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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3년만의 외출,
혜초(慧超)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끝나기 전에 반드시 한 번은 관람을 해야지. 2011년 4월 3일에 끝나는데, 그리고 전시회의 가장 핵심 알맹이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선약(先約) 때문에 3월 17일이면 프랑스로 되돌아 간다고 하든데, 그런 조바심을
하던차 우연히 기회가 다가와 용산 국립박물관을 찾았다.
일행은 7명이었다. 삼우회원(三愚會員) 5명, 삼척출신 재경인 2명이었다. 비록 황사가 끼였으나, 윗도리를 벗어 들 만큼
쌀쌀하지 않은 날씨였다. 바로 가볍게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매우 상쾌해지는, 바로 그런 날이다.
그렇게 관람을 끝내고 이 일 저 일 바쁜 일에 휘말려 한참이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다른 일로 메모수첩에서 그것을 옮겨
적다가, 왕오천축국전을 관람하면서 자료와 느낀 바를 열심히 적어놓은 메모가 눈에 띄어, 그것이 기억에서 더 흐려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놓으려고 자료를 다시 찾아 기억을 되살리다보니, 전시장에 내놓은 자료에서 많은 것을 취할 수밖에
도리 없었다. 이것 또한 문학을 위한 내 생애에서 거둬들인 기록이기에 정리를 해놓고 싶었다.
전시장 입구 안내 간판
* 혜초(慧超)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우리 시대의 학문의 깊이에선 그랬다. 다시 말해 우리 시대의 역사에 관한 공부를 한 사람은 혜초에 대한 역사인식은
지극히 단편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혜초라면 실존적인 평범한 인물이라기보다 너무나 큰 그의 업적 때문에 오히려
신화적(神話的)인 인물로 여겨지기까지 했던 탓이다.
8세기경에 신라 수도 경주에서 태어난 혜초(慧超)는 불법(佛法)을 공부하러 중국을 거쳐 천축오국(天竺五國)으로 여행
했다. 그때 남긴 기록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다. 중국 둔황의 동굴에 묻혀있던 그 필사본이 발굴되어 지금
까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그것이 동· 서양간 문화교류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가치가 높다. 그리고
중국의 나옥진(羅玉振)이라는 사람에 의해 출판되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게 우리 세대가 열심히 공부한
만큼 알고 있는 혜초에 대한 지식의 한계다.
혜초가 여행한 길
동· 서 문화의 교류 합치점은 둔황(敦燉 : Tunhunang)이다. 즉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있는 실크로드(Silk Road)의 요충지 이기 때문이다.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 는 죽음의 사막인 타클라마칸 사막(Taklamakan 沙漠)과 누란(樓蘭)으로
가는 입구에 있는 도시로 서역문화와 중국문화가 만나는 곳, 학자들은 육신으로 비교하면서 '관절(關節)' 같은 곳이라
표현하기도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길을 실크로드라고 처음으로 명명한 사람은 독일인 지리학자인 프레디난드
리히트로펜(Ferdinand Richthofen 1833-1905) 으로 알려져 있다.
실크로드를 따라 왕래하는 대상무역이 이곳에서 크게 번성하였고, 중국인들은 비단무역으로 축적한 부(富)로 이곳 닝샤
(寧夏) 산의 사구(沙邱) 단애(斷崖)에다 인도식 석굴사원을 짖기 시작했다. 그 심리 밑바닥에는 무역 길의 안위와 장사의
발복을 염원하는 뜻이 다분히 담겨 있었다.
이렇게 형성된 것이 막고굴(莫高窟)이다. 막고굴은 일명 '둔황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불린다. 막고굴이라는 명칭은
수(隋)나라 때 개착(開着)된 423호굴에 전하는 묵서로된 '막고굴기(莫高窟記)'를 통해 확인되었다. 즉 막고굴은 사막 높은 곳에 있는 석굴이란 뜻인데, 당시 '막(莫)'이라는 한자는 사막의 '막(漠)'자로 통용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는 곧 위대하고 성스러운 석굴이라는 의미도 함께 담겨있었던 것이다.
돈황 막고굴 275호굴 모형도
사실 막고굴 내부는 한마디로 극채색화(極彩色化)된 벽화와 무수한 소상(塑像)으로 채워진 정토(淨土)의 세계라고 달리
말 할 수 있다. 사막(沙漠)의 대화랑(大畵廊)인 막고굴은 북량(北凉 420-439년) 무렵부터 조영(造營)되기 시작하여 원대
(元代)까지, 무려 1,000년 동안 끊임없이 굴착(掘鑿)과 개축(改築)을 반복하였던 것이다. 현재 700여 개의 석굴이 남아
있으며, 벽화(壁畵)와 소상이 잔존하는 492개에 막고굴이 고유번호를 붙여 관리되고 있다.
돈황 막고굴 17호굴 모형도
이들 막고굴 가운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발굴된 곳은 17호굴로 알려져 있다. 본디 불경, 불화, 종교문서,
사회문서 등 고문서로 3미터 높이 쌓아올린 뒤 벽돌로 출입구를 막은 뒤, 그 앞에다 사람 키 실제 높이의 승려상으로
가려 위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900년경 둔황 막고굴로 흘러들어와 도사 노릇을 하는 왕원록(王圓록)이란 자가 있었다. 그 자가 어느날 막고굴
16호굴을 청소하던 중 우연히 17호굴의 석실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 안에는 3미터 높이의 희귀한 고문서가 가득 쌓여
있었다. 해서 각종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다고 해서 '장경동(藏經洞)' 이라고 달리 부르기도 하는 굴이다.
