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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수 수필가
△부산대 영문과 교수, 교무처장, 인문대학장 역임
△부산대 명예교수. 부산대 평생교육원 수필창작아카데미 주임교수
△에세이집『이카러스의 새로운 비상』,『발자국을 정리하다』
△저서『미국소설의 정체성 탐구』,『오리엔탈리즘의 역사』,『사랑과 성과 영문학』
솔내 정약수|조회 37|추천 0| 2015.06.12. 16:23
회원 동정
● 정약수
2월 15일: 정관성당에서 아내와 함께 가톨릭교 세례를 받다.
세례명: 요셉
4월 19~22일: 일본역사 기행을 목적으로 일본 교토, 나라, 오사카 지역을 탐방.
5월 6일: 서면 남대문 식당에서 개최한 수필부산문학회 임시 총회에서 황선영 회원이 차기 회장에
선출됨으로써 2013년 4월부터 수행해온 2년동안의 "수필부산문학회" 회장직을 면하게 됨.
5월 16일: 효원수필아카데미와 효원수필문학회가 공동 주관하는 문학
기행 참여, 전남 장흥 일대 문학 관련 명소를 탐방하고 돌아옴.
정의륙|조회 10|추천 0| 2015.08.13. 12:45
아름다운 마무리
정 약 수
부산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수필창작아카데미’라는 강좌를 하나 개설하였다. 수필이란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자기를 진솔하게 드러내는 글쓰기이므로, 말하자면 글쓰기를 통한 자기 존재의 탐구 방식이다. 이러한 글쓰기는 젊은 시절보다 나이가 들어서 쓰기에 더 적합한 문학 장르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강좌에 등록하신 분들의 면면을 보면 생각보다 비교적 연세가 높으신 분들이 많았다. 배움에는 나이가 문제 되지 않는다더니, 여기서도 그 말이 적용되는가 보았다.
지난 2008년 9월에 시작한 그 강좌가 2학기 15주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첫 수료식을 갖게 되었다. 수료식날 나는 그분들에게 무언가 의미 있는 선물을 하나씩 드리고 싶었다. 그 강좌를 운영해 오면서 그 동안 정도 들 만큼 들었지만, 대부분 연세가 들 만큼 드신 분들이 그런 과정을 무사히 마무리를 짓는 수료식 자체가 그분들에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아, 무언가 그런 의미에 걸맞는 선물을 하나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선물을 무엇으로 해야 할지를 두고 또 한동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마침 내 눈을 번쩍 뜨게 해 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어느 신문지상에 소개된 법정 스님의 신간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책이었다. 법정 스님의 글이나 책이라면 나도 그 동안 여러 번 읽고 감명을 받은 적이 많았던지라,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그 책을 전체 수료자 수에다 한 권을 더 보태어 주문을 했다. 한 권은 내 몫이었다. 그 책을 수료식장에서 한 권씩 나눠 드렸다. 정말 자기들의 삶에서 또 한번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는 그분들에게 이 이상 더 적합한 선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러고 나서 나도 그 책을 읽어 보았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책의 제목이기도 하고, 또한 책 속에 수록된 여러 편의 수필 작품 가운데 한 편의 제목이기도 해서, 그 제목으로 쓰여진 작품을 특히 주의 깊게 읽어 보았다. 내가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이 제목에 특히 주의가 끌린 것은, 그것이 바로 내 자신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이었다. 즉, 아름다운 마무리는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내 자신의 일이요, 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금년(2009년)이 현직 대학 교수로서의 마지막 해이다. 내년 2월이면 정년을 맞이하게 된다. 대학 교수로서 같은 대학에서 30년을 넘게 봉직하다가 정년을 맞이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그 정년을 앞두고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들을 정리해 보면,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즉, 첫째는 바로 아름다운 마무리요, 두 번째는 마무리 후 다음 단계의 일이다.
내가 법정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글에 특히 주의가 끌린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즉, 나는 법정 스님의 그 글에서 내 자신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지혜를 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법정 스님의 글은 이제 그분도 노경이 깊어짐에 따라 마치 겨울철의 나뭇가지같이 건조하고, 전혀 군더더기가 없다. 어찌 보면 그것은 메마른 것 같고, 평범한 것 같고, 반복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곱씹어 보면 그 속에는 오랜 구도자의 삶과 사색에서 우러나온 깊은 통찰과 지혜의 샘물이 잠언시가 되어 솟구친다.
아래에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그의 수필에서 주요 구절을 뽑아서 옮겨 본다.
“그때그때 바로 그 자리에서 나 자신이 해야 할 도리와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에 대해 감사하게 여긴다. 내가 걸어온 길 말고는 나에게 다른 길이 없었음을 깨닫고, 그 길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긍정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과 모든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에게 성장의 기회를 준 삶에 대해, 이 존재계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내려놓음은 일의 결과나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어 자신의 순수 존재에 이르는 내면의 연금술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채움만을 위해 달려온 생각을 버리고 비움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고 그 비움이 가져다 주는 충만으로 자신을 채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나를 얽어매고 있는 구속과 생각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 삶의 예속물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거듭나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인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마무리다.”
