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1. 현 금융위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메이저 상업은행의 국유화 논란으로 2차 금융 위기가 현실화된 가운데, 현 금융위기의 본질을 분석하고, 앞으로의 세계경제 상황을 예측한 《경제 묵시록》이라는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탐욕의 종말 : 아슈케나지 유대인의 비밀’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충격과 공포로 점철된 대공황의 역사는 물론 금융위기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아슈케나지 유대인이 누구인지, 금융위기를 통하여 그들이 노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대안은 무엇이 있는지 다루고 있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현 금융 위기의 본질을 누리엘 루비니나 조지 소로스 등 기존의 경제 전문가들과 달리, 매우 독특하게 ‘노동자의 개미화’란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인 임종태씨는 “90년대까지만 해도 경영진과 임금 협상을 놓고 사투를 벌이던 노동자들의 모습은 어느새 사무실에 앉아 상사의 시선을 피해 자신이 투자한 종목의 주가 변화를 살피는 개미들로 변모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노동자의 개미화’의 기원을 저자는 칼 마르크스가 그의 스승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의 《오늘날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이 자유로워지는 지위(The Capacity of Today’s Jews and Christians to Become Free)》에 대한 평론(1843)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인의 유대화’ 전략에서 찾고 있다. 마르크스는 중세 고리대금업에 종사하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의 불편한 시선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방법은 그들을 자신들보다 이윤 추구에 더 혈안이 되도록 만드는 ‘그리스도인의 유대화’ 전략이었다고 갈파하였다. 그 결과물이 이윤 추구를 기독교 관점에서 최초로 정당화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윤리》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월가를 지배한 유대 금융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땀 흘리지 않고 축적한 부를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노동자들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방법은 다름 아닌 ‘노동자의 개미화’였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유대인에 대한 비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놀랍게도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유대화’를 통해 중세 그리스도인을 타락시키고, ‘노동자의 개미화’를 통해 현대 노동자들의 부를 강탈한 유대인의 전략이 사실은 유대인이 아닌 그들과 수천 년간 원수지간인 가나안 족속의 전략이었다고 폭로한다. 저자는 우리가 흔히 유대인으로 알고 있는 아슈케나지는 다름 아닌 성서에서 ‘신의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신의 저주’를 받은 가나안의 장자 부족인 두로(Tyre)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모세의 엑소더스 당시 ‘신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조상을 잔인하게 도륙한 유대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솔로몬 시대부터 이스라엘 내부로 침투해 그들의 성서인 토라(모세5경)을 탈무드로 변질시킴으로써 ‘유대인의 가나안화’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흔히 유대인의 세계 지배 시나리오로 알려진 《시온의정서》 역시 가나안 족속의 세계지배 시나리오라고 주장한다. 《시온의정서》는 유대인의 묵시록적 종말론인 정치적 시오니즘을 선동해 전 세계적인 반유대주의를 조장함으로써, ‘약속의 자손’으로 불리는 이스라엘을 이 지상에서 궤멸시키려는 그들의 전략적 사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현 중동 분쟁도 이 같은 맥락에서 조명된다). 이 같은 방식으로 가나안 족속인 아슈케나지는 유대인을 지상에서 멸절시킨 후, 지상 최후의 지배 종족으로 남아 자신들이야말로 ‘신의 저주를 받은 민족’이 아닌 ‘신의 선민’임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해 세계 지배를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서의 가라지 비유처럼 아슈케나지야말로 이스라엘에 침투한 가라지였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스트답게 아슈케나지 계보를 치밀하게 추적한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글은 지난 수천 년 동안 그리스도교의 모태가 된 이스라엘 중심의 역사에 가려져 조각난 모자이크처럼 그 모습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었던 ‘캐러비안의 해적’, 다시 말해 가나안 족속-두로인-하자르인-색목인-유대인-더치맨-뉴요커로 이어지는 아슈케나지 변천사다. 이들은 모세의 엑소더스 당시에는 가나안의 원주민으로, BC 10세기경 솔로몬 시대에는 ‘두로인’으로, AD 8세기까지는 중앙아시아의 하자르인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통일한 몽골제국 시기에는 색목인으로, 중세시대에는 고리대금업에 종사하는 유대인으로, 제국주의시대에는 동인도회사의 더치맨으로, 오늘날엔 뉴요커로 캐러비안의 거친 파도처럼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온 주인공이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 신화의 주역인 그들은 BC 10세기경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을 건축하는 등 찬란한 과학 문명을 이룩한 두로인이었다. 또한 바스코 다 가마보다 2천년을 앞선 BC 7세기 무렵, 아프리카 일주에 성공할 정도로 탁월한 항해술과 조선술, 무역 노하우를 축적한 페니키아 문명의 주체였다. 이들은 오늘날 알파벳의 기원이 된 페니키아 문자를 발명하는 등 전 세계 과학 문명과 건축, 예술을 주도하고 그것을 전파한 주체 세력이었으면서도 역사의 담론에서 한 번도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한 동일자로서 다뤄져본 적이 없다. 오히려 ‘신의 저주’를 받은 까닭에 언제나 ‘신의 축복’을 받은 유대인으로 가장한 채 역사의 담론에서 모자이크 퍼즐처럼 단절된 형태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가나안 족속이다.”
