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성장씨(結城張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결성 장씨 (結城張氏)의 시조(始祖) 장 사 (張 ?)는 930년(고려 태조 13) 후백제(後百濟) 견훤군(甄萱軍)을 크게 무찔러 삼중대광보사벽상공신태사(三重大匡保社壁上功臣太師)에 오른 정필(貞弼)의 14세손이며 중랑장(中郞將)?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상겸(尙謙)의 넷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조(高麗朝)에 추성보리찬화안사공신(推誠輔理贊化安社功臣)으로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올라 삼한벽상삼중대광문하시중판전리감찰사사(三韓壁上三重大匡門下侍中判典理監察司事)를 역임하였고, 결성부원군 (結城府院君)에 봉(封)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사(?)를 시조로 삼고 본관(本貫)을 결성(結城)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그의 현손(玄孫) 하(夏)가 고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토평하여 2등공신(二等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라 결성군(結城君)에 봉(封)해졌으며, 1388년(우왕 14)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있을 때 고려왕조(高麗王朝)의 국운(國運)이 다함을 느껴 치사(致仕)하고 결성(結城)에 내려와 은둔(隱遁)하였으며 조선이 개국되자 몇차례의 부름이 있었으나 불취하였다.
한편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언호(彦浩)와 부호군(副護軍) 서익(瑞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후중(後中) 등이 유명했고, 혼(混)은 학자(學者)로 효성(孝誠)이 극진하여 고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또한 시문(時文)과 글씨에도 뛰어났고, 정조조(正祖朝)에 감인소사준(監印所司準)으로 서적 편찬에 전력하여 「 몽유편 (蒙喩篇)」?「 시종당률 (詩宗唐律)」등을 저술하였다.
근대에 와서는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며 정치가(政治家)인 덕수(德秀)와 덕진(德震)이 임시정부(臨時政府) 수립에서 광복(光復)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업적을 남겨 결성장씨의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결성 장씨(結城張氏)는 남한(南韓)에 총4,758가구, 19,43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례/봉성장씨(求禮/鳳城張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구례 장씨 (求禮張氏)의 시조(始祖) 장 악 (張 岳)은 도시조(都始祖) 정필(貞弼 : 일명 길, 안동 장씨의 시조)의 21세손이다.
「봉성장씨족보(鳳城張氏族譜)」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고려(高麗) 인종(仁宗 : 제 17대 왕, 재위기간 1123~1146년)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나이 70에 입조(入朝)할 때마다 얼굴에 수심(愁心)이 가득하였다. 하루는 그 까닭을 하문(下問)하자, 그가 대답하기를 “신(臣)이 출생하여 자란 곳이 봉성(鳳城)인지라 고향이 생각나서 그러합니다”라고 하자 왕이 즉석에서 봉성(鳳城)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고 봉성군 (鳳城君)에 봉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구례 (求禮)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군수(郡守) 사종(嗣宗)의 아들 필무(弼武)가 중종(中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첨절제사(僉節制使)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등을 역임하고, 명종(明宗)과 선조(宣祖) 때 가장 청렴 결백한 무신(武臣)으로 알려져 죽은 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그의 두 아들 의현(儀賢)과 지현(智賢) 형제도 유명했는데 의현(儀賢)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해남 현감(海南縣監)을 거쳐 선조(宣祖) 때 부령 부사(富寧府使)로 니탕개(尼湯介)의 침입을 막아 명성을 떨쳤고, 지현(智縣)은 병마절도사 신립(申砬)의 부장(副將)을 지낸 후 임진왜란 때 부하를 거느리고 황간(黃澗)의 추풍령(秋風嶺)에서 적과 대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준(浚)과 부총관(副摠管) 정(檉)이 유명했고, 부호군(副護軍) 수회(壽會)?석좌(錫佐)?후창(後昌)?국만(國萬) 등과 중추부사(中樞府使) 세후(世後)?진구(軫九) 등이 가문을 빛냈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구례?봉성 장씨(求禮?鳳城張氏)는 남한(南韓)에 총 2,591가구, 11, 43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주장씨(慶州張氏)
경주장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454가구 10,67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고성장씨
고성장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201가구 3,52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광주장씨
광주장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86가구 1,56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나주장씨(羅州張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나주 장씨 (羅州張氏)의 시조(始祖) 장세동 (張世東)은 조선(朝鮮) 인조조(仁祖朝)에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역임하고 나주(羅州)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다가 황해도 장연(黃海道長淵)으로 이거(移居)하였는데 본관(本貫)을 전세거지(前世居地)인 나주(羅州)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지낸 준필(俊必)과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른 만석(萬石)?치대(致大)?치명(致明) 등이 있으며,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한 일춘(日春)은 오위장(五衛將) 영근(永根)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나주 장씨(羅州張氏)는 남한(南韓)에 총 2,640가구, 12,42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양장씨(南陽張氏)
남양장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32가구 1,33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남원장씨(南原張氏)
남원장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19가구 1,91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단양장씨(丹陽張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단양 장씨 (丹陽張氏)는 동원(同源)이면서도 계보(系譜)를 달리하는 두 계통(系統)이 있다.
