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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오마이뉴스'에서 내가 좋아하는 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학교』 소개글이 실려, 기뻤다. 로베르트 발저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정말 놀랐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무도, 아무것도 아닌 이가 되어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아낸 작가는 없었으니까…...
귀족 신분을 버리고 하인이 되려는 남자
로베르트 발저 지음 '벤야멘타 하인학교' __[조현행 기자]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학교>는 귀족 출신의 한 젊은이가 하인을 양성하는 학교에 입학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야콥 폰 군텐'이라 불리는 이 청년은 하인이 되기 위해, "어느 누군가의 시중을 드는 데 필요한 몇몇 지식들을 습득하기 위해 벤야멘타 학원에 훈련생"으로 들어간다.
세상의 인정을 받고 성공하여 최고가 되기를 누구나 갈망하는 시대에, 삶의 주인이 아닌 하인이 되기 위한 교육이라니! 소설을 처음 읽기 시작한 독자라면 이런 주인공의 행동이 조금은 이상하고 생경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여러 대목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데 소설을 읽는 재미는 바로 거기에서 생겨난다.
그렇다면 주인공 야콥은 귀족 출신을 버리고 왜 기꺼이 하인이 되려고 하는 걸까? 벤야멘타 학교가 이렇게 시대와 동떨어진 교육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로베르트 발저 지음 '벤야멘타 하인학교' |
ⓒ 문학동네 |
야콥이 벤야멘타 학교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 소설은 '성장하고 발전하라', '노력하여 성공하라'와 같은,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이상적 인간형의 대척점에 서서 스스로 '작은 존재'가 되어 삶에서 자신만의 보람과 긍지를 발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반(反) 시대적이고, 반(反) 영웅적인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 학교의 교육 목표는 학생들이 하인으로서 갖춰야 할 자질과 역량을 길러내는 데에 있다. 이에 맞춰 학교는 학생들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둔다." 학생들은 같은 것을 반복적으로 하는 법을 익히고, 교사들은 자유와 충만감이 아닌 강제와 결핍을 가르친다. 학생들은 이곳에서 상실감을 느끼는 법과 견디는 법을 배운다.
벤야멘타 원장은 먼저 학생들이 지식으로 두뇌를 꽉꽉 채우는 것을 경계한다. 지식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높이 평가하고 남들은 깎아내린다고 원장은 지적한다. 지식은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착각에 사로잡히게 한다는 것이다.
원장은 "자기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자신감을 잃게 되거나 모욕을 당하게 될 때 위태로워진다고 말한다. 자의식에 찬 사람들은 의식에 적대적인 무언가를 끊임없이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을 마비시키는 일이며, '지식의 주인이 아니라, 바로 그 지식의 노예가 되는 것과 같다'라고 강조한다.
벤야멘타 하인 학교에서는 이와는 반대되는 교육을 한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자신은 낮추고 남을 높여야 한다고 주문한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겸손을 마음에 새기고, 타인을 존경하는 법을 배우며 관계에서 생겨나는 기쁨을 경험한다. 여기에서 자긍심이 생겨난다고 야콥은 말한다. "더 많이 일하고, 더 조금 소망하는 것." 바로 이것이 벤야멘타 학교가 내세우는 지향이다.
벤야멘타 학교는 무엇보다 세속적인 성공을 경계한다. "성공이란 것은 신경쇠약과 천박한 세계관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기 때문이다." 성공한다는 것은 타인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사람을 자기만족과 허영에 들뜨게 만들어 "정신적으로 혼란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든다"라고 야콥은 설명한다.
훈련생 크라우스는 벤야멘타 학교의 교육 목표를 잘 체현하는 인물이다.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크라우스는 겸손 그 자체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누군가를 돕고, 복종하고, 시중을 드는 일뿐이다."
그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환영받기를 원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을 묵묵히 해나갈 뿐이다. 사람들은 그런 크라우스를 전혀 주목하지 않는다. 크라우스를 칭찬하는 사람은 없으며, 누구도 그에게 고마워하지 않고, 사람들은 그가 재미도 없고 못생겼다고 말한다.
하지만 야콥은 이런 크라우스의 모습에서 존재의 경이로움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별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아간다는 것",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지 않고도 자신만의 긍지를 세워나가는 것, 바로 그 점이 경이로운 것이다.
