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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경현서원 춘향제 사진 사진출처 http://blog.daum.net/ohmyfarm01/13755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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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 영안마을 ❏배향인물: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 황(李 滉) 기대승(奇大升) 김성일(金誠一) ❏창건연도: 1584년(선조 17) ❏사액연도: 1609년(광해군 1) ❏향 사 일: (음력)2월 15일 |
경현서원은 나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조선유학의 정통을 대변하는 많은 인물들을 배향하였던 곳이다. 1583년(선조 16) 나주를 중심으로 한 도내 유림들이 상소를 올림에 따라 김굉필(金宏弼)을 모실 서원 건립이 허락되었다. 그 때 나주목사로 있던 김성일(金誠一)이 적극 지원하여 이듬해인 1584년(선조 17)에 완공되었다.
당시 서원 터는 나주의 서문 밖 대곡동이었고, 서원 명칭은 <금양錦陽>이었다. 이 때 서원의 규모는 매우 정연하고 컸다. 회극당(會極堂, 강당), 영인당(永仁堂, 동랑) 정의당(精義堂, 서랑), 시습재(時習齋, 서재), 일신재(日新齋, 동재), 지원문(知遠門) 그리고 담장 밖에 10여 칸의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한편 서원의 경재기반도 튼튼하여 반월도(현재 안좌면) 등 3개 도서의 포작선과 500여석의 식리재 그리고 7인의 수호유생이 있었다. 원규는 김성일이 직접 백록동규를 본받아 작성하였다. 김성일에 이어 나주목사로 부임했던 임윤신(任允臣) 목사 때 이 지방 유생인 나시침의 아들인 나덕준(羅德峻)·나덕윤(羅德潤) 등이 발의하여 1589년(선조 22)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 4위를 배향하여 오현사(五賢祠)가 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서원원장으로 김천일(金千鎰), 정개청(鄭介淸), 안방준(安邦俊) 등 호남의 이름난 선비들이 임석하여 사풍(士風)과 학성(學聲)이 인근에서 추숭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경현서원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이를 애석하게 여긴 사림들이 중건을 모색하던 가운데 나주목사로 부임한 목장흠(睦長欽)이 전라도 관찰사 박승종의 후원과 뜻있는 사림과 합력하여 1608년(광해군 원년) 중건하였다. 1609년에는 호남유생 김선(金璇)등이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경현>이란 액호를 하사받았다.
그 후 1693년(숙종 19)에는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을 추배하여 모두 7위를 제향하게 되었다. 이후 1868년 서원 훼철령에 따라 훼철되기에 이른다.(실제훼철은 1871년이라고 전해진다.) 현재의 서원건물은 1977년 영안마을에 이전 복원된 것이다. 당시 김희철, 정동채, 유제수 등이 크게 주력하였다.
1)주벽-김굉필(金宏弼, 1454∼1504)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簑翁)·한훤당(寒暄堂). 예조참의 중곤(中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의영고사(義盈庫使) 소형(小亨)이고,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유(紐)이며, 어머니는 청주한씨(淸州韓氏)로 중추부사(中樞副使) 승순(承舜)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소학≫에 심취해 ‘소학동자(小學童子)’로 불리었다. 선조는 서흥의 토성(土姓)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士族)으로 성장했는데, 증조부인 사곤(士坤)이 수령과 청환(淸宦)을 역임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현에 이주하면서 그곳을 주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할아버지인 의영고사 소형이 개국공신 조반의 사위가 되면서 한양에도 연고를 가지게 되어, 그는 할아버지 이래 살아오던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자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그를 보면 모두 피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분발해 점차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근기 지방의 성남(城南)·미원(迷原) 등지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주로 영남 지방의 현풍 및 합천의 야로(冶爐 : 처가), 성주의 가천(伽川 : 처외가) 등지를 내왕하면서 사류(士類)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이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소학≫에 심취해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일컬었고, 이에서 받은 감명을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했더니,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해 자식 구실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 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라고 술회했다고 한다. 이후 평생토록 ≪소학≫을 독신(篤信)하고 모든 처신을 그것에 따라 행해 ≪소학≫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나이 삼십에 이르러서야 다른 책을 접했고 육경(六經)을 섭렵하였다.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 때에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圓覺寺) 승려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이학(理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명목의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해 남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전생서참봉·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6년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으며,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써, 희천에서는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중종반정 뒤 연산군 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면서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사림파의 개혁 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 구축과 인재 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되어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다.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 컸다. 