선단양 (先丹陽)으로 불리우는 첫째 계통은 장씨(張氏)의 도시조(都始祖) 태사공(太師公) 장정필(張貞弼)의 증손인 지현(之賢)의 아들 장순익 (張順翼)이 고려(高麗)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단양군 (丹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단양으로 삼게 되었고, 후단양 (後丹陽)으로 불리우는 둘째 계통은 태사공 정필의 14세손으로 결성부원군(結城府院君)에 봉해졌던 장 사(張 ?)의 둘째 아들 장갑용 (張甲用)과 셋째 장무용 (張戊用)을 관조(貫祖)로 하는 계통이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단양군(丹陽君) 순익(順翼)의 아들 재일(載鎰)이 고려조에서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한문(漢文)은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여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역임하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단양군(丹陽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한편 조선조(朝鮮朝)에서 황해 감사(黃海監司)와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역임했던 중란(仲蘭)의 아들 윤화(允和)는 정용낭장(精勇郎將)으로 한양환도(漢陽還都)에 공(功)을 세워 단산군(丹山君)에 봉해졌으며, 태종(太宗)과 동갑계원(同甲契員)으로 친분이 두터웠다. 그의 아들 지(祉)는 강원 감사(江原監司)를 지내고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隱居)하며 매서운 절개를 지켰다.
한말에 와서는 윤덕(胤德)이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영주(榮州)?풍기(豊基) 등지에서 일본군(日本軍)과 싸우던 중 부상하여 체포된 뒤에도 계속 항거하다가 총살당했다.
후단양(後丹陽) 계통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조선(朝鮮) 초기에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한 덕랑(德郞)과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올랐던 계증(繼曾)이 유명했고,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웠던 온(溫)은 정국3등공신(靖國三等功臣)으로 단양군(丹陽君)에 봉해져서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낸 강(綱), 공조 참판(工曹參判) 석규(錫奎),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준(準) 등과 함께 단양 장씨를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단양 장씨(丹陽張氏)는 남한(南韓)에 총 7,365가구, 30,52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담양장씨(潭陽張氏)
담양장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88가구 1,91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덕수장씨(德水張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덕수 장씨 (德水張氏)의 시조(始祖) 장순룡 (張舜龍 : 일명 舜皐)은 원(元)나라 필도치(必?赤) 경(卿 : 일명 백창)의 아들이다.
「고려사(高麗史)」?「덕수장씨족보(德水張氏族譜)」등에 의하면 순룡은 본래 회회계(回回系) 사람으로 제국공주(齊國公主)를 따라 고려에 귀화(歸化)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등을 지내고 덕성부원군 (德城府院君)에 봉해진 후 덕수현(德水縣)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받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순룡(舜龍)을 시조(始祖)로 하고 덕수 (德水)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순룡(舜龍)의 맏아들 양(良)이 판사(判事)를 지냈으며, 둘째 아들 운(芸)은 신호위 대장군(神號衛大將軍)을 역임했다.
양의 손자인 우(羽)는 문과에 급제한 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및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역임했다.
조선(朝鮮)의 무신(武臣)으로 이름난 정(珽)은 순룡의 8세손으로 무예에 뛰어나 성종(成宗) 때 선전관(宣傳官)에 뽑혔고, 연산군(燕山君) 때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을 역임한 후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장녹수(張綠水)가 부당하게 차지한 토지를 농민에게 나누어 주고 모든 폐단을 제거하여 명관(名官)으로 이름이 났으나 이로 인해 파직되었다.
그 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 정국일등공신(靖國一等功臣)으로 하원군(河源君)에 봉해졌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언량(彦良)은 중종(中宗) 때 무과(武科)에 올라 북청 판관(北靑判官)을 역임한 후 명종조(明宗朝)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이르렀으며, 형조 판서(刑曹判書) 운익(雲翼)은 일(逸)의 아들로 선조(宣祖)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하여 전적(典籍)?공조 좌랑(工曹佐郞)?장령(掌令)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왕(王)을 호종(扈從)하였다. 특히 그는 중국어(中國語)에 능통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운익(雲翼)의 아들 유(維)는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광해군(光海君)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當)에 뽑힌 수재로 주서(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을 지냈으나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한때 파직당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정사이등공신(靖社二等功臣)이 되었다.
그 후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내고 이 괄(李 适)의 난 때 공주(公州)로 왕(王)을 호종(扈從)하여 이듬해 신풍군(新豊君)에 봉해졌으며, 1631년(인조9) 딸이 효종(孝宗)에게 출가하였으므로 국구(國舅)가 되어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그후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천문(天文)?지리(地理)?의술?병서(兵書)?그림?글씨 등에 능통했고, 특히 문장(文章)에 뛰어나 많은 책을 저술했으나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없어지고「계곡 만필(谿谷漫筆)」?「계곡집(谿谷集)」?「음부경주해(陰符經註解)」 등이 전한다.
유(維)의 동생인 신(紳)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순절하여 덕창군(德昌君)에 봉해졌으며 유의 아들인 선징(善?)은 직강(直講)?장령(掌令)?병조 참판(兵曹參判) 등을 지냈으며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올라 숙종(肅宗) 즉위년에 남인(南人)에게 몰려 귀양가게 된 송시열(宋時烈)의 무죄를 주장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덕수 장씨(德水張氏)는 남한(南韓)에 총 4,554가구, 19,36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래장씨(東萊張氏)
동래장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13가구 1,79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목천장씨(木川張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목천 (木川)은 충청남도(忠淸南道)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때는 목주(木州)로 개칭하여 청주(淸州)에 속하게 하였다. 1172년(명종 2)에 다시 설치하였고, 1413년(태종 13) 목천(木川)으로 고쳐서 현감(縣監)을 두었으며,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하였다가 1914년 천안군(天安郡)에 병합되어 지금은 천안군(天安郡) 목천면(木川面)으로 남아있다.
