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거룩한 삶을 영향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있는 믿음과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에 대해서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굳게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세상 어떤 곳에서 살더라도 거룩하게 보전되며, 거룩한 영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기도로 교통하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이미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바울은 결코 “내가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할 능력이 충분한 것이지, 여러분들이 나를 위해서 기도할 능력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들도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하는 것은 바울의 개인적인 겸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겸손의 문제만이 아니라 성도의 교제가 가지는 본질적인 면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성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적인 성질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가운데 맛있는 빵을 만들어서 대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교회의 식구들을 초청하려고 할 때, 초청받은 사람들이 거절하지 않고 가서 맛있게 먹을 때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기쁘게 나누는 사람도 있고, 기쁘게 받는 사람도 있을 때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처럼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듯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도 바울을 위해서 기도할 때 성도가 서로 교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혈관이 막히면 몸이 죽는 것처럼, 성도의 교제가 막히면 교회는 숨을 쉴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이렇게 막힘이 없이 순환되고, 교통해야 합니다.
특히 성도들은 기도로 교통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나의 기도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기도가 막힐 때 누군가 나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해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나의 형편과 사정을 더 잘 알고, 나를 위해서 더 애틋한 마음으로 중보하며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나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의 기도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교회에서 제일 나이가 어린 주일학교 어린이가 나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더 감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서로에게 감동을 주는 관계가 되어서 감동받은 마음으로 풍성한 중보의 기도를 나누는 기도의 교통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3. 은혜로 문안하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은 모든 형제에게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부탁합니다. 또 이 편지를 모든 형제들에게 읽어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원하였습니다. 은혜는 복음의 핵심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교회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들을 대할 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은혜를 더 크게 나누고 싶은 형제가 있고, 은혜를 나누고 싶지 않은 형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이 없고 동일합니다. 이것을 생각해서 우리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써 고르게 인사를 주고받아야 합니다. 또 어느 한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모든 성도들의 영적인 평안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 안에 충만하기를 소망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끔 교회의 식사를 준비하는 분들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거기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하면, 가족들에게 밥을 준비하듯이 하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자식이 밉고,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밥을 굶기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서운한 일을 만나도, 때로는 속상한 일을 만나도 내 안에 쌓여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해지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림으로 나타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져보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사로, 편지로,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 보입니다. 또 성도들끼리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권합니다. 우리의 문화에서는 입맞춤으로 인사를 하는 형식은 없지만, 손을 잡을 때, 어깨를 두드려 줄 때, 사랑의 말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는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고, 더 풍성하게 나누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막히지 않고, 오히려 이 은혜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는 서로에게 주님의 은혜가 풍성하기를 원하며, 주님의 은혜를 나타내고 보여주는 형제자매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