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주님 사랑하는 자
 
 
 
카페 게시글
교회사관련 스크랩 천혜의 요새 마사다
rhee12 추천 0 조회 33 14.01.09 14: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천혜의 요새 마사다

 

 

신라가 백제에게 빼앗겼던 성을 탈환한지 몇 해 지난해로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초토화되는 불운한 패망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마사다의 역사는 1800년대 이래로 발굴되고 유네스코문화 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스라엘군이 훈련을 마치고 이곳을 끝으로 훈련에 참가하는 전통이 생겨난 마사다는 로마군에게 점령당하기 직전에 이곳에서 영광스럽게 전원 자결이라는 명예를 않고 이스라엘의 역사의 종지부를 찍는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곳이 이스라엘 민족의 긍지와 명예가 담긴 숭고한 절벽위의 요새이지만 2000년간의 모습을 뒤로하고 최근에 와서야 존재가 알려졌고 미국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면서 이스라엘 역사 중에서도 가장 비참하지만 그들의 자존심을 남겨놓은 마사다의 전설은 세계 모든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곳을 오를 수 있는 방법은 관광객들을 위한 트래핑 길을 이용하거나 새롭게 케이블카가 정상까지 오를 수 있어 오랜 세월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마사다의 현장을 볼 수 있어서 어쩐지 모르게 가슴에 차오르는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마사다에 오르는 길은 케이블카를 타지 않으면 3시간정도의 트래핑을 통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무엇이 사람들을 이곳으로 이끄는지는 올라본 사람만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로마군에 대해 항거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원 자결! 그리고 바로 그 장소인 마사다!】

 

 

마사다 위치도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마사다는 기원전 37년부터 31년 사이에 헤롯 대왕이 악정으로 인해 자기에 대항한 반란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피난 요세이자 왕궁으로 세웠다고 한다. 수천 명이 몇 년간 충분히 먹을 수 있을 정도 분량의 식량을 쌓을 수 있는 식량창고도 만들었다. 661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하자 일단의 유대인 저항군이 주둔하고 있던 로마수비대를 몰아내고 이 요새를 차지했으며 당시의 지도자는 에리아자르 벤 야이르였다고 한다.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다른 유대인들과 그 가족이 마사다로 피난해서 합류했으며 2년 동안 이곳을 근거지로 삼고 로마군과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 다른 유대인을 공격했다.

 

 

 

72 플라비우스 실바장군이 이끄는 로마 제10군단이 마다사로 진격했다. 여러차례 요새를 공격했으나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고 이에 로마군은 서쪽의 고원과 같은 높이의 거대한 성채를 쌓아올려 공성을 준비했다. 요세푸스는 그가 기록한 다른 전투와는 달리 이 전투에서 유대 저항군의 반격을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마사다의 저항군이 로마군에 대항할 전력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다른 역사학자들은 로마군이 성채를 쌓을때 같은 열심당인 유대인 노예를 이용했기 때문에 민족주의성향이 다분한 열심당원이 차마 동족을 죽일 수 없었다고 보고 있다.

 

로마 제10군단이 마사다로 갔을 당시 로마부대의 군단 단위는 3,000명 선에서 유지하고

군단 양쪽에는 300명의 기병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나 정복전쟁이 시작된 싯점에는 군단의 인원이 6,000명과 그에 맞먹는 보조병 (Auxiliarius)으로 체계가 잡혔다.

 

마사다에 15,000명의 인원이투입된것은 10군단과 예루살렘 함락으로 붙잡은 유대인 포로들을

대거 이곳으로 데려와 전투의 노역으로 부렸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로마의 많은 장군 중 

가장 유능했으며 군단을 가장 잘 사용한 인물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들 수 있다.

대 스키피오라고 불리우는 그는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 장군을 꺽고 30세에 집정관에 오르기도한 인물이다.