목천 장씨 (木川張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조(高麗朝)에서 공(功)을 세워 목천군(木川郡)에 봉해진 장 빈(張 彬)이다.
「목천장씨족보(木川張氏族譜)」의 기록에는 그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그의 후손 지(池)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목천 (木川)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온 것으로 전(傳)한다.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한 지(池)는 남평 현감(南平縣監)을 거쳐 공조 참의 (工曹參議)를 역임했으며, 그의 아들 승로(承老)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라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연산군(燕山君) 때 순천 교수관(順天敎授官)을 역임한 자강(自綱)의 손자 렬(洌)은 임진왜란 때 위성삼등공신(衛聖三等功臣)으로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어 목성군(木城君)에 봉해졌으며, 선조(宣祖) 때 사천 현감(泗川縣監)이 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여러 곳의 전투에서 전공을세우고 진주성(晋州城)에서 장렬하게 순절한 윤(潤)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이 외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홍도(弘道)와 홍적(弘迪)이 이름났으며, 병조 참판(兵曹參判) 수명(受命)과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이필(以弼)?현감(縣監)을 지낸 세량(世良) 등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목천 장씨(木川張氏)는 남한(南韓)에 총 2,409가구, 10,82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밀양장씨(密陽張氏)
밀양장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23가구 1,43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부안장씨(扶安張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부안 장씨 (扶安張氏)의 시조(始祖)는 장씨 도시조 (張氏都始祖) 장정필(張貞弼)의 7세손인 장을호 (張乙湖)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고려(高麗) 인종(仁宗 : 제 17대 임금, 재위기간 : 1123~1146) 때 좌복야(左僕射)를 역임하였고 부령 (扶寧 : 부안의 옛 이름) 군 (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 지방(地方)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며 본관(本貫)을 부안(扶安)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人物)로는 고려에서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을호(乙湖)의 손자(孫子) 대환(大紈),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한 을호(乙湖)의 증손 재(載)를 들 수 있다. 조선(朝鮮)에서 춘추관사(春秋館事)를 지낸 승부(承?)는 절제사(節制使)를 역임한 우인(友仁), 참판(參判)을 지낸 계량(啓良) 등과 함께 부안 장씨(扶安張氏) 가문(家門)을 널리 알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부안 장씨(扶安張氏)는 남한(南韓)에 총 774가구, 3,28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순천장씨(順天張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순천 장씨 (順天張氏)의 시조(始祖) 장천로 (張天老)는「장씨상계세보(張氏上系世譜)」의 기록에 의하며 장씨(張氏)의 도시조(都始祖) 정필(貞弼)의 10세손인 연우(延佑)의 둘째 아들이라 한다.
천로는 고려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중서시랑(中書侍郞)을 지냈고 순천군 (順天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순천 (順天)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인물(人物)로는 천로의 증손인 균절(均節)이 개성윤(開城尹)을 지냈으며 균절의 아들 송저(松貯)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그의 아들 홍(弘)이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였다.
그외에 사검(思儉)이 문과에 급제한 후 사재소감(司宰少監)을 거쳐 중추원 녹사(中樞院綠事)에 이르렀으며, 헌(憲)은 중추원 녹사(中樞院綠事)를 지냈고, 조선 태종 때 승지(承旨)?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고려조에 절개를 지켰다.
한편 조선(朝鮮) 때 판관(判官)을 지낸 일신(日新)은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한 윤의(允義)의 아들로 무예(武藝)가 뛰어나고 청빈하기로 이름났으며, 학자(學者) 건(健)은 성균관 진사시(成均館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전념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문보(文輔)는 명종(明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풍기 군수(豊基郡守)를 거치고 진주 목사(晋州牧師)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많은 치적(治績)을 남겼으며, 효자(孝子)로 이름난 문서(文瑞)는 류성룡(柳成龍)의 천거(薦擧)로 찰방(察訪)에 발탁되어, 효자 정려(孝子旌閭)와 복호(復戶 : 충신과 효자, 절부가 태어난 집의 호역을 면제하여 주던 일)의 은전(恩典)이 내려졌다.
그밖의 인물로는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을 지낸 덕순(德純)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한 대곤(大崑)이 유명하였고, 부총관(副摠管)을 역임한 시규(是奎)와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계헌(桂憲)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낸 한상(漢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세형(世衡)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순천 장씨(順天張氏)는 남한(南韓)에 총 2,308가구, 9,39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동장씨(安東張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안동 장씨 (安東張氏)의 시조(始祖) 장정필 (張貞弼)은 888년(신라 진덕여왕 2) 중국(中國) 절강성(浙江省) 소흥부(蘇興府)에서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 원(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원(源)이 어지러운 난국을 피하여 동래(東來)할 때 함께 따라와 가원도 강릉 땅에 정착, 후에 경북 노전(蘆田)으로 옮겨 살았는데, 930년(고려 태조 13) 고창(古昌) 성주(城主)인 김선평(金宣平), 판관(判官) 권 행(權 幸)과 함께 태조(太祖)를 도와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의 군대를 대파한 공(功)으로 삼한벽상삼중대광아보공신태사영운사(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領雲事)에 오르고 고창군 (古昌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정필(貞弼)을 시조로 삼고, 본관(本貫)을 안동 (安東)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으며, 장씨(張氏)는 덕수(德水)와 절강(浙江)을 제외하고는 거개(擧皆)가 그의 후손(後孫)들이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화령군(花寧君) 사길(思吉)과 그의 아들 철(哲)이 유명하다. 사길(思吉 : 의주 만호 여의 아들)은 1390년(공양왕 2)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威化島) 회군에 가담하여 공신(功臣)에 책록(策錄)되었고, 1392년(태조 1) 조선개국(朝鮮開國)에 공(功)을 세워 개국 1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올라 동지절제사(同知節制事)를 지냈으며, 1398년에 일어난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을 도와 정사2등공신(定社二等功臣)으로 영가군(永嘉君)에 개봉(改封)되고 태종조(太宗朝)에는 참찬(參贊)을 지낸 뒤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그의 아들 철(哲)은 태종조(太宗朝)에 정사2등공신(定社二等功臣)에 오르고, 화산군(花山君)에 봉(封)해졌으며, 이어 첨절제사(僉節制使)?영흥 부사(永興府使)에 이르렀다.
