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춘천시문화관광해설사회
 
 
 
카페 게시글
춘천을 사랑한노래 스크랩 아버님에 대한 기억
아름다운길 추천 0 조회 94 10.10.01 20: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아버님에 대한 기억

내 아버님은 39살 되던 해(1940년?) 나를 낳으셨다.

20세 전에 첫 아이를 보는 것이 정상이나 아버님은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그렇지 못하였다.

그러기에 첫 부인이 되는 임애지(任愛只) 여인은 자책감으로 집을 떠나게 되고

아버님은 그 부인을 찾으려 수없이 수소문 하나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다른 부인을 맞으나 동거의 의미만 가졌을 뿐 초혼의 부인을 호적에서 지우지 않으셨다.

아버님은 1988년 2월 15일(음.1987.12.28) 지병인 협신증으로 타계하셨는데,

그때 내 나이 49이었다.

우리가족은 6.25로 인하여 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었다.

도회생활에서 가장이 직장과 집을 잃었을 때 모든 것을 다 잃은 것과 같이,

내가 26살 되던 해 결혼을 하였는데, 그 동안 부모와 함께 산 것이 13년 밖에 되지 않았고

그것도 유년 시절에 해당이 되며, 결혼 후 모시고 18년의 세월이 전부이다.

따라서 아버님에 대하여 아는 바가 적으며 그만큼 관심을 두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친척 분들이 집안 이야기를 할 때 듣는 것이 전부가 된다.

근년에 오면서 나는 다른 분의 문집에서 아버님의 약력을 보고 감격하였다.

그것은 강원대학교 공과대학장을 지내신 홍순주(洪淳周)박사의 선친 홍종대(洪鍾大)

어른의 문집『海觀自集』인데

백웅(白熊) 이원직(李源直): 1902년 6월 3일 춘천 서면 월송리에서 출생.

龍仁后人, 淸白吏公 諱 伯持 17대 손.

춘천지역 거유(巨儒), 1946년 先考를 도와 漢詩會 昭陽吟社를 結社하였고,

1951년 先考 작고 후에는 이 詩社를 이어받아 주관함. 1979년 6월 24일 소양정에서

사우들을 모아「海觀先生追慕」시제의 시회를 열었고,

여기에서 수집된 시작 20여편을 모아「海觀先生追悼詩集」을 편집하고 그 권두언을 撰함.
1983년 여름에는 40여 춘천지역 先儒들의 유작들을 모아「壽春先儒詩集」과

그 당시 소양음사 50여 사우들의 시작들을 모아「昭陽吟社詩集」을 발간함.

1988년 2월 15일(음 1987년 12월 29일) 별세. 묘는 고은리 가족묘지.

문집 남김. 장남 전 한국문인협회 강원도 지회장 李武相. 장남 敦榮.

(원문에 틀린 곳은 수정하였음)

같이 기록되고 있었으며, 족보에는

자(字)는 선용(善用), 호(號)는 백웅(白熊) 1902년 임인(壬寅) 6월 3일생.

이라 하였다. 이러한 자료는 내가 아버님을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되며,

더없이 소중한 자료라 생각하고 있다. 그

 문집에는 아버님에 대하여도 조금 보이고 있다.

六月二十一日李友白熊來訪共吟 (1946. 6. 21)
(6월 21일 친구 이백웅이 찾아와서 함께 시를 읊다)

與君分路幾星霜(그대와 헤어진 지 몇 해 만인가)
欲說幽懷日夕陽(품은 회포 풀다보니 해는 저물어)
淡水爲交心月白(맑은 물같은 사귐에 마음은 맑은 달같아)
黃金不用契蘭香(친구의 향기로운 정에 황금은 필요없지)
病難醫世憐卿渴(세상에서 고치기 어려운 병 사마장경의 소갈증 불쌍히 여기고)
語不驚人假社狂(사람들을 놀라지 못하게 한 말 두보의 광증 빌린 것)
訪我諸兄乘興到(나를 찾은 여러 형들 흥을 타고 이르니)
以詩言志醉爲鄕(시로서 뜻을 말하며 술 취함으로 고향 삼는다)


心石來四人同吟李白熊家 (1949. 10. 20)
(심석이 네 사람과 와서 함께 이백웅의 집에서 읊다)

菊老霜淸夜己空(국화 시들고 서리 맑은데 밤이 공허해)
踏冥爲訪李先翁(어둠 밟고 이선생을 방문하였네)
棋筵可倣商山趣(바둑판은 상산의 취미를 본받았고)
酒國宣追洛社風(술자리는 의당 낙사의 풍모 따랐다)
無意主留何處裡(별 뜻 없는 주인의 만류 어디까지겠는가)
有綠客到此山中(인연 있는 나그네 이 산 속에 이르렀거늘)
止朋招我來斯地(벗 붇들고 나를 불러 여기에 왔으니)
舊契相尋一席同(옛 약속 서로 물으며 자리 함께 나누네)

위의 글은 근년에 출판된 책이나, 모두 6,25전 기록으로

1946년, 1949년 시문이며 어른들의 교우관계와 그 우정을 엿볼 수 있다.

