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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설교집 15. 세 가지 법 - 세속 윤리도덕, 율법, 성령의 법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로마서 7장입니다. 로마서 7장 1절부터 12절까지 봉독하겠습니다.
(롬 7:1-12)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오늘 로마서 설교 열다섯 번째입니다. 제목은 "세 가지 법"입니다.
로마서 7장은 로마서 6장에 이어서 계속되는 내용이지요. 이 장절 구분은 12세기 경부터 시도가 돼서 16세기에 완료가 됐습니다. 중세 가톨릭의 신학자들 수도사들이 몇 명이 동원이 되어서 몇 백 년 동안 진행이 되어 온 것이지요. 로마서는 첫인사부터 마지막 인사까지가 하나의 편지입니다. 따라서 로마서 모든 구절은 로마서 전체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 하고, 항상 말씀드리듯이 성경 66권 전체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장절 구분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의의 종과 불의의 종을 구분해서 제시를 하면서 설명했지요. 인간은 가치의 문제에 있어서는 노예의지밖에 없다. 몸의 사욕을 좇는 데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다. 완전히 몸의 사욕을 좇게끔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어서 완전히 그 시스템에 속해 있는 노예들인데 몸의 사욕을 채우는 방법, 즉 효율성에 있어서만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고....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서 우리가 의의 종으로 바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우리 몸의 사욕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즉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데 그 또한 프로그래밍이 새로 되면서 거기에 또 완전히 복속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의의 종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거기서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든, 무슨 결정과 판단을 하든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판단을 하게 되니까 의의 종이라는 것인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일을 해나갈 것인가, 우리가 종으로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일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가치에 있어서는 불의의 종이냐 의의 종이냐 둘 중에 하나의 노예로서 노예의지밖에 없는 존재인데 그 노예로서 효율성 있게 일하는 데에서는 자유의지가 있는 거지요. 그래서 주인이 둘이 있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이냐 마귀냐 하고 구분할 수 있겠지요. 루터처럼 우리가 짐승이라고 할 때 우리 등위에 하나님이 타고 계시냐, 마귀가 타고 있느냐. 뭐 이런 식으로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성경 구절들이 있어요. 그러나 로마서에서는 어떻게 구분을 하고 있냐 하면 우리 몸이 주인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주인이시냐. 그렇게 두 주인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몸이 주인인 경우를 불의의 병기로서 살아간다고 표현하고, 하나님이 주인이신 경우를 의의 병기로서 살아가게 된다고 구분을 했었습니다.
오늘 7장에 들어와서는 세 가지 법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노예는 두 가지 종류인데 법은 세 가지가 있다는 겁니다.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7장 5절을 보시겠습니다.
(롬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율법으로 말미암는”이라고 할 때 ‘말미암는’이라는 전치사가 ‘디아’라는 전치사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 그 ‘말미암아’가 디아입니다. 영어에서도 by 또는 through로 번역을 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이 죄를 꾸미는 형용사구가 되는 것이지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그리고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구원을 이루는 것처럼 율법이 죄를 이루었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아, 설마 그럴까?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7절입니다.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여기서 탐심이 에피뒤미아입니다. 너의 에피뒤미아, 너의 욕망이 바로 죄라는 것을 율법이 지적했기 때문에 내 안의 욕망이 죄가 되는 이유는 율법 때문이에요. 율법이 오기 전에는 죄가 없습니다. 8절 마지막에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같은 로마서에서 4장 15절 보시지요.
(롬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리고 5장 13절도 보시면
(롬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제가 학원 사업할 때 미국인 강사들을 소개해 주는 미국인이 있었는데 하루는 힐튼호텔에서 하는 세미나에 저를 초대했습니다. 가보니 암웨이 홍보 세미나였어요. 다단계 판매를 하는 암웨이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오려고 시도를 하는 세미나였지요. 제가 참석해 들어보니 비합리적인 데가 좀 있어서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이삼 년 지나면서부터 신문에 점차 피라미드 판매로 피해를 받는 사례들이 조금씩 나면서 무슨 기사가 실렸었냐 하면 피라미드 판매가 대단히 문제가 있는데 처벌할 조항이 없다는 겁니다. 그땐 법이 없었던 것이지요. 다단계 판매에 대한 법이 국회에서 만들어지질 않았기 때문에 다단계 때문에 피해를 받는 사람이 나와도 처벌할 근거가 없다는 그런 기사였습니다. 물론 그 후로 법이 만들어졌지요. 이렇듯이 다단계 판매가 죄가 되려면 다단계 판매를 죄로 규정하는 법이 만들어져야 됩니다. 그 법이 없으면 다단계는 죄가 아니에요. 제가 예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전체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안 주셨으면 죄가 아닌 것들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는 바람에 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7절을 다시 봅니다.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사도 바울이 여기서 에피뒤미아를 문제를 삼고 있는데 에피뒤미아란 자아성취를 위해서 살아가는 열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탐심은 남의 것 훔쳐 먹고 뺏어먹고 이런 것이 아니에요. 인간이 자아성취를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율법이 죄라고 규정하는 바람에 그것이 죄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추악한 인간이었던 자기에게 율법이 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탐심 때문에 고통 받던 사람이 아니에요. 아주 건실하게 모범적으로 윤리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윤리 도덕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기에게 율법이 와서 윤리도덕적인 자기 삶을 죄라고 규정하신다는 거예요.