한편 학자(學者)로 이름난 흥효(興孝)는 일찍이 김성일(金誠一)과 류성룡(柳成龍)에게 글을 배우고, 정 구(鄭
逑)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으로 뒤에 지평(持平)에 추증되었으며, 선우 협(鮮于 浹)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배운 성리학자(性理學者) 세량(世良)은 효종(孝宗) 때 주?군(州郡)의 수령으로 선정(善政)을 배풀었다.
그밖에 영조(英祖) 때 창성 부사(昌城府使) 겸 방어사(防禦使)로 변방 방어에 공을 세우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오른 천용(天用)이 유명했으며, 순조(純祖) 때 홍경래(洪景來)의 난(亂)에 공(功)을 세운 몽설(夢說)?낙현(洛賢) 부자(父子)가 명성을 날림으로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동 장씨(安東張氏)는 남한(南韓)에 총 15,086가구, 64,81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성장씨(安城張氏)
안성장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29가구 1,04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영동장씨(永同張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영동 장씨 (永同張氏)의 시조(始祖)인 장 항 (張 沆)은 고려(高麗) 충숙왕조(忠肅王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을 거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충숙왕(忠肅王)이 원(元)나라에 5년 동안 억류(抑留)당하였을 때 시종하여 귀국 후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
그후 1327년(충숙왕 14) 2등공신(二等功臣)에 책록되고 충혜왕조(忠惠王朝)에 밀직제학(密直提學)?평양윤(平壤尹)을 역임, 영산군 (永山君)에 봉(封)해졌다. 1345년(충목왕 1) 참리(參理)?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1348년(충목왕 4)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제현(李齊賢)과 경사도감(經史都監)의 제조(提調)가 되었고, 공민왕(恭愍王) 때 예학(禮學)에 밝아 종묘(宗廟)의 예복(禮服)과 악기(樂器)를 수리했다. 영동(永同)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청렴결백하고 문명이 높았다.
「 조선씨족통보 (朝鮮氏族統譜)」를 살펴보면 그이 후손(後孫)으로 예빈령(禮賓令)을 지낸 윤신(允愼)과 정랑(正郞)을 지낸 익(翼)이 있으나, 그의 선대(先代)나 후손(後孫)의 소목(昭穆)에 대해서는 상고(詳考)할 수 없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동 장씨(永同張氏)는 남한(南韓)에 총203가구, 1,03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옥구장씨(沃溝張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옥구 장씨 (沃溝張氏)는 도시조(都始祖) 장정필(張貞弼)의 14세손인 장 익(張 木益)을 시조(始祖)로 한다.「장씨상계세보(張氏上系世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高麗)에서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거쳐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옥성(沃城 :옥구의 별호) 부원군 (府院君)에 봉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 되어 정확한 계대(系代)는 상고(詳考)할 수 없고, 그의 후손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한 장 송 (張 ?)을 일세조(一世朝)로 하고 옥구(沃溝)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송(?)의 손자(孫子) 화(華)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고, 화의 아들 대유(大有)가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대유의 아들 한(?)이 판서(判書)를, 윤(倫)이 참의(參議)를 역임하여 아버지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 외 군수(郡守) 승조(承祖)와 현감(縣監) 현손(賢孫)이 유명했고,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낸 희(禧)와 순명(順命)을 비롯하여 효자(孝子)로 이름난 만건(萬健)?만준(萬俊)과 학자(學者) 만웅(萬雄)?현감(縣監) 위한(緯韓)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옥구 장씨(沃溝張氏)는 남한(南韓)에 총1,093가구, 4,92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옥산장씨(沃山張氏)
옥산장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11가구 2,00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옥천장씨(沃川張氏)
옥천장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56가구 1,90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울진장씨(蔚珍張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울진 장씨 (蔚珍張氏)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정종(靖宗) 때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지냈고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상주국(上柱國)으로 울진부원군 (蔚珍府院君)에 봉해진 장말익 (張末翼)이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울진 (蔚珍)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말익(末翼)의 아들 천일(天鎰)이 고려 문종(文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를지냈으며, 손자(孫子) 원흡(元洽)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한편 동정(同正)을 지낸 한련(漢連)의 아들 양수(良守)는 희종조(熙宗朝)에 문과에 급제한 후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이르렀으며,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거쳐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그 밖의 인물로는 군수(郡守)를 역임한 령(翎)?진문(振文)?기문(起文)?응정(應禎)이 이름났고, 학자(學者)로 명성을 날린 만시(萬始)와 한보(漢輔)는 부사(府使)를 지낸 백손(伯孫)?진행(晋行)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울진 장씨(蔚珍張氏)는 남한(南韓)에 총 4,242가구, 17,68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덕장씨(仁德張氏)
인덕장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68가구 1,46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인동장씨(仁同張氏) (直提學系)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우리나라 장씨(張氏)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하는 인동 장씨 (仁同張氏)는 고려 창업(高麗創業)에 훈공을 세웠던 태사공(太師公) 장정필 (張貞弼)을 도시조 (都始祖)로 받들고,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 국자진사 도평의녹사(國子進士都評議錄事)에 등과(登科)하여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내고 옥산군 (玉山君)에 봉해졌던 장 계 (張 桂)를 시조(始祖)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오면서 인동현 발영전(仁同縣拔英田)에 전거(奠居)하였다.
