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素望 / 賞級 / 天國 스크랩 4. 상급론 어떻게 볼 것인가? - 분석과 논평 (정훈택/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總會神學大學校 추천 0 조회 24 14.07.22 16: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4. 상급론 어떻게 볼 것인가?(정훈택/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 신학자료
최정열 | 조회 22 |추천 0 | 2008.06.26. 12:15

 

 

4. 상급론 어떻게 볼 것인가? 

                                                       정훈택 (총신대학교 신학대원원 교수)   

5. 분석과 논평

 

 한국식 상의 신학/상급론은 다른 어느 기독교 세계에서도 그 발생과 흥왕의 유래를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어디에서도 기독교적 삶을 위해 선풍적 인기를 누린 적이 없었다. 상의 신학/상급론은 성경이 한국에 들어와 뿌리를 내리며 탄생시킨 한국의 순수 토속적 신학 주제이다. 로마 캐토? 교회 즉 천주교의 공로 사상에 반기를 들며 개혁자들이 종교개혁 시기에 몰두했던 주제는 상의 신학/상급론이 아니라 삯의 신학 즉 보상론(報償論)이었다.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공로로 취급되어서는 안 되고, 그것이 한 사람을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는 조건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 것이다.

 

 상의 신학/상급론은 인간의 노력을 구원의 공로로는 제시하지 않지만 천국에서의 더 큰 영광, 더 큰 상급과 연결하여 인간의 삶을 자극하려 하는 것으로 천주교 신학의 공로주의와 개신교 신학의 은혜주의를 교묘하게 절충한 것이다. 인간의 구원과 그 영광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설명하는 개신교 신학처럼 상의 신학/상급론은 구원에 있어서 만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인정한다. 이 점에서는 분명 개신교 신학의 냄새를 풍긴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영광스러운 상태를 상이나 상의 차등과 결합함으로써 인간의 노력을 - 개신교가 전적으로 은혜의 영역으로 돌리던 것과는 달리 - 신적 무엇의 조건으로 내세움에 있어서는 천주교 신학에 동조하고 있다.

 

 천국에서의 화려한 영광을 말함으로 상급론은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축복을 강조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천국에도 부끄러움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공로가 될 만한 일들, 즉 상급을 받을 일들을 일구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 믿음이 지시하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십자가에서 흘린 그리스도의 피, 그 하나님의 일을 믿는 것이 가져올 수 있는 것은 - 물론 천국을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크나큰 영광이지만 - 천국의 부끄러움뿐이다! 한 편으로는 예수님이 하신 일, 그리스도의 생애에 성취된 하나님의 구속사역과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영광의 차등 그리고 겨우 불타다 남은 숯검정과 같은 구원이라고 그리스도의 일과 믿음을 고의적으로 평가절하하고 있다.

 

 앞에서 잠시 논한 것처럼 상의 신학/상급론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인간의 노력을 절대로 공로로 내세우려는 것이 아님을 목 놓아 변증한다. 이러한 인간의 노력조차도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개인에게 부어주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항변은 궤변에 가깝다. 상급론으로 그들이 자극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선한 삶, 순종의 삶”이기 때문이다. 상급론을 거룩한 삶/깨끗한 윤리/모범적 행위의 동기를 유발하기 위한 근거로 본 것이다. 기독교인의 삶을 전적으로 성령에 이끌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설명하는 개신교의 신학이 바람직한 삶을 자극하지 못한다고, 그래서 상의 신학/상급론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상급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들 스스로가 개신교의 신학을 떠나고 있음을, 그리고 신자들의 삶을 더 강하게 실제적으로 자극할 필요를 느껴서 상급론에 -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로주의와 같은 - 동기유발의 기능을 부여함을 고백하는 것이나 같다. “상급동기가 없다면 우리의 삶이 억망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경고 속에 ‘거룩한 삶의 동기를 유발하려는’ 공로주의가 이미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을 순전한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정말 공로성 없는 행위, 은혜에 사로잡힌 인간의 노력을 말하고 그것으로 선한 삶을 자극하려 한다면 상급론이 유별나게 강조되어야 할 필요나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개신교 신학이 오랫동안 말해 온 삯의 신학/보상론으로 충분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상의 신학/상급론이 중요하고 기독교적 삶을 위한 자극제로 꼭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 어떤 변증에도 불구하고 - 공로주의 사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 즉 인간의 노력을 자극하여 삶을 바르게 이끌어 보겠다고 하는 윤리적 동기 유발의 족쇄를 교묘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상의 신학/상급론은 천주교의 이중윤리관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 로마 가톨릭신학은 예수님의 교훈을 구원적 명령과 복음적 권고의 두 가지로 구분한다. 구원적 명령은 죄인이 구원을 얻는데 없어서는 안 될 절대 필요 요구로, 복음적 권고는 구원과는 관련이 없지만 완전한 순종을 위한 보충적 권고로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산상설교는 모든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그런 명령이 아니라 완전한 삶을 위해 특별히 하나님께 헌신을 약속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고 이중윤리관은 말한다. 물론 이 권고를 따르는 것 혹은 따르지 못하는 것은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 상급론이 이 이중윤리관과 비슷한 면은 구원 이후 혹은 천국에 이미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더 나은 것을 위해 자유롭게 지켜야 할 그런 특수한 규칙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에 있다. 같은 구조 안에서 완전한 순종(천주교), 혹은 상급을 위한 순종(상급론)으로 이름 붙인 것만 다를 뿐이다.