야콥은 크라우스에게 그토록 심오한 의미가 숨어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크라우스가 "진정한 신의 작품이며, 무(無)이며, 하인"인 것을 보여준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크라우스는 이 시대에 '기꺼이' 성공하지 않으면서도 진정으로 성공하는 삶을 보여주는 "작게 존재하고 작게 머무는 인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이렇게 "거짓 없고, 단순하고, 명료한" 크라우스를 알아보지 못하며, 하찮은 존재로 여기고 착취할 것이라고 야콥은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크라우스가 의미하는 혹은 의미했던 바를 알게 될 극소수의 사람들중 하나이거나, 어쩌면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씁쓸해한다.
남들보다 더 큰 성공과 뛰어난 성취를 이루는 것만이 최고의 가치가 된 지금 시대에 누구 하나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두가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해서 살아간다. 그러나 그럴수록, 쉬지 않고 달려갈수록 그 목표는 더 커지고 멀어지는 게 아닐까. 열심히 사는데 왜 사람들은 더 불안하고 우울할까.
남들보다 뛰어나고 싶은 욕망, 그렇게 멋진 모습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삶에서 진정한 보람과 기쁨, 자긍심을 찾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소설은 묻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매우 비천하고 미미한 존재가 될 것이다"라는 야콥의 중얼거림은 단순히 자신을 깎아내리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긍지를 발견하고 만들어 가는 한 인간의 의지 표현이 아닐는지. 소설은 우리에게 묻는다. '어떤 삶이 진짜냐?'라고, '당신은 삶에서 어떻게 긍지를 만들어 가지나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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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발저는 1878년 스위스의 빌에서 제본가인 아돌프 발저와 엘리자베트 발저의 여덟 남매중 일곱째로 태어나 독일어권 스위스와 프랑스어권 스위스의 경계인 빌에서 이중 언어 사용자로 성장한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예비 김나지움을 마치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한 그는 어린 나이부터 연극에 매료되었다. 그가 가장 좋아한 작품은 실러의 <강도들>이었다. 1894년 어머니가 정신 질환으로 사망한다. 1892년부터 1895년까지 베른주 주립은행에서 견습으로 일한다. 1895년 형인 카를이 있는 독일의 슈투트가르트로 가서 유니온 독일 출판사의 광고부에서 서기로 일하며 어린시절부터의 꿈인 배우의 길을 모색하나, 결국 성공하지 못한 채 걸어서 스위스로 돌아온다. 이후 빈번히 옮겨다니는 직장에서 불규칙적이긴 하나 주로 사무원이나 서기로 일한다. 이러한 경험을 살린 글쓰기로 인해, 그는 하인이나 종업원의 관점을 문학에 도입한 최초의 독일어권 작가로 평가받는다. 1989년, 베른의 신문 분트 지에 그의 시 여섯편이 실리고, 그에 주목한 프란츠 블라이의 주선으로 뮌헨 거점의 문학 잡지 <섬>을 중심으로 한 작가들에게 소개된다. <섬>에 시와 산문 등의 작품을 발표한다. 1903년 발명가이자 엔지니어인 카를 두블러의 조수로 일하게 되고, 이 경험은 나중에 그의 장편소설 <조수>(1908)의 소재가 된다. 1904년 발저의 첫번째 책 <프리츠 코헤르의 작문집>이 인젤출판사에서 출간된다. 1905년 베를린에서 하인 과정을 수료한 후 그해 가을 오버슐레지엔 지방의 담브라우 성에 몇 달간 하인으로 고용된다. 이 때의 하인 경험은 특히 장편소설 <야콥 폰 군텐>(1909)에서 두드러지게 반영된다. 이듬해 다시 베를린의 형 카를에게 돌아간다. 화가이자 도서디자이너, 무대미술가로 활동하던 카를은 그를 베를린의 문학가들에게 연결시켜 준다. 베를린에서 그는 6주만에 장편소설 <탄너가의 남매들>을 집필하여 1907년 발표한다. 1908년에는 두번째 장편 <조수>가 출간되고 1909년에는 <야콥 폰 군텐>이 나온다. 이 시기에 장편뿐 아니라 여러 신문과 잡지에 산문들도 발표하고 큰 호평을 받는다. 로베르트 무질과 쿠르트 투홀스키가 발저의 작품을 칭찬했으며 헤르만 헤세, 프란츠 카프카는 자신들이 발저의 애독자임을 밝힌다. 1913년 스위스로 돌아와 처음에는 벨렐라이에 사는 누이 리자의 집에, 그리고 이어서 빌의 아버지 집에 머물다가 <푸른 십자가> 호텔의 다락방으로 이사하여 1920년까지 거주한다. 1차 대전이 발발하고 발저도 군에 징집된다. 1916년 정신질환을 앓던 그의 형 에른스트가 발다우의 정신병원에서 사망하고 1919년에는 베른의 지리학 교수이던 형 헤르만이 자살한다. 