이 부분이 서구 신학자들이 가장 혼란을 일으키는 부분입니다.
에피뒤미아는 열정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desire지요. 예수님도 에피뒤미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15절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하실 때 에피뒤미아를 가지고 에피뒤메오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에피뒤미아는 예수님도 가지고 계시던 거예요. 그리고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1장 23절에서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라고 할 때 그 욕망이 에페뒤미아입니다. 그러니까 에피뒤미아는 가치중립적인 것이지요. 인간의 열정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 중에서도 인내라고 번역된 - 제가 꿋꿋한 열정이라고 번역한 - 마크로뒤미아도 ‘마크로’와 ‘뒤모스’가 합쳐진 겁니다. 마크로는 매크로, 거대한이라는 뜻이고 뒤모스는 욕망입니다. 즉 거대한 에피뒤미아인 마크로뒤미아가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렇게 에피뒤미아 자체는 가치중립적인 거예요.
에피뒤미아가 엄청나게 왕성했던 사람으로 누굴 꼽을 수 있냐 하면 아담을 꼽을 수가 있습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천국에서 일과가 뭐였지요?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동식물의 이름을 짓고 돌보는 것이었어요. 모든 동식물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열정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이름을 짓고 기억을 한다는 얘깁니다. 기억을 못하면 이름 짓는 의미가 없는 거지요. 그러면 그 무수한 동식물의 이름을 지어주고 그것을 모두 기억하고 돌봐주고 하는 일을 아담이 했는데 그때 아담이 가지고 있었던 그 열정은 인간으로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열심입니다. 에덴동산 관리자로서 에덴동산 청지기로서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아담인데, 따라서 저는 그 열정을 하나님이 주신 열정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인간은 누구나 다 자아성취를 위해서 어마어마한 열정을 가지고 있어요. 불타는 열정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아성취를 위해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삶에는 세 가지 타입이 있습니다. 이건 세상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기적인 타입의 열정, 이타적인 타입의 열정, 그리고 공동체 지향적인 열정이 있습니다. 공동체 지향적인 열정은 이타적인 열정과는 다르게 자기를 포함해서 모두가 잘되자는 것이지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탐심이라는 것, 열정이라는 것은 셋 중에 어떤 것이었을까요? 저는 공동체적인 열정이라고 봅니다. 거기엔 가끔 이기적인 것도 섞일 수 있고 이타적인 것도 섞일 수 있지만 공동체적인 열정은 우리 다 같이 잘 살자, 나 혼자 잘 살겠다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난 희생만 할 생각도 없다, 그게 공동체적인 열정이에요. 그런데 이 공동체적인 자아성취의 방법이 바로 뭐냐 하면 윤리도덕입니다. 윤리도덕은 누가 만든 겁니까? 하나님이 주신 겁니까? 아닙니다. 윤리도덕은 사람들이 만든 겁니다. 왜 만들었습니까? 윤리도덕을 지켜야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우리의 생존과 번영이 보장된다고 해서 고안해낸 것이 윤리도덕입니다.
그런데 서구 신학이 계속 윤리도덕과 율법을 자꾸 동일시하는 거예요. 그래서 엄청난 혼란이 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내가 윤리도덕적으로 공동체적인 성취를 위해서 열심히 살고 있는데 느닷없이 율법이 와서 그걸 죄라고 했다는 겁니다.
