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유물은 만주에서 발견된 '배달문명 유물'로서
그 시기가 '황하문명'보다 천년 이상 빠르므로
중국 역사학계가 큰 충격을 받았다.
(사실 "황하"는 "누런 강" 이라 하는 말이다.
즉 진흙탕물이다.
황하지역은 물이 맑지 않아서 사람이 살기에 좋지는 않고
최초의 문명이 생기기는 어려운 지역.)
약 6천년 전 의 배달문명 유물들이 최소한 수십년 전부터 만주에서 쏟아져 나왔다.
황하문명은 약 4천 몇백년전 시작.
원래 만주는 중국 한족들의 역사무대가 아니라 한민족 즉 배달민족의 역사무대.
고대로부터 고구려 발해까지 만주의 중심민족은 한민족이었고
고려, 조선때도 만주에는 많은 한민족들이 살고 있었고 (특히 간도)
만주에는 지금도 상당수의 한민족들이 살고있다.
환웅 (한웅) 배달 문명 (범 홍산문명) 지도
환웅(한웅) 배달문명(동북문명 - 범 홍산문명)은 황하문명보다 천년 이상 빠르다.
이 곳에서 '놀라운'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 요녕성 박물관 등에 전시된 유물들.
위_ 삼좌점 터에서 발굴된 성벽.
움푹 튀어나온 ‘치’ 는 고구려 고유의 축성양식을 연상시킨다.
아래_ 삼좌점 발굴현장에서 모습을 드러낸 대형 집터.
대문과 문설주는 물론 곡식창고까지 완벽하게 보존돼 있다.
이곳 60여 채의 군락은 매우 드문 큰 규모로 파악된다.
위_ 삼좌점 유적지의 문설주들은 매우 정돈된 모습으로
고대 국가의 통치력을 연상시킨다.
아래_ 삼좌점 유적터의 곡식창고.
홍산문화지역에서 출토된 원형제단.
하늘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고조선 시대와 겹치는 하가점 하층에서 출토된 청동투구(위),
홍산문화지역에서 출토된 여신상.
가부좌를 튼 채 두손을 다소곳이 모은 형상은 중국 여타 지역에서 출토되지 않는다.
[산해경에 나온 (고)조선도 불교의 뿌리] <- 관련글
홍산 문화는 약 6천년전부터 시작된 문화
[홍산문화]는 약 6천년전에서 약 4200년전까지 이고,
[한웅(환웅)시대]가 약 6천년전에서 4333년 전까지(단군조선 건국 년도)이므로
시기상으로도 서로 일치한다.
[홍산문화]의 특징은 정교한 옥기(玉器 - 옥으로 만든 물건)의 사용,
돌을 사용한 무덤,
그 외에도
진흙 여신상(女神像 = 웅녀 할머니)이 다수 출토되고 있다.
|
돌로 쌓은 무덤과 제단(하늘에 제사 지낸 곳)
- 무덤을 돌로 만드는 문화는 고대 배달민족 특유의 문화.
( 중국은 예로부터 돌로 무덤을 쌓지 않고 흙으로 쌓았다.)
여신(女神)묘 건축지로서
진흙으로 만든 여신상과 더불어
곰의 머리뼈가 출토되어
곰 토템(곰을 상징 동물로 함)과 여성지도자로서의 [웅녀 할머니]를 강력하게 보여준다.
진흙 여신상과 곰 턱뼈
|
[장군총]
쇠를 뜻하는 철(鐵) 자의 옛 글자는
金(금) + 夷(이)
즉 [金夷] 자 이다.
(이 글자는 요새는 잘 안쓰기 때문에 컴퓨터의 한자지원이 안됨.)
쇠 즉 철(鐵)이 원래 동이(배달)민족의 것이란 뜻.
