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15대 기림왕릉 아직 미발굴임: 불명
(? ~ 서기 310년, 재위기간 : 서기 298년 12월 ~ 310년 6월, 11년 6개월)
기림(基臨)왕은 기립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조분왕의 차남인 걸숙의 아들이다.
걸숙은 조분왕이 만년에 낳은 아들로 판단되는데, 모계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어머니가
왕족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일설에는 걸숙이 조분왕의 손자라고도 하는데,
그럴 경우 걸숙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어 신빙성이 떨어진다.
『삼국사기』는 기림의 왕위 계승 과정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다만 기림이 ‘성격이 관대하여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는 기록만 남아 있다.
당시 정황으로 판단하건대, 유례왕에서 기림왕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반란이 일어난 흔적은 없다.
그렇다고 유례왕이 갑작스럽게 죽었다는 기록도 없다. 말하자면 기림왕은 유례왕의 지명과 절차에 따라
적법하게 왕위에 오른 인물인 셈이다.
그렇다면 유례왕은 왜 기림을 후계자로 세웠을까? 기림은 유례왕의 이복동생인 걸숙의 아들인데,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그를 후계자로 삼았을까?
『삼국사기』는 유례왕의 가족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이미 밝혔듯이 이 일은 내물왕과 관련이
있다. 내물의 후예인 김씨 왕족들은 내물왕의 왕위 계승을 합리화하기 위해 유례왕의 부인인
미추왕의 딸을 내물의 부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때문에 유례왕 가족들의 존재를 고의로 삭제했던 것이리라.
그 결과로 유례왕의 자식들에 대해 알 길이 없어졌다. 하지만 유례왕을 이어 조카인 기림이
왕위를 이은 것을 볼 때, 유례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딸조차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신라 사회에선 관습적으로 아들이 없으면 사위가 왕위를 이었다.
즉, 유례왕에게 아들이 없었다면 필시 사위가 왕위를 이었을 것이다.
유례왕에 이어 기림이 후계자로 지명되어 왕위를 이었다는 것은 기림이 유례의 사위였을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당시 풍습으론 사촌간의 결혼은 다반사였고, 혈통을 중시하던
신라 왕실에서는 너무도 당연시되던 일이었다. 따라서 기림은 유례왕의 조카로서가
아니라 사위로서 왕위에 오른 것이 분명하다.
기림은 11년여 동안 왕위에 있었는데, 많은 치적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의 치세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은 재위 3년(서기 300년) 정월에 왜국과 외교 관계를 맺은 일이다.
유례왕 대에는 왜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고, 그로 인해 신라 사회는 늘 전쟁 분위기에 휘말려 있어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왜와 화친한 사건은 신라인들에겐 큰 의미가 있었다.
신라인들은 동해를 끼고 살았기 때문에 왜인의 침입만큼 염려스러운 일은 없었다.
백제나 고구려, 말갈 등은 항상 육로를 택해 쳐들어왔고,
그것도 높은 산맥을 넘어오거나 강을 건너와야만 했다. 따라서 그들을 방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 그러나 왜군은 달랐다.
왜는 항상 수군을 이끌고 와서 상륙작전을 감행했기 때문에 금성을 포함한
모든 신라 땅이 침입로가 될 수 있었고, 일단 수군이 뚫리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더구나 왜는 수전에 매우 능숙했기 때문에 신라인들이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유례왕이 그 골칫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왜국 원정을 감행하려 했지만,
그
때도 왜군의 탁월한 수전 능력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없어 포기했다.
신라인들이 왜를 얼마나 골칫거리로 여기며 두려워했는지는 문무왕의 수중 왕릉에서 잘 엿볼 수 있다.
왜의
침입이 얼마나 염려스러웠으면, 문무왕은 자기가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되어서라도 왜군을 막겠다며
수중 왕릉을 조성하라고 했겠는가?
이런 이유 때문에 신라는 가급적 왜와 화친하려 했다. 왜와 화친하는 것만이 신라의 안정을 유지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기림왕 3년에 성사시킨 왜와의 화친 약조는 바로 그런 안정의 기반을 만드는 일이었다.