설마 윤리도덕적인 삶을 죄라고 하나님께서 그러셨을까? 단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예수님도 언급하셨지만 효도를 예를 들지요. 효도는 십계명에도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렇죠? 그런데 레위기 19장 17절과 18절을 보시지요.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레 19:17-18)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선행의 가장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를 제시합니다. 예수님도 그대로 인용하셨지요. 그런데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이 말씀을 지킬 수가 있습니까? 못 지킵니다. 왜? 내 부모에게 먼저 효도를 해야 하기 때문에. 내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기 때문에 내 이웃 사랑하는 것을 내 몸과 같이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겁니다. 옆집 할아버지 할머니가 죽어나가든 뭘 하든 상관이 없어요. 내 부모님이 잘 살아야죠. 그렇죠? 아프리카 원조하자는 이야기들 요즘 TV에서 공익광고로 많이 나오죠?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노인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무엇이죠? 뭐 사람이 다 살다 죽는 거지 뭐. 그렇죠? 그렇다면 자기 부모님 돌아가셔도 울지 말아야죠. 왜 자기 부모님 돌아가시면 펄펄 뛰며 울지요? 아프리카에서 노인들 죽어가는 것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사람이 말이지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바로 율법의 핵심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아는 겁니다. 예수님도 뭐라고 그러셨지요? 마태복음 22장에서 율법사가 와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율법 전체를 크게 둘로 정리를 하셨어요. 사도 바울도 율법 전체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율법이 말씀하시기를 윤리 도덕적인 삶을 죄라고 규정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사도 바울이 명확하게 파악을 한 거예요.
윤리 도덕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하기 위해서, 추구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중지를 모아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시대와 문화에 따라서 윤리 도덕이 조금씩 다 달라요. 지난번에 제가 칠거지악 말씀도 드렸지만 윤리 도덕 항목들은 계속 변합니다. 왜냐하면 시대의 상황에 따라서 윤리 도덕 항목들이 자꾸 변한단 말이지요. 당연하지요. 시대에 맞춰서 생존과 번영의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 윤리 도덕 항목들은 계속 변합니다. 그런데 윤리 도덕 항목들과 이타적인 삶은 뭐가 다르냐 하면 이타적인 삶은 자기희생이라는 것이 있지만 윤리 도덕적인 삶에는 자기희생이 없습니다. 그 대신에 이기적인 삶도 어느 선에서 제재를 받아요. 즉 양 극단이 이기적인 삶과 이타적인 삶이고 그 중간에 있는 것이 윤리 도덕입니다. 너에게 그렇게 큰 희생을 요구하지도 않을 테니까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도 어느 선에서 자제하라는 것이 윤리 도덕입니다.
그래서 만들어 놓은 그 윤리 도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사람들이 다 무엇을 하면서 사는 거지요? 자아성취를 위해서 사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안 죽고 어떻게 하면 잘 사느냐.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최소한의 테두리만 지키면서 무슨 짓이든지 다 해도 된다. 그것이 윤리 도덕입니다. 인간의 공포와 탐욕을 기반으로 사람들이 서로 극한상황으로 가지 않고 자기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도록 만들어 놓은 툴이 바로 윤리 도덕입니다. 따라서 윤리 도덕의 기반은 탐욕의 조절이에요. 탐욕의 안전판입니다. 탐욕을 마음껏 부리면서 살아도 되는 카테고리를 정해 놓은 것, 그것이 윤리 도덕이에요.
사도 바울이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라고 말씀하지요? 사도 바울이 율법을 보고 나서 기절초풍을 한 겁니다. 자기는 나름대로 참으로 거룩한 뜻을 품고 주변에서 칭찬을 들어가면서 살아왔는데 율법을 깨닫고 보니까 그게 다 죄라고 그러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기절초풍을 하는 거지요.