즉 철(鐵) 도 동이(배달)민족이 처음 쓰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게다가
사마천의 사기(史記) 에 보면
- 사기 권2 : 철고이자야(金夷 古 夷 字 也)
즉 " 철(金夷) 자는 옛날에는 이(夷)자 였다." 고 나온다.
동이(東夷) 민족을 뜻하는 '이(夷)'자 자체가 옛날에는 쇠를 뜻하는 글자로 쓰였다는 얘기다.
그리고 사기(史記)에 이어 중국 제 2의 역사책이라는 '한서'에 보면
- 한서 권28 : 이통차작철(夷 通 借 作 金夷), 철고문철자(金夷 古 文 鐵 字)
"철(金夷) 자는 이(夷) 자에서 나온 것이다."
"철(鐵 - 쇠 철) 자는 옛날에는 [金夷]라 썼다."
라 나온다.
이는 철 즉 쇠가 원래 동이(東夷)민족만이 쓰던 것임을 나타낸다 하겠다.
관련글 - [원조 한문명 ] 즉 [마 문명] <- 누르세요.
고대 중국인들은 배달민족(한민족)을 이(夷) 또는 리(黎) 족이라 불렀다.
사마천의 역사책 사기(史記)도 '리동이국(黎東夷國)' 이라 하며
동이국 (東夷國) 사람들을 '리(黎)민족' 이라 한다고 밝힌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 권1- 에 보면
--------------------------------------------------------
蚩尤古天子 [치우는 옛 천자이다]
九黎君號蚩尤 [구리(九黎)의 임금을 치우라 불렀다] ---------------------------------------------------------
라 나오는데
구리(九黎)는 고대 동이족(배달민족)을 부르는 말이다.
[구리(九黎) = 구이(九夷) = 구한(九韓) = 배달 한국]
즉 옛날에는 배달나라 즉 [배달 한국]의 임금님이 천자(황제) 였다는 것이고
그 중에 한 분이 [치우임금]이었다는 것이다.
계속하여 사기(史記) - 권1-
---------------------------------------------------------------------------
치우가 노산(盧山)의 쇠(金)로 오병(五兵)을 만들었으니 분명히 보통사람이 아니다. [蚩尤受盧山之金 而作五兵 明非庶人]
치우는 형제가 81명인데 구리머리에 쇠이마(동두철액-銅頭鐵額)를 하였으며
모래와 돌을 먹고 칼,창,커다란 활 등의 무기를 만들었다.
[有蚩尤 兄弟八十一人 竝獸身人語 銅頭鐵額 食沙石子 造立兵仗刀戟大弓]
----------------------------------------------------------------------------
등의 기록으로 보아도
철 즉 쇠가 원래 동이(東夷)민족만이 쓰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동이(東夷)의 치우임금과 그 형제들이 철을 만들기 위해서
철광석을 퍼가는 것을 보고 모래와 돌을 퍼다가 먹는다고 생각했으며
구리와 쇠로 투구를 만들어 쓴것을
그들은 '구리머리에 쇠이마' 로 착각한 것이다.
" 치우가 노산(盧山)의 쇠(金)로 오병(五兵)을 만들었다." 는 표현은
철갑옷과 투구등을 만들어서 병사들에게 사용하게 한 것으로 본다.
금속 '구리'의 이름도 사실은 배달한국의 옛 이름인 [구리(九黎)]에서 나온 것으로 보여진다.
리(黎) 자를 풀어보면 사람이 [人] 물가에서 [水] 벼농사를 짓기 위해 [禾] 쟁기질을 하고 있는 모습.
리(黎) 라는 글자 자체가 리(黎) 족 (배달민족)이 처음 농사를 지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나중에 리(黎) 의 발음이 '려'로 바뀌는데
지금도 해가 처음 떠오르는 것을 [려(여)명(黎明)]이라 한다.
이것은 리(黎)족 (배달민족)이
1. 동쪽에 사는 사람들이고
2 . '떠오르는 해'와 같은 최초의 문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겠다.
실제로
한국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농사를 지었다는 증거가 이미 예전에 발견되었다.
