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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안산에 살고 있는 박세은입니다.
저가 우리스님을 만나서 이 법 공부를 하여 달라진 저의 인생얘기를 해볼까합니다.
저가 22살 처녀 때 큰언니 옆집 아저씨 소개로 저의 처사를 만났습니다.
남자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그냥 호기심에 철없이 재미삼아 만나고 다닌 것이
그만 큰일이 벌어졌습니다.
처사도 고아같이 돌아다니다 저를 만나 그냥 살러오라고 했고
집에서도 귀찮은 짐 내다버리듯 나가라 해서 그로부터 동거를 시작했는데,
그것도 막내 시누집 앞에다 방을 얻더군요.
고향이 수원이라 그때부터 서울로 직장을 알아보며 며칠 지내다가 동대문 쪽에 취직됐다고
올라간다기에 저는 잘 모르는 그 사람 따라가기도 싫고 별로 마음에도 안 들었지만,
그땐 뱃속에 아이가 있어 어쩔 수없이 따라가는데,
열차간에서 그렇게 도살장 끌려가듯 그것이 싫어 울었습니다.
그를 만나지 얼마 안됐을 때, 언니 집에 놀러 갔는데 그땐 술을 몇 잔 안 먹었는데,
술 취한 척 찻길 중앙으로 들어가고 길에 누워 일어나질 않고
취중의 행동이 정말 기가 막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한마디만 하면 여자소리가 담 밖으로 넘어 간다느니 말대꾸 한다며
저를 때리고 머리를 벽에 찍으며 여자는 죽어도 문 꼬리 잡고 죽어야 되고 한번 나가기만 하면 두 번 다시 들어올 생각 하지마라며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저에게 고문을 하더군요.
이런 행동을 처음 당한일이라 친정집에는 말을 못하고 뱃속에 애기가 있으니
이러다 말겠지 하는 마음에 서울로 따라갔습니다.
올라가서도 그 행동은 변하지 않고 처사가 바람을 피워 성병에 걸려 약을 먹으면서...
감기가 걸려서 나도 같이 먹어야 된다고 주길래 바보같이 받아먹고는
6개월 된 애를 병원에서 낙태수술을 했습니다.
그래도 바람은 계속 되고, 1년 365일중에 368일을 술 먹고 담을 뛰어 넘어 다니더군요.
그러다 문안 열어주면 안 열어 줬다고 또 두드려 패고, 아프다고 소리 내면 옆집에 들린다고
입을 틀어막고 때렸습니다.
그러다. 1990년도 그때 자기가 동대문 방산시장 청바지 원단가게에 다니면서
저에게 경기도 시흥시에다가 청바지 가게를 차려주더군요.
저는 가난한 사람은 어찌하든 안먹고 안 쓰며 내가 아끼면 된다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반면에 처사는 남 주는 것 좋아하고 다른 사람 돈 내는 것 못보고 시댁 경조사는 다 다녀야 되고,
정말 저랑은 사고방식부터가 달라서 얘깃거리만 있으면 싸우게 됐습니다.
그러다 미쳐 눈이 뒤집어지면 제목을 조르면서 너는 죽어야 내가 편하게 살 것 같다고 할 때는 정말 무서워서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싹싹 빌며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하라고 빌었고, 실컷 혈압 올려놓고 이제 와서 잘못 했습니다면서 또 머리를 벽에 처박았습니다.
10년을 이것을 참다 이건 아니다 싶어 친정에 말하였더니. 이 미친년이 입 다물고 있으면 다냐며 10년 동안 아무 말이 없어서 잘 사는 줄 알았습니다하며 당장 내려오라고 호통을 치니까,
그때야 처사는 두 번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각서도 쓰고 싹싹 빌었지만, 그 성품은 고쳐지는 병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나가서 바람피우고 다니니 가게에 박혀 사는 저를 의심하며 의처증까지 심했습니다.
누가 조금 칭찬하는 소리만 해도 그 사람이 왜 너보고 그러냐? 하고 의심하며, 정말 누구하나 죽기 전에는 이 전쟁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제가 옷장사로 돈을 한참 벌어서 은행동에 아파트도 사고하니 사업의 사짜도 모르는 사람이 전세금으로 안산에 운수업을 차리더군요.
