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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벽력(靑天霹靂)
靑:푸를 청. 天:하늘 천. 霹:벼락 벽. 靂:벼락 력.
[원말] 청천비벽력(靑天飛霹靂).
[출전] 육유(陸游)의《劍南詩稿》〈九月四日鷄未鳴起作〉
맑게 갠 하늘의 벼락(날벼락)이란 뜻. ① 약동하는 필세(筆勢)의 형용. ② 생각지 않았던 무서운 일. ③ 갑자기 일어난 큰 사건이나 이변(異變)의 비유.
이 말은 남송(南宋)의 대시인 육유[陸游:호(號)는 방옹(放翁)]의《검남시고(劍南詩稿)》〈9월4일 계미명기작(九月四日鷄未鳴起作)〉에 나오는 오언절구(五言絶句)의 끝 구절이다.
방옹이 병으로 가을을 지내고 [放翁病過秋(방옹병과추)]
홀연히 일어나 취하여 글을 쓰니 [忽起作醉墨(홀기작취묵)]
정히 오래 움츠렸던 용과 같이 [正如久蟄龍(정여구칩룡)]
푸른 하늘에 벼락을 치네 [靑天飛霹靂(청천비벽력)]
청출어람(靑出於藍)
靑:푸를 청. 出:날 출. 於:어조사 어(…에,…에서,…보다). 藍:쪽 람.
[준말] 출람(出藍).
[동의어] 출람지예(出藍之譽), 출람지재(出藍之才), 후생각고(後生角高), 출람지영예(出藍之榮譽).
[출전]《荀子》〈勸學篇〉
쪽[藍]에서 나온 푸른 물감이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더 나음을 이르는 말.
이 말은 전국 시대의 유학자(儒學者)로서 성악설(性惡說)을 창시한 순자(荀子)의 글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학문은 그쳐서는 안 된다 [學不可以已(학불가이이)]
푸른색은 쪽에서 취했지만 [靑取之於藍(청취지어람)]
쪽빛보다 더 푸르고 [而靑於藍(이청어람)]
얼음은 물이 이루었지만 [氷水爲之(빙수위지)]
물보다도 더 차다 [而寒於水(이한어수)]
[주] 학문이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므로 중지해서는 안 되며 청색이 쪽빛보다 푸르듯이, 얼음이 물보다 차듯이 스승을 능가하는 학문의 깊이를 가진 제자도 나타날 수 있다는 말.
축록자불견산
(逐鹿者不見山)
逐:쫓을 축. 鹿:사슴 록. 者:놈 자. 不:아니 불. 見:볼 견. 山:메 산.
[동의어] 축수자목불견태산(逐獸者目不見太山).
[출전]《淮南子》〈說林訓篇〉
사슴을 쫓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한다는 뜻. 곧 ① 명예와 이욕(利慾)에 미혹(迷惑)된 사람은 도리도 저버림. ② 이욕에 눈이 먼 사람은 눈앞의 위험도 돌보지 않음. 또는 보지 못함. ③ 한 가지 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은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음.
전한(前漢) 7대 황제인 무제(武帝) 때 중앙 정권에 대항적인 입장을 취했던 왕족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 : ? ~ B.C.122)은 문하(門下) 식객(食客)의 도움을 받아 많은 서책을 저술했는데, 그중 특히 도가(道家)사상을 중심으로 엮은《회남자(淮南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사슴을 쫓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하고
[逐鹿者 不見山(축록자 불견산)]
돈을 움키는 사람은 사람을 보지 못한다.
[攫金者 不見人(확금자 불견인)]
치인설몽(癡人說夢)
癡:어리석을 치. 人:사람 인. 說:말씀 설, 달랠 세. 夢:꿈 몽.
[원말] 대치인몽설(對癡人夢說).
[동의어] 치인전설몽(癡人前說夢).
[출전]《冷齋夜話》〈卷力〉,《黃山谷題跋》
바보에게 꿈 이야기를 해준다는 뜻. 곧 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의 비유. ② 종작없이 지껄이는 짓의 비유. ③ 이야기가 상대방에게 이해되지 않음의 비유.
남송(南宋:1127~1279)의 석혜홍(釋惠洪)이 쓴《냉재야화(冷齋夜話)》〈권9(卷九)〉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당나라 시대, 서역(西域)의 고승인 승가(僧伽)가 양자강과 회하(淮河) 유역에 있는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지방을 행각(行脚: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수행함)할 때의 일이다. 승가는 한 마을에 이르러 어떤 사람과 이런 문답을 했다.
“당신은 성이 무엇이오[汝何姓]?”
“성은 하가요[姓何哥].”
“어느 나라 사람이오[何國人]?”
“하나라 사람이오[何國人].”
승가가 죽은 뒤 당나라의 서도가(書道家) 이옹(李邕)에게 승가의 비문을 맡겼는데 그는 ‘대사의 성은 하 씨(何氏)이고 하나라 사람[何國人]이다’라고 썼다. 이옹은 승가가 농담으로 한 대답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석혜홍은 이옹의 이 어리석음에 대해《냉재야화》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는 곧 이른바 어리석은 사람에게 꿈을 이야기한 것이다[此正所謂對癡說夢耳].’ 이옹은 결국 꿈을 참인 줄 믿고 말았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주] ‘치인설몽’이란 말은 요즈음에는 본뜻과는 반대로 바보(치인)가 ‘종작없이 지껄인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음.