그 후 후손(後孫)들은 7세에 이르기까지 인동현 발영전(拔英田)에 세거(世居)하면서 훌륭한 인재(人材)를 많이 배출시켜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으며, 조선(朝鮮) 성종(成宗)이후로 임지(任地)에 따라 서울 창동(倉洞)을 비롯한 충북(忠北) 제천(堤川) 및 단양(丹陽)과 경북(慶北)의 영주(榮州)?예천(醴泉)?문경(聞慶)?의성(義城)?자인(慈仁) 등 전국 각지(各地)로 산거(散居)하게 되었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6세손 안량(安良 : 일명 重智)이 조선 초에 통덕랑(通德郞)으로 홍산 현감(鴻山縣監)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5형제가 크게 현달하여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助功臣)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 판서(兵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증직(贈職)되고 옥산군(玉山君)에 추봉되었으며, 안식(安式)은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했다.
한편 시조(始祖)의 손자로 광주 부사(光州府使)를 역임했던 용서(龍瑞)의 증손(曾孫) 자원(自遠)은 검교세자시강원 필선(檢校世子侍講院弼善)을 지낸 후 황해도 장연(黃海道長淵)으로 이거(移居)하였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평안도 용천(龍川)과 정주(定州)?중화(中和)?구성(龜城) 등지에 집중세거 하고 있다.
옥산군(玉山君) 안량(安良)의 후손에서는 그의 아들 5형제 중 장남 선손(善孫)이 승훈랑(承訓郞)으로 의정부(議政府) 첨서(簽書)와 녹사(綠事)를, 차남 경손(敬孫)은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를 지냈다.
셋째 아들로 1459년(세조 5)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던 말손(末孫)은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와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을 거쳐 함길도 병마도사(咸吉道兵馬都使)를 지냈고,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강 순(康 純)을 도와 난을 평정(平定)하는데 공(功)을 세워 적개2이등공신(敵愾二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첨정(僉正)과 장악원정을 거쳐 예조 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해주 목사(海州牧使)를 역임한 후 성종 때 연복군(延福君)에 봉해졌다.
성종(成宗) 때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篇修官)으로 「 성종실록 (成宗實錄)」편찬에 참여했던 말손의 아우 순손(順孫)은 1502년(연산군 8)에 연산군(燕山君)의 난정을 직간(直諫)했다가 유배되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 경상도 관찰사에 복직되고 대사헌(大司憲)?좌찬성(左贊成)을 거쳐 1533년(중종 28)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궤장(?杖)을 하사(下賜)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특히 그는 중종(中宗) 때 과거제도를 묵살하고 신진 현량(賢良)들을 천거 임용하는 조광조(趙光祖)의 혁신정치를 반대했고, 좌?우상(左右相)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면서 정계의 핵심인물로 가문을 빛냈다.
그외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의 고제(高弟)로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고 영주(榮州)에 이산서원(伊山書院)을 세워 후진양성에 진력했던 과재(果齋) 수희(壽禧 : 연복군 말손의 증손)와 유생(儒生)으로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수비했던 세희(世禧 : 수희의 4촌),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개령 현감(開寧縣監)을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고 유집(遺集)을 남겼던 직방재(直方齋) 신(?), 숙종(肅宗) 때 양산 군수(梁山郡守)와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영조(英祖) 때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공을 세웠던 후상(后相)과 위규(緯奎) 등이 유명했으며, 현종(顯宗) 때 문과에 급제했던 진(?)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울산 군수(蔚山郡守)를 지내고 강계 도호부사(江界都護府使)를 역임했다.
구한말에 와서는 고종(高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과 괴산 군수(槐山郡守)를 지낸 기연(紀淵)과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봉화(奉化)?영덕(盈德)등지의 현감(縣監)을 역임한 후 한성판윤(漢城判尹)과 육군참장(陸軍參將)을 지냈던 화식(華植), 평리원 검사(平理院檢事) 봉환(鳳煥), 외부참서관(外部參書官) 승환(昇煥)등이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으로 가통(家統)을 지켜온 인동 장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인동 장씨(仁同張氏)는 남한(南韓)에 총 129,731가구, 538,80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동장씨(仁同張氏) (上將軍系)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인동 장씨 (仁同張氏)의 시조(始祖) 장금용 (張金用)은 태사공(太師公) 장정필(張貞弼)의 원손(遠孫)으로 고려(高麗)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라 신호위 상장군 (神虎衛上將軍)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선(善)이 고려 문종조(文宗朝)에서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을 지냈다.