안 봐도 알듯이 매일 손님접대 한다며 룸사롱에 놀러오는 친구 이사람 저사람 접대에 오래갈 리가 없죠. 어려울 때면 제가 사업자 등록증이 있어 대출 연대보증서주고 내 카드로 회사 기름이며 뭐든 결제를 다해 듣도 보도 못한 신용불량자라는 이름까지 붙여 주더군요.
그때 97년 IMF가 터져 더 이상은 못 막으니 부도내고 서류상 이혼해야 된다 해서 이혼해주고, 그러면서도 계속 부딪쳐 제가 그랬습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여기서 못살고 부산 가겠다고 하며. 집안에 부조도 15년 동안 했으면 내할 도리는 다 했으니 가겠다하니 무릎 꿇고 싹싹 빌며 자기도 데리고 가면 이제 나라는 존재는 모두 너를 위해서 살 것이며, 집안도 친구도 다 버린다고 해서 2000년도 언니가 사는 부산 광안리로 이사를 내려왔습니다.
부산 와서도 내가 언니 집에 자주 가는 것이 못마땅하였는지 처사가 택시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어딜 갈까봐서 장거리 손님은 영업하지 못하고 세끼 밥을 집에 와서 먹으니 무슨 돈을 벌겠습니까?
저도 그때는 인생 포기한 사람 같이 살았습니다.
나한테는 아무른 희망이 보이질 않았으니까요. 그러다 어느 날인가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싸우면서, 정말 여기서 끝내자는 결론을 내고 전세보증금 2500만원을 반반 나누고. 아이들은 본인의사를 물어서 같이 산다는 사람이 데리고 살기로 했는데, 아이들이 엄마랑 산다더군요.
그런데 제부가 하는 말이 돈 천 만원 가지고 애들 공부시키고 처형이 어떻게 키우느냐고 하면서, 셋 식구가 모두 물에 빠져 죽을 것이냐고 충고하는 말에, 아! 그 말이 맜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을 참고 혼자 2001년7월17일 날 집을 나왔습니다.
① 처음엔 밤마다 술로 세월을 보내고 울었습니다.
그러다 큰애 만나러 중학교를 가니 이사를 간다고 하면서 집에 갔다고 하더군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집으로 전화하니 아빠가 간암이라 서울로 이사 가서 수술해야 된다고 하더군요.
그때 저는 그랬습니다. 나한테 그렇게 못되게 하더니 자기가 지은 죄는 자신이 받는다더니 잘 됐다고 그렇게 악담을 했습니다.
그 후로 저는 삼년동안 아이들과 연락도 못하고 홀로 술로 담배로 그 세월을 잊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내가 이렇게 혼자 살면서, 나중에 아이들을 만나더라도 떳떳한 엄마가 되어야겠다 싶어 종교를 가져보려고 SGI라는 “남묘호렌게교” 라는 종교를 믿어 봤지만, 아침저녁으로 하는 근행이라는 것이 저한테는 너무나 스트레스였고 마음에 닿는 것이 없어서 그만둔 적도 있었고. 그러다 친정어머니가 어디 가서 물으니 너는 “지장보살을 부르라고 하여 그 때부터 하루종일 지장보살 지장보살을 부르고 다녔습니다.
혼자사니 시간이 날 때마다 절에 올라가 몇 시간 혼자 앉아 있다오고 막연히 이렇게라도 하면 내가 사는 게 조금 편해지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그러고 다녔습니다.
어떤 것이 잘 사는지 어떤 게 죄인지도 모르고 막연히 남한테 싫은 소리 안하고 내밥먹고 내 할일만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 괴로워 술 한잔 먹으면 돌아가신 죄 없는 아버지한테 저를 데려가 달라고 소리치며, 내가 무슨 죄가 많아 이렇게 사느냐고 울고불고 밤을 지센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요.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 나만 버려져 있다는 느낌, 내가 이대로 죽으면 누가 알기나 할까? 라는 생각, 그렇게 밤에는 술로 낮에는 아무렇지 않게 밝은 모습으로 산다고 살았지만 사람들은 그러더군요.
“너는 웃고는 있는데 어딘가 모르게 우울해보이고 근심걱정이 있어 보인다.” 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그 9년이란 세월은 제 인생에 너무나 힘들었고, 하는 일마다 안 되고, 너 왜 이렇게 사니? 하고 시험이라도 하듯 아무리 취직을 하려고 발버둥 쳐도 취업은 안되고,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풀칠만 하였고, 꼭 새 모이만큼의 일자리를 주더군요.
