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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이행 운동 : 프롤레타리아 조직 - 당, 평의회 조직문제를 중심으로
남궁 원
(사회실천연구소 연구회원)
“우리가 최근 배운 것을 잊어버려할 필요성이 지금처럼 컸던 적은 없었다.”
“자유로운 공산주의는 ‘투쟁하는 노동자’에 의해
지식인에게 전달된다.”
-안톤 판네쿡 (Anton Pannekoek)-
1. 문제제기
“노조와 의회 속으로!”. 이 슬로건은, 레닌이 1920년 공산주의인터내셔널 (이하 코민테른) 제2차 대회 소집에 맞춰 작성한 저작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의 핵심주장이다. 이 문건은 레닌이 각국의 노동운동 및 공산주의 운동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좌익 편향을 비판하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이 문건이 독일 공산당과 관계되는 것은 레닌이 지칭한 좌익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독일 공산당 내의 급진좌파였기 때문이다. 레닌이 볼 때 노조와 의회에서 활동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오직 후진 노동자를 그들의 반동적 리더의 영향 아래 남겨두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레닌의『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이란 저작은 볼셰비키의 경험을 혁명의 ‘보편적 모델’로 일반화한 것이며, 즉각적으로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전략, 전술의 방침이 되었다.
20세기 초, 전쟁과 혁명의 시대에 각국의 국제노동계급 혁명운동을 지도한 것이 코민테른이었다. 코민테른 2차 대회는 당, 의회주의, 노동조합, 민족 문제에 대한 태도 등 가장 기본적인 전략문제를 결정하는 대회였다. 따라서 레닌 저작에서 보이는 “구체적 정세에 대한 구체적 진리”라는 정세 문건이라고 보기 힘들다.
한국사회의 맑스 레닌주의 이론적 풍토에서, 레닌의『좌익공산주의- 소아병』에서 일방적으로 혹평된 좌익공산주의 운동은, 혁명적 맑스주의 관점에서 복원돼야만 한다. 1917년 혁명에 성공한 레닌과 세계혁명을 둘러싸고 이론적 실천적 ‘전투’를 벌인 좌익공산주의 흐름은 내부의 쟁점과 이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혁명이 아니라 서구 유럽 혁명 전략의 차이에 주목한 바 있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19세기말부터 기회주의에 대항해 투쟁해온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분파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1920년대 좌익공산주의 흐름은 독일,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안톤 판네쿡 (Anton Pannekoek), 헤르만 호르터 (Herman Gorter), 오토 륄레 (Otto Rühle), 칼 코르쉬 (Karl Korsch), 이탈리아의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 영국 공산당의 실비아 팡크허스트 (Sylvia Pankhurst), 러시아의 민주적 중앙주의자(Democratic-Centralist), 노동자반대파 콜론타이 (Kollontai) 등을 들 수 있다.1)
코민테른의 지배적인 흐름에 대항하여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좌파는 러시아혁명의 경험을 서구 유럽에 보편적 모델로 적용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점에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흐름은 당대 공산주의의 지배적인 운동방식을 넘어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물론 좌익공산주의 안에도 차이는 분명히 있다. 이탈리아의 보르디가는 독일 좌파가 노동자평의회를 강조하는 것을 그람시의 “공장평의회주의”와 동일시했으며, 독일 좌파는 코민테른의 퇴행에 대항하는 동맹으로서 “레닌주의적” 이탈리아 좌파를 인식하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나는 이 두 세력의 관점을 ‘혁명적 노동자평의회와 혁명정당’이라는 관점에서 종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점이 좌익공산주의를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현실 사회주의 이행에 있어 중요한 시기인 1917년에서 1920년대까지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조직인 당, 평의회 문제를 검토하여 현재의 시사점을 찾으려 한다.
