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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명문家탐방> 중에서
퇴계에 연원한 혈맥의 유장함! [가]
한국명문 (2005-02-11 오후 9:44:53) Hit : 406 Vote : 22
퇴계에 연원한 혈맥의 유장함!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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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에 연원한 혈맥의 유장함!
퇴계가 문호를 차린 곳은 도산 토계이다. 노송정 고택이 있는 마을 온혜에서 약 10리 떨어진 곳에 토계가 있다. 이 곳은 용두산과 태자동에서 근원한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토계는 토끼 토자, 개울계자이다. 나중에 토끼 토자를 흙토자로 바꾸어 토계라 불렀다.
토계는 상계, 하계, 계남, 원촌이라는 네 개 마을이 있다. 상계는 퇴계 종파가 사는 곳이다. 하계는 퇴계의 셋째 손자 영도가 정착하여 영도의 손자 희철 후손들이 사는 곳이다. 이 곳 냇물 건너 남쪽 마을이 계남이다. 하계 뒷편에 원촌[계남과 원촌은 안동호에 수몰]이 있다. 원촌은 영도의 둘째 손자 극철이 정착한 곳이다. 도산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건너 의인이 있다. 의인은 퇴계의 둘째 손자 순도의 후손이 사는 곳이다. 그리고 부포를 뺄 수 없다. 낙동강이 청량산에 굽이쳐 흐르며 9곡을 이룬 가운데 월천이 있다. 이 월천 옆에 유향이 부포이다. 부포는 우탁을 제향하는 역동서원이 있던 곳이다. 성재 금난수의 고조 경상감사 숙이 시거한 봉화금씨 터전이기도 하다. 퇴계 조부 노송정 이계양이 두루에서 부포로 살림나 살던 곳[나중에 예안으로 이사함]으로 월천 조목과 성재 금난수 등 퇴계 문하의 쟁쟁한 학자들이 난 곳이다. 이곳에 영남 만인소로 유명한 둔와 이만손 등 상계파의 인물이 많이 산 곳이다.
상계는 퇴계 종파이다. 퇴계가 외아들 준과 손자 셋을 두었다. 맏손자 안도는 44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슬하에 아들이 없었다. 둘재 손자 순도는 30세에 세상을 떠났다, 셋째 손자 영도의 둘째 아들 억을 맏손자 안도의 후로 입양시켰다. 퇴계의 장증손 억이 42세로, 억의 맏아들 명철[퇴계 장현손]이 37세로 세상을 떠나 아들이 없었다.
퇴계는 외아들을 두었고 손자 몽재 안도 이후 수세를 내려오면서 모두가 수를 못하였다. 이 때 이조판서로 있던 홍우원이 “대현의 후예가 너무 딱하다.”고 한탄을 했다. 이 소식이 궁중에 전해져 명철의 동생 성철이 입시를 하니 임금이 특명을 내려 성철의 맏아들 고를 입후토록 하였다.
고의 아들 수겸에 이르러 흥성의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수겸은 의금부 도사를 지내고 무신년에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하자 도산으로 달려가 이집, 이재창, 김형국, 금경제 등과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창의소를 설치한 다음 병사와 군량을 모았다. 그뒤 안동 의병장 유승현과 긴밀하게 연락하며 출진하여 관문에 이르렀다. 그러나 관군이 적을 섬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해산하고 돌아왔다. 이 사실을 안무사 박사수가 장계로 올려 포상을 하도록 하였다. 그는 흡곡현령으로 나가 군민들의 요역을 없애버리고 생업을 지성으로 보살펴 군민들이 “우리 원님은 부처님이시다.”고 칭송했다. 법가에 자라 행의가 순수하고 성현의 말씀을 따라 학문을 사랑하며 검소하였다. 서울에 벼슬 살 때 늘 베옷을 입고 다녀 사람들로부터 “촌뜨기”라는 별명을 얻었다. 정산현에서 돌아올 때 행장이라고는 대자리 한 잎 뿐이었는데 그것 마져 돌려 주고 왔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주위 사람들이 “대들보가 부러졌다.”고 했다. 청대 권상일은 “마음은 옥처럼 깨끗하고 얼굴은 춘풍을 띄운듯 온화하다.”고 그의 인품을 평했다. 이원교 윤백하와 병칭되는 명필 설죽당 강재숙은 “이수겸은 충효를 겸비했고 벼슬살이 청직함에 검소하고 인자했다.”고 하였다.
이수겸의 배위는 참봉 홍상문의 딸 부계[부림]홍씨이다. 상문은 목재 홍여하의 아들이다. 여하는 주자학에 밝아 당시 사림의 종사로 일컬어졌다. 여하의 아버지 호는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을 지냈다. 호의 종증조부 언방은 문과에 사가독서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절개가 있어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들었다. 언방의 아버지 귀달은 호조판서를 지냈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다.
이수겸의 맏아들 세덕은 선조의 덕을 이어 받아 인자하며 신중했다. 장릉참봉, 내섬시 봉사, 의금부 도사를 거쳐 단성 현감으로 나갔다. 백성들에 대해 온화한 원으로 행정을 잘하여 명성이 사방으로 퍼졌다. 단성현에 부임한 지 7-8개월만에 병으로 죽었다. 군민들은 그 짧은 기간이지만 청렴한 그의 벼슬살이와 인자한 마음을 못잊어 송덕비를 세웠다. 배위는 처사 홍경의 딸 남양홍씨이다. 홍경은 이조판서 우원의 아들이다. 남양홍씨는 경북 순흥[두곡, 띠띠물]에 세거했다. 우원은 형조판서 가신의 손자이다. 가신의 둘째 아들 영은 우정. 우관, 우원, 우량을 낳았다. 우정은 홍석, 정양, 심장세, 강흡과 함께 태백오현으로 일컬어진다. 우정의 후손에 선비들이 많고 현대 인물로 10,11대 국회의원에 무임소 장관을 지낸 홍사덕을 비롯하여 국세청 징세조사국장 성범, 고교장 성인, 음대학장 춘선, 박사 교수 사만과 남선, 문필가 동선, 승목[외무고시], 승기[사법고시], 의사 혜준, 대흥물산 사장 사기, 의학박사 피부과 의원장 우선, 기술연구원 원선, 은행 차장 사흥 등이 있다.
이수겸의 둘째 아들 세헌은 통덕랑이다. 어질고 착하여 부형의 교훈을 이어 받아 형제간에 우애하고 집안간에 화목하였다. 남들은 고가의 규범을 잃지 않았다고 하였다. 배위는 의병장 유승현의 딸 전주유씨이다. 승현은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참의를 지냈다. 승현은 이인좌의 난 때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양가의 사돈이 모두 의병대장이 된 것은 고금에 드문 일이라 하겠다. 유승현의 아들 도원이 동생 장원과 함께 영남 퇴계학파의 종사로 이름을 날렸다. 승현의 후손에 석학이 쏟아졌다. 아들 범휴와 손자 정문이 학행이 뛰어났고 증손 치엄, 치유는 사서 삼경에 정통했다. 현손에 건호, 정호, 기호가 학행이 있으며 5대손 연구, 연린, 연근 등 글잘하는 선비가 무리로 나왔다. 현대 인물로 공보처장관 유혁인, 한솔그룹 사장 유화석, S오일 사장 유호기 등이 있다.
이수겸의 맏딸은 해저 의성김씨 단사 김경온에게 출가했다. 단사는 관찰사 김성구의 손자이다. 경북 봉화군 해저[바래미]는 솟대가 많이 걸려 빨래가 마르지 않늗다는 곳이다. 솟대란 요즈음으로 말하면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람을 축하해 거는 현수막에 비유되는 것으로 옛날에 과거를 하면 마을 어구에 높이 세운 장대를 말한다. 김성구는 의성김씨 해저 입향조이며 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있다. 단사 김경온은 단사협에서 학문을 닦고 있던 중 어사가 지나가다 조정에 천거하기를 “단사협에서 은거하여 만권의 서적을 읽었다.”고 하였다. 단사 후손에 문천 희소가 나왔다. 그는 이상정 문인으로 사서오경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닭실의 석학 이재 권연하의 학문을 일찍 깨우쳐 주었다. 그 동생 희락은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을 지냈고 우수는 문과하여 예조참의를 지냈다. 글잘하는 선비로 철수, 난영, 화영, 뇌식, 석림, 창기 등이 있다. 뇌식은 건국공로 훈장을 받았다. 현대 인물로 검사 호영이 있다.
이수겸의 셋째 딸은 해평 전주최씨 수인에게 출가했다. 수인의 선조 현과 산휘 부자는 명망이 높은 영남의 인물이다. 현은 호가 인재이며 학봉 김성일과 한강 정구에게 글을 배우고 문과하여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는 학문과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 아들 산휘는 유효립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영사공신 3등에 올라 하사 받은 전토와 노비를 모두 반환하여 칭송을 들었다. 병자호란 때 의병대장으로 문경에 있는 아버지의 명을 받고 단기로 상경하여 임금에게 고하고 돌아오다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이 그 행위를 갸륵하게 여겨 부조지전의 은혜를 내렸다. 아버지 시호는 정간이며 아들 시호는 효헌이다. 해평 전주최씨는 경주최부자 집, 덕천동 청송심부자 집과 함께 영남 3대 부호이다. 경주 최씨가 12대 진사에 12대 만석꾼이며 덕천동 심씨는 9대에 2만석을 한 반면 전주최씨는 해평평야에서 한때 6만석을 한 집이며 400년 동안 부호의 자리를 지켰다. 이수겸의 외손자 최광벽은 문과에 병조참판을 지냈다. 외손자 광옥, 광악, 광익, 광직은 모두 학행과 행의로 일컬었다. 최수인 후손에 현대 인물로 수출입은행 상무 종악이 있으며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로 있는 이가 환, 순, 경호, 시호 등이 있고 의학박사 종국, 외과의 광호, 동아일보기자 맹호, 회사이사 선호, 박사로 산림종합건설회장 종두, 산림건설 사장 종일, 공영토건 차장 경, 건축사 찬, 외무고시 합격자 승호 등이 있다.
이수겸의 넷째 딸은 안동권씨 현령 권정택에게 출가했다. 정택은 경북 봉화 닭실[유곡] 충재 권벌 후손이며 창설재 권두경의 손자이다. 권두경은 갈암 이현일의 문인이며 우담 정시한의 문인이기도 하다. 그는 닭실 문중의 대명사 “하당 창설”의 주인공이다. 하당 권두인과 창설재 권두경이 문명을 떨쳐 영남 사림이 추중하여 붙인 애칭이 “하당 창설”이다. 권정택의 후손에 의병대장 성대 권세연이 배출되었다. 세연의 손자 상규는 당대 유림의 거두이다.