인간의 첫 번째 법이 뭐냐 하면 바로 윤리 도덕입니다.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삶과 윤리 도덕적인 삶을 비교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사람들에게는 관심조차 없는 거예요. 성경 말씀이 윤리 도덕 교과서가 아니에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사람들은 아예 관심조차 없는 겁니다.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거지요. 로마서 1장 32절을 다시 보시지요. 1장 27절까지 동성애 예를 드시고 나서 28절부터 쭉 악행들을 언급합니다.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등등 쭉 나옵니다. 이것이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삶이냐? 그게 아니에요. 32절 보시면
(롬 1:32)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제가 이 부분 설교할 때 말씀드렸었죠? 이건 정신병자들 집단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무슨 얘기냐? 28절부터 쭉 나와 있는 것이 바로 윤리 도덕 항목들입니다. 윤리 도덕에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그 사람을 심판하고 처벌하고 심지어는 격리시키기도 하고 그것이 율법의 중요한 항목들입니다. 29절부터 31절까지의 이 항목들이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항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탐욕의 갈등을 조정하면서 살아가는 윤리 도덕적인 테크닉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32절에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한다는 것이지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사람을 옳다고 말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없어요. 윤리 도덕 항목 자체를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에 대해서는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리시고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윤리 도덕적인 삶입니다. 하나님은 윤리 도덕적인 삶을 죄라고 지적하시는 거예요. 아까 제가 대표적으로 효도를 예로 들어드렸습니다, 사람들은 효도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자기 부모님을 잘 공양하면서 살아야 해요. 부모에게 효도를 안 하는 나쁜 인간들도 있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상황이고 사람들은 모두 효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어느 윤리 도덕에나 다 효도가 들어 있지요. 그런데 효도를 하다보면 무엇을 못합니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율법을 못 지키게 됩니다. 절대 못 지킵니다. 왜? 내 부모가 급하니까. 내 눈에는 내 부모밖에 없고 내 자식밖에 없습니다. 내 눈엔 우리나라밖에 없고, 우리 민족밖에 없고 그래서 빨갱이 저놈들을 처단해야 우리가 살아남을 수가 있고..... 결국 사람들의 사랑이라는 것은 증오와 같이 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 편을 사랑하고 지켜야 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증오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세상의 윤리 도덕 법률 시스템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율법과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없었으면 윤리 도덕이 죄가 아닐 텐데 율법이 오는 바람에 윤리 도덕이 죄가 되어버렸다고 사도 바울이 설명을 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죄는 윤리 도덕적인 죄를 얘기하시는 게 아니에요. 시편에서 “입을 크게 벌리라 내가 채우리라 했더니 너희가 나를 떠났도다”라고 하시지요. 선지자들을 통해서도 하시는 말씀이 뭡니까? "너희는 내게 돌아오라." 하지만 사람들이 안 돌아갑니다. 왜 안 돌아갑니까? 반윤리적이고 반도덕적인 사람들이라 하나님께 안 돌아갑니까? 그게 아니죠. 하나님께 돌아가면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삶이란 것이 뭡니까? 그것이 바로 윤리 도덕적인 삶입니다. 왜 나에게서 떠나가느냐. 나는 너희의 남편이다. 왜 행음하느냐? 사람들이 나가서 행음하는 그게 윤리 도덕적인 삶이에요. 자기들끼리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서 자기들끼리 힘을 합해서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애를 쓴단 말이죠. 그걸 보고 뭐라고 그러셔요? 왜 헛된데다 그렇게 은을 달아주면서 기를 쓰느냐. 왜 안 될 일에 그렇게 기를 쓰느냐. 윤리 도덕적인 삶이 헛된 삶이라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이거든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진짜 정답을 준다고 말씀하시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지요. 왜? 윤리 도덕적으로 살아서 행복하게 살아야 되니까 하나님의 율법에 관심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라 윤리 도덕적으로 사는 삶의 결말이 뻔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윤리 도덕을 포기해야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안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 즉 반윤리적이고 반도덕적인 죄는 사도 바울이 여기서 취급도 안 합니다. 사도 바울이 죄라고 부르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서로 힘을 합해서 윤리 도덕적으로 살면서 사람들의 세속 공동체, 가이사의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열심히 살고 있는 그 죄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5장 20절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롬 5:20 전반)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사람들이 윤리 도덕적으로 열심히 살고 있는데 율법이 가입한, 즉 더해진 것은 - add to로 번역을 하지요 - 범죄를 더하게 함이라, 즉 범죄를 증가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오기 전에는 그런 범죄라는 건 없었어요.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윤리도덕적인 삶을 열심히 사는 것은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와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는 죄를 묻게 된 것이지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도 세상에서는 전혀 죄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죄가 아니에요. 적당한 선에서 절제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남의 부모 돌보지 않고 내 부모만 열심히 돌보아 드리는 것을 효도라고 해서 오히려 권장합니다. 그 효도는 칭찬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런 것이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고도 너희가 행하고 또 심지어 서로 잘했다고 격려한다는 것입니다. 효도는 칭송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그러셔요? “너 왜 네 부모만 사랑하느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 행위인데 하나님은 죄라고 지적하시는 그 죄를 다루는 것입니다. 7장 18절부터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롬 7:18-24)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사도 바울이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윤리 도덕적으로 잘 살고 있었는데, 부모에게도 효도하고 내 인생의 성취를 위해서도 열심히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율법이 오면서 “너를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는 것만큼 네 이웃을 사랑해야 돼”라고 하시니까 사도 바울이 그 하나님의 율법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매뉴얼로 일단 받아들였단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살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느냐? 그렇게 살 수 없다. 왜 그렇죠? 내 부모님이 힘드신 걸 눈뜨고 못 보는 겁니다. 옆집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잘 해 드리려고 했다가도 내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모든 계획을 취소해버립니다. 절대로 못 벗어난다는 거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 속마음으로는 율법대로 살고 싶은데 내 육신이 율법대로 살지 않고 윤리 도덕적으로 사는 쪽으로 나를 자꾸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윤리 도덕적으로는 살 수 있어요. 윤리 도덕적으로 사는 것도 힘들어 하는 인간은 지금 언급하지 말자는 거지요. 지금 비윤리적이고 반도덕적인 사람들 이야기를 우리가 왜 합니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윤리 도덕적으로 살고 싶은 내 탐욕이 문제인 것입니다. 학교에서 도덕 시간에 뭘 가르치는 겁니까? 신호등을 잘 지켜라. 불쌍한 사람들 있으면 도와줘라. 도덕 교과서에 쭉 나옵니다. 왜? 그게 너희에게 유리하니까. 그게 도덕입니다. “어리석게 이기적으로 네 탐욕을 부리다가는 결국 너도 망하는 거야. 이 바보야. 눈을 좀 떠. 결국 윤리 도덕적으로 살아야 너한테도 좋은 거야.” 그렇죠? 그것을 설득하고 세뇌시키는 것이 세상의 윤리 도덕 교육이에요.