그 후 자손(子孫)들이 본향지(本鄕地)인 인동현(仁同縣)에 세거(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인동 (仁同)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始祖)의 증손 국신(國伸)이 고려 때 봉정대부(奉正大夫)로 내사령(內史令)을 거쳐 직사관(直史?:역사를 편수하는 관청의 벼슬)을 지냈으며, 그의 현손(玄孫) 위(偉)가 통의대부(通議大夫)로 검교군기감사(檢校軍器監事)에 올라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고려 말기에 덕령부윤(德寧府尹)을 역임했던 안세(安世 : 군기 감사 위의 현손)는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고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켜 개성 두문동(開城杜門洞)으로 들어가 은거(隱居)하였으며 그의 아들로 김해 부사(金海府使)를 지냈던 중양(仲陽)은 한성좌윤(漢城左尹)의 벼슬을 내려 회유하던 이성계(李成桂)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은거생활(隱居生活)로 일생을 마침으로써 부자(父子)가 함께 인동 장씨의 절맥(節脈)을 이었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組)의 고제(高弟)로 학행(學行)이 뛰어났던 잠(潛)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스승이 사사(賜死)되자 식음을 전폐하며 스승의 억울함을 상소한 후 향리(鄕里)로 돌아가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세워 후진양성에 진력했다.
인조(仁祖) 때 이 괄(李 适)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일등공신(振武一等功臣)에 책록되었던 만(晩)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문(文)?무(武)를 겸비한 뛰어난 지략으로 북변방어와 신흥(新興)하는 청국세력(淸國勢力)에 대한정치와외교에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한편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증산 현령(甑山縣令)으로 공을 세워 옥산군(玉山君)에 봉해졌던 돈(暾)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개천군수(介川郡守)로서 호병(胡兵)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여 영돈령부사(領敦寧府使)에 추증되었으며, 사진(士珍)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생(儒生)으로 창의(倡義)하여 군위(軍威)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한쪽 팔을 잘렸으나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순절하여 성주(星主) 등지에서 의병(義兵)으로 활약했던 봉한(鳳翰),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전사한홍한(鴻翰) 등과 함께 명망을 떨쳤다.
덕령부윤 안세(安世)의 후손으로서 퇴계학파(退溪學派)의 거두(巨頭)였던 현광(顯光)은 당세에 문명(文名)을 떨쳤던 한강(寒岡) 정 구(鄭 逑)의 문인(門人)이자 조카 사위이다.
1595년(선조 28)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나이 42세에 보은 현감(報恩縣監)이 되었는데 약 21일간 관직에 있다가 사임하고 물러난 후 형조 좌랑(刑曹左郞)?순천 군수(順天郡守)?이조 참판(吏曹參判)?대사헌?공조 판서 등 20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오직 독서와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언제나 포의(布衣)로 조정에 나가 왕에게 정치에 대한 건의를 하였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전국을 돌며 격문(檄文)을 돌려 왕(勤王)의 군사를 일으켰다.
인조(仁祖)가 삼전도(三田渡 : 서울 강동구 송파동에 있던 한강 상류의 나루터)에서 청(淸)나라 태종(太宗)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현광은 세상을 등지고 동해안의 입암산(入?山)에 들어가 정수(靜修)로 만년을 보냈다. 특히 덕(德)은 도(道)의 지선(至善)이라고 논했던 그는 율곡(栗谷)의 이기설(理氣設)을 찬동했으며, 경위설(經緯設 : 이기일본설이라고도 함)을 주장하여 독창적인 학설(學說)을 세웠다.
그밖의 인물로는 숙종(肅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훈공을 세웠던 붕익(鵬翼)과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낸 태소(泰紹), 숙종 때 우승지(右承旨)와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을 지내고 < 청명직절 (淸名直節)>의 명신으로 이름났던 응일(應一), 병자호란 때 인동(仁同)에서 의병장(義兵將)으로 활약했던 경우(慶遇), 현종(顯宗) 때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던 석룡(錫龍) 등이 유명했다.
구한말에 와서는 철종(哲宗) 때 등과(登科)하였던 태수(泰秀)가 한일합방의 울분으로 비분단식(悲憤斷食) 끝에 순국하여 이름을 떨쳤고, 근대에 와서는 대한매일신보주필(大韓每日新報主筆)을 지낸 지연(志淵)과 국문학자(國文學者) 지영(志暎), 민주당을 조직하여 부통령(副統領)에 당선되었던 운석(雲石) 면(勉)이 대표적이고, 조국광복운동을 주도했고 국무총리(國務總理)를 지냈던 창랑(滄浪) 택상(澤相)과 한국일보(韓國日報)와 서울경제신문을 창간하고 국제올림픽조직위원과 남북조절위원회부위원장을 역임했던 백상(百想) 기영(基榮) 등이 인동 장씨(仁同張氏)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인동 장씨는 남한(南韓)에 총 129,731가구, 538,80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장수장씨(長水張氏)
장수장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24가구 1,12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절강장씨(浙江張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절강 (浙江)은 중국(中國) 동남부(東南部) 동해(東海) 연안에 위치하여 양자강(楊子江) 하류의 남부를 점하고 있으며, 전당강(錢塘江)에 의하여 동서(東西)로 나누어져 항주(杭州)를 성도(省都)로 하고 있다.
절강 장씨 (浙江張氏)의 시조(始祖) 장해빈 (張海濱)은 본래 중국 항주(杭州)의 속현(屬縣)인 오강현(烏江縣) 사람이다. 그는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유격장군(遊擊將軍) 오유충(吳惟忠)의 휘하(麾下) 장수 (將帥)로 우리나라에 와서 울산(蔚山)의 증성(甑城) 전투에서 유탄(流彈)을 맞아 본국(本國)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군위(軍威)에 정착세거(定着世居) 하였다. 그리하여 후손(後孫)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본향(本鄕)인 절강(浙江)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절강 장씨(浙江張氏)는 남한(南韓)에 총 778가구, 3,12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주장씨(晉州張氏)
진주장씨 시조는 인진부사(引進副使) 장방언(張邦彦)이다. 이 성본의 연원 등은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21가구 1,37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진천장씨(鎭川張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진천 장씨 (鎭川張氏)는 장씨(張氏) 도시조(都始祖) 정필(貞弼)의 후손(後孫) 장 유(張 裕)를 시조(始祖)로 한다.