이옹 : 일명 이북해(李北海), 678~747. 특히 행서(行書)에 능하여 생전에 쓴 비서(碑書)가 800여에 이른다고 함.
칠보지재(七步之才)
七:일곱 칠. 步:걸음 보. 之:갈 지(…의). 才:재주 재.
[동의어] 칠보재(七步才), 칠보시(七步詩).
[유사어] 의마지재(倚馬之才), 오보시(五步詩).
[출전]《世說新語》〈文學篇〉
일곱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시를 지을 수 있는 재주라는 뜻으로, 아주 뛰어난 글재주를 이르는 말.
삼국 시대의 영웅이었던 위와(魏王) 조조(曹操)는 문장 출신이었지만 건안(建安) 문학의 융성을 가져왔을 정도로 시문을 애호하여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맏아들인 비(丕:186~226)와 셋째 아들인 식(植)도 글재주가 출중했다. 특히 식의 시재(詩才)는 당대의 대가들로부터도 칭송이 자자했다. 그래서 식을 더욱 총애하게 된 조조는 한때 비를 제쳐놓고 식으로 하여금 후사(後嗣)를 잇게 할 생각까지 했었다.
비는 어릴 때부터 식의 글재주를 늘 시기해 오던 차에 후사 문제까지 불리하게 돌아간 적도 있고 해서 식에 대한 증오심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조조가 죽은 뒤 위왕을 세습한 비는 후한(後漢)의 헌제(獻帝:189~226)를 폐하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문제(文帝:220~226)라 일컫고 국호를 위(魏)라고 했다.
어느 날, 문제는 동아왕(東阿王)으로 책봉된 조식을 불러 이렇게 하명했다.
“일곱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시를 짓도록 하라. 짓지 못할 땐 중벌을 번치 못할 것이니라.”
조식은 걸음을 옮기며 이렇게 읊었다.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煮豆燃豆萁(자두연두기)]
가마솥 속에 있는 콩이 우는구나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어찌하여 이다지도 급히 삶아 대는가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부모를 같이하는 친형제간인데 어째서 이다지도 심히 핍박(逼迫)하는가’라는 뜻의 칠보시(七步詩)를 듣자 문제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주] 이후 ‘자두연두기’ 약하여 ‘자두연기(煮豆燃萁)’는 ‘형제 혹은 동족간의 싸움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음.
타산지석(他山之石)
他:다를 타. 山:메 산. 之:갈 지(…의). 石:돌 석.
[원말] 타산지석 가이공옥(可以攻玉).
[유사어] 절차탁마(切磋琢磨), 공옥이석(攻玉以石).
[출전]《詩經》〈小雅篇〉
다른 산의 거친(쓸모 없는) 돌이라도 옥(玉)을 가는 데에 소용이 된다는 뜻. 곧 ①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일지라도 자기의 지식이나 인격을 닦는 데에 도움이 됨의 비유. ② 쓸모 없는 것이라도 쓰기에 따라 유용한 것이 될 수 있음의 비유.
이 말은《시경(詩經)》〈소아편(小雅篇)〉‘학명(鶴鳴)’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시(일부)의 한 구절이다.
‥‥‥‥‥
즐거운 저 동산에는 [樂彼之園(낙피지원)]
박달나무 심겨 있고 [爰有樹檀(원유수단)]
그 밑에는 닥나무 있네 [其下維穀(기하유곡)]
다른 산의 돌이라도 [他山之石(타산지석)]
이로써 옥을 갈 수 있네 [가이공옥(可以攻玉)]
[주] ‘타산지석 가이공옥(他山之石 可以攻玉)’-돌[石]을 소인(小人)에 비유하고 옥(玉)을 군자(君子)에 비유하여 군자도 소인에 의해 수양과 학덕을 쌓아 나갈 수 있음을 이르는 말.
태산북두(泰山北斗)
泰:클 태. 山:메 산. 北:북녘 북. 斗:말‧별자리 두.
[준말] 泰斗(태두). 山斗(산두). [동의어] 여태산북두(如泰山北斗).
[출전] ≪唐書≫ 〈韓愈傳贊〉
태산과 북두칠성을 가리키는 말. 곧 ① 권위자. 제일인자. 학문‧예술 분야의 대가. ② 세상 사람들로부터 우러러 받듦을 받거나 가장 존경받는 사람.
당나라 때 사대시인(四大詩人)의 한 사람으로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굴지의 명문장가로 꼽혔던 한유[韓愈:자는 퇴지(退之)]는 768년, 지금의 하남성(河南省)에서 태어났다.
그는 9대 황제인 덕종(德宗:779~805) 때 25세의 나이로 진사(進士) 시험에 급제한 뒤 이부상서(吏部尙書)까지 되었으나 황제가 관여하는 불사(佛事)를 극간(極諫)하다가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천성이 강직했던 한유는 그후에도 여러 차례 좌천‧파직(罷職) 당했다가 재 등용되곤 했는데, 만년에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역임한 뒤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824년).