전쟁으로 인해 독일 문학가들과도 연결이 단절된 이 시기, 발저는 고립된 생활로 빠져든다. 그동안 발표한 산문작품들이 책으로 출간된다. <작문들>(1913), <이야기들> (1914) <작은 문학>(1915), <산문집> (1917) <짧은 산문>1917 <시인의 삶>(1917) <산책>(1917) <코메디>(1919), <물의 나라>(1920) 등. <작은 문학>으로 „라인란트 지방 작가를 위한 여성연합회 상“을 받는다. 이미 예전부터 산책을 즐겨하던 발저지만, 이 시기에 규칙적으로 오랜 시간, 심지어는 밤에도 매우 긴 도보여행을 하게된다. 1921년 베른으로 이사하여 몇 달 동안 국립 기록보관소의 보조로 일한다. 이 시기에 장편 <테오도르>를 집필. 이 작품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베른에서 발저는 외부와 차단된 채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며 12년 동안 16번이나 이사를 한다. 1929년 한동안 공황과 환각증세에 시달리던 발저는 발다우의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몇주 뒤 상태가 호전되자 다시 글을 발표하지만, 이전에 비하면 크게 더딘 속도이다. 이 시기에 그는 점점 더 작은 크기의 필기체로 글을 썼는데, 마지막에는 한 활자의 높이가 1 밀리미터 미만까지 줄어들었고 이것은 „마이크로그람“이라고 불리게된다. 하지만 1933년 헤리자우의 정신병원으로 이송된 후 그는 글쓰기를 멈추었고,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종이봉투 접는 일을 하며 여생을 보낸다.
1935년, 스위스 작가인 카를 젤리히는 헤라자우의 발저에게 편지를 쓴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이미 거의 잊힌 발저의 작품을 새로이 출간하기 위해서이다. 견직물기업가의 아들인 젤리히는 물려받은 유산 덕분에 오직 문학에만 몰두하는 삶이 가능한 입장이었고 헤르만 헤세, 슈테판 츠바이크, 로맹 롤랑 등과 친구 관계였다. 그리고 이듬해 7월, 젤리히는 직접 헤리자우를 찾아가 처음으로 발저와 만나고, 발저의 산문 선집 <위대한 작은 세계>를 출간한다. 그리고 헤르만 헤세나 토마스 만 등의 유명 작가들의 서평도 받아낸다. 또한 발저가 극심하게 비관적인 경제상황에 놓인 것을 알고는 여러 단체와 문화 재단에서 지원금을 받을수 있도록 주선한다. 발저의 형 카를(1943)과 누이 리자(1944)의 사망 이후 젤리히는 발저의 후견인이 된다. 이 시기 발저는 괴팍한 성향이긴 했으나 이미 한참 전부터 병증은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퇴원을 거부하고 있었다. 나중에 젤리히는 그들의 만남을 기록한 <로베르트 발저와의 산책>(1957)을 출간한다.
발저는 열광적이고 고독한 산책자였다. 1956년 12월 25일, 그는 홀로 나선 산책 중에 눈 위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발저의 죽음은 그 자신의 산문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묘사된, 쓸쓸하고 외로운 한 남자의 마지막 암시와 겹쳐진다.
"축제 기간에는 사방에서 웃음이 넘쳐난다. 하지만 눈물 또한 분명 그만큼 흘렀을 것이다. 아픔이 쉽사리 가슴으로 스며들고, 지나가버린 아름다운 한때를 회상하며, 상처가 입을 벌리기 때문이다. 이제 나의 즐거운 기분은 모두 지나가버리고 그 자리에서 고통이 마법처럼 피어오른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마음속 깊은 곳의 진짜 얼굴이다. 신이여, 우리의 운명은 당신의 것입니다.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당신의 결정은 모두 홀륭하고 옳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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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발저의 작품 세계를 체계적으로 조망하기란 쉽지 않다. 워낙 여러 매체에 짧은 산문들을 산발적으로 발표했고 또 여타 작가들과는 달리 일기나 자서전 등 자기 자신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며, 현재까지도 새로이 발견되는 편지 자료 등을 통해서 발저 연구에 지속적인 보완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빈번하게 바뀌었던 그의 거주지에 기반하여 발저의 작품 세대를 구분하게 되었다. 주로 유겐트스틸과 유미주의의 영향을 받은 초기(1898-1905), 비교적 사실주의적이며 현존하는 그의 모든 장편이 쓰인 베를린 시대(1905-1913), 표면적으로나마 스위스적인 주제가 부각되는 빌 시대(1913-1920), 그리고 점점 더 추상적이고 은둔의 분위기가 짙어지는 베른 시대(1921-1933). 1933년 이후로는 작품을 거의 쓰지 않았으며, 간간히 쓰던 편지도 1949년 이후로는 완전히 중단했다.