 

 개신교 특히 장로교의 부동성, 정체성, 이지적 교리는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에게 자주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어왔다. 공격의 주 목표는 장로교 신자들에게 삶의 활력소와 교회 생활의 활기를 불어넣거나 되찾게 하는 데 맞추어졌다. 그 중 하나가 성령 충만 혹은 성령 세례를 제 이의 은혜로 제시하는 순복음 신학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하더라도 능력 있는 삶, 활기찬 증거의 삶을 위하여 중생/믿음/칭의와는 종류가 다른 은혜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상급론은 성령의 두 번째 은혜를 강조하는 이 순복음 신학과도 대동소이하다.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하는 상급을 노려 이 세상에서의 풍성한 삶과 사후의 더 큰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상을 두 번째 은혜로 설정하고 이 기준에 따라 모든 신자들을 이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 구분하기 때문이다.

 

 정말 상급론을 성경에서 증명하려면 상의 신학/상급론을 말하는 사람들이 찾아내야 할 구절들은 다음과 같은 범주의 내용이어야 한다.

 

 첫째, 상, 상급, 면류관 등이 천국이나 지옥과 직접 연결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상급이란 천국 이후의 논제이기 때문이다. 상과 벌은 - 성경과는 달리 - 상급론에서는 서로 반대개념으로 연결될 수 없다. 상급론에서 “상”은 천국이 전제된 순 긍정적 개념이요, “벌”은 천국이 배제된 순 부정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즉 상급론은 하나님의 벌을 “상”이 아니라 천국이나 구원의 반대어인 “심판”에 첨가되는 “어떤 것”으로 내세워야 한다. 또 “상”을 벌이 아니라 지옥의 반대어인 “천국”에 첨가되는 “무엇”으로 내 세워야 한다. 상 혹은 벌을 말한다는 구절이 - 이들이 제시한 구절이 보여주듯이 -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나타나 때로는 천국과 때로는 지옥과 결합되어 있다면 상을 천국 안에서 만의 문제로 설명하거나, 벌을 지옥 안에서 만의 문제로 설명할 수는 없다. 또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모순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둘째, 위 첫 번째 규칙을 위반하면서 상급론이 상과 벌을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파악하려 한다면 - 앞에서 인용한 상급론이 실제로 이렇게 설명하는 것처럼 - 상과 벌은 모두 천국 안에서의 얘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성경에서 순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하나님의 “벌”, “심판”이 “천국 안에서의 무엇” 즉 긍정 안에서 따지는 부정임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작은 상급”이나 “상급 없음”을 하나님의 벌, 하나님의 심판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상급론이 성립하려면 하나님의 “벌”, “심판”이라는 용어가 “천국의 허용, 그러나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의미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벌”, “심판”, “밖에 쫓아냄”, “울며 이를 갊”은 절대적 부정을 말하는 것 아닐까? 개혁신학은 오래 동안 이 개념들을 순 부정으로 파악해 왔다. 그런데 상급론은 이 개념들을 긍정(즉 천국의 허용) 중에 들어 있는 부정(그러나 부끄러움)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말씀이 성경에 들어있지 않다면, 상급론은 순전히 궤변적인 신학 이론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다.

 

 세째, 상급론의 구조 안에서라면, 믿음으로 구원을 보장받았다는 신자들에게 더 이상 벌, 심판, 지옥 등의 개념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구원을 조금도 말할 수 없는 불신자들에게 상급 개념이 결합되어 나타나서는 안 된다. 천국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에게는 (차등)상급만 거론될 수 있고, 지옥의 불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차등)벌만 거론될 수 있다. 그런데 상급론자/상의 신학자들이 제시하는 구절에는 대부분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상을 말하는 구절이 동시에 여전히 벌을 말하고 지옥의 심판을 말한다. 벌을 말하는 구절에 동시에 여전히 하나님의 상급이 등장한다. 즉 상급론은 성경의 구원론적 구조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구원론적 어투, 즉 성경의 표현법을 바르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상급론을 말하는 사람들은 정말 상급을 말한다는 구절은 어느 것이나 신자들과만의 관계에서, 또 벌을 말하는 구절들은 어느 것이나 불신자들과만의 관계에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일까?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불가능하다.

 

 상급론자들이 상급론의 근거 내지 증거 구절로 제시한 모든 구절들은 위의 세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상급론은 성경적 주장이 아니라고 잘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상급론이 유독 한국 풍토에서만 발생하였고 따라서 이 천 년 기독교 역사상 어떤 유래도 찾아볼 수 없다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상급론자들이 제시하는 증거구절들이 논리적으로 제시한 위의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다는데 기초한 것만은 아니다. 더 큰 이유는 상급론자들/상의 신학자들이 제시하는 가장 기본적인 구절들에 포함된 “상”, “상급”, “상주다”, “상받다”가 전적으로 오역이라는 데 있다. 이 구절들을 모두 제외하고, 즉 “면류관”이라는 상징적 표현과 심판 등과 관련된 간접적 지원 구절들만으로 상급론을 주장할 수 있을까? 필자가 보기에 그 대답은 “아니다”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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