이처럼 순탄치 못했던 그의 벼슬살이와는 달리 한유는 ‘한유(韓柳)’로 불렸을 정도로 절친한 벗인 유종원[柳宗元:자는 자후(子厚)]과 함께 고문부흥(古文復興) 운동을 제창하는 등 학문에 힘썼다. 그 결과 후학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에 대해《당서(唐書)》〈한유전(韓愈專)〉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나라가 흥성한 이래 한유는 육경(六經:춘추 시대의 여섯 가지 경서)를 가지고 여러 학자들의 스승이 되었다. 한유가 죽은 뒤 그의 학문은 더욱 흥성했으며, 그래서 학자들은 한유를 ‘태산북두’를 우러러보듯 존경했다.”
[주] 태산 : 중국 제일의 명산. 산동성(山東省)의 태안(泰安)에 있는 오악(五嶽) 중의 하나인 동악(東嶽)으로, 중국에서는 옛부터 태산을 성산(聖山)으로 추앙해 왔음.
북두 : 북두칠성(北斗七星)을 가리키는 말. 북두칠성이 모든 별들의 중심적인 존재로 받들어지고 있는 데서 남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인물에 비유하고 있음.
토사구팽(免死狗烹)
免:토끼 토. 死:죽을 사. 狗:개 구. 烹:삶을 팽.
[원말] 교토사 양구팽(狡免死良狗烹)
[동의어] 야수진 엽구팽(野獸盡獵狗烹)
[유사어] 고(비)조진 양궁장[高(飛)鳥盡良弓藏].
[출전]《史記》〈淮陰侯列傳〉,《十八史略》,《韓非子》〈內儲說篇〉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는 뜻. 곧 쓸모가 있을 때는 긴요하게 쓰이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헌신짝처럼 버려진다는 말.
초패왕(楚霸王) 항우(項羽)를 멸하고 한(漢)나라의 고조(高祖)가 된 유방(劉邦)은 소하(蕭何)‧장량(張良)과 더불어 한나라 창업 삼걸(三傑)의 한 사람인 한신(韓信:?~B.C.196)을 초왕(楚王)에 책봉했다(B.C.200).
그런데 이듬해, 항우의 맹장(猛將)이었던 종리매(鍾離昧)가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고조는 지난날 그에게 고전한 악몽이 되살아나 크게 노했다. 그래서 한신에게 당장 압송하라고 명했으나 종리매와 오랜 친구인 한신은 고조의 명령을 어기고 오히려 그를 숨겨 주었다. 그러자 고조에게 ‘한신은 반심을 품고 있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진노한 고조는 참모 진평(陳平)의 헌책(獻策)에 따라 제후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제후는 초(楚) 땅의 진(陳:하남성 내)에서 대기하다가 운몽호(雲夢湖)로 유행(遊幸)하는 짐을 따르도록 하라.”
한신을 진에서 포박하든가 나오지 않으면 제후(諸侯)의 군사로 주살(誅殺)할 계획이었다.
고조의 명을 받자 한신은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래서 ‘아예 반기를 들까’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죄가 없는 이상 별일 없을 것’으로 믿고 순순히 고조를 배알하기로 했다. 그러나 불안이 싹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활한 가신(家臣)이 한신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종리매의 목을 가져가시면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한신이 이 이야기를 하자 종리매는 크게 노했다.
“고조가 초나라를 치지 않는 것은 자네 곁에 내가 있기 때문일세. 그런데도 자네가 내 목을 가지고 고조에게 가겠다면 당장 내 손으로 잘라 주지. 하지만 그땐 자네도 망한다는 걸 잊지 말게.”
종리매가 자결하자 한신은 그 목을 가지고 고조를 배알했다. 그러나 역적으로 포박당하자 그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교활한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쓸모가 없어져) 좋은 사냥개는 삶아 먹히고[狡免死良狗烹(교토사양구팽)], 하늘 높이 나는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은 곳간에 처박히며[高鳥盡良弓藏(고조진양궁장)], 적국을 쳐부수고 나면 지혜 있는 신하는 버림을 받는다[敵國破謀臣亡(적국파모신망)]고 하더니 한나라를 세우기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한 내가, 이번에는 고종에게 죽게 되었구나.”
고조는 한신을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회음후(淮陰侯)로 좌천시킨 뒤 주거를 도읍인 장안(長安)으로 제한했다.
[주]《십팔사략(十八史略)》에는 고조(高鳥)가 비조(飛鳥)로, 양구(良狗)가 주구(走狗)로 나와 있으나 뜻은 같음.
퇴고(推敲)
推:밀 퇴‧옮을 추. 敲:두드릴 고
[출전]《唐詩紀事》〈卷四十 題李凝幽居〉
민다, 두드린다는 뜻으로, 시문(詩文)을 지을 때 자구(字句)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침을 이르는 말.
당나라 때의 시인 가도[賈島:자는 낭선(浪仙),777~841]가 어느 날, 말을 타고 가면서〈이응의 유거에 제함[題李凝幽居]〉이라는 시를 짓기 시작했다.
이웃이 드물어 한거하고 [閑居隣竝少(한거린병소)]
풀숲 오솔길은 황원에 통하네 [草徑入荒園(추경입황원)]
새는 연못가 나무에 잠자고 [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
중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 [僧敲月下門(승고월하문)]
그런데 마지막 구절인 ‘중은 달 아래 문을……’에서 ‘민다[推]’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 ‘두드린다[敲]’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 여기서 그만 딱 막혀 버렸다. 그래서 가도는 ‘민다’‘두드린다’는 이 두 낱말만 정신없이 되뇌며 가던 중 타고 있는 말이 마주 오던 고관의 행차와 부딪치고 말았다.