기림왕 치세에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재위 3년 2월에 비열흘을 순행하고, 3월에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 왔다는 기사이다. 비열흘은 함경남도 안변이다. 안변은 원산항과 영흥평야를 끼고 있는 곳으로, 북방에서는 비교적 살기 좋은 땅이다. 이 곳은 필시 한반도 낙랑인 동예의 도읍이 되었을 법한 곳인데, 기림왕이 이 곳을 방문했다는 기사는 뜻밖이다. 더구나 바로 다음 달에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 왔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대개 학자들은 이 기사들을 터무니 없는 기록으로 치부하고 있다. 당시 신라의 북방 경계는 기껏해야 소백산맥 정도였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 그렇게 단정할 일은 아니다. 조분왕 때에 석우로가 고구려군과 싸우다가 후퇴하여 마두책에 저지선을 마련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마두책은 경기도 포천의 옛 이름이다. 즉, 조분왕 대에 신라는 임진강 근처까지 진출했다는 뜻이 된다.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보면, 전혀 터무니없는 일도 아니다. 당시 이 땅을 차지하고 있던 세력은 말갈족이었다. 하지만 말갈은 여러 부족이 각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터라 부족 간에 갈등이 생길 경우엔 전혀 저항력이 없는 집단으로 전락하기 십상이었다. 거기다 당시 말갈을 지배하고 있던 고구려는 중국의 위나라와 패권 다툼을 벌이느라 한반도 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신라는 그런 상황을 이용하여 북진을 감행해 임진강까지 진출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고구려가 군대를 동원하여 신라군을 응징한 것이 석우로가 마두책에서 방어진을 형성하고 싸운 전쟁일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그 뒤에 위나라와 싸우다가 도성인 환도성이 무너지는 어려움에 봉착하는데, 이 일로 한반도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이 크게 위축되었을 것이다.
기림왕이 비열흘을 순행하던 300년에도 고구려는 내정의 불안으로 몹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봉상왕의 독재와 전횡으로 민심이 크게 격앙되어 있었고, 결국 창조리가 반정을 일으켜 봉상왕을 내쫓고 미천왕을 옹위한 것이 같은 해 9월이다. 더구나 당시 중국은 서진이 무너지면서 5호 16국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고, 고구려는 중국 대륙의 각축장에 뛰어들어 중원으로 세력을 확대하려 하고 있었다.
당시 비열흘은 고구려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지만, 고구려는 내정의 불안과 중원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느라 한반도 쪽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신라는 그런 상황을 이용하여 동예(한반도 낙랑) 왕실의 후예들에게 손을 뻗쳤고, 급기야 기림왕이 직접 동예의 도성인 안변으로 찾아가 그들의 망명을 권유하여 데려온 것이다. 기림왕 재위 3년에 낙랑이 항복해 왔다는 것은 바로 동예의 왕실 후예들이 대거 망명해 온 사실을 기록한 것일 게다. 이로써 소백산맥 이북으로 영토를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 셈이다.
그렇다면 대방이 항복해 왔다는 기록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대방은 지금의 중국 산동 지역에 형성되어 있던 곳으로 247년에 그 곳의 태수 궁준이 백제의 고이왕과 싸우다 패배하여 전사했다. 이후 대방은 백제와 결혼 동맹을 맺고, 대방 왕의 딸 보과를 고이왕의 태자 책계에게 시집보내야 했다. 이로써 백제는 대방을 병합한 꼴이 되었는데, 책계왕 대에 이르러 백제는 완전히 대방을 병합하여 대륙백제를 건설했다. 대륙백제 건설 후, 백제의 행정은 대륙과 한반도로 분리되어 대륙은 왕이 직접 다스렸고, 한반도는 외척이 다스리는 형태를 띠었다. 그러나 한성을 지배하고 있던 외척 진씨들의 전횡으로 반란이 일어나 300년경부터 약 45년간 나라가 양분되는 사태를 맞았다.
대방이 신라에 항복했다고 기록된 300년 당시에는 한성을 지배하고 있던 외척 진씨 세력의 학정에 반발하여 비류가 구수왕의 아들임을 자처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진씨 세력을 제거하고 한성을 장악해 버렸다.
이때 한성에는 볼모로 잡혀 온 대방의 왕족들이 머물고 있었을 것이다. 반군에 의해 한성이 무너지자, 이들은 신라 땅으로 달아나 항복했을 것이다. 즉, 기림왕 3년에 대방이 항복해 왔다는 기사는 한성에 머물고 있던 대방의 볼모가 신라로 달아나 망명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기림왕 치세 중에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10년 기사에 ‘국호를 다시 신라로 하였다’ 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탈해왕 이후 계림국으로 쓰던 것을 신라로 복구했다는 뜻이다. 원래 신라는 서라, 사로, 신라, 계림 등으로 불렀는데, 탈해왕 대에 계림으로 부르다가 기림왕 대에 다시 계림을 폐하고 종전의 명칭으로 되돌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증왕 대에 가서 ‘신라’ 를 국호로 확정하게 된다.
이외에 몇 가지 재해에 관한 기사도 보인다. 재위 5년에 봄과 여름에 걸쳐 심한 가뭄이 들었고, 7년에는 8월에 지진이 발생하여 샘물이 솟아올랐고, 9월에는 더 큰 지진이 발생하여 금성의 민가가 무너지고 사망자가 발생했다.
기림왕은 재위 내내 병마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그리고 재위 13년 5월에는 병이 위독해져 죽음을 예고했고, 6월에 생을 마감했다.
기림왕은 이전 왕들과 마찬가지로 이사금을 칭호로 사용했으며,
능과 가족에 관한 기사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 출처 : 한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웅진지식하우스), 박영규 지음.(인터넷자료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