다음은 족보 및 친족들의 이야기와 다른 자료들에서 아버님의 선대(先代)와

아버님의 모습을 정리하여 보면, 증조 되시는 이중호(李重祜. 1759-1835) 어른은

서면 금산리 또는 신매리에서 훈학을 하신 것으로 보인다.
1820년 62세의 나이로 증광시(增廣試)에 생원진사가 되셨으나

벼슬과는 관계없이 자신을 확인하는 것으로, 원주의 원천석(元天錫)

그 분이 벼슬을 하지 않고 있을 때, 양민의 의무였던 병적에 편제하려 할 때

진사가 되어 면제받았듯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족보에

이중호(李重祜). 생부 보일(普一), 초명 태호(泰祜), 字 군잠(君譧),

호 규산제(奎山齊) 己卯 2월 16일생.
1820년에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공은 성품이 대범 침착하고 문장이 능하고 화려하였다.

공의 제자 수십 인이 돈을 모아 논 여러 마지기를 장만하여

이로써 매년 공의 생신잔치에 이바지 하였다.
이날 사제간(師弟間)에 모인자리에서 공이 학문의 강론도 하였고,

시도 낭송하여 사제간에 화락하였다. 분위기가 고상하고 엄숙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유가(儒家)의 아름다운 법도라고 칭송하였다.

위의 기록에서 그 제자 분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논밭을 마련하고 그 소출로 찬치를 받으신 것으로 보아,

크게 예우를 받으신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한 연유인지는 모르나 아버님은 항상

“세교(世交) 집안들과는 잘 알고 지내야 된다.”

하고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내가 어려서 고향(서면)을 떠났고

연고되는 분들과 연령차이가 많아 어느 집안과 어떤 관계인지 모르며,

이야기를 나누어 볼 시대적 상황들이 아니었기에 다만 참고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인연들은 1700년대 서면 현암리에 와 계셨던 이의현(李宜顯) 어른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춘주지」고시문(古詩文) ‘백운동(白雲洞)’편에

「옛날에 김창흡(金昌翕)이 이곳 높은 곳에 와서, 감와리(堪臥里. 현암리)라 하였으니,

한편의 뜰에 마음과 몸을 백운(白雲)에 싸여 살고자 하였으므로,

후에 사람들이 마을 이름을 감와리라 하고, 골 이름을 ‘백운동’이라 하였다.
진사 백시석(白時奭). 참봉 김덕연(金德淵). 이성검(李誠儉). 박중문(朴重文).

현감 이기정(李耆定)이 설강학계(設講學契)하여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과

더불어 문장을 떨쳤으며, 서원을 만드니 부사 성진령(成震齡)이 상랑문을 찬하였으나

조정의 령으로 완수하지 못하고 토지는 춘수영당(春睡影堂)을 만드는데 기부하였다」

여기에 보이는 이의현(李宜顯)이란 분이, 문중(龍仁李氏)의 28세손으로

1727년 우의정(右議政), 1735년 영의정(領議政)을 지내신 분이며,

김창협(金昌協)어른에게 논어를 배웠고 따라서 그 아우 김창흡(金昌翕)

어른과도 인연이 되어 춘천 서면으로 오게 되며 춘천선비들과 교분을 맺는다.
그 원인이 위의 글에서 보이듯, 춘천현감 및 춘천선비들이 백운동에 서원을 짓기로 하여,

스승으로 모신분이 이의현(李宜顯)으로 이중호(李重祜. 30세손) 어른과는 파(派)는 다르나

2대 윗분이며 이러한 인과(因果)는 서면(월송리. 내골)에 세거하였던

집안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받아드릴 수 있다.

따라서 집안형편도 사촌 누님(李相淑. 90세)의 말을 빌리면

300석 집안으로 궁색한 살림은 아니었으며,

그 재산이 할아버지 형제분들의 갈등으로 탕진되면서 논밭을 모두 잃고

농촌과는 인연이 없어지고, 아버님 대에서는 직장을 갖지 않으면

생계가 어려운 형편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나 이웃 분들의 물심양면의 힘으로 당당한 모습을 보이신다.

더구나 아버님형제분이 우애가 돈독하셔서 매사에 꾸김이 없으셨다.

우두동에 이문영(李文榮. 73세)씨는,

“춘천에서 아버님 형제분을 무엇으로도 당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그것은 학문. 인물. 능력의 함축 된 이야기로 보여 진다.