“무례한 놈! 뭣하는 놈이냐?”
“당장 말에서 내려오지 못할까!”
“이 행차가 뉘 행찬 줄 알기나 하느냐?”
네댓 명의 병졸이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으며 가도를 말에서 끌어내려 행차의 주인공인 고관 앞으로 끌고 갔다. 그 고관은 당대(唐代)의 대문장가인 한유(韓愈)로, 당시 그의 벼슬은 경조윤(京兆尹:도읍을 다스리는 으뜸 벼슬)이었다.
한유 앞에 끌려온 가도는 먼저 길을 비키지 못한 까닭을 솔직히 말하고 사죄했다. 그러자 한유는 노여워하는 기색도 없이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엔 역시 ‘민다’는 ‘퇴(推)’보다 ‘두드린다’는 ‘고(敲)’가 좋겠네.”
이를 계기로 그후 이들은 둘도 없는 시우(詩友)가 되었다고 한다.
[주] 가도 : 당나라의 시인. 하북성 범양(河北省范陽) 사람. 자는 낭선(浪仙). 일찍이 불문(佛門)에 들어감. 법명(法名)은 무본(無本). 한유(韓愈)와의 사귐을 계기로 환속(還俗)한 후 시작(詩作)에 전념함.
파죽지세(破竹之勢)
破:깨뜨릴‧깨어질 파. 竹:대나무 죽. 之:갈 지(…의). 勢:기세‧형세 세.
[동의어] 영인이해(迎刃而解), 세여파죽(勢如破竹).
[출전]《晉書》〈杜預專〉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라는 뜻. 곧 ① 맹렬한 기세. ② 세력이 강대하여 적대하는 자가 없음의 비유. ③ 무인지경을 가듯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진군함의 비유.
위(魏)나라의 권신(權臣) 사마염(司馬炎)은 원제(元帝)를 폐한 뒤 스스로 제위에 올라 무제(武帝:265~290)라 일컫고, 국호를 진(晉)이라고 했다(265년). 이리하여 천하는 3국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오(吳)나라와 진나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이윽고 무제는 진남 대장군(鎭南大將軍) 두예(杜預)에게 출병을 명했다.
이듬해(280년) 2월(음력), 무창(武昌)을 점령한 두예는 휘하 장수들과 오나라를 일격에 공략할 마지막 작전 회의를 열었다. 이 때 한 장수가 이렇게 건의했다.
“지금 당장 오나라의 도읍을 치기는 어렵습니다. 이제 곧 잦은 봄비로 강물은 범람할 것이고, 또 언제 전염병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단 철군했다가 겨울에 다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찬성하는 장수들도 많았으나 두예는 단호히 말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지금 아군의 사기는 마치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破竹之勢]’요. 대나무란 처음 두세 마디만 쪼개면 그 다음부터는 칼날이 닿기만 해도 저절로 쪼개지는 법인데, 어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버린단 말이오.”
두예는 곧바로 휘하의 전군을 휘몰아 오나라의 도읍 건업[建業:남경(南京)]으로 쇄도(殺到)하여 단숨에 공략했다. 이어 오왕(吳王) 손호(孫晧)가 항복함에 따라 마침내 진나라는 삼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천하를 통일했다.
[주] 두예 : 진(晉)나라 초엽의 명장‧정치가‧학자. 자는 원개(元凱). 진나라의 초대 황제인 무제(武帝) 때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오(吳)를 정벌하고 삼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무공을 세움.《춘추(春秋)》《고문상서(古文尙書)》에 통달한 학자로도 유명함. 저서로는《좌전집해(左專集解)》《춘추석례(春秋釋例)》등이 있음. (222~284).
포호빙하(暴虎馮河)
暴:사나울 폭(관용)‧포. 虎:범 호. 馮:탈 빙. 河:물 하
[동의어] 포호빙하지용(暴虎馮河之勇)
[참조] 전전긍긍(戰戰兢兢). [출전] ≪論語≫ 〈述而篇〉
맨손으로 범에게 덤비고 걸어서 황하를 건넌다는 뜻. 곧 무모한 행동.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모한 용기의 비유.
공자의 3000여 제자 중 특히 안회(顔回)는 학재(學才)가 뛰어나고 덕행이 높아 공자가 가장 아끼던 제자라고 한다. 그는 가난하고 불우했지만 이를 전혀 괴로워하지 않았으며 또한 32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노하거나 실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이 안회에게 어느 날,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왕후(王侯)에게 등용되면 포부를 펴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이를 가슴 깊이 간직해 두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는 나와 너 두 사람 정도일 것이다.”
이 때 곁에서 듣고 있던 자로(子路)가 은근히 샘이 나서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도를 행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만약 대군을 이끌고 전쟁에 임할 때 선생님은 누구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무용(武勇)에 관한 한 자신 있는 자로는 ‘그야 물론 너지’라는 말이 떨어지기를 기대했으나 공자는 굳은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맨손으로 범에게 덤비거나 황하를 걸어서 건너는 것[暴虎馮河]과 같은 헛된 죽음을 후회하지 않을 자와는, 나는 행동을 같이하지 않을 것이다.”
풍성학려(風聲鶴唳)
風:바람 풍. 聲:소리 성. 鶴:학 학. 唳:학울 려.
[출전] ≪晉書≫ ≪謝玄載記≫
바람 소리와 울음소리란 뜻으로, 겁을 먹은 사람이 하찮은 일이나 작은 소리에도 몹시 놀람의 비유.