이세덕의 아들 귀응은 동몽교관을 거쳐 주부, 감찰을 지내고 하양현감으로 나가 청렴과 간결함으로 고을 행정을 돌보았다. 어사가 장계를 올려 표리를 하사받았다. 이어 영덕 현령으로 제수가 되었을 때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입시하였다. 임금이 “너는 대현의 봉사손으로 하양현감 때 치적이 가장 우수하여 매우 가상하게 여겼노라.”고 하였다. 나중에 비안 현감으로 나갔을 때 쌍천교 다리를 놓는데 녹봉 600량을 선듯 내놓아 백성들이 칭송하며 공적비를 세웠다. 귀응의 배위는 순천박씨 별검 성준이다. 성준은 충정공 취금헌 박팽년의 후손이다. 세덕의 셋째 딸은 광산김씨 성익에게 출가했다. 성익은 후조당 김부필의 적은집 부륜의 후손이다. 성익의 아들 시찬은 제자백가서에 통달했다. 저서가 19책이 있다. 시찬은 외조부 세덕의 묘갈명을 썼다. 이세덕의 넷째 딸은 의성김씨 김한동에게 출가했다. 그는 해저 입향조 팔오헌 김성구의 증손이며 단사 김경온의 당질이다. 한동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임금이 영남 인재에 대해 물을 때 우의정 채제공이 “김한동이 제일이다.”고 했다.
이수겸의 둘째 집 손자 귀몽[세헌의 아들]은 통덕랑이다. 귀몽의 배위는 의성김씨 택동의 딸이다. 택동은 팔오헌 김성구의 증손이며 한동과는 6촌간이다. 택동의 후손에 인물이 많이 나왔다. 희성, 두명, 건수 등이 문과에 급제하고 희교, 희용, 재전, 익수, 우림 등 글 잘하는 선비들이 나왔으며 홍기, 정진, 창백 등 건국공로 훈장을 받은 이가 배출되었다. 특히 문정공 김우옹 집으로 양자간 김창숙이 이집 후손이다. 김창숙은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과 성균관대 창립초대 총장을 지내며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다.
이지순은 수겸[귀응의 아들]의 증손이다. 희릉 참봉을 지내며 그 고장에 흉년이 들자 봉급을 풀어 구휼했다. 영월 사람들은 이 미담을 전하며 칭송했다. 그는 성현의 좋은 말씀을 추려 [대월록]이라 이름하고 매일 정신을 가다듬는 교본으로 하였다. 암행어사 박준이 “고을을 다스리기 3년에 온갖 폐단이 사라졌으니 훌륭한 벼슬아치를 얻으려면 이이가 바로 그 사람이다.”하였다. 병산 한치응이 지순의 묘갈명을 썼다. 병산은 청주한씨로 1651년 우의정을 지낸 한응일의 후손으로 병조판서를 지냈다. 치응이 문과에 장원하고 아들에서 현손까지 내리 5대를 문과 급제하였으며 치응과 아들 손자 3대가 판서를 지낸 명문 출신이다. 지순이 무후하여 수겸의 둘째 아들 세헌의 증손 휘령[세헌-귀몽-승순-휘령]으로 입양계대했다. 휘령은 생가로 공조참판 만익, 목사 만유의 숙부가 된다.
이휘령은 호가 고계이다. 181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동몽교관을 거쳐 1851년 동래부사가 되었다. 1853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뒤 도정과 부총관의 벼슬이 내렸으나 역시 사양했다. 도산의 가학을 이어 받아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 휘령의 배위는 권사주의 딸 안동권씨이다. 사주는 닭실 안동권씨 충재 권벌의 후손이다. 사주의 적은 집들이 번성했다. 사주의 숙부 정근의 후손에 만석꾼이 났다. 진사 권철연과 권상경 부자가 그 주인공으로 학행에 재물이 넘쳤다. 상경의 종손자 원기가 과기대 총장과 과기처 차관을 지냈다. 철연의 숙부 칭하의 증손 두환이 문학박사에 서울대 교무처장을 하고 있다. 정근의 적은 아들 사계 후손에 국연, 노섭이 학문이 깊으며 노섭의 조카 정기가 중앙일보 인사국장에 공영토건 인사상무를 지냈으며 정기의 매부 강증원은 강원산업 대표이사를 지냈다.
휘령의 셋째 손자 중인은 학행이 있다. 중인의 배위는 김석규의 딸 선성김씨이다. 석규는 호가 치암이다. 치암은 경북 영주 이산 우금 출신이다. 문절공 김담의 현손 윤의의 둘째 아들 우익은 삼판서 고택에서 분가하여 우금에 자리 잡았다. 우익이 문과하여 영원군수에 이어 안동의 제독관을 지냈다. 1620년 이괄의 반란 때 의병대장을 지낸 뒤 한성부서윤에 이르렀다. 우금에서 사마시에 합격한 이가 30여명, 문과 급제자 8명이 나왔다. 선성김씨 [우금]은 연안김씨 마을 [머름이], 함창김씨 마을 [신내]와 함께 인물, 재산이 울성해서 [반서울]이라는 칭을 들었다. 영남의 명망 있는 학자 강좌 권만이 당대 인물로 첫손가락을 꼽은 운학재 김한주가 우금에서 나왔다. 김석규는 현감 낙주의 손자로 백가서를 섭렵했다. 그는 영남 만인소를 올릴 때 소수 이만손에 이어 부소수로 활약했다.
중인의 아들 영호 또한 글하는 선비로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중인의 조카 상호와 그 아들 원영이 학행이 있다. 영호의 아들 가원이 현대 한국 한문학계의 태두로 퇴계학연구원장, 유도회총본부위원장, 연대교수, 단국대교수 등을 역임했다.
휘령의 현손 원태는 문행이 있으며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원태의 아들 동준, 동보, 동신, 동승이 진성이씨 현대 가문 상계 종파의 주역들이다. 동준은 인천제철사장, 대한양회사장을 역임하고 세계적인 퇴계학연구원을 설립 이사장으로 활약하고 있고 동보 동신 동승도 함께 참여하며 종사를 돌보고 있다. 동승은 서울대 독문과 교수를 지냈다.
휘령의 5대손 동은은 동준의 종백씨이고 퇴계 15대 종손이다. 동은은 맏아들 돈환[근필] 둘째 아들 정희[삼보 컴퓨터 부사장]를 두었고 딸 하나는 재령이씨 대종손 이문흠[삼보 컴퓨터 회장]에게 또하나는 의성김씨 학봉 종손 김종길[삼보 컴퓨터 사장]에게 출가시켰다.
이수겸의 동생 세헌의 아들 귀몽은 아들 여섯[종순, 이순, 명순, 사순, 승순. 연순]을 두었다. 종순과 이순은 학행이 있다. 이순은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참판 이정규가 경학에 깊고 행실 있는 선비로 이순을 첫손가락에 꼽았다. 이순은 효릉 참봉, 선공감 봉사, 금부도사를 거쳐 은진현감을 지냈다. 명순의 아들 휘규는 문과에 급제하여 영천군수, 청주목사, 동래부사 등 6고을을 살고 동부승지를 지냈다.
이순의 아들 휘병은 호가 소계이다. 휘병은 1855년 장헌세자의 추존을 요구하는 영남 만인소의 소수가 되었다. 휘병의 아들 만손은 호가 돈와이다.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국왕에게 가납되자 안동지방 유림에서 영남만인소를 올렸다. 이 때 예조참판을 지낸 늑암 강진규가 상소문을 썼다. 늑암은 조부 송서 강운과 과재 성근묵에게 글을 배워 시와 문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조부 송서 강운이 이재 권연하, 복재 강건, 신암 이만각을 가르친 영남의 종사이다. 조부의 가르침을 받은 늑암[역암]은 대원군이 신임하는 예조참판이다. 위정척사의 뜨거운 불길이 훨훨 타오르는 영남 유림의 절규를 가장 잘 표현할 문장가의 적임자로 강진규가 선정된 것이다. 그리고 소수는 인품이나 학문, 덕행에서 만인의 사표가 될 사람으로 이만손을, 부소수는 우금 선성김씨 석규를 각각 뽑았다. 이만운, 이만유 등이 함께 참여하였다. 그일로 인해 이만손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귀양을 갔다. 휘병과 만손 부자는 영남 유림을 대표하는 양대 소수로 명성을 날렸다. 종순의 손자 만호, 만손의 아들 중택, 만손의 조카 중흥, 중흥의 조카 병호, 명순의 손자 만숙과 만원, 만원의 손자 욱호 등이 학행이 있다.
이성철은 상계 종파의 적은집이다. 성철은 억의 둘째 아들이며 명철의 동생이고 수겸의 종조부[생가 조부]이다. 성철은 목릉참봉을 거쳐 산음현감, 한성부 판관을 지냈다. 병으로 49세에 세상을 떠났다. 배위는 장사랑 정기덕의 딸 청주정씨이다. 기덕의 부친은 전이다. 전은 김성일, 유성룡, 구봉령에게 글을 배웠다. 전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도사에 임명되었다. 성리학에 잠심하면서 많은 문인을 배출했다. 전의 조부 사성은 호가 지헌이며 어려서 김언기, 구봉령에게 글을 배우고 17세에 이황에게 글을 배웠다. 유일로 천거되어 현감을 지냈다. 전의 후손에 내성이 경학에 밝고 주자학에 깊어 문명이 높았다. 사성 동생 사공 후손에 현대 인물로 자유당 원내 총무 정문흠이 있다. 사공의 동생 사신은 김성일, 유성룡, 구봉령에게 글을 배우고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무찌른 공으로 선산군수가 되었으며 학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사신의 아들 칙은 학행이 뛰어나 암행어사의 천거로 제랑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사신의 동생 사의 후손에 탁은 호가 매계이다. 그는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을 지냈다.
이성철의 맏아들 고는 종가의 봉사손으로 입후했다. 성철의 둘재 아들 절은 세 아들 수태, 수대, 수인을 두었다. 수인과 세정 부자가 학행이 있고 세정 후에 만로가 문과하여 정언을 지냈다. 수대 후에 운호, 성호가 학행이 있으며 목호는 건국공로 훈장을 받았다.
이성철의 셋째 아들 실은 온화하며 후덕했다. 배위는 의성김씨 현감 학배의 딸이다. 학배는 학봉 김성일의 형 명일의 후손이다. 학배는 표은 김시온 문인이며 생원으로 태학에 유학했을 때 성균좨주 송준길이 “성균관 선비로는 김학배가 가장 뛰어납니다.”고 임금께 아뢰었다. 그는 문과급제하여 고성현감을 지냈다. 성균관에 경서 교정청이 설치되어 이단하, 김만중, 박신, 홍도 등과 함께 교정관으로 일했다.