2. 러시아 소비에트(평의회)와 레닌, 크론슈타트 봉기
노동자 평의회는 1905년 러시아에서 노동자 중심으로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된 혁명조직―혁명위원회, 파업위원회, 소비에트―에서 출발하여, 1918-1923년 독일 혁명기간 동안의 노동자, 군인평의회 그리고 서구 유럽 대부분의 산업국가에서의 노동자평의회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평의회는 전후 제3세계를 중심으로 전개된 생산에 대한 노동자 직접통제 운동까지도 포함한다. 노동자평의회 운동의 정치적 조직형태는 지배층이 권력을 실행하는 직접적 영역이거나, 권력의 유지에 도움을 주는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법률적 조직과 제도에 대항하면서, 급진적인 직접민주주의 조직형태를 지향하였다.2)
노동자 소비에트는 실천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러시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소비에트 형태를 드러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이 고조된 상황에서 빼쩨르부르그에서 결성된 소비에트는 이제까지 노동운동 과정에서 형성되었던 노동자 조직과는 다른 유례없는 조직이었다. 노동자만의 단순한 파업위원회와 달리 노동자 대표 평의회는 대중파업을 통해 혁명적 투쟁기구로 발전해나갔다. 러시아 혁명 세력은 노동자평의회의 발생과 활동 전 과정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노동자평의회는 러시아사회민주당의 지배를 받는 혁명 기구는 아니었다.3) 1905년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대표 소비에트의 <혁명성>과 <민주적 권력 확보>라는 두 요소는 소비에트를 이전의 노동자조직과 구별하게 하는 중요한 특성이다.
1902년 레닌은「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운동의 자연발생성과 경제주의를 비판했다. 레닌은 1898년 미완의 당 창건 이후 산개한 지역운동가를 하나의 혁명가조직으로 결집시켜 내야 하는 조직적 투쟁의 길로 나섰다. 당시 혁명가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던 인민주의는 합법적 맑스주의의 가면 뒤에 “경제주의”라는 형태로 부활하여, 급격히 성장하고 있던 대중 운동 속에 잠재하고 있었다. 자생적으로 폭발한 대중적 노동운동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 계급투쟁으로 변환시키는 것, 노동자계급이 자생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노동조합 의식일 뿐이며, 사회주의적 의식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으로부터 노동운동 속에 전달될 수 있을 뿐이었다. 자생성에 대한 의식성의 우위였다.
그러나 1905년 빼쩨부르크에서 결성된 소비에트를 보고 난 이후 레닌은 “노동자들의 대표체인 소비에트를 선택할 것인가 당을 선택할 것인가? 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질문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확실한 해답은 노동자들의 대표체인 소비에트와 당 둘 모두 필요하다”4)고 주장한다. 즉 볼셰비키 당은 ‘소비에트 내부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권력 장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며, 이를 요약해주는 슬로건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이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가 의미하는 바는 정부의 행정, 관료기구나 생산경영에 대중과 선출된 대표들의 직접 참여를 의미하는 것이다. 레닌의 이론적 저작「국가와 혁명」에서 ‘당의 지도적 역할’ 이라는 말이 한 번도 안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10월 혁명은 러시아 소비에트를 투쟁적 혁명 기구에서 새로운 국가권력의 지주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1918년에서 1920년까지 소비에트의 정치적 발전 과정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볼셰비키 이외의 정당들의 점진적 제거, 그리고 중앙집권화와 관료화, 당지도자들의 독재였다. 특히 1920년에서 1921년 볼셰비키 체제는 파국적 경제 상황으로 심각한 내부위기를 맞이하였다. 볼셰비키의 당 독재의 수립, 내전, 경제적 혼란 등은 1917년 혁명 중에 달성했던 진정한 민주주의의 기초를 파괴했다. 소비에트가 장식적인 기구로 변화한 원인을 볼셰비키 당 지도자인 콜론타이(Kollontai)는 명확히 지적했다. 콜론타이는 “우리는 대중들 스스로가 일을 처리하도록 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그들의 창조적 재능의 허용을 두려워하고 비판을 무서워한다. 우리는 더 이상 대중을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 관료 정치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독창성은 사라지고 행동의 욕구는 사멸하였다.” 이것은 룩셈부르크가 러시아의 당 독재 위험을 경고한 것과 같다.
