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지지 않는 작은 산골 마을
벌써 해를 본지도 열흘이 다 되어 간다. 지난 13일, 산계3리 계하 마을을 찾았을 때도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마을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조그마한 은행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해 앉아있는 4명의 할머니들이었다.
■산계1리 최경술씨와 은행나무 이야기 계속된 비 때문인지 할머니들의 대화는 온통 비 얘기뿐이었다. 그 중 며칠 전, 청산 장을 다녀오다 길가에 쓰러진 김석용(87)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가 단연 화제였다.
"지금도 들에 나가 밭을 매는 건강한 양반인데 청산장엘 다녀오다 그만 길거리에 쓰러졌다는 거야" "무심하기도 하지. 그곳을 지나는 차들이 한 두 대도 아닐텐데 몇 시간을 그렇게 쓰러져 있었다지 뭐야" 그렇게 몇 시간을 쓰러져 있던 김석용 할아버지를 구한 것은 바로 산계1리 최경술씨였다. 최씨는 아들과 함께 차를 타고 나섰다가 할아버지를 발견하고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드렸다고 한다. "비 맞고 그대로 뒀으면 돌아가셨을 껴. 그렇게 많은 차가 지나갔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래도 이웃사촌이 좋지, 금방 알아보고 할아버지를 집까지 바래다 줬다는 거야. 하여튼 고마운 일이여" 최씨에 대한 칭찬과 함께 할머니들의 얘기는 쉼터로 사용하고 있는 은행나무로 이어졌다. "이거 봐봐. 은행이 아주 포도송이처럼 달렸어. 가을만 되면 마을주민들이 다 나눠 갖고도 남을 정도야" 이 은행나무가 이곳에 심어진 것은 마을 식수 심기가 한창이었던 86년이었다. 마을 주민 중 김병택씨 집에서 희사를 받아 심은 나무가 이제는 안 노인네들의 쉼터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한 시간을 넘게 은행나무 아래에서 할머니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비는 무성한 은행잎과 포도송이 만한 은행에 가려 할머니들의 쉼터를 적시지는 못했다.
■장수하며 사는 마을 올해 봄, 계하마을 주민들은 큰 일을 치렀다. 1902년에 태어나 한 세기를 살아온 이기남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예전부터 장수하는 마을이었어. 보통 90세 이상은 다들 살지" 김인호 노인회장(71)의 얘기처럼 김 회장의 아버지도 96세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도 90을 넘겨 돌아가셨다. 이밖에 이기남 할머니에 이어 신낙순(90) 할머니가 마을의 최고령으로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다. 노인들이 많은 만큼 주민들의 효심도 다른 마을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 김연호(62)씨는 3년 동안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수발해 효자상을 받기도 했고 김인호 노인회장의 아내인 이범순씨도 병석에서 오랫동안 고생한 시부모님을 모신 공으로 효부상을 받기도 했다.
또 마을의 최고령 신낙순 할머니의 4형제 중 막내아들인 이선우(43)씨는 마을 내에서 가장 젊은 주민으로 신씨는 물론 마을주민 모두를 친 부모님처럼 공경해와 주민들의 칭찬을 받고 있다. 마을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계하마을 표지석에 적혀 있는 `효심'이란 글자가 마을 주민들의 모습과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마을의 상징 `계수나무' 청성면 산계3리는 계하와 안임이 두 개의 자연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산계3리의 중심마을인 계하에는 모두 19가구가 거주하고 있고 안임이마을에는 다섯 가구만이 거주하고 있다. 계하마을의 지명은 마을 앞 계수나무와 관련이 있다. 즉 계수나무가 유명한 만큼 계수나무 아래 마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수명도 오래됐지만 보면 볼수록 잘 생긴 나무예요. 이제는 마을주민들의 소중한 벗이 되고 있지요" 마을의 지명을 있게 한 나무지만 요즘, 이 계수나무가 시름시름 앓고 있다고 김동식 이장은 전하고 있다.
"98년 큰 물 피해를 입고 난 후 하천 정비 때 한 자 정도 파헤쳐 졌어. 그 뒤로 가지들이 썩어 들어가더라고. 이제는 우리 힘으로는 살릴 수가 없을 것 같아" 주민들의 소중한 벗이 된 계하마을의 계수나무를 살리기 위해 주민들은 매년 이 나무의 건강을 기원하며 제를 올리고 있다. 나무의 성장에 좋다는 막걸리도 주민들의 정성을 모아 매년 한 말씩 뿌려주면서. "이 계수나무 아래는 할아버지들의 쉼터가 되고 있어요. 커다란 가지가 썩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는 할아버지들이 다칠까봐 걱정이예요. 돈이 얼마가 됐든지 나무를 살리고 마을 주민들이 안전하게 쉴 수 있도록 썩은 가지를 쳐내주었으면 좋겠어요" 마을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는 계하마을의 계수나무. 다시 한번 푸르름을 간직한 채, 건강한 모습을 되찾았으면 하는 것이 산계3리 주민 모두의 소망이 되고 있다.