오죽하면 포장마차 써빙이며 로바다야끼 주방 설거지도 12시간 하는데 정말 힘이 들어 잘라줬으면 하는 마음까지 들더군요.
그러다 너무 답답해 철학관에 가서 물으니, 저는 물을 관리하면 좋다 하길래 목욕탕 관리사(일명 때밀이) 하고 경락도 배워서 맛사지 샾 에서도 일해보고 목욕탕에서도 일을 하는데 정말 재미있었어요.
하루 13~4시간을 탕 속에서 일하면서 바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계속 물만 먹으니 나중에는 잘못하다가는 이러다 가겠다 싶더군요.
그것도 내 복이 못 되는지 버스를 3번씩 타고 다니면서도 즐겁게 일은 했는데, 돈이 줄어들어(짝지가 빙땅) 짝지에게 일한 것을 메모를 하자고 했더니 삿대질을 하면서 그렇게 못한다고 하는 소리를 주인이 듣고 저보고 싸웠다고 그만두라 하였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짝지는 다른 탕에서도 돈 문제로 소문이 나서 인력소개소에서도 알게 되었지요. 그러다 제동생의 소개로 부동산 중개업을 시작했습니다.
(사주를 보고) 흙이 많아 부동산은 안 맞다 했지만 지금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아니었어요.
그러다 옆에 앉은 언니가 어느 지장도량 좋다면 거기 가서 앉아 있고, 또 부산에는 부산역에 가면 팔공산 가는 버스가 토요일 마다 있고, 남해 보리암, 낙산사, 등 무료버스운행도 해서 관음재일 날은 강원도로 시간 날 때마다 절에 가서 철야수행을 하고 다녔습니다.
막연히 집에 있으면 술 마시고 음악 틀어놓고 울고 있으니. 절에 가 있으면 그러지는 않으니 절에 갔었죠.
내 마음 편하자고 갔지만, 밤새 그 추운 겨울날 누가 시켰다면 난리 날거예요.
법당에서 몸을 웅크리고 떨면서 천수경부터 남이 좋다는 경은 다 외우고 하기 싫은 108배하면 좋을까 싶어서 욕심을 가지고 하였던 지난 일들이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었습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누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으니 도리가 없었죠.
② 그러다 우리 부서의 동생이 자기가 무슨 책을 갖고 독경하는데 뭐가 어쩌고저쩌고 이야기하기에 저는 아무 생각도 없이 그거 어떻게 하는데? 하고 물으니 자기가 아는 언니한테 나도 책 좀 달라고 하였더니 그 언니가 말하길 책 줘도 공부하지 못해 이제 안준다고 하드라면서 스님 전화번호를 가르쳐주겠다고 하여 일주일 지나서 번호를 받아 스님한테 전화를 드리니, 스님이 사람을 시켜 책을 보낼테니 한번 해 보라고 하시더군요.
다음날 부산에 문순남 총무보살님이 회사 근처로 와서 책과 수행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서 저는 가르쳐준 대로 수행하며 매일 스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며칠 후 부산에서 법회를 하니 오라고 하셔서 법회장소를 찾아 갔습니다.
제가 막연히 지장보살님을 부르고 찾아다니다 보니 저를 여기까지 인연을 찾게 된것 같아요.
그날 저는 스님을 뵈면서 아! 이분이 지장보살님이시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 왔어요.
스님께서 하시는 한 말씀 한 말씀이 전부다 저에게는 솜처럼 저의가슴에 스며들었고 정말 내가 이때까지 막연히 찾아 헤맸던 그 무언가를 해결해주실 것 같았습니다.
매일 하루에 몇 번씩 스님께 전화를 드리면서 나의 고통과 인생 상담과 꿈 제도와 제 전생 내가 왜 그런 남편을 만났는지 제 업을 알게 되었고, 어떻게 해야 소멸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 모든 고충을 내놓아야 내가 치료약을 줄 수 있다고, 말씀하시었고, 저는 정말 무덤까지도 가지고갈 모든 저의 비밀을 다 틀어 놓고 나니 내 가슴에 돌덩이를 내려놓은 것 같이 홀가분하였습니다.
