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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
15. 변화됨(2)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절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했는데 이것은 “실제적인 봉사니라”는 말이다.
제사장들은 봉사는 봉사인데 양을 잡아서 드리는 봉사다. 그러니까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린다는
말은 양 대신에 너희 자신을 드리라는 말이다. 신약에 오면 모든 것이 이렇게 실제화된다. 구약에 있었던 형식이 신약에 오면 실제가 된다. 그러니까 양을 드렸던
것의 실제는 나를 드렸던 것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의식에 매이다 보면 양만 드리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오래 가니까 굳어져서 양을 드리는 것이 봉사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고 제물을 드리는 것의 의미는 내 몸을 드리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것을 의미하기 위해서 “이 제물은 나다.”라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
제물에 안수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좋은 제물만 드리면 된다는 생각 때문에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제사를 해석할
때도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가인의 제물은 제물이 나빠서 하나님이 안 받는 것이다. 아벨의 제물은 제물이 맞기 때문에 받는 것이라고 대부분이 이렇게 해석한다. 그것이
아니고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 제물은 받으시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제물과 그 사람을
하나로 보지 분리해서 보지 않는다. 그러니까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는 언젠가는 양과 제물이
하나된 제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예수께서 제물이 되었다.”그러니까 옛날 제물은 필요 없다는 이런 말씀이 나오게 된 것이다. 오늘은 그런 맥락에서 1절은 거룩한 한 제사라고 하는 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고 영적 예배니라는 것은 합리적인 실제적인 봉사라고 하는 것이 맞다. 오늘 그렇게
하려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에게 선하시고(유익함)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이런 말씀이다.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은 우리들의 합당한 봉사라고 하였다(1). 성막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위한 하나의 건축물이다. 그런데 그 실제는 제물을 들리는 제사장들의 봉사로 나타난다.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 이것이 우리의 실제적인 봉사다. 우리가 몸을 어떻게 드릴 것인가? 그런데 성막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하나의 건축물이다. 그런데 건축물만 있다고 해서 봉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 제물을 드리는 것이 실제 내용이다. 실제는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들의 봉사다. 그런데 제물이 아니고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들의 봉사, 이것이 실제적인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왔을 때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내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실제적인 봉사라는 말이다. 왜 우리 몸을
봉사로 드려야 하는가? 하는 얘기를 오늘 할 것이다.
제사장들의
봉사는 제물을 드리는 일이지만 다른 면으로는 제물 자체로서 성막의 실제가 된다. 제물과 드리는 자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의 봉사가 없다면 성막은 형식은 있지만 생명이 없는 건물에 불과
할 것이다.
제사장들의 봉사는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다른 면으로는 제물 자체로서 성막의 실제가 된다. 제물 아닌 것으로 제사장이 일하는 것은 아무리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 있었으니까 제사장의 실제는 바로 제물인 것이다. 제물과
드리는 자는 하나다. 이것이 창세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의 봉사가 없다면 성막은 생명이 없는 건물에 불과할 것이다.
제사장의
봉사는 몸을 드림으로 시작 되는데 이 를 위해서는 먼저 이 세대로부터 구별 되어야 하고,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확증해야 한다.
우리고 마찬가지다. 물질은 있는데 사람은 없다. 사람은
있는데 물질은 없다. 이러면 빈껍데기가 된다. 제사장의 봉사는
몸을 드림으로써 시작되는데 이를 위해서 먼저 이 세대로부터 구별되어야 하고 제사장이 되는 사람은 구별되어야 한다.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한다는 말이다.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서 확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별한다.”고 말했는데 이 말속에는 확증한다는 같이 있다. 그러니까 분별해서
그것을 확실하게 증거해야 한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 가를 확실하게 증거해야 한다는 말이다.
교리라는 것으로 예배를 드리면 서로 자기가 옳다고 한다. 정작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는 모르고
내 교리가 옳으니 네 교리가 옳으니, 아니면 내가 드리는 예배 방식이 옳으니 네가 드리는 예배방식이
옳으니 하면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것은 허무한 것이다. 허공을
치는 것이니까 그렇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분별해서 확증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들으면 어떻게 확증할 것인가라는 막막한 것이 있다.
1. 이 시대를 본받지 않음
몸을 드리려면
이 시대로부터 구별 되어야 한다. 제사장의 이마에는 여호와 성결(구별)이라는 표가 있다. 그는 하나님을 봉사하기 위해서 구별 되었다는 것이다.
첫째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몸을 드리려면 이 세대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냥 마음만
드리면 구별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있으면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을 지키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던 이유가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믿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안식일에 일을 안 해야 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핍박하는 제왕들이 오면 그날 일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면
안 나가게 되는데 그러면 드러나게 된다. 2차 대전 때 유태인을 구별할 때 할례를 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고 구별했다. 옷을 벗겨보면 다 아니까 구별되었다. 그
시대에 할례를 한다는 것은 죽음을 걸고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은 구별되어야 한다. 이런 구별이 없이는 제사장의 봉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사장의 머리에 관을 쓰는데 거기에 “여호와 성결”이라는 띠를 두른다. 이것은 ‘이 사람은 여호와께
구별되었다.’는 그 말이다. 군대에서는 모자에 계급장을 단다. 그러면 이 사람은 계급이 이렇다는 것과 똑같다. 해군이다 육군이다
공군이다는 표가 나게 된다.
그러니까 제사장들도 이마에 여호와 성결이라는 띠를 두른다. 그는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구별되었다는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구별이다는 것이다. 왜 구별인가? 잘 생각해보면 구별을 안 하고도 섬길 수 있지 않나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두
이 시대를 따라서 살던 사람들이다. 가인의 때, 네피림의
때 바벨의 때, 안에서 몸을 드리고 살았던 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전에 너희는 죄의 병기로 사단에게 드렸다고 했다(롬6;13참).
롬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 모두 이 세대를 따라서 살던 사람들이다. 어떤 시대를 살던 사람들이다. 그 말은 가인의 시대에는 가인을 따라서 살던 사람들이고 네피림의 때는 네피림의 때를, 바벨의 때는 바벨의 때를 살던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안에서
몸을 드리고 살았 던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냥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누가 네피림의 때를 만드냐는 것이다.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네피림의
때를 만드는 것이다. 사람이 없으면 네피림의 때라는 것은 없다. 아무도
네피림으로 살지 않으면 네피림의 시대, 네피림의 때라는 것은 없다. 그런데
다 네피림으로 살기 때문에 네피림의 때가 되는 것이다. 바벨도 모든 사람이 바벨로 살지 않는다면 바벨의
때, 바벨의 시대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다 바벨에
들어가기 때문에 바벨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있는 것이 하나의 시대를 만들어간다.
이것을 바울은 “전에 너희는
죄의 병기로 사탄에게 드렸었는데 이제는 의의병기로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같은 세상을 살고 있어도 세계는 여러 개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세대를 만들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어떤 시대를 만들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 사람들이 만드는 시대가 있다. 지금 나이가 든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 시대와 잘 맞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그 시대에 맞다. 그 시대가 맞는 것이 아니고 그 시대를 만들고 있다. 그러니까 그 시대에 그 젊은이들이 없이는 그 시대가 안 만들어진다.
