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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 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 行 成均進士 諱 繼陽 事錄
事蹟
公은 영양 김씨에게 장가들었는데 김씨 집은 예안현 서쪽에 살았다. 공은 처음에 예안현 동쪽인 부라촌(지금의 浮浦)에 살았는데 공이 봉화현 교도가 되어 하루는 봉화에 가는 도중 온계(溫溪)를 지나 가다가 그 천석의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배회하면서 두루 살펴보다가 신라현에서 잠시 쉬어가려는 차에 우연히 한 중을 만났으니 그 중도 역시 온계에서 오는 길이었다. 중과 함께 쉬었는데 온계의 풍수가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니 공은 공의 소견과 일치하는 것을 기뻐하여 그 중을 데리고 온계로 돌아가서 오르락 내리락하며 두루 살펴보았다. 집터 한 곳을 지적하며 여기에 살면 귀한 아들을 둘 것 이라고 말했다. 공은 그 말을 듣고 마음으로 옮겨 살기로 결심하였다. 그때는 단지 민가 한 집이 살고 있을 뿐 밭 사이사이는 모두 묵어있어서 곳곳마다 개간하여 농사지을 수 있었다. 또 숲이 우거지고 골이 깊고 아늑하여 시냇물이 맑고 달아서 물고기도 많이 서식하여 또 냇물을 끌어들여 밭과 논에 물을 댈 수도 있었다. 공은 성품이 염정(恬靜)하고 원대하여 관로진출(官路進出) 에 힘쓰지 않고 조용히 농사짓고 때로는 낚시질로 낙을 삼으면서 자손교육을 필생사업으로 하다가 세상을 마치실 뜻이 있다. 공의 피부와 안색은 백옥 같아서 속세를 벗어난 풍채였다. 공의 형 훈련참군이 일찍이 매와 개(鷹犬) 기르기를 좋아함으로 근심하여 말하기를 이러한 일은 유가의 근본 뜻을 저버려 그르치는 것이니 이 어찌 자질(子姪)들에게 보일수가 있겠느냐고 하였다. 선군(先君)과 숙부 송재공이 젊었을 때 용두산에 있는 용수사에서 공부를 하셨는데 공이 그때 시 한수를 지어 보냈는데 사시절후(四時節侯)는 빨라 어느듯 해는 저무는데 깊은 산 절문 앞에는 백설이 쌓였으리라. 이 차가운 절간에서 고생하며 공부하는 너희를 생각하니 꿈속에서 때때로 너희 곁을 찾아간다.(節序駸駸歲墓天 雪山深擁寺門前 念渠若業寒窓下 淸夢時時到榻邊)라고 하였다) 공은 혹시 자제들이 시복들을 꾸짖는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남의 하인이 되어 남에게 복종하여 섬긴다면 일상생활에 과실이 없겠느냐 무식한 노복들이란 마땅히 인정을 베풀어 용서하여야 하는데 어찌 가혹하게 힐책을 하느냐고 하셨다. 부인 김씨는 세종 경술 시월 사일에 나셨고 타고난 성품이 후덕하고 순수하며 간곡한 정성으로 선고조를 섬기 시셨고 가시덤불을 헤치고 기틀을 닦을 때 근검으로서 내조를 닦았고 자애와 은혜로서 비복과 자제를 길러서 먼 후일을 생각하며 문호(門戶)를 경영하여 이루었으니 오늘에 이르러 자손들이 번성하게 된 것이다.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우리 선군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숙부 참판공이 조정에 수 십 년 동안 계시면서 효성을 극진이 하였고 숙모 이씨도 단정하고 한결같이 공경하여 극진히 봉양하였으나 부인께서는 확고한 부덕으로 시종일관 추호라도 호화롭고 교사한 빛이 없었다. 자손의 여러 부녀들이 서로 조금도 간언(間言)이 없었다. 여러 손자들이 나아가서 뵈올 때면 반드시 부지런히 공부하여 입신양명을 권장하셨고 공부에 소흘하여 행실에 결함이 있을까 경계하셨다. 동안(童顔) 백발로 천수를 누리시다가 돌아가시니 향연이 93세 이었다. 장지는 수곡 조고祖考와 동원同原에 모셨다.----孫 判中樞府事 滉 謹撰
墓碣銘
