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屈松(굴송-굽은 소나무)
屈松은 필자의 雅號입니다. 필자의 삶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의 여동생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형제는 위로 오빠가
2명 남 동생이 2 명이었는데 여기 소개하는 친구는 바로
위의 오빠였다
아내의 오빠
이 친구는 오창범과 조남재와 같은 교회에 다니던 친구였고 대광 친구는 아니었다.
이명홍이도 같이 어울려 다녔다. 지금도 이 세 친구는 소식을 주고 받고 있다고 한다..
친구의 여동생은 당시 배화여중 학생이었다.
친구 집에 드나들다 보니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 녀가 중학교 시절에 자궁암으로 오래 동안 고생하시다가 49세에 별세하셨다. 당시 묘비에 필자가 “인자하신 어머니 황국신 이곳 고이 잠드시다”라고 새기기도 했다.
그 녀는 졸업 후 명동에 있던 공인회계사 사무실에 근무했는데 이때부터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게 되었다.
필자의 등록금도 몇 번 마련해주었고 혼자 생활하는 동안 물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졸업반 때 급성 간염에 걸려 고생할 때 그녀가 많은 수고를 했다.
고등학교 졸업 때 신학교를 가라고 했던 형님은 대학 졸업 반 때 다시 필자에게 신학교에 들어가 목회 길을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재차 이야기했다.
그래서 사귀던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녀는 장로 아내는 몰라도 자신은 목회자의 아내가 될 자격도
없고 감당하기도 어렵다면서 결혼을 못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신학교 가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1963년에 입학하여 1971년에 졸업을 했으니 입학 한지 8년 만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 동안 매우 어렵고 힘들었다.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려고도 했다.
졸업사진
앞 줄 좌측부터 작은 형수. 조카. 조카(손형식 목사 아내)큰 형수.
뒷 줄 좌로부터 큰 조카. 손형식. 필자의 약혼녀.필자의 어머니. 작은 형
입학 동기와 함께
그러다 보니 내가 고려대학교를 나왔다고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샌디에고에서 목회할 때 나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어느 교회 목사는 내가 고대 졸업했다는 사실을 의심하여
여기 저기 확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에 이민 와서 목회하는 목사들 중에는 햑력을 속이는 목사들이 많았다.
마침
1985년에 발간한 교우회 명부가 있어서 이것을 카피하여 보여 주기도하고 졸업식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고대 교우 총동창회 명부의 색인부(64회)
졸업하기 직전 10년 동안 알고 지내며 교제하던 지금의 아내와 드디어 결혼 하게 되었다.
1970년 12월 5일 영락교회 한기원 부목사(후에 동신교회 담임)의 주례로 약혼식을
했다.
약혼 사진
졸업하는 해인 1971년 3월 25일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목사 주례로 결혼식을
했다.
친구들과 함께
앞 줄 좌측 첫번째 조남재, 우측 두번째 오창범아내. 뒷줄 우측 오창범 이명홍
결혼 식 때 김두완 선생님의 사모님이 축가를 불러주셨다.
그리고 신혼 부부를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는 풍습 있었던 반살기를 김두완 선생님이 해주셨다.
[‘반살기‘ 또는 ‘반살미’(갓 혼인한 신랑이나 신부를 일갓 집에서 처음으로 초대하는 일)’의 방언(평안북도)](국어 사전).
신혼 여행 때 카메라를 친구에게 빌려서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인화하려고 사진관에 필름을 가져갔더니 필름이
까맣게 되어 신혼 여행 때의 사진이 한 장도 없다.
신혼 여행 때 지나가던 어느 고마운 분이 찍어 보내 준 사진이 한 장 있을 뿐이다.
유일한 신혼 여행 사진
이문동 외국어 대학 정문 앞쪽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1972년 7월 12일 첫 아들을 낳았다.
백일 사진
생후 19일만의 첫 외출 오창범 집에 세 친구의 들이 첫 아기들을 데리고 모였다.
좌측 명홍 부부 중앙 필자부부 오창범 부부
생후 며칠이 되지 않은 때 대홍수로 청량천이 범람하여 살던 집이 침수되어 방에 있던 장롱 중간까지 물이
찼었다.이문동 일대가
거의 다 침수되었다.
근처에 큰 조금 높은 지역에 형님이 살고 있어서 똥이 둥둥 떠다니는 물에 해엄을 쳐서
가기도하였다.
그때 며칠 동안 다락에서 생 고구마로 식사를 대신했다.