옛날에 어디 공연장에 구경하러 갔다가 공기통에 빠져 죽은 사람이 있었냐는 것이다. 없었다. 그런데 이 시대가 그런 시대가 되어서 조금이라도 높은 데서 보고 싶어서 빠지게 된 것이다.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자기들이 시대를 만들고 또
시대가 자기들을 만들고 있다. 이렇게 사람은 시대와 같이 살면 시대 따로 사람 따로가 아니고 사람이
곧 시대인 것이다. 우리의 삶이 곧 시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러면 공동구에 올라가지 않으려면 그 시대를 본받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 가서 키는
작고 안 보이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높은데 올라가야 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그 시대를 본받고서는 다른 시대를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죄의 병기로 드려졌던 사람들인데 이제는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봉사하려면 전에 드렸던 곳에서 나와야 한다. 한 몸을 두 곳에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봉사는 몸을 드림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와 같이 교회생활도 몸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전에 드렸던 곳으로부터 분별 되어야 한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구별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내 몸이 어디에 있냐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보통 일이 아니다. 몸은 거기 에 있으면서 ‘나는 이런 사람이다.’ 이렇게 할 수 없다. 사람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봉사하려면 전에 드렸던
곳에서 나와야 한다. 거기서 나와야 하나님께 봉사하는 시대를 만들지 거기에 그냥 있으면서는 하나님께
봉사하는 시대를 만들 수 없다.
오늘 우리가 가령 가을이고 하니까 단풍구경을 가는 사람이 많은데 단풍구경은 마음이 가는 것이 아니고 몸이 가야 하는 것이다. 몸이 단풍구경을 가면 교회에 올 수 없는 것이다. 몸은 그쪽에 있고
마음은 이쪽에 있을 수 없다. 몸이 가 있는 곳이 하나의 시대가 된다.
그러니까 교회에 오면 교회시대가 되고 팔공산에 가면 단풍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내
몸이 있는 곳에 따라서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몸이 어디에 있냐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그러니까 사람은 한 몸을 두 곳에 드릴 수 없다. 아무리 두 곳에
드리고 싶어도 몸은 두 곳에 드릴 수 없다.
봉사는 몸을 드림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와 같이 교회생활도 몸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전에 드렸던
곳으로부터 분별되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에 올 수 있다. 전에
드렸던 그 자리 그대로 있으면서 교회를 올 수 없다. 왜냐하면 전에 드렸던 그 곳에서는 오늘 단풍놀이를
가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멤버들이 다 단풍놀이를 가니까 나 혼자 안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 자리에 있어서는 교회를 올 수 없다. 내 몸은
그리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 그리 간다면 교회 모임은 안 된다. 그러니까
교회생활은 몸을 드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니까 전에 드렸던 곳으로부터 구별되어야 교회를 오는
것이 자유롭지 전에 그래도 있다가 교회에 오려면 불편해서 결국 안 된다. ‘교회를 날마다 가야 되나
다음에 가도 되지. 오늘 단풍이 마지막인데 가야지.’하면
어쩔 수 없이 그냥 끌려가는 것이다. 그 물결을 따라 가지 않을 수 없다.
전에 드렸던 곳에 내가 좋아서 있는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내가 거기에 드려진 사람이라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거기 드렸던 곳에 그냥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거기서
분별되어 나와야 내가 교회를 올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올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오고 싶기는 한 데 바빠서 못 오겠다고 한다. 어디에 바쁜가? 그 시대에 바쁘다. 거기에 바쁘다.
그 시대에 속하지 않았으면 바쁠 일이 하나도 없다. 주일날이면 당연히 교회로 갈 것인데
그 시대에 속해 있기 때문에 바쁘다. 도저히 틈을 낼 수가 없다. 틈내서
교회를 오려고 하면 못 오는 것이다. 교회 오는 것은 전적으로 와야지 틈나면 가야겠다고 해서 교회 오기는
안 된다. 그런 사람은 밥도 틈나면 먹고 틈 안 나면 안 먹고 그래야 한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구별되어야 한다. 성경에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런 말이 있다.
교회생활은
단지 말씀을 듣고 간증하고 기도하는 것만은 아니다. 교회생활은 건축이다.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유기적으로 연합 된 하나의 실체가 됨으로서 하나님의 충만을 나타내는 것이다. 생활이 곧 건축이다.
교회생활은 단지 집에서 말씀을 좀 듣고 간증하고 기도하고 성경보고 이러는 것은 교회생활이 아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이나 종교생활이 될지는 몰라도 교회생활은 아니다. 교회생활은 건축이다.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유기적으로 연합된 하나의 실체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충만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교회생활이다. 그러므로 생활이 곧 건축이다.
어제도 결혼식장에 갔다.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그런데
끝나고 나니까 다 가고 우리만 남았다. 찬해와 유희가 왔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세계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웃고 껴안고 사진 찍고 난리가 났다. 영식이 형제는 싸구려 기계를 가지고 사진 찍느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다. ‘야! 그런 기계로 사진 찍으면 누가 돈을 주겠느냐? 좀 비싼 카메라를 가지고 오지’ 그랬다. 그래도 열심히 찍어서 사랑방에
올려놓았다. 다 올려놓지는 못하고 몇 컷만 올려놓았다. 아주
재미있는 일이 많이 있었다.
우리가 몸을 하나로 모아 놓으니까 그런 일이 생기더라. 몸을 따로 구별해 놓으니까 거기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섞여 있을 때는 몰랐다. 여러 사람들 속에
섞여 있을 때는 모르겠더라. 나도 간신히 한 마디 하고 나왔다. 주례가
없는 결혼식이니까 주례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찬해에게 이야기를 했다. 부모들이 나와서 덕담을 하는 데 그 틈에 나를 좀 끼워주라고 했다. 그래서
자기가 이야기를 하고 거기에 살짝 끼워 넣을 줄 알았더니 안 끼워주고 그냥 나왔다. 아니 엉뚱한 소리만
하고 나온단 말이다. 내가 너무 일찍 결혼을 해서 애를 낳은 바람에 이렇게 해서 지금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게 아닌데... 내가 여기까지
왔다가 공짜로 갈 수는 없는데’ 알고 보니까 정식 프로그램에 넣어 놓았다. 사회자가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주례 아닌 주례를 하고 왔다.
그래야 되지 그냥 공짜로 올 수가 있는가? 주례를 안 하는 결혼식에 간 것은 처음이었다. 그냥 올 수 없었다. 신우에게도 할 말이 있었다. 아주 좋았다. 손자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 애가 어려서 성막 수술을 했다. 그래서 우리가 고려 삼성병원에서
혹시라도 긴급 수혈이 필요할지 모른다고 해서 몇 사람이 수혈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인연이
있다. 그런데 다행히 수술이 잘 되어서 그냥 나왔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했다. 모를 것 같아서 내가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더 좋아했다, 친근감이 느껴지니까. 며늘아기에게도 이야기를
해 주고 이렇게 보고 나니까 시원하고 좋았다. 그냥 왔더라면 찝찝할 뻔 했다.
교회생활은 몸으로 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다 가고 우리만 남으니까 완전히 우리판이 된 것이다. 우리 세계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본받지 말라고 한다. 시대는 하나의 건축(建築)이다. 사람들에 따라서 시대는 건축 된다. 노아의 시대, 네피림의 시대는 다 사람들에 의해서 건축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말하게 된 것이다. 시대는 하나의 건축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대는 몇 년부터 몇 년까지
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건축이다. 사람들에 따라서 시대는 건축된다.
