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정대신 시절의 초상화.
도요토미 가문의 문장. 오동나무, 현재 일본 정부를 상징하는 인장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고시치키리몬(五七桐紋)이라고 하며, 사실 이 문장은 히데요시만의 전용 문장이 아니라, 본래는 일본 덴노 가문이 쓰던 문장 중 하나였는데,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덴노에게 하사받은 이래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이 문장을 하사받은 적[1]이 있으며, 노부나가 항목에 있는 초상화에도 노부나가의 옷에 이 문장이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이 문장은 조선총독부 휘장에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문장을 쓰는 건 일본이 한국 침략의 야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위 경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렇게까지 볼 필요는 없다.
1. 개요 ¶
1537.03.17~1598.09.18
2. 입지전적 출병 ¶
3. 원숭이, 천하를 잡다 ¶
히데요시는 무가 출신으로써는 최초로 간파쿠에 취임하였고, 게다가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음으로써 고셋케가 아닌 무가 출신의 새로운 가문이 간파쿠에 취임했다는 의의를 갖는다.[21] 이것은 막부가 아닌 조정의 일원으로써 율령체계에 입각한 통치를 하겠다는 의미였으며, 이후로도 조정의 관직을 무사들에게 수여하고 조정의 실권을 회복시킨다. 그리고 그 정점인 간파쿠직을 도요토미 가가 세습함으로써 정권을 유지하려는 구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헤이안 시대의 셋켄 정치와 유사한 면이 있다. 실제로 히데요시는 간파쿠 직을 후계자로 내정하였던 히데츠구에게 물려주었고, 히데츠구를 사사한 후에도 다른 누구에게도 간파쿠 직을 내리지 않아, 히데요리의 장성을 기다린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체제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도요토미 가의 당주가 간파쿠가 된다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히데요리가 너무 어려서 히데요시 사망 직후 간파쿠가 되지 못했고 후견 세력도 마땅치 못하여 정권이 무너진다.
세키가하라 합전으로 실권을 잡은 이에야스는 간파쿠 직을 다시 고셋케에 주었고, 자신은 쇼군에 취임하여 막부를 통한 통치로 돌아갔으며, 관직을 공가의 것과 무가의 것으로 엄격하게 나누게 된다. 후대 메이지 시대에 히데요시의 이러한 정치체제 구상은 천황을 존중한 것으로 높게 평가되고, 이에야스의 막부 개창은 천황을 무시한 것으로 평가하게 되어 히데요시는 충신으로, 이에야스는 역신으로 평가하여 천황의 권위 강화에 써먹었다.
4. 조선 침략 ¶
2. 무역증서제를 부활한다.
3. 일본과 명나라 양국 대신이 각서를 교환한다.
4.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이양한다.
5. 조선의 왕자와 신하를 볼모로 일본에 보낸다.
6. 포로로 잡고 있는 조선의 두 왕자를 석방한다.
7. 조선의 권신이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5. 후계자 문제와 죽음 ¶
6.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 ¶
7. 히데요시의 능력 ¶
일설에 따르자면 이때 구로다는 "마침 잘 되었군요. 이걸로 히데요시님에게 천하의 길이 열렸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몹시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물건까지 떨어트릴 정도였고, 구로다의 말에 따르기는 했지만, 그 지략을 몹시 두려워하여 경계했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구로다 간베에 참조. 히데요시가 구로다의 제안에 따라서 한 신속한 회군은 일본사에 남는 역사적인 것이 되었다.