그 결과 1517년(중종 12) 정광필(鄭光弼)·신용개(申用漑)·김전(金詮) 등에 의해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도학(道學)을 강론하던 곳에 사우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그의 문인들이 피화되면서 남곤(南袞)을 비롯한 반대 세력에 의해 그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 은전에 대한 수정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이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뒤 그를 받드는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575년 영의정 추증, 1577년(선조 10) 시호가 내려졌으며, 1610년(광해군 2)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해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학문적으로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김종직을 사사(師事)한 기간이 짧아 스승의 후광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와 교육적 공적이 더 크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사우(師友)들 가운데에는 사장(詞章)에 치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정여창과 함께 경학(經學)에 치중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성향으로 인해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의 편향성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현실에 대응하는 의식에서도 그러한 성격이 잘 나타나, 현실상황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응하려는 자세는 엿보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20여 인에 달하는 문인들은 두 차례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크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나아가 유배지 교육 활동을 통해 더욱 보강되어 후일 개혁 정치를 주도한 기호계(畿湖系) 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소학≫에 입각한 그의 처신(處身), 복상(服喪)·솔가(率家) 자세는 당시 사대부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한훤당의 가범(家範)’으로 숭상되었다. 후학으로는 조광조(趙光祖)·이장곤(李長坤)·김정국(金正國)·이장길(李長吉)·이적(李勣)·최충성(崔忠誠)·박한공(朴漢恭)·윤신(尹信) 등이 있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서흥의 화곡서원(花谷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의 옥천서원(玉川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현록≫·≪한훤당집≫·≪가범 家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2)정여창(鄭汝昌, 1450∼1504)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勖), 호는 일두(一蠹)·수옹(睡翁). 판종부시사 지의(之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전농시사 복주(復周)이며,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증한성부좌윤 육을(六乙)이다. 어머니는 목사 최효손(崔孝孫)의 딸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쓰다가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논어≫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여 체용(體用)의 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480년(성종 11)에 성종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행실을 닦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다.
지관사 서거정(徐居正)이 그를 경연에서 진강하게 하려 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148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8월에는 성균관 상사(上舍)의 동렬(同列)에서 그를 이학(理學)으로 추천하였다. 1486년 어머니가 이질에 걸리자 극진히 간호했으며, 어머니가 죽자 최복(衰服)을 벗지 않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 그 뒤 지리산을 찾아가 진양의 악양동(岳陽洞) 부근 섬진(蟾津)나루에 집을 짓고 대와 매화를 심으며 여기에서 평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1490년 참의 윤긍(尹兢)에 의해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자식의 직분을 들어 사양하였다.
성종은 그의 사직상소문의 끝에 “너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행실을 감출 수 없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것이 너의 선행이다.”라고 쓰고 사임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가 되었는데 이 때 정도(正道)로써 동궁(연산군)을 보도했으나 동궁이 좋아하지 않았다. 1495년(연산군 1) 안음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어 백성들의 질고(疾痼)가 부렴(賦斂)에 있음을 알고 편의수십조(便宜數十條)를 지어 시행한 지 1년 만에 정치가 맑아지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감사는 해결하기 어려운 옥사가 있으면 그를 만나서 물어본 뒤에 시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판결에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원근에서 그를 찾아와 판결을 받았다. 민사(民事)를 돌보는 여가로 고을의 총명한 자제를 뽑아 친히 교육하였고, 춘추로 양로례(養老禮)를 행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종성(鍾城)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중종 대에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승무(陞廡)되었다.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灆溪書院),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일두유집 一두遺集≫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3)조광조(趙光祖, 1482~1519)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자는 효직(孝直)이며 호는 정암(靜庵)이다. 17세때 어천 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金宏弼)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학문은 소학·근사록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 연구에 응용하였으며,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는데,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에는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에 초임되었다.
그 해 가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감찰·예조좌랑 등을 역임하면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는데, 그는 항상 유교로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그 뒤 정언·수찬·정랑·교리·부제학·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여씨향약(呂氏鄕約)의 실시, 소격서의 혁파, 현량과(賢良科)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 삭제 등과 같은 많은 개혁 정치를 단행하였다.
이 같은 급진적인 개혁은 마침내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야기 시켜서 기묘사화의 실마리로 작용하였고,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가 사사되었다.
당시 조광조의 도학정치에 대한 주창은 대단한 것이었고 이러한 주창을 계기로 하여 당시의 학풍은 변화되어 갔으며 뒤에 이황·이이 같은 학자가 탄생될 수 있었다.
