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인어공주]속 왜곡된 여성성
안나 이즈미의 [안데르센의 절규]를 읽고
성배순(1999.9.9)
아름답고 슬프고 잔인한 [인어공주]를 읽으면 남성으로 대표되는 이성세계에 억압받아 온 여성사를 보는 것 같아, 우리들의 어머니가 떠올라 가슴이 아프다
[인어공주]가 수면 위의 세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왜 목소리를 잃어야 하고 걸을 때마다 칼날 위를 걷는 듯한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지, 모든 것을 바쳐서 사랑하는 사람 곁에 다가가는데 성공하지만 왜 결혼할 수 없는지, 어릴 적 이 동화를 읽은 이후 줄곧 의문이었다. 안데르센이 동화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감히 쓸 수 없었던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안데르센의 절규]는 이런 의문에 몇 가지 답을 제시 해 준다.
안데르센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정신병으로 죽거나 정신병원에 입원했었다는 사실과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열 다섯 살이나 많은 천박하기 그지없는 여자이고 그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은 이년 뒤 재혼한다는 내용, 그리고 열네살 때 코펜하겐에 가서 차라리 죽음이 구원으로 여겨질 만큼 극심한 가난 속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해 나갔다는, 그래서 안데르센은 이러한 자신의 과거를 절대로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식직이든 무의식적이든 안데르센의 작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한 왜곡을 다른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완벽하게 이야기를 꾸며 나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래서인지 안데르센의 동화는 무겁다.
바닷속 세계의 공주를 영혼이 없는 존재로 폄하해 태양이 비치는 밝은 세계인 왕자의 세계로 오기 위해 왕자의 사랑을 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야 한다는, 여성을 수동적일 수밖에 없게 만든 이 대목에서는 우리의 어머니들이 시집와서 벙어리 삼년 장님 삼년 귀머거리 삼년의 세월을 사는 것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목소리를 잃어 말을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왕자의 사랑을 얻을 수 있냐는 질문에 마녀는 ‘너의 아름다운 몸매, 너의 우아한 동작, 그리고 반짝이는 너의 눈, 그것으로 너는 쉽게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얼마나 가슴 뜨끔한 이야기인가? 우리들의 남자들은 여성의 미를 이야기할 때 ‘백치미’를 우선으로 꼽는다. 부끄럽게도 이 말의 저의에는 몸매만 아름다우면 머리는 텅 비어도 좋다는 뜻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보며 스스로 점수를 메기고 했던 내 자신이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그리고 수면 위의 세계로 나간 인어공주가 겪는 고통에 대한 묘사는 정말로 처절하다. ‘너는 아름다운 다리를 갖게 되지만 대신 그 다리로 걸을 때마다 칼이 너의 몸속을 뚫고 지나는 것과 같을 것이다’라고.
안데르센의 주인공들은 인어공주와 같이 엄청난 육체적 고통과 희생을 겪는 가련한 여성들이다 그들은 끝내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인어공주]의 원작에서 인어공주는 왕자와 새로 맞이한 신부의 행복을 빌며 칼을 바닷속으로 던지고 스스로 바다로 뛰어든다는 아름다운(?)이야기로 끝이 나지만 [안데르센의 절규]속 [인어공주]는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왕자와 그 신부를 인어 공주가 살해하는 것으로 바꾸어 안데르센의 속마음을 노출시킨다. 난 안데르센의 [인어공주]의 희생보다 안나 이즈미의 [인어공주]의 선택이 오히려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남편만을 위해 자식만을 위해 평생을 사신 우리 어머니들이, 아내들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이여! 아름다운 다리로 고통스럽게 사느니 차라리 자기의 언어로 꼬리를 달고 노래하라고 외친다면 돌을 맞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