이수연은 실의 아들이다. 수연은 밀암 이재의 문인이다. 청량산 및 낙동강에 있는 9곡은 산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이 9곡 중 단사협이란 곳에서 단사 김경온과 함께 이수연은 절경을 즐기며 스스로 호를 청벽이라 했으며 사서성리서에 심취하였다. 안접사 김상성은 “이수연은 경학이 밝아 강관의 반열에 두어야 한다.”고 천거하여 익위사 시직으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또다시 중신들이 경연에서 주청하여 익찬이 제수되었다. 그는 퇴계의 학문을 정리하여 [퇴계선생속집]을 편찬했다. 56세로 별세했다. 관찰사 남태량이 조정에 장계를 올려 “익찬 이수연은 대현의 후예로 가학을 훌륭히 이어 받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지난날 무신년 역변 때 위험 속을 무릅쓰고 능침에 이르러 소임을 다 했나이다. 조정에서 그의 어짐을 알아 그의 문려에 정표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고 하였다. 이에 임금은 정려를 하도록 하고 조정에서는 그의 행적을 뽑아 국조명신록에 실었다. 수연의 배위는 통덕랑 응하의 딸 풍산유씨이다. 응하는 서애 유성룡의 현손이다.
이세윤은 수연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사마시에 합격하고 적성현감을 지냈으며 벼슬에서 물러나 초가 삼칸에서 끼니를 잇기 어려웠다. 장인이 죽으면서 준 재산 문서 한 상자를 받지 않았다. 세윤의 후손 중찬은 문과하여 부정자를 지냈다.
이휘재는 수연의 현손이다. 휘재는 호가 운산이다. 1827년 생원시에 장원하고 1842년 경산현령으로 문회재를 창건하여 선비들의 학문을 크게 권장하였다. 그는 안성군수, 청풍부사를 지내고 안렴사 서당보의 천거로 홍주목사가 되었다. 홍주의 고을원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어 홍주에 공덕비가 섰다. 병인양요 때 군사를 모집하라는 어명을 받고 예안에 나가 모병을 하여 공을 세웠다. 그뒤 호조참의, 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했다. 고향 용계에서 성리학 연구에 잠심하였다. 의례변절을 정선하였으며 후진을 양성했다. 휘재의 아들 만시[군수], 손자 중린, 증손 원호 모두 학행이 있다. 휘재의 적은집에 은순, 만정, 중봉 등이 글하는 선비들이다.
이수택은 수연의 동생이다. 수택의 후손에 귀발, 휘각, 만상, 만여 등이 학행이 있다.
이신철은 성철의 동생이다. 신철의 증손 세백은 문과하여 승의랑을 거쳐 전적이 되었다. 임금이 그에게 내구마를 한 필 주며 돈령도정을 제수했다. 세백의 고모부로 청대 권상일이 있다. 세백의 후에 중섭이 글잘하는 선비이다.
이상은 퇴계의 맏손자 안도 이후, 즉 퇴계 종파인 상계파의 인물을 대략 훑어 본 것이다. 족보상으로는 종파, 염촌파, 강산정파, 병암정파, 계상파, 항곡파, 하산파, 칠창파, 염계파 등으로 나누고 있지만 여기서는 이 모두를 합쳐 편의상 상계파로 묶어 본 것이다.
퇴계 가문의 큰집 상계파를 일별해 본 결과 한양의 문중 8강이나 최고 문형 4대 가문, 충청도 양반 은진 송씨 가문, 호남의 행주기씨 가문을 둘러본 감회와는 천양지차가 나고 있음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그들 가문에 어깨를 겨루어 내놓을 것은 퇴계 이외는 아무 것도 없다. 한양에서부터 호남에 이르는 명문 대가 들에서 그렇게 흔하게 보던 상신, 판서를 상계 종파에서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변변한 참판 한 자리도 못했다. 한양의 명문세가들이 가문 마다 뽐내는 화려한 자랑거리 하나 없다. 한양의 영화와 명예는 죽령과 조령이라는 높디 높은 고개에 걸려 넘어 오지를 못했다. 한양의 명문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되었다. 문물, 풍속, 언어, 습관, 음식이 다른 인물이 사는 별세계가 펼쳐졌다.
바로 동방 유학의 이상향이 탄생한 것이다. 포은 정몽주로부터 점필재 김종직을 거쳐 정암 조광조를 통해 퇴계 이황에서 꽃핀 도학의 도원경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인, 의, 예, 지, 신의 종합 예술품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재원
이야기의 흐름에 관계된 것은 아닙니다만, 오류를 지적하면 ((" 하계는 퇴계의 둘째 아들 영도가 정착하여 영도의 손자 희철 후손들이
사는 곳이다. 이 곳 냇물 건너 남쪽 마을이 계남이다. 하계 뒷편에 원촌[계남과 원촌은 안동호에 수몰]이 있다. 원촌은 영도의 둘째 아
들 극철이 정착한 곳이다")) <<< 이 문장에서 이영도는 퇴계의 아들이 아니고, 셋째 손자입니다. 또한 이극철은 영도의 둘째아들이 아
니라, 영도의 아들 수졸당 이기의 둘째 아들입니다. 2005-02-11 오후 11:44:00
퇴계에 연원한 혈맥의 유장함 ! [나]
한국명문 (2005-02-13 오후 7:20:55) Hit : 231 Vote : 24
퇴계에 연원한 혈맥의 유장함 ! [나]
도산서원 건너편 마을 의인은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이다. 백두산의 기운을 받은 태백산의 양기와 낙동강의 음기가 합쳐 남쪽에 한덩어리 일월산을, 북쪽에 한덩리 청량산을 만들고 그 계곡을 굽이굽이 돌다 남은 태백의 양기가 낙동강변에 사정하여 한덩어리 뿌린 옥토가 의인이다. 강변에 띄운 배 모양의 의인은 태백 준령의 오지로 조선 양반 500년의 태평연월을 구가하던 동방의 낙토이다. 오늘에 와서는 낙동강 음기가 가끔 왕성해서 그 강의 음부인 안동댐의 옥문을 열면 의인은 만경창파 옥수에 잠겨 장관을 이룬다. 이것도 명당이 연출하는 묘경의 하나이다.
진성이씨 퇴계 가문의 의인파 파조는 퇴계 둘째 손자 이순도이다. 퇴계는 순도에게 [아순]이라는 이름을 지어 [근사록] 1질과 [주시잠명] 1책을 동봉한 편지를 보내 학문을 권장했다. 그는 우애가 돈독하고 성품이 선하였고 부친상을 당하여 애통해 한 나머지 여묘살이 일년이 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이 31세이다.
이영철은 순도의 하나 뿐인 손자이다. 그는 선현의 가르침을 받아 부귀영달을 원하지 않았다. 천거로 교관이 제수되었다.
이재건은 영철의 아들이다. 통덕랑을 지냈다. 배위는 현감 유원지의 딸 풍산유씨이다. 원지는 서애 유성룡의 장손이다. 원지의 호는 졸재이다. 어려서 조부 서애한테 배우고 나중에 숙부 수암 진에게 배웠다. 병자호란 때 의병장 이홍조와 함께 활약했다. 경사와 제자백가서에 통달했다. 뿐만 아니라 역학, 천문, 지리 , 예악, 음률, 의학, 상수에 까지 두루 밝았다. 유원지의 후손에 인물이 쏟아져 나왔다. 병조판서 상조, 예조참판 태좌, 대사간 치목, 우부승지 진한, 대사간 지영, 승지 도휘, 공조참의 광목[모두 문과급제자임] 이외 글 잘하는 선비들이 수도 없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원지 손자 유후장이 유명하다. 후장의 호는 주일재이다. 그는 조부 원지, 족숙 세명, 목재 홍여하에게 글을 배웠다. 퇴계의 도학이 서애 성룡으로부터 그의 셋째 아들 수암 진을 통해 맏손자 원지에게 전해지고 원지의 손자 후장에 이르렀다. 임여재 유규도 유명하다. 규는 원지의 현손이며 후장의 종손자이다. 규는 지중추부사 강항에 의해 경학으로 천거되고 상신 채제공에 의해 또다시 천거되어 도정의 벼슬까지 지냈다. 규 역시 제자백가서에 통하고 음양, 산학, 음률, 역상에도 밝았다. 이황의 학문이 성룡, 진, 원지, 후장을 통해 규에 이르렀다. 그는 퇴계의 학풍을 크게 신장시켜 이름을 떨쳤다. 원지 후손에 건국공로 훈장을 받은 이로 소우, 시보, 시훈 등이 있다. 현대 인물로 국회의원 유돈우, 주일대사 태하, 육군준장 창우, 신세계백화점사장 한섭, 농협중앙회이사 시동 등이 있다.
이재건은 무후하여 끝에 동생집의 셋째 아들 수증으로 입양계대했다. 재건의 동생 양도 무후하여 끝에 동생집의 맏아들 수홍으로 입양계대했다. 양의 동생 경도 무후하여 집의 둘째 아들 수항을 입양시켰다. 영철의 세 아들이 모두 후사가 없는 것을 넷째 아들 집이 8남 2녀를 낳아 세 명의 형집 대를 이어주었다. 집은 의인 진성이씨 가문의 큰 대들보 역할을 했다.
이집은 자가 백생이며 호는 수월헌이다. 집은 의인 마을 절벽 위에 정자를 짓고 강 주변 큰 바위에서 유유히 흐르는 강물 속에 노니는 물고기를 구경하며 [관어암] [조은대]라 하였으며 성현의 말씀으로 심신을 정결히 하는 곳을 [세심대]라 하고 자연 속에 절로 즐겁게 살아 8남을 낳아 마을을 번창케 했다. 집은 서애 현손 유일재 유후장의 문인이다. 그는 헌릉참봉을 거쳐 화순, 삼가의 현감을 지냈다. 이인좌의 반란 때 이수영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세술은 양의 손자이다 양은 영철의 둘째 아들이다. 세술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현감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배위는 관찰사 정옥의 딸 청주정씨이다. 옥은 약포 정탁의 후손이며 경북 예천에 세거하는 약포 가문의 종손이다. 정탁은 이황의 문인으로 좌의정을 지냈다. 탁은 경학에 정통하고 천문 , 지리, 병법에도 통했다. 탁의 아들 윤목은 호가 청풍자이다. 경사는 물론 예악, 병형, 음양, 율력에 두루 통했다. 그는 초서로 당대 제1인자이다.
이구석은 세술의 둘째 아들이다. 호는 반와이다. 경산과 영산의 현감을 지냈다. 젊을 때 길을 가다가 숲속에서 아이가 비명을 질러 가보니 문둥 병자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 아이 간을 내 먹으려던 참이었다. 사연을 들으니 흉년에 굶주린 어미가 돈을 받고 그 아이를 그들에게 팔았다는 것이다. 구석은 그 값을 치르고 길거리집에 맡겨 키우게 했다. 그 아이가 자라서 구석의 집 노역을 자청했으나 굳이 물리치고 노자를 주어 돌려보냈다. 기호지방의 남인 학자로 당대 유림의 종장인 성재 허전이 구석의 묘명을 지었다.