따라서 사도 바울이 지금 괴로워하는 것은 속마음으로는 ‘아! 나도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되는데. 날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는데’ 하면서도 그게 옳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게 살아지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윤리 도덕적으로 살아서 내 탐욕을 채우고 싶다는 그것에 내 마음이 계속 끌려가서 율법대로 살고 싶은 마음을 제압해 버린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탄식을 하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나를 자꾸 윤리 도덕 쪽으로 끌고 가는 이 원수 같은 몸이 나를 장악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누가 나를 좀 꺼내줄 수 없을까? 그것입니다.
지금까지 윤리도덕과 율법, 이렇게 두 법을 말씀드렸는데 이 두 법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육에 속한 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윤리도덕은 육신의 소욕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자기들 몸에 종노릇하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법입니다. 불의의 종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법이 윤리 도덕이에요. 그런데 율법은 이러한 불의의 종들에게 하나님께서 강제로 명령 조항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하는 이 고백은 지금 내가 육신의 종이고 불의의 종인데 내가 원하는 윤리도덕적인 삶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율법적인 삶 그 둘 사이에 끼어서 어쩔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죽을 노릇이라는 겁니다.
결국 율법은 육신의 종노릇을 하는 사람을 죽이려고 온 것입니다. 육신의 종노릇을 하는 사람은 윤리 도덕적으로밖에는 못 살아요. 율법대로 못 삽니다. 율법은 윤리 도덕적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를 죽이러 온 것이지요. 그래서 7장 9절 보시면
(롬 7:9-10)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신명기에 복과 저주가 나옵니다. 율법대로 살면 너는 복을 얻고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너는 저주를 받는다고 하시지요. 그 율법이 복을 주는 율법입니까, 사망을 주는 율법입니까? 사망을 주는 율법입니다.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율법을 주셨는데 육을 가진 인간들은 결국 그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망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결국 구약 성경은 육신 때문에 율법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 지키면서 살 수 있는 건 무슨 법이에요? 윤리 도덕입니다. 그래서 7장 1절부터 남편과 아내의 비유를 하는 겁니다. 제가 봉독합니다.
(롬 7:1-4)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6장에서 우리가 보았던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다는 것을 설명한 후에 이어지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왜 주셨을까요? 우리가 육신의 노예이기 때문에 통제하시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율법으로는 통제가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여기서 남편과 아내의 비유는 이런 말씀입니다. 어떤 순진무구한 처녀가 시집을 갔어요. 아주 믿음직한 남자가 있어서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부산도 가끔 놀러 데려가고 끔찍이 나한테 잘해 줘요. 그런데 어느 날 경찰이 찾아온 겁니다. 둘을 다 체포를 했어요. 그래서 이 순진무구한 새댁이 “아니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랬더니 그 경찰이 말하기를 “당신 남편이 조폭인 걸 몰랐습니까?” 그래서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랬더니 “당신 남편하고 지난번에 부산을 왜 갔다 왔지요?” 그래서 “놀러 갔다 왔지요.” 그랬더니 “마약 운반하러 갔다 온 겁니다.” 이제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졸지에 남편의 범죄행위에 가담한 자가 되는 것이지요. 순진무구한 새댁이 말입니다. 그런데 재판이 진행되다가 이 새댁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 인정이 되어 풀려나고 그 남편은 감옥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면 이 새댁에게 앞으로 경찰이 찾아올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경찰이 찾아올 일이 없지요.