강대국의 패권주의(覇權主義)가 기승을 부리던 1905년, 프랑스는 중앙아시아 탐험대를 파견키로 결정하고, A급 문화
착취자인 폴 펠리오(Paul Peilot 1878-1945)를 단장으로 임명했다. 파리 정치학교와 베트남 하노이 극동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찍 중국과 인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불교를 공부하고, 구법승(求法僧)과 실크로드에 특별난 관심을 보였다.
1908년 2월 25일 그는 실크로드의 중요 요충지인 둔황의 막고굴에 도착했다. 이미 막고굴에서 귀중한 문서가 발견되었다는 사전 정보를 파악한 펠리오인지라 한시가 급하여 성급하게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현장조사를 하기도 전 왕 도사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왕 도사는 일종의 관리역활을 하면서 이미 한차례 다녀간 다른 나라 탐험대에게 석굴 접근을 완강히 막았을 뿐만 아니라 어떤 굴은 존재자체를 그의 면전에서 아예 부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펠리오는 낙담하지 않고 왕 도사를 설득했다. 그의 유창한 중국어 구사능력 앞에 왕 도사는 끝내 무릎을 꿇고 말았다.
1908년 3월 3일 드디어 고문서에 대한 조사가 허락되었다. 대부분 6세기에서 10세기의 귀중한 문서들이었다. 펠리오는 귀신에 씌인 듯 쉬지 않고 꼬박 3일간 걸쳐 계속 문서를 뒤져내기에 정신을 잃다시피 했다.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그러던 어느 날,드디어 펠리오는 앞뒤 일부가 떨어져나간 필사본 두루마리 하나를 발견했다. 이미 저자명은 떨어져 나간
뒤지만, 그의 식견에서는 그건 틀림없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었던 것이다. 그는 중앙아시아 탐험에 앞서 혜초의 후배인 혜림이 8세기말에 편찬한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를 읽었던 것이다. 일체경음의란 불교관련 전적(典籍)에 나오는 어려운 어휘들만 골라 주석(註釋)을 붙인 책이다. 그 책에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어휘 85개도 들어있었던 것이다.
펠리오는 17호 석실 안의 모든 문서를 사겠다고 왕 도사에게 제안했다. 처음 냉정히 거절하던 왕 도사는 끊임없는 펠리오의 설득에 고문서를 팔고야 말았다. 중요문서 6,000여점을 손아귀에 넣고 건네준 돈이 고작 500백냥이라는 헐값. 그 문서를 수습하여 펠리오가 둔황을 지체없이 떠나기는 5월 30일. 10월 5일에 베이징에 도착한 그는 그것을 포장해 프랑스로 서둘러 부쳤다. 그 고문서들은 말할 것도 없이 곧장 프랑스국립박물관으로 들어간 뒤 다시는 세상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왕오천축국전 필사본
그리고 이듬해인 1909년 5월 펠리오는 비로소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획득을 학계에 보고하여 세계에 알린다. 그러자
1915년 일본인 불교학자 다카구스 준지로(高楠順次郞)가 밀교승 불공의 유서 내용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혜초가 신라인
임을 세상에 밝힌다.
펠리오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발견 당시 기록을 이렇게 남겼다. 자신에 찬 서술이다.
"저는 혜초 책의 주석 어휘를 중에서 두세 개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크메르에 관한 것과 또 하나는 말레이
제국을 지칭하는 곤륜이라는 어휘였으며, 세 번째의 것은 틀림없이 사율, 즉 자블리스탄에 관한 것이 었습니다. 이러한
어휘의 순서를 보아 혜초는 중국을 떠나서 남해를 거쳐 서북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갔다가 돌아왔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중략) 이리하여 제가 결국 발견한 이 무명의 여행기는 그 주요 부분이 '혜초왕오천축국전'이라고 생각됩니다."
-간쑤 성에서 발견된 중세의 한 장서(藏書)에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임대조건에 따라 60cm만 펼쳐 전시되었다.
나는 위의 펠리오의 그 기록을 읽으면서 세상에 남겨지는 글의 생명의 장구(長久)함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문자로 남겨지는 기록은 대단히 무섭구나,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분명 우리의 조상인 신라인의
저술이지만, 우리의 것은 분명 아니다. 다시 말해 소유권이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중국 땅 장안에서 저술되었고, 필사본이 돈황 막고굴로 들어갔다가 프랑스로 팔려갔기에 중국도 역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처지다.
해서 1283년만에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처음 나온 이 두루마리에 대하여 프랑스는 한국의 전시요청에 따라 대여하면서도 훼손을 이유로 내세워 총 227행 5893자, 폭 42cm, 총길이 358cm 가운데, 단 60cm만 펴야 한다는 조건이어서 용산에서는 저자 후손들에게 몸의 일부분만 수줍게 속살을 드러내보였던 것이다.