公의 휘는 계양이요, 자는 달보이니 진보현 사람이다. 원조遠祖 석이 고려조 말기에 벼슬이 밀직부사에 이르렀다. 본조에 들어와서 諱 자수라는 분이 있어 벼슬이 판전의시사에 이르렀으니 이 분이 공에게 증조가 된다. 이 분이 군기시부정 諱 운후를 낳아서 뒤에 판사복시사에 추증되었으니 이분이 공의 조부가 된다. 그 아드님 선산부사 휘 정은 젊었을 때 강개(慷慨)하여 큰 뜻이 있고 활쏘기, 말타기에 능해서 일찍이 현달했다. 세종조에 건주위 추장 이만주가 여러 번 변경을 침범함에 조정에서는 서쪽을 돌아보아야 할 근심이 있었다. 이 때 공은 영변부 판관에 선임 되었는데 때마침 약산성을 넓혀서 큰 진영을 설치할 때였다. 당시 공은 부사 조비형曺備衡을 도와 성을 쌓는 감독하는 데에 적절함을 얻어 좋은 성적이 있었고, 뒤에 또 최윤덕을 따라 모린위를 처서 공로가 있었음으로 二級의 작위를 받았다. 이러한 일이 최치운의 운수루기(運壽樓記) 및 여지지(輿地誌), 명환록(名宦錄) 등에 자세히 나와 있다. 한산, 선산의 원을 역임해서 모두 선정을 기리는 비석이 서있다. 지보주사(知甫州事,현 도지사)김정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영락갑진(세종6년 1424년) 9월에 공을 낳았다. 공은 형제 남매가 모두 아홉 사람인데 공이 막내가 된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 영소하고 풍모가 뛰어나서 부모가 가장 사랑하는 바가 된다. 소시에 백종조伯從祖 이중위에게서 자랐는데 중위는 집이 부유하여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면서, 그에게는 훈도와 교회(敎誨)를 더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은 마음속으로 분발하여 뜻을 가다듬어 학업에 힘써서 계유 1453년에 사마시에 합격되었다. 그 뒤로부터 유환(遊宦)에 종사하지 않고 시골에 물러가 살았다. 나이65세 되던 홍치 무갑 1488년 5월 병으로 집에서 졸하니 유명에 의하여 장지를 가리지 않고 집에서 북쪽으로 2리되는 수계곡(樹溪谷)의 남향 언덕에 장사지냈다. 둘째 아들 우의 훈공으로 보조공신 이조참판 진성군(眞城君)에 추증되었다. 공은 부사직(副司直) 김유용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맏아들 식은 소시에 학업에 힘써 여러 번 향시(지방에서 실시하는 과거의 하나, 각 도에서 그 도의 유생에게 보이는 초시)에 응하여 장원으로 뽑혔으며 계유년에 진사시에 합격되었으나 일찍 서거했다. 둘째 아들 우는 임자년(1492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무오(1498)년에 문과에 올라 내한에 선보되고, 간원(諫院)과 이병부(吏兵部)의 낭관을 거쳐 병인년 가을에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성상의 용비(龍飛, 임금이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를 만나자, 정국훈(靖國勳)에 책록되어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으며 지금은 호조참판으로 있다. 맏딸은 부승지문원사 김한계의 아들 만신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갑산교수 김신에게로 시집갔다. 진사 식은 먼저 평해군수 김한철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과 한 딸을 두었으니 아들은 潛과 河이고 딸은 유학 신담에게 시집갔다. 그 뒤에 후취로 별시위 박치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네 아들을 두었으니 의, 瀣, 澄, 滉이다. 참판 우는 생원 이시민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한 아들과 두 딸을 두었으니 아들은 수령이요, 맏딸은 유학 조효연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유학 오종호에게 시집갔다. 교수는 딸 하나를 두었는데 충순위 금원복에게 시집갔다. 참판이 이미 선대의 추증을 얻자 선고공(先考公)의 신도(神道, 무덤 근처에서 무덤으로 가는 큰길을 말함)에 비석을 세워 그 계파, 지행 연수 등으로 표기해서 후세 사람에게 남겨 주려 했다. 드디어 글을 만들어 이조판서, 신용개에게 명을 청하기를 선고께서는 천성이 효성하고 우애있고 염결하고 근신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사를 당해서는 모두 3년 동안 여막(廬幕, 상재가 부모 무덤 근처에서 여막을 짓고 삼년간을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하면서 애모를 극진히 했다. 