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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강론 15
디모데전서 6:6-10
자족하는 마음
바울 사도는 6장에서 교회가 된 자들을 ‘종들’로, 예수 그리스도와 먼저 하나 된 자들을 ‘상전들’로 비유하여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복음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다른 교훈을 전하는 거짓 선생들은 신화와 성취함이 없는 족보에 집착하여 말씀 아닌 것을 조사하고 연구하여 논쟁하고 말싸움을 병적으로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거짓 선지자들은 진리를 완전히 빼앗긴 상태이기에 경건을 종교적으로 이용하여 이익을 방도로 삼아 가장 예수 그리스도 같은 모습을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다. 이제 바울 사도는 거짓 선생들이 경제적 이득을 얻는 것과 대조하여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진리 안에 있는 상태는 물질적인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존재임을 말씀한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6절). “자족하는 마음”이란 ‘아우타르케이아’는 ‘아우토스’(자신)와 ‘아르케오’(충분하다, 넉넉하다, 만족하다)의 합성어인 ‘아우타르케스’에서 온 단어로 ‘자족, 충분한(양), 자기만족, 풍족’이라는 뜻이다. 단순히 세상에서 풍족하고 넉넉하여 만족한다고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넉넉하여 넘치는 은혜 가운데 있는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히 13:5).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아우타르케이아)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아우타르케스)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비천”이란 미약하여 굴욕적인 상태를 뜻하고 “풍부”란 넘쳐서 풍성한 상태를 뜻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하였는데 나를 능하게 하신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때 “모든 것”이란 무엇이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약하고 굴욕적인 상태, 즉 배고픔과 궁핍이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원망하지 않고, 넘쳐서 풍성한 상태, 즉 배부름과 풍부한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거나 거부하지 않게 된 능력을 말한다. 그것은 오직 나를 능하게 하신 분 안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잠 30:8-9). 그러므로 자족이란 내가 스스로 흡족하고 충분하다고 여기는 마음 상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상태, 곧 충만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경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부터 나온 말씀에 대한 경외함이다. “이익이 되느니라”라는 표현은 5절에서 다른 교훈을 전하여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인 거짓 교사들과 대조한 말씀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충만한 상태에 있는 자라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를 경제적인 이익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라는 말씀은 진리의 아들들이 된 자는 세상의 물질적인 것과는 상관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7절). 흔히 이 말씀을 가지고 고사성어인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를 말하는데 사전적으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뜻으로, 재물에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음을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이 고사성어가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청빈론”을 말하기도 하며 또 어떤 목회자는 복음을 위해 “청부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은 엄밀한 의미에서 세상의 이런 주장들과 전혀 관련이 없다.
“아무것”이란 말은 ‘우데’(아니)와 ‘헤이스’(하나)의 합성어로 ‘하나가 아닌, 아무도 아닌, 어떤 것도 아닌’이라는 뜻이다. “못하리니”의 ‘뒤나마이’는 ‘할 수 있다’라는 뜻인데 부정의 ‘우데’가 있으니 못한다는 의미인데 중수디포태로 사용되었다. 즉 스스로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원인자에 의해서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구약 지혜서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 1:21)
14 그 재물이 재난을 당할 때 없어지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것도 없느니라 15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16 이것도 큰 불행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는 수고가 그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17 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느니라(전 5:14-17)
우리 성경에서 “큰 불행”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큰’이라고 번역한 말은 히브리어로 ‘할라’로 ‘약하다, 병들다’라는 뜻이고, “불행”이란 말의 ‘라’는 ‘나쁜 것, 악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약하여 병든 상태는 악한 상태에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솔로몬왕은 인간이 수고하여 얻은 것일지라도 자기 손에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악한 것,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다시 말해서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이 땅의 상태에서는 자신이 가진 것이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죽음 가운데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본문의 “세상”은 헬라어로 보면 ‘그 세상’이란 표현으로 솔로몬왕이 말한 그 세상이다.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9-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23)
그러므로 세상은 위, 하늘과 대조된 표현으로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죄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대적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 영원하다고 선언하였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8절). 세상, 즉 이 땅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 이런 모든 것들은 죄악 가운데 있는 것들이다. 그러니 더 가졌다고 하여 좋을 것도 없고 덜 가졌다고 하여 나쁠 것도 없다. 어차피 다 죄의 권세에 매여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강론에서 목숨을 위해 먹는 것, 몸을 위해 입는 것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마 6:25-29). 염려하며 땅의 것을 구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특징이다(마 6:32). 다시 말해서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의 특징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죽고 살려주심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기에 땅의 것을 가지는 것에 대한 관심과는 상관없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9절). “부하려”의 ‘플로테오’는 ‘풍부하다, 부유하다’라는 뜻이다.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 19:23-24)
“부자”란 이 땅에서 가진 것이 많은 자이고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은 자기 의가 충만함을 상징한다. 그래서 자기 구원의 많은 재료를 가지고 영생을 쟁취하려는 자로 나타낸다(참고 호 12:8, 계 3:17). 이런 점에서 부를 추구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라고 말씀한다. “어리석고”라고 하였는데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이다(시 14:1, 53:1). 곧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 스스로 시험과 올무, 어리석은 욕심 안에 빠지는 것이다.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라는 표현은 파멸과 멸망 안에 잠기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10절). “돈을 사랑함”이란 말의 ‘필라르귀리아’는 ‘돈에 대한 사랑, 탐욕’이라는 뜻인데 “돈”은 자신의 노력과 행위로 만들어 낸 공로로 ‘자기 의’를 상징한다. 이런 점에서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눅 16:14)이라고 하여 자기 의가 극대화된 모습을 말씀하였다. 성경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곧 돈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1-2)
“일만”이란 표현은 의역이고 ‘모든’이라는 말이고, “뿌리”란 근원이나 원천이 된다는 의미이다. 언제나 인간의 자기 의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 맞서 있기 때문이다(마 6:24, 롬 10:3). 그래서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씀하였는데 “근심”이란 말의 ‘오뒤네’는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슬픔, 비탄’이라는 뜻이고, “찔렀도다”라는 말의 ‘페리페이로’는 ‘꿰뚫다’라는 뜻이다. 즉 이 땅에서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상태는 고통 중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있는 자를 꿰뚫고 있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눅 1:46-55)
한나의 노래(삼상 2:1-10)를 재해석한 것인데 비천함이란 죄의 권세에 매여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고, 높이셨다는 것은 하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다윗 언약이 성취되었음을 말씀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집인 교회가 되었다는 것은 진리의 아들들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세상의 것을 구원의 재료로 삼는 것이 아닌 십자가 은혜와 긍휼로 채워지는 구원이 생명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본문은 공수래공수거 정신으로 비우는 것을 목적으로 살라는 교훈이 아니라 자기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충만한 상태가 자족하는 것이라고 복음을 말씀한 것이다(2025011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