유(裕)는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좌우위중추원사(左右衛中樞院事)?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을 지냈고, 예산군(禮山君)에 봉해졌다가 다시 진천군 (鎭川君)에 개봉(改封)되었다고 「진천장씨세보(鎭川張氏世譜)」 에 기록하고 있다.
그 후 후손들은 진천(鎭川)에서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며 진천 (鎭川)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유(裕)의 손자(孫子) 빈(贇)이 1164년(고려 의종 18)에 출생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판도판서(版圖判書)를 거쳐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으며, 증손(曾孫) 진영(鎭永)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라 이름을 날렸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른 송(松)과 광정대부(匡靖大夫)?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낸 하일(河馹)이 뛰어났고, 부사(府使)를 역임한 기손(起孫), 참판(參判)을 지낸 희안(希顔)은 훌륭한 가문을 유명하게 하였으며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한 관일(貫一)도 유명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천 장씨(鎭川張氏)는 남한(南韓)에 총 227가구, 98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창녕장씨(昌寧張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창녕 장씨 (昌寧張氏)의 시조(始祖) 장천일 (張千鎰)은 태사공(太師公) 정필(貞弼)의 6세손이며,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고 옥산군(玉山君)에 봉(封)해진 효익(孝翼)의 아들이다.
천일은 고려조(高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228년(고종 15)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어 사신(使臣)으로 몽고(蒙古)에 다녀와 국자감 좨주(國子監祭酒)가 되었으며, 그후 2차례나 몽고(蒙古)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왔다.
1270년(원종 11) 삼별초(三別抄)가 난을 일으키자 대장군(大將軍)으로 경상도 수로방호사(慶尙道水路防護使)가 되어 난을 평정하였고, 이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지냈으며, 충렬왕조(忠烈王朝)에는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보문각 대학사(寶文閣大學士)에 오르고 하산 (下山 : 창녕의 별호) 군 (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後孫)들이 천일(千鎰)을 시조로 삼고 본관(本貫)을 창녕(昌寧)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창녕 장씨의 가문(家門)에서는 고려(高麗) 때 누대(累代)에 결쳐 평장사(平章事)가 많이 배출되었고,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한 계회(季會)와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을 재낸 계지(繼池), 부사(府使)를 지낸 응성(應星) 등이 가문을 더욱 빛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창녕 장씨(昌寧張氏)는 남한(南韓)에 총 1,151가구, 4,75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흥덕/흥성장씨(興德/興城張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흥덕?흥성 장씨 (興德?興城張氏)의 시조(始祖) 장 유 (張 儒)는 상질현(尙質縣) 사람으로 도시조 장정필(張貞弼 : 문헌공)의 9세손이다. 신라 말에 난(亂)을 피하여 오월국(吳越國:중국 춘추 전국 시대의 오나라와 월나라)에 들어가 중국어(中國語)를 배우고 돌아와, 고려(高麗) 광종(光宗)이 여러번 객성(客省)의 관원에 임명하여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접대하게 하였다.
그 후 벼슬이 광평 시랑 (廣評侍郞)에 이르렀고, 그의 6세기손 기(機)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후 흥산 (興山 : 흥성의 별호) 군 (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흥성(興城)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유(儒)의 아들 연우(延祐)가 고려 현종(顯宗) 때 거란의 침입으로 남쪽에 피난한 왕을 호종(扈從) 하여 중추원사(中樞院事)가 되고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지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후손 인신(隣臣)이 세조(世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홍문관 전적(弘文館典籍)에 올랐으며, 응량(應梁)의 아들 우(佑)가 진도 군수(珍島郡守)를 역임했고, 후손 현휘(賢輝)는 부호군(副護軍)에 올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왕(旺)과 무관으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오른 석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흥덕?흥성 장씨(興德?興城 張氏)는 남한(南韓)에 총 8,837가구, 37,6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산장씨(牙山蔣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장씨(蔣氏)의 득성(得姓) 근원은 중국(中國)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나라 이름으로 주(周)나라 주공(周公)의 셋째 아들 백령(伯齡)이 하남성(河南省) 기사현(期思縣)을 장국(蔣國)으로 하사(下賜)받아 국명(國名)을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장씨(蔣氏)의 본관(本貫)은 문헌(文獻)에 아산(牙山)?청송(靑松)?김포(金浦) 등 여러 본(本)이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현존(現存)하는 장씨(蔣氏)는 아산 장씨(牙山蔣氏)로 단일화(單一化) 하고 있다.
