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헌은 벽산 김도현(金道鉉 : 1852∼1914) 자신이 쓴 창의일기(倡義日記)이다.
내용은 을미년(1895) 12월 초3일부터 다음 해인 9월 초5일까지 약 10개월 동안의 기록이다. 이 기간중, 안동(安東)·영양(英陽) 등 경북의 10개 고을과 동해안 쪽의 강릉·삼척 등 넓은 지역에 걸쳐 험준한 산하를 발섭하면서 수많은 인인(仁人)과 지사들을 역방하여 토적구국(討賊救國)의 방책을 문답하기도 하고 모의도 하던 사실, 또 때때로 일본군과 싸워 작은 규모의 전과들을 올린 이야기도 실려 있다. 당시의 안동의병의 총수인 귄세연(權世淵)과 의병장 김도화(金道和)·도정(都正) 유지호(柳止鎬) 등을 찾아 거의(擧義) 방략을 모의한 때도 있었는데, 이때는 바로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에게 유지호가 머리 깎지 않는다고 곤욕을 당하던 때다.
한편 벽산창의에 동조하여 안동의병장 유시연(柳時淵) 등이 찾아오는 열혈청년(熱血靑年)들의 이야기, 이제까지 크게 알려지지 않은 안동의병진의 중요 인물들인,
안동의진의 도총(都摠) 유난영(柳蘭榮)·좌익장 이상오(李尙五)·중군 권문팔(權文八)·선봉장 이원여(李元汝) 등의 행적도 적혀 있다.
또 진보(眞寶)의 의병대장 허방산(許舫山)의 동생 환(煥)이 사천(沙川)선비 권모(權某)를 보내어 벽산과 같이 거사를 도모케 한 이야기와 특히 초기 의병항쟁사에서 분명치 않던 인물들의 정체가 밝혀져 있다.
예를들면 김하락의 의병진이 병신년(1896) 봄에 남한산성에서 적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다가 퇴진하여 영남방면으로 행군하여 마침내 영덕(盈德)에서 최후를 마친 대목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오직 김하락 일기가 있을 뿐이었는데, 이 문헌에는 그가 영남지역에 들어서서 바로 벽산의진과 관계를 맺은 이야기가 소상하게 실려 있고, 또 초기 의병항쟁 시기에 명성은 알려져 있으나 기록이 소상치 못했던 강릉의병장 민용호(閔龍鎬)의 이야기가 실렸는데,
그가 병신년(1896) 봄에 소모사(召募使) 이호성(李虎成)을 시켜서 벽산을 강릉으로 초청하자 벽산이 5백 리 길을 행군하여 강릉에 이르러, 수천 의군(義軍)을 친히 거느린 민용호의 뜨거운 영접을 받은 이야기들이다.
이 기록은 모두 그들의 투쟁사를 보다 정확하게 밝혀 줌으로써 이제까지의 벽산은 의병장으로서보다도 모친을 여의고 즉시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영해(寧海)의 관어대(觀魚臺)에서 바다에 투신한 열사로만 아는 이가 많았던 바, 이 문헌으로 말미암아 그의 의병장으로서의 영향력과 빛난 업적이 얼마만했던 것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 15 -
벽산선생창의전말(碧山先生倡義顚末)
국가의 운수가 불행하여 왜병이 졸지에 몰려와서 을미(乙未) 8월 21일에 국모(國母)께서 해를 입으시고, 이 해 11월 15일에 주상께서 또 강제로 머리를 깎이시니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울분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이 달 그믐날 저녁때 종제(從弟) 성옥(聖玉) 한현(漢鉉)이 읍에서 돌아와 머리를 깎인다는 급보를 전하니 자연히 한심스러워져서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12월 초하룻날. 일찍 집을 떠나 안동(安東) 지경 동산리(東山里) 길에 이르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머리 깎는 일로 임동면(臨東面)에서 모임이 있다고 한다.
저녁때 누침촌(樓沉村)에 이르러 유사장(柳査丈)의 소상(小祥)을 위문하고 이튿날 수곡(水谷)에 이르러 회식(悔植) 유원엽(柳元燁)을 찾아 함께 시사(時事)를 의논했다. 이 때 여러 친구들도 역시 여기에 모여 낮부터 밤까지 서로 일을 의논했다.
3일에 도정(都正) 유지호(柳止鎬)를 뵙고 그 넓은 포부를 듣고 물러나와 그 아들인 상사(上舍) 연박(淵博)을 만나고 곧 돌아왔다.
오늘날은 곧 화부(花府)에 모여서 창의(倡義)할 것을 의논하던 날이다.
주파로(舟坡路)에 이르러 성순(聖循) 권한모(權翰模)를 만나보고 창의(倡義)할 일을 의논했으나 지금 바야흐로 주위의 형세가 불리해서 억지로 일어나기가 어렵다 하나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로다. 어두워서 돌아와 아버지께 뵈었다.
4일 아침. 글을 돌려 한 번 청기(靑杞) 대명동(大明洞)에서 모이자고 했으니 이곳은 곧 표은(瓢隱) 김병의(金秉義) 선생의 숨어 사는 곳이다.
9일. 읍(邑)에 들어가 통문(通文)을 띄웠다.
이튿날 시골 노소(老少)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일을 의논했다. 여기서 수일을 묵었으나
- 16 -
안동(安東)과 예안(禮安)에 다녀온 뒤에라야 일이 되겠다 하여 유생(儒生) 넷을 뽑았다. 그러나 응섭(應攝) 오석인(吳錫寅)은 친환(親患)이 있다 하여 사양하고, 자정(子鼎) 조병희(趙秉禧)도 역시 고사(固辭)하니, 오직 국윤(國胤) 조영기(趙永基)와 나만이 같이 가게 되었다.
12일. 낮에 떠나서 동현(東峴)에서 잤다.
이튿날 낮에 시냇가에서 밥을 먹고 저녁때 조천(棗遷)을 지나서 포진(浦津)으로 달려가노라니, 큰 바람이 일어 모래를 날려 얼굴을 친다. 이날은 수정(藪亭)에서 잤다.
14일. 아침에 포항교(浦項橋)를 건너 제남루(濟南樓) 앞으로 말을 달려 갔으나 아무도 막는 사람이 없다. 이에 수곡(水谷) 상사(上舍) 유연박(柳淵博)을 만나서 함께 서기소(書記所)로 들어갔다. 인하여 대장소(大將所)로 들어가니 대장은 곧 전 참봉(叅奉) 권세연(權世淵) 어른이다.
다시 도소(都所)로 들어가 지평(持平) 김흥락(金興洛)과 도정(都正) 유지호(柳止鎬) 2어른을 만나고, 또 좌익장(左翊將) 상오(尙五) 이운호(李運鎬)를 만나고 나왔다.
나는 사사로이 유원엽(柳元燁)을 보고 말하기를
“무슨 진세(陣勢)가 이렇게 허술한가.”
하고 다만 스스로 탄식할 뿐이었다.
오후에 그곳을 떠나 중로에서 자고 선성(宣城)에 이르니 곧 15일이다. 대장(大將) 양산령(梁山令)·이만도(李晩燾)와 부장(副將) 용계(龍溪) 이중린(李中麟)이 위의(威儀)가 정숙(整肅)하고 언론이 준절(峻切)했다.
그곳을 물러나와 강위 주막에서 점심을 먹고 이내 떠나서 종로에서 잤다.
16일. 아침에 갈령(葛嶺)을 넘어 압곡(鴨谷)에 이르러 조국윤(趙國胤)과 헤어지면서 약속하기를 ‘내일은 곧 대향회(大鄕會)이니 설영(設營)할 것을 한결같이 공론(公論)을 좇아 하도록 하자’고 하였다.
해가 반도되기 전에 돌아와서 아버지께 뵙고 안동(安東)과 예안(禮安) 일을 대강 보고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이 와서 전하기를 안동(安東)에서 진(陣)이 깨졌다고 한다.
- 17 -
저녁때 또 수곡(水谷) 종고모(從姑母)가 피난해서 왔다. 그날은 즉 우리 종조부(從祖父)의 제삿날이다.
나는 말하기를
“이런 판에 어느 겨를에 예의를 닦으리오.”
하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통문을 발포하고 장차 한 고을에 돌려 거의(擧義)할 것을 도모하려 했으나 아버지께서 중지시켰다.
그러나 밤중에 촛불을 켜 놓고 비밀히 글을 써서 사람을 시켜 돌려 보였으나 약속을 두려워하는 세상에 그 누가 여기에 응하겠는가.
나는 새벽 달을 띄고 칼을 짚고 동북쪽으로 가서 애령(艾嶺) 밑에 이르러 제경(濟卿) 김병식(金秉植)을 만나 말 한마디를 듣고 깨달아 돌아왔다.
이때 유도정(柳都正) 어른이 안동관찰사(安東觀察使) 김석중(金奭中)에게 머리 깎는 일로 붙잡혔다가 형벌과 욕을 당했단 말을 듣고 몹시 분해했다.
이에 10여 일 동안 산 남쪽과 물 북쪽을 방황하고 다녔다.
어느 날 가범(可範) 정건모(鄭建模)의 집에서 자는데, 그날 밤 눈 속에 군석(君奭) 정치모(鄭致模)와 함께 달빛을 띄고 권성순(權聖循)을 찾아 그로 더불어 시사(時事)를 의논했다.
조반 후에 사창(泗倉)에 이르러 권덕숭(權德崇)을 만나 보고 다음 약속을 남기고 돌아왔다.
어느날 밤 한 마을 장정들을 모아 놓고 그들의 뜻을 시험해 보았으니 이 날은 섣달 그믐날이었다.
병신(丙申) 정월 초하룻날. 두 손이 동쪽으로부터 찾아왔으니 그 하나는 곧 유시연(柳時淵)이다. 그는 나를 위해서 청량(淸凉)에서 거의(擧義)할 것을 말해 준다.