1921년 3월 크론슈타트 섬에서 수병, 부두노동자에 의해 봉기가 일어났다. 이들의 슬로건은 ‘모든 권력을 당에게로’가 아니라 ‘소비에트에게’로였다. 크론슈타트 노동자들은 1917년 10월 혁명을 지지했다. 그들은 명백히 좌파였다. 밑으로부터 노동자의 좀더 나은 소비에트에 대한 열망, ‘영구혁명’을 진압한 것은 역설적으로 크론슈타트 유혈충돌의 책임자인 트로츠키였다.5) 크론슈타트 봉기6) 이후 레닌은 NEP정책도입을 선언하면서, 당 기구에 국가적인 권한을 강하게 부여했다. 10차 전당대회에서 레닌은 당내 분파해산(노동자반대파, 민주적 중앙주의자)과 “당 결정에 어떠한 불복종이라도 생길 땐 당에서 무조건 추방하기로 한다.”를 결정했다.7) 이로써 1917년 레닌이「국가와 혁명」에서 언급한 노동자민주주의는 종지부를 찍었다. 어쩌면 러시아혁명의 비극적인 실패는 예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레닌과 볼셰비키 당은 소비에트, 공장위원회, 노동조합의 관계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 전략에서의 각각의 역할에 대한 이론을 도출하지 않았다. 이는 레닌의 유사 자코뱅주의로부터 기인한다. 제 1차 대전 동안 독일 산업의 트러스트에 깊은 인상을 받은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국가자본주의 단계’가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대부분의 사회민주주의자(개량적이건 혁명적이건 간에)처럼 조직효율이 경제 집중화의 정도에 직접 비례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자는 ‘스스로의 국가’에 대항하는 독립적인 노동조합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노동자가 국가를 관리하는 한 테일러주의의 변형된 형태, 혹은 성과급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가 생존하고 발전하는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레닌에게 ‘노동자통제’는 노동자 국가의 통제였기 때문에 국가자본주의체제하에서 노동자통제는 국가로부터 임명된 노동자 대표가 자본가나 전문경영인에 대해서 감독권을 갖는 것이지 결코 경영에 대한 노동자의 직접적인 개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공장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통제를 생산력 증진이나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의 도구로만 협소하게 이해한 레닌과 볼셰비키는 노동조합을 국가행정기구로 통합시켰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혁명 후 혁명사회의 기초 기관으로 자리 잡아야 할 노동자통제를 당과 국가에 의해 억압하고 소멸시켰다. 이는 대량생산체제와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레닌의 집착이 불러온 근본적 한계였다.8)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국가자본주의 도입’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의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3. 독일혁명과 독일 좌익공산주의: 브레멘좌파와 스파르타쿠스단
1917년 러시아 혁명은 독일 급진좌파에게 영향을 미쳤다. 1918년 독일에서의 혁명의 발발은 세계혁명의 전망을 지니고 있었다. 1918-19년의 독일혁명의 가장 큰 특징은 레테(평의회)운동이었다. 혁명의 도화선이 된 키일(Kiel)의 수병반란은 1918년 11월 키일시 노동자 병사 평의회 건설로 이어졌고 레테(평의회)가 키일시의 전권을 장악하면서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 후 전개된 혁명의 모든 경과는 레테(평의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 독일혁명의 정치적 과정은 노동자의 대중행동과 그것의 조직적 형태인 레테다. 그것은 정당이나 노조에 의해 계획되거나 지도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주도한 것이었다. 혁명이 진행되던 12월과 1월 동안 베를린 노동자위원회는 공장평의회의 과업에 대한 프로그램을 완성하였다. 이 프로그램에는 작업장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문제의 의사결정에서 동등한 권리와 작업장 단위에서의 중역과 감사위원회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사회화의 관철은……노동자위원회의 공동작업이 필수적”이라는 조항이 강조되었다. 이 새로운 방향은 베를린 평의회 총회에서뿐만 아니라 사민당이 다수로 지배하던 인민위원회에서도 통과되었다. 이 당시 사민당에 속한 많은 평의회가 독립사회당과 함께 투쟁하였고 눈에 뛰게 급진화 되었다. 이러한 발전이 있었던 것은 평의회 내부의 노동자 자치조직 속에서 이루어진 노동자의 학습과정의 결과였다.9)
1) 권력을 레테(평의회)로!
