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 정공 행장(山齋 鄭公 行狀)
공의 휘는 이신(履新), 자는 수지(綬之), 자호(自號)는 산재(山齋), 성은 정씨로 해주 사람이다.
공은 영조 갑술(1754년) 윤 四월에 고남리(古南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이한 자질이 있었다. 길거리에 나가 놀 때, 초목(草木)의 맹아(萌芽)를 꺾지 않고 걸음을 걸을 때 개미집을 피하였으므로, 듣는 이는 그 덕이 있음을 알았다.
점차 성장하여 월뢰(月瀨) 조명국(曺明國)의 문하에 나아가 수업하였는데, 삼동(三冬)도 되지 못해서 [통감(通監)]과 [사략(史略)]을 독파(讀破)하였고, 그 이듬해 여름에는 능히 문구(文句)를 엮어 곧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구절이 있었으므로 조 공(曺 公)은 기재(奇才)라 칭찬 하였다. 약관의 나이 적에는 속학(俗學)이외에 유가(儒家)의 위기학(爲己學)이 있음을 알고, 대산(大山) 이 선생(李 先生)을 사사(師事)하여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강론, 변석(辨晰)한 바가 많으므로, 이 선생은 크게 추앙하였다. 공은 집안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年老)하여 혼정(昏定) 신성(晨省)의 절차를 오래도록 궐(闕)할 수 없으므로 사석(師席)을 떠나 돌아왔다. 또 만암( 晩巖) 김숭묵(金崇黙)을 찾아 질의(質疑)하자 김공은 그 학문을 시험해 보고 매번 추앙을 아끼지 않았다. 천성이 효도로와 어버이를 섬기는데 먼저 순응하여 그 뜻을 어김이 없었다. 일찍이 두역(痘疫)을 피하여 딴 곳에 나가 있다가 갑자기 모친의 병환 소식을 듣고 백리 길을 발섭(跋涉)하여 당일에 집으로 돌아왔다. 가인(家人)이 대문 앞에 서서 저지하며 이르기를 <시탕(侍湯)에는 딴 자제가 있다. 지금 마을에 두역이 한창 치렬하니 괜한 모험으로 모친의 걱정을 끼쳐 드릴 수 없다.>하였으나 공이 듣지 않고 들어갔다. 그러나, 끝내는 아무 탈이 없었고 친환(親患)도 약간 나아졌으므로, 이웃에서 다 ‘성효(誠孝)의 소치이다’ 하였다. 갑오(甲午: 1774년)에는 모친의 상을 만나 그 애훼(哀毁)가 법도에 넘었고, 항상 악실(堊室)에서 거처하였다. 추위가 심하여 온 벽(壁)이 꽁꽁 얼었으나 빈소를 떠나지 않았다. 심한 병이 없으면 질대(絰帶)를 벗지 않다가 수척(瘦瘠)이 병이 되어 거의 집상(執喪) 할 수 없게 되자, 부형(父兄)이 억지로 육즙(肉汁)을 전하였고, 병이 나아지자, 다시 이전대로 하였다.
갑진(1784년)에는 부친의 상을 만나 초종(初終) 범정에 정의와 의식을 아울러 다하여 조금의 유감도 없었고, 아침과 저녁에 슬피 곡하였으므로 이웃이 도리어 오열(嗚咽)하였으며, 하루에 두 번씩 묘소를 찾았는데 바바람도 피하지 않으므로 초동목수(樵童牧叟)도 감읍(感泣)하면서, 참으로 효자라고 하였다. 아우와 우애가 있어 계(季)씨 병에 손수 대변을 치웠고, 십년동안 한 이불을 사용하였으며, 의복도 함께 입곤 하였다. 신임(辛壬:1791~1792)의 흉년을 만나서는 한가지의 먹을 것을 얻으면 먼저 들지 않고 먼저 사람을 시켜서 계씨의 사정부터 묻곤 하였다. 무릇 제사에는 선대(先代)에 대해 애(愛)와 경(敬)을 다하였고 제물의 풍성을 요하지 않았으며, 사람이 소를 잡아 포(脯)를 만드는 것을 보면, <나라에 금령(禁令)이 있으니, 희생(犧牲)을 잡는 일은 온당치 못한 듯 하다. 가세(家勢)의 유무(有無)에 맞추어 닭이나 돼지를 대용한들, 무엇이 나쁘겠는가?>하였으며 제계(齊戒)가 끝나는 날에도 문밖에 나가지 않았다. 가세가 본시 청한(淸寒)하였으나 조수(操守)가 더욱 확고하여 아무리 하찮은 물건이라도 일찍이 남에게 비의(非義)의 것을 요구 하지 않았고, 처자(妻子)에게도 경계하기를, <삼가 남에게 꿈질 하지 말라. 만약 갚지 못하면 실신(失信)이 된다.> 하였다.
일찍이 식량 사정이 급하여 김공 하주(金公河柱)에게 편지를 보내어 꾸어 주기를 청하였는데 김공은 답하기를, <형까지도 남에게 이 같은 말을 꺼내는 것을 보니, 사나운 정사(政事)가 호랑이 보다 더 심한 것을 알겠네>하였고 한 사람이 비웃기를, <가난한 집에서 모자라는 것을 꾸는 것은 상례인데, 그대의 처자에게 경계한 말은 스스로 그 잘못을 답습한 것이다.>하였다. 공은 사례하기를, <친구사이에 서로 꿈질하는 일이 상례리기는 하나, 그 사람이 아니면 불가하다..>하였다. 일찍이 수일 동안 끼니를 잇지 못한 적이 있었으나 이웃에서는 그 글 읽는 소리만 듣고, 굶주리는 줄은 알지 못하였으며 ,울타리가 초라하고 봉필(蓬蓽): 봉호(蓬戶)와 필문(筆門)이 쓸쓸하였다.