이튿날 일찍 떠나서 읍(邑)을 지나다가 관리 남규원(南▼(氵+奎)元)을 보고 절대로 머리를 깎지 말라고 말했다.
장에서 그 고을 사람 김영두(金永斗)를 보고 이런 말을 하니 말을 듣자 한마디로 승낙한다.
- 18 -
동쪽으로 사평(沙坪)에 가서 조경실(趙敬實)을 보고 또 머리에 대한 말을 했다.
저녁때 도계(道溪)를 지나 이동(梨洞)에 이르러 유시연(柳時淵)의 인숙(姻叔) 조씨(趙氏) 집에서 잤다.
그날 밤에 소년들의 뜻이 용맹스런 자 수삼인을 보았다.
조헌기(趙憲基)가 뒤에 왔는데 언론이 몹시 쾌활해서 가히 쓸만했다.
약 4일 후에 갈현(葛峴)에서 서로 기다려 만나기로 약속했더니 그 뒤에 청량(淸凉) 사람이 왕래하는 자가 있었다.
약속한 기약이 되자 나는 내 아우와 종제(從弟), 일가 사람과 촌 백성 19명을 데리고 오후에 떠나 갈현(葛峴)에 다다르니 이미 황혼이었다.
순검(巡檢) 하나를 잡아가지고 밤에 어천(漁川)을 지나 두곡(斗谷)에 다다라 밥을 먹으니 닭이 운다.
이윽고 일찍 길을 떠나 산성(山城)을 넘어서 청량(淸凉)으로 들어가니 과연 초연적인 험한 곳이었다.
울퉁불퉁한 기이한 바위는 어풍대(御風臺)로 이것을 둘러 정사(精舍)를 지은 곳은 강학소(講學所)이다.
총을 가진 군사들로 대략이나마 군대의 모양을 만들어 즉일로 행군(行軍)을 시작했다.
골짜기 입구로 내려가 돌자갈을 밟고 비진촌(飛津村)에 이르니 사람이 불을 켜 들고 기다린다.
듣건대 상사(上舍) 김학일(金學一)이 방금 상중(喪中)에 있다 하므로 들어가 만나고 같이 자면서 함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고 이야기했다.
6일에 봉화읍(奉化邑)에 들어가 군수(郡守) 안모(安某)를 만나고 총과 탄환을 빌려 가지고 떠났다.
낮에 내성시(乃城市)에서 쉬노라니 면내 여러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소 잡고 술을 내다가 우리를 맞는다.
영천읍(榮川邑)에 당도하니 밤이 이미 깊었다.
- 19 -
동헌(東軒)으로 들어가 군수(部守)를 보니 군수가 친히 나와서 사관(舍館)을 정해 주고 대접하기를 심히 후하게 한다.
그때 서울에서 한 역인(驛人)이 와서 전하는 말에 개화(開化)는 깨졌고 머리를 깎이는 법령은 중지되었으며, 안동관찰사(安東觀察使) 김석중(金奭中)은 벌써 도망했다고 한다.
이에 영천(榮川) 향원(鄕員)들이 즐겨 일을 같이 하려 하지 않고 장차 자립(自立)해서 각각 계교를 마련하려 하니 어떻게 다툴 수가 있는가.
대개 영남(嶺南) 여러 군이 서로 어긋나고 합하지 않는 것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오후에 회진(回陣)하여 입석(立石)에서 잤다.
그날 밤 큰 눈이 왔다.
날이 밝자 고종숙(姑從叔) 권양오(權養吾)의 집을 찾았더니 그는 말하기를
“오일(午日)에는 교전을 하지 말도록 하라.”
한다.
그날 온혜(溫惠)로 돌아와 숙소를 삼백당(三栢堂)에 정했으니 여기에는 곧 유격장(遊擊將) 원여(元汝) 이인화(李仁和)의 큰 집이다. 주인이 나이는 어리나 총명하고 민첩했다.
이튿날 서고서재(西皐書齋)로 숙소를 옮기고 그 이튿날은 선성읍(宣城邑)으로 들어갔다가 비에 막혀 2밤을 잤다.
13일에 출진해서 안동부(安東府)를 향하니 서로 상거가 40리다. 기치(旗幟)는 앞에 있고 거기(車騎)는 뒤에 있으며 대포 소리는 우뢰와 같으니 기개가 사람들을 움직였다.
산 남쪽에서 바라보는 자가 몇 명이며 길 가에서 보는 자 몇 명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 지경에 들어가 산천의 형세를 보고 인물의 풍부함을 보니 참으로 15읍중에 제일 큰 고을이었다.
이틀이 지난 후에 수백 명 군사를 거느리고 영호루(暎湖樓)에 올라 잠시 앉았다가
- 20 -
이내 내려와 평평한 사장(沙場)에서 진 치는 법을 훈련하고 사정(射亭)으로 달려가 활을 쏘고 돌아왔다.
여러 10일 동안 울분하던 끝에 반나절 말을 타고 돌아 보니 족히 뭉클한 마음을 격발시킨다.
이날 밤 칼을 끌러 걸어 놓고 달 구경을 했으니, 정월 상원(上元)인 때문이었다.
이때 영천진(榮川陣)은 안기(安奇)에 머물렀고, 안동진(安東陣)은 새로 향교(鄕校)에 설치했다. 나는 이들 각 진과 합하자는 뜻으로 여러 번 청했으나 종시 듣지 않는다. 나는 마땅히 본읍(本邑)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하고 드디어 그 곳을 떠나 포진(浦津)에서 잤다.
영양(英陽) 수리(首吏) 남두환(南斗煥) 형제가 와서 말하기를
“청량의병(淸凉義兵)들이 침해가 많다.”
고 한다.
이에 일찍 떠나 말을 빨리 달려 70리를 가서 읍에 이르러 체포한 자는 풀어 주고 온 자는 놓아 보내니 모두 무사했다.
이튿날 본향(本鄕)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장차 영채를 세우고 나가려 했으니, 대장(大將)은 곧 조승기(趙承基)이다.
지금을 당해서 병사(兵事)는 의리로 합하는 것인데, 마음이 만일 같지 않으면 어찌 서로 합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떠나 진보(眞寶)로 가니 진보(眞寶)도 또한 그렇다. 또 청도(靑島)로 들어가니 청도(靑島)도 또한 그렇고, 영진(英眞)도 역시 마찬가지다.
또 여기서 떠나 청운역(靑雲驛)을 거쳐서 의성군수(義城郡守)의 집에 일이 있어 들렸는데, 그 아들이 나이 겨우 17세로서 일 처리하는 것이 조용하니 심히 기이하고 장한 일이다.
이튿날 이전평(梨田坪)에서 점심을 먹고 높은 고개 하나를 넘어 영덕(盈德) 경계에 이르니 그 고을 군수(郡守)는 이미 머리를 깎았다가 선진(先陣)에게 체포되었다.
읍에 도착하니 그 고을 선비 김약장(金約長)과 배참봉(裵叅奉)은 다만 영접하고
- 21 -
떠나 보낼 뿐이었다.
이곳을 떠나 영해(寧海)에 이르러 자고 또 떠나서 익동(翼洞)에 이르러 처인당(處仁堂)에서 잤다.
또 울령(鬱嶺)을 넘어 석포(石浦) 순익(純益) 이현채(李鉉採)의 집에서 잤다.
이튿날 신촌(新村)에서 점심을 먹고 저물게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님께서 문에 기대어 기다리고 계시다.
겨우 하루를 지나 다시 집을 떠나서 갈령(葛嶺)을 넘어 부포서재(浮浦書齋)에서 자고 소를 잡아 군사들에게 잘 먹였다.
역동(易東) 이맹연(李孟然)은 증국에서 군사를 지휘하던 자이다.
읍에 들어가 대장(大將)을 보니 그는 곧 전일의 부장(副將)이다.
이때 중군(中軍) 김석교(金奭敎)는 주천(酒泉)에 가서 호좌소모관(湖左召募官) 서상렬(徐相烈)·안동증군(安東中軍) 권문팔(權文八)과 말을 죽여 맹세를 맺었다는 보고가 오고, 또 중군(中軍)의 자리를 사퇴하려는 글이 계속해서 왔다.
이리하여 그 자리를 내가 맡게 되었다. 이때 마침 용궁(龍官)으로 출진(出陣)하려는 참이어서 나는 사양할 수가 없었다.
환군한지 하루 만에 다시 떠나서 선봉장(先鋒將) 원여(元汝) 이인화(李仁和)·전방장(前防將) 정언(正言) 이중언(李中彦)·참모(叅謀) 이빈호(李彬鎬)·이중엽(李中燁), 종사(從事) 이장규(李章奎)와 함께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15리를 가 서촌(西村)에 도착하니 해가 이미 기울었다.
이날은 박씨(朴氏) 집에서 자고 또 그곳을 떠나 수동역(壽洞驛)에 도착했다. 이 곳 마을 뒤에는 서애(西厓) 유(柳)선생의 묘(墓)가 있다. 올라가서 성묘(省墓)를 하고 돌아오니 권주성(權周成)이 와서 본다. 이 사람은 무신(戊申)년 공신(功臣) 화원군(花原君)의 봉사손(奉社孫)이다.
밤에는 비가 오고 이튿날 낮에는 개었다.
그곳을 떠나 오천시(梧川市)에서 자고, 또 떠나서 주막에서 밥을 먹고 산양시(山陽市)에 다다르니 이미 석양이다.
- 22 -
전 증군(中軍)과 만나 서로 읍하고 자리를 양보한 후 앉아서 얘기하는데 얼마 안 되어 호좌종사(湖左從事)와 풍기(豊基)와 봉화(奉化)의 종사(從事)가 와서 태봉(胎峯) 지도(地圖)를 뵈면서 내일 교전(交戰)한다고 한다.
곧 그곳을 떠나 어디어디를 거쳐 한 마을이 있기에 거기서 잤다. 밤에 한 남자가 머리에 두건(頭巾)을 쓰고 손에 칼을 짚은 채 문 밖에 서서 나를 보고 말을 하려고 한다.