저는 지난과거를 잊고 하루를 성실하게 지내며 불면증과 우울증 술과 담배를 끊고 즐겁게 살아가며, 잃어버린 나의 건강까지 되찾아 그렇게 수행을 해 나가던 중 큰딸이 병원에서 간 검사를 한다는 연락이 왔더군요.
그래서 무슨 일로 검사하였나하니 아빠가 간암으로 간이식을 해야 하는데 자기가 맞는지 검사한다고 하더군요.
순간 너무 놀라 스님께 전화 드리니 수술한다는 생각도 잊어버리고 무심으로 있어라하시며 그게 돕는 길이라고 하였어요. 정말 그렇게 했습니다.
4월28일 날 아주대 병원에서 남편과 큰딸을 수술실로 보내고 스님이 일러준 발원문를 부르고 수술실 앞에서 13시간을 지장본원경을 읽으며 삼구게를 외우며 정말 잔잔한 호수같이 보내고 나니. 큰 딸이 병실을 나왔습니다.
안 울려고 해도 눈물은 흘리고 큰딸한테 정말 엄마가 미안하다. 너에게 이렇게 힘든 일을 겪게 하여 정말미안하다고, 참회를 하였습니다.
처사한테도 제가 그전에 전화로 참회를 했습니다.
제가 사는 동안 조금만 지혜로웠다면, 우리가족이 헤어져 살지 않고 잘 살았을 텐데, 다 제 잘못이니 용서해 달라고요.
근 10년 만에 만난 별난 시누이도 어떻게 왔냐며 고맙다고 하더군요.
일반실로 옮기고 한 일주일 지내고 부산에 내려왔는데, 처사가 전화가 왔더군요.
옛날의 자기가 아니고 돈쓰는 것도 많이 고치고 앞으로 행복할 날만 있을 테니까?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며 생각해보라 하였습니다.
스님께 말씀드렸더니. 너는 지금 지옥도 상 지옥 속에 들어가니 각오가 되었느냐 하시며. 저의 각오를 물으시기에 그러면 저는 가지 않고 공부를 다 마치고 가겠다고 하니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때까지 그 자리가 너를 기다리고 있느냐. 하시며 나무라시며,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스님을 안 만났으면, 저의 상이 높아서 못하겠지만 지금은 이겨낼 자신 있습니다. 하고 확고한 대답을 했습니다.
참고로 남편은 저와 헤어져 서울 올라와 시누이권유로 교회에서 선교활동한지 9년 됐어요. 온 시가집안 모두가 교회를 다녀 종손집안인데도 시누들이 나서 제사도 없애고 명절날 차례도 안지내더군요.
내가 올라가기 전에 저는 한 스님을 만나서 수행공부를 하는데 저보고 교회가자든지, 불경공부를 못하게 한다든지, 한달에 한번 법회에 가야되는데 들어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니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왔습니다.
와서 보니. 정말 크나큰 지옥이 저를 반기더군요. 수술한지 2달된 환자가 매일 밤12시가 넘어 들어오고, 9년 동안 자기들 마음대로 살던 아이들도. 귀가 시간이 질서가 없고 외박하는 것이 일수고. 일정하지 않는 생활을 바라보면서 예전 같으면 억장이 무너질 행동들을 하더군요.
처사는 교회의 일과 교우들의 길흉소사에 일보러 다니는 취미를 버리지 못하고, 이제 교회 총무일이며 모든 모임과 행사를 주관하며 그것이 주업이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도 집안 경조사와 십일조 봉투를 미리 만들어놓고 다니고 있으며, 집세며, 세금은 독촉장에 과태료 등 보험료도 몇 년씩 연체되고 무엇 하나 바로 바로 된 것이 없었어요.
그러다 교회 동생이 강원도로 일하려 가는데 따라간다 하기에 아직까지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였더니.
제가 들어와서 신경 쓰이고 불편하다고 짜증을 내며, 괜히 오라 했다라는 겁니다.
그때 저가 느꼈습니다.
저는 내가 희생해서 여기로 왔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은 그걸 불편해 할 수 도 있겠구나.
아! 그럴 수 도 있겠네? 생각됐죠. 스님은 그러시더군요. 살면서 처사모습은 너의 모습이고 그걸 보여준 처사한테 빚 갚게 해줘서 정말 고마운 마음으로 대하라고 하시며, 그리고 남편과 자식은 없다. 머리에서 지워버려라.
