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윤 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요약
(박해시기별)
14. 을해 박해 순교 복자(경상 강원 1815-1816년 순교자)
김 윤덕 아가타 막달레나(1765-1815) 김 시우 알렉시오(1783-1816)
최 봉한 프란치스코(1785-1815) 서 석봉 안드레아(? -1816)
김 강이 시몬(1765-1815) 김 희성 프란치스코(1765 -1816)
구 성열 바르바라(1776-1816) 이 시임 안나(1782-1816)
고 성대 베드로(?-1816) 고 성운 요셉(?-1816)
김 종한 안드레아(?-1816) 김 화춘 야고버(?-1816)
1)김 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경상도 상주의 은재(현 경북 문경시 가은읍 저음리)에서 태어나 고향 인근에 전파된 복음을 듣고 입교하였다. 입교 후 노래산 교우촌(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 2리)으로 이주하여 그 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한다.
1815년 2월 22일경 교우들과 함께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던 중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된다.
모진 고문속에서 배교를 하고 감옥문을 나가던 중 김 종한 안드레아의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신앙 격려를 듣고 다시 관장 앞으로 들어가 신앙을 강하게 증거한다.
“아까는 혹형을 견디기가 너무 어려워 천주를 배반하였지만, 이것은 크나큰 죄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뉘우치고 다시 관장님 앞으로 온 것입니다. 원하시면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실한 신자입니다.”
화가 잔뜩 난 관장은 더한 고문을 가해 뼈가 허옇게 드러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옥중 수감 생활을 하다 1815년 음력 4, 5월 50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2)김 시우 알렉시오
충청도 청양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오른쪽 몸이 반신불수로 가난하게 생활하고 결혼도 하지 못했다 한다.
일찍이 고향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누구보다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지키고,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신자들이 모여 사는 진보 머루산 교우촌(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으로 이주한다.
박해가 일어 안동과 대구로 압송, 이송되고 감사 앞에서 용감히 신앙을 증거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영혼을 구하시려고 수난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감사께서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분을 흠숭하고 천주교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옥에 갇힌 알렉시오는 음식을 구할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다른 죄수들처럼 음식과 바꿀 짚신을 삼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에 대구로 이송되어 굶주림과 형벌의 상처 때문에 33세의 나이로 옥사하게 된다.
3)최 봉한 프란치스코
충청도 홍주 다래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태어나 부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한다. 1815-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서 석봉 안드레아와 구 성열 바르바라 부부가 그의 장인과 장모다.
박해가 일자 가족을 데리고 장인 부부와 함께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 2리)을 찾아가 그 곳 교우들과 신앙 공동체를 이룬다.
박해가 일어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 경주와 대구로 이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모진 형벌 속에서도 열심과 용기를 잃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다가 옥중에서 30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대구 감사가 그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은 다음과 같다.
“최 봉한은 옥에 갇혀 있는 천주교 신자들의 우두머리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천주교 서적들을 수습해 가지고 경상도 산골로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신자들과 함께 한 마을을 이루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가르치며 살았으니 지극히 엄한 법률로 다스려야 한다.”
4)서 석봉 안드레아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구 성열 바르바라의 남편이며, 최 봉한 프란치스코의 장인이다. 뒷날 신자들 사이에서는 ‘손골(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박씨의 외조부’라고 전해져 온다.
과부였던 구 바르바라와 혼인한 서 안드레아는 사위인 최 프란치스코 부부와 함께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 교우촌으로 들어가 신앙 생활을 한다. 박해가 일어 경주, 대구로 이송되고 모진 고문을 받아 쇠약해진 탓에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중 옥중 순교하게 된다.
5)김 강이 시몬
충청도 서산의 중인 집안으로 출신으로 장성하여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재산이 많았으나, 입교한 뒤에는 재산과 종들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아우인 김 창귀 타대오의 가족과 함께 전라도 고산 땅에 가서 살게 된다.
후에 온전한 신앙 생활을 위해 경상도 진보의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으로 이주 교우촌을 일군다.
경상도에서 1815년 을해 박해가 일어 안동에 수감되고 후에 강원도의 수부인 원주로 이송된다.
김 시몬은 임금의 사형 선고가 내려 오기 전에 50세의 나이로 옥에서 순교하게 된다.