이에 누구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호좌(湖左) 선봉(先鋒) 황기룡(黃起龍)이라 한다.
자리를 주어 앉게 했더니 조금 있다가 급히 기별이 있어 흑추(黑酋)가 온다고 한다.
이 말을 듣자 황선봉(黃先鋒)은 창황히 달아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군사들을 불러 함께 뒷산에 올라 보니 포성(砲聲)이 들리고 탄환이 쏟아지니 의심컨대 그 흑추(黑酋)가 포를 몇 번 쏘는 듯 싶다.
북쪽 산에 흰 옷을 입은 자가 은연(隱然)히 멀리 달빛 속에 보였는데 이어 호좌 선봉의 군인 것을 알았다. 대개 서로 의심, 서로 놀랐었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내일 태봉(胎峯)의 일은 여러 군진(軍陣)이 이미 당일에 동맹(同盟)을 맺던 여러 장수들도 아니고, 또 평생 친구들도 아니니 내일의 일이 어찌 오늘 밤 일과 같지 않기를 바랄 수 있을까.
16일에 태봉(胎峯)을 향해 가는데 한 기다란 시내가 있고 커다란 들이 하나 있다. 혹 산에 올라 멀리 바라보기도하고 혹 길을 물어 후군을 기다리기도 한다. 오직 선성(宣城)의 진이 앞에 섰고 풍(豊基)·영(榮州)·순(順興) 3진은 뒤에 따라 들을 덮고 나간다.
나는 요지(要地)을 살펴 긴 뚝을 의지하고 포를 쏘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도망해 간다.
오직 왜추(倭酋) 17명이 총을 메고 들로 나오더니 역시 조그만 뚝에 의지하여 포를 쏘니 탄환이 뚝을 넘어서 비오듯 쏟아진다.
우리 진에서는 군사 하나가 왜의 포에 맞아 탄환이 겨드랑이를 뚫고 피가 몹시 흐르는데,
- 23 -
그래도 아직 죽지 않았다. 이것을 보고 일군(一軍)이 모두 겁을 낸다.
안동(安東)군사는 뒷산에서 포를 쏘니 우리 군사는 중간에 끼어 있다. 이에 영을 내려 퇴진하여 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의지하고 바라보도록 했다. 이 싸움에 내 아우 경옥(景玉) 동현(東鉉)은 포를 쏘아 흑추(黑酋) 5명을 죽였고, 초장(哨長) 이오동(李五同)도 역시 포를 쏘아 흑추(黑酋) 7명을 죽였다.
이리하여 각 진에서 포로 적을 죽인 것이 수10여 명 되었다.
낮에 들으니 안동(安東)군대의 중군(中軍) 권문팔(權文八)이 왔다 하므로 가서 보았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의 계교가 이루어지지 못하므로 피해 달아나겠다 하니 형세가 만류할 수가 없다.
흑추(黑酋) 60여 명이 몹시 많은 것은 아니지만, 사방으로 흩어져 포를 쏘고 있으며, 우리 의병(義兵)들은 도망해 달아나는 자가 얼마인지 알 수가 없다.
저녁 무렵 흑추(黑酋) 수백 명이 뒷산을 넘어 내려오는데, 의외의 포성이 터져 나오니 7진의 군사가 바람처럼 흩어지고 남는 것이 없다. 장졸(將卒)이란 불과 친졸(親卒) 15, 16명뿐이니 그 형세 어찌할 수가 없다.
나도 또한 숨어 피해서 산양시(山陽市)에 다다르니 말군종은 안장과 말을 버리고 달아나며, 포졸(砲卒)은 돈 꾸러미와 총만 가지고 달아난다. 이것은 역시 훈련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모두 서로 잃어버리고 뒤에 있는 자는 3, 4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을 데리고 용궁읍(龍宮邑)으로 피했다가 밤에 샛길로 해서 불을 끄고 가서 딴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게 했다.
밤을 타서 조그만 고개를 넘으니 따르는 자가 두어 대(隊)에 지나지 않는다. 조그만 다리 서쪽에 한 초가집이 있는 것을 보고 밥을 청해 먹고 잠시 쉬었다.
날이 밝기 전에 경진교(京津橋)에 다다르니 위에서 가게 보던 사람이 파수를
- 24 -
보고 있다가 말한다.
“호좌(湖左) 군대들이 모여서 다시 싸울 계책을 세우고 있으니 그리로 가십시오.”
그러나 나는 이미 전 날 여러 진이 겪은 일을 보았다.
그들이 힘을 합해서 함께 싸울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이에 조그만 길을 따라 학가산(鶴駕山)으로 들어가니 산은 깊고 길이 험해서 쫓는 자들이 따라오지 못한다.
골짜기 속에 백성들의 집 몇 호가 있는데 이름을 가거리(可居里)라 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하룻밤 자고 이튿날 구부러진 언덕에서 점심을 먹고 서촌(西村) 뒷 동리에 도착하니 발이 부르터 걸을 수가 없다.
들에 망아지 한 마리가 있어 탈만한데, 마침 한 소년이 나오니 그가 바로 주인이다. 이것을 빌어 타고 몇 리를 가니 선성(宣城)이 멀지 않다. 조그만 시내를 건너 그 망아지를 돌려 보내고 지팡이를 끌고 역계(驛溪)에 도착하니 먼저 온 여러 군사들이 듣고 몰려 나와서 맞아 준다.
장관(將官)들 중에 나를 아는 자들은 서로 만나 위로하니 전 군대에 상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또 부상을 당한 사람도 또한 무사하였으니 역시 다행한 일이 아닌가. 인하여 나는 사면장(辭免狀)을 올렸으나, 허락지 않고 좌우에서 또 억지로 붙든다.
이에 나는 대장(大將)이 있는 곳에 나가서 읍하고 사퇴했다.
이튿날 화부(花府)에서 사사로이 기별이 왔는데, 그곳 왜병들이 지경에 들어왔으니 구해 달라고 청한다. 의리가 같은 처지이니 구원하지 않을 수 없어서 나는 군사 50명을 거느리고 스스로 장수가 되어 나갔다.
이때 포졸(砲卒)은 모두 진(陣)에 머물러 있게 하였는데 이는 싸운 경험이 없는 자들이고, 장관(將官)으로서 따르는 자는 원여(元汝) 한 사람뿐이었다.
이날 오천(烏川) 후조당(後凋堂)에서 잤다. 주인 김원가(金元可)는 석포(石浦)로 피난 갔고, 그 아우 명가(明可)도 또한 읍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날 밤 불빛이 벌겋게 타오르니 우리가 미처 구원하기 전에 왜적이 이미
- 25 -
화부(花府)에 들어와 방화하였다.
새벽 닭이 울자마자 군사를 돌려 읍으로 들어가니 거리에는 사는 사람이 없고 몇몇 군졸(軍卒)들이 장소(將所)에 모여서 황황해 할 뿐이었다.
이튿날 부근 동리에 영을 내려 장정들을 모아서 선성(宣城) 성을 고쳐 쌓고 기봉(旗峰)에 굴을 파고 역계(驛溪)에 돌을 쌓아 군대를 나누어 덮고 지켜서 방어할 방책을 세우니 왜추(倭酋)가 감히 예안(禮安) 지경을 범하지 못했다.
이로부터 군중 상하가 2 갈래로 갈라지니 나는 기미를 보아 행동하여 3번이나 사면서를 올렸으나 허락을 얻지 못했다.
하루는 군중이 크게 시끄러워 제 멋대로 달려 역계(驛溪)를 지나 고개를 넘어 달아나는 군사가 있었다.
나는 이를 쫓아가 만류하고 진으로 데리고 돌아와 타일렀다.
이틀이 지난 후에 대장(大將)이 망미루(望美樓)에 앉았더니 졸지에 중군(中軍)을 해임하는 명령이 내렸다.
아아!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머리 털을 보존하고 의관을 보존하기 위함인데 어찌 아무 죄도 없이 머리를 굽힐 것이랴.
수기(手旗)를 거두어 돌려 보내고 강에 이르러 배를 타니 사공이 배를 매고 놓아 보내지 않는다. 칼을 빼어 줄을 끊고 앞으로 배를 내면서 다시 이 강물을 건너지 않겠다고 맹서했다.
부포(浮浦)와 인포(仁浦)를 거치고 소산(蘇山)을 넘어 구룡방(九龍坊)에 이르렀다.
권군필(權君弼)을 찾아 점심을 먹고 대곡(大谷)에 이르렀다. 따르는 군졸 몇 명을 당령(塘嶺)으로 보내고 혼자서 해천(海川)에 이르러 사형(査兄) 이문서(李文瑞)의 집에서 잤다.
이튿날 세동(細洞)에 있는 족제(族弟) 형옥(衡玉)의 집을 거쳐 늦게 집으로 돌아와 자취를 감출 계획을 했다.
이튿날 안동도총(安東都摠) 유난영(柳蘭榮) 어른이 편지를 써서 사람을 보내서 나를 부른다.
- 26 -
나는 회답하여 이를 사양했다.
어느날 석포(石浦) 순익(舜翼) 이현채(李鉉埰)가 유도총(柳都摠)을 위하여 그 일가 사람 계호(繼浩)를 시켜 편지를 보내서 나를 청한다.
이때 진보대장(眞寶大將) 방산(舫山) 허훈(許薰)의 아우 환(▼(艹/煥))이 사천(沙川)의 선비 권씨를 내게 보내서 속히 함께 일 할것을 요구했다. 방산(舫山)은 곧 망사(望士)요 또 그 아우 위(蔿)는 당세의 기남자(奇男子)로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동인(同人)이므로 함께 의리를 강구하고 일을 꾀할 수 있다고 하니 어찌 이를 물리치고 나가지 않을 수 있으랴.
이에 단기(單騎)를 타고 상리(上里) 유진소(留陣所)로 가서 만나 보았다.
허(許)어른은 의리의 큰 것을 대강 말하고 나서 그 아우 희기(羲墍)로 하여금 일의 시말을 의논해 들리게 했다.
