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에 대한 기억 20세 전에 첫 아이를 보는 것이 정상이나 아버님은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그렇지 못하였다. 그러기에 첫 부인이 되는 임애지(任愛只) 여인은 자책감으로 집을 떠나게 되고 아버님은 그 부인을 찾으려 수없이 수소문 하나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내 나이 49이었다. 도회생활에서 가장이 직장과 집을 잃었을 때 모든 것을 다 잃은 것과 같이, 내가 26살 되던 해 결혼을 하였는데, 그 동안 부모와 함께 산 것이 13년 밖에 되지 않았고 그것도 유년 시절에 해당이 되며, 결혼 후 모시고 18년의 세월이 전부이다. 따라서 아버님에 대하여 아는 바가 적으며 그만큼 관심을 두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친척 분들이 집안 이야기를 할 때 듣는 것이 전부가 된다. 그것은 강원대학교 공과대학장을 지내신 홍순주(洪淳周)박사의 선친 홍종대(洪鍾大) 어른의 문집『海觀自集』인데 龍仁后人, 淸白吏公 諱 伯持 17대 손. 춘천지역 거유(巨儒), 1946년 先考를 도와 漢詩會 昭陽吟社를 結社하였고, 1951년 先考 작고 후에는 이 詩社를 이어받아 주관함. 1979년 6월 24일 소양정에서 사우들을 모아「海觀先生追慕」시제의 시회를 열었고, 여기에서 수집된 시작 20여편을 모아「海觀先生追悼詩集」을 편집하고 그 권두언을 撰함. 그 당시 소양음사 50여 사우들의 시작들을 모아「昭陽吟社詩集」을 발간함. 1988년 2월 15일(음 1987년 12월 29일) 별세. 묘는 고은리 가족묘지. 문집 남김. 장남 전 한국문인협회 강원도 지회장 李武相. 장남 敦榮. (원문에 틀린 곳은 수정하였음) 더없이 소중한 자료라 생각하고 있다. 그 문집에는 아버님에 대하여도 조금 보이고 있다. 1946년, 1949년 시문이며 어른들의 교우관계와 그 우정을 엿볼 수 있다. 아버님의 모습을 정리하여 보면, 증조 되시는 이중호(李重祜. 1759-1835) 어른은 서면 금산리 또는 신매리에서 훈학을 하신 것으로 보인다. 벼슬과는 관계없이 자신을 확인하는 것으로, 원주의 원천석(元天錫) 그 분이 벼슬을 하지 않고 있을 때, 양민의 의무였던 병적에 편제하려 할 때 진사가 되어 면제받았듯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족보에 호 규산제(奎山齊) 己卯 2월 16일생. 공은 성품이 대범 침착하고 문장이 능하고 화려하였다. 공의 제자 수십 인이 돈을 모아 논 여러 마지기를 장만하여 이로써 매년 공의 생신잔치에 이바지 하였다. 시도 낭송하여 사제간에 화락하였다. 분위기가 고상하고 엄숙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유가(儒家)의 아름다운 법도라고 칭송하였다. 논밭을 마련하고 그 소출로 찬치를 받으신 것으로 보아, 크게 예우를 받으신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한 연유인지는 모르나 아버님은 항상 연고되는 분들과 연령차이가 많아 어느 집안과 어떤 관계인지 모르며, 이야기를 나누어 볼 시대적 상황들이 아니었기에 다만 참고로 생각하고 있다.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춘주지」고시문(古詩文) ‘백운동(白雲洞)’편에 한편의 뜰에 마음과 몸을 백운(白雲)에 싸여 살고자 하였으므로, 후에 사람들이 마을 이름을 감와리라 하고, 골 이름을 ‘백운동’이라 하였다. 현감 이기정(李耆定)이 설강학계(設講學契)하여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과 더불어 문장을 떨쳤으며, 서원을 만드니 부사 성진령(成震齡)이 상랑문을 찬하였으나 조정의 령으로 완수하지 못하고 토지는 춘수영당(春睡影堂)을 만드는데 기부하였다」 1727년 우의정(右議政), 1735년 영의정(領議政)을 지내신 분이며, 김창협(金昌協)어른에게 논어를 배웠고 따라서 그 아우 김창흡(金昌翕) 어른과도 인연이 되어 춘천 서면으로 오게 되며 춘천선비들과 교분을 맺는다. 스승으로 모신분이 이의현(李宜顯)으로 이중호(李重祜. 30세손) 어른과는 파(派)는 다르나 2대 윗분이며 이러한 인과(因果)는 서면(월송리. 내골)에 세거하였던 집안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받아드릴 수 있다. 300석 집안으로 궁색한 살림은 아니었으며, 그 재산이 할아버지 형제분들의 갈등으로 탕진되면서 논밭을 모두 잃고 농촌과는 인연이 없어지고, 아버님 대에서는 직장을 갖지 않으면 생계가 어려운 형편으로 전락하게 된다. 더구나 아버님형제분이 우애가 돈독하셔서 매사에 꾸김이 없으셨다. 우두동에 이문영(李文榮. 73세)씨는, 또 그런가하면 물질적으로도 많은 힘이 되어 주신분이 서면(금산리)의 월담(月潭) 한성교(韓省敎.1890-1964년. UN의장을 지낸 韓昇洙씨의 조부) 어른으로 그 분은 아버님 보다는 13년이 연장이시고 백부님 보다는 5년이 위이신 분으로, 어려운 시기에 백부님(李源正. 1894-1951)의 생계를 위하여서는 방앗간을 마련해 주셨고, 아버님에게는 교동 53번지에 7칸짜리 집을 장만해 주셨다. 군정청(軍政廳)에 빼앗기고 춘천향교 동재(東齋)에 기거할 때 월담(月潭) 어른이 집을 장만하여 주신 것이다. 