6)김 희성 프란치스코
1765년 예산 여사울의 부유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 예산에서 순교한 김 광옥 안드레아가 그의 부친이다.
아버지에게서 신앙을 배우고 모범을 따라 열심한 신자가 된다. 후에 박해를 피해 모든 재산을 버리고 경상도 일월산에 있는 영양의 곧은장으로 들어가 가족과 함께 생활한다. 을해 박해가 일어 잡히게 되고, 안동과 대구로 이송되고 임금의 사형 언도가 내려와 대구에서 참수 치명하게 된다.
7)구 성열 바르바라
충청도 홍주의 한내장벌(충남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출신으로 첫 남편을 먼저 보내고 서 석봉 안드레아에게 개가한다.
부부는 사위인 최 봉한 프란치스코 부부와 함께 교우들이 모여 사는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으로 들어가 신앙 생활을 한다.
박해가 일어 형벌을 받았을 때 마음이 한 때 약해지기도 했지만, 사위인 최 프란치스코가 그녀를 위로해 주면서 “천주를 위하여 함께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설명하구 격려를 들으며 다시 신앙을 다잡는다.
대구로 압송되어 40세 가량의 나이로 참수 치명하게 된다.
8)이 시임 안나
1782년 충청도 덕산의 높은뫼(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양반 집안 출신으로 나이가 들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고향을 떠나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1827년 정해 박해 때 체포되어 8년 뒤 전주에서 사망한 이 성지 요한이 그녀의 오빠이다.
박해를 피해 진보 머루산 교우촌으로 들어가 살다 체포된 후 안동과 대구로 압송되고 동료들과 함께 34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게 된다.
9)고 성대 베드로
충청도 덕산의 별암(현 충남 당진군 고덕면 상장리)출생으로 어려서 부모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다.
1801년 신유 박해 때 체포된 후 유혹에 넘어가 배교를 한다. 그 후 이를 곧바로 뉘우치고 아우와 함께 박해를 피해 경상도 청송 노래산 교우촌으로 들어가 신앙 생활을 한다.
박해가 일어 체포, 경주와 대구로 압송되어 아우와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게 된다.
대구 감사의 조정 보고는 다음과 같다.
“고 성대와 고 성운 형제는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로 천주교에 미혹되어 깨달을 줄 모르기에, 엄한 형벌을 하면서 깨우쳐 주려고 하였지만,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 죽기로 한 마음을 목석과 같이 고집하니, 그들의 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10)고 성운 요셉
충청도 덕산의 별암(현 충남 당진군 고덕면 상장리)출생으로 어려서 부모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다.
형과 함께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된다.
형과 함께 박해를 피해 경상도 청송 노래산 교우촌으로 들어가 신앙 생활을 한다.
박해가 일어 체포, 경주와 대구로 압송되어 형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게 된다.
11)김 종한 안드레아
충청도 면천의 솔뫼에서 태어났다. 1814년에 순교한 김 진후 비오의 아들로, 김 데레사 성녀의 아버지이며, 성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가 된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해 뒤 맏형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다.
부친 김 비오의 오랜 옥중 생활로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져 생활하게 된다.
김 종한 안드레아 가족도 홍주를 거쳐 경상도 영양의 우련밭으로 가서 숨어 산다.
박해가 일어 영양, 안동으로 끌려갔고, 대구로 이송된다. 모진 고문에 약해서 배교하고 나오는 김 윤덕 아가타 막달레나를 열성적으로 권면하여 회심시킨다.
옥중에서 두 통의 편지를 형에게 보내고, 교우들에게도 한 통의 편지를 보내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저는 순교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며, 감히 이 마지막 은혜를 바라기까지 합니다. 제가 만일 이 훌륭한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이후에는 어떻게 삼구에 대적해 나가겠습니까? ..만약에 제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것을 영영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님의 은총을 바라고 다음으로는 여러 교우들의 기도를 믿습니다.”
김 안드레아는 지도층 신자로 지목되어 제일 먼저 칼을 받고 순교하게 된다.
12)김 화춘 야고버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남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으로 이주해 산다. 1839년에 순교한 김 대권 베드로가 그의 형이다.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청송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체포되어 경주와 대구로 압송된다.
고 성대 베드로, 고 성운 요셉 형제, 구 성열 바르바라 등과 함께 대구 옥에 갇히게 되고 참수 치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