혜초는 704년경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태어났다. 기록에 의하면 719년 열다섯에 밀교를 공부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다. 4년 뒤인 723년 열아홉 살 때, 그는 인도로 구법(求法) 기행을 떠난다. 중국 광저우를 출발하여 뱃길로 인도에 도착한 혜초는 불교 8대 성지를 순례하기 위해 동천축국으로 시작점을 잡아 중천축국, 남천축국, 서천축국, 북천축국으로 여행했다. 이게 다섯 천축국이다.
천축오국의 순례를 마친 그는, 간다라를 거쳐 페르시아와 아랍을 지나, 다시 중앙아시아를 거쳐 파르미 고원을 넘는다. 이어 쿠차와 둔황을 지나 727년 11월 당나라 수도인 장안(지금의 시안)으로 돌아왔다. 장장 4년에 걸친 약 2만km의 대장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국 신라로 돌아오지 않고 당나라 땅 장안에서 밀교를 연구하다가 780년경 76세의 나이로 삶을 마쳤다. '서유기' 모태가 된 7세기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 13세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14세기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와 함께 4대 여행기인 8세기 '왕오천축국전'을 써낸 혜초의 밀교내의 위치는 어디쯤이었을까.
1915년 일본의 불교학자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는 밀교의 문헌집 '대종조증사공대판정광지삼장화상표제집(大宗朝贈 司空大辦正廣智三藏和尙表制集)'에서 밀교승 불공의 유서내용으로 그것을 명확히 증명해내고 있다.
"내가 지금껏 30여 년 동안 밀교의 비법을 전하고자 여러 명의 제자를 두었다. 그들 가운데 일가를 이룬 제자가 여덟이다.
그들 가운데 두 명은 이미 입적하였고, 여섯이 남아있는데, 금각사의 함광, 신라의 혜초, 청룡사의 혜과, 승복사의 혜랑,
보수사의 원교와 각초다."
혜초는 불공의 제자 가운데 두 번째 서열인 셈이다. 불공은 누구인가. 혜초는 50여 년간 인도 밀교승 금강지를 사사하다가 그가 입적하자,그 뒤에 스승으로 모신 사람이다. 혜초는 불공 밑에서 밀교 교리를 한역(漢譯)하는데 힘써 중국 밀교를 정리하고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혜초는 774년 오랜 가뭄으로 민심이 흉흉해졌을 때, 황제의 명에 따라 흑하(黑河)의 옥녀담에서 기우제를 주관하기도 했다. 그리고 스승 불공이 입적했을 때, 황제의 지원으로 장례를 마친 뒤, 여섯 제자를 대표해 왕이 베풀어준 하사와 부조에 감사하는 표문을 올린 사람으로 전해지고 있다.
* 혜초의 또 다른 시
得達摩揭陁國 摩訝菩提寺 稱其本領 非常歡喜 略題 述其愚志
(달마게타국 마아보리사에서 기분이 무척 좋아 본바탕 그대로의 내 마음을 그려본다)
不慮菩提遠 보리수 멀다고 걱정하지 않았는데
焉將鹿苑遼 어찌 녹야원을 멀다 하리
只愁懸路險 그저 근심거리는 험한 벼랑길뿐
非意業風飄 업풍 몰아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八塔誠難見 여덟 탑을 보기란 참으로 어려워라
參差輕劫燒 어지러이 긴 세월 지나며 불타버렸다
何其人願滿 어찌 한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질까만
目睹在今朝 오늘 아침 내 눈으로 보고 있노라.
那揭羅馱娜寺 悼一漢僧
(나게라타나 절에서 타계한 중국 스님을 애도하며)
故里燈無主 고향 등불은 주인을 잃고
他方寶樹摧 타향의 보배로운 나무는 꺾였구나
神靈去何處 신성한 혼령은 어디로 갔는가
玉貌已成灰 옥 같은 모습은 이미 재가 되고 말았네
憶想哀情切 생각하니 가엾고 절통해라
悲君願不隨 그대 소원 이루지 못했음을 슬퍼하노라
孰知鄕國路 누가 고향 가는 길을 알까
空見白雲歸 덧없이 바라보느니, 흰구름 지나는구나
吐火羅國 逢漢使入蕃 略題四韻 取辭
(토화라국에서 토번으로 가는 한나라 사신을 만나 그의 말을 취해 시를 짓는다)
君恨西蕃遠 그대는 서쪽 변방이 멀다고 한탄하고
余嗟東路長 나는 동쪽 길이 멀다고 탄식하노라
道荒宏雪嶺 길은 험하고 산마루는 어마어마한 눈을 이고 있는데
險澗賊途倡 험한 골짜기로는 도적떼가 길을 트는구나
鳥飛驚峭嶷 날던 새는 가파른 산에 놀라고
人去偏樑難 사람은 기우뚱한 다리 건너기가 어려워라
平生不捫淚 평생 눈물 훔친 적 없었다만
今日灑千行 오늘만큼은 천 줄기 눈물을 뿌리노라
冬日 在吐火羅 逢雪述懷
(겨울날 토화라국에서 눈을 만나 그 회포를 읊는다)
冷雪牽氷合 찬 눈은 얼음과 뭉쳐 뒹굴고
寒風擘地裂 찬바람 땅 흔들며 휘몰아친다
巨海凍墁壇 큰 바다는 얼어서 단이 되었고
江河浚崖囓 강물은 낭떠러지 깨물고 있다
龍門絶瀑布 용문에는 폭포조차 끊어졌고
井口盤蛇結 정구에는 뱀처럼 선회하는 결빙들
伴火上胲歌 횃불 들고 올라가 부르는 노래
焉能度播密 어떻게 파미르고원을 넘어갈 것이냐
* 아스타나 고분(古墳) -현세의 삶으로 이어가기
현재 투르판(吐魯蕃 : Turfan)에서 동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있는 아스타나(Astana) 고분(古墳)에서는 지하에 조성된 수백 개의 무덤이 3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발견되었다. 위구르어로 '휴식(休息)' 이라는 뜻을 가진 이 아스타나 고분 벽면은 죽어서도 현세(現世)의 삶이 이어지기를 염원이나 하듯 자신들이 생전에 누리고자 했던 삶을 벽에다 그려놓았다. 특히 그 중에는 중국의 중원의 삶을 동경하였던 그림이 많았고, 그와 관련된 그림과 물건들이 다량으로 출토되는 무덤이 많았다.