그래서 율법에서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내 육체가 십자가 위에서 죽을 때, 우리가 내 옛사람을 벗어버릴 때는 우리가 율법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5절과 6절을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롬 7:5-6)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자 이제 드디어 세 번째 법이 나왔습니다. 바로 성령의 법입니다. 이 성령의 법은 육체가 제거된 사람에게만 적용됩니다. 성령의 법이라는 새로운 법체계 안에서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섬긴다고 번역했지만 원어는 둘류오, 즉 종노릇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영을 KJV에서는 인간의 영이라고 보아서 소문자 spirit를 쓰고, NIV에서는 성령이라고 보아서 대문자 Spirit를 씁니다. 저는 성령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의문, 즉 율법 체계와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의문은 written code. 문자로 기록된 조항, 즉 율법을 말합니다. 율법의 종노릇을 하던 그런 삶에서 이제는 벗어나서 성령 안에서 종노릇을 하는 삶으로 이제는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과 우리가 상관이 없다는 거지요. 남편이 죽어버렸으니까 경찰관이 찾아올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세 번째 법이 등장하는 것인데 이 성령의 법은 육체가 제거된 사람, 옛사람을 벗어버린 사람만이 그 법에 의해서 살 수가 있어요. 감옥 갔던 남편이 어느 날 돌아오면 누구를 달고 돌아오겠어요? 경찰관을 달고 돌아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육체가 정과 욕심과 함께 죽어버리는, 제거되는 것이 성령의 법대로 살 수 있는 절대 전제조건입니다. 따라서 육에 속한 크리스찬이 성령의 인도대로 살 수 있느냐? 절대 못 삽니다.
교회에서 기독교 윤리학을 자꾸 말하는 것은 그 육체가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책만 보면 윤리 도덕 교과서로 보이고, 입만 열면 “우리가 착하게 삽시다,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으니 우리가 부모님에게 효도합시다”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묵상 때 봉독해드린 마태복음 5장의 예수님 말씀에서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왔다고 하시면서 이어서 율법의 실제 의미를 다섯 가지의 예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그 중에서 음행을 하지 말라는 율법의 진정한 의미는 음욕을 품으면 안 된다는 것이라고 하시지요. 우리에게 음욕이 생기지 않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음욕이 안 생기는 사람에게 음행을 하나 안 하나 감시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서 이 육체, 즉 조폭 남편이 제거되지 않으면 경찰관의 감시 하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조폭 남편과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은 눈에 경찰관만 보입니다. 즉 육체가 제거되지 않은 사람은 성경책을 보면 전부 윤리 도덕 교과서로 보이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성경책을 윤리 도덕 교과서로 보는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엄청난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율법이 윤리 도덕인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한다, 신사 물건을 훔치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정작 너희는 훔치지 않느냐” 등등 이런 이상한 말을 사도 바울이 하는 것은 율법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윤리도덕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논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러 왔다고 하셨고 일점일획도 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2장 13절부터 봅니다.
(롬 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그 다음에 3장 31절 보시면
(롬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예수님과 똑같은 말씀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옆에 3장 20절 보시면
(롬 3:20-22)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 논리가 전부 정교한 논리입니다. 이 말 했다, 저 말 했다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육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가 우리 주인이에요. 우리는 육체를 섬기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육체를 잘 섬기면서 살기 위해 아주 효율적인 방법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윤리 도덕입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에게도 윤리 도덕을 가르치고 세뇌를 시키면서 열심히 살고 있는데 갑자기 율법이 와서 “그렇게 살지 말아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면서 살아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가 있느냐? 절대로 못 지키지요. 왜냐하면 내 남편이, 내 육신이 윤리 도덕을 요구하거든요. 따라서 절대 율법대로 살 수가 없단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오십니다. 오셔서 내 남편을 죽이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먼저 죽으셔요. 그리고 성령께서 오셔서 내 남편을 강제로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 버립니다. 조폭인 내 남편을 말이지요. 내가 섬기던 육체가 제거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게 됐더니 내가 원하는 삶이 바로 율법에 다 써 있는 거예요. 예전의 내 육체, 내 조폭 남편이 원하던 삶에는 흥미가 없어지고 이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대로 사는 것이 너무너무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걸 설명하는 겁니다.