혁명 당시 레테운동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 (Rosa Luxemburg)가 이끄는 스파르타쿠스단의 입장은 ‘모든 권력을 레테로’라는 구호로 요약된다. 독일에서 혁명의 투쟁기구로서 레테의 건설을 처음으로 요구한 것은 스파르타쿠스단이었다. 룩셈부르크는 혁명을 이끌어가는 근본적인 힘인 대중의 혁명적 계급의식은 결코 이론이나 선진적인 당에 의해서 매개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 속에서 기존 질서와의 계속적인 투쟁 속에서 획득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와 같은 관점은 정치적 계급의식이란 노동자 스스로가 획득할 수 없고, 오직 외부로부터, 즉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전위에 의해 외부로부터 노동자에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레닌의 명제와 상충된다. 룩셈부르크는 “역사적으로 볼 때 혁명운동이 범한 오류는 현명한 중앙위원회의 무오류보다 훨씬 더 풍요롭다.”며 준비되지 않은 레닌의 초중앙집권주의는 노동운동의 족쇄가 된다고 비판한다.
룩셈부르크가 주도한 스파르타쿠스단의 입장은 당 자체 조직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만일 스파르타쿠스단이 혁명에 있어서의 당의 지도적 역할을 강조하는 입장을 가졌다면, 스스로 잘 조직된 체계를 갖춘 정당으로의 발전을 꾀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의 자발성과 혁명성에 대한 신뢰에 근거해 당의 역할을 주로 선전활동에만 한정했다. 스파르타쿠스단은 그 자신의 조직을 엄격한 규율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독자적 조직체가 아닌 독립사민당 내의 느슨한 형태의 ‘선전동맹체’ 정도로 상정하였던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중앙집권적 조직은 필연적으로 대중의 자발성과 창조성을 말살하고 운동의 발전을 가로막는 보수적 경향이 내재해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 브레멘 좌파의 이론가 판네쿡은 볼셰비즘과 러시아혁명의 열광적 지지자였다. 판네쿡은 러시아 혁명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혁명발전을 위한 새로운 평의회기구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았다. 평의회는 공격적 혁명과정의 전술적 도구일 뿐 아니라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 재조직을 위한 맹아적 틀이라고 보았다. 1917년 브레멘 좌파의 이론가로서 판네쿡은 독일국제사회주의(ISD)의 전략적 관점을 정교화 하는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ISD는 독일혁명기간 동안 브레멘에서 공장전투파를 통해 대중파업과 함께 노동자평의회 건설에 집중했다. 아울러 브레멘 좌파는 새로운 조직을 추구하는데 당과 노조의 기능을 통합하는 새로운 ‘단일조직’을 설립했다. 새로운 단일조직은 지방공장, 지역 및 업종의 분권화된 자발적인 망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공격적인 활동을 벌이던 ISD는 그 이름을 <독일국제공산주의자> (Internationale Kommunisten Deutschlands IKD)로 바꿨다. IKD그룹은 1차대전이 발발한 이후 사민당과 노조의 전쟁정책에 강력히 발발하면서 좌파들만의 독자적인 정당을 추진한다. 반면 로자가 이끄는 스파르타쿠스단은 독자정당 건설이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독립사민당내에서 개혁활동을 중점적으로 진행했다.
2) 평의회를 둘러싼 논쟁과 분화
당시 독일의 주요 정치세력은 사민당과 독립사민당 그리고 스파르타쿠스단, 브레멘 좌파라고 할 수 있다. 사민당과 독립사민당의 연립정부 구성이란 안정 속에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국민의회 소집을 뜻한다. 여기서 레테(평의회)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 혁명 발발 직후 카우츠키가 이끄는 독립사민당 지도부는 레테(평의회)체제냐 국민의회체제냐 사이에서, ‘국민의회와 레테체제’ 입장을 취한다. 국민의회 소집은 곧 부르주와 민주주의의 승리를 뜻한다. 1918년 12월에 열린 노동자병사 레테(평의회) 전국총회는 국민의회 결정을 내린다.
스파르타쿠스단은 독립사민당 내에서 패배하고 당을 혁명적으로 개혁하는 데에 한계를 느낀다. 스파르타쿠스단은 독립사민당을 탈퇴한다. 현장을 중심으로 공격적인 평의회 활동을 전개한 IKD그룹은 급진좌파의 통합을 요구받고 있었다. IKD그룹의 제안으로 스파르타쿠스단은 혁명적 노조그룹과의 통합 대신에 IKD그룹과 함께 1918년 12월30일 독일공산당을 창당한다. 독일공산당의 강령은 노동계급의 규칙을 확립하고 생산의 사회화를 향한 첫 번째 단계를 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일련의 실천적 조치를 취하고 있다.