2. 금융 위기의 향후 전개 방향은 어떻게 진행될까?
저자는 금융 위기의 향후 전개 방향을 알기 위해서는 아슈케나지의 모두스 비벤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며, 월가의 모두스 비벤디를 탁월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영화 <캐러비안의 해적>을 들고 있다. 특히 2편 <망자의함>에 등장하는 해저 괴물 크라켄이야말로 지난 수세기 동안 ‘충격과 공포’로 점철된 대공황을 상징하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향후 경제 묵시록의 방향 역시 9·11 테러를 통해 이미 예시되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리먼브라더스발 금융 위기가 1차 피격이었다면, CDS의 폭발로 발생할 메이저 상업은행의 파산 또는 국유화가 1차보다 강력한 2차 피격이 될 것이며, 그로 인한 달러화 붕괴는 월드트레이드센터의 붕괴를 연상시킬 정도로 어느 한순간 급속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달러화 붕괴가 현실화될 경우, 전 세계 지구촌 사람들은 마천루로 여겨지던 월드트레이드센터의 트윈 타워가 자신들의 머리 위로 가공할 연무를 내품으며 붕괴되는 모습을 목도한 뉴요커처럼 상상할 수 없는 ‘충격과 공포’에 빠져들 것이라고 단언한다.
3, 아슈케나지 유대인이 노리는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
이 같은 달러화 붕괴를 통해 그들이 노리는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그것은 뉴밀레니엄을 앞두고 전 세계 화두로 떠올랐다가 어느새 잊혀진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 사회라고 주장한다. 특히 달러화의 급속한 붕괴는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블록 체제처럼 역내 단일 통화론에 불을 지피게 될 것이고, 이 같은 과정을 거쳐 종국엔 ‘단일세계통화(the one-world currency)’에 기반한 ‘현금없는사회(totally cashless society)’로 이행하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 물론 단일세계통화에 기반한 현금없는사회가 현실화될 경우, 최종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호모 바코드 시대’의 도래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물론 그에 앞서 총기 규제와 민병대 해체와 같은 사회적 변화가 미국에서 발생할 텐데, 그것이 호모바코드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사건이 될 것으로 규정한다. 현 금융위기 전까지 미국 사회에서 총기 규제 논란이 가장 큰 사회적 이슈가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4. 아슈케나지 유대인의 세계 지배 음모에 맞설 구체적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대응 방안 역시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고 말한다. 놀랍게도 그것은 1980년대 중반 지상에서 가장 살기 힘들다는 방글라데시에서 집에서 쫓겨난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적은 돈을 빌려주면서 극빈층의 구원자로 떠오른 그라민(Grameen : 방글라데시어로 ‘시골’을 뜻함) 은행과 같은 생활공동체다. 물론 저자는 지구촌 사람들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경제 공황으로 인한 끔찍한 궁핍함은 물론, 환경 파괴로 인한 대재앙과 전쟁 등 상상할 수 없는 사회적 격변을 겪으며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감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무런 소망도 사라지고 없을 때, 비로소 카뮈가 자신의 소설 《페스트》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것처럼,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휴머니즘이 그 빛을 발하는 놀라운 인류 부흥의 시기가 도래해 새로운 가치관에 근거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야말로 성서 묵시록에서 언급된 종말의 의미로, 그것은 새로운 시작에 다름 아니라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예언자들이 말하는 미래란 실제 미래의 모습이 아닌 예언자가 처한 상황에서 바라본 미래의 모습에 불과하다. 미래(未來)란 말 그대로 아직 오지 않은 것이고, 예언자들이 환시 등을 통해서 바라본 미래의 모습은 엄밀한 의미에서 돌이킬 수 없는 확정된 사실로서의 미래가 아닌, 현재 상태가 지속될 경우 다시 말해 현재의 미분체로서 미래의 모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일 돌이킬 수 없는 미래가 있다면 그것을 공표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바뀔 수 없는 현실이라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예언은 미래에 대한 호기심 차원이 아닌 현실에 대한 반영으로서, 현재의 잘못된 모습에서 벗어나 미래를 위해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겁주고 두렵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