그는 선조초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하여 사당이 세워지고 서원도 건립되었으니, 능주의 죽수서원(1570), 희천의 양현사(1576), 심곡서원(1605)등이 대표적이다. 이이는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등과 함께 그를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불렀다. 저서로는 정암집(靜庵集)이 있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4)이언적(李彦迪, 1491∼155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참군 수회(壽會)의 손자로, 생원 번(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 소(鷄川君 昭)의 딸이다.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갔다. 이조정랑·사헌부장령·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한 뒤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서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 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명종 즉위년)에 좌찬성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선비를 축출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켰을 때 추관(推官)이 되어 선비들을 심문하는 일을 맡았지만 자신도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언적은 조선조 유학, 곧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유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것은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는 것이다. 그의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계승받은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수립한 것이다. 다만 그의 호를 ‘회재’라 한 것은 회암(晦菴: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27세 때 당시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 쟁점인 무극태극 논쟁(無極太極論爭)에 뛰어들어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에서 손숙돈과 조한보의 견해를 모두 비판해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물론, 이언적은 이 논쟁에서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의 견해는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된다. 여기에서 그가 벌인 태극의 개념에 관한 논쟁은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그 자신이 좌찬성·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자신이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이이(李珥)는 그가 을사사화에 곧은 말로 항거해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만년에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큰 업적이 되는 중요한 저술들을 여러 개 남겼다. ≪구인록 求仁錄≫(1550)·≪대학장구보유 大學章句補遺≫(1549)·≪중용구경연의 中庸九經衍義≫(1553)·≪봉선잡의 奉先雜儀≫(1550) 등이다.
≪구인록≫(4권)은 유교 경전의 핵심 개념으로서 인(仁)에 대한 그의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에 인의 본체와 실현 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 정신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대학장구보유≫(1권)와 ≪속대학혹문≫(1권)은 주희의 ≪대학장구≫나 ≪대학혹문≫의 범위를 넘어서려는 그의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뒤따르는 도학자들보다 훨씬 자율적인 학문 태도를 가졌다. 곧,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계를 개편했던 것이다. 특히, 주희가 역점을 두었던 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亡章)을 그는 인정하지 않고, ≪대학장구≫의 경1장에 들어 있는 두 구절을 격물치지장으로 옮겼으며, 이런 개편에 대해서 주희가 다시 나오더라도 이것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1610년(광해군 2)에 문묘에 종사되었고,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배향되고 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5)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진보(眞寶)이고 자는 경호(景浩)이며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이다.
1527년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153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 후 1543년에는 성균관 사성까지 승진하였으나 을사사화 후 병약(病弱)을 구실삼아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1546년에는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중앙의 계속된 부름으로 외직을 지망하여 1548년에는 단양군수, 풍기군수 등을 지내기도 하였다.
풍기 군수로 재임 중에는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서적·학전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하여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의 효시가 된 소수서원이다. 풍기군수를 퇴관한 후에도 조정에서는 수십 회에 걸쳐서 성균관 대사성·홍문관 부제학·공조참판·공조판서·대제학·예조판서·우찬성·이조판서 등에 임명하였으나 몇 차례를 제외하고는 거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특히 1560년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고 정하고 이로부터 7년 동안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 수양,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이황의 사후 선조는 그를 영의정에 추증하였고, 향리에서는 도산서당 뒤에 서당을 지어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으며,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황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통하여 영남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인 퇴계 학파를 형성해왔고, 일본에 전파되어 도쿠가와(德川家康) 이래로 일본 유학의 기몬학파(崎門學派) 및 구마모토학파(熊本學派)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609년 문묘에 종사되었고, 서원 제향도 전국 40여 개 처에 이르렀다.
6)기대승(奇大升, 1527∼1572)
조선 중기의 문신·성리학자.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 또는 존재(存齋). 아버지는 진(進)이고, 어머니는 강영수(姜永壽)의 딸이며,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은 그의 계부(季父)이다.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에,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 해 8월 이량(李樑)의 시기로 삭직되었다. 그러나 종형 대항(大恒)의 상소로 복귀해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듬해 2월에 검토관으로 언론의 개방을 역설하였다. 1565년 병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1567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같은 해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집의가 되었으며, 이어 전한(典翰)이 되어서는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하였다. 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했고, 1570년 대사성으로 있다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 당하였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으며, 대사간·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 고부(古阜)에서 객사하였다. 그의 관로 생활에 변화가 많았던 것은 그의 직설적인 성격과 당시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학문에 대한 의욕은 남보다 강하였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金麟厚)·이항(李恒)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한 바 있고,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게 되자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뒤 이황과 12년에 걸쳐 서한을 교환하였다.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이른바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으며,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수정해 정발이동기감설(情發理動氣感說)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을 주장, 주기설(主氣說)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설(主理說)과 맞섰다.
그의 인물됨은 기묘명현인 조광조의 후예답게 경세택민(經世澤民)을 위한 정열을 간직했고, 정치적 식견은 명종과 선조 두 왕에 대한 경연강론(經筵講論)에 담겨 있다. 이 강론은 ≪논사록 論思錄≫으로 엮어 간행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숭례론(崇禮論)·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으로 분류된다.
