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토욕혼)까지 정벌한 광개토태왕
다물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광개토태왕의 정벌루트를 추적한다
광개토왕은 영락(永樂) 8년에 백신(帛愼 : 연해주 방면 숙신 지칭)과 토욕(土谷 : 감숙성, 청해성 방면 토욕혼 지칭)을 정벌하였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은 광개토태왕비문 기록내용이 증명한다. 기존 사학계와 역사스폐셜 방송에서는 광개토태왕의 토욕혼 정벌을 잘 다루지 않는 것 같다. 토욕혼은 지나북부의 강자로 흥기하고 있던 북위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 광개토태왕이 정벌하여 복속한 영역
광개토태왕비문의 기록을 보자!「8년은 무술년이었다. 정예부대를 백신(숙신)과 토욕에 보내어 동정을 살피고 막구라성과 가태라곡을 쉽게 차지하여 그 곳의 남녀 300여명을 포로로 잡아 왔다. 그들은 이 때부터 조공을 바쳐 오게 되었다. 八年戊戌 敎遣偏師觀帛愼土谷 因便抄得 莫0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口事」 廣開土王碑文 永樂八年條
백신과 토욕의 정확한 위치는 사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으나, 백신은 숙신을 지칭한 것이다. 숙신은 고구려 서천태왕 11년(A.D 280년) 10월에 고구려의 변경을 침범하였다가 달가의 역습을 받아 추장이 죽고 단로성이 점령당하여 6-7개소의 부락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그 후 영락 8년(A.D 398년)에 고구려가 정벌한 백신은 동부여의 동쪽인 연해주 방면이다.
그리고 토욕(土谷)은 [위서(魏書) 토욕혼전(吐谷渾傳)]에 나오는 토욕혼(吐谷渾)을 지칭한 것이다. 이 토욕혼은 선비족 모용외의 일파였는데, A.D 4세기 초에 시조 토욕혼이 이복동생인 모용외와 사이가 벌어져서 모용외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서쪽으로 이동하였는데, 광개토태왕이 토욕혼을 정벌한 A.D 398년경에는 북위의 서쪽인 감숙성, 청해성 방면인 티벳지역에 있었다.
국내성에 티벳까지 정벌이 가능한 일인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몽골초원에서 유럽까지 정벌에 나섰던 징기즈칸만 보아도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고구려는 기마국가다. 그것도 화살도 쉽게 뚫지 못하는 찰갑으로 무장하고 당시 최고의 명마라는 고구려의 말을 타고 달리던 기마국가였던 것이다. 몽골의 말은 하루에 500km를 달렸다고 한다. 모본태왕 때 한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고구려는 어양-북평-태원에 이르는 원거리를 단번에 달려 반격을 가하기도 했다.
광개토태왕이 북위의 서쪽에 있는 토욕혼을 정벌한 것은 북위가 후연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 수도를 성락(盛樂 : 내몽고 呼和浩特 부근)에서 평성(平城 : 산서성 대동)으로 옮기고, 후연의 유주를 압박하자, 북위의 배후에 있는 토욕혼을 정벌하여 북위를 포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고, 백신을 정벌한 것은 동부여의 배후에 있는 숙신을 정벌하여 동부여를 포위.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광개토태왕은 토욕혼을 정벌한 그 해에 북위 수도에 고구려 기술자 40여만명을 정착시켰다. 이는 지나 북부지역을 고구려가 완전히 복속했다는 반증이다.
우리 민족사에서 정복군주로 상징되는 광개토태왕은 태왕직위 20년 동안 왜 그렇게 정복사업에 몰두했을까? 그것은 단군조선의 옛영토를 모두 회복하겠다는 고구려의 개국성조 고추모의 다물정신의 실현에 있었고, 모용선비족(전연)에게 미천왕의 시신이 도굴당하고 왕후와 태후가 인질로 끌려 갈 정도로 비참하게 고구려가 유린당하고 결국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자신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수모를 되갚고 다시는 그러한 비참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강한 고구려를 건설하기 위함이였다.
▢ 광개토태왕의 정벌(征伐) 과정
광개토태왕의 주변국 정벌순서는 아주 정교한 수순으로 진행되었다. 만약 이러한 수순에 의하지 아니하고 정복활동을 벌였더라면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은 틀림없이 성공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고구려는 백제와 후연 등 주변국의 합공(合攻)을 받아 멸망하였을 것이다. 광개토태왕의 정벌순서를 정리해 본다.
광개토왕은 고구려 주변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인 백제와 후연 중 먼저 백제를 정벌하였고, 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후연과 백제를 적대관계로 만들고 후연과 고구려를 우호관계로 만들었다.