그 외에도 많이 있지만, 이 정도로 하자. 너무 많으면 주의가 분산되고, 초점이 흐려진다. 사실 위에 옮긴 글 정도만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아름다운 마무리는 충분할 것 같다. 그렇다. 나는 나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먼저 내 자신이 해야 할 도리와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것을 소홀히 하거나 방치하면서 무슨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겠다는 것인가. 그러면서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비울 것은 비울 줄 알아야 한다. 마지막까지 내려놓을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계속 붙잡고 늘어지거나, 비울 것을 비우지 못하고 채우기에 급급한 모습은 얼마나 추하고 어리석은가.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해 불만스러워하기보다 감사하는 것, 그리고 그 삶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뒷받침해 준 국가와 사회와 공동체와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것, 나의 삶의 과정에서 지금까지 나를 성장시키고 성숙시키고 존재시켜 온 이 존재계 자체에 대해 감사 하는 것 또한 나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 빠뜨려서는 안 될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얽어매고 있는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 삶의 예속물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진정한 자유인으로 거듭나는 것, 이것이야말로 나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완성하는 것이다.
내가 현직 대학 교수로서 마지막 해가 되는 금년을 나는 이 정도로라도 아름다운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자신이 없지만, 노력할 뿐이다. 그러나 정말 아름다운 마무리는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그 생각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 그 생각에 너무 사로잡히다 보면 그것이 또한 집착이 되고 강박관념이 되어 경직되고, 그래서 유연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를 잃지 않을까 두렵다.
법정 스님은 그 책의 서문에서 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그렇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자신의 삶의 어떤 특정 순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을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으로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마무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정의륙|조회 15|추천 0| 2015.07.12. 11:33
모성애
정약수
아내가 병원에 입원을 했다.
집안 계단에서 넘어져서 난간에 머리를 부딪쳐 뇌출혈을 일으켜 입원치료를 받아야 할 사정이었다. 아내는 오랜 세월 지병을 앓아온 관계로 전에도 여러 번 이런 저런 이유로 입원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에 입원했을 때와는 사정이 달라졌다. 전에는 내가 현직에 있을 때였고, 아이들도 집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아내를 돌보는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는 내가 퇴직을 한데다가 아이들도 다 집을 떠나가서 각자 자기들 몫의 삶을 살고 있으니, 입원한 아내를 돌보는 일이 전적으로 내 몫이 되어 버렸다.
입원실은 3인실이었다. 그런데 3명의 환자뿐만 아니라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나 간병인도 같은 병실을 공동으로 사용해야 했다. 그러자니 환자와 보호자, 간병인, 때때로 찾아오는 면회객들에다 수시로 들락거리는 의사와 간호사까지 좁은 병실 안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환자의 침대 곁에 보호자나 간병인용 간이침대가 놓여 있지만, 그 침대에서 밤을 새우며 환자를 돌보는 일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장소, 그런 일에 내 자신이 적응이 안 되어 처음엔 서투르기도 하거니와 여간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시간이 가다 보면 서서히 적응이 되기 마련인가 보았다.
같은 병실에 오랜 시간을 같이 있다 보면 주위의 다른 환자에게도 시선이 가게 마련이다. 한 침대에는 아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환자가 세 번이나 바뀌었다. 그러다 보니, 별로 눈여겨 볼 형편도 못되고, 인상에 남는 환자도 없었다. 그런데 다른 한 침대의 환자는 아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는데, 아내가 열흘간이나 입원해 있다 퇴원할 때까지도 아직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러니, 자연 그 환자뿐 아니라 환자의 주변 사람들까지도 낯이 익게 되고, 이런저런 사연과 정보에도 접하게 되었다.