율법은 뭡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내 조폭 남편이 살아 있을 땐 절대로 그렇게 못 살지요. 왜냐하면 내 남편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살게 만들질 않습니다. 우리말도 예전에 남편을 “우리 주인 양반”이라고 그랬듯이 그 당시 유대인들은 남편이 주인이에요. 실제 주인입니다. 그래서 이런 비유을 하는 겁니다. 내 남편이 이거 하자 저거 하자 하는데 거기에 대항했다가는 무슨 말을 듣습니까? “삼종지도도 모르느냐.” 그렇게 되는 거지요. 친정으로 쫓겨가게 됩니다. 절대 남편을 거역 못합니다. 그런 배경으로 사도 바울이 이런 비유를 든 것입니다.
내 육체가 나의 주인인 불의의 종으로 우리가 살 때에는 두 가지 법이 우리 안에 있었습니다. 하나는 윤리 도덕, 또 하나는 율법입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인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내 주인 노릇하던 육체를 제거해 버리십니다. 그리고 났더니 나는 율법대로 사는 것이 너무너무 행복해 지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세 번째 법인 성령의 법 체계 안으로 들어온 자의 모습입니다.
율법대로 사는 것이 과연 뭐냐? 안식일에 꼼짝도 안 하고 쌀 없으면 그냥 굶고 이러는 거냐? 그게 아니라 사도 바울이 규정하기를 로마서 13장 10절을 봅니다.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그럼 율법이 왔을 때 사랑하면서 살면 될 거 아닙니까?” 아까 말씀드렸죠? 내 부모님 사랑하느라고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하신 내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남편이 죽으면서 율법이 완성이 되고 봤더니 무슨 삶을 사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게 내가 변해 있는 거예요. 그것이 구약과는 다른 새 언약인 신약입니다.
율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 구약 시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을 죽이는 시대에요. 그런데 율법 안에 하나의 안전장치가 있지요. 그게 뭡니까? 제사입니다.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희생제사법을 같이 주셨어요. 그래서 육신이 여전히 살아 있는 유대인들이 계속 반복되는 제사로 그 정죄를 피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였지요.
그런데 신약 백성들에겐 제사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죄를 짓게 하는 육체가 죽어버렸으니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지요.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단번에 이룬 제사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 한 번으로 끝내버리셨다는 겁니다. 반복된 제사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율법대로 사는 삶을 살기 원하는 자가 되어 기쁘게 율법대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세 번째 법인 성령의 법 체계 안으로 우리가 들어 온 것입니다.
이 윤리 도덕과 율법과 성령의 법에 대한 서구 교회사에서의 혼란을 잠깐 말씀드리고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서구 신학자들은 구약의 율법이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분석합니다. 방금 말씀드렸던 ritual, 제사법이 있고 그 다음에 두 번째를 뭐라고 이야기 하냐 하면 시민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윤리도덕 조항들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율법을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법과 윤리 도덕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서구 신학계가 분석을 하고 거기에는 누구도 반론을 안 합니다. 정말 황당하지요?
우리에게는 많은 신학적 과제들이 있는데 그 중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서구 신학자들이 시민법이라고 규정한 율법의 그 부분이 세상 윤리 도덕과 어떻게 모순되고 충돌되는가 하는 것을 조목조목 밝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큰 카테고리로 다섯 가지 예를 들면서 그 모순과 충돌을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율법 모든 조항 하나하나에 대하여 세상 윤리 도덕과 어떻게 모순되고 충돌되는 것인가를 논증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탄식한 “곤고한 사람”이 결국 율법 앞에서 윤리 도덕을 버리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을 실제로 논증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서구 교회는 루터 이전까지는 율법의 용도를 두 가지라고 분석해왔습니다. 하나가 아까 말씀드린 시민적 용도 혹은 정치적 용도, 즉 윤리 도덕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서로 물고 먹다가 파멸하면 안 되니까 윤리 도덕과 법률로 주셨다고 보는 것인데 그건 말이 안 돼요. 사람들은 알아서 다 합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실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 것은 사람들이 윤리 도덕을 세워서 알아서 다 합니다. 어느 문화권이나 그건 알아서 다 해요. 그런데 그것을 율법의 제1용도라고 본 겁니다. 소경들이지요.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이 부분에서 서구 신학자들은 다 소경들이에요. 헬라 철학과 헬라 윤리학으로 눈이 먼 소경들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용도로 뭘 꼽고 있냐 하면 신학적 용도, 영적 용도라고 하는데 3장 20절을 보시죠.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 부분을 율법의 제2용도인 신학적 용도, 영적 용도라고 부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신 시민법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시면서 하나님 앞에 죄를 실토하게 만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논리가 결국 무슨 얘기를 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말씀으로 보는 겁니다. 그렇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윤리 도덕 항목을 시민법으로, 정치적 용도로써 주셨는데 우리 다 알지 않느냐. 우리가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지를. 그래서 우리가 윤리 도덕적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다 알지 않느냐” 그 이야기거든요. 그러면서 “아! 하나님 저는 윤리 도덕적으로 살지 못하겠어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을 지적하시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 율법의 두 번째 용도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황당한 말입니까?