또한 다양한 크기의 각 인종의 인형이 출토되어 많은 인형을 부장(副葬)했던 중국의 장례문화(葬禮文化)의 영향을 받았던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복희씨와 여와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복희씨와 여와. 상부 확대 사진.
7세기경 것으로 추정. 중국 고대신화에 나오는 남성신(男性神)인 복희씨(伏羲氏)와 여성신(女性神)인 여와(女蝸)를 그린
것. 오른쪽의 복희씨는 왼손에 구(矩 : 곱자. 사각형을 그리는 도구)를, 왼쪽의 여와은 오른손에 규(規 : 콤파스. 원을
그리는 도구) 가지고 있다. 구와 규의 의미는 규구주승(規矩準繩)으로서 사물의 규칙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것이다. 또한
이것은 중국 신화에서는 모두 천지창조를 위한 도구로 상징되기도 했다.
두 신의 머리 중앙에는 빨간 핵이 있는 둥근 태양을 배치하고, 아래쪽에는 두꺼비 머리가 있는 둥근 달을 그리고, 주위에는 각종의 별들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시체나 관을 덮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용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투르판 아스타나
고분에서 출토. 신장위구르자치구박물관 소장.
나무 아래 미인도
8세기 것으로 추정. 한마디로 그 시대의 미인상(美人像)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다. 당대의 귀족여성의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는 이 그림은 병풍에 들어있는 그림 가운데 하나다. 머리를 높이 틀어 올려 꽃장식 비녀를 꽂고, 눈썹을 짙게 그렸으며, 양 뺨은 붉게 화장을 했다. 특이한 것은 풍만한 체구에 화려한 복식을 갖췄는데, 당나라 시대의 풍만한 여성이 미인으로 대접 받았다는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투르판 아스타나 출토. 신장위구르자치구박물관 소장.
격구(擊毬)하는 흙인형
7세기에서 10세기의 것으로 추정. 말을 타고 격구(擊毬)를 하는 사람의 채색인형(彩色人形)이다. 남자는 오른 팔로 막대를 쥐고 힘차게 공을 치려 하고 있으며, 그가 타고 있는 말, 역시 공중으로 높이 뛰어오르려는 듯 약진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페르시아에서 기원한 '격구'는 사람이 말을 타고 공을 치는 운동으로 '폴로(polo)' 라고도 불린다.
아래사진이 8세기에서 9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 구정동 방형고분(九政洞 方形古墳)[국립경주박물관 소장분]의
네모난 돌방무덤(石室墳)의 둘레돌에 새겨진 조각인데, 격구하는 서역무사(西域武士)의 얼굴이다. 이를 보아 페르시아에서 기원한 격구가 당나라로 통하여 신라 경주까지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고, 또 당시 신라에서는 그 놀이를 즐겼던 것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격구(擊毬)하는 서역무사
격언과 문자의 조형미가 돋보였던 게시물이다.
전시장에서 관람하다가 선뜻 시선을 잡았던 격언 판이다. 내용이야 격언(格言)이라면 으례 그만한 격을 갖춘 것이겠으나, 이
전시물이 유독 시선을 끄는 이유는 뛰어난 문자 조형미다. 그리고 뒤로부터 배어나오는 조명으로 신비감이 더했던 전시물이었기
때문이다. 지혜의 미식(美飾)은 혀이고, 혀의 미식(美飾)은 언어이며, 사람의 미식(美飾)은 얼굴이고, 눈은 얼굴의 미식(美飾)
이다. 언어(言語)와 언사(言事)의 중요성을 강조한 격언인 듯 싶어 나뿐만 아니라 다른 관람객들의 발걸음까지 한참 머물게 하며,
감상의 즐거움을 안겨주었던 전시물이었다.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鎭墓獸). 흙인형
사람들은 조상을 땅에 묻고도 그것이 악령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거라고 내세를 걱정했다. 그것에 대한 대비책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악령으로부터 무덤을 지키기 위하여 세웠던 짐승 모양의 신상(神像)이다. 이것을 진묘수(鎭墓獸)라 했다.
이 진묘수는 우리나라 공주에 있는 백제 무령왕릉에서도 발굴되었다. 무령왕릉의 것은 돼지형상인, 어찌보면 깜찍한
진묘수다.