동진(東晉:317~420)의 9대 효무제(孝武帝) 때인 태원(太元) 8년(383)의 일이다. 오호 십육국(五胡十六國) 중 전진(前秦)의 3대 임금인 부견(苻堅:338~385)이 10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효무제는 재상 사안(謝安)의 동생인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 사석(謝石)과 조카인 전봉도독(前鋒都督) 사현(謝玄)에게 8만의 군사를 주고 나가 싸우게 했다. 우선 참모인 유로지(劉窂之)가 5000의 군사로 적의 선봉을 격파하여 서전을 장식했다.
이 때 중군을 이끌고 비수(淝水) 강변에 진을 치고 있던 부견은 휘하 제장(諸將)에게 이렇게 명했다.
“전군을 약간 후퇴시켰다가 적이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돌아서서 반격하라.”
그러나 이는 부견의 오산이었다. 일단 후퇴 길에 오른 전진군(前秦軍)은 반격은커녕 멈춰 설 수도 없었다. 무사히 강을 건넌 동진군은 사정없이 전진군을 들이쳤다. 대혼란에 빠진 전진군은 서로 밟고 밟혀 죽는 군사가 들을 덮고 강을 메웠다. 겨우 목숨을 건진 군사들은 겁을 먹은 나머지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風聲鶴唳]’ 소리만 들어도 동진의 추격군이 온 줄 알고 도망가기 바빴다고 한다.
[주] 부견 : 전진(前秦)의 3대 임금. 이름은 문옥(文玉), 자는 영고(永固). 시호(諡號)는 세조(世祖). 저족(氐族) 출신. 2대 임금을 시해하고 즉위한 후 농경(農耕)을 장려하고 법제(法制)를 정비‧확립하는 등 내치(內治)에 힘씀. 376년 화북(華北:황하 중‧하류 지방)을 평정하고 전진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었음. 국력이 신장되자 천하 통일의 야망을 품고 383년 동진을 쳤으나 비수의 싸움에서 대패함. 나라가 분열된 가운데 385년 스스로 목숨을 끊음. (338~385, 재위 357~385).
학철부어(涸轍鮒魚)
涸:마를 학. 轍:수레바퀴 자국 철. 鮒:붕어 부. 魚:고기 어.
[준말] 학부(涸鮒), 철부(轍鮒).
[동의어] 철부지급(轍鮒之急), 학철지부(涸轍之鮒), 학철부어(涸轍鮒魚).
[유사어] 우제지어(牛蹄之魚). [출전] ≪莊子≫ 〈外物篇〉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있는 붕어란 뜻으로, 매우 위급한 경우에 처했거나 몹시 고단하고 옹색함의 비유.
전국 시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했던 장자(莊子)의 이야기이다. 그는 왕후(王侯)에게 무릎을 굽혀 안정된 생활을 하기보다는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러다 보니 가난한 그는 끼니조차 잇기가 어려웠다. 어느 날 장자는 굶다 못해 감하후(監河侯)를 찾아가 약간의 식대를 꾸어 달라고 했다. 그러자 감하후는 친구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할 수가 없어 이렇게 핑계를 댔다.
“빌려주지. 2,3일만 있으면 식읍(食邑)에서 세금이 올라오는데 그때 삼백 금(三百金)쯤 융통해 줄 테니 기다리게.”
당장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2,3일 뒤에 거금(巨金) 삼백 금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체면 불고하고 찾아온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장자는 내뱉듯이 말했다.
“고맙군. 하지만 그땐 아무 소용없네.”
그리고 이어 장자 특유의 비아냥조(調)로 이렇게 부연했다.
“내가 여기 오느라고 걷고 있는데 누가 나를 부르지 않겠나.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니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붕어가 한 마리 있더군[涸轍鮒魚].’‘왜 불렀느냐’고 묻자 붕어는 ‘당장 말라죽을 지경이니 물 몇 잔만 떠다가 살려 달라’는 겨야. 그래서 나는 귀찮은 나머지 이렇게 말해 주었지. ‘그래. 나는 2,3일 안으로 남쪽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로 유세를 떠나는데 가는 길에 서강(西江)의 맑은 물을 잔뜩 길어다 줄 테니 그 때까지 기다리라’고. 그랬더니 붕어는 화가 나서 ‘나는 지금 물 몇 잔만 있으면 살 수 있는데 당신이 기다리라고 하니 이젠 틀렸소. 나중에 건어물전(乾魚物廛)으로 내 시체나 찾으러 와 달라’고 하더니 그만 눈을 감고 말더군. 자, 그럼 실례했네.”
[주] ‘涸’이란 글자는 원래 ‘학’자인데 이 경우 ‘확’으로 읽어 ‘확철부어’라고도 함.
한단지몽(邯鄲之夢)
邯:땅 이름 한. 鄲: 땅 이름 단. 之:갈 지(…의). 夢:꿈 몽.
[동의어] 한단지침(邯鄲之枕), 한단몽침(邯鄲夢枕), 노생지몽(盧生之夢), 일취지몽(一炊之夢), 영고일취(榮枯一炊), 황량지몽(黃粱之夢)
[출전] 심기제(沈旣濟)의 ≪枕中記≫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덧없음과 영화(榮華)의 헛됨의 비유.