그 다음 A.D 392년 정월에 백제의 동쪽에 있는 신라를 복속시켜 백제를 북쪽과 동쪽 양 방면에서 포위하였다. 같은해 7월 백제를 공격하여 한수(漢水) 이북 10여성을 빼앗았다. 같은해 9월 훗날 후연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후연의 북쪽에 있는 거란을 정벌하였고, 그뒤 A.D 395년에 다시 거란을 정벌하였다. 같은해 10월 관미성을 함락시키고 온조백제의 아신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A.D 396년에 수군(水軍)을 금강하류 방면에 상륙시켜 구태백제를 괴멸시키고 이어서 보기병이 한강을 건너 온조백제를 항복 받았다. 당시 부여왕이 한반도지역으로 이주하여 개국한 구태세력의 백제는 서울 한강지역의 백제세력와 웅진의 백제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서울지역 백제는 고구려 방어에 목적이 있었고 웅진의 백제는 마한과 가야, 그리고 일본열도를 통제관리하는데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광개토태왕이 수군을 동원하여 한성백제와 웅진백제를 동시에 정벌한 것이다.
A.D 398년에는 북위가 후연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유주(幽州) 방면으로 동남진하자 정예 기마군대를 북위의 서쪽에 있는 토욕(土谷 : 토욕혼)에 보내어 토욕혼을 정벌하므로써 북위를 동쪽(고구려.후연)과 서쪽(토욕혼) 양 방면에서 포위하였고, 또 군사를 동부여의 동쪽에 있는 백신에도 보내어 백신(숙신)을 정벌하여 동부여를 동쪽(숙신)과 남쪽(고구려) 양 방면에서 포위하였다.
A.D 399년에는 백제가 응신조(應神朝) 왜(倭:보통 일본인들로 이해하고 있는 '왜'는 태양을 의미하는 '해'에서 온 말로 본래 한반도 서남해지역과 일본열도의 해양세력을 의미한다. 바다을 의미하는 한자음도 '해'다. 아마도 서남해지역이 바다가 되기 전의 마고문명에 대한 기억과 전승에서 나온 어원이 아닌가 싶다. 한반도3한시대에는 3한의 남쪽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후한서-한전'에서 기록하고 있다)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자 A.D 400년에 이를 물리치고 왜(倭)를 정벌한 다음 해상교통의 요지인 대마도에 임나연정(任那聯政)을 설치하여 신라, 백제, 왜를 통제하였다. 임나일본부는 당시 왜가 고구려의 임나연정에 정사를 보고하기 위해 머물도록 설치한 관청이다.
A.D 400년에는 후연을 사방으로 고립시키기 위하여 유성(柳城)에서 북평(北平) 사이 백제군(百濟郡) 장군들과 후연의 유주자사 진(鎭)과 태수들을 귀복시켜 요서지방과 유주를 고구려가 차지함으로써 고구려는 후연을 동(고구려), 서(유주), 남(유성에서 북평 사이 전 백제군), 북(거란) 사방에서 포위하였다.
A.D 402년에는 북진(北鎭)에서 단단대령 사이 후연 지역을 빼앗아 후연을 더욱 고립시켰고, A.D 407년에는 사방에서 후연을 공격하여 후연을 괴멸시키고 고구려계인 고운(高雲)이 왕이 된 북연(北燕)을 친고구려 국가로 만들었다.
A.D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함으로써 만주, 한반도, 대마도, 일본열도(왜) 정벌을 마무리 했다.
이로써 광개토태왕은 티벳에서 지나대륙 동북부 지역과 한반도에서 일본열도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넘 보지 못한 강성대국 고구려를 건설한 것이다.
▢ 복속지역에 대한 광개토태왕의 통치 방식
땅 따먹기는 쉬울 수 있어도 뿌리깊은 사상과 제도에 익숙한 습성때문에 정벌한 땅에 사는 사람들을 고구려인들로 만드는데는 상당한 세월이 걸릴 수 밖에 없다. 20여년간의 정복을 통하여 복속된 지역에 대하여 직접 통치방식은 저항을 불러 올 수 있고 진압할 수 없게 되면 결국 멸망으로 갈 수도 있는 길이다. 예의와 법도를 상실한 도적과 양아치같은 국가들은 정벌하고 응징하는 대신에 약한 나라들은 도우면서 더불어 사는 연방국가시스템이야 말로 가장 합당한 통치방식이다. 광개토태왕은 홍익인간이념을 정치의 가치관으로 삼았던 천제국 환국과 배달국과 단군조선과 부여를 계승한 고구려가 대륙과 바다를 통하여 아시아의 정치.경제의 중심이 되어 주변국가들이 모두 교류하고 협력하여 사는 네트워크 시스템을 건설하는 일이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광개토태왕이 정복한 후 피정복국에 취한 정책은 조금씩 달랐다고 볼 수 있다.