채색문형의 토기들
무덤의 부장품 가운데 토기들은 귀중한 역사자료이다. 곧 그 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닥이 평평하고
배가 불룩한 토기들이다. 그릇 아랫부분으로부터 연꽃이 위로 향하기도 하고, 위에서부터 아래로 엎어져 있기도 하다.
뚜껑은 진흙으로 만들어 구멍을 막았고, 꽃무늬를 찍어 장식하였다. 아름다운 채색토기들이다.
*불교가 동쪽으로 가면서
인도의 불교는 간다라 지역을 거쳐 동쪽으로 타클라마칸 사막의 오아시스로 전파되었다. 서역 지방에 전파된 불교문화는 우선 서역남도 지역에서 불탑을 중심으로 하는 사원건축의 형태로 발달하기 시작하여 불교문화의 중심이 점차 서역북도로 옮겨가며 평지 사원건축과 더불어 석굴사원이 조영(造營)되기에 이른다. 4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 중앙아시아에서는
실크로드의 각지에서 석굴사원으로 대표되는 대규모의 불교미술이 조영되기 시작하여 6~7세기경에는 그 전성기를 맞게
된다.
쿠차의 키질 석굴
쿠차의 키질 석굴, 투르판의 베제클리크 석굴, 둔황의 천불동 등은 그 대표적이 예이다. 중앙아시아의 불교문화는 석굴
사원의 형태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 장엄한 벽화 및 조각의 양식에 이르기까지 실크로드를 따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 전파되어 불교문화뿐만 아니라 일상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불상 틀
음각형태로 되어있어 좌상의 부처상을 찍기 위한 석고 틀임을 알 수 있다. 호탄지역에서 불교를 주제로 한 석고 틀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파미르에서 석고가 많이 생산된 것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석고로 빚은 유물들이 다량으로 발굴되고 있다.
석고틀로 찍어낸 불상
보살 입상
여래좌상 벽화
3세기에서 5세기의 것으로 추정. 흙벽을 채색하여 여래(如來 : 부처)를 표현한 벽화. 벽화 아랫부분은 연화좌 위에 두
다리를 교차하고 앉아 있다. 부처의 머리는 비스듬하게 오른족으로 향해 있다. 검은 선으로 얼굴, 가사와 연꽃잎의
윤곽을 그리고 붉은 바탕에 황색기가 섞인 색으로 광채를 냈다.
여래좌상
여래좌상 상부확대 사진
활 모양의 눈썹과 눈동자에 검은 물질을 넣은 기법, 왼손 새끼손가락과 오른쪽 엄지를 붙이는 형태의 설법인 연화좌
(蓮花座)와 수미좌(須彌座)를 상하로 구성한 대좌 등이 카시미르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한대(漢대) 청동마차 행렬
기원전 3세기에서 3세기의 것으로 추정. 1969년 레이타이묘에서 출토된 한(漢)나라 시대 행차 의장 대열. 말에 오른
병사들은 창과 미눌창 등 4가지 창을 들었고 수레마차, 주인이 탄 마차, 도끼 등 무기를 실은 마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행렬의 위용(威容)이 당당하고 웅장하다. 간쑤 우웨이 레이타이묘에서 출토. 간쑤성 박물관 소장품.
말의 엉덩이를 보면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고사(古事)를 연상시킬 만큼 팡팡하니 살이 쪘고, 네 다리는 너른 대지를
거침없이 내달려도 무서움이 없을 만큼 날렵하기까지 하다.
뿔이 하나 달인 동물
3세기에서 5세기의 것으로 추정. 청동으로 만든 해치(獬豸)다. 머리에 뿔이 하나 달려 ‘독각수(獨角獸)’ 라고도 불린다.
모습이 양 같기도 하고 사슴 같기도 한, 이 짐승은 좋고 나쁨을 판단할 때 성이 나서 눈을 동그랗게 뜬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나 분쟁이 발생했을 때,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 편을 뿔로 가리키거나 물어 버리기도 했으며, 심지어 뿔로
찍어 그 자리에서 죽이기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해치는 공명정대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간쑤 주취안 출토. 간쑤성박물관 소장품.
이와 비슷한 동물이 중국 고대 4대 기서(奇書) 하나인 '산해경(山海經)'의 서산경(西山經)에 보이는데 그 이름은 '쟁(猙)'
이라고 부른다고 적어놓고 있다. 아래 그림이 쟁이다.
해경(山海經)'의 서산경(西山經)에 나오는 쟁(猙)이라는 동물
*석가모니부처님 입멸(入滅)의 길
인도에서는 옛부터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는 관습과 더불어 불타고 남은 유골을 수습하여 숭배하는 유골숭배의 풍습이
있었다. 석가모니가 45년간의 중생구제와 진리전파를 위한 일생을 마치고 쿠시나라에서 입멸(入滅)에 들자 부처님의
장례도 재가신자들에 의해 인도의 전통예식대로 화장으로 치뤄졌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부처님의 제자인 출가수행자들은 부처님의 장례같은 일에는 관여하지 말고 오로지 진리탐구에만 힘쓰라고 유언했기 때문이다.
