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우(陸羽 733-804)의 자(子)는 홍점(鴻漸) 또는 계자(季疵)이며, 호(號)는 경능자(竟陵子), 상저옹(桑苧翁), 동강자(東岡子) 등이고, 일명 질(疾)이라고도 한다.
당현종(唐玄宗) 개원(開元) 733년에 경능군(竟陵郡 현재 호북성(湖北省) 천문현(天門縣)에서 태어났다. 735년 경능군 소재 용개사(龍蓋寺) 주지스님인 지적선사(智積禪師)가 서호(西湖) 물가에서 울고있는 3살 먹은 고아 육우를 자신의 사찰에 데리고와 길렀다.
지적선사는 자신의 성(姓)인 육(陸)씨와 역서의 점괘와 연결시켜 고아의 이름을 육우(陸羽) 호는 홍점(鴻漸)이라 지어주었다.
어린 육우는 절에서 불경 공부외에 주지스님의 차 끊이는 일도 맡아 했다. 비록 절에서 생활하지만 어린 육우는 불경 공부보다는 유학(儒學) 공부에 더 매력을 느껴 점차 절 생활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육우가 9살이였을 때 어느날 주지스님에게 유교(儒敎)에서는 자식을 두지 않는 것이 제일 큰 불효라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불효를 범하고 출가할 수 있습니까? 라고 대들기도 하였다. 그런 후 12살이 되던해 용개사(龍蓋寺)에서 뛰쳐나와 극단에 들어가 단역배우로서 광대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후에 그는 해학(諧謔) 3편을 쓰기도 하였다.
육우는 비록 얼굴은 못 생기고 말마저 심하게 더듬었지만 성실하고 재주가 많아 뭇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746년 경능태수(竟陵太守) 이제물(李濟物)이 연극 관람중 육우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그를 화문산(火門山)에서 유교(儒敎)를 공부할 수 있도록 추천해 주었다.
752년 새로 경능으로 부임한 태수 최국보(崔國輔)와 의형제의 망년지교를 맺은 후 그는 상류층 인사와 번번하게 접촉하여 많은 인간관계를 맺게된다. 755년 안록산(安록山)의 난을 피해 24~25살 때 절강성(浙江省) 호주(湖州)에 정착한다. 후세는 호주의 정착을 가르켜 육우의 제2고향 이라고 불러기도 한다.
차의 명산지인 호주에 정착한 육우는 어린시절 용개사(龍蓋寺)에서 터득한 차에 관한 지식을 십분 활용하여 차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이 시절 육우는 당대의 시인이자 차에 관한 지식이 풍부한 비구승 교연(皎然)과 교분을 갖는다.
교연(皎然)의 적극적인 권유에 따라 육우는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차에 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28세 때 다경(茶經)의 초고(草稿)를 완성한다.
774년 육우는 호주자사(湖州刺使) 안진경(顔眞卿)이 운해경원(韻海鏡源)을 저술할 때 작업에 참여하여 차의 역대 이야기를 수집하였고 그 줄거리를 자신의 저서 다경의 칠지사(七之事) 편에 보충 편집하여 비로소 다경(茶經)을 탈고하였다.
이렇게 육우가 10여년 세월에 걸쳐 정립한 다경(茶經)은 세계 최초의 차 전문서로서 뿐만아니라 후세 차에 관한 모든 학문의 지침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