그는 학행(學行)이 겸비된 사유(士儒)로서 학문에서는 그의 사칠이기설에서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행동에서는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인 탁견을 진주(進奏)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고경명(高敬命)·최경회(崔慶會)·최시망(崔時望) 등이 있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문집으로 원집 3책, 속집 2책, 별집부록 1책, ≪논사록≫ 1책, ≪왕복서 往復書≫ 3책, ≪이기왕복서≫ 1책, ≪주자문록 朱子文錄≫ 4책 등 모두 15책의 ≪고봉집≫이 있다.
7)김성일(金誠一, 1538∼159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안동 출신. 아버지는 진(璡),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6년(명종 11) 아우 복일(復一)과 함께 도산(陶山)의 이황을 찾아 ≪서경≫·≪역학계몽 易學啓蒙≫·≪심경≫·≪대학의의 大學疑義≫ 등을 익혔으며, 1564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후 다시 도산에 돌아와 이황에게서 수학하고, 그로부터 요순(堯舜) 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을 적은 병명(屛銘)을 받았다.
156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고, 이듬해 정자가 되었다. 이어 검열·대교 등을 거쳐 1572년 봉교가 되어 노산묘(魯山墓)를 노릉(魯陵 : 端宗의 陵)으로 봉축하고 사육신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도록 진언했으며, 군덕(君德)과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이듬해 전적과 형조·예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고, 이어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1574년 부수찬을 거친 후 정언의 신분으로 변장(邊將)에게 초피덧저고리를 받은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을 탄핵하였다.
이듬해 이조·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였다.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노력했으며, 돌아와 이듬해 홍문관교리가 되고, 이어서 장령·검상·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80년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史)로 함흥·삼수·길주·종성 등을 살피고 돌아와, 변장의 직무에 충실한 혜산첨사 김수(金燧)를 당상관에 승품하고, 영건만호(永建萬戶) 우응장(禹應長)과 정현룡(鄭見龍)·김광옥(金光玉) 등을 선전관(宣傳官)에 기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1583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황해도순무어사로 다녀와 군기관리(軍器管理)를 소홀히 하고 창곡(倉穀)을 부실하게 한 황주목사 윤인함(尹仁涵)의 파직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나주목사로 부임해 민원 처리에 노력하고, 오랫동안 끌어온 이 고을 임씨(林氏)·나씨(羅氏)간의 송사(訟事)를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이곳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워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 등을 제향하고,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1586년 나주 사직단(社稷壇)의 화재에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 이황의 ≪자성록 自省錄≫·≪퇴계집≫ 등을 편집, 간행하였다. 1588년 종부시첨정에 이어 봉상시정·경기추쇄경차관(京畿推刷敬差官)·예빈시정·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보고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해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그 해 부호군에 이어 대사성이 되어 승문원부제조를 겸했고,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92년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전의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서울로 소환 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柳成龍) 등의 변호로 직산(稷山)에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다. 그는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는 한편, 함양·산음(山陰)·단성·삼가(三嘉)·거창·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는 동시에 각 고을에 소모관(召募官)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 해 8월 경상좌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규합·군량미확보에 전념하였다. 또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해 도내 각 고을에게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 병으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김성일은 동인(東人)에 가담, 1590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崔永慶)의 신원(伸寃)을 위해 서인(西人)의 영수 정철(鄭澈)을 규탄하였으며, 그 후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릴 때 유성룡·김우옹(金宇顒) 등과 입장을 같이해 남인을 이루었다. 학문적으로 그는 이황의 수제자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해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했으며, 그의 학통은 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남한조(南漢朝)-유치명(柳致明)-김흥락(金興洛)으로 전해졌다. 또한 예학(禮學)에도 밝아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는 모든 예절을 ≪가례 家禮≫에 따라 행했으며, ≪두씨통전 杜氏通典≫·≪구씨의절 丘氏儀節≫·≪향교예집 鄕校禮輯≫ 등을 참고해 ≪상례고증 喪禮考證≫을 지었다. 1664년(현종 5)에 신도비가 세워지고,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사빈서원(泗濱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해사록 海槎錄≫·≪상례고증≫ 등이 있으며, 1649년(인조 27)에 문집으로 ≪학봉집≫이 만들어졌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현재 경현서원은 주위의 울창한 송림과 함께 아담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인 사당과, 정면 4칸에 팔작집인 강당 그리고 정면 3칸, 측면 1칸씩의 내삼문, 외삼문이 있다.
경현서원에 관련된 자료는 최근의 것이긴 하나 ≪경현서원지≫1책(1983년)이 있어 참고가 된다. 이 밖에 1980년에 세워진 <경현서원묘정비>와 <경현서원강당신축연의비>가 있다.
참고-나주시지1, 200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나주신문사 http://najunews.co.kr/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