해서 쿠시나라에 살던 말라족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부처님의 장례를 치르고나자 이번에는 부처님의 유골을 처리하는
문제가 생겼다. 뒤늦게 부처님의 입멸소식을 전해들은 여러 나라의 왕들이 각기 생전의 부처님과의 인연을 빌미로 부처님의 유골을 요구하며 심지어는 군대를 동원하는 사태까지 벌이게 되었다.
그러자 때마침 도냐라는 한 바라문이 부처님의 생전의 덕을 일깨우며 중재에 나서서 유골을 여덟 등분하여 여덟 나라에서 각기 사리탑을 세워 공양하도록 하였다. 또, 유골 분배가 끝난 후 현장에 도착한 모리야족은 할 수 없이 화장을 하고 남은 재를 가져갔고 도냐에게는 유골을 분배할 때 썼던 병이 주어졌는데, 그들도 각기 그것들을 탑을 세워 봉안했다. 그것을 '근본팔탑(根本八塔)' 혹은 '근본십탑 (根本十塔)' 이라고 한다.
그후 아쇼카왕 때에는 불교를 널리 포교하기 위해 여덟개 탑 속의 유골을 꺼내 인도 전역에 팔만사천개의 사리탑을 세웠
다고 한다. 불자들은 대대로 사리탑을 석가모니부처님 대신으로 여기며 정성껏 공양해왔는데, 사리탑의 '사리'란 인도의
옛말 '사리라'에서 온 말로, 유골을 의미하던 말이다.
보살입상
여래좌상
짐승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동제 고리
날개 달린 두 마리의 동물이 서로 마주 보고 엎드려 있는 둥근 동제(銅製)고리다. 호랑이의 머리를 하고. 귀는 위로
섰으며, 짧은 갈기를 가졌다. 한 쌍의 뿔은 뒤를 향해서 올라가 있고, 등 양측에 한 쌍의 날개가 달려있다. 원통형 안은
비어서 안쪽으로 열려있다. 종교의식에 사용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단은 서쪽으로
기원전 1세기경 중국의 비단을 처음 접한 로마인은, 부드러운 감촉과 화려함을 가진 비단에 매료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중국의 비단은 로마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금과 똑같은 무게로 교환되었다. 비단의 직접 생산은 로마뿐만 아니라
비단 무역으로 생기는 이익을 얻고자 했던 실크로드 지역 모든 도시들의 공통된 욕구였다.
호탄(Khotan)은 가장 부흥했던 나라로 중국 바깥에서 최초로 비단을 생한한 곳이라 전해진다. 7세기 현장(玄裝)의 '대당서 역기(大唐西域記)' 에 이런 얘기 등장한다. 5세기 경 호탄의 국왕은 비단의 제조기술을 알기 위하여, 중국 황실과 정략적 으로 혼인을 청했다. 국왕은 결혼할 공주에게 사신을 보내 "우리나라는 비단을 만들 수 없으니, 공주가 직접 만들어 입어야 한다" 고 전하였다. 왕의 뜻을 알게 된 공주는 자신의 머리 장식에 뽕나무 종자와 누에고치를 숨겨서 호탄으로 가지고 들어왔고, 호탄의 비단 직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서역남도는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 곤륜산맥 북쪽의 오아시스 도시를 연결하는 길로 호탄, 케리야, 니야, 체르첸, 누란
등의 오아시스가 있다, 누란의 샤오허묘지에는 기원 전 2,000년 전 이곳에서 전형적인 코카서스 백인이 살았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서역남도의 호탄 케리야, 이란 등에서 서역 지방에 전파된 초기 불교의 사원 건축에 많이 남아있다.
고대로부터 중국인이 선호했던 호탄의 연옥(軟玉)은 이길을 통하여 중국으로 향하였고, 중국의 비단 역시 초기에는
이 길을 통하여 서쪽으로 향했다.
여신의 형상이 있는 면직물
1세기에서 4세기의 것으로 추정. 파란색의 면포(綿布) 위에 흰색으로 문양과 틀을 만들었다. 사각형 안에 상의를 벗고
가슴을 노출한 여신상이 그려져 있다. 머리 뒤로 원형의 광배(光背)가 있고, 두 손에는 포도가 가득 담긴 풍요의 뿔
[코피아(cornucopia)]을 들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하는 산양 아말테이아(Amaltheia)의 한쪽 뿔로 추측된다.
중국비단의 직조 기술은 서역을 통해 서쪽으로 페르시아에 전파되면서 커다란 변환을 겪었다. 중국의 전통 비단 직조
기술은 한금(漢錦)이라고 하는 날실(세로실)을 이용해서 무늬를 넣는 경금(經錦)이었다. 이에 반해 페르시아에서는
씨실(가로실)을 이용해서 무늬를 넣는 위금(緯錦)을 발전시켰다. 페르시아의 직조 방식이 중국보다 화려하고 다양한
무늬의 직조가 가능한 것이었다. 페르시아의 위금 기법은 다시 중국으로 전해졌고, 그것이 당금(唐錦)이라 불리는 중국식
위금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목민들의 생활 용품 도구들(털모자. 주머니, 나무 머리빗)
천산산맥 북쪽의 초원지대는 말을 타고 양과 염소 등의 가축을 먹일 풀을 찾아 이동하는 유목생활이 발달하였다.