형제들과 함께 유산을 나누는 데는 박한 것으로 자기에게 돌렸으며 문서를 만들어 후일을 위한 대비를 하지 않았건만, 몇 대를 전해 내려오도록 누구 한사람도 분쟁을 일으키는 자가 없었다. 형제와 유리(동서)사이에 있어서 화기가 있었고, 자제들은 훈도하시는데 바른 도리로 하셨다. 경사를 가르치시되 책을 대할 때마다 반드시 너희들은 어떤 경우와 어떤 일을 당하면 마땅히 어떠하게 처리해야 한다 하며 거듭 강구하면서 이치에 맞은 뒤에야 그만두셨다. 비복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은혜와 믿음으로 거느려서 함부로 기쁨과 노여움의 감정을 더하지 않았으며, 항상 자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노복이라는 것은 한 집안의 대간(臺諫, 조선조 때 간언을 맡아보던 관리를 이르는 말로 곧 사헌부 사간원의 벼슬을 통틀어 말함)이다. 규문(閨門)의 은미(隱微)한 일들을 비복이 누설 시키는 것이니 그들을 마음에서 언제나 두려워하기를 대간처럼 한다면, 옥루(屋漏, 집이 가장 깊숙하고 어두운 곳을 말함. 이처럼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마음을 경계하고 행동을 삼가서 양심에 물어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에서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 하셨다. 사마시에 합격되면서 여러 번 향천(鄕薦, 고을 안의 인재를 천거 하는 것)에 올랐으나 계속 뜻을 얻지 못했으며 뒤에 바람병을 앓아서 귀가 잘 들리지 않자, 과거에서 아주 뜻을 끊으시고 초연히 진세에서 벗어날 생각을 가지셨다. 갑술년 가을 선성 북쪽 용두산 남쪽 도계의 굽이진 고에 집을 지으셨으니, 이는 그 깊고도 그윽함을 즐거워한 것이다. 그곳에서 삼십여년동안 은거해 살면서 천석을 즐겼다. 집곁에 물이 있으니 좋은 전답 수백 이랑에 물을대어 스스로 생활에 충당했으며 조금이라도 여축이 있으면 친족중에 곤궁해서 살 수 없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언제나 한가롭게 살면서 물징(物懲)에 담박(澹泊)했으며 발자취가 일찍이 관청에 이르지 않았고 산수사이에 우유자적(優遊自適)하여 천수를 마치셨으니 진실로 옛날 일민(逸民, 학문과 덕행이 있으면서도 세상에 나가서 벼슬하지 않고 파묻혀서 지내는 사람을 말함)의 류 인데도 세상에서 아는자가 드물다. 문한을 맡은자의 붓을 빌어서 후세에 전해지기를 원한다. 이 우의 말이 본분에 넘치지 않는다고 생각하신다면 한 말씀으로 선인(先人)의 이름이 길이 남게 해주기 바란다 했다. 용개(用漑)는 이 글을 받고서 몸을 일어 절하고서 말하기를 참판은 순수하고 근신하여 법도있고 성실한 군자이니 그 말이 반드시 사(私)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것으로 선공(先公)의 뜻과 행실이 능히 내수(內修)해서 구차(苟且)하지 않겠다는 것을 알겠다. 티끌세상 밖에 소요하여 사람들과 더불어 다투는 일이 없으니 그 개결한 조행이 탐욕하고 완악한 자를 깨우치고 비루한 풍속을 바로 잡기에 넉넉했는데도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홀로 뜻을 지키고 한적한 곳에 홀로 처해서 세상을 잊었다. 하늘이 이같은 분의 뜻을 펴지 못하게 한 것은 그 까닭은 알지 못하겠지만, 그 착한 일을 행한 보응이 참판에게서 나타나고 남은 경사가 끝이 없으니, 몸은 죽었어도 죽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이것으로 명을 짓는다. 명銘에 말하기를 내수(內修,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것)의 맑음이며 효도하고 우애하여 허물이 없도다. 천석泉石과 맹약盟約함이여! 의물의 뜻을 옮기지 못했네. 마음이 세상과 멀었음이여! 몸이 태고의 시대에 살았네. 티끌세상 밖에서 우유함이여! 도를 즐기면서 천수를 마치셨네. 하늘이 착한 자에게 보답함이여! 그 후손을 번영으로 이끌었도다. 문에 차마가 가득함이여! 경사와 복이 끝이 없었네. 덕을 제때에 쓰지 않음이여! 이름을 길이 후세에 전하셨네. 유허(幽墟, 비록 살아서 뜻을 펴지 못하더라도 그 자손이 번영을 누림에 따라서 이름이 세상에 전해지게 됨을 말함)에 기록을 남김이여! 그 공적을 길이 보존하시리라 했다.