당나라 현종(玄宗)때의 이야기이다. 도사 여옹이 한단[하북성(河北省)내]의 한 주막에서 쉬고 있는데 행색이 초라한 젊은이가 옆에 와 앉더니 산동(山東)에서 사는 노생(盧生)이라며 신세 한탄을 하고는 졸기 시작했다. 여옹이 보따리 속에서 양쪽에 구멍이 뚫린 도자기 베개를 꺼내 주자 노생은 그것을 베고 잠이 들었다. 노생이 꿈속에서 점점 커지는 그 베개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 보니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있었다.
노생은 최씨(崔氏)로서 명문인 그 집 딸과 결혼하고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순조롭게 승진했다. 경조윤(京兆尹:서울을 다스리는 으뜸 벼슬)을 거쳐 어사대부(御史大夫) 겸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랐으나 재상이 투기하는 바람에 단주 자사(端州刺史)로 좌천되었다. 3년 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조정에 복귀한 지 얼마 안 되어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 그 후 10년간 노생은 황제를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한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역적으로 몰렸다. 변방의 장군과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다. 노생은 포박 당하는 자리에서 탄식하여 말했다.
“내 고향 산동에서 땅뙈기나 부쳐먹고 살았더라면 이런 억울한 누명은 쓰지 않았을 텐데, 무엇 때문에 애써 벼슬길에 나갔는지 모르겠다. 그 옛날 누더기를 걸치고 한단의 거리를 걷던 때가 그립구나.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칼을 들어 자결하려 했지만 아내와 아들이 말리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노생과 함께 잡힌 사람들은 모두 처형당했으나 그는 환관(宦官)이 힘써 준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수년 후 원죄(冤罪)임이 밝혀지자 황제는 노생을 소환하여 중서령(中書令)을 제수(除授)한 뒤 연국공(燕國公)에 책봉하고 많은 은총을 내렸다. 그후 노생은 모두 권문세가(權門勢家)와 혼인하고 고관이 된 다섯 아들과 열 손자를 거느리고 행복한 만년을 보내다가 황제의 어의(御醫)가 지켜보는 가운데 80년의 생애를 마쳤다.
노생이 깨어 보니 꿈이었다. 옆에는 여전히 여옹이 앉아 있었고 주막집 주인이 짓고 있는 기장밥도 아직 다 되지 않았다. 노생을 바라보고 있던 여옹은 웃으며 말했다.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네.”
노생은 여옹에게 공손히 작별 인사를 고하고 하단을 떠났다.
호가호위(狐假虎威)
狐:여우 호. 假:거짓 가. 虎:범 호. 威:위엄 위
[준말] 가호위(假虎威). [동의어] 가호위호(假虎威狐)
[출전] ≪戰國策≫ 〈楚策〉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어 다른 짐승을 놀라게 한다는 뜻으로, 남의 권세를 빌어 위세를 부림에 비유.
전국시대인 기원전 4세기 초엽, 초(楚) 나라 선왕(宣王)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선왕은 위(魏:梁) 나라에서 사신이 왔다가 그의 신하가 된 강을(江乙)에게 물었다.
“위나라를 비롯한 북방 제국이 우리 재상 소해휼(昭奚恤)을 두려워하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오?”
“그렇지 않사옵니다. 북방 제국이 어찌 일개 재상에 불과한 소해휼 따위를 두려워하겠나이까. 전하, 혹 ‘호가호위’란 말을 알고 계시옵니까?”
“모르오.”
“하오면 들어 보시오소서. 어느 날 호랑이한테 잡아먹히게 된 여우가 이렇게 말했나이다. ‘네가 나를 잡아먹으면 너는 나를 모든 짐승의 우두머리로 정하신 천제(天帝)의 명을 어기는 것이 되어 천벌을 받게 된다. 만약 내 말을 못 믿겠다면 당장 내 뒤를 따라와 보라구. 나를 보고 달아나지 않는 짐승은 단 한 마리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호랑이는 여우를 따라가 보았더니 과연 여우의 말대로 만나는 짐승마다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짐승들을 달아나게 한 것은 여우 뒤에 있는 호랑이였는데도 호랑이 자신은 그걸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하옵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이옵니다. 지금 북방 제국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소해휼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초나라의 군세(軍勢), 즉 전하의 강병(强兵)이옵니다.”
이처럼 강을이 소해휼을 폄(貶)하는 이유는 아부로 선왕의 영신(佞臣:간사하고 아첨하는 신하)이 된 강을에게 있어 왕족이자 명재상인 소해휼은 눈엣가시였기 때문이다.
호연지기(浩然之氣)
浩:넓을 호. 然:그럴 연. 之:갈 지(…의). 氣:기운 기.
[준말] 호기(浩氣). [동의어] 정대지기(正大之氣). 정기(正氣).
[출전] ≪孟子≫ <公孫丑篇)
①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도 큰 원기. ② 도의에 뿌리를 박고 공명 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울 바 없는 도덕적 용기. ③ 사물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고 즐거운 마음.
전국 시대의 철인(哲人) 맹자(孟子)에게 어느 날, 제(齊) 나라 출신의 공손추(公孫丑)란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시어 도를 행하신다면 제나라를 틀림없이 천하의 패자(覇者)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런 경우를 생각하면 선생님도 역시 마음이 움직이시겠지요?”
“나는 40 이후에는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 없다.”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용(勇)’이다. 자기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고, 이것이야말로 ‘대용(大勇)’으로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하는 최상의 수단이니라.”