이수항은 경의 아들이다. 경은 영철의 셋째 아들이다. 수항은 호가 산후재이다. 그는 경술로 천거되어 감역에 제수되었다. 가학을 이어 받아 성리학 연구에 힘을 쏟았다. 퇴계 [문순공 실기 도산급문록 사칠통변연원록부주] 등의 편저를 남겼다. 수항의 아들 세택은 학행이 있다. 세택의 넷째 아들 구호는 통덕랑이다. 구호의 배위는 참판 이헌묵의 딸 여주이씨이다. 헌묵은 회재 이언적의 후손이다. 언적은 이조판서를 지내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원이다. 헌묵은 영조조에 문과하여 도승지를 거쳐 호조참판을 지냈다. 헌묵의 숙부 순중 후손에 외무부, 문공부, 체육부의 장관을 지낸 이원경이 나왔다. 헌묵의 적은집[의택 후]에 코오롱 초대 회장 이원만, 2대회장 이동찬, 3대 회장 이웅렬 3대가 나왔다. 세택의 셋째 아들 구록의 딸은 참판 유태좌에게 출가했다. 태좌는 서애 후손이며 원지의 6대손이다. 세택의 동생 세탁은 생원에 현감이다. 세탁의 동생 세명은 처사이다. 세명의 배위 의성김씨는 열행으로 복호를 명받았다.
이수항의 둘째 딸은 풍산 김씨 첨추 김서필에게 출가했다. 서필은 학사 김응조의 후손이며 정의 아들이다. 학사 김응조는 대현의 아들이다. 대현은 8형제를 두었다. 8형제가 모두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 중 5형제[봉조, 영조, 연조, 응조, 숭조]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고금에 드문 일이라 하여 그들이 사는 동네 오릉동을 오미동으로 고치게 하고 마을 어귀에 경상감사로 하여금 봉황려라는 문을 세우게 하였다. 5형제 중 영조와 응조가 현달하였다. 망와 영조는 이조참판을, 학사 응조는 한성부우윤을 지냈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상의 기강을 하도에서는 한강 정구가, 윗녘에서는 망와 학사 형제가 붙들어 세웠다.”고 하였다. 김서필의 아버지 정은 1708년 문과에 급제하여 옥천 군수로 나갔을 때 민가 600여호와 공청 수백칸이 불탄 사건에 대해 뒷수습을 잘 하였다. 이조판서 민진원이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려 표리 한 벌을 하사 받았다. 그뒤 강릉대도호부사로 나가 삼백석을 내놓아 굶주린 백성을 돌보았다. 감사 이복명이 그의 치적을 조정에 알리기를 “김정의 치적이 도내에 제일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숙마 한 필을 하사했다. 서필의 증손 종태는 병조참판에 올랐다. 종태 후손으로 현대에 부산고속 이사 장환, 서울지하철차량사무소장 맹수가 있다. 응조 후손으로는 육군대장 김재창을 비롯하여 공군소장 진섭, 공군준장 병탁, 박사 교수에 중대, 두산산업이사 천섭, 장학관 재영 등이 있고 재헌의 배위 고교장 이영애, 정춘의 시부 내무차관 이상룡, 진섭의 딸 미영 부군 박사 김영주 그리고 영주의 부친 박사 운태, 재호의 배위 송혜숙 혜숙의 부친 석탄공사안전본부장 송재규, 순희의 부군 박사 교수 안병렬, 천섭의 여동생 의학박사 애수 부군 산림조합중앙회장 차종태 등 풍산김씨는 여성쪽의 사회 진출이 많다. 이것은 응조 집에 한한 현상만이 아니다. 풍산 김씨 가문 전체를 보면 그 현상이 더 두드러진다. 봉조 후손에 수필가 및 교수인 진섭의 딸 옥교 부군 박사 쌍용양회사장 김채겸, 옥교 동생 문자 부군 교수 배한경, 의학박사 만섭 딸 선자 부군 변호사 서재웅, 대판흥업은행이사 흥섭 딸 일희 부군 재일본거류민단부단장 김시현. 숭조 후손에 대검검사 완섭의 아들 박사 교수 재영의 배위 약사 김혜규 그리고 혜규의 부친 대법원장 김병로, 혜규의 동생 의학박사 가미, 대검검사 완섭의 딸 영자 부군 서울공대 학장 이양. 영자 동생 달생 부군 박사 고려대 부속병원장 신흥수 흥수 부친 의학박사 신필호, 달생 동생 영옥 부군 공학박사 홍승우, 영옥 동생 양미 부군 서울법대교수 이태로, 보사부국장 하섭의 딸 재남 부군 박사 육군소장 대한적십자병원장 박성대, 부산부시장 병순의 딸 경옥 부군 육대교수.....등등이다. 이집 여성쪽 사회 진출을 다 열거하려면 하룻밤을 지새워도 부족하기에 여기서 그친다. 풍산김씨 오미동과 오록의 딸네들 데려가면 잘 산다는 이야기 나올만하다. 그렇다고 남성쪽이 기우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풍산김씨 명성은 거슬러 올라가 인조대왕을 놀라게 하고 500년을 한결같이 영남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동순은 구천의 아들이며 구천은 수증의 손자이고 수증은 영철의 맏손자이다. 영철은 의인 파조 순도의 장손이다.
이동순은 의인을 명당으로 만든 진성이씨 인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느 한 지역에 대형 백화점이 생기면 그 지역 땅값이 올라 간다, 인본주의 유교사회에서는 어느 지역에 인물이 하나 나면 그곳의 땅값이 치솟는 것에 맞먹는 명성이 났다. 이동순이 나온 뒤부터 의인은 오늘날에 삼성이나 현대, 엘지와 같은 렛델이 붙어버렸다. 진성이씨 의인댁이라 하면 그 집 딸은 보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데려갔다. 그 집 도령이라 하면 영남사람들 대우가 달라진다. 요즈음은 삼섬의 애니콜 같은 물건이 세계에 명성을 떨치듯이 조선 사회에서는 사람이 그렇게 명성을 떨쳤다. 삼성의 애니콜이 인기를 끌면 삼성과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도 한국 사람이면 기분이 좋다. 그와 마찬가지로 의인의 이동순은 진성이씨 뿐만 아니고 타성씨도 덩달아 자랑스러워 했다. 오늘로 말하면 팬들이 많이 생긴다는 이야기이다.
이동순이 왜 그렇게 인기가 있었는가? 진성이씨 퇴계 가문에서 참판 벼슬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퇴계 이후로 상계파 후손들이 벼슬을 한 것이 고작 현감이나 군수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이동순이 병조참판이 된 것은 분명 퇴계 가문의 이변이라 봐야 한다. 퇴계 보고 군수 정도 하기를 권장했던 가문이 아니던가? 그 유훈을 따라 그 자손이 모두 하나 같이 군수 현감을 하다가 어느날 이동순이 불쑥 참판 벼슬에 올랐다. 주위의 영남 사람들은 퇴계 가문의 경사라며 축하 일색이지만 진성이씨 가문의 어른들은 이동순의 선전을 크게 기뻐하면서도 가훈과 어긋나는 출세에 대해 성만의 폐해가 없기를 내심으로 기도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퇴계 가문의 겸양이라는 미덕의 관점에서는 참판이 호화롭고 분수에 넘친다고 할 지는 모르지만 그 이유만으로 그 인기에 대한 설명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영남은 알다싶이 퇴계가 수를 쉽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직서를 올린 끝에 권력이라는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따라서 동인이 중앙 정계 무대에서 물러난 이후 영남인이 참판에 오르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와 같이 힘들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영남의 참판은 한양 명문세가들의 영의정보다 더 큰 대접을 받았다. 오늘날도 전방 부대에 별이 하나 뜨면 수천 명의 장졸이 긴장을 하고 장군 짚차가 지나가는 노변의 수풀까지 떤다. 그러나 육군 본부에 별이 버글버글하는 핵심부대로 가면 별 하나는 대통령 순시 때는 손수 대걸래 들고 쫓아 다녀야 할 판이다.
한양의 상신 한 자리에 대해 문중 8강의 사람들은 늘 흔히 보기 때문에 뭐 그리 대단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영남의 참판은 전방에 우글거리는 보병들 속에 싸이렌을 울리는 장군의 출현보다 10배는 더 놀라워 한다고 보면 된다. 이동순은 영남인들이 신처럼 받드는 퇴계 이황의 가문에서 그 어려운 참판 벼슬을 한 것이었기에 인기가 있었으며 그 인기는 더욱 값진 것이었다.
이동순의 인기는 반짝하고 끝난 것이 아니다. 동순의 족질 휘승이 문과에 병조참판이 되고, 동순의 조카 휘병이 문과에 승지, 휘승의 재종질 만기가 문과에 승지, 동순의 증손 중태가 문과에 승지, 휘승의 재종질 만형이 문과에 교리, 동순의 족질 휘림이 문과에 교리가 되어 진성이씨 의인의 양반들이 중앙 정계 요직이 있는 한양으로 입성했다. 한려수도의 외도보다 더 적은 마을 의인! 명당의 경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휘부는 동순의 아들이며 승지 중태의 조부이다. 호는 치응이다. 영릉참봉을 거쳐 단성현감으로 나갔다. 세금을 깍아주고 어려운 백성을 돌보며 선비를 기르고 선정을 베풀어 고을 사람들이 생사당을 지었다. 그뒤 영천군수로 나가 수재민 800여호를 구휼했으며 두 번째 수해를 당했을 때도 경비를 내놓아 제방을 복구했다. 사람들이 그 제방을 [이공재]라 불렀다. 이어 삼척부사로 나갔을 때 논밭 300여결이 유실되고 360호가 떠내려 갔다. 이 때도 자비를 보태 복구하였다. 그리고 묵은 폐단을 깨끗이 씻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그 덕을 기려 [만세청풍]이라 돌에 새겼다.
의인에는 번남댁이라는 고택이 있다. 고종 연간 대원군 집정시에 지은 건물로 99칸으로 지었는데 지금은 50칸 정도 남았다. 서울 창덕궁을 모방한 집이다. 번남은 이동순의 당호이다. 사랑채는 대원군의 친필인 [좌산]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좌산 이만윤은 동순의 손자로 이 건물을 지었다. 지금 걸려 있는 삼호당기는 이만윤이 글을 짓고 만윤의 아들 중태가 글씨를 썼다. 번남댁은 의인 마을이 번성했던 흔적으로 남은 귀중한 고택이다.