 

 

 

73년 드디어 공성을 위한 성채가 마련되자 로마군은 공성기를 이용해 성벽일부를 깨뜨리고 요새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식량창고를 제외한 요새안의 모든 건물이 방화로 불에 탔고 엄청난 수의 자살한 시체들만 즐비했다. 유대인 율법은 유대인의 자살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기에 유대인들은 제비를 뽑아 서로를 죽였으며 최후에 2인이 남자 한 명이 죽이고 남은 한 명은 자살했다고 한다. 다른 건물을 모두 불에 태우면서도 식량창고만은 남긴 것은 최후까지 자신들이 노예가 되지 않으려고 자살한 것이지 식량이 없거나 죽을 수밖에 없어서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마사다에서 살아남은 것은 여자 두 명과 다섯 명의 아이들뿐이며 로마군은 그 무서운 자살 광경에 겁을 먹고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들을 방어할 흙과 벽돌의 담은 말이없다. 다만 이곳의 역사가 살아남았던

몇 안되는 사람들에 의해 알려지고 오랜동안 외부와의 차단으로

이스라엘 빈족의 소식을 알 수 없었던 마사다의 시민들에 의해 남겨진 헤로데 대왕의

두개의 궁전 그리고 그들이 사투를 벌이면서도 꼭 필요했던 빗물을 저장했던 저수조,

로마식으로 만들어진 목욕탕의 잔해, 그리고 막사로 사용했던 흔적과 창고들이 2000년

전의 역사와 살아간 흔적들을 말해주고있다. 그리고 마사다 요새 400m아래에는

로마군들이 주둔했던 터와 막사의 자리가 보존되어 역사의 현장을 볼 수 있었다.

 

 

 

로마군과의 전투가 계속 되었을 당시 로마군의 수는 15,000명정도였으며

유대인들의 숫자는 960명이었는데 살아남은 여자 둘과 아이들 5을 빼면 953명 전원이 자결을 한셈이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강하고 담대하게 로마군과 많은 시간을 대치하며 저항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신에대한 경외심과 그들의 조국에 대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존감이었을것이다. 그런 이유로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경제력의 거부들이 유대인들로 넘쳐나고 있다는것만 보아도 그들의 머리가 우수하기보다는 뭉치는 힘, 조물주를 향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민족의 액소더스를 경험하며 숱한 고통을 당하고 로마에 의해 그들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는 역사와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에 의해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가 없어지도록 도륙을 당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풀뿌리처럼 성장하고 뭉치고 세계를 그들의 손에 의해 좌지되는 역사를 보면 놀라기보다 존경스러워진다.

 

 

 

그냥 볼때는 돌무더기들의 집합처럼 보이는 이곳에도

그들의 애틋하고 비장한 마음이 전해져오는것 같다.

 

 

 

 

 

마사다요새에는 로마군의 침입에 대비해 5m가 넘는 성벽과 38개의 탑이 만들어져있다.

 애초부터 헤롯대왕의 은신처로 만들어진 요새로 유대인들이 이곳에 오게된 이유중의 하나도

유대광야 동쪽 끝이면서 따로 떨어져있는듯 보이는 요새의 역활로 보았기때문~

 

 

 

 

 

 

 

 

 

이곳에 남겨져있는 둥근 돌은 로마군과의 전투에 사용되던 돌이다.

 지금은 한 여자 아이가 그 돌에 앉아있다.

세월로 인해 과거의 역사는 잊혀지지만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모든게

현재로 돌아오고 많은 의미심장한 교훈을 주기 마련이다.

그래서 잠시 들른 마사다는 돌로쌓은 축조물에 불과하지만 사막 한가운데

우뚝 솟아난 마사다의 위용만큼이나 많은 생각들을 하고왔다.

삶의 한가운데 서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양~

 

 

 

 

 

 

 

 

 

이 조형물은 헤롯대왕이 만든 현대의 사우나같은 시설이라고한다.

 마사다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만들어진 헤롯대왕 역시

로마식 목욕탕을 선호했던것 같다.

 

헤롯대왕은 기원전 35년에 이곳을 새롭게 축조했는데 실은 하스몬가가 축조한것을

헤롯대왕이 개축을 하였는데 로마를 등에 업고 유대지방을 다스리던 그가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한 반란과 독립을 원하면서 유대왕국에 관심이 많던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에게 유대왕국을 달라고 요구하자

불안감을 느낀 헤롯대왕이 마사다를 근거지로 옮기고

식량과 무기를 쌓아두면서 일의 발단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그가 사망하고 난 후에 로마군은 서기 70년에 유대왕국의 이스라엘을 불태우고

패망한 뒤 유대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 오면서 길고 지루한 마사다의 역사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현대의 사우나 시설같은 편안한 목욕문화를 즐겼던 헤롯대왕(헤로데라고도 불림)은

헤로데스 1(히브리어: ????????? 호르도스, 그리스어: ?ρ?dη?, 기원전 73년경~기원전 4)

또는 헤로데 대왕(공동번역성서), 헤롯(개역한글판)은 로마 제국 시대에 유대 지방에 분봉된 왕으로 

로마제국이 유대를 간접 지배하기 위해 유대의 왕으로 임명한 사람이다.