(滉이 삼가 생각건대 명문銘文 안에는 둘째 아드님 우의 훈공으로 해서 보조공신 이조참판 진성군으로 추증되었다는 말이 들어있고 비명의 제목은 단지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만으로 되어있다. 이는 대개 송재공이 병인년의 훈맹에 참여하고 비명은 경오년에 만들었기 때문에 실지를 그대로 써 넣은 것이다. 그 뒤에 언론을 맡은 벼슬아치가 정국훈신(靖國勳臣)의 일을 논해서 숙부 송재공도 녹훈되었던 것이 삭제되고 자계(資階)가 내려졌다. 병자년에 숙부가 안동부사가 되어서 치적의 평점이 가장 우수했기 때문에 표리(表裏, 임금이 신하에게 내려주는 옷의 겉감과 안감)를 내려 포장(褒獎)하고 다시 가선대부의 위계를 주게 되었던 것이다. 이 까닭에 진사공께서 또 다시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으니 비명의 제목은 단지 지금의 증직에 근거해서 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목과 글 내용이 서로 다르게 된 것이다. 또 생각건대 공의 집은 실지로 온계에 있었는데 비명에는 도계라고 했다. 이것은 숙부의 생각에 시냇물이 위 아래로 통한다고 해서 도계라는 표현을 쓴 것이 아닐까요) ( 이후 손자인 판중추부사 황의 귀로 인하여 자헌대부 이조판서를 추증 받았다) -----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同知經筵事 弘文館 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成均館事 申用漑 撰 (신용개는 본관이 고령이며 신숙주의 손자이며 호는 이락헌 또는 송계라고 한다. 성종때 문과 급제하여 중종 때 좌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遺事
선생 휘는 계양이요 자는 달보요 호는 노송정이니 본관은 진보이다. 고려 판전의시사 자수의 증손이며 선산부사 정의 아드님이다. 영락갑진(1442년)에 안동 주촌 제택에서 나셨다. 나시면서 체모가 수려하고 범상한 아이들과 달랐으며 어릴 때부터 부사(父師)의 교독(敎督)을 기다림 없이 능히 몸소 향학에 힘써서 경진계유(1453년 단종 지년에 해당됨)년에 택궁(성균관의 별칭)에 들어갔으니 곧 우리 온문대왕(溫文大王, 단종의 시호인바 恭懿溫文純定安莊 累順敦孝大王을 약하여 온문대왕임)이 즉위한 원년이었다. 선생은 이미 하늘이 심어주신 효행으로 전후 부모상을 당하여 여묘(부모의 무덤)에서 삼년을 지냈고 여러 형제들과 살림을 나누는데 자신이 적게 가지고 그 사실을 문권에 기록하지 않았으나 그 돈독한 윤리가 이와 같았다. 그 뒤에 마침 예안의 용두산을 지나시다가 그 지세가 아늑하고 조용하며 물이 맑고 땅이 비옥하니 드디어 황무지를 개간하고 산 아래 온계에 집을 세웠으니 그 해가 바로 삼대신(문종의 유명을 받아 단종 보호의 대임을 맡은 황보인 김종서 정본)을 주살시킨 이듬해이다. 이로부터 다시는 영진榮進할 마음을 끊고 날마다 글을 읽고 자제들을 교훈하는 것으로 일을 삼다가 때로 여가에 낚시도 드리우고 산에서 나물도 캐며 여생을 보내었다. 환갑지낸 5년째인 1488년에 병으로 졸하시니 유명으로 장사 절차에 술객을 부르지 못하게 하셨다. 때는 강정대왕(성종의 시호인데 仁文康靖 憲武聖欽 恭孝大王을 약하여 강정대왕이라 함) 19년 이었는데 그 후 차자인 우의 貴로서 소사마小司馬(참판의 별칭)에 증직되었고 또 손자인 문순공의 귀로 대총재大冢宰(이조판서의 별칭임)에 가증되었다. 아! 선생의 세대가 지금부터 삼백 삼십 여년이 된다. 자신의 세상에 처신한 의리가 후인이 알도록 한 말씀도 남겨놓지 않았으니 후세 사람들이 무엇으로 쫓아 사적을 알겠는가? 오직 옛날의 문자가 남아 있어서 참고하여 짐작할 수가 있다. 문경공 신용개의 묘문에 이르기를 (진실로 옛 일민逸民의 유풍이다)고 하였고 다음에 또 이르기를 (개결한 지조는 족히 완악하고 탐욕한 자를 일으키고 비루한 풍속을 가다듬을 만하다)고 하였고 그 갈명(碣銘)에도 말하기를 (마음이 세상과는 멀었으니 몸이 한가로워서 먼 태고의 갈천(葛天)씨였다)하였으며 문순공이 닦은 유사(遺事)에는 일찍이 과거에 뜻을 꺾고 자연 속에서 뜻을 즐겼다)고 하였고 또 뒤에 (속세를 벗어난 품격이 있다)고 하였다. 