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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사 천안문 사건 / 주은래 / 등소평
천안문 사건
ㅇ 현대 중국은 개방적 실무파와 공산주의 강경파의 투쟁 즉 ‘專과 紅의 투쟁’이 계속되어 왔다. 모택동이 홍노선인데 대하여 유소기 주은래 등소평 등은 실용주의에 기초하여 부강한 현대국가의 건설을 지향하는 專의 노선이었다. 모택동은 專이 우세하게 되면 이를 견제하였다. 1950년대 후반의 대약진운동, 1960년대 후반의 문화대혁명, 1970년대 초반의 비공비림 운동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은 것은 문화혁명이었다.
ㅇ 그러나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976년 4월 대중 반란이라고도 할 천안문사건(톈안먼사건, 天安門事件)이 일어나 모택동은 완전히 고립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ㅇ 천안문 사건은 두 차례 있었다.
① 1976년 1월 周恩來 총리가 사망하자, 중국에서는 ‘주자파(走資派 : 자본주의의 길로 나아간 實權派)’비판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따라서, 오랜 기간 중국의 혁명과 건설 및 국제적 무대에서의 중국의 위신증대에 기여한 주은래를 추도하려던 중국 민중의 의지는 꺾이고, 다시 극좌적 조류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고인을 추모하려던 민중들이 76년 4월 4일 청명절(淸明節)에 천안문을 중심으로 시위를 하며 주은래를 추모하는 화환을 바쳤다. 당국이 이 화환을 모두 철거해 버리자 다음날인 5일 격노한 대중은 반란을 일으켜 건물과 자동차 등에 방화를 하는 등 일대 소요가 일어났고, 등소평(덩샤오핑, 鄧小平: 당시 중국공산당 부주석·부총리) 에게 책임을 물어 실각시켰다. 이 사건으로 화국봉이 (화궈펑, 華國鋒)이 정식으로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② 등소평 정권하인 1989년 6월 4일 미명에 민주화를 요구하며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학생·노동자·시민들을 계엄군을 동원하여 탱크와 장갑차로 해산시키면서 발포,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 이 사건 이후 천체물리학자 방여지(팡리즈, 方勵之)는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27년간 총리년 역임한 주은래
▣ 출생과 결혼
주은래(저우언라이, 周恩來, 1898∼1976.1.8)는 강소성(장쑤성, 江蘇省)에서 지주·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1913년 천진(톈진, 天津)의 남개학교(난카이, 南開 중학∼대학)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5·4운동에 참가하여 투옥, 퇴학당하였다.
ㅇ 부인 등영초(1904년생)와는 이 남개학교 시절에 만나서 이별 없이 평생을 반려자로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았다.
ㅇ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청강하였고,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1922년 중국공산당 파리지부를 창설하였다.
▣ 주은래와 등소평
ㅇ 주은래와 등소평의 관계는 특별하다. 1920년 프랑스 유학시절에 만나 형제의 의에서부터 출발하여 평생 동안 혁명이념의 동지가 되었다.
ㅇ 문화혁명 기간 중 주은래는 혁명동지들을 보호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등소평이 강서성으로 쫓겨날 때 여러 가지 현지에 지시를 내려 자상한 배려를 해 주었다.
ㅇ 1965년 주은래는 위험을 무릅쓰고 모택동의 후계자로 주저 없이 자신이나 유소기를 뛰어넘어 등소평을 공론화 하였다.
ㅇ 주은래는 모택동의 대약진운동과 정반대노선인 4개 현대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뒤 개혁개방정책을 과감하게 실천한 등소평은 바로 주은래 노선의 충실한 후계자였다.
▣ 주은래와 장개석
ㅇ 주은래와 장개석의 인연은 중국혁명 지도자 손문이 1924년에 세운 광주의 황포(黃 )군관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임표와는 정치부 주임과 학생으로 만났다. (장개석은 1887년생, 모택동은 1893년생, 주은래는 1898년생 등소평은 1904년생 ) 37세의 장개석 교장 밑에 26세의 주은래가 이 학교 정치부 주임으로 부임하여 모질고 긴 인연이 시작되었다. 당시 국민당은 손문의 국공연합 정신에 의해 새롭게 개조된 것이어서 공산당의 참여가 활발했었다.