 

흔히 마태복음서 제2장에 나오는 동방 박사와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서

어린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운 일로도 유명하다.

 

헤롯은 자기 영토에 일종의 건축붐을 일으키고 많은 도시와 요새를 건설했다.

예루살렘에 수도시설을 정비하고 새로이 왕궁을 건설하고 국경에 마사다와 같은 요새를

새로이 정비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에 배를 건조하는 데 꼭 필요했던 아스팔트를 사해에서

추출하여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배분하여 독점하였고 아우구스투스로부터 키프로스의

구리 광산을 임대하여 돈을 벌어들였다. 당시에 그가 건설한 도시로 유명한 것은

카이사레마르티아와 그 항구, 그리고 옛 사마리아의 유적 위에 세워져 아우구스투스에게 봉헌된

세바스테인데 카이사레아는 나중에 유대가 로마의 직할령이 된 후 그 지역의 수도가 되었다.

 

 

 

기둥들이 여러개 땅에 세워져있는데 사우나 시설이다.

기둥 아래로 열이 지나가고 그 위로는 구들을 놓아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공법하고 비슷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로마군을 막던 요새들의 모습은 돌들이 많이 무너진채로 대충적인 윤곽만 알 수 있다.

 

 

 

마사다의 헤롯대왕 궁의 절벽쪽 모형이 전시되어있다.

헤롯 대왕의 왕궁은 몇시간 지나면 뜨거운 햇볕을 피해 시원함을 느길 수 있도록

건설되었고 냉수와 온수를 번갈아 쓸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다니 놀랄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위험한 곳에 왕궁을 지은 이유도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었겠지만

아랍인들은 이곳을 아스사바(저주 받은 땅)이라고 명명하기도했다.

마사다의 생김새가 군함의 윗편을 닮았지만 생김새가 이상하게 생겨서

붙여준 이름이기도하다.

 

 

 

마사다 주변을 바라다보는 시선은 누구나 다를 수 있다.

관광지로 보는 사람, 종교적인 시선으로 보는 사람, 고고학적인 견지에서 관찰하는 사람,

모두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예루살렘 멸망과 더불어 결사항전하던 곳으로 바라보게되지만

헤롯대왕의 역사와 로마의 역사가 함께 공존했던 이곳은 기독교의 본질인 예수가 중심에 서 있기도하다.

 

로마에서 도망나와 이곳에 안착한 헤롯이 동방박사가 찾아왔던 예수탄생 당시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했던 장본인이기때문이다. 그도 결국에는 기원전 4년에 극심한 고통으로

생을 마감했는데 가장 사랑했던 부인 마리암과 두 아들을 죽이고

6번의 결혼을 통해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고 로마의 허락을 받지 못한채

세 아들에게 그의 모든 영토를 나누어주고 성서상에서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장본이기도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적인 관점과 왕으로서의 관점이 서로 엇갈리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다른 것도 그의 예루살렘 성의 재건에 대한 치세때문일 것이다.

 

(마 2:1-18)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 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수천년이 지났지만 역사의 현장은 그대로 남아있다.

 

 

 

마사다요새 아래의 지형

 

이곳의 역사가 시작된 이유는 한마디로 예루살렘의 함락이 그 원인이다.

로마에 항거하는 운동인 제1차 유대인 반란사건으로 로마의 분노를 사서

지금의 통곡의 벽 부분만 남겨놓은채 예루살렘성전이 전소가 되었다.

이 사건은 로마의 티투스장군에 의해 실행되었고 예루살렘성전의 공격에 최후까지

남아있던 열심당원 엘르아살 벤야일을 포함 960명이 마사다로 도망오면서

이스라엘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엔딩은 참혹하지만

자존감을 지킨 유대인들의 자결로 끝나고...

