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 '기브앤드테이크'
1980년대 초반, 내가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우연히 알게 된 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돈을 조금 벌게 되었다. 물론 큰돈은 아니었지만, 내가 이득을 볼 수 있도록 그 친구가 나름대로 많은 신경을 썼다. 나는 돈을 번 것보다도 나에게 그렇게 마음을 써 주는 친구를 얻었다는 것이 더 기뻤다. 그래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뒤부터 그 친구와 멀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로 만나거나 연락을 주고받는 횟수가 점점 줄더니, 이제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나는 그 이유를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인사를 말로 혹은 마음으로만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돈이 아니어도 좋다. 하다못해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준비해야 한다. 그렇게 주고받고, 서로 나누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진짜다. 이건 친한 친구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때 친구 덕으로 돈을 벌었으므로 그 돈의 일부를 나누었어야 했다. 액수가 크지 않을 때에는 식사 대접을 하거나 간단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으로 때울 수도 있다. 나는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좋은 친구를 하나 잃은 셈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조금 치사해 보일 수도 있다. 친구 사이에 진심이 담긴 고마움을 표시하면 되지 꼭 밥을 사거나 선물을 해야 하는 건 아니잖은가. 이는 '기브앤드테이크(give and take)' 에 익숙한 서양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사고방식 같기도 하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사 온 사람이 이웃집을 떡을 돌리면, 그 접시에 하다못해 김치 한 쪽이라도 담아서 돌려보내는 것이 한국 사람들의 인정이다. 한국어에는 있지만 영어에는 없는 가장 대표적인 단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인정'이다.
심지어 돈 거래에서조차 인정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을 보면 놀랍기도 하다. 연대 보증이라는 이상한(?) 제도 때문에 한 사람이 잘못되면 일가친척들이 줄줄이 피해를 보는가 하면, 투자를 할 때조차도 합리적인 판단에 의존하기보다는 주먹구구식이나 인정에 끌려 돈을 집어넣는 경우가 많다.
따지고 보면 사실은 나도 이런 이야기를 할 자격이 없다.
내가 정말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내가 가장 어려웠을 때 큰 힘이 되어 준 친구였다. 어느 날 그가 나를 찾아와 사업을 하려는데 자금이 조금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확실한 사업이기 때문에 절대 실패할리 없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사업 아이템이 별로 성공할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말렸다. 그러나 사업을 구상해서 실행 단계에 접어든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충고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위험 요소들은 잘 보이지 않고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만 눈에 들어오게 마련이다.
몇 번 만류했으나 통할 리가 없었다. 나는 미련 없이 내가 가지고 있던 돈을 그 친구에게 투자했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나로서는 아주 오랫동안 아끼고 저축해야 간신히 모을 수 있는 거금이었다.
나는 그 돈을 친구에게 주면서 다시 내 주머니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역시 내 예측대로 친구의 사업은 얼마 못 가 실패했고, 나는 투자한 돈을 고스란히 날렸다.
이 사건은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만약 내가 한국적인 정서를 갖지 않은 전형적인 미국인이었다면, 고민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럴 경우 정상적인 미국인은 절대로 돈을 주지 않는다. 친구 아니라 부모 형제라도 마찬가지다.
돈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다. 때로는 돈에 얽매이는 게 싫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몸담고 살아가는 이상 어쩔 수 없다. 실패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토록 소중한 돈을 선선히 내준 이유를 나 자신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도 나는 그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친구를 원망하는 마음도 없다. 그는 또 얼마나 마음이 아파겠는가.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참 자주 일어나 정말 안타까울 때가 많다. 특히 벤처 열풍이 심할 때 주머닛돈 쌈짓돈 다 꺼내서 ‘묻지마’ 투자에 나서는 사람들을 볼 때는 무섭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기업이나 큰손들이 투자를 할 때는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데서 만회할 여력이 있다. 그러나 평생 피땀 흘려 모은 돈을 투자하는 개인의 입장에서는 한번 삐끗하면 그야말로 끝장이다.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