“그럼, 선생님의 부동심(不動心)과 고자(告子)의 부동심은 어떻게 다릅니까?”
고자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대하여 ‘사람의 본성은 선(善)하지도 악(惡)하지도 않다’고 논박한 맹자의 논적(論敵)이다.
“고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애써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이는 소극적이다. 나는 말을 알고 있다[知言]는 점에서 고자 보다 낫다. 게다가 ‘호연지기’도 기르고 있다.”
‘지언’이란 피사(詖辭:편벽된 말), 음사(淫辭:음탕한 말), 사사(邪辭:간사한 말), 둔사(遁辭:회피하는 말)를 간파하는 식견을 갖는 것이다. 또 ‘호연지기’란 요컨대 평온하고 너그러운 화기(和氣)를 말하는 것으로서 천지간에 넘치는 지대(至大), 지강(至剛)하고 곧으며 이것을 기르면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천지까지 충만 한다는 원기(元氣)를 말한다. 그리고 이 기(氣)는 도와 의(義)에 합치하는 것으로서 도의(道義)가 없으면 시들고 만다. 이 ‘기’가 인간에게 깃들여 그 사람의 행위가 도의에 부합하여 부끄러울 바 없으면 그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도덕적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호접지몽(胡蝶之夢)
胡:오랑캐‧어찌 호. 蝶:나비 접. 之:갈 지(…의). 夢:꿈 몽.
[유사어] 장주지몽(莊周之夢) [출전] ≪莊子≫ 〈齊物篇〉
나비가 된 꿈이란 뜻. 곧 ① 물아 일체(物我一體)의 경지. 물아의 구별을 잊음의 비유. ② 만물일체(萬物一體)의 심경. ③ 인생의 덧없음의 비유. ④ 꿈.
전국 시대의 사상가 장자[莊子:이름은 주(周), B.C. 365~290]는 맹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물(物)의 시비(是非)‧선악(善惡)‧진위(眞僞)‧미추(美醜)‧빈부(貧富)‧귀천(貴賤)을 초월하여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제창한 사람이다.
장자가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꽃과 꽃 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는 즐거운 나비 그 자체였다. 그러나 문득 깨어 보니 자기는 분명 장주가 아닌가. 이는 대체 장주인 자기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자기는 나비이고 그 나비인 자기가 꿈속에서 장주(莊周)가 된 것일까.
꿈이 현실인가 현실이 꿈인가. 그 사이에 도대체 어떤 구별이 있는 것인가? 추구해 나가면 인생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 아닌가. 그 사이에 도대체 어떤 구별이 있는 것인가? 추구해 나가면 인생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 아닌가.《장자(莊子)》의 이런 우화(寓話)는 독자를 유현(幽玄)의 세계로 끌어들여 생각게 한다.
[주] ‘호접지몽(胡蝶之夢)’은 요즈음에도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하는 말’로 흔히 쓰이고 있음.
유현 : 사물(事物)의 이치(理致) 또는 아취(雅趣)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깊음.
홍일점(紅一點)
紅:붉을 홍. 一:한 일. 點:점‧점 찍을‧흠 점.
[출전] ≪唐宋八家文≫ 〈王安石 詠石榴詩〉
① 여럿 가운데서 오직 하나 이채를 띠는 것. ② 많은 남자들 틈에 오직 하나뿐인 여자. ③ 여러 하찮은 것 가운데 단 하나 우수한 것.
북송(北宋) 6대 황제인 신종(神宗) 때 왕안석(王安石:1021~1086)이란 재상이 있었다. 당시 신법당(新法黨)의 지도인 왕안석은 재상에 임명되자 부국강병을 위한 이른바 ‘왕안석의 개혁’을 실시했다. 처음에는 구양수(歐陽脩)‧사마광(司馬光)‧정이[程頤:호는 이천(伊川)]‧소식(蘇軾) 등 유명한 문신들이 주축이 된 구법당(舊法黨)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쳤으나 신종의 적극적인 지지를 배경으로 중단 없이 실행되었다.
왕안석은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그의〈영석류시(詠石媹詩)〉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많은 푸른 잎 가운데 한 송이 붉은 꽃
[萬綠叢中 紅一點(만록총중 홍일점)]
사람을 움직이는 봄빛 많은들 무엇하리
[動人春色 不須多(동인춘색 불수다)]
화룡점정(畵龍點睛)
畵:그림 화. 龍:용 룡. 點:점 찍을 점. 睛:눈동자 정.
[유사어] 입안(入眼). [출전] ≪水衡記≫
용을 그리는데 눈동자도 그려 넣는다는 뜻. 곧 ① 사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완성시킴. 끝손질을 함. ② 사소한 것으로 전체가 돋보이고 활기를 띠며 살아남의 비유.
남북조(南北朝) 시대, 남조인 양(梁)나라에 장승요(張僧繇)라는 사람이 있었다. 우군장군(右軍將軍)과 오흥태수(吳興太守)를 지냈다고 하니 벼슬길에서도 입신(立身)한 편이지만 그는 붓 하나로 모든 사물을 실물과 똑같이 그리는 화가로 유명했다.