첫째, 경찰과 군 간부의 무장해제, 노동자 평의회에 의한 모든 무기와 화약의 접수, 노동자 군대의 창설.
둘째, 군대 통솔구조의 해소, 군사평의회의 일반화.
셋째, 혁명법정의 창설.
넷째, 전국의 노동자 평의회와 병사 평의회에 의해 선출된 노동자 및 병사 평의회 중앙의회 설립, 모든 옛 시의회 및 국회의 해산.
다섯째, 6시간으로 노동시간 단축.
여섯째, 모든 인민의 의식주를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의 몰수.
일곱째, 토지, 은행, 광산, 그리고 주요 산업 및 상점 기업의 몰수.
여덟째, 공장과 기타 작업장의 관리를 과업으로 하는 기업평의회 건설이다.
그러나 독일공산당은 창당직후 내부논쟁에 휩싸였다. 스파르타쿠스단은 독일공산당이 국민의회 선거에 참여할 것을 주장한다. 말로만 투쟁하는 것은 아니라, 국민의회에 들어가 부르주아지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 요지다. 이에 대해 급진좌파 대표로 나온 오토륄레 (Otto Rühle)는 국민의회 연단 대신에 가두연단에서 싸울 것을 주장하면서, 혁명세력은 14일 이내에 곧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고 낙관적인 혁명 전략을 피력했다. 국민의회를 둘러싼 당 대회의 격렬한 논란 끝에 62:23으로 선거불참이 결정됐다. 이 결정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와 노동자평의회에 대한 판단차이가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의회선거 참여를 주장한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스파르타쿠스단의 한계가 나타난 것이다. 창당대회 당 조직 문제는 중앙집권적 방식이 아니라 연방제적 원칙을 결정했다.
이후 독일공산당은 베를린 1월 봉기, 루르 광산지역, 중부지역 노동자총파업과 사회화운동 등 혁명을 진전시키려는 시도를 감행하다 정부군에 의해 무력진압 되었다. 1월 봉기기간에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암살되고, 이후 독일공산당의 조직세력은 현저히 약화됐다.
새로운 당 지도부는 당내 급진좌파를 겨냥한 내부투쟁에 돌입한다. 독일공산당은 2차 전당대회에 ‘공산주의의 근본원칙과 전술에 관한 기본원칙’을 채택하면서 독일공산당을 혁명투쟁의 지도자로 규정하고, 당의 중앙집권적 조직형태를 결정한다. 이른바 독일공산당의 ‘볼셰비키화’이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독일공산당의 활동방침을 지지한다. 독일공산당과 노동조합은 의회주의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틀 내에서의 계급투쟁에 적합한 노동운동의 조직형태로 자리매김 된다.10)
1919년 말 의회주의와 노동조합에 대한 거부를 이유로 독일공산당으로부터 축출된, 판네쿡, 호르터, 오토륄레 등 독일 ‘좌익’공산주의자는 (투쟁정신과 영향력에서 자신들의 ‘관료적’ 라이벌을 순식간에 넘어선) 새로운 당, 독일 공산주의노동자당(KAPD)을 결성했다. 간단하게나마 KAPD강령을 검토하면 맑스주의의 명료성을 볼 수 있다.
첫째, 무정부주의에 반대하면서, 강령은 세계자본주의의 객관적인 역사적 환경에 기초하고 있다.
둘째, 무정부주의에 반대하면서, 강령은 러시아혁명과의 연대와 세계적 확장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셋째, 의회주의와 노동조합에 대한 반대는 도덕주의와 형식에의 집착이 아니라 의회와 노조가 계급의식에 봉사하는 조건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넷째, 공장조직과 노동자평의회의 주창은 소수의 혁명가가 꿈꾸는 가공적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계급운동의 구체적 조직적 표현이다.
다섯째, 반(反)당의 입장과 달리, 공산주의 투쟁의 핵으로서 당의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
여섯째, 강령은 PT독재라는 맑스주의 개념을 방어하고 있다.
독일노동자총연합 (AAUD)과 함께 독일공산당을 창당한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독일 노동계급 내에서, 특히 루르지방과 브레멘에서 중요한 위치를 획득했다. 당원은 20만 명이나 되었다.