■ 99년부터 조성된 마을 앞 꽃길 계수나무와 함께 99년부터 조성된 마을 앞 꽃길은 또 다른 주민들의 자랑거리다. 6년 전,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낮선 땅에 들어온 안형식(72)씨가 정성스럽게 가꾼 꽃길이 이제 산계3리의 가장 큰 자랑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몇 가지 꽃이 심어졌는지도 몰라. 봄부터 가을까지 무슨 꽃이든 피니까" "자기 일도 바쁠텐데 조금이라고 날이 가물면 하루 종일 꽃밭에 나와 물 주기 바빠" 오랜만에 고향을 찾는 아들, 딸들이 마을 앞 꽃길을 보며 고향의 정취를 담뿍 지니고 갈 수 있게 되었다며 주민들은 안씨에 대해 고마움을 전하고 있었다.
■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들 계수나무와 함께 예전에 이곳 계하마을에는 기와집이 많아 계하마을이 되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김동식 이장은 이와 관련 "예전에는 기왓장을 빻아서 짚 수세미를 이용해 놋그릇을 닦는데 쓰기도 했다"며 지금도 마을 입구에서 많은 기왓장이 발견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기와집이 많았다는 얘기와 함께 계하마을 주민들로부터 예전부터 전해오는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아들과 딸이 내기를 하자 아들을 위해 어머니가 딸에게 뜨거운 팔죽을 먹였다(본보 산계2리 마을탐방에 소개)는 마을 뒤 산성과 관련된 얘기다. 전설뿐 아니라 열 여섯살에 시집와 40년을 계하마을에서 생활하고 있는 문기연(74) 할머니와 김동식 이장으로부터 마을 곳곳에 깃든 주민들의 추억을 찾아볼 수 있었다. 마을 뒤 큰골날맹이 중턱, 절골에는 오래 전 폐허가 된 절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3년 전이었나, 한 번은 경찰서에서 절터주변의 굴에 지명수배자나 간첩들이 숨어 지낸다는 얘기가 들린다며 조사해간 적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밖에 `마을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거북산은 일제 때 이 마을에서 큰 일을 할 인재가 태어난다고 해서 거북이 모양을 한 산의 꼬리 부분을 잘랐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저 산이 얕아보여도 경사가 무지 급해. 옛날에는 산에서 돌을 굴리면 보청천 건너에 있는 마을인 만명리, 지금은 장수리인데 그 마을에 피해가 난다며 어른들이 매일 나무란 적도 있었어" 큰골날맹이에 대한 얘기와 함께 골짜기가 얼마 안돼 산에 매달려 있다고 해서 붙여진 매금골 등도 주민들의 얘기 속에 묻어 나온 마을 내 지명들이었다.
■ 다섯가구 거주하는 `안임이' 계하마을을 지나 포장된 도로를 지나다 보면 산밑으로 한적하게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 안임이다. 10년 전, 7가구가 거주했던 이곳은 이제 다섯가구 만이 남아 마을을 지켜 나가고 있다. 하지만 모두 고령인데다 자녀들도 모두 외지에서 자리를 잡고 있어 이들이 안임이 마을의 마지막 세대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이곳에는 82세의 안경모씨 내외를 비롯해 김재봉(80)씨 내외, 이석봉(67)씨 내외와 이창수(80·여)씨와 샤름나라수양관(대표 최경순)이 위치해 있다. 한 곳에 모여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함께 얘기 나누는 기회도 그만큼 적은 것이 안임이 마을의 현실이다. 하지만 서울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는 안경모씨의 아들 안병국(52)씨 등 자녀들이 자주 고향을 찾고 있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 되고 있다.
■ 가물면 농사 더 잘되는 마을 산계3리에 들어서면 다른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설하우스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보청천을 사이에 두고 넓게 펼쳐진 논들을 보며 이 마을의 주 작목이 무엇인지 쉽게 짐작이 갔다. "담배는 노인들이 많아지다 보니 없어졌어. 밭농사도 산짐승 때문에 지어먹을 수 없을 정도야. 포도농사를 짓는 곳이 단 한 가구 있지" 특별한 소득 작목 없이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는 마을이지만 산계3리 주민들에게는 남다른 자부심이 있다고 김동식 이장은 전한다. "우리마을은 가물면 농사가 더 잘되는 마을이야. 토질 자체가 수분을 오래 머금고 있고 높은 산에 가려져 있지 않아 일조량도 좋은 편이지. 그래서 우리마을에서는 물에 대한 욕심을 안 부려" 물에 대한 욕심만 없는 것이 아니었다. 마을회관을 건립할 당시, 출향인들에게 부담을 지우기 싫어 조용히 회관을 건립했다는 이장의 얘기 속에서 고향을 떠나 살아가는 출향인을 배려하는 마음까지 읽혔다. |
첫댓글 고향의 마을에 대한 전설을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여기에 나오는 어르신들 지금은 돌아가신 분도 많군요 고향의 전래를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