ㅇ 1925년 3월 12일 국민당 최고지도자 손문이 서거하자 국공합작의 기반은 무너지고, 1927년 4월 장개석은 반공노선을 확실히 하였다.
ㅇ 공산당은 1927년 7월 당 총서기 진독수의 권한을 정지시키고 5명으로 구성된 임시 중앙정치국을 가동시켰다. 이 때 주은래는 그 5인 위원중 한 명이었다. 주은래는 공산토벌에 대항하여 우한(武漢) 노동자의 무장규찰대(武裝糾察隊)를 조직, 남창(난창, 南昌)폭동을 지도하고, 광주(광저우, 廣州)코뮌을 조직하였다.
ㅇ 중국 인민해방군의 건군 기념일은 8월 1일인데 이것은 주은래의 주도하에 일어난 1927년 8월 1일 남창폭동을 기념한 것이다. 모택동의 주은래에 대한 신뢰와 배려였다.
ㅇ 장개석은 주은래만 없애면 중국 공산당은 끝장이라며 은화 10만원의 현상금을 내걸고 주은래의 체포를 독려하였다.
▣ 주은래와 모택동
ㅇ 1931년 말 광시성(廣西省)의 소비에트구에 들어가서 전략을 지도하고, 1936년 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서 大長征에 참가하였다. 대장정 도중에 준의회의에서 모택동이 지도적 위치를 확립하였다. 모택동을 지도자 위치로 끌어올린 것은 주은래였다. 당시 주은래는 모택동보다 당 사업이나 군사지도분야에서도 우세에 있었지만 주은래는 스스로 양보하고 모택동을 추대하였다. 이후 주은래는 모택동의 충직한 동지와 참모로서 때로는 노선을 달리하면서도 혹독한 인내로써 충심으로 모택동을 받들었다.
ㅇ 西安사건 때에는 대국민당 정치 협상력을 발휘하여 國共내전의 정지와 항일연합전선의 결성에 힘썼다. 1949년 4월 공산정권 수립 후 문화대혁명을 거쳐 최후까지 공산당에서 지도적 위치를 유지하면서 1927년간 총리(58년까지 외교부장 겸임)로서 국내외의 중요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였다.
▣ 검박한 생활
ㅇ 그의 검박한 생활은 잘 알려져 있다. 총리 집무실인 서화청을 손도 못되게 하자 근무원들이 주은래가 외국출장간 사이에 몰래 실내장식을 해버렸다가 “우리 지도자들이 나를 본받아 저마다 집을 손질한다면 군중에게 어떤 영향을 주겠는가 ” 라며 크게 책망을 받았다. 총리가 된 후에도 그의 음식은 황포군관학교시절 장개석과 함께 먹던 그 검소한 식사 그대로였고, 친인척 관리도 철저했으며. 차림은 언제나 단정하였다.
ㅇ 1976년 1월 7일 밤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이 세상에서 마지막 한말은 의사에게 “여기는 나 한 사람이고 아무 일 없어요. 괜찮으니 가서 다른 위급한 동지들이나 돌보십시오. 그들은 당신들을 더 필요로 합니다.”
▣ 닉슨과 일화, 재치 있는 유머
1972년 중국을 방문한 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주은래로부터 네 가지 깊은 감명- 비상한 기억력, 용의주도함, 뛰어난 교섭술 그리고 흔들림 없는 냉정함을 받았음을 이야기했다. 주은래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로부터 다음과 같은 면박을 당한 적이 있었다. “우리 사이에는 분명히 계급차이가 있다. 당신은 부르주아 출신이고 나는 프롤레타리아 출신이다.” 주은래 : “우리 사이에는 분명 계급차이가 있다. 그러나 계급과 관련하여 공통점도 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자기 계급을 배반했다.” 1949년 건국 직후 외국기자의 회견에서 어느 서방 기자가 짓궂은 질문을 하나 던졌다. “오늘의 중국에 창녀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대만에요” 중국에 창녀가 있다고 말하여 그 의외성과 엉뚱함으로 관심을 끌고는 대만을 끌어들임으로써 중국대륙에는 창녀가 없으며, 대만은 엄연히 중국 영토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실용주의자 등소평
▣ 출생
ㅇ 등소평(덩샤오핑, 鄧小平, 1904.8.22 ∼1997.2.19)은 쓰촨성(四川省) 출생.