*발저는 1929년부터 발다우 정신병원에서 글쓰기를 계속하지만, 헤리자우로 옮긴 다음부터는 더이상 문학작품을 쓰지 않았다.
현재는 스위스를 대표하는 작가로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생전에 발저는 문학사에 보기 드물 정도로 스스로를 „작게“ 만들었던 작가이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학력마저 보잘 것 없었던 그는 점원과 서기 등의 직업을 전전했으며, 실제로 슐레지엔 지방의 성에서 하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고 집도 고정적인 거주지가 없었고, 단 한 점의 가구도, 심지어는 자신이 쓴 책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글을 쓰는 종이조차도 재활용품이었다. 그는 물질뿐만 아니라 인간들과도 멀었다. 발저는 초기에 잡지 <인젤>관련자들과 교류하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어떤 문학단체에 속하거나 문인들과 그룹을 이루거나 경향을 공유한 적이 없었다. 그는 여러 고독한 시인들 중에서도 타인들과의 교류가 가장 희박한 케이스에 속했다. 최후에는 그가 쓰는 문자까지도, 마치 자신의 문학을 사라지게 만들려는 듯이, „마이크로그람“으로 작아졌다.
발저는 일차 대전 발발 이전 그리고 이후 20년대까지도 많은 글을 발표하고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책도 연이어 출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글이 주로 실린 것은 잡문으로 분류되는 신문 문예란이었고, 책으로 묶여 나온 작품들도 많이 팔린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전쟁이 끝난 후 종이의 부족, 인플레이션, 경제위기 등이 닥치자 그는 빠른 속도로 잊히게 된다. 카를 젤리히 에디션이 출간된 다음에도 스위스에서만 주목을 받았을 뿐 이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크리스티안 모르겐슈테른, 로베르트 무질, 쿠르트 투홀스키, 프란츠 카프카, 발터 벤야민과 헤르만 헤세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로베르트 발저의 재발견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것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그런 이후에 그의 대부분의 원고와 후기의 스케치들이 출간되어 독자들에게 알려졌다. 현 시대의 다양한 작가들, 마르틴 발저, 페터 빅셀, 로어 볼프, 페터 한트케, 엘프리데 옐리네크, W. G. 제발트, 막스 골트 등이 발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초기의 발저 발견자 가운데 한 명인 발터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썼다.
“로베르트 발저의 글은 여기저기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에 관한 글은 아무데서도 읽을 수 없다…….. 우리는 기준 이상으로 능숙하게 잘 다듬어진, 계획과 의도를 완비한 예술 작품에서 스타일의 신비를 발견하는 일에 익숙해진 독자이다. 그런데 갑작스레 최소한 겉보기에는 아무런 계획도 의도도 없어 보이고, 그런데도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할 만큼 매혹이 무성한 야생의 언어와 마주치게 되었다. 거기다 더해서, 문장이 저절로 앞으로 가도록 내버려두는 방치의 언어가 아닌가. 그 안에는 우아함에서부터 통렬한 비꼼까지, 모든 형태가 풍부하게 들어 있다. 아마도 특별한 의도 없이 그냥 쓴 걸 거야, 하고 독자는 생각했다. 정말 그런건지 아닌지 종종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은 작품을 쓴 후 단 한 줄도 고치지 않았다는 발저 자신의 고백을 생각하면, 그런 논쟁은 전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발저의 고백을 어휘 그대로 사실로 믿을 필요는 없지만, 그 말을 염두에 둔 독서도 나쁘지 않다. 다음과 같이 이해하면 독자의 마음이 좀 안정될 것이다. 일단 쓰고, 이미 쓴 것을 결코 고치지 않는 글쓰기는, 최대의 무의도성과 최고의 의도성이 서로 완벽하게 침투하는 과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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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침부터 로베르토 발저가 내게로 찾아왔으니 그와 하루를 산책하고 싶다. 발저만큼 걷기에 자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와 함께하는 산책은 오랜만의 영광이자 행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