문순공의 다섯째 형인 정민공 묘지에 말하기를 조부의 휘는 계양인데 계유년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천성이 고요함을 좋아하여 숨은 절조가 있었다)고 했고 묘도의 세계에는 다만 진사로만 써도 만족했으니 계유라는 연대만을 써서 숨은 지조를 나타냈고 또 정난이후(靖難以後)(단종 지년 계유 1453년에 삼대신을 주살하는데 공을 세운 수양대군 외 36인에게 준 정난공신을 약하여 정난이라고 함) 自靖의「靖」자를 靜자로 쓴 것은 분명히 깊은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또 이 문충공의 항복(본관은 경주 호는 백사白沙이며 선조 임란 시 도승지로 임금을 의주까지 호가한 공으로 호성공신무성부원군에 봉군되고 광해조에 영의정으로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북청 적소에서 절세함)이 찬한 공의 증손인 지현공知縣公의 묘갈에 말하기를 (진사 계양은 숨은 덕망이 있어 벼슬하지 않았으니 고사전高士傳보다 뛰어났다)라고 하였으니 그 말에는 자세한 뜻이 포함되어 있으나 사실을 밝히지 않았음은 당시의 사정으로 그런 것이니 어찌 감히 분명하게 밝혀서 현저하게 할 수 있겠느냐. 용두산의 서쪽 등 온계에서 수 백보 떨어진 곳에 국망봉 이라고 불러오는 산이 있다. 이 산봉은 소백산의 꼭대기가 서울을 멀리 바라볼 수 있을 정도가 아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그 이름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의심스러웠는데 옛 노인들이 서로 전해오는 말을 듣건대 선생은 정축년 동뢰일(冬雷日, (1457년) 즉 단종이 승하 하던 날 동뢰는 동지)을 맞이하여 절을 하셨다고 하여 그 봉 이름이 국망봉으로 불러지게 되었다고 한다. 아! 이는 선생이 고심하신 바이었고 선생께서 진사에 등제登第할 때에 어계漁溪 정절공 조려趙旅(본관은 성안 , 단종 원년 계유에 진사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인데 정조 5년 1781년 십세손 중회가 소장을 올려 본말을 밝혀서 이조판서에 증직됨 시호 정절貞節)와 동방同榜이었는데 어계공은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 할 때에 마침 성균관에 있다가 모든 학생(생원 진사를 말함)들과 향리로 돌아가서 세상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행적이 세상에 알려졌으나 선생은 고향에 계시다가 자취를 숨겼으니 그 행적이 드러나지 않았다. 비록 세상에 드러나거나 않거나 그 마음은 꼭 같은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지금은 장릉(莊陵, 단종대왕의 능호를 말함)이 이미 복위가 되었고 당시의 육신들도 모두 추앙되는 터이고 어계공도 역명(易名, 시호를 내리는 일)의 은전을 받았다. 그러나 선생의 충성심은 끝내 숨겨졌으나 비록 조야에 큰소리로 말하는 것을 어찌 감히 못하겠느냐? 또한 신공(신문정공 용개를 말함)이 선생이 자제를 가르치는 방법을 엮은 것을 상고하니 거기 말하기를 (경사經史를 가르치실 때 반드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어떤 때에 임하고 어떤 일을 당하면 어떻게 처신 하겠는가 라고 하시고 매양 정당한 사리를 강구 하고야 말았다)고 하니 이러한 말씀은 스스로 대의를 지키고 삼강오륜을 담항擔夯하지 않은 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니 그 얼마나 위대하였던가. 선생은 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자제 송재공은 문장과 재구(材具)로서 정릉(靖陵, 중종 때의 능호)때 현달하셨고 손자인 정민공(온계공의 시호임)은 학행과 곧은 지조로 강릉(康陵, 명종의 능호)때 현달하였고 문순공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의 정주( 정호(程顥), 정이(程이)와 주희가 이룩한 성리학)의 정통을 이어 받아 집대성 하였으니 옛사람이 이르기를 (근원이 깊은 물은 멀리 흘러 내린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덕망은 이러한 보답을 받을 만하다. 신공의 기술한 바에도(또한 다른 전할만한 언행이 있지만 이미 대절이 이와 같으니 그 나머지의 언행은 말해도 좋고 말하지 않아도 또한 좋다)고 하였으니 어찌 수다스럽게 말할것이 있겠느냐 시질(是瓆)의 선비(先妣)는 문순공의 후예인지라 이제 여러 후손들의 말씀에는 도징사(陶徵士) 맹부군(孟府君)의 감회가 있음으로 삼가 옛 일민(逸民)의 대절(大節)을 밝혀서 증판서 노송정 이선생의 유사를 쓰노라 -------外裔孫 朝奉大夫前行童蒙敎官 金是瓆 謹撰 (金是瓆 本貫 光山 號 一一齋 官童蒙敎官 雪月堂 金富倫 後孫)