유목생활은 가축과 함께 정처없이 떠도는 것이 아니라, 여름에는 서늘한 산 정상지역에서 지내며, 겨울에는 따뜻한
저지대로 이동하는 등 정기적으로 생활 거점을 바꾸는 생활방식이다.
유목민은 기본적인 의식주를 그들의 기본 자신인 가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농경을 주로 하는 민족과는
달리 육류를 기본적인 식량으로함은 물론 의복 또한 주로 가축의 털이나 가죽으로 만들어 입으며, 이동에 편리한
조립식 텐트(겔)에 거주한다.
유목민들에게 동물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정신력의 상징이었으므로, 이들은 뼈, 나무, 금속, 등으로 각종 동물의
형상을 조각하여 몸에 휴대하거나 집안에 비치했다.
경교석비
기독교의 한 종파였던 경교(景敎)와 관련된 비석으로 위에 검은색 십자가 도안이 새겨져있다. 기독교도의 무덤 앞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교는 중국 당나라 태종 9년(635) 페르시아인에 의하여 중국에 전래(傳來)한 기독교의
네스토리우스파(Nestorius派)를 말한다. 처음에는 왕실의 보호로 성하였으나, 당말(唐末)에 쇠약해졌던 종교다.
당삼채낙타
중국 당나라 때 만들어진 당삼채 낙타이다. 등에 봉이 하나 있는 낙타는 아프리카 대륙과 아라비아 반도에서 주로 서식하고. 봉이 두 개 있는 낙타는 고비사막, 몽골. 알타이 지역 등 아시아 내륙에 분포하여 서식하고 있다. 낙타는 사막을 건너는 실크로드 최고의 교통수단이었기에 이들에게는 중요한 가축이었다.
당삼채(唐三彩)는 잿물이 녹황백(綠黃白) 또는 녹황남(綠黃藍)의 세 가지 빛으로 된 당나라의 도자기로, 납을 매용제(媒熔劑)하여 섭씨 800도 정도의 낮은 열로 구운 것이다.
공양인 두상
공양인(供養人)은 부처나 보살에 향기로운 꽃과 등불, 음식, 의복 등을 시주하는 사람을 말한다, 머리에 복잡한 형태의
터번을 말아 넣고 풍부한 수엽을 기른 호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두상에 나타난 수염과, 눈썹, 코 부분과 전체 얼굴 형태가
입체감이 강하여 중원 한족의 두형과는 분명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국제상인, 소그드인
소그드인(Soghd 人) 은 중앙아시아 아무다리아. 시르다리아 두 개의 강 사이에 위치하는 제라프샨강(江) 유역에 살았다.
10세기 아라비아 지리학자인 무카다시가 언급한 '신(神)이 만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라는 곳이다.
이들은 실크로드의 요충자리라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곳곳에 집단 거류지를 건설하고 실크로드의 동서를 잇는
육상의 중계무역을 주도하였다. 소그드인은 중국의 수도 장안을 비롯하여 무역의 주요 대상자인 투르판, 하미, 둔황
등지에도 집단 거주하였다. 이란계 민족으로 알려져 있는 소그드인의 종교는 이란 문화를 대표하는 조로아스터교
(Zoroaster敎)였다.
불을 숭배하는 종교, 즉 배화교(拜火敎)로 알려져 있는 조로아스터교는 소그드 상인의 활동을 따라 사방으로 전파
되었다. 동서 교역을 주도하였던 소그드인의 활약으로 소그드 문자 역시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소그드 문자는 이후 위구르. 몽골문자의 성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도제 납골기
도제 납골기 확대사진
진흙으로 만든 붉은 색 도기로, 발견 당시 안에 해골이 있었다. 관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지어로 ‘웃으아리’ 라고 한다.
웃으아리는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소그드인의 일반적인 매장 방식이었다. 특히 소그드인들은 깔끔했으며 사체가 부패하며 흐르는 물까지도 따로 흐르도록 물길을 터 냈을 정도라고 전해지고 있다.
*누란의 그림자 샤오허 묘지
샤오허 묘지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곳' 이라는 의미를 가진 타클라마칸 사막은 사람이나 짐승이 살 수 없는 불모지다. 해서, 이곳을
지나는 여행자들에게는 언제나 두려운 곳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북쪽의 천산산맥과 남쪽의
곤륜산맥에서 흘러오는 물에 의지하여 사막에 오아시스 도시를 만들고 삶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2002년 타클라마칸 사막 동쪽, 누란의 옛 성터 서쪽에 4,000년 전의 무덤이 처음으로 발굴되었다. 황량한 사막 한 가운데
섬처럼 솟아 있는 언덕 위에 수백 개의 무덤들이 쌓여 있었다. 무덤 위에는 메마른 나무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누란의 미녀’라고 불리는 젊은 여인의 시신을 비롯해 이곳에 묻힌 사람들의 인종은 전형적인 코카서스 백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무덤 주인공들의 문명은 더 이상 후세로 이어지지 않았다. 1,000 년 이상이 흐른 후 이 지역에는 기원전 2세기
중국의 역사책에서 서역 36개국의 하나로 ‘누란’이 나타나지만, 아직 정확히 고증되지 않고 있다.