1만 5천년전에 쌀농사를 지은 증거(재배 볍씨)가 발견되어 국제 학계의 공인 을 받았다.
국제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아왔던 중국 후난(湖南)성 출토 볍씨보다도
약 3천년이나 더 오래된 세계 최고(最古)의 볍씨가 한국에서 발견됐다고 영국 BBC 인터넷판이 2003년 10월 22일 보도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 (충북 청원서 발견 - 약 1만 5천년전것)
중국 "신화통신"은 2001년도 7월에 만주의 고대 한국 피라미드의 일부를 뉴스로 전했으나
파장이 워낙 큰일이라 아주 일부만 살짝 전했다.
황하문명보다 훨씬 오래된 배달민족의 유물이므로.
-중국 신화통신이 5~6천년 이상 전 만주 피라미드를 극히 일부 밝힌 내용 -
신화통신이 보도한 만주의 고대 한국 피라미드 바로가기
위글에서 피라미드 뿐만이 아니라
쌀 미(米)의 원시 한자로 보이는 글자를 찾아내었다는 내용도 있다.
한자도 만주(배달한국 고조선)에서 먼저 썼다는 얘기다.
...........................................................................................
[홍산문화] 즉 [배달문명] 은 '황하문명'보다 천년 이상 더 빠르다.
즉 위 지역의 문화가 황하 유역에 전해져서 '황하문명'이 된 것.
갑골문자(고대 한자)도 황하문명의 갑골문보다 더 빠른 것이 만주에서 발견되고 있다.
한자도 만주(배달한국 고조선)에서 먼저 썼다는 얘기.
즉 한자(한문)도 원래 한민족이 쓰던 것이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만주 배달문명보다 시기가 늦은 갑골문자(원시 한자)가 발견된
황하 지역의 고대 '은'나라도 동이(배달)족이 세운 나라다.
이는 이미 중국고대역사학계의 '상식'처럼 되어있다.
즉 고대한국(배달나라)의 문명이 전해져서 이루어진 것이
'황하문명'인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중국당국이 대단히 크게 충격 받았다.
그리하여 시도하는 것이 바로 소위 '동북꽁정' 즉 '만주역사 왜곡꽁작'
즉 필사적으로 배달한국 고조선 고구려를 중국역사라고 우기게 된 것.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
세계 개의 조상은 동아시아 (고대 한국) 회색 늑대 <- 누르시면 열립니다.
중국 후한(後漢)의 정사(正史) '후한서 [ 後漢書 ]'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
《후한서 동이전》서문
[동방을 "이(夷)"라 한다]
"이(夷)"라는 것은 "근본이 되는 뿌리"라는 의미이니,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하여, 마치 만물이 대지로부터 솟아나오는 것과 같다.
[仁而好生萬物 地而出]
그러한 까닭에 천성이 훌륭하여 도덕(道德)을 잘 행하여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 -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 라 불리워지게까지 이르게 되었다.
[至有君子不死之國焉]
때문에 공자는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어 하였다. [故孔子欲居九夷也]
( 구이(九夷)는 한민족을 뜻함.)
[산해경(山海經)]에 이르기를
[군자국(君子國)에서는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있으며,
짐승을 키우고, 두 마리의 무늬 있는 범(호랑이)을 곁에 두고 부린다]라고 하였다.
......................................................................................................
이상 중국 정사(공식 역사책)인 [후한서 동이전 서문] 에 나오는 내용이다.
《후한서 동이전》서문 - 한문본
<王制> 云: [東方曰夷.] 夷者, 也, 言仁而好生, 萬物 地而出.[1] 故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不死之國焉.[2] 夷有九種,[3] 曰 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
[4] 故孔子欲居九夷也.
【1】事見《風俗通》. 【2】《山海經》曰: [君子國衣冠帶劒, 食獸, 使二文虎在旁.]