강남스타일이 있다. 강남스타일 시대가 되어서 젊은이들을 휘어잡고 다닌다. 전 세계 젊은이들이 흥분되어서 따라다닌다. 그게 하나의 시대다. 성경이 말하는 시대다. 네피림의 시대는 다 사람들에 의해서 건축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을 본받아서 사는 것은 그 시대를 건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건축을 두고
고 또 다른 시대를 본받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을 본받아서 사는 것은 그 시대를 건축하는 것이다. 우리가
강남 스타일을 따라가서 우리도 같이 춤추면 우리는 교회생활과는 관계없이 그 시대를 건축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교회를 건축해야 되는 데 가서 이러고 있으면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 아니고 강남스타일을 건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시대를 두고 다른 시대를 본받으면 안 된다. 시대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된다. ‘이것은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시대를 만들어 가는구나.’
본받는 것은
같은 모양이 되는 것이다(롬6:5참).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된다는 것은 그와 같은 모양이 되는 것이며(롬6:5참). 그 모양은
하나님의 충만으로서 교회로 건축 되는 것이다.
본받는 것은 같은 모양이 되어간다는 뜻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된다는 것은
그와 같은 모양이 된다는 뜻이다. 6장 5절에 있는 말은
그런 뜻이다. 같은 모양이 된다는 것이다. 그 모양은 하나님의
충만으로서 교회로 건축되는 것, 그 모양을 이야기 한다. 우리는
그 한 모양이 되어야 한다.
8장까지에서 언급 된 선택, 부르심, 구속, 의롭다
하심, 영화롭게 하심, 등의 항목들은 창조에 속한 것이다. 제2의 창조다. 우리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하신 결과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옛 것이 전혀 없다. 옛 창조에 속한 것이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생각 속에 마저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새 창조에 속한 것이다.
8장까지 언급된
선택, 부르심, 구속, 의롭다
하심, 영화롭다 하심, 이런 것들은 모두 창조되지 않은 다른
항목에 속한다. 이것은 1차적인 창조 안에는 없던 일이다. 1차적인 창조는 기계적인 창조다. 그래서 거기에는 이런 것이 없다. 선택, 부르심, 구속... 이런 것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온 것은 다른 세계가 온 것이다. 선택, 부르심, 구속, 의롭다
하심, 이런 것은 모두 다른 것이다. 원래 있던 것이 개발된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이다, 다른 것. 제 2의 창조라고 할 수 있다. 왜 창조라고 하는가 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첫 번째 창조에도 우리는 한 것이 없다.
한 것 없기 때문에 창조라고 한 것이다. 또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창조라고 한다. 우리가 산을 만들겠는가, 바다를 만들겠는가? 못 만든다. 그러니까
창조에 속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택과 부르심과 구속과 의롭다 하심과 영화롭게 하심, 이것들도 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은 창조에 속한 일이다.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일도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부모로부터 내가 태어난다면 부모로 인해 된 일이니까 나는 모르는 일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그것도 창조에 속한 일이다.
그러니까 전에 것이 없다. 옛 것이 있는 줄 알지만 없다. 우리가
교회를 볼 때 모임은 그대로니까 옛 것이 그냥 있는 줄로 알지만 이 안에 흐르고 있는 선택과 부르심과 구속과 의롭다 하심과 영화롭게 하심은 다른
문제다. 이것은 다른 데서 온 문제다. 하늘로부터 왔다는
말이 이런 말이다. 원래 우리 앞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 이런 말이다. 제 2의 창조에 속한 것이다. 그
세계 속에는 옛 것이라는 것이 전혀 없다. 부르심 안에는 우리가 생각할 때 ‘이러이러한 사람은 부름을
받겠다.’ 이런 것이 없다. 하나님은 누구를 부르실지 모른다. 왜 그 사람을 불렀는지도 모른다. 부름 받은 사람 자신도 모른다. 왜 내가 부름 받았는지 자기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게 속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안에는 옛 창조에 속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혼동하면 안 된다.
사람 속에 원래 있던 것을 개발한다는 것과 사람 속에 없던 것이 왔다는 것은 아주 다른 것이다. 불교의
논리는 자기들의 것들이 사람 속에 다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도 내 안에 있고 다 있다. 있는 것을 내가 깨달아서 개발하는 것이다. 그것과 지금 성경이 말하는
선택, 부르심, 구속, 의롭다
하심, 영화롭게 하심, 이것은 전혀 없다. 우리 속에 없단 말이다. 그러니까 창조에 속한 일이다. 밖으로부터 온 일이고 내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속에는 옛 것이
하나도 없다.
에베소서를 읽어 보면 하늘에 속한 교회를 이야기 하는 데 인간은 그대로고 별로 변화된 것도 없는 데 ‘하늘로부터 왔다. 신성하다. 흠이 없다.’
이런 말이 나온다. 그래서 헷갈린다. 우리의 옛 것을 가지고
생각하니까 헷갈리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다른 데서 온 것이다. 생각마저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새 창조에 속한 것이다.
이것이 구별되어야 교회생활 안에도 뭐가 흐르는지 알 수 있다. 그냥 ‘사람들이 잘 한다, 잘 못한다.’ 이런 것이 아니다.
그런 것만 보는 것은 옛 창조만 보는 것이다. 우리는 잘 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잘 하다가도 못 할 수도 있다. 잘 한다고 항상 잘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 실수 할 수도 있고 또 잘 할 수도 있고 그렇다. 이것은
옛 창조에 속한 세계다. 잘 해도 옛 창조에 속하고 못해도 옛 창조에 속한다. 그런데 그것으로 교회생활을 하려고 하면 헷갈린다. 교회와 세상이
구별 안 된 것이다. 1차적인 창조와 2차적인 창조가 구별이
안 된 것이다. 우리는 1차와 2차를 구별해야 한다.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새 창조는 우리들에게 신분상에 변화를 가져오지만 실질적인 변화는 우리들의 노력과 함께 한다. 밭을 받았으면
경작은 내가 해야 한다. 몸을 받았으면 몸은 내가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몸들(개별적)을 주시고 건축 된 한 몸(교회)으로 받으신다. 이
한 몸은 실질적인 변화를 거친 신성한 몸으로서, 하나님의 거할 처소로 드려져서 그의 충만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전적으로 다른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새 창조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바꾼다. 첫째는 신분상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두
번째는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신분상의 변화는 다 아실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하지만 한님의 아들을 인정한다. 나는 의롭지 않다. 그런데 그가 의롭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니까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까 내가 신분의
변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데 여기까지가 이신득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수준이다. 법적으로 신분의 변화가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똑 같을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렇게 본다. 그러니까 나는 똑 같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볼 때 나는 다른 사람이다. 나는 같은 사람이고 형편이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볼 때는 다르게 보고 있다. 신분이 변화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실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신분만 바꿔지면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군인이라는 신분을 바로 줬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바로
전쟁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전쟁을 하려면 훈련을 해서 전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가능하다. 소집을 해서 훈련소에 데려다 놓고 막대기를 하나 달아주면 다 군인이다. 신분이 딱 변화되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을 왜 훈련시키는가? 실제적인 군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분을 바꿔주었지만 그 신분에 맞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어떤 과정을 겪어야 된다. 이것은 실제적인 문제다. 이 실제적인 문제에 가면 변화라고 한다. 이 변화는 우리들의 노력과 함께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전혀 개입하지
않는 게 아니다. 신분상의 변화는 내가 개입한 것이 아니다. 계급장을
준 것이니까 그렇다. 훈련소에만 가면 누구나 다 막대기 하나씩 준다.