퇴계 가문 상계 종파 이안도 후손은 가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봉제사 접빈객에 바쁜 터에 겸양의 미덕을 실천하느라 관직에 대한 실적을 내지 못하고 조그마한 지방에 원을 지내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 실적은 겨우 승지 두어명 내는 것으로 그쳤다. 그러나 둘째집 이순도 후손은 맏집보다 선업 수성 책임이 홀가분한 상태에서 관직 진출에 성과를 거두어 영남 유림에 활기를 주고 야망을 북돋웠다.
퇴계에 연원한 혈맥의 유장함! [다]
한국명문 (2005-02-16 오후 1:08:10) Hit : 279 Vote : 21
퇴계에 연원한 혈맥의 유장함! [다]
하계에 퇴계 이황의 셋째 손자 이영도가 터전을 잡았다. 토계 마을을 관통하는 토계수가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속칭 웃토끼라 불리는 상계 아랫 마을에 아랫토끼라 하는 하계가 있다. 사실 하계는 아랫토끼가 아니라 슈퍼토끼에 해당한다. 상계의 퇴계 종통이 끊기는 것을 아랫토끼의 이영도가 이었기 때문이다. 상계종파의 장손 이안도의 후손은 모두가 영도의 혈맥이다. 이영도는 퇴계 가문의 종통을 잇게 한 매우 귀중한 인물이다. 뿐만아니라 본인의 인물이 성현의 손자답게 우뚝하고 그 후손들의 인물이 또한 출중하기 때문이다. 하계는 진성이씨 인물의 보고다. 하계는 계남과 원촌의 영걸을 길러낸 본령이다. 하계에 뿌리를 둔 계남, 원촌을 포함한 이영도 후손의 제제다사는 태백산의 영롱한 기운을 3-400년을 두고 힘차게 뿜어냈다. 태백산 준령의 기운을 뿜는 명인들의 대부가 이영도이다.
이영도는 이미 9세에 중용을 읽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 공로를 세웠고 광해군 때 절의를 지켰으며 병자호란 때 의리를 존중했다. 이 세 가지는 망우당 곽재우의 수성록, 금역당 배용길의 향병일록을 비롯하여 서애 유성룡의 장계, 약포 정탁의 차자, 우복 정경세의 상소문에 이어 계암 김령의 유고, 미수 허목의 묘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영도는 임진왜란 때 계암 김용과 더불어 거의하여 김해를 대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도총관으로 군무를 총괄했다. 그는 곽재우, 김면 등이 용궁, 예천 등지에서 적군을 섬멸하는 작전계획을 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의병대장 김해가 전사한 뒤에도 그는 끝까지 진중의 군무를 다스렸다.
이영도는 또한 창녕 화왕산성의 의병진에 가서 장작불을 쌓아놓고 의병들과 함께 산성 사수를 피로 맹세했다. 적장 가등청정이 “이 성중에는 의기가 충천하고 있으니 감히 범할 수 없다.”하며 철군했다.
명나라 양경리 호가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용만에 와서 군사의 급식 문제를 거론할 때 비국에서 이영도가 적임자라 하여 그를 파견했다. 그들의 질문과 요구에 조리 정연하게 답변하였다. 이에 양경리가 크게 감탄하여 “참으로 재상의 기국이 있다.”하면서 “국왕에게 크게 쓰라 추천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접반사 이덕형이 조정에 천거하여 정랑에 승진하였다. 명나라 구원병이 경주로 남하하자 그 군대 급식 준비의 명을 받고 현지에 가는 도중 고향 부근을 지나면서 집에 들리지 않고 명나라 진중으로 달려가 군무에 충실하며 흩어진 난민을 위무하였다. 이와 같은 공로로 선무원종공 2등에 기록되었다.
간악한 무리들이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강금시키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가두었을 때 이영도는 영천군수로 있다가 탄식하기를 “흉악무도한 무리들이 마치 개가 겨를 핥아 먹다가 맛을 들여 쌀가지 범하는 격이니 삼강이 무너졌다. 어찌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느냐?”하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영도는 영남지방 고가세족들의 지주와 같은 존재이다.
이영도의 아들 기는 앞에서 이야기 하여 영도의 손자 희철로 넘어간다. 희철의 후손이 하계의 주력부대이다. 희철은 찰방의 벼슬을 할 때 이웃집이 염병으로 온 식구가 다 죽고 어린 딸 하나만 남았다. 그는 그집이 장례를 치루게 돌봐 주었다.
이수약은 희철의 손자이다. 그는 7남 5녀를 낳아 하계를 번창시킨 주인공이다. 참봉을 했으나 사후 아들 세사가 지중추부사가 되어 이조판서의 증직이 내렸다. 조선조 말엽 영남의 대학자 서산 김흥락이 묘명을 찬했다. 배위는 처사 강자의 딸 진주강씨이다. 강자는 이오당 강흡의 아들이다. 흡은 심장세, 홍석, 정양, 홍우정과 함께 태백오현으로 일컬어졌다. 강흡이 5남 1녀를 낳고 손자 13명에 손녀 3명으로 후손이 번창하여 영남의 명문이 됐다. 강흡의 딸이 하계로 출가하여 7남 5녀를 낳았으니 청출어람하는 다산의 복을 지녔다 할 수 있다. 강흡의 후손은 방대해서 한꺼번에 다 이야기 할 수 없다. 단지 흡의 셋째아들 자의 후손만 보기로 하자. 자의 증손 윤의 집이 강흡 가문의 노른자위이다. 이 집은 영남에서 흔히 말하는 좋은 집으로 서너 손가락 안에 든다. 참판이 귀한 영남에 양대 참판이 난 집이다. 윤이 문과하여 관찰사이고 윤의 손자 시환이 삼산재 김이안의 문인으로 경술이 뛰어나 천거로 세마가 되었다. 좌의정을 지낸 남곡 송근수가 그의 행장을 지었다. 시환의 아들 태중이 문과하여 병조참판을 지내고 태중의 아들 건이 문과하여 예조참판을 지냈다. 영남에서 동인이 쇄락한 뒤 부자나 형제가 참판을 한 집은 몇집 되지 않는다. 관찰사 윤의 증손, 현손 대에 부자 참판이 났으니 영남이 떠들썩했다. 이수약의 장인 강자의 후손에 현대 인물도 만만치 않다. 박사에 고려대교수 영남대 학장 면희, 면희 아들에 아주대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 신영 그리고 신영 배위 부친 제일은행장 정규황, 신영 동생 축협 중앙회 부장 신홍, 신홍 동생 과학수사연구소소장 카토릭의대 교수 신몽 그리고 신몽 배위 박사 순천향의대 교수 이혜경, 신몽 누나 정애 부군 대원과학대 학장 기주연, 면희 조카 박사 서울공대 교수 신형, 면희 종형 화일토건 감사 영희, 영히 아들 신세기 통신 대표이사 신종, 자의 아들 재광 후손에 국회의원 인권 변호사 신옥 등이 있다.
이세진은 수약의 맏아들이다. 문과하여 시강원 사서를 지냈으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건지산 선영 아래 집을 얽고 성리서를 연구하며 가업을 이었다.
이세사는 수약의 넷째 아들이다. 그는 총명하여 10여세에 이미 경사를 두루 섭렵했다. 1744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내렸으나 그 때마다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자하봉 아래 만화헌이라는 집을 짓고 음풍영월을 했다. 또 벼슬이 내려 입궐하여 사은 숙배하고 돌아 오니 임금이 “너는 대현의 후예로 번번이 임금의 부름을 어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어리석은 신하로 무거운 소임을 맡는 것은 임금을 속이는 것이며 그것으로 인해 조상을 욕되게 하는 죄가 더욱 무거워 차라리 명을 어기는 벌을 달게 받겠나이다.”고 하였다. 그뒤에도 임금은 판결사, 공조참의를 제수하였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임금은 하는 수 없이 경상감사에 명하여 세찬을 내리고 가의대부에 올렸다. 이어 자헌대부, 정헌대부를 내리고 옷감과 식물을 하사했다. 그뒤 숭록대부 지중추부사의 벼슬이 내리고 기로소에 들었다. 그가 실제로 관직에 있은 것은 18일 정도이다.
이세진의 후손에 익호, 세호가 학행이 있다. 세진의 동생 세관의 손자 택순이 글하는 선비이고 택순의 손자 만송은 문과하여 정언을 지냈다. 만송의 동생 만백의 아들 중두는 문과하여 이조참의를 지냈다. 중두의 아들 국호, 필호는 학행이 있다. 만백의 현손은 동봉이다.
이동봉은 경술국치를 당해 족조 향산 이만도가 순국하자 비분강개하여 항일지사들과 교유하며 구국의 결의를 다졌다. 고종황제 인산이 거행된 뒤 청장년들과 함께 예안 장날 거의하여 수천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어 안동시일을 기하여 거의하기로 하고 군청과 경찰서로 진격하다 수백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되어 주모자로 악형을 받았다. 대구로 이송되어 오래도록 구류생활을 하고 심한 고문으로 병세가 위중하여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27세로 세상을 떠났다.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동산 유인식이 묘지를 썼다. 만송의 6촌 만우는 첨추이다. 만우의 아들은 중언이다.
이중언은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을 지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5적의 극형을 청하는 소를 올렸다. 한일합방이 되자 향산 이만도의 순국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 여러 날이 지나 숨을 거두었다.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이태순은 택순의 동생이다. 태순은 하계에서 참판을 한 인물이다. 진성이씨 가문에 참판이 모두 6명 나왔다. 6명 중 2명이 퇴계 둘째 손자 순도의 후손이고 나머지 5명은 퇴계 셋째 손자 영도의 후손이다. 참판 6명은 구운, 태순, 언순, 동순, 휘승, 만운이다. 구운은 원촌, 태순은 하계, 언순과 만운은 계남, 동순과 휘승은 의인이다. 네 개 마을에서 참판이 6명 나와 영남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았다.
