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시절에 가장 인상에 남는 일은 무엇입니까.
조박사:
글쎄요, 대학 3학년때 ,
학내에서 일어날 뻔한 부정에 대해 선두에 서서 투쟁한 것이겠지요.
1957년 4월의 일입니다.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여 정부의 어느 고관대작의 아들이
육군사관학교에서 제가 다니는 학부에 부정으로 편입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제가 존경하는 민주주의적인 교수 3명이
사립대학으로 옮길것이라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안절부절못한 저는 동료들을 모아 임시학생회의를 열었습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괴로워도 정의의 길을 믿고
비겁한 삶은 피하겠다고 결심하였기에
‘이런 부정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 라고 일어선 것입니다.
집회에서 저는 제일 먼저 등단하여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그 때의 연설 내용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SGI회장: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조박사:
대강 이런 이야기입니다.
“인류사회의 역사는 다름아닌 자유와 평등이 발전한 역사다.
한국의 자유와 평등을 발전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는
우리 학교에서 그것과 반대로
지금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사태가 일어나려 하고 있다.
만약 이것을 말하지 않고 묵인한다면 ,
우리 대학이 존재할 가치는 없다.
단호하게 투쟁하여 부정을 저지할 것인가 아니면
대학을 폐교할 것인가를 우리는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모인 학생들은 모두 큰 박수로 찬성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부정을 저지하기 위해 ‘동맹휴학’에 들어갔습니다.
그 후, 총장의 호출이 있어
우리들도 ‘학생은 공부하면서 투쟁하는 것이 도리에 맞는다’라고
생각하여 휴학은 1주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 때의 우리들의 투쟁이
1960년 ‘ 4·19학생의거’ 로 이어져 당시의 정권을 붕괴시키는
단서가 되는 투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SGI회장:
젊은 시절부터 강한 정의감에 불타셨군요.
감명받았습니다.
차원은 다르지만, 창가학회의 마키구치 초대회장도
초등학교 교장시절,
지역의 유력자의 압력으로 몇 번이나 좌천되었습니다.
“유력자의 자제를 특별히 대우해 주기 바란다” 라는 의뢰를
마키구치 회장이 엄격하게 거절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이런 폭거에 대항하여 학부모들은
마키구치 교장을 배척하면 자식을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고
하여 3일간 ‘동맹휴교’에 들었갔습니다.
가두에 서서 전근을 반대하는 연설을 하는 학부모도 있었다고 합니다.
조박사:
대단히 존경받으셨군요.
SGI회장:
그렇습니다.
그러나 인사발령은 이미 났다는 이유로 철회되지 않아
마키구치 회장은 전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학교에서도 마키구치회장은 똑같은 이유로
불과 반 년만에 다시 다른곳으로 전근을 가야 했습니다.
이 때도 뜻 있는 교사들이 유임운동을 벌였지만,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도다 선생님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도 말단 교원이지만, 이 운동에 참가할 수 있게 되어
필사의 옹호운동을 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속을 구명운동을 위해
마키구치선생님 댁을 찾아가다가 비에 흠뻑 젖은 일도 있다“
라고.
나중에 마키구치 회장은 <창가교육학체계> 속에서
정치권력이나 행정권의 부당한 지배를 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학교자치권의 확립’을 강하게 제창하고 있습니다.
이 개혁론은 ‘어린이의 행복’을 제일로 생각한
마키구치 회장의당연한 귀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조박사:
마키구치 회장의 사상에 강하게 공감합니다.
저도 오랫동안 대학의 교원을 해 왔습니다만,
대학은 무엇보다 ‘학생제일’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행동해 왔습니다.
원래 저는 대학의 직책을 맡지 않고
연구 외길로 살 것을 신조로 했습니다만,
학생을 위해서라면 하는 마음으로
학내의 일도 마다하지 않고 맡았습니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주대학교의 사회과학대학장이 된 후
얼마 되지 않은 1980년대의 중반의 일입니다.
당시, 민주화를 주장하며 데모하는 학생들을 억압하기 위해
경찰기동대가 수시로 학내에 들어와 폭력을 행사하는 사태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가동대원의 손목을 잡고
“너는 도대체 누구 앞에서 그런 짓을 하려는 것이냐” 하고
큰 소리로 힐문한 일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학생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활동을 뒤에서나마 격려했습니다.
SGI회장;
실로 용기있는 행동입니다.
박사께서 학생을 생각하는 마음에 감동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저도 뉴스 등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만,
분명히 ‘평화대행진’ 이라고 하여
대단히 큰 규모의 데모가 벌어졌지요.
조박사:
그렇습니다.
1987년 6월의 일입니다.
한국 전역에서 100만명이상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학생들의 운동이 널리 시민들을 파고든 결과
민주화를 시도하는 ‘6·29특별선언’을 쟁취할수 있었습니다.
전부 8항목입니다만,
그 중에는
“대학의 자율화와 교육의 자치는
조속히 실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대학의 인사, 예산, 행정 등에 대해서도
그 자율성을 보장한다” 라는 내용도 들어갔습니다.
또 선언에서는 제가 전공한 지방자치에 대해서도
새로운 방향성이 발표되었습니다.
“사회 각 분야의 자치와 자율이
최대한 보장되지 않으면 안된다.
시· 도 단위의 지방의회 구성도
구체적으로 재검토를 추진한다.”
그 의미에서 선언은 제게도 더욱 감개무량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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