모자 씌어주고 군복 입혀준다. 그러면 다 군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그대로 놓아두면 여기 사회에 있는 것이나 똑 같다. 그런데
한달인가 40일인가 굴려 놓으면 실질적인 변화가 생겨서 군인과 민간인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저 사람들은 민간인이다.’ 생각하고 ‘자기는 군인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신분상의 변화와 실질적인 변화가 있다. 그런데 이 실질적인 변화에는 내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신분상의 변화는 내가 모르는 것이지만 실질적인 변화에는 내가 거기에 들어가 있다. 그래서 나의 어떠함에 따라서 잘 될 수도 있고 못될 수도 있다. 훈련을
제대로 받으면 유능한 군인이 될 수도 있고 훈련을 제대로 안 받고 농땡이로 받으면 가서 총알받이가 되는 것이다.
군대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정신 문제라고 한다. 전쟁 통에 누가 잘 죽는가 하면
신병 보충으로 들어 온 사람이 첫날 와서 많이 죽는다고 한다. 그리고 휴가 갔다 온 사람이 잘 죽는다고
한다. 휴가를 가서 민간인 정신이 섞여 들어와 버린 것이다. 그래서
고지에 오니까 헬렐레 해져서 군인정신이 정비가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잘 죽는다고 한다. 친구 하나도 나이가 나보다 많은 데 후방에 있었다. 그런데 휴가를
왔다 가서 오발탄에 맞아서 죽었다. 훈련소 교관으로 후방에 있었는데 휴가를 갖다 와서 다른 총의 오발탄에
맞아서 죽었다. 그러니까 군인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실질적인 군인이 되어야 한다. 오래된 군인은 그 많은 총알 속에서 죽지 않는다. 신분상의 군인이
아니라 실질적인 군인이기 때문이다. 밭을 받았으면, 밭을
줬으면 경작은 하나님이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경작을 해야 한다. 내가 어떤 신분을 주었으면 그 신분은
내가 개발해야 한다. 몸을 주었으면 실제로 몸은 내가 드려야 한다. 몸을
줬는데 드리지 않으면 쓸 데가 없다.
하나님은 몸들을 개별적으로 우리에게 주었다. 개별적인 몸을 왜 주었는가 하면 건축된 한 몸을
받기 위해서이다. 건축된 몸을 받기 위해서이다. 이 실질적인
한 몸을 실질적인 변화를 거친 신성한 몸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주신 그 몸도 신성하지만 그것이 훈련의
과정을 거쳤다.
그러니까 야곱이 자기 힘으로 나와서 도망쳐서 받단아람에서 20년 동안 구르다가 맨손으로 돌아온
것, 이 과정을 통해서 신성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이 공짜가 아니다. 이런 일 저런 일을 당하고 무슨 일을 좀 당하면 재수 없다고 하는데 일을 당하는
것이 재수 없는 일이 아니고 이것이 실질적인 것이 되기 위한 길이다. 실질적인 것으로 변화하기 위함이고
그러면 하나님이 쓰실 일이 생기고 이러면 신성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신성한 몸이 되는 것이다.
벽돌은 다 같은 벽돌인데 왕궁을 지으면 왕궁이 되는 것이다. 그 벽돌로 변소를 지으면 변소
간이 되는 것이다. 똑같은 벽돌인데 그렇다. 건축에 들어가서
그때부터 자기 영원한 용도가 결정된다. 그러니까 신성한 몸은 하나님의 거할 처소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할 처소가 되고 그것이 성전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충만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몸은 일차적으로 받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쓰는 이차적인 몸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신분상의
변화로는 하나님이 변화시켜 주었으니까 실질적으로는 우리를 통해 변화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훈련소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아야 내가 실질적인 몸이 되는 것이다. 그 몸이 되었을 때 군대가 되어서
전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첫째는 한 시대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런 시대에서 내가 하나님을 섬기려면 강남
시대에서 나와야 한다. 그 시대에 같이 뛰면서는 안 된다. 여기서는
거기 가신 분은 없겠지만 거기 가서는 교회생활이 안 된다. 각자 지가 알아서 뛰는 것인데 교회가 안
된다. 이놈의 춤이 왜 쉬운가 보니 각자 자기 좋은 대로 뛰는 것이고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같이 뛰면
된다. 그러니까 교회생활을 하려면 거기서 나와야 한다. 공연장에도
안가야 한다. 왜냐하면 공연장에 갔다가 환풍구에 빠져 죽으면 누가 책임을 지겠는가.
2. 생각이 새로워 짐
몸은 교회로
드려져야 하고 생각은 변화를 받아 새로워져야 한다.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 다른 세계 안으로 들어가려면 생각이 새로워져야 한다. 같은 생각으로
다른 세계의 생활은 할 수가 없다. 교사의 생각으로 군인이 될 수 없고 군인의 생각으로 교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 안에 들어가서 새로운 삶을 살려면 생각이 새로워져야 한다.
두 번째는 생각이 새로워져야 한다. 몸은 교회로 드려져야 하고 생각은 변화를 받아 새로워져야
한다. 몸은 드리고 생각은 안 변한다면 안 된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곳이다. 다른 세계 안으로 들어가려면 생각이 새로워져야 한다. 군인이 되려면 군인의 생각으로 무장이 되어야 한다. 육사에 다니는
친구에게 무슨 훈련을 받아서 장교가 되느냐고 물어봤더니 훈련은 1학년 여름방학에 한번뿐이라고 하더라. 그러면 4년동안 무엇을 하느냐고 했더니 4년 동안 공부한다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군인이 되느냐고 했더니 4년 동안 공부하는 것이 군인을 만드는 것이란다. 졸업을 하고 나면
자기가 군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각이 새로워져야 다른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 같은 생각으로 다른 세계의 생활을 할
수가 없다. 민간인 생각을 가지고 군대생활을 어떻게 하겠는가? 민간인
생각으로는 군대생활을 못하니까 훈련소에 들어가면 민간인 생각은 벗어나야 한다. 3년동안 은행에 예금시키고
보류하고 가야 한다. 그러니까 교사의 생각으로 군인이 될 수 없고 군인의 생각으로 교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5.16후에 교대 선생님들은 군대를 안 갔다. 왜냐하면 기초적인 교육을 담당하기도 해야 하지만 전투하던 사람들이 아이들을 가르칠 수가 없다. 그래서 면제를 해주었다. 면제를 해주었는데 선생님들이 불공평하다고
데모를 해서 지금은 다 군대를 간다. 그런 특혜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만이 있어 반항을 하다 보니
자기들이 자기 꾀에 넘어갔다. 그래서 지금은 교대를 다니는 사람들도 군대를 갔다 와야 한다. 옛날에는 ROTC를 해서 6개월만
훈련을 받으면 되었다. 그러니까 불평하는 놈은 어쩔 수가 없다. 지옥불에
달구는 수밖에 없다.