가톨릭과 개신교를 통틀어서 여기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루터도 이 두 가지 용도밖에 못 보았는데 멜랑히톤이 율법의 제3용도에 대한 뉘앙스를 풍기는 언급을 좀 했고 이어서 캘빈이 율법의 제3용도라는 것을 교리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제3용도란 크리스찬이 된 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사는 삶의 지침서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논리 자체는 상당히 성경적입니다. 하지만 캘빈도 내용적으로는 무엇을 보고 있겠어요? “그렇지. 크리스찬이라면 윤리 도덕적으로 살아야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서구 기독교 이천 년은 인간이 만든 윤리 도덕에 완전히 갇혀 있는 신학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윤리 도덕 안에서 성경을 보아 온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무엇과 무엇의 싸움을 이야기합니까? 윤리 도덕과 율법의 싸움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나는 윤리 도덕적으로 살고 싶은데 율법이 그것을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러니 곤고한 겁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윤리 도덕적으로 살기 원합니다. 왜? 공포와 탐욕 때문에 그렇습니다. 탐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윤리 도덕은 탐심을 채우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서 인간들이 개발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율법이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니까 사도 바울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예수님께 오셔서 십자가에서 사도 바울의 육체를 죽이는 길을 여시고 그 다음에 성령께서 오셔서 실제로 사도 바울의 육체를 죽여 버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음 주가 로마서 8장이 될 텐데 로마서 8장에서 1절과 2절을 보시겠습니다.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할렐루야! 성령께서 내 육체를 죽이셨습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율법의 용도는 첫째, 자신들을 위해 윤리 도덕적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둘째,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대로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좌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희생 제사를 허락하셔서 목숨만은 살려주십니다.
그러다가 선지서에 예언된 새 언약을 주실 때가 오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그 피로 인간들이 자신들을 위해 때로는 이기적으로, 때로는 이타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윤리 도덕적으로 살아온 모든 잘못을 덮어주시고 그 다음에 사람들의 육체를 끌어다 십자가에서 죽여 버리심으로써 다시는 육신을 주인으로 섬기는 삶을 살지 않게 하십니다.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거지요. 사도 바울의 오늘 비유로는 조폭 남편을 잡아다 죽이시는 겁니다.
그리고 나면 어떻게 되겠어요? 조폭 남편이 죽어버린 나는 이제 홀가분하게 내 남편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려고 봤더니 율법에 자세하게 쓰여 있는 거예요. “아! 이대로 살면 되는구나.” 조폭 남편이 없기 때문에 훼방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쭉 읽어봤더니 이건 윤리 도덕이 아니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거구나 하는 게 눈에 보이게 되는 거지요. 이 논리가 완전히 clear하게 입증이 되려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서구 신학자들이 시민법 조항이라고 보았던 율법의 그 조항들이 윤리 도덕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모순된다는 것을 우리가 하나하나 다 설명을 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 안에서 누군가 할 거예요. 우리 다음 세대에서 하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그래서 윤리 도덕의 틀에 갇혀서 진행되어온 기독교 이천 년이 다 뒤집혀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표현하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신령한 자입니다.
오늘 7장 말씀을 이렇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지는 성찬에서 우리의 육체가 죽는 또 한 번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줄을 믿습니다. 계속 제가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이 일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한 것처럼 단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완성하셨지만 우리가 그 길을 통과하는 과정은 점진적으로 통과해 나가게 됩니다. 단번에 이루어졌다고 하는 그런 이단들이 교회사에 무수히 많이 나옵니다. 그건 성경을 잘못 본 것이고 체험도 이상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고, 우리에게는 점진적으로 진행됩니다. 따라서 오늘 성찬에서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분량만큼 그 놀라운 일이 진행될 줄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이 육신의 종이 되어서 공포와 탐욕 때문에 탐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다가 결국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아 허덕이다가 신기루 앞에서 말라 죽는 것과 같은 그런 인생일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허락하시니 그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는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일이 이루어지기 위한 회개를 할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심을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회개에 이를 수 있도록 우리의 육적인 삶을 환란에 빠트리셔서 저희들로 하여금 절망하게 하셨던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들이 하나님의 이 놀라운 약속 앞에서 엎드려 간절히 기도드리오니 이어지는 성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큼 제거가 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큼 성령께서 장악하시는 그 놀라운 일을 이루시옵소서.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이 일을 이루실줄 믿사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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