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한량들이어서 집안 어른들은 어린 신한승이 택견을 흉내 내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다. 호기심 많은 그는 적삼에 짚신을 신고 팔을 휘저으며 발을 가볍게 내디뎠다 뒤로 거두며 발길질을 해대는 모습을 눈여겨보곤 혼자 연습했다. 해방 전 만주로 가서 1944년 만주 사평성립 산성진 국민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해방 뒤 다시 서울로 와서 1949년 지금의 경희대 전신인 신흥대학 체육학과 1기생으로 입학했다. 이곳에서 레슬링을 전공한 그는 1956년에 열렸던 멜버른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국가 대표 선발전에 나가지만 최종 선발전에서 져 국가대표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레슬링을 그만두고 아버지 신우선이 충주 경찰서 수사과장으로 발령받아 1957년 충주로 함께 내려간 그는 한 때 충주 한림 중학교 체육교사를 했으나 1년 만에 그만두고 서울 아시아 극장에서 기도 일을 맡기도 했다. 그가 아시아 극장 기도로 있을 때 단월동에 사는 이름난 씨름꾼이 건달 패거리들과 함께 극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저지하다가 신한승 선생과 싸움이 벌어졌을 때, 신한승 선생은 그들 중 두목쯤 되어 보이는 키가 9척이 넘는데다 힘이 장사인 명성이 자자했던 김모라는 씨름꾼의 멱살을 잡아 딴죽을 치니 순간 그 거한의 몸이 한길높이 솟아오르며 땅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을 지켜보던 패거리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는 일화가 있다. 신한승은 1960년도부터 어린 시절 증조부 슬하에서 어깨너머로 배웠던 택견이야말로 유일한 한국의 전통무예라는 것을 깨닫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택견 명인들을 찾아 사라져가는 택견정립에 온 정열을 쏟게 된다. 그는 마침내 ‘택견’을 고스란히 몸속에 감추고 있던 송덕기 옹을 만났다.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전해 내려온 이 무술은 구한말 활동하던 지역의 이름을 따 종로택견, 왕십리택견, 구리개택견 등으로 불렀다. 또 대궐에서 가까운 곳의 택견을 윗(웃)대 택견, 먼쪽을 아랫대 택견이라 분류했다. 신한승 옹은 1970년 한 신문에 난 송덕기 기사를 보고 서울로 달려가 5년간 본격적으로 택견을 익혔다. 그는 1973년부터는 그동안 정립한 택견을 후학들에게 전수하기 시작했다. 또 74년에는 박털백의 전수자인 이경천과 박무경의 전수자인 김홍식을 찾아가 활갯짓활용법과 낚시걸이 등의 수를 익혔다. 배움과 가르침을 통해 택견의 원형을 어느 정도 복원했다고 생각한 신한승 옹은 1977년 4월 서울 YMCA 체육관에서 한국 전통 택견 발표회를 시작으로 고려대 강당, 충주 탄금대 야외음악당 등에서 발표회를 잇달아 열어 민속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전통무술의 복원에 대한 집념은 현 택견 인간문화재 정경화와 같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1981년 11월에는 그동안 정리한 택견을 문화재로 지정 받는 것이 택견의 원형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하고 문화재 관리국에 정식으로 택견무형문화재 지정조사를 의뢰하기에 이르렀다. 1982년 7월 문화재 위원 임동권 박사를 충주로 보내 현지 조사케 하였으며 1982년 7월 문화재위원 임동권 박사는 문화재 심의위원회에 중요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146호를 작성 제출하여 마침내 1983년 6월1일 전통무술로는 유일하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