남다른 교분이 있었던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20-30대의 이야기를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로 종합해 보면, 일본의 보국대나 징병을 피하여 나이를 4살(1899년) 늘여 일본 순사(巡査)로 들어가게 된다. 그때의 단편적인 이야기로 그 고기를 먹는 시늉만하고 상 밑으로 내려놓았다 유치장 죄수들을 갔다 주 곤 했던 사람이야! <李相淑. 신북면 신동리 92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갯길을 내려서는데 갑자기 용변이 마렵다는 거야, 그래 그런 줄만 알고 수갑을 모두 풀어주고, 담배를 한 대 피우려는데, 웬걸 용변을 보는 척하며 풀섶으로 들어 간 사람이 갑자기 산 밑으로 뛰기 시작하는 거야, 순간 얼마나 급하고 당황했는지 나도 비호같이 달려가 붙잡아 수갑을 채우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옆에 있는 나무를 꺾어, 몇 차례 때려주었지, 그런데 보니까 그 나무가 가시나무였어. 그 일이 잊혀지지 않아!” 젊은 패기에 분을 참지 못하여 한 행동이나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본인을 괴롭혔던 모양이다. 노자를 마련하여 만주로 갈 결심을 하고 집을 떠난다. 사행심에 현혹되어 노자 돈을 모두 털리게 되고, 다시 춘천으로 돌아와 일자리를 구하던 중 고성(高城郡) 장전항(?) 정어리공장(간유 만드는 공장)에 입사하여 몇 년 동안 감독생활을 하다가, 춘천근교 어느 광산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필자의 생모인 민봉이(閔鳳伊)여사를 만나게 된다. 그때의 이야기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들이 없으니 아들 하나 보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지. 그래 만나게 된 여자가 그 마누라야! 그런데 아들을 얻긴 얻었는데 알고 보니 그녀의 남편이 같은 이웃에 사는 친구 부인인 거야!” 집에는 시어머니와 초등학교 다니는 막내가 있으며, 큰아들은 춘천고보(춘천고등학교 전신)에 다니다 남양군도로 징용을 간 때였다. 그러므로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어머니가 일을 하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 모두 주위 분들의 배려 인듯하다. <유의열(柳義烈)>이라 불렀다.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아, 새벽이면 훔쳐가고 훔쳐오는 줄다리기를 하였다. 아들의 장수(長壽)를 위하여 수수경단(수수팥떡)을 만들어 오시고, 아들이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떠나신 후 어머니는 나타나지 않으셨다. 하여 아버님은 1942년 9월 15일 아버님의 호적에 이무상(李武相)이란 이름으로 입적하게 된다. 아버님 형님에 아들(내게는 4촌)인 이한상(李翰相.1923-?)씨가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좌경(左傾)활동을 하게 되어, 두 형제분들 사이에는 묘한 갈등이 생기게 된다. 끝내 반대하여 홀로 남으시고 몇 번의 죽을 고비와 시련의 후유증으로 1.4후퇴 당시 수복되면서 쉽게 고향엘 들어오지 못하고 피난지에 머물렀던 것이다. 남한정부에서는 연좌법(緣坐法)으로 심적인 부담을 주어 아버님은 직장을 얻지 못한 채 가족들은 고생을 안게 된다. 요선동(要仙洞) 일대였는데 그때에 그 대서방을 중심으로 전후에 흩어진 아버님의 시우(詩友)들이 그곳에 모이게 되고 모임을 만들게 되니 전통에 얼을 둔 한시(漢詩)모임인 소양음사(昭陽吟社)와 시조창 모임인 정악연구회(正樂硏究會)가 된다. 그 사무실은 춘천시에서 마련해 주었는데 요선시장 옆 30평 건물이었다. 연사를 초청하여 발표도 하며, 전국대회에 입상을 하는 등 활발한 모임을 갖는가하면 또 그 분들이 중심이 되어 소양정 중건에 앞장을 선다. 소양정(昭陽亭. 6.25때 전소)을 비각거리 위로 이전하여 중건하고 이듬해 한시백일장을 개최하여 뽑힌 글을 편액하여 소양정에 현판하기에 이른다. 때에 따라 회원들의 집에서 시회(詩會)를 열기도 하고 그때 모아진 글을 두루마리에 정서하여 보관하고, 잘된 글은 즉석에서 시조창으로 들려주었는데, 그때에 어른들은 눈을 지그시 감고 듣고 계시다 잘된 부분에 이르면 머리를 끄덕이시며 흐뭇해하시곤 하셨다. 타협이 없으셨으며 성품이 곧고 급하셨는가 하면, 남달리 부지런 하셨다. 그러한 정신기조가 되는 시조 몇 편을 1967년 1월 11일, 14일 일기장에서 옮겨보면 60년대 이후부터 위의 두 모임을 이끌어 오시며 소양정 중건에 앞장을 스셨으나 그 대표였다는 것은 자식 된 본인도 모르고 있었다. <나에 글이 소양정 상랑(上樑) 속에 있다> 라 하셨으나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으나 늦게야 느낀 것이 소양정 중건의 과정과 상황을 기록 보관하신 것으로 생각이 되고 있다. |
출처: 강원도 춘천 시인 이무상 원문보기 글쓴이: 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