그 환자는 결혼한 지 아직 채 1년도 안 되는 신혼의 앳되고 귀여운 여인이었다. 그러니 결혼 전에는 부모님 사랑도 많이 받았을 테고, 결혼 후에는 남편의 사랑도 듬뿍 받았으리라. 그러다 보니, 아뿔싸! 조물이 시기했던지, 어느 날 액운이 찾아왔더란다. 자동차 운전 도중 차 바로 앞에서 갑자기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와 도로를 질주해 가는 것을 발견하고 급히 핸들을 꺾는 바람에 그만 차가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사고가 났단다. 얼굴에 심한 타박상을 입어 코가 내려앉고, 이빨이 여러 개 부러졌을 뿐만 아니라 목뼈까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단다. 우리가 처음 그 병실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거의 혼수상태에서 여러 날을 보내고 있었다.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는 번갈아 바뀌었는데, 짐작컨대, 남편과 친정어머니로 짐작되었다. 환자의 친정아버지로 보이는 초로의 신사도 종종 병실에 들렀다 가고는 했다. 그 때까지는 그 환자에게나, 보호자들에게도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환자는 거의 혼수상태로 계속 잠만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그날에야 환자는 의식이 조금 돌아온 모양이었다. 의식이 돌아오자 환자는 괴로워하고 신음하며 몸을 뒤척였다. 그러자 당황한 것은 그날 보호자로서 곁에 있던 환자의 남편이었다. 그는 젊고 핸섬할 뿐 아니라 우리 부부에게는 대단히 예의 바르기까지 한 나무랄 데 없는 청년이었다. 그런데 절대 안정을 요하는 환자가 괴로워하고 몸을 뒤척이고 움직이려하니 그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움직이지 말라고 환자를 타이르기도 하고, 환자의 몸을 붙잡고 있기도 하다가, 간호사에게 가서 대책을 호소하기도 하는 등, 안절부절 하는 것이었다. 간호사들도 진통제나 수면제를 투입하는 것 말고는 별로 뾰족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약물들의 효과도 일시적이고 부분적일뿐 완전한 방책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그 젊은 남편은 때로 짜증을 내기도 하고, 신경질을 부리기도 하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렇게 그날 낮과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에는 거의 파김치가 되어 장모인 환자의 친정어머니와 교대를 했다.
그날도 환자의 상태는 전날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의 태도는 전날과는 딴판이었다. 환자를 대하는 표정이 다르고, 환자를 어루만지고, 다독거리고, 달래는 손길과 동작이 다르고, 환자에게 나타내는 감정과 언어의 표현이 달랐다. 그건 한 마디로 지극한 모성애의 표현 그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환자의 표정과 태도도 달라졌다. 비록 심한 상처를 입어 일그러진 모습이긴 하지만, 그 일그러진 모습에서도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평화와 안정의 표정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조차도 마음이 놓이게 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렇구나. 저게 바로 어머니와 다른 사람과의 차이구나.
비록 결혼을 해서 어머니의 품을 떠난 딸이지만,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같을 수가 없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상대적인 관계인데 반해서,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절대적인 관계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라 하더라도 부부관계는 원래 상대적 조건 위에서 성립되는 관계이다. 하지만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는 그 어떤 조건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혈육으로 맺어진 본능적이며, 맹목적이며, 절대적인 관계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본래 그것은 둘이 아니라 한 몸이었다. 즉 태아가 어머니 몸속에 있을 때는 모체와 한 몸으로서 가장 완전한 합일 상태로 안정과 만족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기가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와 독립된 개체로서 성장 발전해 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태아시절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누리던 그 완전한 합일의 안정과 만족에 대해서 영원한 향수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누구나 어머니 품속을 그리워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제 저 여인도 비록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어 성장하여 결혼을 하고 남편과의 새로운 합일을 이루었지만, 자신이 무력해지는 저런 위기와 고통의 순간에는 평소에는 잊고 있던 그 모성애를 새롭게 갈구하게 되고, 그 모성의 품속에서 만족과 안정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 어머니 역시 딸이 사고를 당하여 병상에 누워서 고통의 시간을 헤매고 있는 이 순간에는 본래의 그 근원적인 모성애로 되돌아감으로써 딸에게 저런 평화와 안정과 위안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일찍이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이란 책을 썼던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남녀 간에 성립하는 사랑은 모체로부터 분리된 두 인간이 다시 하나로 합치고자 하는 사랑이며, 본래 하나였다가 분리되는 것이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인데, 참다운 모성애는 아기가 분리되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자녀의 행복을 위해서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날 그 환자의 어머니는 바로 그런 모성애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성애 속에서 그 딸은 비록 다 큰 어른이지만 다시 애기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애기로 돌아가서 마치 유아가 어머니 품속에서 안정과 만족과 행복을 누리는 듯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진짜 애기처럼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이었다.
“엄마, 〇서방 내일 오지 말라고 해. 엄마랑 같이 있는 게 좋아. 〇서방은 싫어!”
그날 밤, 나는 아내의 침대 곁에 놓인 간이침대 위에 누워서 혼자 망상에 젖었다. 비록 아내도 어느새 이순耳順에 이르렀지만, 아내 역시 지금처럼 병들고 상처받고 고통스러울 때, 그래서 자기 몸조차 스스로 돌볼 수 없이 무력하고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빠졌을 때, 지금 옆에 있는 나보다도 더 그리워하고 필요로 하는 대상이 있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영원한 근원적 귀의처인 모성의 품속이 아닐까? 그것은 아내뿐만 아니라 나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근원적 귀의처로서의 모성의 품속을 그리워하는 속성에는 연령과 세대의 차이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슬프게도 아내도 나도 이미 우리는 그러한 근원적 귀의처인 모성의 품속을 오래 전에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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