1920년 초 우익의 카프반란이 시도되었을 때, 좌익공산주의 활동가는 루르지방을 단시간에 점령한 적군 사이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호르터는 독일노동자총연합(AAUD)과 함께 본격적인 노동자평의회운동을 전개한다. 호르터는 당의 주요 목표는 “평의회 사고”를 선전하고, 평의회가 나타나면 당도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러시아를 방문한 오토 뢸레는 소련사회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소련사회를 국가자본주의”로 파악하고, 이후 “노동자평의회 외에 모든 정치조직은 부르주아기구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초평의회 지상주의자로 흘렀다.
오토 륄레는 당과 독일노동자총연합의 단일조직을 주장하면서 독일노동자총연합-단일조직 (AAUD-E)를 창설한다. 오토 륄레는 「혁명은 당의 과업이 아니다」라는 글에서, “독일공산당KPD은 정치적 당이 되었다. 독일공산당은 의회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독일공산당은 의회를 파괴하려고 하지 않았다. 독일공산당은 원하지도 않았고, 하려고도 않았다. 독일공산당은 의회 내에서 “긍정적인 사업”만 하려고 한 것이다. 이것이 독일공산당의 생존방식이었다. 혁명적 전투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공장조직인 현장에서 함께 하여야 하는 이유가 있다. 오토 륄레는 일반노조로 재조직된 혁명적인 공장조직이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며, 혁명적 평의회와 혁명적인 평의회 정부를 주장하였다.
4. 코민테른, 레닌과 좌익공산주의 전투
판네쿡뿐만 아니라 유럽 공산주의 운동의 좌파들은 대부분 열렬한 레닌주의자였고 볼셰비즘과 러시아 혁명의 열광적 지원자였다. 그런데 그들은 볼셰비키의 강점을 조직구조에서 보지 않고 공격적 전투성과 맑스주의 원칙의 확고한 헌신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1915년 찜머발트 좌파에서 드러난 레닌과 판네쿡의 차이는 한 마디로 국제주의에 대한 인식에 있다고 볼 수 있다. 1919년 3월 코민테른이 결성되고 서유럽의 공격적 맑스주의자들은 암스테르담 서기국을 만든다. 판네쿡과 네덜란드, 브레멘(독일) 좌파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건설에 열광적 주창자였지만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승리로 인해 코민테른은 러시아 주도하에 결성되었다고 보았다.
1920년 2월 3-6일 암스테르담 국제대회에서는 암스테르담 서기국을 서유럽 인터내셔널로서의 역할로 규정하고 의회주의,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분명한 비판과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조직으로서 노동자평의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은 코민테른 지도부와 네덜란드 좌파 사이의 전망차이의 첫 번째 표시였다. 암스테르담 서기국은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의 입장을 채택했고 1920년 4월 30일 모스크바 지도부는 암스테르담 서기국을 폐쇄하고 베를린 서기에게 할당했다고 방송했다.
1) 독일좌익공산주의
호르터는『레닌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써서, 제3인터내셔널은 제2인터내셔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동일한 종류의 기회주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의회와 노조 참여를 통해 계급의식을 주입해야 한다는 레닌의 강조에 반대하여, 호르터는 평의회, 공장조직을 기반으로 자본주의 국가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의식을 형성하는 좌익 공산주의 전술을 거듭 주장했다. 1920년 3월 판네쿡은 「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을 좌익공산주의의 교과서로 제출했다.11) 판네쿡은 여기서 “의회의 활동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민족으로 분할되고, 진정한 국제주의적 개입이 불가능해지며 국제자본에 대항하는 대중 행동에 있어서 민족분할로 나아간다. 제국주의 시대에 노동조합은 이전의 부르주아 국가와 같이 동일한 발전경향을 갖는 거대한 단체가 되었다. 그들 속에는 관료 계급이 생기고, 그 관료주의는 자금, 언론, 경영 등 모든 조직의 자원을 통제한다. 혁명당의 기능은 앞장서서 명확한 이해를 선전하고 대중이 올바른 방식으로 인식하는 계획, 슬로건을 제시해야한다.”고 지적한다.
20세기 초, 소비에트가 이름만 남았다는 것과 코민테른이 러시아의 대외 정책에 종속된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 독일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마침내 볼세비키와의 관계를 끊었다. 유럽 내에서, 1923년 이후 계급 갈등의 상대적 안정화는 좌익공산주의 경향 추종자들의 수를 감소시켰다. 고립되면서, 남은 독일 좌익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정치적 관점을 천천히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정립하면서, 그들은 ‘유럽의 거대한 부르주아혁명’의 최후의 산물로서 볼세비키 체제를 보기 시작했다.