이 때 생전 처음으로 이재민이 되어 구호품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 필자는 국립보건연구원 약품부 분석
3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1985년 발간된 고대 총동창회 교우회 앨범의 내용임
신혼 초 어느 날 대구 피난 시절 대구 평북 교회에 함께 다니던 정상웅이란 친구가 찾아왔다. 필자가 대구 경상 중학교 재학 시 이 친구는
대구 경북 중학교에 다녔다. 경북 중학교는 당시 서울 경기 중학교라고 했다.
교모에 하얀 세 줄, 소매에 끝에 하얀 줄 셋이 있는 교복은 그 당시 모든 학생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앞 줄 가운데 친구
대구 평북교회 시절
아기를 낳아야 하는데 아기가 위험하여 병원에 가야 한다고 하면서 돈을 좀 빌려 달라고 했다.
그래서 아내와 의논하여 많이는 도와주지 못했지만 병원비 정도 도움을 주었다.
후에 그는 필자가 자기 아내와 딸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면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그 친구는 구두 밑창을 만드는 일을 했는데 후에 크게 성공하여 회사를 차릴 정도가 되었다.
어느 날 우리 부부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정능 골짜기로 데리고 갔다.
그때 아주 큰 대야에 갈비를 가득 준비해가지고 와서 생전 처음으로 구운 갈비를 실컷 먹었다.
필자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 친구가 공항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다 되었는데 친구가 나타나지 않았다. 안으로 막 들어가려 하는데 친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러면서 아침에 화문석을 선물하기 위해 강화도에 갔다가 늦었다는 것이다.
2015년 아내의 칠순 기념으로 모국 방문 시 만나 하루를 함께 보냈다.
필자의 누님을 만났으면 좋겠다 하여 공주 원로원에서 은퇴 후 여생을 보내고 있는
둘째 누님과 매부(목사)를 방문하였다.
좌측 첫번째 둘째 누님 좌측 두번째 친구 부부 우측 첫번째 매부(오석희목사)
(회고록)(12)<내 평생에 가는
길> ’국립보건 연구원’(공무원)근무
첫댓글 이대로 그냥 인쇄하면 바로 자서전이 발간되는거로구나...
지금은 이목 독자들이 긴 글을 잘 보지 않는 것 같아
생각나는 것들만 대충 기록하고 있다오,
만일 책으로 출판하게 되면 좀 더 자세히 기록할 생각입니다.
역시나 머리가 좋으신분은 옛사진과 함께 지나온스토리를 자세하게 올려 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쏘~이다
머리가 좋다니 ? 그 무슨 소리요 ?
난 회고록을 쓰면서 과거를 기억해 내느라고 진땀을 흘리고 있는 중이요.
좋았던 일, 슬펐던 일, 마음 아팠던 일 ,아름다운 추억 등등 많았는데
기억이 안 나니 속상하기도 하네요.
그때 그때 일기를 써 놓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
후회도 되는군요.
그때 물난리가 아마 사라호인가였지 나또힌 이문동셋집에 살았었는데,똥물 석탄물이가슴까지 차오른 골목길을 헤쳐가며 찾았던 기억이~
똥물에 헤엄치던 동무가 또 하나 있었구먼 !
반갑소. 동무요.
한편에 인생드라마를 보면서 부러워하는것은 포기를 모르는 근성이 대단하외다.
샬롬^^^
이 근성이 없었으면 별루 대단한 인물은 아니지만
오늘의 김창기는 없지 않았을까 ?
난 그때에 상수동 빌라에서 살었지요,, 당시에 당산동 에서 물이 넘쳐서 우리집을 덮쳤지요..
난 지금도 그당시를 생생히 기억합니다요,,난 모든것을 그대로 놓고서 몸만 빠져나왂슴니다.
몇일간 아버님 집에서 생활을 했습니다요..몇일후에 집을 가보니 모든것이 뭉에 잠겨있었기에 무척이나 고생을 했슴니다요
그 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악몽이었지요.
홍수 이재민 동무 !
반갑소.
홍수로 생명과 재산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는 살아 남았으니 얼마나 다행이요.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목사님과 일맥상통하는것이 없나 열심히 찾고 있었는데 이제 하나 건졌네요.
저도 한기원목사님이 약혼식을 한경직목사님이 결혼식주례를 해 주셨지요.
감사!
우리가 살아오면서 일맥 상통하는 일이 어디 이뿐일까 ?
대광에서 함께 숨쉬고 뛰놀고 공부한 것이 이처럼 우리를 연결시켜주니
제일 큰 일 이지요.
6.25. 4.19는 어떻구요 ?
생각해보면 많을 꺼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