여기에서 하룻밤 같이 자고 안동(安東)군사를 나누어 가지고 남쪽으로 가서 군사를 더 모집하기로 약속하고 돌아왔다.
그런지 이틀 후에 군사 40명을 거느리고 장차 안동(安東)으로 향하려 하여 바람과 비를 무릅쓰고 가서 편항(鞭巷)에서 잤다.
이튿날 중도에서 비를 만나 길가 집으로 피해 들어갔다가 비가 개인 뒤에 물을 건너 사빈(泗濱)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이때는 3월이라 꽃 피고 버들잎 터 나오는 시절인데, 어느 겨를에 이런 것을 생각하랴.
또 길을 떠나 가노라니 이슬이 옷을 적신다.
금수리(錦水里)에 도착하니 검은 연기는 마을을 덮어 일어나며 누런 진흙은 길에 가득하다.
이날 전사(傳舍)에 들려 잤다.
이튿날 유난영(柳蘭榮) 어른을 뵙고 승진되어 부장(副將)이 되었다. 또 명함을 바치고 대장(大將) 김도화(金道和) 어른을 뵈오니 나이 70이 넘었는데 예로 대접하였다. 대도(大都)에서 1번 모일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나는 먼저 가서 신당노사(新塘路舍)에 진을 머물렀다.
- 27 -
듣자니 광주(廣州)군대가 남쪽으로 온다하므로 들에 나가서 기다렸다. 그 군사는 50~60명이고 장수는 의성(義城) 사람 김하락(金河洛)인데, 키가 크고 시원스러우며 그 말은 쾌활하고 씩씩하다. 그들은 경주(慶州)로 향한다.
낮에 중군(中軍) 권문팔(權文八)이 지나다가 나를 찾아본다.
정언(正言) 권옥연(權玉淵)과 참모(叅謀) 권재중(權載重)이 또 와서 봤다.
이튿날 안동부(安東府)에 들어가니 과연 집 천여 호가 모두 불타서 잿가루만 땅에 가득할 뿐, 저자도 쓸쓸하여 그 참혹한 모양을 차마 볼 수가 없다.
며칠을 거기서 유하노라니 허희기(許羲墍)가 아침 저녁으로 와서 말하기를
“본부(本府) 장수가 군사를 나누어서 남쪽으로 보낼 의사가 없으니 이를 장차 어찌 할 것인가?”
한다.
나는 외로운 군사로 낙동강(洛東江)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희기(羲墍)와 슬프게 작별했다.
마침 평해(平海)에 있는 상사(上舍) 이호성(李虎成)이 강릉의병장(江陵義兵將) 민용호(閔龍鎬)의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나를 청하려고 5백여 리 길을 왔다.
또 그 편지를 보니 내용이 몹시 긴하고 간절하며 의리가 명쾌(明快)해서 관동(關東) 전체의 모든 고을을 통솔하여 의병다운 세력을 이루겠다 했으니 참으로 의사(義士)였다.
나도 그를 보고자 해서 이를 허락하고 패랭이[平凉子]를 사서 의병(義兵)들에게 쓰게 하고 모두 흰 옷을 입혔다.
집에 돌아가 하룻 밤을 지내고 또 아버님께 고하고 나와서 먼 길을 가니 사람의 자식된 자로서 진실로 국가의 일이 아니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겠는가. 거느린 군사가 겨우 60명인데 집을 떠나 본읍에서 잤다.
이튿날은 수비신원(首比新院)에 도착해 잤다.
비가 오다가 개었다가 한다.
- 28 -
낮에 옥잠(玉岑)을 떠나 선미촌(仙味村)에 이르러 잤다.
이튿날 평해읍(平海邑)으로 들어가니 읍수(邑守) 정현조(鄭賢朝)는 바로 회동대신(檜洞大臣)의 손자다.
5리 밖까지 나와 말에서 내려 예로서 영접하고 관사에 숙소를 정하며 음식을 장만하여 잘 대접한다.
근래의 수령(守令)이 어찌 이같이 충성스런 뜻이 있는 자가 있겠는가.
이틀을 지나 울진(蔚珍)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자고 또 이틀만에 삼척(三陟)에 이르러 죽서루(竹西樓)에 올라 보니 참으로 기이한 경치였다.
또 이틀만에 오후에 강릉(江陵)에 도착하니 민대장(閔大將)이 친히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들에 나와 기다린다.
함께 들어가 옆에 앉아서 보니 용모는 단정하고 뜻은 굳으며 그 글이 또 날카로와 가히 의리를 성취할 만한 분이었다.
그는 당포(唐布)를 주어 우리 군사의 갖가지 옷을 만들도록 하고 또 돈을 각각 2냥씩 주었다.
이튿날 듣자니 서울 군사가 의병(義兵)을 공격해 온다고 한다.
민대장(閔大將)은 나를 청해서 대공산성(臺空山城)을 보여 주고 험한 곳에 웅거할 계획을 하라고 한다.
나는 두어 포병(砲兵)을 데리고 가라니 선비 최씨가 앞에서 안내한다.
삼왕동(三王洞)에 이르니 한 절 집이 있고 중 3,4인이 살고 있다.
여기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후에 뒷산에 올라 보니, 그 동쪽에는 강릉김씨(江陵金氏) 시조(始祖)의 묘(墓)가 있다.
성 터에 이르러 보니 다만 몇 초막(草幕)이 있고, 부인 하나와 조그만 아이 하나가 있을 뿐, 그 밖의 장정들은 모두 산을 개간하러 나갔다.
산 위에 샘이 있어 목 마른 사람들이 마시도록 되어 있다.
좌우를 둘러 보니 진을 쳐 웅거할 곳이 못 되므로 그 읍으로 도로 들어가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온 진의 군사가 모두 나와 있기로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서울군사가 방금 지경으로 들어온다.”
- 29 -
고 한다.
저녁에 산에 올라 군사를 매복시키고 밤을 지냈더니 날이 밝기도 전에 군대 속에서 과연 대포 소리가 나온다.
양군이 교전했으나 의병쪽이 불리하여 구산역(九山驛)으로 퇴진하여 점심을 먹었다.
이때 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니 심히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풍편에 듣건대 내 아우 경옥(景玉)은 상사(上舍) 이경첨(李景瞻)와 함께 위험을 피하여 먼저 마을 집으로 나갔고, 내 말 3필을 적들이 빼앗아 갔다고 한다.
나는 도보(徒步)로 관동진(關東陣)과 함께 비령(扉嶺)을 넘어 임계(臨溪)에 다다라 진을 머물렀다.
4월 12일. 밤에 큰 바람이 일어 나무를 뽑고 기와를 날리고, 보리가 마른다.
며칠 뒤에 떠나서 중로에서 점심을 먹고 초저녁부터 백복령(白伏嶺)을 넘으니 높고 험하며, 또 멀기도 하여 50여 리나 된다.
날이 샐 무렵 인가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
이날 같이 온 여러 사람들이 모두 모였는데 홀로 부포(浮浦) 이경첨(李景瞻)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후평시(後平市)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뒤에 경첨(景瞻)이 와서 말하기를
“강릉(江陵)군대에 잡혀 겨우 죽음을 면했다.”
한다.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랐으나 얼마 뒤에는 서로 보고 웃었다.
삼척읍(三陟邑)에 도착하자 민대장(閔大將)이 울릉도시찰사(鬱陵島視察使) 염석하(廉錫夏)를 죽였다.
5일 후에 들으니 서울군대 수천 명이 바야흐로 들어와서 장차 한 번 싸울 계획을 한다고 한다.
중군(中軍) 최중봉(崔中峯)은 뒷 산에 진 치고 민대장(閔大將)은 본 읍
- 30 -
군대와 함께 남쪽 산에 진을 치고 나는 민동식(閔東植)·한중보(韓重輔)와 함께 성 안에 진을 쳤다.
웅덩이를 파 군사를 배복하고 있으려니 조금 후에 저쪽 군대들이 먼저 대포를 쏘아 포 소리가 천둥소리와 같고 탄환은 우박과 같이 쏟아진다.
나는 성을 돌보면서 격려하노라니 맨 앞 진이 약철(藥鐵)이 다 떨어졌다.
나는 그 중에서 제일 날쌘 포정(砲丁) 5명을 데리고 남쪽 산으로 가서 약철(藥鐵)을 지고 도로 뒷 산으로 돌아왔다.
이때 진중에서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약철을 빨리 가져 오너라.”
한다.
적군들이 이 말을 듣고 승세(勝勢)하여 연달아 포를 쏘니 진중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또 앞 진은 이미 흩어져 달아났고 산성(山城)에 매복한 복병(伏兵)도 역시 놀라 달아났다.
나는 한 삼나무[杉]에 의지하여 우리 군사가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이들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돌아오니 겨우 50명 밖에 되지 않았다.
길에서 장참모(張叅謀)·박진사(朴進士)와 포정(砲丁) 몇 명을 만나 함께 평릉(平陵)으로 지났으나 민대장(閔大將)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컨대 필시 오십천(五十川)으로 들어가는데 내 산졸(散卒)들도 역시 그 곳으로 따라 간 것이 아닌가.
중로에서 장 참모(張叅謀)와 박 진사(朴進士)를 오십천(五十川)으로 가도록 보내고 나는 십이령(十二嶺)을 향하여 도전(島田) 이씨(李氏)의 집에 와서 잤다.
이튿날 남쪽 회룡(回龍) 상사(上舍) 정문여(鄭文汝)의 집에 들려 점심을 먹고 일월산(日月山)을 넘어 죽고(竹皐)에 이르니 밤이 이미 깊었다.
종질(從姪) 군서(君瑞)가 피난 와서 살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잤다.
이튿날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님 기운이 몹시 쇠약하시다. 심히 걱정스럽다.
- 31 -
다행히 척주(陟州)에서 흩어진 군사들이 전날 모두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 교남(嶠南) 모든 군사들이 다 흩어져 버렸다.