2) 이탈리아좌익공산주의
이탈리아공산당 내의 진정한 좌파는 존재하지 않았다. 1910년까지 비타협적 맑스주의 흐름은 발전하지 못했다. 이탈리아공산당 내 우파와 중앙파에 대항한 보르디가(Bordiga)그룹이 있었다. 보르디가는 인터내셔널에 대한 점증하는 러시아의 지배에 대해 비판하고, 러시아 볼셰비키 경험이 서구에 기계적으로 이전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코민테른 2차 대회 마지막에 의회주의, 노조운동, 그리고 집권적 정당 조직을 지지하는 결의안에 동의했다. 그러난 비타협적 맑스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이탈리아의 보르디가 그룹의 활동은 당의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① 반의회주의 ② 혁명적 쌩디칼리즘 반대 ③ 개량주의 반대 ④ 전쟁과 군사주의 반대를 원칙으로 삼았다. 보르디가는 핵심문제를 당이라고 보았다. 보르디가도 평의회의 지지자였지만 평의회가 “공산주의당 지역부분” 기반위에 형성될 때 혁명적 내용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보르디가는 대중정당을 건설하는 것을 비난하고 공산주의당의 집중화를 부정하는 레닌주의적 공장세포 체계를 비난한다. 공장세포 체계는 내적인 삶을 불구화시키고 노동자를 공장이라는 좁은 경계 속에 가둔다고 비판한다.
첫째, 세포에 의한 지역부분의 대체는 단일한 지도력을 가진 능동적 집합체로서의 혁명당의 유기적 삶을 말살시킨다.
둘째, 볼셰비키주의화는 특수주의와 개인주의의 편을 든다. 당은 전문영역에 부속된 개별 노동자의 합이 되었다. 이 결과 당의 통일을 깨뜨리는 조합주의와 노동자주의가 되었다.
셋째, 당에서의 “지식분자”의 역할을 제한하는 대신, 세포체계는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노동자는 특정한 경제문제만 토론하게 만들고 인텔리가 권위를 독점한다.
넷째, 노동계급 출신의 지도자는 당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보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기회주의의 인텔리보다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영향력에 의해 흡수되기 쉽기 때문이다. 보르디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국가기구화 되지 않는 당 독재’를 통하여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소비에트는 “본질적으로 혁명기관”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좌파는 러시아의 패배의 잿더미 속에 드러난 체제의 본질을 토론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러시아 10월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혁명이었다. 둘째, 세계자본주의가 쇠퇴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부르주아혁명은 그 어떤 부분에서나 의제가 아니었다. 셋째, 일국사회주의 개념을 총체적으로 거부하며,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에 어떤 타협도 없었다.
5. 결론에 대신하여
이 글은 레닌과 좌익공산주의자들의 논쟁을 살펴봄으로써 한국사회의 주류좌파를 이루고 있는 ‘진보정당-산별노조‘를 넘어서기 위한 시사점을 얻고자 하며, 8-90년대, 아니 지금도, 한국사회의 이론적 전통으로서 뿌리 깊게 사고된, ‘맑스-레닌주의’ (사실은 스탈린주의) 공식 전통에 근거한 활동을 넘어서기 위한 모색이다.