《外國圖》曰: [去琅邪三萬里.]
▶ 자료 출처 :《중국정사 조선열국전》서울 동문선(東文選). 1996. ..................................................................
약 2300년 전, 공자(孔子)의 7대손 공빈(孔斌)이 고대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서 쓴 [동이열전](東夷列傳)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고대의 동이(東夷)는 한(韓)민족 (배달민족) -
.........................................................
<동방에 오래된 나라가 있는데 동이(東夷)라 한다. 훌륭하신 분인 <단군>이 계셨는데
<구이(九夷 - 동이(東夷)의 아홉나라들.>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셨다. 요임금 때의 일이다. 순임금은 동이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와서 임금이 되어 훌륭한 정치를 하였다. 동이(東夷)에는 자부선인(紫府仙人) 이라 하는 도에 통한 훌륭한 분이 계셨는데 <황제헌원씨>가 그 문하에서 내황문(內皇文)을 배워와서
<염제 신농씨>의 뒤를 이어 중국의 임금이 되셨다.
동이(東夷)는 그 나라가 비록 크지만 남의 나라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그 나라의 군대는 비록 강했지만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풍속이 훌륭해서 길을 가는 이들이 서로 길을 양보하고, 음식을 먹는 이들이 먹는 것을 서로 양보하며,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거처해 함부로는 섞이지 않으니, 가히 <동방예의 군자국> (東方禮儀君子之國 - 동쪽에 있는 군자의 나라) 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기자(箕子)가 주(周)나라 신하가 되지 않고 동이(東夷)땅 (고조선)으로 갔고 나의 할아버지 공자(孔子)께서도 동이(東夷)에 가서 살고 싶어 하셨다. 나의 벗 노중련(魯仲連) 역시 동이(東夷)로 가고 싶어한다. 나도 역시 동이에 가서 살고 싶다. 예전에 동이의 사절단이 온 것을 보니 대국 사람들 (大國人) 다운 모습이었다. 동이는 대강 천년이상 전부터 중국과 우방이었다. 사람들이 서로 왕래했다.
위나라 安釐왕 10년 곡부에서 공빈 씀. .................................................................
<한문본>
동이열전 전문
《 東夷列傳 全文 》
東 夷 列 傳 (註 檀奇古史 附錄)
東方有古國 名曰東夷 星分箕尾 地接鮮白 始有神人 檀君 遂應九夷之推戴而爲君 與堯병立 虞舜 生於東夷 而入中國 爲天子至治 卓冠百王 紫府仙人 有通之學 過人之智 黃帝受內皇文於門下 代炎帝而爲帝, 小連大連 善居喪 三日不怠 三年憂 吾先夫子稱之, 夏禹塗山會 夫婁親臨 而定國界, 有爲子 以天生聖人 英名洋溢乎中國 伊尹受業於門 而爲殷湯之賢相 其國雖大 不自驕矜 其兵雖强 不侵人國, 風俗淳厚 行者讓路 食者推飯 男女異處 而不同席 可謂東方禮儀之君子國也, 是故 殷太師箕子有不臣於周朝之心 而避居於東夷地 吾先夫子 欲居東夷 而不以爲陋, 吾友魯仲連亦有欲踏東海之志 余亦欲居東夷之意 往年賦觀東夷使節之入國其儀容有大國人之衿度也, 東夷蓋自千有餘年以來 與吾中華 相有友邦之義 人民互相來居往住者接踵不絶, 吾先夫子 以東夷不以爲陋者 其意亦在乎此也, 故余亦有感而記實情以示後人焉 魏 安釐王 十年 曲阜 孔斌 記 (字 子順)
.................................................................
위와 같이 고대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지혜있고 솔직한 인물들은
<배달문명>을 존경해 마지 않은 것이다.
"한웅 배달문명"의 시작은 약 6천년전.
"황제헌원씨"는 약 4천 7백년전 인물.
즉 배달문명의 시작 이후 약 1천 3백년 후의 인물.