나는 분발(憤發)하여 다시 종족(宗族)들을 불러 괴암서재(槐岩書齋)에 모이게하니 겨우 수 10명뿐이다.
글을 돌려 면내(面內) 사람들을 모이게 해 가지고 읍으로 들어가 영(營)을 꾸몄다.
적의 병대들이 장차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잠시 북초(北初) 등지로 피하여 와고(瓦臯)에서 자고 문암(門岩)으로 들어갔다.
적병들은 잠간 왔다가 바로 가므로 우리는 비로소 읍으로 돌아갔다.
며칠이 지나 또 적병들이 그 지방으로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동쪽 대천곡(大川谷)으로 들어갔다.
비를 만나 잠시 민가(民家)에서 비를 피하고 산을 넘어 북어령(北漁嶺)에 도착하여 자고, 새벽에 떠나 비를 맞고 소계(素溪)를 넘어 아침을 먹었다.
또 석포(石浦) 술집에서 점심을 먹고 구수동(九水洞)으로 들어가 선비 유씨 집에서 잤다.
이 집에서 담배 1 둥치를 준다.
또 그곳을 떠나 한 고개를 넘어 한 곳에서 자고 일직 떠나 고현(高峴) 술집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소모동(召謀洞)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또 골짜기를 따라 고개를 넘어 가니 이곳은 곧 원절암(元節岩) 건너 편이다. 아우 경옥(景玉)을 보내서 덕천(德川)의병에게 소식을 통하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는 바야흐로 5월 5일이다.
3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한 가지 방책도 얻지 못했다고 한다.
석양(夕陽)에 황목촌(黃木村) 황일관(黃日官)의 집에 들어가 잤다.
이튿날 어천(漁川)을 지나 조그만 고개를 넘어 미산(眉山)을 지나고 또 합강(合江)을 지나 현포(玄浦)에서 점심을 먹었다.
산을 따라 동산령(東山嶺)에 이르니 한 동자(童子)가 말하기를
“적병들이 소청(小靑)으로 들어갔다.”고
- 32 -
한다.
군사를 이끌고 산마동(山馬洞)으로 들어가 저녁밥을 먹고 밤에 대항(臺巷)을 지나 저동(苧洞)으로 해서 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본진은 과연 적병들이 모두 약탈해 가고 빈 집이었다.
다시 영(營)을 꾸미고 군사를 모아 검산(劒山) 책보(柵堡)를 수리했다.
어느날 적병들은 팔수동(八水洞)으로부터 여림령(麗林嶺)을 넘어 애현(艾峴) 양지쪽에서 모여 가지고 검산(釼山)을 향해 포를 쏜다.
이에 산 위에 매복했던 우리 군사들이 모두 겁내어 내려 간다.
나는 하는 수 없어 군사를 거느리고 유동(幽洞)으로 들어가 앞 산에 올라 바라다보니 왜놈 50명이 책(柵) 속의 초가집을 불 태우고 산을 내려 마을로 들어간다.
나는 앞에 있는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포를 쏘게 했더니 왜놈들은 놀라서 빨리 달아난다.
그들은 혹 화고(花皐) 뒤를 넘기도 하고 혹 호담(虎潭) 가를 달리기도 한다.
층층 바위 위에 나무가 있는데 군사 3 명이 또한 대포를 쏘아 소리가 산과 골짜기를 움직이니 왜놈들은 능히 서로 의지하여 대적하지 못하고 거의 경계 밖으로 물러간다.
그러나 이때 또 비가 몹시 쏟아져 포를 쏠 수가 없게 되니 복병(伏兵)들이 다시 제일 높은 봉우리로 올라와 계속하여 탄환을 쏜다.
나는 옥녀봉(玉女峰) 위에서 아우 경옥(景玉)과 종제(從弟) 영옥(英玉)을 시켜 힘껏 대적하게 했으나 형세 어찌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저동(苧洞)으로 해서 화등(花燈)에 올라 바라보니 포 소리가 그치고 불빛이 하늘로 올라가는데 괴재(槐齋)가 타고 있고, 당숙(堂叔)의 집이 역시 불타고 있다.
포졸(砲卒)을 시켜 물을 가져다가 처마가 연해 있는 3, 4호를 구하게 했더니 다행히 사람은 상하지 않았으니 집이야 아까울 것이 없다.
5일 후에 고을 사람 남종언(南宗彦)이 와서 말하기를
- 33 -
“적의 군대들이 지금 떠나는데 확실히 탄환은 떨어졌고 또 군사 수효도 적으니 이때를 타서 모두 사로잡을 수 있다.”
고 한다.
나는 식사를 하고 있어 미처 계획을 세우기 전에 포졸(砲卒)들이 어깨를 치켜 올리고 손바닥을 치면서 바로 천을봉(天乙峰)으로 달려 올라간다.
또 와서 전하는 말이
“적군들이 감천(甘川) 앞을 지났으니 얼마 안 있어서 입암(立岩)에 도착 할 것이다.”
한다.
나는 생각하기에 입암(立岩)은 지형이 험하여 군사를 매복할 만하리라 하고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사천(泗川)을 지나 부용봉(芙蓉峰)에 올라가서 군사들을 입암(立岩) 술집에 머무르고 있으려니 또 비가 온다.
이 때 왜놈 몇 명이 기계를 가지고 먼저 떠나서 앞으로 오고 있다.
이것을 본 총을 가진 군사들이 누구인들 쏘고 싶지 않을까만 하늘이 장난을 하니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비밀히 앞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이때 한 포에서 탄환을 쏘아 우리 의병(義兵)의 행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우리는 급히 군사를 거두어 초선도(招仙島)를 건너 들을 지나 다시금 강을 건너서 문해(汶海)에 도착했다.
저들 병대들의 포 쏘는 소리가 북쪽을 향해서 울려 와 산이 울리니 아마 소청(小靑)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우리는 삼산(三山)을 지나 안현(鞍峴)을 넘어서 하풍(河豊)으로 해서 주이(注易)·지평(芝坪)에 이르니 조숙첨(趙叔瞻)이 길에 나와 말하기를
“연당(蓮塘) 정성첨(鄭聲瞻)이 포에 맞아 상했다.”
하니 듣고 놀람을 이기지 못했다.
이 사람은 본래 의리를 숭상하고 뜻이 굳었으며 함께 고생한 지도 여러 날이 되었는데 오늘의 변을 당하니 더욱 어떠하리오.
- 34 -
이 날은 바로 12일 경오(庚午)이다.
저번에 양오(養吾)씨가 말하기를
“오일(午日)에는 싸우지 말라.”
하던 말을 내 생각지 못했도다.
군사를 이끌고 감천(甘川)으로부터 떠나 장평(長坪)에 도착하여 자고 신당(新塘)에서 아침을 먹은 다음 낮에 구통(九通)에 도착하니 아버님께서 집식구들을 데리고 송지학(宋志學)의 집에 묵고 계시다.
이때 선성(宣城) 의진(義陣)에서 사사로이 통해 와서 양쪽이 합세하자고 한다.
나는 흩어진 군사 약간을 수습하여 청기(靑杞)에서 자고 이튿날 정족(鼎足)에서 점심을 먹었다.
선봉장(先鋒將) 이원여(李元汝)는 소모(召募) 신공필(申公弼)과 함께 갯머리에서 자고 오다가 들에서 서로 만나 손을 잡고 반가운 울음을 억지로 삼켰다.
우리는 함께 주곡상항(注谷上巷)에 이르니 포졸(砲卒)들이 무수히 포를 쏘아 사람을 상할 염려가 있으므로 나는 말에서 내려 이를 금지시키고 조대장(趙大將)의 집으로 들어가 잤다.
밤에 한 포졸(砲卒)이 낭촌(浪村) 속으로 도망하므로 인해 태형(笞刑)을 베풀어 내 쫓았다.
이튿날 읍으로 들어가니 본진(本陣) 조대장(趙大將)은 장소(將所)를 남씨재사(南氏齋舍)로 옮겼기로 내가 가서 보았다.
어느날 저녁에 헛 경보(警報)가 있었다.
장마가 계속되므로 여러 날 그곳에 진을 머물렀다.
전하는 말에 적의 병대들이 편항(鞭巷)을 지나 바야흐로 이곳으로 들어온다고 한다.
나는 군사를 거느리고 여림령(麗林嶺)에 올라 양쪽 골짜기에서 바라보고 기다렸다.
신소모(申召募)는 군사 50명을 거느리고 먼저 도계(道溪)로 가서 포졸(砲卒)이
- 35 -
혹 동쪽 산에 올라가기도 하고 혹은 뒤 언덕에 올라가기도 했다.
나와 원여(元汝)는 군사 10여 명을 거느리고 고개 위로 올라가 포정(砲丁)들을 보내서 정찰하여 그곳 산세를 알아 오게 했다.
동자(童子)들이 마동(馬洞)을 지나 남쪽으로 높고 험한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무사한 줄 알고서 영을 내려 대포 수 문을 앞에 장치해서 마동(馬洞) 고개 목을 막도록 했다.
포정(砲丁) 고인식(高仁植)이 앞에서 급히 고하기를
“왜놈이 지금 올라옵니다.”
하더니 바로 포 소리가 계속해 나면서 탄환이 지척에 와서 떨어지니 회피할 겨를이 없다.
아우 경옥(景玉)으로 하여금 대포 2, 3번을 쏘게 했더니 골짜기 속에 있는 오랑캐가 놀라서 달아난다.
이에 또 산위로 올라가 좌우를 돌아다보니 나를 좇는 자는 오직 아우와 이충언(李忠彦)·이양길(李兩吉) 3 사람뿐이다.
팔수동(八水洞)에서 나와 청기음(靑杞陰) 마을에 다다르니 선봉장(先鋒將) 원여(元汝)가 산에서 내려가다가 발을 다쳐서 걷지 못하고 조련장(組鍊將) 박수종(朴秀宗)이 업고 물 건너 죽고(竹皐)를 거쳐 골짜기로 해서 산을 넘어 토현(土峴)에 이르러 잤다.
