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山翠屛 (푸른 병풍과 같은 팔공산)
嶪岌公山翠靄中 아지랑이 속에 우뚝 솟은 팔공산 愛看屛嶂立蒼空 창공에 세워진 한 폭의 병풍이로다 精靈凝聚化人傑 공산의 정령 어리어 인걸로 화했는가 護國聲華冠海東 호국 의사 명성이 해동에 으뜸일세 === [ 푸른 병풍 앞에서 ]
늦은 오후였다. 햇살은 말없이 베란다 끝까지 밀려와 마룻바닥에 가느다란 금 하나를 그어 놓고 있었다. 나는 식어 가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늘 그 자리에 있는 팔공산이 있었다. 멀리서 보면 산은 한 폭의 병풍 같았다. 하늘과 땅 사이에 누군가 오래전에 세워 둔, 푸르고 단정한 병풍. 바람이 불어도 물러서지 않고, 구름이 걸쳐도 제 모습을 잃지 않는, 깊고 큰 침묵의 병풍이었다.
산은 언제나 말이 없다. 그러나 말이 없는 것들이 더 오래 마음을 붙드는 법이다. 능선은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떠받치고, 숲은 아무 말 없이 계절을 품는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저 산이 단지 흙과 바위와 나무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저 푸른 빛 속에는 오래전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내어준 사람들의 숨결도 함께 스며 있는 것은 아닐까. 이름을 남긴 이도 있었겠지만, 이름조차 없이 사라진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내일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며, 자기 하루를 조용히 내어준 사람들. 그들의 땀과 기도와 눈물이 저 산의 청록빛 속에 묻혀 오늘도 저토록 깊은 색으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생각이 미치자, 내가 누리고 있는 이 평범한 오후가 갑자기 평범하지 않게 느껴졌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산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 창문을 열면 두려움보다 바람이 먼저 들어오는 저녁, 사랑하는 사람의 안부를 걱정 없이 기다릴 수 있는 하루. 나는 그것이 내 힘으로 얻은 삶의 결과라고 믿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실은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 나보다 먼저 살아간 누군가가 긴 시간을 견디어 주었고, 무너질 자리를 대신 버텨 주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위해 병풍이 되어 주었기에 가능한 평화였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사람은 조금 작아진다. 아니, 작아진다기보다 비로소 제 크기를 알게 된다. 나는 혼자 여기까지 온 사람이 아니었다. 내 삶은 수많은 침묵 위에 세워져 있었다. 부모의 기도, 이웃의 선의, 선조들의 희생, 시대를 건너며 끝내 무너지지 않으려 했던 이름 없는 인내. 팔공산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여 주는 거대한 상징처럼 서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뒤편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에 잠기곤 했다. 지금의 나를 가능하게 한 보이지 않는 어깨들을.
바람이 화분 잎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작은 잎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산이 내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만 같았다. 크게 드러나지 않아도 된다고. 높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만 제 자리를 오래 지키는 것, 누군가의 삶에 바람을 막아 주는 한 겹의 병풍이 되어 주는 것, 그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세상은 늘 눈부신 것들을 칭찬하지만, 정작 한 사람을 끝내 살려 내는 것은 대개 눈에 띄지 않는 보호와 오래 참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산은 묵묵히 제 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해가 기울 무렵, 팔공산은 점점 보랏빛으로 잠겨 갔다.
낮 동안의 푸름은 서서히 먹빛 속으로 스며들고, 능선은 한 장의 수묵처럼 깊어졌다. 나는 창가에 앉은 채 저녁이 산 위에 내려앉는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저 산에게가 아니라, 저 산처럼 살아간 모든 존재들에게. 내 삶을 여기까지 밀어 올린 보이지 않는 손들에게. 내가 모르는 사이 나를 위해 바람을 막고 어둠을 견디어 낸 모든 푸른 병풍들에게.
그날 저녁, 나는 하나의 다짐을 품었다.
감사는 아름다운 감정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진짜 감사는 내일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누군가의 희생 위에 놓인 평화를 누리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나 또한 누군가에게 작은 병풍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크지 않아도 좋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한 사람의 바람을 막아 주고, 한 사람의 하루를 지켜 주고, 한 사람의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곁에 서 있는 존재. 어쩌면 한 인간의 성숙은 바로 거기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밤이 오기 전, 산은 마지막 빛을 받아 잠시 더 푸르게 빛났다. 나는 그 빛을 바라보며 알 것 같았다. 우리 삶을 끝내 지탱하는 것은 거대한 승리가 아니라, 말없이 제 자리를 지켜 온 사랑이라는 것을. 세월이 흘러도 무너지지 않는 것은 강한 목소리가 아니라, 오래 견딘 마음이라는 것을.
창밖의 팔공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푸른 병풍 앞에서, 나는 비로소 조금 더 사람다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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