중국 초기역사의 임금은
[황제헌원씨]-> ->[요임금]->[순임금]->[우임금]->... 으로 나아간다.
맹자도 "순임금은 동이사람(한민족)" 이라 하였고
중국 고전 "초사[楚辭] "에도
"[황제헌원씨]는 백민(白民) (배달민족의 한자식 표기) 즉 동이족(한민족)이다."고 나온다.
[황제헌원씨] 와 그 후손인 [요임금],[순임금] 등 황하문명의 주역들이 모두 동이족
즉 한민족이라는 얘기다.
사마천의 사기(史記)가 전하는 [황제헌원씨]의 성은 '웅(熊)'씨.
즉 '곰'씨.
여러가지로 보아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 할머니'의 후손 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기(史記)에 [황제헌원씨]는 " 소전(少典)의 아들" 이라 나온다.
[黃帝者少典之子 : 史記ㆍ五帝本紀]
소전(少典)은 지금의 도지사, 군수 정도되는 직책.
즉 황제헌원씨가 "어느 큰나라의 제후(아래)나라의 왕자"라는 얘기.
그러면 "큰나라"는 어디 였을까.
중국인들은 '황제헌원씨' 부터 자신들의 나라가 생겼다고 수천년 동안 주장해 왔는데
'황제헌원씨' 는 중국한족이 아니라 동이(배달)민족.
중국으로 건너가서 지도자가 되어 중국문명의 시조가 됐는데
'황제헌원씨'가 어느 큰 나라의 아래(제후)나라의 왕자였으니
그 위의 큰나라 즉 대국(大國)은 도대체 어느 나라였을까.
중국이 생기기 전의 대국.
사기(史記)에 이런 귀절이 나온다.
" 치우는 옛 천자(天子 즉 황제)이다." [蚩尤古天子]
치우천황은 황제헌원씨와 같은 시대 인물이고
즉 황제헌원씨는 '치우천황이 다스리는 큰나라 안의 작은 나라의 왕자' 였는데
치우천황으로부터의 "독립"을 시도하여 성공하였던 것.
그런데 치우천황이 누구인가 하면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치우(蚩尤)는 구리(九黎)의 임금이다." ( 九黎君號蚩尤是也) 라 나온다.
이는 구리(九黎) 가 중국보다 더 오래된 나라라는 얘기가 되는데
중국이 생기기전의 대국(大國)인 '구리(九黎)'
중국 고대사 기록상
구리(九黎) =구이(九夷) = 고대한국
고대한국의 아래 작은나라 중의 한 나라의 왕자였던 '황제헌원씨'가
새로운 나라를 세워서 나간 것이 약 4천7백년전의 일.
그 후로 '황제헌원씨'의 나라는 요,순임금을 거치면서 발전하여 중국의 뿌리가 되는데
중국 역대 왕조는 대부분 배달민족인 '황제헌원씨'의 후손.
황제헌원씨는 중국을 건국한 '훌륭한 배달민족'이다.
"원시석기시대"였던 중국은 황제헌원씨와 그 후손들(요순임금 등)에 의하여 문명국을 이루어
나가게 된다.그리고 사실 중국에서 "황제(皇帝=천자)"를 칭한 것은 그로부터 2천 몇백년 후인
진시황 때 부터.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의 황(黃)은 누를(노란색) 황이고
진시황의 황 자는 황제(천자) 황(皇) 자임. 서로 다름.)
황제헌원씨 이후 2천 몇백년이 지나고
진시황에 이르러서야 고조선이 힘이 약해지고
그때에서야 중국이 역사상 최초로 중국 임금을 천자(天子)라 부를 수 있었다.
그래서 진시황은 "처음 시작하는 황제"라 하여 "시황제"라 하였다.
그 전에는 중국에 천자(天子)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이 천자국이었다.
(진시황 이전의 중국의 나라들은 작았다. 큰나라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