 

 

 

 

 

 

 

 

 

당시 로마군과의 싸움에 이용되던 돌덩이들이 한무더기 쌓여있다.

 

 

 

마사다 상단부위와 아래쪽으로 이어진 길과 좌측의 헤롯대왕의 궁이

있던 자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조형물로 만들어져 있다.

 

 

 

2000여년 전의 역사를 대하는 사람들은 흘러간 중요한 사건을 인식하기엔 부족할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에겐 현재 진행형인 영광의 상처 같은 것이리라.

 

 

 

당시에 쓰이던 물항아리가 덩그마니 건물 한쪽에 놓여있다. 

 

 

 

 

 

험준한 산새가 이곳을 오르기엔 무척이나 힘들었을법한 풍경이다.

마사다의 윗쪽의 크기는 14만톤짜리 크루즈의 2배정도 크기로

폭이 110m, 길이가 620m 정도이다. 그러고보면 크루즈의 크기도 만만치 않다.

이곳을 운항하는 배는 6만톤급인데 지중해 지역을 다니는 크루즈는 14만톤 정도로

길이가 300m가 넘었고 폭도 50m 이상이었다.

 

 

 

 

 

 

 

 

 

 

 

벽돌로 특이하게 쌓는 모습이 그림으로도 안내되어 있다.

 

 

 

유대인 포로들에 의해 강제로 만들어진 망루는 마사다의 성벽보다 높은 위치에서

공격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유대인들의 저항에 종지부를 찍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로마군은 마사다 요새부분에 비해 노출이 되어 있고 물자의 수송이 어려웠지만

15,000명 정도의 인원중엔 포로인 유대인들이 6,000명 정도가 요새를 함락할 망루를 만들었는데

마사다 요새보다 높은 크기로 투석기를 이용해 400m나 되는 거리로 수십kg이나 되는 돌들을 쏘아

올리는 바람에 마사다의 요새는 무너지고 저항할 길 조차 없게 되어 함락에 이르게 된다.

같은 민족이었던 포로들의 힘에 의해 결국은 마사다의 역사도 끝이날 수 밖에 없었으니

비통함의 운명은 이들의 마지막 희망도 사라지게 만들었다.

 

사진에서 보이는 가운데의 언덕같은 부분이 3년여 공사끝에 완성한 부분으로

이곳이 완성되자 로마군이 습격을 감행했던 곳으로 항전에 종지부를 찍게된 중요한 부분이다.

 

 

 

 

 

 

 

 

 

 

 

이곳의 역사를 모른다면 이길을 따라 걷는 것도 무의미하리라.

그러나 다행히도 미국의 학자에 의해 발견되고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발굴과 조사가 되어 요세푸스의 수수께기가 풀림으로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다.

 

 

의외로 몇시간을 오르는 트래킹코스의 길을 따라

마사다로 올라가는 여행객들이 많이 보인다.

 

 

 

 

 

마사다가 함락되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결을 한 이후로

로마군은 마사다에 40년쯤 머물렀다. 500년 가량 지나 비잔틴 수도사들이 한동안 살았지만,

이슬람 교도들이 유대를 정복하자 그들도 떠나갔다.

 

유태인들이 이스라엘을 세우기까지 1900년 간이나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떠도는 사이에,

그들의 용기와 신앙을 상징하는 마사다는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그리고 유대인이면서 마사다에 얽힌 일화를 책으로 만들어 이 이야기를 알리고자 했던

'요세푸스'그는 로마편에 서서 갈릴리 지방을 다스리던 유대인 출신 로마장교였기에

그의 이야기는 사실상 묻혀지고 말았다. 그 후로 1838년에 미국의 두 학자에 의해

이곳이 발견되고 이스라엘 정부의 결정으로 요세푸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수백년간 발굴을 거듭한 후에 이곳의 결정적인 결론에 도달하여 지금의 마사다의

전설을 알리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오가고 그들의 비화에 애도의 뜻을 전하고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곳을 그들의 자랑이자 애국의 현장으로 보존하고 있다.

 

 

 

케이블카가 없다면 얼마나 힘들게 이곳을 올라갈지...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