아산 장씨의 시조(始祖)인 장 서 (蔣 壻)는 중국(中國) 송조(宋朝)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신경위 대장군(神慶衛大將軍)을 지냈으며 고려(高麗) 예종(睿宗) 때 금(金)나라가 송(宋)을 침입하자 상서(尙書) 이 강(李 綱)과 함께 항전(抗戰), 적에게 한치라도 빼앗겨서는 안되며 끝까지 사수(死守)할 것을 조정(朝廷)에 건의하였다. 그러나 조의(朝儀)가 불합(不合), 자기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배를 타고 동(東)으로 망명, 우리나라의 충남 아산군 인주면 문방리에 표착(漂着) 하였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예종(睿宗)이 중국에 탐문(探問)한 바 후히 대접하라는 전달을 받았다. 예종은 서(壻)에게 식읍(食邑)을 하사(下賜)하고 아산군 (牙山君)에 봉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서(壻)를 시조로 하고 아산 (牙山)을 관적(貫籍)으로 하여 누대(累代)에 걸쳐 세거(世居)하면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인물을 살펴보면 서(壻)의 증손(曾孫) 숭(崇)이 고려조(高麗朝)에 정록대부(正祿大夫)로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겸 도총사(都摠事)를 역임하였고, 숭의 아들 득분(得芬)은 정순대부(正順大夫)로 서운관사(書雲觀事) 겸도총사(都摠事)를 거쳐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에 이르렀다.
그리고 서의 6세손 균(均)이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올랐으며 균의 아들 자방(自芳)이 봉상대부(奉常大夫)로 삼사 부사(三司副使) 겸 검교 예빈경(檢校禮賓卿)을 역임하였다.
자방(自芳)은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성길(成吉)이 판도판서(版圖判書)?평장사(平章事)를, 둘째 아들 성발(成發)은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전공전서(典工典書)를 역임하였으며, 셋째 아들 성휘(成暉)가 전서(典書)를, 넷째 아들 성호(成昊)는 전법 전서(典法典書)를, 다섯째 아들 성미(成美)는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는 등 모두 전서를 역임하였으므로 그들의 출생지(出生地)인 경북 의성군 점곡면 교동은 5전서(五典書)로 전(傳)해지고 있다.
그외 인물로는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를 지낸 극맹(劇孟)과 장사랑(將仕郞)으로 동정(同正)을 지낸 모(?)가 유명(有名)하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서(壻)의 9세손(九世孫)이며 전서(典書)를 지낸 성휘(成暉)의 아들인 영실(英實)이 있다. 그는 1423년(세종 5) 상의원 별좌(尙衣院別坐)?사직(司直)을 지내고 1432년(세종 14) 천문기상기기(天文氣象機器)를 발명, 1438년부터 몇 년 동안 대소간의 천구의(大小簡儀天球儀), 혼천의(渾天儀), 일귀(日晷), 자격루(自擊漏)를 완성(完成)하였다. 그외 동활자주조(銅活字鑄造), 채광제련(採鑛製練)을 감독하였고 1442년 세계 최초로 천문측우기(天文測雨器)를 발명하였다.
그후 관직은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으나 선생(先生)의 업적(業績)이 세월이 흐를수록 높이 평가되어 1983년 전국의 후손과 각계각층(各界各層)의 인사(人事)들이 모여 과학선현(科學先賢)의 기념사업회(記念事業會)를 결성(結成)하고, 이듬해 선생의 뜻을 담아 충남 아산군 인주면 문방리에 있는 동래시조(東來始祖) 서(壻)의 표착지(漂着地)에 추모기념비(追慕紀念碑)를 세워 유지(遺志)를 기리고 있다.
이밖에도 조선 성종조(成宗朝)에 경기 병사(京畿兵使)를 지낸 처용(處勇)과 선조조(宣祖朝)에 옥포 만호(玉浦萬戶)를 거쳐 부사(府使)에 이르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울산 소모대장(蔚山召募大將)으로 전공(戰功)을 세워 칠공신(七功臣)의 한 사람이 된 후완(後琬)이 유명했으며, 희양(希陽)은 원종3등공신(原從三等功臣)에, 언기(彦起)는 호종3등공신(扈從三等功臣)에 올랐고, 희춘(希春)의 재종형(再從兄) 계현(啓賢)은 의병장(義兵將)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화왕산(火旺山) 토벌(討伐)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아산 장씨의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아산 장씨(牙山蔣氏)는 남한(南韓)에 총 3,937가구, 16,10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거창장씨(居昌章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장씨(章氏)는 중국(中國) 하간(何間 : 지금의 직예성 진해도)에서 계출(屆出)된 성씨(姓氏)로 문헌(文獻)에 전(傳)해지는 본관(本貫)은 거창(居昌)과 복성(福城:보성 지방)이었으나, 오늘날에는 거창(居昌) 단본(單本)으로 알려져 있다.
거창 장씨 (居昌章氏)의 시조 장종행 (章宗行)의 선대(先代)는 실전(失傳)되어 알 수 없으므로 고려 충렬왕 때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겸 춘추관사(春秋館事)를 지낸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그의 아들 두민(斗民)이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치는데 공(功)을 세워 아림 (娥林 : 거창의 별호) 군 (君)에 봉해졌으므로, 본관(本貫)을 거창 (居昌)으로 하게 되었다.
그후 두민(斗民)의 아들 영순(永巡)이 고려(高麗)의 절신(節臣) 이양중(李養中)의 사위로 공민왕(恭愍王)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 등을 지냈으며, 후손 참장(參將)은 공양왕(恭讓王) 때 돈령부 부정(敦寧府副正)을 지내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벼슬을 버리고 거창군(居昌郡) 웅양면(熊陽面) 한현촌(汗峴村)으로 퇴거(退居)하여 그 곳에 정착(定着)하게되었다.
그외 선조(宣祖) 때 훈련원정(訓鍊院正)으로 임진왜란 때 장렬하게 순절(殉節)한 헌휘(獻輝)와 판관(判官)을 지낸 헌서(獻瑞)가 유명했으며, 석규(錫奎)는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거창 장씨(居昌章氏)는 남한(南韓)에 총 1,039가구 4,22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