遺事甫
야순은 일찍이 문순공이 지은 금강정시(錦江亭詩)를 읽었는데 시에 (산이 찢어질 듯 두견새 울음소리 언제나 그칠 건가 물 이름 또한 촉나라와 같은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로세)(鵑啼山裂豈窮年 蜀水名同非偶然)이 두 귀절 열 넉자이다. 뜻이 깊어 평범한 것 같기도 하고 감회를 깃들인 것 같기도 하여 갑자기 뜻을 찾아내어 지적하기는 쉽지 않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함부로 선생의 문법은 소인(墨客)들이 경박하게 속뜻을 드러내지 않음이 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랬더니 판서공의 사적을 보고 두견새가 슬피 우는 산, 달 밝은 밤에 처신함이 심상한 것도 같고 고고한 것도 같았으나 후인들이 칭송하지 않음으로 알게 된 뒤에야 비로소 선생의 시 뜻을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가정의 풍절이 바탕을 둔 것이고 우연히 읊어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판서공의 휘는 계양이며 단묘계유(端廟癸酉)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조금 뒤에 봉화현 훈도가 되셨다. 을해乙亥(1455년)에 단종대왕이 선위하시고 영월로 가시게 되니 공이 이때 훈도직을 버리고 처자를 거느리고 깊은 온계로 들어가서 용두산 밑 땅을 개간하고 국망봉의 동쪽에 집을 짓고 살면서 다시는 과거에 응하거나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문 밖에 만년송 한 그루를 심어놓고 노송정이란 현판을 걸고는 날마다 산책도 하고 때로는 시도 읊으면서 스스로 고상함을 표방하지 아니하고 농부와 낚시꾼과도 어울려서 한가롭게 세상을 마치셨다. 유명으로 다만 진사라고만 쓰게 하였으니 실은 문순공에게 조부가 되신다. 경태계병(景泰癸丙, 계병은 계유병자 년간인데 단종이 왕위에서 승하가지 단종 원년에서 세조 2년 까지를 말함) 년간을 당하여 충절을 지키고 의절한 충신으로서는 사육신과 생육신이 있다. 그러나 공은 다만 한 상사(上舍, 생원 또는 진사)였고 일개 현의 학관(學官)이었으니 죽을 만한 지위는 본래 아니었고 살았어도 하늘에 대해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산 높고 물 맑은 곳에 몸과 마음을 의탁하고 때로는 산을 바라보고 혹은 전원을 돌보면서 평범한 것 같게도 고고한 것 같게도 처신했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공은 일찍부터 향학에 힘써 진사에 등제할 때에는 겨우 서른인데 만일 뜻을 세상일에 두었더라면 얼마든지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공은 그러지 않고 궁곤 속에서 편안함을 얻고 고요한 산속에서 유유자적하여 원망도 않고 후회 하지도 않았다. 한 고을의 훈도의 직함도 오히려 혐섭하게 생각하고 다만 계유년의 진사만을 내세운 것은 당시에 그 자취를 숨기려는 것만이 아니라 후세에도 이름을 숨기려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다만 항간의 이름 없는 선비거나 냇가의 일개산인(一個散人)으로 보도록 하여 그 마음가짐에 대하여 여지가 없게 한 것 이었으니 이것은 다름 아니라 오직 안으로는 마음속에 지닌 지조가 확고부동하고 밖으로는 춘추의 의리보다 엄하다. 나라를 위한 의리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문순공이 공의 행록에서 단지 말하기를 (일찍이 과거에 뜻을 버리고 임천(林泉)에서 뜻을 즐겼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고요하고 한가로웠으며 영리에 힘쓰지 아니하고 들에서 농사짓고 물가에서 고기 낚는 것으로 유일한 낙을 삼고 여생을 마치려는 뜻을 두었다)고 하였다. 다만 이뿐이겠는가 만은 밝혀 말하지 않는 것은 당시의 형편으로 부득이한 것이었다. 다만 문경공 신용개가 묘갈에서 말하기를 (실로 옛날 숨어 사는 백성이 다 아는 자가 드물었다. 홀로 지킨 절조는 족히 완악한 세상을 깨우쳐 일으키고 비루한 풍속을 바로 잡을 만 했다)고 하였다. 깊이 생각건대 이것은 하나의 실마리만 비친 것이나 후세 사람들로서 식견이 있는 자 에게는 보이고자 한 것 이었으니 그 지조는 독실하였고 그 뜻은 애써 가다듬었고 고고한 가운데 처신하였고 말없이 침묵한 가운데 스스로 편안하였고 숨는 가운데 빛이 났고 의연한 가운데 우주를 지탱하는 동량의 힘이 있었던 것이다. 