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기(喚起)가 찾아와
엄세원
시가 되지 않는 날에는, 여정도 시를 찾아 헤맨다
운탄고도 2길 김삿갓문학관 뒤꼍
받아적으라는 시비의 타이름
휴대폰으로 사진부터 찍고 보는데
집에 돌아와 검지로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문득, 병중이었던 사내가
아득한 기억 건너 쪽에서 나를 돌아보는지
산골짜기 돌고 돌면 산 중턱에 팽나무가 있는 집이 제가 있는 곳입니다 아버지의 빛을 따라온 이곳은 별의 생애도 낙타가시풀에 내려앉아 있습니다 당신의 자취방에서 오는 건 극지행일지 모릅니다 손에 관한 명상이 편지라면 새벽은 부엌에서 온다는 이곳을 이해하게 될 거에요 불을 지피면서 기다립니다 너무 늦더라도 나의 자화상은 이곳에 남아 걸려 있을 겁니다 기다리는 동안 막걸리에 태를 묻듯 나를 내려놓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찾아와 내가 없다면 제왕나비가 두레반 위에 넘노닐 겁니다 몸이 세상 놓을 때 그래도 허공 중에 잊지 않고 잘람잘람 기척을 남길 테니까요 당신이 지켜보도록 수평의 힘으로 노을을 붙들어 놓을 겁니다
시가 되지 않는 날
시들이 자리를 바꿔가며 들려주는 시구가
나의 뒤꼍에 있다
한때 부치지 못했던 편지
그 사내
내게 영영 수취인불명이 되어버린
*김삿갓 문학상 수상자 시비의 제목을 빌렸다.
금강굴에 거울 있다
엄세원
금강굴 오르다가 깔딱고개 접어들 때
계단의 녹을 주워 들고 산허리 재어본다
돌 틈에서 톡톡 물방울이 떨어지고
천 길 낭떠러지 벼랑에 거울이 걸려 있다
거울이 들여다보는 여자, 입술을 달막거린다
어느 한쪽이 무너져도 끝까지 버텨내는 절벽
너도 나만큼만 살았으면, 말끝 흐리며
일흔아홉 어머니가 멀어져간다
한 생을 헐고 나오는 뿌리 끝에서
끌어올린 소리가 되돌아와
절벽의 손바닥에 걸렸다 핏줄보다 더 붉었다
새벽 넘어온 능선들이 운무를 벗는다
가파르게 오르내리던 계절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천불동 계곡과 비선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죽음의 계곡 넘어 대청봉을 향한다
벼랑에 매달린 붉은 꽃 하나 칼바람을 눕힌다
거울의 그 안쪽을 운명처럼 점치다가
그 위에 나도 비스듬히 기댄다
깎아지른 절벽에 두 다리를 걸치고
원효가 해골바가지로 퍼 담은 어둠을 삼켰다
스무아흐레 달이 기울고서 어미를 빠져나온
알 하나, 희뿌연 속껍질을 벗는다
그녀의 가장 내밀한 포착이 빛을 데려온다
노을 품고 수행기도 하는 절벽이
꼿꼿하게 등뼈를 세우고 있다
***********************
* 엄세원: 약력: 21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시부문 당선
시집『숨, 들고나는 내력』,『우린, 어디에서 핼리 혜성을 볼까』
사임당 문학상, 제2회 강원시니어문학상
2022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 선정
문화.관광 디카시 대상 (홍성군)
사임당문학문학상 (한국소비자연합 문화예술부)
대구신문신춘문예 디카시우수상수상
첫댓글 [환기(喚起)가 찾아와] 작품에서 *별표가 어딘지 없습니다/ *별표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