가야와 백제세력인 왜의 연합군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할 상황에서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구원해 준 신라는 광개토태왕비문의 기록대로 신하국으로서 복속을 맹세받은 후 신라 체제를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따라서 신라는 고구려를 100여년간 종주국으로 섬긴 점만 제외하고는 전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고구려는 신라에 군대를 주둔시켰지만 오히려 신라에게 정치.군사적 지원과 도움을 주었다. 충주지역에서 종원고구려비를 세운 장수태왕도 비문을 통하여 신라는 고구려의 형제국이라고 표기한 배경이 그것이다.
요서와 지나대륙 동해안 지역의 백제군 장군들과 전에 후연의 유주자사 진(鎭)과 13군 태수들은 종전의 직위를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이 방식은 복속을 쉽게 받아낼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고구려의 힘이 약해졌을 때 이들이 쉽게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이탈할 수 있는 단점이 있다. 백제와 고구려가 요서와 지나대륙 동해안 지방을 번갈아 가며 영유한 것도 요서와 지나대륙 동해안 지방에 있는 백제장군들이 백제와 고구려에 번갈아 가면서 복속하였기 때문이다.
군사를 보내어 정복한 후 피정복국으로부터 복속을 맹세받고 인질을 받아 오거나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 왔다. 부여의 정통성을 내세우면서 고구려에 가장 적대적이였던 백제와 그 후국(侯國)인 응신조(應神朝) 왜(倭)는 군사를 보내어 정벌하였다. 광개토태왕은 신라, 백제, 가야, 왜를 복속시킨 다음 해상교통의 요지인 대마도에 10국으로 구성된 연립정부인 임나연정(任那聯政)을 설치하여 수군을 두고 백제, 왜, 신라, 가야를 통제하였다. 임나연정의 백제 통제는 실패하였다. 백제는 A.D 404년에 왜(倭)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대방(帶方界 황해도)지역를 공격하는 등 곧 임나연정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임나연정의 왜(倭) 통제나 백제와 왜 사이 해상통로 통제는 대체로 성공하였다. 왜(倭)는 A.D 404년에 백제와 같이 고구려의 대방지역를 공격하는 등 일시 임나연정의 통제를 벗어났으나 곧 임나연정의 통제를 받았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 후 웅략천황(雄略天皇) 때 대화왜(大和倭)는 임나연정의 요구에 따라 임나(대마도)에 신(臣) 또는 장군들을 보내었고, 대마도에 파견된 일본부(日本府) 장군들은 고구려 임나연정의 지시를 받았다. 이것이 한국과 일본 사학계의 논쟁거리였던 임나일본부설의 실체다. 서로가 임나의 개념을 모르니 소모적인 논쟁만 한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임나가 고구려.백제.가야 3나라가 분할된 대마도이며 고구려가 대마도에 임나연정을 설치했다고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 임나연정의 신라 통제는 초기에는 성공하였으나 후에는 실패하였다. 신라는 초기에 미사흔(未斯欣)을 임나연정에,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각 인질로 보내고 임나연정과 고구려에 복속하였으나, A.D 418년에 인질(人質)로 가 있던 복호(卜好)를 고구려로부터 돌려받고, 같은 해 가을 임나연정에 인질로 가 있던 미사흔(未斯欣))을 몰래 빼내 온 후부터 고구려와 임나연정의 통제를 벗어났다.
광개토태왕 사후 몇 년이 지나지 않은 A.D 416년에 지나대륙 동해안 지방의 백제 장군들이 도로 백제에 복귀함으로써 고구려가 지나대륙 동해안 지방을 상실한 것과 A.D 418년에 신라가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것 등은 장수태왕의 통치술에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무튼 고구려는 광개토태왕에서 아들 장수태왕 손자 문자태왕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초원지역과 지나대륙 동남부지역과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열도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두었으니 고구려 최대의 전성기였다.
문자태왕은 백제로부터 빼앗은 양자강 지역 이남 천주(홍콩)지역에 신라인들을 대거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 이는 지나대륙이나 한반도지역에서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군사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부여의 정통성을 놓고 백제와 싸워야 하는 고구려서는 신라를 최대한 활용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홍콩지역에 신라지명들이 많은 것을 두고 신라가 지나대륙에서 개국했네하는 소위, 대륙사관론자들이 있는데 그것은 문자태왕이 신라인들을 이주시켜 알맹이로 삼았다는 [환단고기]기록을 보지 않았거나 한글 그대로 이해하지 않아서이다. 신라는 지나대륙에서 개국한 나라가 아니다.
부여에서 내려온 박혁거세 세력이 진조선유민세력을 모아 경상도 지역에서 개국한 사로국을 4세기 고구려와의 전쟁과정에서 이탈하여 동해안을 타고 들어온 모용선비족(성골=왕족=성씨를 김씨로 바꾸었다)와 한나라이후 지나대륙에서 망한 흉노계 신나라 세력(김알지세력=귀족=진골)이 연합하여 만든 나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