영남에 이름 있는 가문들을 살펴 보면 영남의 참판이 얼마나 귀한 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동인 몰락 이후를 기준했지만 퇴계와 그 제자들은 포함시켰음]
************참판을 하나도 못낸 가문*********************
진주강씨 청풍군수 강혜 증손 강우,무,서, 속 가문. 개성고씨 승지 고유 선조 고흥운 가문, 광산김씨 김언구, 김언기 가문. 광산김씨 김부필, 김부의 가문. 광산김씨 김부인, 부신, 부륜 가문. 영양남씨 경주부윤 남천택 증조 남응원 가문, 달성서씨 명필 서성구 고조 서명세 가문. 창녕성씨 우승지 부용당 성안의 부친 성괴 가문. 경주손씨 불천위 손종로 증조 손경 가문. 성산이씨 성리학 6대가의 일인 이진상 선조 이정현 가문. 영천이씨 농암 이현보 아들 이문량, 희량, 중량, 계량 가문. 예안이씨 예안백 이혼 후손 이대인, 홍인, 순인 종형제 가문. 재령이씨 이조판서 갈암 이현일 조부 이함 가문. 전주이씨 세종 후손 송월재 이시선 부친 이영기 가문. 진주정씨 대제학 우복 정경세 가문. 현풍곽씨 관찰사 망우당 곽재우 조부 곽지번 가문
************참판 1명 배출 가문*************************
선성김씨 김륵 가문. 안동김씨 김기보 가문. 안동김씨 천사 김종덕 선조 김세우 가문.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 부친 김진 가문. 의성김씨 척암 김도화 선조 김원 가문. 반남박씨 대사간 소고 박승임 조부 박숙 가문. 함양박씨 승지 박수서 조부 박종린 가문. 전주유씨 병조참판 정재 유치명 선조 유성 가문. 풍산유씨 서애 유성룡 부친 유중영 가문. 진성이씨 이조참판 송재 이우 가문[이우는 동인 몰락 이전으로 통계에서 제외]. 한산이씨 대산 이상정 가문. 청주정씨 공조참판 한강 정구 가문. 경주최씨 12대 만석꾼 선조 최진립 가문. 해평평야 부호 관찰사 인재 최현 조부 최치운 가문. 창원황씨 예조참판 식암 황섬 부친 황응규 가문. 인동장씨 여헌 장현광 조부 장계증 가문.
********참판 2명 배출 가문*******************
의성김씨 동강 부친 김희삼 가문[사월, 해저].
********참판 3명 배출 가문***********************
여주이씨 문묘배향 회재 이언적 가문. 진주강씨 강징의 아들 정민공 강흡 형제 가문.
********참판 4명 배출 가문**********************
풍산김씨 망와 김영조 증조 김의정 가문. 진주강씨 우의정 강사상 부친 강온 가문[상주 봉대]
********참판 6명 배출 가문************
진성이씨 퇴계 이황 가문.
영남에서 명문이라 일컬어지는 20여 개 가문[이상 명단 이외 가문 포함]이 참판 하나 못냈고 20여 개 가문이 겨우 한 명 배출 했을 정도이며 참판 2명 이상 낸 가문이 여섯 가문에 불과하다. 이러니 영남 참판 귀하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이태순은 1801년 문과하여 교리, 장령 등을 지냈다. 지방 고을원으로 나갔을 때 치적이 좋아 암행어사 김학순의 장계로 그 사실이 조정에 알려졌다. 그는 대사간, 동부승지, 공조참의 등을 거쳐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태순의 손자 만덕은 문과하여 정언을 지냈으며 또하나의 손자는 당대의 석학 신암 이만각으로 정재 유치명의 수많은 제자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명성 있는 학자이다. 이 3조손은 진성이씨 하계의 주가를 상종가로 올려 놓은 사람들이다. 의인의 병조참판 이동순의 번남댁과 하계의 병조참판 이태순의 초초암댁은 진성이씨 퇴계 가문 중에서도 일류들이다. 태순의 배위는 첨지중추부사 강색의 딸 진주강씨이다. 송서 강운은 태순의 처남이다.
이태순의 맏손자 만억은 통덕랑을 지냈다. 만억의 아들 중묵은 역시 통덕랑을 지냈다. 만억은 진주강씨 대사간 강하규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다. 하규는 송서 강운의 손자이다. 만억은 딸을 잘 키워 의성김씨 서산 김흥락에게 출가시켰다. 서산은 한말에 영남을 대표하는 대학자의 한 사람이다. 학봉 김성일의 종손으로 석학이면서 독립투사인 제자들을 수없이 많이 배출했다. 서산 제자들은 의병대장 급 인물에 권세연, 이상룡, 김동삼 등이 있고 석학으로 권상익, 이승희 이외 이중업, 송준필, 기대락, 김원식, 김연환 등이 있다.
이야순은 태순의 4촌이다. 야순은 호가 광뢰옹이다. 그는 대산 이상정과 천사 김종덕의 문인이다. 그는 뇌석정을 중건했으며 암행어사 이우재의 천거로 경기전 참봉이 되었다. 성리학 연구가 깊고 예학에 밝았다. 문장이 뛰어나 이태순과 함께 하계의 명성을 치켜 올렸다. 야순의 아들 휘정도 경술이 뛰어나 부자 명성이 높았다.
이세진의 둘째 동생 세항의 후손에 선구, 현구, 윤석 등이 학행이 있고 병호는 심학과 성리학을 두루 섭렵하여 경북 영주를 대표하는 당대의 석학으로 명성이 높았다.
이세태는 세진의 6촌이다. 세태는 문과하여 참의를 지냈다. 세태의 아들 구경, 구경의 아들 헌순, 구경의 손자 휘장, 구경의 증손 만두, 만규 모두 글잘하는 선비들이다. 만규는 문과하여 교리를 지냈다.
이가순은 지중추부사로 기로소에 들고 겨우 관직에 18일 있었던 이세사의 손자이다. 가순의 3대[가순, 휘준, 만도, 만계]는 병조참판 이태순 3조손[태순, 만덕, 만각]과 함께 하계의 명성을 진동시켰다. 가순은 3대에 문과 넉장을 냈다. 거기에 이만도 3대가 독립운동을 하여 금성첨화의 명성을 얹고 진성이씨 퇴계 가문의 학문과 충절을 힘껏 자랑하는 금자탑을 쌓았다.
이가순은 1813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정언, 수찬 등을 거쳐 실록 기주관이 되고 부응교로 임금에게 치국의 도리를 강의하여 왕대비로부터 표리 한 벌을 하사 받았다. 순흥 와란촌에 은거하며 송서 강운, 소암 이병원, 수정재 유정문 등과 문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이휘준은 이재 권연하와 긍암 이돈우와 함께 장인 송서 강운에게 글을 배웠다. 그는 아버지에 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 대사간 , 호조참의, 이조참의, 대사성을 지냈다. 휘준의 배위는 세자시강원 필선 강운의 딸 진주강씨이다. 강운은 강도오충의 일인으로 일컬어지는 불천위 충열공 강위빙의 후손이다. 강운의 손자 셋이 현달하였다. 한규는 동지돈녕부사이며 하규는 문과에 대사간, 진규는 문과에 예조참판으로 그 유명한 영남 만인소의 글을 쓴 문장가이다. 강운은 이태순의 처남이며 이가순과 사돈간이다. 강운의 아버지 색의 딸이 이태순의 배위가 되었으며 강운의 딸이 이가순의 며느리가 된 것이다. 퇴계 가문의 초대형 토끼 마을 하계 명성의 선봉장 이태순과 과환, 학문으로 빛난 3대[가순, 휘준, 만도]에 연이어 충절로 감동을 준 3대[만도, 중업, 동흠]를 낳은 하계 최고의 명가가 내리 네 번[태순, 휘준, 휘택의 딸, 중묵]을 혼인한 강운 가문은 고가세족이 아닌 영남의 이방인이다. 강운은 앞에서 말한 양대 참판을 낸 진주강씨 이오당 강흡 형제 가문[경북 봉화 법전 문중]의 혈맥이다. 진주강씨는 남인의 세계에 중간에 들어온 외래인인데 오자 말자 영남의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했다. 진주강씨는 통정공 강회백과 통계공 강회중 형제가 번창했다. 통정공 후손은 호남에서 뿌리를 내리고 통계공 후손은 영남의 봉대, 법전, 의령에 터를 잡고 영남의 양반 기록을 하나 하나 갱신했다. 위에서 본 바 대로 진성이씨 퇴계 가문이 참판 6명을 내서 수위를 차지한 것을 봉대가 4명, 법전이 3명 도합 7명을 내서 퇴계 가문을 압박하여 영남 사림을 경악시켰다. 법전은 병자호란 이후 낙남한 이후 문과급제 제1순위 진성이씨를 앞섰다. 병자호란 이후 한말까지 단기간에 퇴계 가문 문과급제 수보다 더 많은 급제자를 내서 영남 제일위 기록을 갱신하여 또한 번 영남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의령의 진주강씨는 충효열로 12정문이 서서 영남 사람들 혀를 두르게 했다. 단위 가문으로 영남 양반을 따지면 진성이씨 퇴계 가문, 의성김씨 학봉 부친 청계 김진 가문, 풍산유씨 서애 부친 유중영 가문을 흔히 든다. 소문중단위가 아닌 씨족 단위로 보면 영남에 다섯 개의 명문거족이 있다. 그것은 안동권씨, 의성김씨, 진성이씨, 풍산유씨, 진주강씨이다. 진주강씨는 대족이지만 중간에 들어온 이방인으로 비교적 영남에 뿌리가 얕아서 영남의 모든 양반 기록에서 나그네 취급을 받았다 할 수 있다.
태순의 손자 신암 만각과 가순의 아들 휘준과 강운의 종제 복재 건, 강운의 세 손자 한규, 하규, 진규 모두 송서 강운에게 글을 배웠다. 태순의 두 손자 만운, 만각과 가순의 아들 휘준과 가순의 손자 향산 이만도와 유천 이만계, 송서 강운의 종제 건, 강운의 손자 한규, 하규 진규 양가 자손의 학문과 충절은 당대에 장관을 이루었다. 여기에 초초암 맏손자 이만억의 사위 서산 김흥락, 향산 이만도의 처숙부 이재 권연하까지 합친 14인은 태백의 영기를 압축해서 일시에 뽑아낸 영남의 명인들이다. 이들은 영정조 시대의 루네쌍스가 낳은 영남 명사들이다. 이들 14인의 학문과 충절은 혈연, 학연, 지연이 꽃피운 유교 사회의 특산품이며, 영남 유학이 태평성대를 구가한 도원경의 산물이다.
이태순의 장인 강색과 이휘준의 장인 강운의 후손으로 현대 인물은 대법관 강신욱, 포항제철 사장 강창오, 은행 감독원 부원장 강신경, 경북 경찰청장 강수창, 대한제지 부회장 강신홍, 대한 벌크터미날[대한 그룹] 사장 강형창, 서울지법 판사 강석훈, 남영나이론 공장장 강신박, 한농 방계 사장 강민기, 공군 준장 강희간, 삼성물산 이사 강춘기, 국세청 징세국장 강희탁, 내셔날은행 본부장 강희인, 쌍용건설 전무 강희좌, 기술고시 강혁기. 변호사 강신원, 한외투자금융 전무 강희완 등이 있으며 문객으로 공영토건 회장 변호석과 사장 변강우, 풍전산업 사장 유시관, 경주 최부자 집 성남병원 이사장 최염 등이 있다.