8. 후세의 평가 ¶
9. 기타 ¶
양부하는[30] 어린 나이에 동래에서 살다가 왜군이 부사 송상현을 죽이고 동래성을 함락시키는 와중에 할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이 왜군에게 살해당했다. 그 직후 포로로 끌려간 양부하는 하루 만에 간단한 일본어 회화를 구사해 총명함을 인정받아 히데요시의 시동으로 보내졌고 그의 수발을 들게 됐다. 몇 년후 강화 교섭으로 건너온 심유경을 만났고 그와 히데요시 독살을 모의하게 되는데 그 과정은 이와 같다. 어느 날 심유경은 히데요시와 대면하면서 이상한 환약을 자꾸 섭취했다.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계속 약을 집어 삼키는 심유경의 행동에 히데요시는 궁금하게 여겼다. 이윽고 히데요시의 질문에 심유경이 대답하길 대륙과 열도의 풍토가 맞지 않아 몸이 허해졌는데 그 허해진 기운을 보충해주는 아주 좋은 강장제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히데요시는 처음에는 의심해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자꾸 권하는 심유경의 권유에 결국 약을 들이삼켰다. 그런데 얼마 후 히데요시는 몸에 기운이 솟는 것을 느끼게 되고 심유경에게 약을 받아 그 후로도 자주 약을 섭취하는데……. 이것이 사실 심유경이 진정 의도한 바였다. 그 약은 사실 복용한 사람을 점점 말라죽이는 비소 계열 독약으로 심유경은 객사로 오자마자 바로 해독약으로 응급처치를 해서 아무 탈이 없었으나 이를 모르고 해독제 없이 복용한 히데요시는 그 탓에 점점 말라가고 기운이 빠져 사경을 헤메여 백약이 무효인 채 얼마 안가 비명횡사했다. |
다만 이야기의 출처가 정식 사서가 아닌 개인이 기록한 야사이며 현재도 히데요시의 사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으므로 단순히 조선과 일본 소수 측에만 돌던 가설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다. 아무튼 이 설이 맞다면 세 나라를 속이고 더 나아가서 뛰어난 사기로 전쟁을 일으킨 전범까지 골로 가게 만든 심유경은 도대체…….
10. 대중매체에서 ¶
- [1] 다만 이에야스는 이 문장을 거절하고 본래 자기 가문의 문장인 접시꽃 문장을 쇼군 가문의 문장으로 사용했다.
- [2] 가토 기요마사,와키자카 야스하루,토도 다카토라,고니시 유키나가,후쿠시마 마사노리등등 임진왜란때 참여했던 왜장들도 상당수 있지만 그래도 임진왜란을 주도했던 히데요시보다는 덜 유명하다. 유명세도 낮지만 저들은 하나같이 객장이라 적어도 앞장서서 침략했다고 해도 전쟁에 대한 책임이 주군인 히데요시만큼 크지는 않은 것도 사실이다. 까라면 까야하니. 다만, 학살, 방화, 약탈, 납치 등의 그들이 저지른 만행은 아무리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이었다 할지라도 만행은 만행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저지른 만행은 잊지 말아야 한다.
- [3] 당시 일본에선 아시가루는 말이 좋아 무사이지(전국시대에는 하급 보병단 역할), 발에 챌 정도로 흔한 졸병.
이 정도로 미천한 신분이었기에 단순하게 '천민 신분'으로 규정하는 이들도 많다.그러나 당대 아시가루는 무사와 농민의 중간적 계급이었는데, 이 때문에 천민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 [4] 칸파쿠 취임 후에 자신의 모친이 츄나곤의 딸로, 궁정에서 시녀로 일하다 낙향한 후 자신을 낳았다고 선전한 적은 있다.
- [5] 이때 얻은 이부(異父)동생이 도요토미 히데나가와 여동생 아사히히메. 이에 대해 이설도 있지만, 아무튼 히데나가는 그의 영지였던 야마토국의 이름을 따서 야마토 다이나곤이라 불리며 형의 충실한 동반자요 심복으로 활약한 인물로 그의 이른 죽음이 도요토미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다는 설까지 있는 거물, 그리고 아사히히메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정략결혼을 하여 스루가 마님이라 불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 [6]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배배신, 즉 가신의 가신의 가신이었다!
- [7] 추운 날 노부나가의 신발을 데우려고 품 속에 품고 있자 노부나가가 크게 마음에 들어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한데, 사실 이 일화는 명확한 사료가 있는 게 아니라 전설의 영역에 가깝다고 한다.
- [8] 이 일화도 후세에서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높다.
- [9] 히데요시는 천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그의 가신들은 대부분 그와 그의 아내 고다이인의 친인척들일 수밖에 없었고, 정식으로 가신들을 양성하기 시작한 것은 오우미에 터를 잡으면서부터의 일이었다. 이런 정황 때문에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하는 오우미 계열 가신들과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오와리 계열 가신들의 갈등이 일어났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 [10] 62대 무라카미텐노의 7대손인 미나모토노 스에후사(源季房)의 아들 아카마츠 히데노리(赤松秀則)을 시조로 하는 가문. 무로마치바쿠후의 창건에 힘쓴 가문이지만 카키츠의 난을 일으킨 대가로 멸문당하기도 했다.
- [11] 아카마츠 히데노리의 5대손인 아카마츠 노리무라(赤松則村)의 4대손 마츠바라 사다모토(松原貞基)를 시조로 하는 가문. 흔히 무라카미겐지 아카마츠시류 마츠바라씨(村上源氏赤松氏流松原氏)라고 불린다.