이튿날은 토구(土邱)에서 자고 산으로 해서 올라가 도곡(道谷)으로 들어가 잤다.
큰 비가 오다가 오후에 잠간 개었다.
길을 떠나 조그만 고개를 넘으니 또 비가 온다.
오리현(五里峴)으로 들어가려니 물이 크게 불어 건너지 못한다.
물통 하나가 있기로 기어서 건너가 한 집으로 들어가니 그 집 주인은 흥해(興海)에서 왔다는 최극인(崔棘人)이라고 한다.
또 손 하나가 있는데 역시 흥해(興海) 최세윤(崔世允)으로서 이 사람은 안동(安東) 의진(義陣) 좌익장(左翼將)으로서 나를 보려고 중로에서 기다린다고 한다.
- 36 -
그곳에서 이틀 밤을 자고 고개를 넘어 대항(大巷)에서 잔 다음 이튿날 수비(首比)로 들어가 중군(中軍) 박복원(朴福元)의 아우의 집에서 잤다.
다시 옥령(玉嶺)을 넘어 선봉진(先鋒陣)은 외선미(外仙味)에서 자고 우리 진은 내선미(內仙味)에서 잤다.
밤에 헛 정보가 있었다.
아침에 들으니 이것은 마을 사람 한참봉(韓叅奉)이 만들어 낸 것이라 한다.
아침을 먹은 후에 선봉진(先鋒陣)이 돈 백 꾸러미를 지고 소 1 마리를 끌고 왔다.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한참봉(韓叅奉)이 속죄하는 물건입니다.”
한다.
나는 말하기를
“죄는 지었지만 어찌 용서할 수 없단 말이냐. 이미 가져온 돈은 군대 비용에 쓰도록 하고 소는 도로 끌고 가도록 하라. 또 농사철이 바야흐로 바쁜데 어찌할 것인가.”
하고 포졸(砲卒)로 하여금 소를 그 주인에게 돌려 보내도록 했다.
온정동(溫井洞)에서 점심을 먹었다.
관진우영장(關陣右營將) 이영찬(李永燦)이 마침 평해읍(平海邑)에 왔다가 우리 군사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글을 보내어 일부러 만나자고 했다.
이에 나는 답장을 보내어 내일 중로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했다.
아침 후에 길을 떠나 과연 길에서 만났다.
평해군수(平海郡守) 정후(鄭候)가 나를 기다린다 하기로 동행해서 읍으로 들어가니 정후(鄭候)는 나와서 맞아 시종이 한결 같다.
점심 먹는 것도 관청에서 당해 주고 또 백목(白木) 7필과 짚신 10죽을 준다.
이영찬(李永燦)도 또 돈 15꾸러미를 주니 족히 행진(行陣)의 수일 동안 쓸 비용이 되겠다.
- 37 -
곧 떠나서 백석진(白石津)에서 자고 또 떠나서 병곡진(柄谷津)에 이르니 갯사람들이 생선과 술을 바친다.
원항(院巷)에서 점심을 먹고 나니 가는 비가 부실부실 온다.
또 떠나서 영해읍(寧海邑)으로 들어가니 큰 비가 와서 물이 넘친다.
광주장(廣州將) 김하락(金河洛)이 바야흐로 영덕(盈德)에서 접전하고 있다고 성 안에서 사자(使者)가 와서 길에서 부탁한다.
이튿날 일찍 떠나 큰 내를 건너 웅창가(熊倉街)에 이르니 흩어진 포병(砲兵) 수백 명이 산으로 가득히 와서 말하기를
“광주진이 이미 패했다.”
고 한다.
나는 군사를 돌이켜 칠성동(七星洞)으로 들어가 캄캄한 밤에 비를 무릅쓰고 남씨(南氏) 집으로 가서 잤다.
아침에도 비가 개지 않았으나 마을에 폐를 끼칠 수가 없어 길을 떠나 고개를 넘어서 중로에서 점심을 먹고 가산(佳山)으로 들어가 잤다.
이튿날 광주(廣州)진과 안동(安東)진의 장관(將官)들과 포졸(砲卒) 백여명을 만나 광주진 김 광수의 간 곳을 물으니 혹이 말하기를
“물 가에서 들으니 내가 거느린 군사 수백 명과 함께 동행해서 창수원(蒼水院) 등지로 들어갔다.”
고 한다.
대(隊)를 나누어 점심을 먹고 울령(鬱嶺)에 올라가니 6월 찌는 더위는 바야흐로 지독하다.
술집에서 쉬고 두어 잔을 마신 후에 여러 진의 모든 장수들과 의논하고 힘을 합해서 영양읍(英陽邑)에 머물러 있는 적의 병대들을 사로잡자 했으나 안동(安東)과 광주(廣州) 2 진은 장수가 없는 군사라 하여 이를 듣지 않고 석포(石浦)로 향하여 청송(靑松) 등지로 갔다고 한다.
선성(宣城)진만은 본래 우리와 합친 일이 있었으므로 함께 약속하고 양구(羊邱)로 내려가 저녁밥을 먹은 후 밤 수경이나 되어 정병(精兵)으로 총 가진 군사 40명을 거느리고 넘치는 물을 건너 도보로 창암(蒼岩)에 도착하니
- 38 -
날이 샌다.
그 동네에서 아침밥을 먹고 또 다음 날 밤을 기다려 산을 넘어 군사를 숨겨 놓고 나무 그늘에서 쉬었다.
소계(苕溪)로 들어가 들어니 적의 병대들의 창암(蒼岩)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바로 길을 떠나 신동역(新洞驛)에서 점심을 먹고 석포(石浦)에 이르러 원여(元汝)를 만나 노곡(魯谷)으로 들어가 잘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주인 유거염(柳居▼(宀/炎))은 집에 있지 않고 또 마을 사람들도 모두 비어 있다 하므로 다시 중노곡(中魯谷)으로 들어가 이형일(李亨一)의 집에서 잤다.
상리(上里)에서 점심을 먹고 모동(謀洞)으로 해서 신기(新基)에 이르러 잤다.
또 비가 몹시 온다.
비를 무릅쓰고 감곡(鑑谷)을 넘어 점심을 먹고 그곳에서 잤다.
이튿날 떠나서 강에 이르니 물이 불어서 억지로 물을 건넜다.
중평(中坪) 상사(上舍) 신경보(申景輔)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지나는 길마다 모두 광진(廣津)을 겁내서 피해 숨는 자가 많았다.
한 고개를 넘어 회동(檜洞)으로 들어가니 심계오(沈繼五)가 동네에 나와 영접하고 장졸(將卒) 수백 명을 3, 4일 동안 잘 대접했으며, 또 떠날 때에는 돈 30꾸러미를 주었으니 이는 사람마다 다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곳을 떠나 상덕천(上德川)에 이르러 장씨(蔣氏) 생질녀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마평(馬坪)에 이르러 잤다.
이튿날 떠날 무렵 선성(宣城)의 포졸(砲卒)이 먼저 도망하고 신소모(申召募)도 계속하여 갔으니 이것은 마음대로 약탈을 하지 못하게 한 때문이었다.
탄식함을 금치 못한다.
나는 말을 타고 달려가서 대전시(大前市)로 향해 가노라니 괭이를 멘 한 사람이 오면서 손을 내두른다.
- 39 -
나는 말을 세우고 서서 가까이 오기를 청하자 그 사람은 말한다.
“적의 병대가 뒤에 옵니다.”
말을 마치기 전에 포 소리가 난다.
말을 달려 물을 건너 청운역(靑雲驛)에 도착하니 먼저 도망한 군사가 길에 있다.
청송읍(靑松邑)을 지나 뒷 고개를 넘어 소모동(召謀洞)으로 들어가니 신공필(申公弼)이 또 따르지 않는다.
해가 이미 저물므로 월전(月田)에 이르러 잤다.
흥구(興邱)로 들어가 허방산(許舫山) 어른을 찾았으나 집에 계시지 않았다.
그 큰 아들이 나를 맞아 잠시 쉬었다가 장산(長山)을 끼고 천곡(泉谷)에 이르러 황성오(黃成五)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금대(琴臺)에 도착하여 들으니 아버님께서 해천(海川)에 계시다 하니 멀리 바라볼 뿐이다.
나는 본집으로 와서 선봉진(先鋒陣)을 청기(靑杞)로 보내고, 어둠을 타서 집에서 잔 다음 새벽에 떠나서 주동(朱洞)으로 해서 토현(土峴)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토구(土邱)에 다다랐다.
이 때 원여(元汝)는 청기(靑杞)로부터 밤에 이곳으로 와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낮에 떠나서 갯머리에서 점심을 먹고 또 떠나서 당동(唐洞)에 이르러 주막에서 잤다.
이튿날 김제경(金濟卿)의 큰 아들 성제(聖齊) 형칠(衡七)이 사람을 보내서 급히 전한다.
“신소모(申召募)가 탈을 잡고 집을 포위하여 포를 쏘아 못 하는 짓이 없으니 원여(元汝)와 함께 곧 도망하라.”
이에 우리는 곧 떠나서 예안(禮安)을 향하여 신월동(新月洞)에 이르러 자고 외청량(外淸凉)에 이르러 보니 과연 경치가 기이하고 험준한 곳이다.
나는 원여(元汝)와 말하기를
- 40 -
“이야말로 한 사람으로서도 관(關)을 지킬 만한 곳이 아닌가?”
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방황하면서 탄식하다가 산에서 내려 배를 타고 건너와 보니 과연 전날 복병이 지나지 않던 곳이었다.
연구(淵邱)에서 점심을 먹었다.
연구(淵邱) 동쪽에는 고산정(孤山亭)이 있다.
또 그곳을 떠나 원여(元汝)는 온혜(溫惠)에 있는 자기 본집으로 갔고 나는 원촌(遠村)으로 들어가 언양(彦陽) 이만현(李晩鉉) 어른 집에서 잤다.