군인과 교사는 다른 것이다. 군인은 전투하는 것이고 교사는 가르치는 것인데 같은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하겠는가? 불가능하다.
새로운 세계 안에 들어가서 새로운 삶을 살려면 생각이 새로워져야 한다. 교회 안에 교회생활로서의
생활을 하려면 교회 생활의 생각이 되어야 한다. 교회생활로서의 생각으로 변하지 않으면 교회생활을 하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잘 모르게 된다.
어떤 믿는
이들은 예수를 믿으면 무조건 천당에 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보내준다 해도 거기서 살지는 못할 것이다. 생각은 그 사람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생각이 변화되어야 한다. 몸이 건축에 드려지려면 생각이 새로워져야 한다.
어떤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무조건 천당에 간다고 이렇게 생각 하는 사람들이 상당이 많다. 그런데
생각이 변화되지 않는 사람으로서 이신득의, 예를 들어서 믿었으니까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까 천당을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생각이 변화를 받지 않았다면 이 사람을 천당을 보내줘도 거기서 살지를 못한다. 생각이
맞지 않으니 천당이라도 자기 생각에 맞지 않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천당은 무조건 좋은 데가 아니다. 좋은 사람에게 좋은 것이지 나쁜 사람에게는 그것이 지옥이다. 생각을
해보라. 생각이 다르니까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러니까 보내줘도
못산다.
생각은 그 사람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생각이 변화되어야 한다.
몸이 건축에 드려지려면 생각이 새로워져야 한다. 그래야 건축에 드려질 수가 있다.
생각은 몸을
주관한다. 생각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몸이 드려진다 해도 합당한 용도에 사용 되지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생각이 새로워짐으로 변화 되어 하나님의 선한 뜻, 기뻐하시는
것,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확증하라하였다. 생각이 새로워짐은
변화의 핵심이다.
생각이 몸을 주관한다. 몸을 주관하는 것은 생각이다. 우리는
오늘도 생각 때문에 교회를 왔다. 아침에 일어나서 교회 생각이 났기 때문에 왔다. 아침에 일어나서 팔공산 단풍이 생각났으면 교회를 오겠는가. 교회를
못 온다. 오늘 같은 날 우리교회 사람 중에 팔공산 단풍 구경을 간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 때 심판을
되게 받게 된다. 미안하지만 안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없다. 그런데
비가 와서 아무도 안 갔을 것이다.
생각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몸이 새로워진다고 해도 합당한 용도에 사용되지 못한다. 생각이 바꿔지면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이 재미있다. 그리고 교회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 재미있다. 내가 젊었을 때 그랬다. 생각이 바꿔지니까 교회에서 하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좋았다. 깊은 것은 잘 몰랐지만 뭐든지 하라는 것은 다 좋았다. 그래서 조그마한 교회이니까 서리집사를 하라고 해서 하고 교회학교 부장을 하라니까 부장을 했고 뭐든지 시키면
다 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이 바꿔지고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생각되어졌다. 실질적인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생각이 새로워짐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선한 뜻, 기뻐하시는 것,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확증하라 했다. 그것을 세상 앞에 보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갔다 왔는데 갔다 와서도 얼굴이 시커매서 고개 숙이고 앉아있으면 확증이 안 된다.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이 확증이 안 된다. ‘자네 어디 갔다
왔는가? 나는 교회 갔다 왔어.’ 그런데 왜 푸 ~푸~ 소리를 하고 있느냐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니까 확증하라는 말이 그 말이다. 천국에 갔다 왔으면 이렇게
하니까 천국 생활이 되더라고 확증을 하라는 그 말이다. 생각을 새롭게 해서 이렇게 사니까 이렇더라 하는
것을 증명하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교회 갔다 와서는 집에 가서 짜증을 내면 안 된다. 교회 갔다 왔으면 짜증이 나더라도
웃고 억지로라도 웃어야지 솔직하게 한다고 집에 가서 던지고 하면 안 된다. 그러면 확증이 안 된다. 하나님이 믿는 사람으로서 증거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된다. 그리고
오늘 교회생활을 했던 증거가 나와야 하는데 교회 생활을 해놓고 와서 싸우면 증거가 안 된다.
생각이 새로워지는 것은 변화의 핵심이다. 신분상의 변화를 받았을 때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우기니까 사람들이 미워하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이유가 자기는 하나님 아들이 됐다. 의롭다 함을 받았다. 너희들이 그렇게 말을 해도 하나님이 인정해 줬다고 하니까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아니꼽고 미운 것이다. 내가 볼 때 똑같은 놈이 교회 갔다 오더니 교만해졌다고 한다. 그
말을 들어도 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 받기는 받았지만 자기는 변화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생각이 변화가 되면 다른 사람도 안다. 생각이
변화되면 다른 사람도 안다. 그 때는 그런 비난을 못한다. 그것이
확증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힘이 필요하다. 우리의
협력이 필요하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을 새롭게 할 것인가? 생각은 입장과 목표에 따라서 달라진다. 몸을
드리면 입장도 달라진다. 몸이 있는 곳에 생각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생활 안에 있으면 생각이 교회를 위한 생각으로 변화된다.
어떻게 생각을 새롭게 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이다. 생각은
어떻게 나오는가? 입장에 따라 다르다. 입장과 목표에 따라서
생각이 나온다. 그냥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할 일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할 일이 없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할 일 없다는 생각만 나온다. 바쁜 사람은 바쁘기
때문에 바쁜 입장만 나온다. 사람은 입장과 목표에 따라서 생각이 달라진다. 억지로 생각을 바꾸려고 도 닦는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자기 속의 생각이 깨끗해질까? 그 뭔가를 바꾸어보려고, 영원한
생각으로 바꾸어 보려고 하는데 그것이 어려운 것이다. 입장이나 목표는 그대로 있는데 생각만 바꾸려는
그것이 되겠는가? 안 된다. 생각이라는 것은 기계적인 것이다. 어떤 입장에 있고 어떤 목표를 갖느냐에 따라서 생각은 기계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입장과 목표가 달라지지 않고는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자기들이
바꿔졌다고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자기 좋을 대로 자기가 편할 대로 바꿔진 것이지 우리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변화된 것과는 다른 것이다.
몸을 드리면 입장이 달라진다. 몸이 있으면 입장이 달라진다.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내 몸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물질이 있는 곳에 내 마음도
있다는 말처럼 보물을 둔 곳에 내 마음이 간다. 쓰리꾼들이 말하길 주머니 속에 돈이 있는 사람을 알
수가 있고 돈 냄새를 맡는다고 한다. 어떻게 돈 냄새를 맡는가 하면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 중 주머니
속에 거액의 돈을 가진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돈이 든 주머니로 신경이 가기에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한다. 돈이 거기에 들었으니까 안 그럴 수가 없다. 사람은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법이다.