어느 날, 장승요는 금릉[金陵:남경(南京)]에 있는 안락사(安樂寺)의 주지로부터 용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절의 벽에다 검을 구름을 헤치고 이제라도 곧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두 마리의 용을 그렸다. 물결처럼 꿈틀대는 몸통, 갑옷의 비늘처럼 단단해 보이는 비늘, 날카롭게 뻗은 발톱에도 생동감이 넘치는 용을 보고 찬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용의 눈에 눈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는 점이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장승요는 이렇게 대답했다.
“눈동자를 그려 넣으면 용은 당장 벽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이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당장 눈동자를 그려 넣으라는 성화독촉(星火督促)에 견디다 못한 장승요는 한 마리의 용에 눈동자를 그려 넣기로 했다. 그는 붓을 들어 용의 눈에 ‘획’하니 점을 찍었다. 그러자 돌연 벽 속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더니 한 마리의 용이 튀어나와 비늘을 번뜩이며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눈동자를 그려 넣지 않은 용은 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화서지몽(華胥之夢)
華:빛날 화. 胥:서로 서. 之:갈 지(…의). 夢:꿈 몽.
[유사어] 화서지국(華胥之國). 유화서지국(遊華胥之國).
[참조] 호접지몽(胡蝶之夢). [출전] ≪列子≫〈黃帝篇〉
화서의 꿈이란 뜻으로, 좋은 꿈이나 낮잠을 이르는 말.
먼 옛날 중국 최초의 성천자(聖天子)로 알려진 황제[黃帝:공손헌원(公孫軒轅)]는 어느 날,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화서씨(華胥氏)의 나라에 놀러 가 안락하고 평화로운 이상경(理想境)을 보았다.
그곳에는 통치자도 신분의 상하도 연장(年長)의 권위도 없고, 백성들은 욕망도 애증(愛憎)도 이해(利害)의 관념도 없을 뿐 아니라 삶과 죽음에도 초연하다. 또 물 속에 들어가도 빠져 죽지 않고 불 속에 들어가도 타 죽지 않으며, 공중에서 잠을 자도 침대에 누워 자는 것과 같고 걸어도 땅 위를 걷는 것과 같다. 또한 사물의 미추(美醜)도 마음을 동요시키지 않고 험준한 산골짜기도 보행을 어렵게 하지 않는다. 형체를 초월한 자연 그대로의 자유로 충만한 이상경인 것이다.
이윽고 꿈에서 깨어난 황제는 번뜻 깨닫는 바 있어 중신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꿈 이야기를 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짐은 지난 석 달 동안 방안에 들어앉자 심신 수양에 전념하며 사물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려 했으나 끝내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소. 그런데 짐은 이번에 꿈속에서 비로소 그 도(道)하는 것을 터득한 듯싶소.”
그 후 황제가 ‘도’의 정치를 베푼 결과 천하는 잘 다스려졌다고 한다.
화씨지벽(和氏之璧)
和:화할 화. 氏:각시 씨. 之:갈 지(…의). 璧:둥근 옥 벽.
[준말] 화벽(和璧). [동의어] 변화지벽(卞和之璧)
[유사어] 완벽(完璧). 연성지벽(連城之璧)
[참조] 완벽(完璧). [출전] ≪韓非子≫ 〈卞和〉
천하 명옥(天下名玉)의 이름.
전국 시대, 초(楚)나라에 변화씨(卞和氏)란 사람이 산 속에서 옥(玉)의 원석을 발견하자 곧바로 여왕(厲王)에게 바쳤다. 여왕이 보석 세공인(細工人)에게 감정시켜 보니 보통 돌이라고 한다. 화가 난 여왕은 변화씨를 월형(刖刑: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에 처했다. 여왕이 죽은 뒤 변화씨는 그 옥돌을 무왕(武王)에게 바쳤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왼쪽 발뒤꿈치를 잘리고 말았다.
무왕에 이어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변화씨는 그 옥돌을 그러안고 궁궐 문 앞에서 사흘 낮 사흘 밤을 울었다. 문왕이 그 까닭을 묻고 옥돌을 세공인에게 맡겨 갈고 닦아 본 결과 천하에 둘도 없는 명옥이 영롱한 모습을 드러냈다. 문왕은 곧 변화씨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그의 이름을 따서 이 명옥을 ‘화씨지벽’이라 명명했다.
그 후 화씨지벽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손에 들어갔으나 이를 탐내는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이 15개의 성(城)과 교환하자는 바람에 한때 양국간에는 긴장이 조성되기도 했다. 이에 연유하여 화씨지벽은 ‘연성지벽(連城之壁)’이라고도 불렸다.
후생가외(後生可畏)
後: 뒤 후. 生:날 생. 可:가히 가. 畏:두려울 외.
[출전] ≪論語≫ 〈子罕篇(자한편)〉
젊은 후배들은 두려워할 만하다는 뜻. 곧 젊은 후배들은 선인(先人→先生)의 가르침을 배워 어떤 훌륭한 인물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가히 두렵다는 말.
춘추 시대의 대철학자‧사상가인 성인(聖人) 공자는 말했다.
“‘젊은 후배들은 두려워할 만하다[後生可畏].’ 장래에 그들이 지금의 우리를 따르지 못하리라고 어찌 알 수 있겠는가[焉知來者之不知今也]? 그러나 40세, 50세가 되어도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는다면 두려워할 바 없느니라.”
[주] ‘후생가외’는 공자가 제자 중 학문과 덕행이 가장 뛰어난 안회[顔回:자는 자연(子淵), B.C. 521~490]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