아! 절의 지켜 죽은 충신 여섯 분과 산 충신 여섯 분이지만 죽은 분은 죽음으로써 평소의 뜻을 다 하였지만, 산분은 살아서 그 뜻을 완수함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지조를 지키기 위하여 혹은 더러운 곳에도 들어가고 혹은 노예의 무리에 섞이기도 하고 혹은 눈 어둡고 귀머거리로 행세하기도 하나 오히려 그 자취가 세상에 드러났으며 그 일도 또한 속임수였다. 그러나 오직 공은 농사지어 스스로의 힘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때로는 낚시 대를 메고 자연에 소요하면서 근심하는 듯 즐기는 듯 생각이 있는 듯 생각이 없는듯하여 중용을 지켜 치우치지 않고 평범하면서도 바꾸지 아니하였다. 이렇게 30여 년 동안이나 남이 알지 못하게 남이 칭송하지 않게 숨겼으니 어려운 중에서도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국망봉은 집에서 서쪽으로 百弓(一弓은 八尺)사이에 있는데 공은 봉 위에 단을 모셔놓고 매년 10월 24일이 되면 문득 여기에 올라가서 북쪽 금강천지(錦江天地)를 바라보고 절을 하셨다. 국망봉(國望峰)의 이름은 실로 공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것이다. 집안사람들이나 늙은이들은 다만 거기에 올라가서 구경만 할 따름인 것으로 알았다. 뜰 한편에 한 그루의 소나무는 도정절(陶靖節, 도연명의 시호가 정절임)의 반환(盤桓, 떠나지 못하고 그 기를 자방이는 것)하는 뜻을 담고 있고 또 공자의 세한(歲寒)의 의(義)를(歲寒然後知松栢) 상징하였으니 묵묵히 그 높은 지조와 그윽한 향기를 거슬러 생각한다면 가위 천고에 짝이 없고 비슷한 일이 드물다. 문순공이 말하되 (공의 얼굴은 흰 옥설과 같아서 티끌세상을 벗어난 풍모가 있었다)고 하였다. 안으로 마음가짐이 뢰락(磊洛)하기 저와 같다고 말 할 수 있으니 밖에 나타난 훌륭한 풍채가 또 어찌 씻은 듯이 깨끗하고 속되지 않고 광채가 빛나서 사람들이 우러러 보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실마리를 크게 열어 대동(大東)에 유학의 표준이 되는 정종(正宗)을 나게 하였으니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또는 정민공 해의 을사년 명절과, 동암공 영도의 광해군 혼조에 지조를 세운 일과, 귀암공 홍중(훈도공 하河의 현손이며 진사, 호 지간 諱 종도의 손자로 임란에 약관 부진함)의 한주척배(漢舟擲盃)(광해조에 과거길로 입경도중 한강변에서 당시 권신가의 척당(戚當)이던 이강(李茳)을 만나니 그의 말이 자기에게 동조하면 급제는 물론 일악세도(一握勢道)란 말을 듣고 들었던 술잔을 한강에 던지고 고향에 돌아와 벼슬에 뜻을 끊고 노론연의(魯論衍義)를 저술함)와, 난은공 동표(송재공의 육대손이며 숙종 3년 (1677년) 정사(丁巳)에 문과급제관지이조참의증이조판서(文科及第官至吏曹參議贈吏曹判書)이며 시호는 충간공이다)의 기사당의(己巳讜議)(숙종 15년 1689년)기사에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희빈장씨를 왕후로 맞이하였는데 그 때 공은 폐위를 반대하여 상소를 올렸음을 말함)는 그 유래한 바를 미루어 본다면, 어찌 세상에 드러나지 않겠는가? 훌륭하고 아름답도다 남기신 지조의 영향이 인기(人紀)를 도왔고 국가를 이롭게 한 것은, 더욱 멀고 더욱 무궁하니 어찌 우리 진성이씨 문중의 사적인 영광뿐이겠는가. 생각건대 숙종이전(숙종 18년 1691년) 신미에 사육신관직이 추증되고 단종의 복위가 이루어져 단종을 위한 정절이 포상됨)은 단종대왕을 위한 절의에 대한 일은 말할수도 없고 칭송할 수도 없었으나, 그 이후로는 충절을 다 드러내 포상했고 또한 말 할 수도 있었으나 공의 행적에 있어서는 조정에 알리지 않은 것은 가정의 유계(遺戒)에 인한 것으로서 나라의 은전을 받는 것이 혐의스러워서나 힘써 정중함을 지녀서 그런것도 아니었다. 특히 민몰(泯沒, 형적이 아주 없어지는 것)되어 알려지지 않은 것은 결국은 그 진리가 반드시 스스로 나타난다. 그러나 드디어 이삼백년이 지났으니 그 사적이 묻혀버린것도 또한 오랜 세월이 지났다. 돌이켜 보건대 그 아름다움이 있어도 권하지 못한 것은 오늘날 후생들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근세 선대왕이 특히 장릉(莊陵)에 단을 모으고 향사를 치는 의식을 베풀었으나 유독 공의 사적만 묻혀 버렸음은 실로 개탄할 일이며 생육신과 같은 절의의 혜택을 받지 못함은 깊이 숨은 슬픔이었다. 