그러니까 몸을 드려 놓으면 입장이 달라진다. 배를 타고 간다면 내 몸을 배에다 실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입장이 달라지니까 바람이 좀 잠잠했으면, 파도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이런 생각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육지에서
구경하는 사람은 파도가 좀 넘실거렸으면 기분 좋겠다고 한다. 파도가 와서 바위에 부딪치는 것을 보면
시원하고 기분 좋고 통쾌하니까 이런 것을 보면서 사진 찌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배 타는 사람은
그렇치가 못하다. 배 타는 사람은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바람이 많이 불면 안 되는데 이렇게 생각한다.
몸이 드려지면 입장이 달라진다. 그러니까 몸이 있는 곳에 생각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몸을 먼저 드리라는 것이다. 생각을 먼저 드리라고 하지 않고
몸을 먼저 드리라고 했다. 우리가 몸을 먼저 드리면 생각이 바꿔진다.
그러므로 교회생활 안에다 내 몸을 두면 생각도 교회를 위한 생각으로 바꿔진다. 내가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생각도 바꿔지는 것이다. 교회 안에다 몸을 넣어놓고 강남 스타일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우리교회는 몇 명씩 앉아서 순모임을 하는데 다른 사람은 다 간증할 생각을 할 때 자기 혼자 뛰고 있을
수 있겠는가? 안되게 되어 있다. 교회생활 안에 있으면 교회생활로
생각이 바꿔지게 된다. 그러니까 아주 쉽다. 꿇고 앉아서
자기 생각을 바꾸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게 쉽게 되겠는가? 아무나
될 일이 아니다.
앉아서 생각을 정리한다고 하는데 나는 정말 그것이 안 되었다. 그냥 앉아서 생각을 정리하려고
하면 얼마나 생각이 복잡해져 버리는지, 그리고 그것이 또 끊겨가지고서는 방금 생각한 것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게 되고 연속이 안 된다. 나는 천상 그 짓을 못한다. 무슨
한 가지 생각으로 일관해야 바위를 뚫든지 뭐를 하든지 할 텐데 나는 그것이 안 되고 한마디 생각을 하고 나면 다음 다른 것을 생각하게 되고 다음
것 생각하고 있으면 그 앞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니 어떻게 도를 통하겠는가? 내가 일찍 그것이 안 했기에 다행이지 만약에 했더라면 큰일 날 뻔 했다. 정말
집념이 강한 그런 사람들이 그것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것을 못한다. 해 봤는데 정말 못하겠다.
내가 교회생활 안에 있으니까 교회 생각을 하게 되지 내가 교회생활 안에 있지 않고 다른데 있으면 딴 생각을 할 사람이다. 내가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나는 될 수
없는 사람이다. 우리가 몸을 어디에다 두느냐는 너무 너무 중요한 문제다. 그러므로 몸은 어디 있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자랑하지 말고,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 그렇게 못 할 것이니까 가능하면 그렇게 안 가기를 바란다. 그것이
고생을 안 하는 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바라는 변화는 무엇인가?” 내가 도를 통해서 어떤 정신을 갖는 사람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교회건축을
위한 생각으로 바꿔지는 것 이것을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변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고, 못 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너무너무 싶다. 교회에 몸만 넣어 놓으면 저절로 되는 일이다.
여러분들은 교회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크게 변화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계추하는데 가보면 생각이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가라고
해도 못 가게 된다. 계추하는데 가서 보면 나와 안 맞다. 교회생활을
하다 보니까 안 맞다. 너무 유치해서 안 맞다. 그래서 가라고
해도 못 간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변화” 이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변화가 아니다. 내가 도인이 되는 그런
변화가 아니고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 사는 그런 변화다. 그것은 누구나 가능하다. 아무에게도 어렵지 않다.
3.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확증함
제사장은
율법에 정해진 법도에 따라서 봉사한다. 자의로 행해서는 안 된다. 법과
제도에 따라서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 제사장은 율법에 정해진 법도에 따라서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법을 따라서 자의로 행해서는 안 된다. 법과 제도에 따라서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봉사도 법과 제도에 따라야 한다.
경찰관이 된 사람은 자기가 법에 따라서 경찰관이 됐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하면 안 된다. 법에서 정해진 대로 행동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제사장도 법에 따라서
됐다. 그 사람이 실질적으로 제사장 자격이 있어 된 것이 아니라 법을 따라서 제사장이 됐기 때문에 그래서
이 사람은 철저하게 법을 따라야 한다. 안 따르면 이 사람은 이탈해 버린다.
그런데 교회에는
법도가 정해져 있지 않다. 왜 교회는 법도가 없는가?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무슨 법으로서 구속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법이 없다. 그러므로
구속 받은 생명으로 교회생활 안에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확증해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도 그런 것이 있는가? 교회에는 그런 것이 없다.
법도 정해져 있지 않고 제도도 정해져 있지 않다. 그래서 교회생활이 제사장 생활하고 다른
것이다. 제사장 생활은 임명하면 다 한다. 임명만 하면 법과
매뉴얼이 있으니까 그 매뉴얼대로 하면 제사장 노릇을 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교회에는 매뉴얼이 없다. 왜 우리가 교회가 될 때 우리가 무슨 법으로 됐는가? 어떤 법이 있어서 교회가 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부르심을 받아서 내가 교회가 된 것이지 내가 어떤 법이 있어서 법으로 교회가 된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법으로 교회 사람이 됐다면 우리는 법으로 교회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법으로 교회생활을
한 것이 아니고 구속 안에서 부르심 받아서 교회생활을 하는 것이다.
무슨 법으로서 구속 받은 것이냐? 무슨 법으로 구속을 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내가 그것을 보고 구속이 됐다. 그 안에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 그러니까 법이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아론의 자손만 제사장이 된다. 다른 사람은 안 된다. 그것도 법으로 정해져 있다. 아론의 자손만 제사장이 된다. 이렇게 정해져 있으니까 아무리 다른 사람이 훌륭해도 제사장이 될 수 없다. 아론
자손만 되도록 법으로 딱 정해 놓았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법이 없다. 왜?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부름 받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구속받은 생명으로 교회생활 안에서 변화를 받아야 한다. 거기서 변화가 필요하다. 제사장은 변화 받을 필요가 없다. 법으로 정해져 있고 매뉴얼을 따라 하기 때문에 변화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변화가 돼야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법으로 된 것이 아니고 구속 받은 생명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변화가 돼야 한다. 그래서 변화가 돼서 분배를 해야 한다.
제사장은 법에 따라서 분배를 한다. 그래서 양을 가져오면 흠이 있는지 없는지를 법에 따라서
검사를 한다. 그리고 어떻게 잡는지도 법이 다 있기 때문에 그 법대로 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없으니까 변화가 안 되면 우리 제사장이 못 된다. 임명을
해도 법이 없으니까 못 한다. 대구교회에 와서 어려운 것이, 보통
다른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사람들이 생기는 문제인데 매뉴얼이 있어서 했는데 대구교회는 매뉴얼이 없다. 어떻게
하라는 것이 없다. 그러니까 뭘 해야 될지를 모르겠다. 막막해지는
것이다. 열심히 다른 교회생활 하던 사람이 이런 문제에 봉착한다. 아예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상관이 없는데 열심히 해 본 사람은 매뉴얼대로 하다가 매뉴얼이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변화를 받아야 가능하다.