또 그런가하면 물질적으로도 많은 힘이 되어 주신분이 서면(금산리)의

월담(月潭) 한성교(韓省敎.1890-1964년. UN의장을 지낸 韓昇洙씨의 조부)

어른으로 그 분은 아버님 보다는 13년이 연장이시고 백부님 보다는 5년이 위이신 분으로,

어려운 시기에 백부님(李源正. 1894-1951)의 생계를 위하여서는 방앗간을 마련해 주셨고,

아버님에게는 교동 53번지에 7칸짜리 집을 장만해 주셨다.
아버님에 경위는, 해방되면서 일본인에게 산 집이 적산가옥(적국인의 재산)이라 하여

군정청(軍政廳)에 빼앗기고 춘천향교 동재(東齋)에 기거할 때

월담(月潭) 어른이 집을 장만하여 주신 것이다.
따라서 세분들의 관계가 어떤 교분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남다른 교분이 있었던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버님에 유년시절은 들은바 없으나,

20-30대의 이야기를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로 종합해 보면,

일본의 보국대나 징병을 피하여 나이를 4살(1899년) 늘여 일본 순사(巡査)로 들어가게 된다.

그때의 단편적인 이야기로

“당신 아버지는 말이야, 경찰서에 갈비나 고기 같은 것이 들어와 회식을 하게 되면,

그 고기를 먹는 시늉만하고 상 밑으로 내려놓았다 유치장 죄수들을 갔다 주 곤 했던 사람이야!

<李相淑. 신북면 신동리 92세>”

그런가 하면 본인이 드려준 이야기로 화천에서 죄인을 춘천으로 호송하는 일이1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화천에서 나와 춘천에 가까웠을 무렵(사북면 고탄?)이었어,

고갯길을 내려서는데 갑자기 용변이 마렵다는 거야,

래 그런 줄만 알고 수갑을 모두 풀어주고, 담배를 한 대 피우려는데,

웬걸 용변을 보는 척하며 풀섶으로 들어 간 사람이 갑자기 산 밑으로 뛰기 시작하는 거야,

순간 얼마나 급하고 당황했는지 나도 비호같이 달려가 붙잡아 수갑을 채우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옆에 있는 나무를 꺾어, 몇 차례 때려주었지,

그런데 보니까 그 나무가 가시나무였어. 그 일이 잊혀지지 않아!”

산에 있던 나무가 어떤 종류의 나무였는지 모르나

젊은 패기에 분을 참지 못하여 한 행동이나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본인을 괴롭혔던 모양이다.
그런 일과 결부되었는지는 모르나 그 후 순사생활을 그만두고 친구 분과 둘이서

노자를 마련하여 만주로 갈 결심을 하고 집을 떠난다.
하여 젊은 두 사람이 평양까지 갔을 때 그곳에서 야바위꾼을 처음 보게 되고

사행심에 현혹되어 노자 돈을 모두 털리게 되고,

다시 춘천으로 돌아와 일자리를 구하던 중

고성(高城郡) 장전항(?) 정어리공장(간유 만드는 공장)에 입사하여

몇 년 동안 감독생활을 하다가,

춘천근교 어느 광산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필자의 생모인

 민봉이(閔鳳伊)여사를 만나게 된다.

그때의 이야기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광산에 여자들이 많이 있었어, 그래 여자반장을 찾아가

‘나는 아들이 없으니 아들 하나 보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지.

그래 만나게 된 여자가 그 마누라야!

그런데 아들을 얻긴 얻었는데 알고 보니

그녀의 남편이 같은 이웃에 사는 친구 부인인 거야!”

생모의 남편은 중국으로 들어가 소식이 없을 때였고,

집에는 시어머니와 초등학교 다니는 막내가 있으며,

큰아들은 춘천고보(춘천고등학교 전신)에 다니다 남양군도로 징용을 간 때였다.

그러므로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어머니가 일을 하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
그 후 아버님은 광산 일에서 물러나 자리를 옮긴 곳이 춘성군 서면 부면장으로

모두 주위 분들의 배려 인듯하다.

어머니는 나를 4살까지 당신의 품에서 키우며 형님들의 돌림자를 붙여

<유의열(柳義烈)>이라 불렀다.
그런 상황에 있게 되니 아버님은 아들을 본가로 데려가려 하나,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아, 새벽이면 훔쳐가고 훔쳐오는 줄다리기를 하였다.
그러기를 2달, 신경을 세우시던 어머니가 물러나시며,

아들의 장수(長壽)를 위하여 수수경단(수수팥떡)을 만들어 오시고,

아들이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떠나신 후 어머니는 나타나지 않으셨다.