이튿날 떠나서 하계(下溪)를 지나다가 이중두(李中斗) 어른을 찾고, 또 떠나서 도산강(陶山江)을 건너 염촌(剡村)에서 잤다.
이튿날 의인(宜仁)으로 들어가 상사(上舍) 이윤명(允李明)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마침 신공필(申公弼)이 상주(尙州) 집에 와 있더니 내가 도착하자 얼마 안 되어 공필이 와서 보고 몇 마디 말을 한 뒤에 용계(龍溪)로 가서 대장(大將)을 만나 보겠다고 한다.
오후에 강 위에서 경첨(景瞻)을 만나서 함께 이야기하고 거느린 여러 군사들을 먼저 분천(汾川)으로 보냈다.
나와 원여(元汝)는 경첨(景瞻)을 따라 역동(易東)에 이르러 맹연(孟然)을 만나 보고 바로 저녁을 먹는데 또 참외를 내 왔으니 올해는 처음 먹어 보는 것이었다.
밤을 타서 그곳을 떠나 강에 이르니 소나기가 크게 와서 의관을 모두 적신다.
분천(汾川) 이경심(李敬心)의 집에 이르러 보니 잠이 깊이 들어 있다.
문을 두드리니 주인은 목소리를 알아 듣고 나와서 맞아 들인다.
옷을 벗어 걸고 베개에 의지해 누워 동쪽 하늘이 밝은 것도 알지 못하고 잤다.
아침을 먹은 후에 온혜(溫惠)로 들어가 삼백당(三栢堂)에서 잤다.
- 41 -
이튿날 부포(浮浦)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떠나려는데 헛 경보가 들어와서 골짜기로 들어가니 날은 어두웠는데 향할 바를 몰랐다.
포졸(砲卒)이 산 속에 사는 사람을 불러 불을 들고 길을 찾아 한 집에 이르러 앉아서 밤을 새웠다.
날이 새자 그곳을 떠나 외표곡(外瓢谷)에 이르러 포졸(砲卒) 정덕순(鄭德順)의 어머니 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산을 넘어 구통(九通)에 이르러 술집에서 점심을 먹고 포졸(砲卒)을 여기에 머물러 두고 나는 아버님을 뵙고자 여미(余味)로 내려 갔다.
아버님께서는 이때 동성(同姓)되는 집에 계셨다.
이 집은 백대(百代)의 의(誼)가 있어 딴 사람과는 다르다.
그 집 노인은 우리 아버님과 평일에 서로 상종하던 일이 있었다.
비록 그러나 지금 같은 어지러운 세상에 동당(同堂)의 사람들도 모두 각각 피난을 하는 판인데 5, 6명 식구를 한 방에 용납해 받아 두어 삼복 찌는 더위에 연기 낀 처마와 우물만한 싸리짝이 작은데 출입하기 어려운 빛을 조금도 얼굴빛이나 말에 표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적들의 경보가 날로 두려운데 이것으로도 화가 미친다고 근심하지 않으니, 그 감사한 뜻을 어찌 다 말하랴.
하루 밤을 자고 또 떠나니 아버님께서 경계하시기를
“삼가하고 삼가하라.”
하신다.
후곡(後谷)으로부터 사현(梭峴)을 넘으니 모든 포졸(砲卒)들도 또한 왔다. 이들을 거느리고 정족등라(鼎足登羅)에 가서 점심을 먹고 김 위장(金衛將)의 집에서 잤다.
비에 막혀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나니 잠시 비가 갠다.
그곳을 떠나 흥림산(興霖山)을 넘어 주곡가(注谷街)에 이르니 비가 크게 온다.
도구(道邱)에 이르러 조희윤(趙羲允)의 집에서 잤다.
이튿날 염촌(剡村)에서 점심을 먹고 또 떠나서 재인구(梓人邱)에서 잤다.
- 42 -
저녁에 사탄(沙呑) 권경인(權敬仁)이 와서 본진 포졸(砲卒)들이 폐를 끼치던 일을 말한다.
밤이 깊어서 그의 조카가 또 와서 포정(砲丁)이 계동(桂洞) 일로 함께 의논하는데 책망하는 태도가 몹시 급했다.
일찌기 떠나 덕봉(德奉)에서 밥을 먹고 삼거리 술집에 이르니 본진 포졸(砲卒) 50여 명이 그곳에 머물러 기다리고 있다.
그들에게 무사함을 타이르고 나는 경인(敬仁)의 집에서 유숙했다.
이튿날 낮은 수비(首比)에서 쉬고 공수(公水) 아래로 들어가 자고, 심천(深川)으로 향해 진을 머물렀다가 포졸(砲卒) 4명을 데리고 오산(梧山)으로 들어가 잤다.
또 송방(松方)으로 들어가 이틀 밤을 잤으나 왕비천(王妃川)이 10리 밖에 있다는 것을 가 보지 못했다.
심천(深川)으로 돌아와 포졸을 머물러 두고 신리(新里)로 돌아와서 잤다.
이튿날 신원(新院)으로부터 우천(愚川)에 들어가 점심밥을 먹고 장파동(長坡洞)으로 들어가 남포(南浦) 이생원(李生員) 집에 자리를 정했다.
또 날이 어둡자 장파동(長坡洞)으로 내려가 소모장(召募將) 이충언(李忠彦)을 시켜서 진을 머무르게 하고 나는 반진(半陣)을 나누어 상장파동(上長坡洞)에 머물렀다.
사온 쌀과 얻은 양식이 4, 5일을 지낼 만하다.
또 신원(新院)을 넘어 주사수촌(酒舍水村)에서 쉬노라니 주사집(朱士集)이 와서 말하기를 안동(安東) 포정(砲丁)들이 폐를 끼치는 일이 많아 지탱하기가 어려우니 나더러 와서 금지해 달라는 것이다.
이에 곧 떠나서 가곡(佳谷)에 도착하니 안동(安東)의 포정(砲丁) 몇 명이 도계(道溪) 조도사(趙都事) 집에서 말을 뺐고, 또 김마동(金馬洞)에게서 돈을 억지로 취해 갔으니 이 사람은 바로 조도사(趙都事)의 농막(農幕)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날이 어둡자 나는 이것을 도로 찾아서 돌려 주고 그들을 쫓아 당동(唐洞)까지 가 보니 포정(砲丁)들은 이미 가 버렸고 마을 사람들은 무사했다.
- 43 -
술집에서 점심밥을 먹고 맹촌(孟村)에 이르러 강생원(姜生員) 집에서 잤다.
여기에는 저동(苧洞) 김경삼(金敬三)이 와서 살고 있었다.
나는 그와 이야기를 하다가 말이 행진(行陣)하는데 신고(辛苦)를 겪은 일에까지 미쳤다.
아침밥을 먹은 후에 월천구(月川邱)에 올라 이계명(李繼明)의 집에서 점심밥을 먹었다.
이희증(李羲曾)과 대략 예안(禮安) 일을 이야기하고 또 떠나서 수촌(水村)에 이르러 주씨(朱氏)의 집에서 잤다.
이 집은 곧 종제(從弟) 공옥(公玉)의 생질의 집인데, 공옥(公玉)은 방금 난을 피하여 이웃 마을에 가서 살고 있다.
아침에 고개를 넘어 자금동(雌禽洞)에 이르러 점심밥을 먹고 도곡(道谷)에 가서 잤다.
이튿날 일월산(日月山)에 들어가 잠시 피할까 했더니 마침 바다 위에서 사람이 와서 안동(安東)과 이천(利川)에서 사사로이 본읍과 진을 합칠 의사를 통한다.
이에 돌이켜 생각하매 영송(迎送)하지 않을 수 없어 남쪽으로 가곡(佳谷)을 향해 내려가려니 본진(本陣) 대장이 그 아들을 시켜 나를 길에 나와 만나 보게 하고 또 자기가 스스로 거리에 나와 나를 불러 가지고 들어간다.
대장은 말하기를
“잘 처리해서 여러 진들이 본읍에 폐가 없도록 하시오.”
하고 부탁하고 신칙하기를 은은히 한다.
거기서 점심밥을 먹고 주곡(注谷)을 거쳐 거리 주막에서 쉬노라니 조범구(趙範九)가 와서 함께 도로 주곡(注谷)으로 들어가 잤다.
이튿날은 7월 14일로서 바로 내 생일이다.
주인이 알고 잘 대접한다.
아침밥을 먹은 후 떠나서 송점(松店)에서 점심을 먹었다.
들으니 안동(安東)·이천(利川) 2진이 울령(鬱嶺)을 넘어 온다고 한다.
- 44 -
우리는 사구(沙具)에 이르러 잠시 쉬고 월담헌(月潭軒)에서 잤다.
이튿날 대천(大川)에 이르러 점심밥을 먹고 항동(項洞)에 이르러 잤다.
또 듣자니 저들 진이 옥령(玉嶺)을 넘어 온다 하므로 도로 송점(松店)으로 들어갔다.
선봉(先鋒) 유시연(柳時淵)이 방금 교궁(校宮)에 와서 진을 쳤다 하므로 체면을 잃은 것 같아서 나는 들어가서 유선봉(柳先鋒)을 보고 대략 진중의 대체를 말해 주고 물러나와 송점(松店)에 있었다.
다시 그 거리에 들어가니 포졸 하나가 망녕되어 부르는 자가 있기로 큰 소리로 경계하고 벌 주었다.
이때 수곡(水谷) 유여경(柳呂卿)이 마침 조찬옥(趙贊玉)의 집에 왔다가 함께 안동 군사의 일을 탄식했다.
이튿날 유시연(柳時淵)과 함께 주곡(注谷)으로 가서 하룻밤 잤다.
그날 2진 군사들이 도구(道邱)에 와서 잤다기에 이튿날 군사를 거느리고 도구(道邱)로 내려가 보니 2진 군사들은 이미 떠나서 부(府)로 들어갔다 한다.