이만도는 호가 향산이다. 1866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교리, 사간, 장령 등을 지내면서 그 명성이 높았다. 시강을 할 때 임금은 진언을 다 받아들였다. 그뒤 응교, 양산군수 등을 거쳐 동부승지에 이르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졌다. 이만도는 소모관 이용호와 창의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서 1896년 1월에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향산은 [예안통문] 발송을 주도하고 의병장을 맡았다. 영양 청기에서 활약하는 벽산 김도현을 중군으로 영입했다. 예안의병의 중심인물로 출전하여 안동, 예천, 봉화, 영주, 제천 등의 의병과 합세하여 경북 상주 함창에 주둔하는 일본군을 공격했다. 이 때 안동시가는 불태워지고 퇴계 종가와 거기에 있던 1500여 권의 책이 함께 불탔다. 이것은 일본군에 의한 만행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향산은 오적의 매국죄를 통박하는 상소를 했다. 순종이 즉위하자 가선대부, 1910년 자헌대부에 승진되었다. 그해 일제에 의해 나라가 강점되자 유서를 남기고 단식 24일 만에 순국했다. 이집을 흔히 양산댁이라 일컫는다. 양산군수를 지냈기 때문이다. 만도의 배위는 진사 권승하의 딸 안동권씨이다. 승하는 글 잘하는 선비 재륜의 아들이며 연하의 형이다. 연하는 닭실 안동권씨가 자랑하는 대성리학자이다. 하당 권두인과 창설재 권두경은 시와 문장으로, 이재 권연하와 채산 권상규는 경학으로, 충헌공 권정침과 의병대장 성대 권세연은 충절로, 공조참판 권재대와 병조참판 권영하는 양대 참판 벼슬로 각각 명성을 날렸다. 이상 8인은, 인물이 수도 없이 많은 닭실 안동권씨를 대표하는 충재 권벌의 뛰어난 후손들이다. 이재 권연하는 이만도의 처숙부로 닭실이 아끼는 석학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영남 사림의 종사 정재 유치명의 첫손가락을 꼽는 영남의 인물이다. 유치명의 문인은 수백 아니 천여명에 가까운 대군단이다. 경상 좌우도를 휩쓸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서 빼어난 인물이다. 위에서 언급한 복재 강건, 신암 이만각은 이재 권연하와 더블어 정재 유치명의 3대 문인이다. 이 세 사람은 당시 사람들이 그들의 호 앞글자를 따서 [이복신]이라 하여 정재 유치명의 문인인 대군단의 3대 학자로 꼽았다.
이만계는 가순의 아들이며 만도의 동생으로 휘준의 동생 휘택에게 입양계대하였다. 그는 호가 유천이다. 1883년 문과하여 지평, 교리 등을 지냈다. 한일합방이 되자 곽종석 등과 함께 만국평화회의에 유림단 대표를 보내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이로인해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중업은 향산 만도의 아들이다. 서산 김흥락에게 수업했다. 1919년 고종황제 장례에 참석하여 3.1만세 운동을 보고 돌아와 유림들을 규합하여 파리만국회담에 사람을 보내는 일을 도모했다. 곽종석과 함께 파리장서를 작성하여 서명운동을 했다. 애국지사들과 광복운동을 계속했다. 중업의 배위는 의성김씨 김진린의 딸 김락이다. 김락은 학봉 김성일의 형 수일의 후손이다. 시아버지 향산 이만도가 순국하고 김락의 친정 큰오빠 김대락은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해 대소가 친척들을 데리고 만주로 대거 망명했다. 김락의 친정 조카 형식, 만식, 제식, 조식, 정식, 규식, 종손자 성로 등이 독립운동의 전선으로 떠났다. 큰 형부 석주 이상룡[장차 서로군정서 차모장이 될 큰 별]도 고성이씨 대소가 친척 수십명을 거느리고 만주로 떠났다. 맏아들 동흠은 할아버지 이만도, 아버지 이중업에 이어 독립 투쟁의 대열에 나섰다. 3대를 이은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김락과 맏아들 동흠은 일경에 쫓기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을 집뒤 대밭 토굴에 숨겨줬다. 만주에 독립군 기지 건설용 군자금 모집에 불응한 친일 부호 장승원을 처단하고 쫓기던 박상진을 만나 동흠은 동지가 되었다. 그뒤 동흠은 군자금 모집에 앞장 섰다. 28세의 동흠은 봉화의 부호 이정필에게 군자금을 헌납하라고 종용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과 공갈미수로 징역 5월형을 받았다.
파리장서라 불리는 제1차 유림단 의거가 시작되었다. 이중업은 이 거사에 숙부 이만계와 함께 핵심 인물로 참여했다. 김창숙과 실행계획을 논의하였다. 독립청원서 서명자 모집 강원도와 충청도 지역 담당자로 뛰었다. 이때 중업의 아내 김락은 3.1 운동에 참여했다. 김락은 57세로 수비대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고 잔학한 고문을 당하다 두 눈을 잃어 버렸다. 남편 중업은 장석영, 손후익, 권상익 등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작성해서 손문과 중국 정부에 가져 가는 책임을 맡았다. 중업은 중국으로 출발하기 직전 세상을 떠났다. 김락은 두 눈을 잃고 남편을 떠나 보낸 채 두어번 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김락이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만주로 망명한 친척들에게 군자금을 보내야 하는 일을 돌보아야 했다. 이 일에 맏사위 김용환이 나섰다. 용환은 학봉 김성일의 종손이다. 용환은 군자금 모집에 대한 일제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방탕과 기행을 일삼은 것이 나중에 드러났다. 속으로는 오직 조국의 독립에 기여하려는 일념이 굳셌다. 그는 항일 전투에 참여하고 만주로 망명하려다 일경에 체포되어 강제로 귀향당했다. 그뒤 의용단 결성에 참여한 혐의로 경찰에 또 체포되었다.
둘째 사위 유동저도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동저는 의병장 유승현의 후손이요, 정재 유치명의 증손이며 세산 유지호의 손자이다. 그는 안동 청년회에 거금 100원을 기부했고 토론회에 참여하여 국민계몽과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 제2차 유림단 사건이 터졌다. 여기에 중업의 두 아들 동흠과 종흠이 관련되어 체포되었다. 연락책 정수기로부터 통보를 받은 종흠은 형 동흠에게 상의하고 대구로 가서 김창숙에게서 권총 한 자루를 받아 돌아 왔다. 종흠은 양외숙부에게 그 권총을 들고 가 군자금을 요구하다 탄로나서 형제가 모두 체포되었다. 두 사람은 모진 고문을 받고 형은 면소 판결, 동생은 1년 집행 유예에 4년형을 받았다.
진성이씨 하계를 지맥으로하여 이태순과 이가순이 퇴계로부터 받아 만운, 만각, 휘준에게 전한 성혈의 고리가 강운, 강건, 강한규, 강하규, 강진규, 김흥락, 권연하까지 연결되어 이룬 혈맥에 사제의 연이 더해지고 사우의 정으로 맺어진 학연으로 뭉친 14인의 학문과 청환이 이룬 아름다움은 태백의 정기가 낙동강에서 용솟음해 보인 영남의 장관이다. 퇴계의 유장한 혈맥과 지맥, 학맥의 거대한 3대 맥이 뽑아낸 정수 덩어리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 연후에 향산 이만도로 하여금 영남 천하에 또다른 장관을 연출하게 하였다.
1910년 열강이라는 국제 조폭의 앞잡이 일제에 의해 조선조가 순교할 무렵을 전후해 전국에서 5-60명이 순국했다. 이때 퇴계의 3대 맥에 연결된 인사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전주이씨 송월재 이시선 가문의 계은 이면주, 선성김씨 백암 김륵 가문의 야옹 김성진 등 안동 인사들 여럿이 음독자결했다. 1894년 의병 항쟁이 안동에서 불붙기 시작하여 향산에 와서 그 불길이 치열했다. 이만도는 항일 독립 운동에 불을 당긴 영남의 선봉장으로 37명의 진성이씨 독립투사를 빼출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산모 역할을 했다.
하계의 양산댁 이만도 측근에서 건국공로 훈장을 받은 이를 살펴 보면, 향산 이만도, 만도의 동생 만계, 만도의 아들 중업, 중업의 아들 동흠, 중업의 배위 김락, 김락의 큰오빠 김대락, 김락의 형부 이상룡 등이다. 향산이 순국하 뒤 퇴계 가문에서 줄줄이 독립 운동에 투신하여 건국 공로 훈장이 수여된 이 37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다 음********************
이만원, 이인화, 이중빈, 이중원, 이중언, 이용호, 이목호, 이광호, 이영호, 이수호, 이열호, 이영호[석전], 이운호, 이맹호, 이비호, 이극호, 이종호, 이호, 이선호, 이원일, 이원기, 이원록, 이원유, 이발호, 이원박, 이원영, 이린, 이동봉, 이동학, 이동하, 이필곤, 이회림, 이경식, 이병희 등이다.
퇴계는 진성이씨 가문의 조그마한 마을 토계를 유럽의 로마로 만들고 향산 이만도는 하계를 영남의 서울로 만들었다. 향산 이만도는 14인의 골육의 정과 학문으로 다져진 밑바탕에서 구국 충절로 솟아 올라 영남 태백의 한 봉우리 향산을 이루었다. 이것은 진성이씨 하계의 영원한 자랑이며 영남의 긍지이고 성현 자손의 빛난 도리이다.
퇴계에 연원한 혈맥의 유장함 ! [라]
한국명문 (2005-02-19 오전 7:35:41) Hit : 299 Vote : 28
퇴계에 연원한 혈맥의 유장함 ! [라]
계남은 경북 안동군 도산면 토계동에 있다. 상계 종택의 남쪽에 있는 명당 계남은 물위에 뜬 연꽃 모양의 극락정토이다. 계남의 맞은 편에 삼봉산, 뒤편에 함산이 있다. 삼봉산 주변의 경치가 아름답고 함박꽃 모양의 함산의 명당길지는 슬기롭다. 1748년 퇴계 이황의 8대손 함인재 이구용이 이곳에 터를 잡고 언순 휘정 만운 3대가 함께 높은 벼슬에 올라 다남다산 수산복해를 이루었으며 문호가 번창하여 그 명성이 태산준령을 울리고 조야의 이목을 건드렸다.
이극철은 하계 파조 영도의 둘째 손자이며 퇴계의 현손이고 학사 김응조의 외증손이다. 1624년에 태어났다. 장인 금시해에게 글을 배웠다. 자질이 순후하고 덕행과 기국이 크며 깊었다. 고산 이유장, 계동 남천호, 난은 이동표와 함께 도의를 강마하고 시구를 창수하여 늙도록 변함없이 정다웠다. 그윽한 맛이 풍기는 8경3곡에서 세 가지 복 연치, 관작, 덕을 한껏 누렸다. 향년이 여든 아홉, 벼슬은 용양위 부호군, 덕은 닭실의 안동권씨 참판 권대재가 노래했다.