삼가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말을 듣고 이상과 같이 그 대개를 기록하여 묘당에 앉아 국왕을 보필하고 세상에 숨은 사적을 발휘(發徽)하고 천명하는 권한을 가진 자에게 옛 태사씨太史氏의 예와 같이 사적을 캐 내어 나라에 상달하여 밖에 드러내고 빛나게 할 것을 바라노라. 그렇지도 못하다면 우리들 중에 정의를 사랑하는 선비가 상소하여 숨은 행적을 드러낸다면 또한 다행한 일이겠다.. 어떤이는 공은 이미 자취를 숨겼고 마음을 숨겨 스스로 세상에 나타내고자 아니했으니 오히려 사적을 드러내어 포숭하는것은 공의 뜻을 어기는것이 아니냐고 하는 이도 있다. 무릇 옛날 생민으로 절의를 지주(砥柱)처럼 굳게 지킨자가 스스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고자 하였으랴 하물며 소위 생육신은 열조에서 차례로 다 가장(嘉獎)하여 천고에 빛나는 심사가 일조에 밝혀졌으니 어찌 평소의 몸가짐에 해로울것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유광잠덕(幽光潛德)을 천발하는 일이 세상에 어찌 있겠으며 또 누구가 유풍을 듣고 따르겠는가. 야순(野淳)은 잔렬(孱劣)하여 다만 감개무량한 생각만을 품고 아름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드러내지않고 묻어두는 죄에 빠질것을 두려워하여 다만 문순공의 금강정시를 인용해서 공의 숨은 절조와 의리를 발휘할 것을 기약하니 이 글을 보는자는 용연(聳然)히 일어나고 犂然히 감탄하리라.----11代孫 野淳 謹撰 (號 : 廣瀨. 退陶夫子九代孫 純祖時 以薦儒林爲主簿)
국망봉비명國望峰碑銘
선성宣城의 국망봉은 증판서贈判書 이공의 숨은 절조로 인하여 얻어진 이름이다. 공의 휘는 계양繼陽이요 字는 달보達甫이니 진성인이다. 고려 말 공신인 송안군松安君 諱 자수子脩의 증손으로 영락 甲辰年에 나서 단종 계유년에 진사로서 삼상신三相臣(세 정승인데 김종서 황보인 정분)이 희생되자 이 峰 아래 온계촌에 들어와 숨었다. 乙亥年 단종이 선위한 뒤 훈도직을 그만두고 뜰 앞에 노송 한 그루를 심어놓고 해마다 10월 24일 단종이 승하한 날에는 이 봉에 올라가서 망배望拜하였다. 봉우리는 심히 높지 않고 북쪽 영월과의 거리가 수 백리나 되나 첩첩이 쌓인 산 봉오리는 눈으로 맞이하면 공손히 엎드렸고 신선이 탄 흰말은 지척에서 뵈옵는듯하니 실로 천작이어서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국왕을 생각함은 내 사사로운 슬픔이 있고 영월을 바라봄도 내 사사로운 억울한 심정을 펴 보려함이었다. 소리를 삼키고 울음을 되씹으며 억울한 슬픔을 참고 숨어 지냈으니 세상 사람들이 칭송하는 生六臣과 약속한 일도 아닌데 그 마음은 꼭 같았다. 퇴도 문순공은 친손이신데 행적을 서술하길 (고요히 숨은 절조가 있었도다)고 하였고 문경공 신용개가 지은 비명碑銘에는 (탐욕하고 완악함을 깨우쳐 일으키고 저속한 풍속을 가다듬게 감회시켰으니 이는 곧 고대의 일민逸民의 유풍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진실로 그 시의時義에서 인용하였으나 드러내지 않았으니 일민이란 곧 공자가 이른바 백이 숙제를 지적함이니 그 미덕을 찬양함이 다시 더 할 수 없는 말이다. 오직 추증된 것은 친손 퇴계의 貴로 인한 것이고 실덕實德으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 뒤에 천거하여 국론에 호소하고자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단 한번 스스로 사를 모으고 제사한 후에는 폐하였다. 주손冑孫 만임씨가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이 봉우리에 단을 모으고 돌에 새기어 추모하니 영월에 별단 배견루拜鵑樓가 있는 것과 그 의의는 같다. 저들이 한 밤중에 도적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인하여 깨끗이 쓸고 다시 새로이 표시하여 드러냄을 어찌 아니할 것인가. 때는 정미(1907년)년 봄 3월 두견새 우는 밤이다. 명하여 가로되 흘러서 움직이는 것은 음과 양의 이기二氣이고 바뀔 수 없는 것은 삼강三綱이로다. 우뚝한 외로운 봉우리가 우주의 기둥과 들보가 되었도다.----十三代孫 前承旨 晩燾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