저녁 무렵 주현(珠峴)에 이르니 광주(廣州)의 종사(從事)가 군사 30명을 거느리고 나를 맞으러 왔다.
이에 말을 돌려 함께 부(府)로 가는데 헛 정보가 있어 잠시 쉬었다.
이천(利川)의 좌군(左軍) 이희두(李熙斗)를 들어가 보고 몇 마디 말을 한 뒤에 일어나 장거리로 나가 보니 좋지 못한 공기가 거리에 퍼져 있다.
나는 주현(珠峴) 아래 주막에 숙소(宿所)를 정했다. 밤에 들으니 이천(利川)의 포졸(砲卒)이 수월(水月) 안순천(安順天)의 집에 폐를 끼친다 하기에 나는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타일러 시끄러움을 피우지 못하게 하고 아침에 읍으로 올라왔다.
아침밥을 먹은 후에 안동(安東) 도총(都總) 김하림(金夏林)을 보고 말하기를
“이천 군사는 반드시 합칠 필요가 없다.”
하였다.
- 45 -
이희두(李熙斗)는 석포(石浦)로 보내고 김하림(金夏林)과 함께 감천(甘泉)에서 점심밥을 먹고 동현(東峴)에 이르러 잤다.
저녁에 김하림(金夏林)의 본집에서 편지가 왔는데 자당(慈堂)의 병환이 계시다 한다.
새벽에 그를 떠나 보내고 나도 역시 일찍 떠났는데 유시연(柳時淵)만이 홀로 군사를 거느리고 금수(錦水)로 갔다.
나는 천곡(泉谷)으로 해서 집에 이르러 보니 집은 적의 병대들이 불을 놓아 타 버렸고 아버님은 둘째 아우 응옥(應玉)의 집에 가 계시다.
나는 잠간 가서 아버님을 뵙고 또 떠나서 읍으로 들어가니 해는 저물었는데 한 부중(府中) 사람들이 모두 맞아서 장정과 6, 7세 된 어린애들까지 앞뒤에서 불을 들어 준다.
이틀 밤을 잔 뒤에 황룡동(黃龍洞)으로 해서 주곡(住谷)에 다다랐다.
다시 1주야를 걸려 가곡(佳谷)에 이르러 점심밥을 먹었다.
뒤에서 잡아온 대구(大邱) 사람 윤선달(尹先達)이란 자를 산운동(山雲洞)에 이르러 석방했다.
압곡(鴨谷)에 이르러 먼저 소모(召募) 이충언(李忠彦)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갈령(葛嶺)을 넘게 하고 나는 홀로 한 구부라진 마을로 들어가 민가에서 잤다.
이튿날 골짜기로 해서 고개에 올라가 총 1백 13자루를 싸 가지고 포졸(砲卒) 5명을 시켜 져다가 인가에 깊이 감춰 두었다. 이는 후일에 쓰기 위함이다.
고개에서 내려오니 급한 비가 몹시 내린다. 새는 민가에 들어가 겨우 비를 피하다가 곧 떠나서 도곡(陶谷)에 이르니 군사들은 이미 성황동(城隍洞)으로 옮겨갔다.
찾아 가서 서로 만나 술집에서 잤다.
이튿날 부포(浮浦)에 이르러 서재(書齋)에 머무르고 있노라니 이 때 원여(元汝)가 새로 예안(禮安) 대장(大將)이 되어 사람을 보내서 나를 청한다.
나는 위태로운 기미가 있다 하여 이를 즐겨 허락지 않자 좌우 사람들이 억지로
- 46 -
권하므로 부득이해서 저물게 그곳으로 들어가니 1군이 모두 무사했다.
밤에 원여(元汝)와 함께 베개를 나란히 했으나 잠은 자지 않고 밤새 의병(義兵)의 전후 일을 많이 이야기했다.
또 우리는 화부(花府)에서 한 번 모일 일이 시급하니 내일 떠나서 협로(峽路)로 향할 것이라고 계획을 세웠다.
아침 일찍 나는
“위험한 기미가 박두했으니 속히 행장을 차리는 것이 좋겠다.”
했다.
그러나 낮이 되어도 떠나지 못하니 몹시 초조하고 답답하다.
이때 포 소리가 갑자기 나자 놀라 일어나 각각 도망하여 신도 신을 새가 없어 7, 8개월 동안 행진(行陣) 중에서 쓰던 긴요한 물건과 문부를 모두 잃었다.
또 당나귀 1마리와 말 1필을 잃었는데, 당나귀는 제경(濟卿)에게서 빌린 것이요, 말은 충언(忠彦)이 타던 것이다.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서 도보로 돌아와 그날로 고개를 넘어 사동(寺洞)에서 점심밥을 먹고 기포(畿浦)에 이르러 권명언(權明彦)의 진에서 잤다.
이튿날 백운송리(白雲松里)로 들어가니 이때 산남(山南)의 모든 의병진은 흩어져 없어졌다.
병대장(兵隊長) 김장옥(金長玉)이 사사로운 기별이 있기로 회답해 보냈다.
또 떠나서 일월산(日月山) 뒤를 넘어 우련전(雨蓮田)에 이르니 비가 내린다.
초가집으로 들어가 잠간 비를 피했다가 개인 뒤에 그 마을에 사는 선비 한씨 집을 찾으니 후하게 대접을 한다.
이튿날 기봉(旗峰)을 넘어 죽현(竹峴)에 이르러 점심밥을 먹고 그곳에서 잤다.
또 강림(絳林)에 올라 정기원(鄭奇原)의 집에서 자고 다시 등나무를 따라 바위를 넘어 천축사(天竺寺)에 이르러 자는데 늙은 중 하나가 잘 대접을
- 47 -
한다.
장항동(場項洞)에 이르러 이범이(李範伊)의 집에서 잤다.
이튿날 남쪽으로 회룡(回龍) 정상사(鄭上舍)의 집에 이르러 또 잤다.
떠날 무렵 상사(上舍)는 쌀 10말을 주는데 사양할 수가 없었다.
다시 통고산(通高山)에 들어가니 한 초가집이 있는데, 주인은 밀양(密陽)에서 왔다는 손입(孫笠)이라는 자이다. 양식을 주고 그 집에서 묵으면서 포졸(砲卒)들을 시켜 상수리도 줍고 돌도 쌓고 혹은 송이를 채취하면서 한가롭게 6, 7일을 지내니 그곳도 역시 세상 사람이 아는 것을 면치 못하는 곳이었다.
하루는 자리를 옮겨 조성동(鳥城洞)에 이르렀으나 오래 머무를 곳이 못 된다.
수일 후에 와은천(臥隱川) 북쪽 산 위 깊고 궁벽한 곳으로 들어갔으나 역시 산 뒤에 길이 있다.
다시 갈전동(葛田洞)으로 돌아와 하루 밤을 자고 또 일월산(日月山)으로 올라가 천축사(天竺寺)에 도착하기 전에 접산(接山)에서 동북쪽으로 가서 구절동(九節洞)에 들어가 하루 밤을 잤다.
여기에서 또 북쪽으로 조록동(鳥祿洞)에 들어가니 빈 집 1간이 있고 조그만 솥이 하나 있다.
이것은 필시 산에 사는 사람들이 농사를 지은 뒤에 집으로 돌아가면서 남겨 두었다가 내년에 쓰려는 것인 듯하니 이곳에 거처해도 무방할 듯하다.
또 그 집 주인의 아우가 이웃에 살고 있어 이를 허락한다.
지고간 쌀로 한 군사를 시켜 밥을 짓게 하니 식사는 걱정이 없다.
이에 통문(通文) 1 통을 써서 산남(山南)지방에 포고(布告)했다.
어느날 뒷산에 올라가니 이곳은 곧 조성사(鳥城寺)로서, 세상에서 이르기를 ‘모든 새들이 봉(鳳)에게 조회한다.’는 곳이다.
6일을 지나 이곳을 떠나서 도곡(道谷)에 도착하니 적의 병대들이 읍으로 들어갔다 하니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가곡(佳谷) 정종사(鄭從事)를 시켜 돈 10꾸러미를 빌어 수촌(水村)에 가서 쌀 7말을 사 가지고 다시 일월산(日月山)으로
- 48 -
들어가니 중간에 양수정(養壽亭)이라는 데가 있어 머물러 있을 만하다.
이때 선유어사(宣諭御史)의 글이 와서 이를 답장해 보냈다.
하루는 예안(禮安) 포졸(砲卒) 4명이 와서 산돼지 2 마리를 잡아 와서 이를 베어 먹었다.
9월 초5일 정유(丁酉)에 산 허리로 들어가니 한 초가집이 있는데, 그 주인은 곧 죽고(竹皐) 선비 구(具)씨었다.
나는 생각하기에 여러 진 군사들이 모두 해산했으니 나만 홀로 군사를 유지할 수 없은즉 깊은 산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추고자 했다.
그러나 늙은 아버님의 기운이 엄엄하시니 형세 어찌할 수가 없다.
용항(舂項)으로부터 며칠 동안 산을 타고 비밀히 다녀 필대(筆臺)·토구(土邱) 등 여러 곳을 거쳐 만항곡(晩項谷)에 이르러 밤이 깊어 그곳에서 잤다.
새벽에 떠나 고개를 넘어 여미(余味)에 이르니 아버님은 초가집 몇 간을 사 가지고 거처하고 계시다.
이 날은 바로 중양(重陽)이다.
본수(本守) 유흥렬(劉興烈)이 다시 글을 보내왔기로 답장해 보냈다.
나를 따르던 포졸(砲卒) 수10명을 모두 각각 제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대개 행진(行陣)한 시말(始末)과, 산에 들어가기 전후의 일을 기록한 것이 대략만 적고 자세치 못하며, 또 빠진 것이 있기로 이에 환경이 호전된 뒤에 그 경과의 대개만 기록하여 환난(患難)을 잊지 않는 뜻을 표하고 또 스스로 내 마음에 맹서하는 바이다.
첫댓글 영양분들이 영양출신 의병장에 관한 관심이 이렇게도 없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