- [12] 아카마츠 노리무라의 증손자 벳쇼 아츠미츠(別所敦光)를 시조로 하는 가문. 이렇게 1579년까지 멸망했던 가문 중 아카마츠·마츠바라·벳쇼의 세 가문은 같은 혈족에서 갈라져 나온 가문이다.
- [13] 모리 측 대장인 시미즈 무네하루가 할복하고 성은 히데요시 측이 갖는 대신, 성내 약탈을 금하는 내용
- [14] 물론 이건 기마무사 기준이다. 보병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함
- [15] 우츠미로 발음하는데, 노부타카가 죽은 곳의 지명. 그리고 과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등의 아버지였던 요시토모가 부하에게 배반당해 죽은 곳이기도 한데, 이를 빗댄 구절이다
- [16] 이때 히데요시의 관직이 치쿠젠노카미였으므로 하시바 치쿠젠노카미 히데요시(羽柴 筑前守 秀吉)고 불렀다.
- [17] 근위부의 차관급
- [18] 태정관의 차관급, 조선의 도승지에 상당. 단 권관이므로 정원 외.
- [19] 헤이안 시대에 등장한 율령 외 직위로써, 헤이안 시대 후지와라 가문이 섭정(셋쇼), 관백(칸파쿠)를 장악한 셋칸 정치를 벌인 바 있었다. 이 시기에는 명예직에 불과한 공가의 직위였다. 유래는 <한서(漢書)> 곽광전(霍光傳)에 “모든 정사는 곽광에게 거친 뒤에야 천자에게 아뢰었다.”는 글에서 나온 것.
- [20] 조정 최고위
- [21] 당시 일본은 성(性)과 씨(氏)가 구별되었었는데, 히데요시는 고셋케의 일가인 후지와라(氏) 씨 코노에(性) 가의 일원으로 관백에 취임했으나, 조정으로부터 도요토미(氏)를 받음으로써 새로운 가문을 열게 된 것이다.
- [22] 야사나 민간설화에서는 히데요시가 오이치를 짝사랑했다는 설이 많고, 오이치의 딸 중 그녀를 가장 많이 닮은 딸이 요도도노라고 한다.
- [23] 쉽게 말하면 일본이 곧 명나라를 정복할테니 조선이 그 길을 안내하라는 뜻. 만약 조선의 왕이 이를 받아들인다면 그때부터는 히데요시 휘하의 한명의 다이묘로 전락하게 된다.
- [24] 형식적으로는 참가한다면서 1000명 가량의 병력을 차출하긴 했지만, 일본 본토에서만 대기했을 뿐 조선에는 단 한 명의 병력도 보내질 않았다. 80년대에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임진왜란에선 도쿠가와에게 파병하라고 명령을 내려도 나중에는 대놓고
배째개무시하는 도쿠가와를 보고 히데요시가 버럭 거리다가 쓰러지는 묘사가 나왔었다. 그런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얼마나 여우같은 위인이냐 하면 그나마 예비대라고 내놓은 것도 자신의 영지에 도적이 횡행한다는 이유로 몇십명씩 곶감 빼먹듯 빼갔다. - [25] 1591년 할복
- [26] "노부나가가 진을 치면 풀 한 포기 나지 않지만, 히데요시가 진을 치면 시장이 들어선다"란 말이 있다. 다만, 이것은 상업 장려 외에도 히데요시가 즐겨쓰던 '기동전'과 '기만전술'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한데, 예를 들어 오다와라의 호죠가를 정벌할 당시에 대군으로 오다와라 성을 포위한 뒤 뒤에 목책을 쌓고 그 너머에 시장과 유곽(!)을 세워 비번인 병사들과 여자들이 노닥거리는 모습을 일부러 보여주어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등의 공작을 펼치기도 했다고 전한다.
- [27] 'はん'은 "~씨"를 뜻하는 'さん(~상)'의 간사이 방언이다. 한국어 식으로 번역하자면 방언이니까 '태합 아재' 정도.
- [28] 물론, 고려 말의 왜구의 경우에는 '소수'라는 말이 무색하게 수천에서 수만 단위로 난리를 일으켜댔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항목 참고.
- [29] 결과는 기록적인 참패를 당하고 그 3만명은 전멸했다.
- [30] 남원 양씨로 히데요시 사후 모리 테루모토 휘하에 있었다가 35세의 나이로 조선인 백여 명을 데리고 조선에 귀환 후 95세까지 장수했다. 참고로 이 이야기는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 등에도 나와서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