선악과를
먹고 그 지식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통제할 법이 필요하다. 법이 없으면 각자의 생각에 좋은 대로
행하기 때문에 혼란을 막을 수 없고 생각이 각각이고 많기 때문에 법은 더욱 많아진다. 편하게 살고 싶지만
그러려면 더 많은 법이 필요하게 된다. 이율배반이 일어난다. 악순환이다. 이것은 위치를 이탈한 인간의 운명이다.
선악과를 먹고 그 지식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통제할 법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내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있기 때문에 이 지식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니까 그 지식에 따라서 통제할 법이 또 있어야 된다.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다스려야 된다. 아는 사람은 아는 것으로 다스려야 된다. 그러니까 법으로 하는 사람은 법으로 다스려야 된다. 다른 것으로는
다스릴 수가 없다. 그래서 율법이 주어진 것이다.
법이 없으면 각자의 생각에 좋은 대로 행하기 때문에 혼란을 막을 수 없다. 생각이 각각이고
많기 때문에 법은 더욱 많아진다. 편하게 살고 싶지만 그러려면 더 많은 법이 필요하게 된다. 이율배반이 일어난다. 편하게 살려고 법을 받아들였는데 법을 받아들이고
나면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것은 위치를 이탈한 인간의 운명이다. 어쩔
수가 없다. 자기 길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배를 탔으면 멀미를 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왜냐하면 바다가 출렁거리면 멀미를 한다. 나는 배만 타면 멀미를 한다. 조금만 움직여도 멀미를 한다. 배를 안 타면 멀쩡하던 사람이 배만 타면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심하면
토하기도 한다. 어디에 내가 속해있느냐에 따라서 멀미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멀미라는 것이 아주 신기하다. 금방 똥물까지 다 나오다가도 육지에
발을 디디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싸악 사라진다. 인간은 d왜
법이 없으면 안 되는가? 자기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에 법이 없으면 안 된다. 어쩔 수 없는 자기 운명이다. 배를 타면 멀미를 해야 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인간을 구속하여 위치를 회복하고 교회로 불러 모으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새로운 인류가 새로운 목표를
위하여 소집된 것이다. 새로운 목표는 구속 받은 몸으로 하나님의 거처로서의 몸을 건축하는 것이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거처를 이루었던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구별 되어 봉사함으로써 살아계셔서 사람과 교통하시는 하나님을 단체적(건축)인 봉사로서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인간을 구속하여 위치를 회복하고 교회로 불러 모으셨다. 이것이
구속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새로운 인류가 새로운 목표를 위하여 소집된 단체이다. 그 전의 것을 개선해서 그 전 것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새 인류를 만들어서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 소집되었다.
새로운 목표는 무엇인가? 구속 받은 몸으로 하나님의 거처로서의 몸을 건축하는 것이다. 이것이 새 인류의 목표이다. 인간의 첫 번째 목표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거처 안에서 같이 사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같이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탈하고 나왔다. 그래서 형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성막이고 봉사하는 생활이었다. 그것으로서는 안 되기 때문에 새로운 목표, 새로운 인류가 생겼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 몸을 건축하기 위해서였다. 인간은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하나님의 몸을 건축하려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형상으로 지었으니까.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했다. 그의 형상으로 지어진 이상 우리는 어떻게 해도 그의 형상을
나타내어야 된다. 그럴 수밖에 없게 되어있다.
장갑을 만들어놓으면 손에 끼거나 안 끼면 그냥 놔두든가 해야지 양말로 쓸 수는 없다. 장갑은
장갑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양말로 쓸 수는 없다. 그러니까 그냥 장갑으로 있는 것보다는 손에 끼는 것이
훨씬 영광이다. 손에 끼려고 만들어놓은 장갑은 손에 끼어야 영광이다.
제격이다. 그냥 있으면 장갑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무
소용이 없다.
위치를 이탈한 인간은 쓸 데가 없다. 이런 인간을 구속하여 위치를 회복하여 주었다. 새로운 목표를 주어서 새로운 일을 하게 하려고 소집하였다. 그 새로운
목표는 바로 하나님의 거처를 준비하는 것이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거처를 이루었던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성막을 만들어놓은 것은 제사장들의
봉사를 위한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거처가 된 셈이다. 그들은 구별 되어 봉사함으로써 살아계셔서 사람과 교통하시는 하나님을 단체적(건축)인 봉사로서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냥 제사 드리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고, 단체적으로 하나님을 봉사하는, 창세기에 나왔던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했던 것을 이루는 일이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이루는 생활이다. 성막에서 하는 일이 하나님의 동산에서 사는 생활을
이루는 일이었다. 만일 선악과를 먹고 이탈하지 않았으면 성막 봉사가 없었을 것이다. 에덴동산에 같이 살면 되는데, 그곳을 나왔으니까 이렇게 옹색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교회 안에 와서 실제가 드러나게 되었다.
교회는 단체적으로 하나님께 봉사한다. 하나님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유익하고, 그가 기뻐하시는, 즉 온전한 하나님의 뜻은 교회가
그의 표현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만유에게 나타냄으로써 그의 생명과 성품을 분배하시려고 사람을
지으셨다(창1:26,27참).
하나님께 유익하고, 그가 기뻐하시는, 이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다. 유익하고 기뻐하는 그 표현체가 되는 것이다. 온전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교회가 그의 표현체가 되는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표현체가 될 때 인간은 완성된다. 하나님은
자신을 만유에게 나타냄으로써 그의 생명과 성품을 분배하시려고 사람을 지으셨으니까 우리가 그의 생명과 성품을 분배하는 몸이 될 때, 그때 인생은 완성된다. 이것이 개인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단체적으로
되어야 된다.
이 목적을
이루시려고 사람을 지으시고 노아를 구원하시고 아브람을 부르셨으며 이삭으로 이스라엘의 씨가 되게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속하시고 새 생명을 주어 교회를 건축하게 하신 것이다.
이 목적을 이루시려고 사람을 지으시고 노아를 구원하시고 아브람을 부르셨으며 이삭으로 이스라엘의 씨가 되게 하셨다. 구약에 있는 일이 모두 이 목적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속하시고 새 생명을 주어 교회를 건축하게 하신 것이다. 다 똑같은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구속한 재료들로 그분의 거처를 만드는 것이다.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몸이 되게 하는 것이 이분의 목적이다. 이 목적 안에 우리가 지음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목적 안에 있을 때 행복하게 된다. 만족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로 부름 받은 사람은 이 뜻을 분별하고 확증해야 한다.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양심이나, 교정하려고 주어진 율법이나, 스스로 만든 종교나,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을 표현할 교회적 인간으로서의 소명 안에서 그에게 유익하고 기쁨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실행함으로 확증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로 부름 받은 사람은 이 뜻을 분별하고 확증해야 한다. 내가 무엇을 위해 지음
받았는가? 그것은 건축을 위해서 지음 받았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건축을 위해서 부름 받았구나. 그것을 분별하고 그것을 나를 통해서 확증해야 된다.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의 건축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구나. 저 사람은
하나님의 건축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구나. 이렇게 증명이 되도록 해야 한다.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양심, 그런 것을 교정하려고 둔 것이 아니다. 새롭다는 이 말은 그 사람의 양심이 교정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정하려고
주어진 율법, 율법은 왜 주었는가? 선악과는 먹은 양심이
제대로 양심이 안 되기 때문에 준 것이다. 우리는 양심을 신선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다. 이미 선악과를 먹은 양심이다. 이것을 교정하려고 준 것이 율법이다. 율법 앞에 서보았자 양심이
양심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율법이 없으면 양심은 제일 좋은 것이다. 완전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다. 그런데 율법 앞에 딱 서면 양심이 드러난다.
