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으로 원래의 “종남산 봉수대” 위치 설명
지금까지는 글과 사진으로 원래의 “종남산 봉수대” 위치를 설명드렸습니다
이번에는 많은 분들이 이해하시기 쉽도록
고지도(古地圖)와 사진을 위주로 원래의 “종남산 봉수대” 위치를 설명드립니다
□ 봉수대 복원의 필수 시설
봉수대는 불꽃이나 연기가 올라가는 봉수대(烽燧臺)와
봉군이 양쪽(추화산 및 백산.자암산봉수대) 봉수대를 관찰하는 “초소 겸 숙소”가 항상 같이 있습니다
자동차로 비교하면
봉수대는 차체(바디)와 같고, “초소와 숙소”는 엔진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봉수대를 복원하려면,
껍질격인 봉수대와 함께 아주 중요한 역할인 국경의 변란을 상호 연락하는
봉수대 자체를 관리하는 “초소와 숙소”를 같이 복원해야 합니다
봉수대(불과 연기가 피어 오르는 연통)만 복원하는 것은
껍질만 복원하는 즉, 반쪽만 복원하는 것입니다
종남산 봉수대의 초소와 숙소는
전국의 수 백 곳의 봉수대 터 중에서
가장 완벽한 초소와 숙소의 유적이 남아 있는 유일한 터 중의 한 곳입니다
□ “종남산 봉수대 터”에 표지석 건립 요청
밀양시 또는 사회단체 등은
원래의 “종남산 봉수대 터”에 표지석을 우선 세워야 합니다
삼백만원은 개인에게는 큰 돈입니다
또 "개인"일지라도 누구라도 형편이 되시는 분이 계시면,
이러한 표지석을 하나 세워주시면, 더욱 고맙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영광스러운 일이 될 것이고
향토사를 빛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표지석 예시 : 『조선시대 원래의 ”종남산 봉수대 터“』
표지석은 3백만원 정도면 충분히 세울 수 있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남산 임도를 오르내리면서 볼 수 있도록
“종남산 임도” 바로 옆인
“봉군(烽軍)의 초소 겸 숙소의 축대 앞”에 세우면 됩니다
위기로부터 밀양과 나라를 구했던
첨병인 수 백, 수 천, 수 만명의 봉군(烽軍)의 피와 땀과 영혼이 서려있는
원래의 터인 이곳에 봉수대를 복원하는 것은
선현(烽軍)에 대한 우리들의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종남산 봉수대 표지석" 건립 위치 및 견본 예시
(주)도재국
밀양지(1987 밀양문화원 발행) 546 페이지에는
"조화원(助火院)이 있고, 예림리 안마을로 추정된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저(도재국)가 보기로는 밀양지의 기록 중에서 조화원 위치 설명이 잘못되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조화원(助火院)" 이라는 원(院)의 명칭 자체가 "봉수대를 지원하는 원(院)"입니다
그래서 "자여도"로 이어지는 역로인 "상남면 기산리 우곡마을 앞 역로변(驛路邊)"이 맞다고 봅니다
"밀양지에 이미 예림리 안마을로 기록되어 있다" 라고 해서, 그냥 고착화시키면 않됩니다
밀양지(密陽誌)에도 "추정"이라고 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가장 타당하고, 적정한 위치로 "조화원의 위치"를 비정해야 합니다
수 백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조화원에 대해서
지금 발굴해서 흔적(유물) 없어면, 증거 채택이 않된다는
"책상 앞에 앉아 고루한 주장만 하는 기존 사학계의 증거 채택 논리"는 이제, 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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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보신 바와 같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의 고지도 및 국립중앙도서관의 고지도와
현장의 “종남산 6부 능선의 봉군 초소(숙소) 유적지”에 의해서
“종남산 봉수대” 위치가 명명백백하게 확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종남산 봉수대”의 위치가 위 여러 사진과 고지도에 표시된 “종남산 제2봉의 능선”
즉 “종남산 6부 능선의 봉군 초소(숙소) 유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문화재청도, 밀양시도, 역사학계도, 어느 누구도 부정을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