“천사 물가 언덕은 대덕군자가 즐기던 곳이다. 재빠르게 벼슬에서 돌아와 이 한가함을 즐겼다. 그 고아한 품격을 갖춘 풍채! 숭상하여서 후인이 감탄하리!”
이규는 극철의 아들이다. 학식에 조예가 깊고 서예에 정묘했다. 한결같이 퇴계의 글씨를 본 받아서 보는 사람들이 한 솜씨에서 나온 듯하다 하였다. 그의 서법이 둘째 아들 수강과 끝에 아들 수휘에게 전수되었다. 그이들은 필법으로 선성 삼필인 매헌 금보, 매암 이숙량[농암 이현보 아들], 춘당 오수영[송재 이우 외손]과 겨루었다.
이수강은 규의 아들이다. 자는 진숙이며 호는 단구이다. 어머니는 퇴계 문인 지헌 정사성의 후손 황의 딸 청주정씨이다. 장인 함계 정석달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장인 석달은 강의공 정세아의 5대손이며 영천에서 세거하는 연일정씨 가문 출신이다. 세아는 호가 호수이다. 호수는 정종소의 현손이며 윤량의 아들이다. 호수는 여헌 장현광, 지산 조호익, 창석 이준과 교유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으로 큰 전과를 거두었으나 포상은 사양했다. 이수강은 뜻이 고결하고 학문을 즐겼다. 단사에 집을 짓고 수석을 벗 삼으며 아우 수훈, 청벽 수연, 단사 김경온과 지묵으로 성현의 글을 강마했다. 사우들이 단구의 학문이 해박하고 정밀하다며 추중했다. 단구는 부인에게 언제나 온화하고 어진 남편이다. 늘 말하기를 “부부란 군자를 시작하는 첫 관문이다. 서로 예의로 함이 마땅한 도리이다. 일찍이 퇴계 선생께서 허부인과 더블어 서로 공경함이 귀한 손님 대접하듯 했다. 이것을 자손의 가법으로 함이 마땅하다.”하였으며 자손들로 하여금 부인을 대할 때 마다 반드시 서로 예배하며 종신토록 공경하게 하였다. 대질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향년이 83세이다. 선성지에는 “공의 뜻과 행의가 고요하고 조촐하며 학문이 정밀하고 해박하다. 곧은 마음으로 자신을 지켰으며 가난한 가운데 글을 부지런히 하였다.”고 일컬었다.
이언순은 수강의 증손이며 퇴계의 9대손이다. 그는 호가 농와이다. 1774년 천사리에서 태어났다. 1804년 문과에 급제하여 효릉별검을 거쳐 홍문관에 뽑혀 부수찬, 현풍현감 등을 지냈다. 상고를 당해 복을 마쳤다. 그뒤 수찬, 헌납 등이 제수되었으나 사직 상소를 했다. 이때 문숙공 채제공이 죄인의 신분에 있어 언순은 사직소에 그의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병산 한치응은 언순의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감탄하기를 “의리의 맹주이다. 귀향하면 향리를 깨우쳐서 사풍을 진작시킬 만하다.”하였다. 이언순은 호서우도에 어사로 나가 아전들의 세미 농간, 뇌물수수, 수령들의 독직, 역관의 마정결손과 역로침탈, 토호의 탐학 등 각종 폐단을 척결했다. 이로 인해 강직하다는 소문이 높았다. 그뒤 공조참의, 동부승지, 춘천부사를 거쳐 이조와 형조의 참판을 지냈다. 조정에 벼슬한 지 40년 세 조정을 내리 섬기면서 임금으로부터 살뜰한 대우를 받았다. 만년에 정자 하나를 짓고 서운정이라 이름했다. 퇴계의 “산에 있으면 구름에 깃들이는 학 되기가 원이다.”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아들과 맏손자가 잇따라 벼슬을 하자, 그는 경계하기를 “3대가 같은 조정에 벼슬함은 세상에 드문 바이니 더욱 조심하고 근신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그리고 퇴계의 성학십도, 육조소 등을 따로 뽑아 장정을 말끔히 하여 손자에게 주며 “임금을 섬김과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가 여기에 있다.”고 훈계하였다. 1845년에 별세했다. 병조참판 정재 유치명이 행장을 찬하고 공조참판 권재대가 묘갈명을 지었다.
이휘정은 언순의 아들이다. 그는 호가 황고이다. 1799년 계남에서 태어났다. 1824년 이후로 향시에 여러 번 합격했으며, 1884년 관찰사의 천거로 경기전 재랑에 제수되었다. 그뒤 정읍현감으로 나가 고을을 맡은 지 다섯 해에 아전이 두려워 하고 백성들이 어버이 같이 따랐다. 1857년 도백과 암행어사의 포상 상신과 천거를 받고 서천군수로 옮겼다. 1860년 대신이 연석에서 “이휘정의 치적이 제일입니다.” 하였으며 그가 그냥 늙음이 애석하다고 아뢰어 임금이 특별히 양산군수를 제수했다. 이어 충주목사, 도정, 형조참의 등을 지냈다. 나라에 경사가 있어 휘정의 장남 만운이 임금을 모시고 있을 때이다. 임금이 대신에게 “만운의 부친이 여러 군읍을 돌며 다스림 또한 잘했다 하니 그 아들에게 한 계자를 올려주어 나의 뜻을 보이노라.”하며 곧 가선으로 올렸다. 1872년이 회혼년이라 장윤에게 동도윤을 제수하고 그 회혼 예식을 관에서 거행하도록 은택을 내렸다. 1875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의 증직이 내렸다. 행장은 서산 김흥락이 찬했으며 묘갈명은 세산 유지호가 지었다.
이만운은 휘정의 아들이다, 호는 쌍취이다. 1815년 상주 산양리에서 태어났다. 기린을 않은 꿈을 꾸고 탄생하여 아명을 인상이라 했다. 그는 이목과 두상이 잘 생겼으며 손과 발 바닥에 거북이 모양 같은 무늬가 있어 보는 이들이 원대한 장래를 기대했다. 관찰사 조인영이 상신 순찰 때 집을 들러 만운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그 비상함에 감탄했다. 아버지의 명으로 정재 유치명의 문하에 들어가 글공부를 하였다. 부친이 연경 사신 갈 때 스물한 살로 따라갔다. 184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아버지가 이르기를 “너무 일찍 과거에 오른 것은 불행이다.” “3대가 같은 조정에 벼슬하니 더욱 성만의 계를 지켜야 한다. 너는 마땅히 벼슬길에 나가지 말고 옛글을 즐겨 읽어서 학문이 넉넉한 다음에 벼슬에 오르는 것이 옳다.” 하며 퇴계가 벼슬에 나아감을 어렵게 여기고 물러남을 쉽게 한 뜻을 강조했다. 1853년 전적을 거쳐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을 지냈다. 정재 유치명과 정산 권재대가 귀양 갔을 때 그는 닭실 권참판 집을 들려 “권씨 유씨 두 대관은 우리 영남의 영수이며 중망입니다. 그런데 지금 먼 지방으로 귀양가서 계절이 바뀌어도 처분이 없습니다.” 하며 안위를 걱정한 나머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조정으로부터 좋은 명이 내렸다. 1855년 동부승지를 거쳐 대사간, 병조참의를 지내고 이조참의가 제수되었다. 이때 대원군이 글을 보내어 “저번에 궁에 들어갔더니 주상이 ”좌승지 만운은 퇴계의 후예입니까?“라고 물은 뒤 ”이 사람은 학식과 지벌, 외양이 모두 비범한데 어찌 헛되이 늙습니까? 필시 조정에서 쓰지 않은 모양입니다. 내가 이 사람을 이조참의로 삼고자합니다.“는 임금이 한 말을 전했다. 1870년 좌승지를 제수하고 임금이 ”반창명월주인“ 여섯 자를 손수 써주며 ”기억하여라. 반드시 믿을만한 날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와 같은 임금의 보살핌은 특이한 은택이다.
1871년 우승지에 이어 좌승지에 승진했다. 그는 자경전에서 임금에게 중용을 진강했다. 그리고 경무대의 삼일제에 임금이 친히 나와 영의정 김병학에게 “좌승지 만운의 아버지는 복록이 많아 자손이 무려 백여 명에 이른다하니 과연 그러한가?”라고 물었다. 영의정이 아뢰기를 “복록뿐만 아니라 주군의 수령을 여러 번 지나며 성대한 치적을 올렸습니다.” 또 옆에 있던 도승지 남정순이 “좌승지의 복록은 고금에 희귀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아들에게 한 자급을 올리고자하는데 대신들의 뜻은 어떠한가?” 이에 영의정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는 지당하십니다.”하매, 임금이 명하여 전교하기를 “조령 이남은 추로지향이다. 좌승지는 대현의 후예답고 가상하도다. 특별히 한 자급 올려 내 뜻을 보이도록 하라.“하였다.
이 날에 좌승지 겸 사옹원 제조를 제수하였다. 이어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임명되고 한성부 우윤에 옮겼다가 예조참판에 제수되었다. 그뒤 동지의금부사, 겸지춘추관사, 동지경연사, 경주부윤, 경연특진관,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이재 권연하, 긍암 이돈우, 복재 강건, 신암 이만각 등과 도의로 사귀었으며 특히 서산 김흥락과는 형제의 의리로 정의가 투터웠다. 이만운은 의성김씨 학봉 후손 목사 김진화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서산은 김진화의 아들이므로 만운의 처남이 된다. 1886년에 세상을 떠났다. 향산 이만도가 행장을, 중재 김황이 묘갈명을 찬했다.
이중건은 만운의 아들이다. 호는 지산이다. 대대로 혁혁한 가문의 주손으로 영지산 아래에서 글을 하고 덕을 쌓았다. 외숙부 서산 김흥락이 이끌어 주는 가운데 선대의 정자에서 학무에 정진하니 계남 4대의 전통을 모두 칭송했다. 지산의 글이 청신하고 사람들의 심기를 밝게 한다 하였다.
이상호는 중건의 아들이다. 호는 남파이다. 모양이 준수하고 기우가 헌걸했다. 천성이 자상했으며 법도가 정연했다. 성실과 신의로 사람을 사귀어 사랑채에 손님들의 신발이 가득했다. 아들 원강은 제일은행 상무를 지냈다. 딸 하나는 국회의원 정도영의 배필이 되고 딸 또하나는 박사에 교수로 학술원회원이 된 이우성의 배필이 되었다.
태산준령은 성스럽다. 높은 봉, 깊은 계곡, 기암괴석에 태풍이 지나면 춘풍이 논다. 태산같은 성현의 가문 토계수가 푸르며 한 봉우리 향산 아름답고 농와 황고 쌍취 3대 3경문이 놀랍다. 태산준령의 깊은 맛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