아배(兒輩)가 혹 전포(田圃)를 가꾸고 있으면 공은 <학문에 힘쓸 나이에 그 지취가 비루하니, 이상 더 보잘 것이 있겠는가>하며 개탄을 마지않았다. 동당(同堂)의 자제들을 산재(山齋)에 모아놓고 [소학(小學)을 가르쳤는데, 교수(敎授)에 차등을 두고 그 과정(課程)을 엄격히 하며 엽등(躐等):등급을 뛰어 넘음)을 경계하면서, <이는 우리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심법(心法)이다>하였다.
서적(書籍)에 벽(癖)이 있어 젊어서 늙음에 이르도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더욱[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과 모든 성리서(性理書)를 잠심(潛心)해서 탐구하여 천인(天人), 성명(性命)의 즈음을 깨달았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글도 두루 통하였다. 그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고고(高古) 하였고, 손을 대하는 데는 각기 그 사람에 따라 종용히 관대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글 읽는 선비임을 알지 못하는 정도였다.
김공 상발(金公 相發)은 만년(晩年)에 사귄 친구였다. 공이 그 집을 방문하여 기삼백(朞三百)의 주설(注設)과 태극음양(太極陰陽)의 묘리(妙理)를 변설(辨設)하자 김공은 기쁜 표정으로, <이 고장에 이 같은 고사(高士)가 있었으나 알지 못하였으니,이는 나의 잘못이다.>하였다.
벗을 사귀는데는 다정한 사람을 취하여 세속과 구차히 부동(附同)하려 하지 않았으며 규각(圭角)이나 간격을 위주 하지 않고 자신을 보통 사람처럼 여기어 마치 유약한 사람으로 자처(自處)한 때문에 세상에서는 더러 공의 신분을 알지 못하는 이가 있었다. 신당 선생의 실기를 교정하는 일로 대둔사(大屯寺)에서 조 구당(趙 舊堂)과 회합하였는데, 구당이 물러 나와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외에도 一사(舍)쯤 되는 거리에 이 같은 은덕군자(隱德君子)가 있었는 줄은 몰랐다.>하였다.
도사(都事) 이사겸(李思謙)은 공을 한 번 만나 보더니 심지( 心知)로 허여(許與)하여 매번 동류(同類)들에게 공에 대해 늘 말하기를 <정수지(鄭綬之)는 학문에만 전력할 뿐 애당초 이해득실(利害得失)의 영역에 뜻이 팔리지 않았으니, 사람들에게 흠선(欽羨)해도 미칠 수 없게 한다.>하였다.
기미(1799년) 정월 19일에 사십육세(四十六歲)를 일기로, 종질(從姪) 유숙(惟俶)의 집에서 세상을 떠나, 고남(古南) 성산(星山) 간좌(艮坐)에 장사 지냈다.
배(配) 함양(咸陽) 박씨(朴氏)는 내경(來慶)의 따님으로 임신(1752년) 정월 14일에 태어나서 갑신(1824년) 삼월 24일(三月 二十四일)에 세상을 떠나 상곡(上谷) 경좌(庚坐)에 장사지냈다.
아! 공은 뛰어난 재주로 일찍부터 조 월뢰(趙 月瀨)에게 나아가 시가(詩家)의 정맥(正脉)을 체득하였고, 중년에는 대산(大山) 이 선생(李 先生)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여 학문하는 방법을 알았다. 물러나서는 강우(江右)에 궁벽하게 거처하여 성현(聖賢)의 글에 구심(求心)하였을 뿐, 위무(威武)를 두려워하거나 가난을 병되게 여기지 않았고, 겸손하고 호고(好古)하는 성실이 시종(始終) 변함이 없었다.
공의 발인 때에는 탁천(濯泉) 김 호찬(金 虎燦), 팔포(八圃) 권 사한(權 思漢), 탄은(炭隱) 이 사겸(李 思謙)등 제현(諸賢)이 곡(哭)과 만사(輓詞)에 이어 제(祭)를 드렸다. 여러 만사 중에<옛날 평천의 화석은 자네 선대(先代)의 집인데, 십년 동안 깊숙한 산은 처사의 거처일세. 정확 상세하여 마음 간수하는 법 얻었고 박식(博識)은 온 서가(書架)의 서적을 통하였네.>하였고 또, <옛날 누가 남주의 고사전을 지었던가 내 수중에 붓없는 것이 유감일세>하였으며, 또,<저승엔 형제 서로 만나는 즐거움이 있겠지마는 살아 있는 우리는 어떡하라는 건지!>하였고 또, <그 말은 청고해서 읽는 것보다 낫고, 시는 경계 담겨서 스승될 만 하였네>하였으니,이는 다 당시에 모은 말로, 공의 아름다운 행, 덕(行, 德)의 줄거리를 볼 수 있다.
아 공의 평소에 남겼던 약간의 시, 문(詩,文) 잠경(箴警)이 거의 다 좀벌레에 상하여 그 여광(餘光)을 뵐 수 없으니, 어찌 자손의 통한(痛恨)뿐이겠는가. 세대가 점차 멀어지고 유광(幽光)이 영원히 인멸될까 염려하여, 그 대략을 뽑아 이 다음 집필 군자(執筆 君子)를 기다린다.
병신구월에 방후손(傍後孫) 우섭(禹燮)은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