하여 아버님은 1942년 9월 15일 아버님의 호적에 이무상(李武相)이란 이름으로 입적하게 된다.

8,15해방을 맞으며, 아버님은 춘천시청 농회과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읍내로 이사를 하였다.
그때 국내는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러시아군이 주둔하여 판이한 정치 양상을 갖을 때

아버님 형님에 아들(내게는 4촌)인 이한상(李翰相.1923-?)씨가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좌경(左傾)활동을 하게 되어, 두 형제분들 사이에는 묘한 갈등이 생기게 된다.

6.25가 발발하고 9.28 인천상륙 때, 아버님도 함께 북으로 가기를 종용하였으나,

끝내 반대하여 홀로 남으시고 몇 번의 죽을 고비와 시련의 후유증으로 1.4후퇴

당시 수복되면서 쉽게 고향엘 들어오지 못하고 피난지에 머물렀던 것이다.
그리고 나에 집은 <반동의 집>이라 불태워졌는가 하면

남한정부에서는 연좌법(緣坐法)으로 심적인 부담을 주어

아버님은 직장을 얻지 못한 채 가족들은 고생을 안게 된다.

그때에 아버님이 생활방편으로 문을 여신 것이<行政代書>다.
그 즈음이 1959-1970년으로 시청을 중심한 옥천동(玉泉洞).

요선동(要仙洞) 일대였는데 그때에 그 대서방을 중심으로

전후에 흩어진 아버님의 시우(詩友)들이 그곳에 모이게 되고 모임을 만들게 되니

전통에 얼을 둔 한시(漢詩)모임인 소양음사(昭陽吟社)와

시조창 모임인 정악연구회(正樂硏究會)가 된다.

그 사무실은 춘천시에서 마련해 주었는데 요선시장 옆 30평 건물이었다.
하여 그곳에서 시조창(時調唱)을 가르치기도 하고,

연사를 초청하여 발표도 하며, 전국대회에 입상을 하는 등 활발한 모임을 갖는가하면

또 그 분들이 중심이 되어 소양정 중건에 앞장을 선다.
그리하여 1966년 7월 6일 강원도의 지원을 받아 소양1교 옆에

소양정(昭陽亭. 6.25때 전소)을 비각거리 위로 이전하여 중건하고

이듬해 한시백일장을 개최하여 뽑힌 글을 편액하여 소양정에 현판하기에 이른다.
한시모임은 매월 초하루, 보름 정기모임을 소양정 또는 산과 냇가에서 갖는가 하면

때에 따라 회원들의 집에서 시회(詩會)를 열기도 하고

그때 모아진 글을 두루마리에 정서하여 보관하고, 잘된 글은 즉석에서

시조창으로 들려주었는데, 그때에 어른들은 눈을 지그시 감고 듣고 계시다

잘된 부분에 이르면 머리를 끄덕이시며 흐뭇해하시곤 하셨다.
그 모임이 세월이 흐르면서 나이가 들고, 회원들이 줄어들면서 시조창은 없어지고 한시모임인「昭陽吟社」만 명맥을 유지하다 그나마도 자취를 감추게 된다.

아버님은 매사에 소신이 뚜렷하셨고 <아니다> 생각이 드셨을 때는

타협이 없으셨으며 성품이 곧고 급하셨는가 하면, 남달리 부지런 하셨다.

그러한 정신기조가 되는 시조 몇 편을 1967년 1월 11일, 14일 일기장에서 옮겨보면

非理면 먹지말고 非禮면하지마라
食非理 動非禮면 그것이 惡이로세
行惡이 아모리 크다해도 적은 善만 못하오리.
(1967. 1. 11.)

김서방네 새며느리 잘들었다 하더니만
남편의 옷동정은 구슬때가 쪼록쪼록
그래도 화장품장사 오면 코티분 있소 묻는다.
(1967. 1. 11.)

아버지 젊잔으면 아들이 얌전하고
아비가 우악하면 그 아들이 잔인하다
아마도 鳳生鳳 龍生龍은 이를 두고 한말인가 하노라.
(1967. 1. 14.)

자식이 귀엽거든 회초리 매 더쳐주소
매 안 맞고 키운 자식 부모 앞에 욕만 오네.
옛 노인 하신말씀 그른 것이 있을손가?
(1967. 1. 14.)

위의 글은 단편적인 모습이나 생활 또한 그러 하셨다.

60년대 이후부터 위의 두 모임을 이끌어 오시며 소양정 중건에 앞장을 스셨으나

그 대표였다는 것은 자식 된 본인도 모르고 있었다.
생존해 계실 때

<나에 글이 소양정 상랑(上樑) 속에 있다>

라 하셨으나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으나

늦게야 느낀 것이 소양정 중건의 과정과 상황을 기록 보관하신 것으로 생각이 되고 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