나무로 만든 미이라
기원전 20세기에서 기원전 10세기의 것으로 추정. 나무를 깎아 얼굴과 몸통, 다리를 만들고 눈과 입을 조각해 만든 사람의 형상의
미이라. 출토 당시 나무 관에 매장되어 있었다. 사람이 타지에서 사망해 시신조차 거둬들이지 못할 경우, 나무미이라를 대신해
안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적으로 매우 희귀한 사례로 꼽힌다. 굳이 연상하면 죽음의 의미를 가진 타클라마칸 사막의 여행이
시신을 찾지 못할 만큼 어려운 일이란 것을 상상할 수 있겠다. 또 수습하기 어려운 시선이기에 그것을 대신한 의식이라고
여겨진다. 누란 샤오허묘지에서 출토. 신장문물고고연구소 소장품.
모자를 쓴 해골
기원전 20세기에서 기원전 10세기의 것으로 추정. 모자를 쓰고 있는 여성의 두개골. 발견 당시 두개골에 약간 틀어올린
머리카락이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모자 정수리는 뾰족하고 모자 왼쪽에 깃털 등을 묶었을 나뭇가지 두 개가 꽂혀 있다.
모자 꼭대기 부분에는 털을 꼬아 만든 띠가 장식되어 있고, 깃털은 남아 있지 않다. 누란 샤오허묘지에서 출토. 신장문물
고고연구소 소장품.
누란의 미녀 복원도
*길은 동쪽으로 이어지고
둔황에서 동쪽으로 란저우를 거쳐 장안(서안)에 이른다. 둔황에서 란저우까지는 남쪽으로 치렌산맥, 북쪽으로 고비사막이
1,000km 정도 펼쳐져 있는데, 이를 '허시회랑(河西回廊)'이라고 부른다. 한나라 이후 이 지역은 중국의 서쪽 변방을 이루고
있었지만, 중국이 쇠약해졌을 때는 독립적인 소왕국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허시회랑 동남쪽의 닝샤 역시 오래
전부터 중국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하지만 흉노 계통의 유목민 전통도 갈이 남아있다. 중국 문화와 흉노 계통의 유목민 문화가 결합되어 이 지역은 실크로드
상의 독특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서역에서 전래된 각종 문물은 장안에 집결되어 서역으로 향하는 중국 문물과 교환 되었다.
하지만 장안이 실크로드의 종착점은 아니었다. 장안에 모였던 각종 문물은 보다 동쪽으로 신라의 경주에까지 이르렀다.
무덤에 있던 무사 흙인형
전시장에 진열된 무사상은 하나같이 눈썹이 숯덩이처럼 짙고, 두 입술을 꽉 다문 채 수염을 길러 엄숙함을 더했다.
그리고 칼집이 여섯마디로 이루어진 장검을 차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삼국지를 읽을 때, 들리던 장수의
함성이 이곳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금관장식
괴수가 호랑이를 물고 있는 모양의 금장식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의 것으로 추정. 용의 몸에 매의 부리와 발톱을 한 괴수가 뛰어오르며 발톱으로 호랑이의
얼굴을 잡고 입으로 목을 물고 있다. 호랑이 꼬리는 아래로 쳐져 있다. 오른족 위에 조그만 구멍이 뚫려있어 허리띠고리를
장식한 것으로 추정된다. 투루판 자오허고성에서 출토. 신장문물고고연구소 소장품.
황금 허리띠고리
1세기에서 2세기의 것으로 추정. 황금으로 만든 허리띠 잠금장치. 큰 용 한 마리와 작은 용 일곱마리가 노는 모습을
표현했고, 터키석을 상감했다. 형체는 가는 금실을 용접해 만들었고 사이에 작은 금 구슬을 채웠다. 국립중앙박물관도
비슷한 모양의 황금 허리띠고리(오른쪽. 평양출토)를 소장하고 있다.
호랑이 모양의 금관장식
금관장식
로마 금화
유리잔. 유리잔은 경주 금령총에서 발굴 된 유리잔과 똑같은 모습이다
포도넝쿨의 암막새-경주에서 발굴된 포도넝쿨 암막새.
페르시아에서 풍요와 생명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포도무늬는 넝쿨무늬(唐草紋)과 함께 어우러져 통일신라의 암막새를
장식했다. 우리나라에서 포도가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로 알려져 있는데, 포도무늬는 서아시아를
통해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실크로드(SliK Road)와 신라 경주
서역에서 전래된 각종 문물은 장안에 집결되어, 서역으로 향하는 중국 문물과 교환되었다. 하지만 장안이 실크로드의
종착점은 아니었다. 장안에 모였던 각종 문물은 보다 동쪽으로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중국을
통해 서역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직접 서역과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신라 고분에 나타나는 유리제품과 황금 제품 등은
실크로드를 통하여 서역의 문물이 경주에 많이 들어왔음을 알려준다.
특히 신라의 왕릉급 무덤에서는 약 20여 점 이상의 유리그릇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로만 글라스계통으로 보인다. 경주
괘릉과 흥덕왕릉의 무인상이나 조각에서는 신라인의 눈에 비추어진 서역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왕오천측국전의 지명들
첫댓글 공부하듯 천천히 읽고 보고 있습니다. 아마 몇 회독 더 해야지 머리속에 박힐 것 같습니다. 고향 두타문학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심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왕성한 필력이 산수를 넘어서도 이어지시기를 빌어 드립니다. 서성옥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