스스로 만든 종교는 이것은 무엇인가? 자기가 지금 위치를 이탈했는데 하나님을 불러들이려고 만들어놓은
것이 종교다. 이런 종교나 이런 것을 교정하는 것이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또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을 표현할 교회적 인간으로서의 소명 안에서 그에게 유익하고 기쁨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실행함으로 확증해야 한다. 우리가 실행을 해야 확증이 된다.
실행을 하지 않으면 확증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은 실행해야 확증이 된다. 나를 통해서 실행함으로 확증이 된다. 그런데 그것이 단체적인 교회를
통해서 확증되게 되어야 된다.
이것은 정해진
법을 지키는 것과 다르다. 하나님의 온전한 뜻은 법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그는 살아계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때그때 그분의 뜻을 분별해야
하고 실행함으로써 확증해야 한다.
이것은 정해진 법을 지키는 것과 다르다. 하나님의 온전한 뜻은 법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그는 살아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살아계신 분의 요구가 늘 살아있다. 부모에게 효도할 때 객관적으로 소고기가 좋다고 해서 계속해서 소고기만 드린다면 안 된다. 소고기가 처음에 필요할 때가 있는데 몸이 어떻게 변하면 싫을 때가 있고 또 먹으면 안 될 때가 있다. 언제 싫어지는지 언제 좋아지는지는 책으로 알겠는가? 책으로는 모른다. 살아계신 분이니까 어제까지는 소고기가 맛있다고 하다가도 오늘 아침에는 갑자기 소고기에서 냄새가 난다고 한다. 그러면 변덕이 났네, 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변덕이 난 것이 아니라 몸에 변화가 온 것이다. 그때는 돼지고기를
먹어야 된다. 그러니까 매뉴얼로 정해놓고 할 수가 없다. 하나님도
살아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언제 무엇을 필요로 할지 우리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때그때 그분의
뜻을 분별해야 하고 실행함으로써 확증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한 변화이다. 다른 변화가 아니다. 율법에
따라서 제사장 노릇을 하려면 변화가 필요가 없다. 제사장 보고 변화를 받으라는 말은 없다. 그런데 우리보고는 변화를 받으라고 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에
그런 분을 섬기려면 변화가 되어야 된다.
그러려면
그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고
하였다(6:8). 그와 함께 죽은 자가 그와 함께 산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가? 그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야 한다는 그 말이 그래서 나온 말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 내가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아야만 가능하지 방법이 없다. 교회에서 무슨 방법을 세워놓으면 그것이 교리이고 제도이다. 교리와 제도를 강조하는 이유가 그렇게 하면 획일화된다. 다 그것을
보고 봉사를 하니까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될 수 없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함께 죽고 함께 살아야 가능하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고 말했다. 그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는 이 말은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생활한다는 말이다. 함께 생활하니까 아버지가 소고기를 드시다가 돼지고기가 드시고 싶을 때 나도 돼지고기가 먹고 싶어진다. 그러면 쉽다. 내 입맛이나 아버지 입맛이 똑같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 입맛과 다른데 공부하여 알 수가 없다.
그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사는 것이다. 결국 그와 함께 죽은
자가 그와 함께 사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막막하고 참 어렵다. 여러분이 30~40년 들어도 뭐가 잘 잡히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잡으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못 잡는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 같아서 못 잡는다. 잡으려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그와 함께 죽으면 그와 함께 산다. 20년을 들으나 30년을
들으나 40년을 들으나 사실은 똑같다. 그와 함께 죽으면
그와 함께 사는 것이고 아무리 40년을 들어도 그와 함께 죽지 않고서는 그와 함께 살 수가 없다. 구약과 다른 점이 이점이다. 교회는 당연히 신약이다. 신약 안에서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산 자들이다.
교회를 보면 신기하다. 하나님의 필요가 우리가 모르게 흐른다.
무엇을 하지 않아도 흐름이 있어서 그 흐름에 따가 가게 된다. 나는 그것을 보고 있다. 처음부터 교회를 이런 모양으로 이렇게 하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할
수도 없었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보게 되었다.
지켜보는 수밖에 없으니까 지켜보게 되었다. 지켜보니까 그때그때 필요한 대로 되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목회를 하느냐고 물으면 대답해 줄 말이 없다. 친구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그 친구들도 목회를 했는데 잘 안 됐다. 좀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고 친구들도
나를 보니까 자기들 보다 나으니까 어떻게 하는가를 본 사람이 많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된다고 말해줄
방법이 없다. 성공한 목회자 세미나 같은 것을 하면 사람이 구름떼처럼 몰린다. 예를 들어 조용기 목사가 목회자 세미나를 한다고 하면 구름떼처럼 전국에서 몰려간다. 왜? 그렇게 성공한 방법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나는 성공도 하지 않았지만 해줄 말이 없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나도 모르겠다. 그냥 교회가 흘러간다. 필요할 때
그렇게 딱 흘러간다. 그러니까 살아있다고 밖에 할 수가 없다. 살아있으니까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는구나. 나는 모르지만 살아있기 때문에 교회 자체가 살아있구나. 하나의 생명체로구나. 그렇게 밖에는 할 수가 없다.
그와 함께 죽은 자는 그와 함께 산다. 내가 십자가 밖에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 결과로 살고
있다. 그것을 자기가 받은 것만큼 살고 있다. 어떻게 살라고
내가 한 적이 없다. 하도 그런 것이 너무 빈약한 것 같아 요즘 사랑방에 누가 메일을 보내오는데 교훈
될 만한 것들이 많이 있어 그런 것이라도 실어보자고 하여 싣고 있다. 누구인지 모르는데 기독교인 같다. 성경구절을 꼭 넣는다. 교훈될 만한 것이 많은데 내가 교훈하자고
내가 여기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은 부가서비스로 사랑방에 올리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에게는 이런 것도 필요하니까 참고하라는 것이다. 보신 분은
알겠지만 지혜로운 것도 많고 존경할만한 것도 많다. 본받을만한 것도 많다. 그런 것을 보면서 우리도 본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올린다. 좋은 글도 많이 보내주고 내가 모르는 것도 많이 보내준다. 여러분이 참고해서 내가 여기서 말하지 못하는 것은 거기서 보기를 바란다. 아까운
시간에 귀중한 시간에 그것까지 말할 수가 없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라”
변화! 이 변화는 세상이 말하는 변화와 다르다. 하나님의
교회를 건축하기 위한 변화다. 그렇게 기억하기 바란다.
[ 기 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먼저 우리를 필요로 하시고 우리 앞서가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전에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했던 것처럼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은 교회를 통해서 당신이 살아 움직이고 당신이 운행하시는
것을 우리에게 보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뒤따라가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께서 늘 앞에 서셔서 모세가 앞에 서듯이 여호수아가 앞에 서듯이 늘 앞에 서서 구름기둥과 불기둥 앞에 서서
주님이 인도하여 주셔서 우리가 늘 그 뒤를 따를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