ㅇ 1918년 프랑스로 유학, 21∼24년 파리에서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그 후 모스크바의 中山대학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1927년 광시(廣西)에서 공산당 지하운동에 종사하였다.
ㅇ 1933년 반주류였던 모택동을 지지하고, 장정에 참여하였다. 항일전 내내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에서 정치위원을 지냈고, 1949년 장강(長江) 도하작전과 난징(南京) 점령을 지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수립에 공을 세웠다. 1952년 정무원(政務院) 부총리가 되었다.
▣ 문화대혁명 때 받은 핍박
ㅇ 한편 유소기 등과 함께 경제발전을 위하여 물질적 보상제도를 채택하고, 엘리트를 양성하자는 실용주의노선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마오쩌둥과 노선갈등을 빚어 1966년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으로부터 반모주자파(反毛走資派)의 수괴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하였다. 등소평의 장남은 북경대에서 홍위병들에게 고문을 받다가 4층에서 던져져 평생 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 오뚝이 같은 정치인
ㅇ 1973년 3월 총리 주은래의 추천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으나,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죽자 마오쩌뚱의 추종자인 4인방(四人幇)에 의하여 다시 권좌에서 밀려났다.
ㅇ 1976년 9월 모택동이 사망한 뒤, 그를 추종하면서 문혁을 이끌었던 4인방이 잠시 득세하였지만, 화국봉(화궈펑, 華國鋒)이 주은래 계열의 노간부인 엽검영 (예젠잉, 葉劍英), 특무부대장인 왕동흥(왕둥싱, 汪東興)과 결탁하여 4인방을 숙청하였다. 화국봉의 힘만으로는 정국수습이 어려웠으므로 엽검영의 종용으로 1977년 7월 등소평이 복직된 것이다.
ㅇ 모택동은 후계자로 화국봉을 택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등소평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등소평은 화국봉과 5년간의 권력투쟁 끝에 1981년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였다. 등소평을 중심으로 하는 실용주의자 들은 모택동 시대에 있었던 극단적인 이념의 강조를 비판하면서, 농업, 공업, 과학과 기술, 군사 부분에서의 4대 현대화를 추진하는 것을 국가의 목표로 삼았다. 모택동이 초래한 상처투성이 중국을 회복시킨 것은 등소평이었다. 그는 참으로 오뚝이 같은 정치인으로 문화혁명의 와중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권력을 잡았다.
▣ 흑묘백묘론과 실용주의
『검정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경제)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라는 그의 유명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은 실용주의, 시장원리와 자본주의 제도를 도입하여 모택동 때문에 초토가 되고 뒤죽박죽이 된 중국을 되살렸다. '부유한 자본주의보다 빈곤한 사회주의가 낫다'는 모택동의 평균주의와 달리, 등 이념은 '다같이 배고픈 것보다 누군가 먼저 부자가 되는 것이 낫다' 는 '선부론'이다.
ㅇ 그의 집권 후 기업가와 농민의 이윤보장, 지방분권적 경제운영, 엘리트 양성, 외국인투자 허용 등으로 중국경제가 크게 성장하였다. 연안 도시의 문도 활짝 열리고 외국인 투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선경제 건설, 후군사 현대화'의 부국강병론도 폈다.
ㅇ 1989년 4월 천안문사태 직후 공직에서 물러난 등은 그의 정치적 거취가 불안해 보였으나 위기를 수습하고, 중국 정계의 최고 실권자로서 개혁과 개방정책을 계속 추진하였다. 19세기 후반기에 그랬던 것처럼, 국가가 주도하는 자강운동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이 대부분 경제난 때문에 몰락하자, 중화인민공화국은 1993년 3월에 열린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국시로 수용하기 위한 헌법개정을 단행함으로써, 부강한 사회주의를 분명한 국가목표로 설정하였다. 경제 궤도를 바로잡아 '연착륙'에 성공했다.
ㅇ 1997년 2월 19일 파킨슨병과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중국인들은 “우리들의 '먹는 문제'를 해결한 은인”으로 칭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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