나는 이 글에서 레닌의 1902년「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보여준, 외부로부터 계급의식 도입을 통한 당 이론이 1905년 소비에트 투쟁 경험 속에서 변화했다고 본다. 즉 당은 계급의 일부이며, 대중의 계급투쟁 속에서 변화된 것이다. 당은 대중의 혁명적 투쟁기구로 나타난 평의회 내에 활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 이후 레닌은 당과 새로운 국가기구 사이에 관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관료화와 프롤레타리아 반혁명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국가의 위험성을 보지 못했다. 레닌은 내란의 위기가 가속화되고, 도시에서 경제가 완전히 붕괴되자, 당기구의 중앙집권화를 가속화시켰다. 아울러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정의는 노동대중에서 나온 계급적 성분보다 혁명에 대한 헌신성, 당성에 의해 내려질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혁명 이후 레닌의 당론은 결국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당의 독재로 변질됐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룩셈부르크가 지적한 대중의 자발성에 기초한 투쟁에 근거하는 당의 역할은 유의미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독일 좌익공산주의자와의 논쟁에서 드러나듯이, 혁명적 대중투쟁 기관으로서, 사회주의 사회의 재조직화 기구인 평의회에 대한 동요를 보였다. 이것은 룩셈부르크가 독일공산당내 논쟁 지형에서, 자신이 그렇게 반대했던 국민의회 개입을 선택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1905년과 1917년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쇠퇴하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시기에 자본주의 질서의 전복을 위한 새로운 조직인 노동자평의회를 창조했다. 독일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의회의 이용불가능성, 사회민주주의의 배반과 반동적 본질,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국가의 옹호자이자 제국주의 전쟁의 신병모집관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새로운 시기의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소비에트와 동일한 원칙에 근거한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 공장안에 갇힌 노동자 투쟁을 강조함으로써, 정치조직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반면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통일전선, 민족해방 투쟁을 지지하는 코민테른 입장에 반대하고 국제주의 원칙에 입각한 투쟁을 전개했다.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 그룹은 당을 계급의식의 능동적 인자이자 동시에 계급 전체 내에서의 의식 발전의 표현으로서 파악했다.
계급투쟁의 역사적 조건의 변화는 계급조직의 형태에도 상당한 변화를 초래한다. 통합된 세계자본주의 체제, 자본의 세계화에 따른 ‘위기의 세계화’는 노동계급운동을 전지구적 투쟁이라는 새로운 지평으로 끌어올리고 있고 노동계급의 국제주의 관점은 더욱 요구되고 있다. 맑스주의는 세계노동자의 혁명적 연대를 통해서 자본주의 전복을 의도한다. 따라서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독일혁명 (1918-23) 중심으로 한, 레닌과 유럽 맑스주의 내부논쟁을 되새기는 것은, 우리 사회 혁명적 맑스주의 실천운동 복원과도 연관돼 있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조합 운동은 1997년 역사적인 총파업투쟁 이후 점차 자본과 국가기구에 포섭되고 있다. 진보정당-산별노조의 낡은 구도를 벗어나 이제 노동자평의회, 혁명당 문제가 새로이 제기되어야 한다. 당과 평의회 관계는 지속적으로 연구해야 할 주제다. 여기서는 앞에서의 논쟁에서 시사점을 받아 한국 사회에서의 당과 평의회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정리해본다.
첫째, 부르주아당과 달리 프롤레타리아 당은 국가를 접수하거나 국가 운영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 원칙은 전체로서의 계급이 이행국가를 통하여 그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계급이 당 없이 존재한 시기도 있었지만 계급 없는 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둘째, 모든 노동자에게 열려있는 대중조직과 정치조직인 당 사이에는 진화의 차이가 있다. 자본주의 상승기에는 당면 경제이해를 방어함으로써 영구조직인 노동조합이 존재한다. 하지만 당은 그렇지 않다. 당의 존재는 계급투쟁의 상태에 의존하는데, 상승기에는 나타나고 후퇴기에 사라진다. 자본주의 쇠퇴기에는 영구조직인 노조가 프롤레타리아 내용을 상실하고 국가기구의 부분이 된다. 그리하여 이때는 대중파업, 와일드캣 파업이 일어난다.
셋째, 노동자평의회에 의한 투쟁이 절정에 이르기 전에 당은 나타난다. 왜냐하면 당의 존재는 부상하는 계급투쟁의 시기에 의해 조건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의 역사적 진화와 함께 당 기능은 변한다.
넷째, 당은 계급의식의 유일한 담지자라고 주장할 수 없다. 계급의식은 전체로서의 계급 속에 내재해 있다. 당의 활동은 계급의 방향을 제시하고 투쟁에 비료를 주는 것이지, 계급대신에 결정을 하는 지도자가 아니다. 계급에게 여러 개의 일관된 혁명경향이 존재하는 것처럼 강령 틀 내에 차이와 경향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공산당은 일괴암적 관념을 거부한다. 당은 투쟁이 제기하는 모든 문제에 구체적으로 답하는 처방을 낼 수 없다. 그것은 계급의 기술적 행정기관도 아니고 집행기관도 아니다. 당의 역할은 봉기의 “참모부”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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