그저 들어오면 예우만 갖춰라. 하시는데 잘되다가도 도둑놈을 한순간 받아들이면, 가슴밑바닥에서부터 분노가 올라와 저를 폭류 속으로 끌고 갔어요.
그러다가 울면서 스님께 전화 드리면. 내가 지옥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나, 왜 남편이라 생각하고 내 자식이라 생각하니 그러니까 분노가 올라오지 하시며 저를 혼냈지만, 그게 가슴깊이 받아지지가 않았어요.
안산에 올라와 서너 달을 반지하방에 밤 12시까지 있는데, 아무리 삼구게를 외우며 바보천치가 되겠다고 외쳐도, 완전히 바보는 안됐나 봐요.
그리고 생활비를 10원도 안주니 스님은 돈도 달라 하지마라. 안주면 안주는 대로 굶어라. 하시며, 제가 일하러 나가는 것조차 금하시었습니다.
제가 3kg이나 살이 빠졌어요.
내 속에 도둑놈을 받아들이니 입맛도 없고 먹을 것도 없었어요. 그렇게 몇 달을 스님의 법약을 먹으면서 대구 법회를 꼭 참석했습니다.
법회에 가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이 공부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스님은 그러셨어요. 세은이가 처사랑 이런 일이 없었다면, 이 스님을 만났겠나? 이것을 전화위복이라 하는거다. 하시길래, 맞다 내가 만약 힘든 일없이 잘살았다면 이 공부도 안하고 스님을 만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테니, 내 살아온 세월한테도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살아온 세월을 생각해보면 아무리 잘 살아 보려고 애를 쓰도 길을 몰라 가질 못했고, 스님을 만나고 난 지금부터는 저는 스님이 가르쳐 주시고 닦아놓은 대리석 길로만 가면되니. 저는 무조건 스님 시키시는 대로 한눈팔지 않고 가렵니다.
법회에 갔다 오면 제 마음가짐이 바뀌어서 처사나 애들한테 저를 낮추니 처사도 조금씩 바뀌어 오고, 아이들도 아직까지는 완전히 바뀌진 않았지만 그들도 노력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고, 그 악습도 다 내가 가르친 거라 딸들 잡고 용서를 빌며 참회합니다.
정말 전생에 엄마가 그렇게 부모 속을 섞이고 가슴 아프게 했고, 따님들을 9년간 방치해둔 이 어미의 죄를 용서해 달라구요. 제가 이법을 안 만났더라면. 어쨌을까 생각해보면 정말 아찔합니다.
아직 까지도 저 잘났다고 고개 쳐들고 남자들이나 만나고 술 마시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현생에 갚아야 될 빚을 또 후생까지 가져갔겠죠. 지금은 처사한테 정말 빚 갚는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대하고 교회에도 가자고하면 가고 행사로 모임이 있으면 따라 갑니다.
해달라고 하는 것 다해주고 잔소리 안하고 돈 달라 안하니 집안이 극락이죠.
전에는 12시가 되어야 들어오더니. 요즘은 6-7시에 일찍 들어오고. 누가 당구치자 하면. 당구 좀 치고 온다하고 이야기를 하고 갑니다.
그러면 예 다녀오십시오. 하고 어깨도 한번 틀어주고 머리를 90도 각도로 꾸벅 숙이며,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하니 이것이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지마라 너만 바뀌면 모든 것이 다 바뀐다는 스님의 가르침 이였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스님 말씀이라면 100% 다 믿었고, 무조건 따랐습니다.
정말 스님이 저를 따라 죽을 사람 있어요? 손들어 보세요? 하면 정말 따라죽을 정도로 스님을 믿었습니다.
“스님께서 저희에게 항상 하시는 말씀” 나만 쳐다보면 되고 도둑놈만 제때제때 바로바로 내치라는 말씀 정말 그것만 놓치지 않으면, 지옥에서 극락까지 빠르게 갈수 있습니다.
저는 정말 복이 없이 태어났다고 항상 자책하며 살아왔는데,
우리스님을 만나고 나서보니. 저는 정말 복이 많아 우리스님을 만났고, 전국에 있는 정말 좋은 도반들을 만났고, 지장보살님을 만났습니다.
저도 열심히 수행하여 정말 제 목숨 내놓고 이법을 지켜나가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