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의미와
각국의 부활절 축제
(요 11:25–27)
시작하는 말씀
구약성경에는 몇몇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4:35절에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일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13:21절에 엘리사가 죽어 장사되었습니다. 장례를 치루는 자들이 모압의 도적떼를 보고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던지고 도망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습니다. 지혜 자들과 선지자들이 부활에 관해 언급한 사실도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그 사상이 매우 미미한 편입니다. 따라서 구약은 부활신앙의 씨앗이 움트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구약에서 신약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점진적으로 발전되었습니다. 바로 그 계시의 정점이 주님의 부활과 우리의 영생입니다.
본문은 신약에 실려 있지만 그 시기와 내용은 구약과 신약의 한가운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장차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신성을 드러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됨을 우리는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구약의 부활 신앙
복에 관한 구약과 신약의 견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신약에는 거의 현세적인 복의 개념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에도 현세적인 복의 개념은 없습니다. 거의 현실에서 벗어나는 내세적인 복의 개념입니다. 반면 구약의 복의 개념은 대부분 현세적입니다. 구약의 축복의 장이라 할 수 있는 신명기 28 장을 보면 거기서 내세적이거나 현실 초월적인, 혹은 영적인 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에 부활과 영생의 사상이 아예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에녹과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하였으며(창 5:22-24 ; 히 11:5 ; 왕하 2:11, 12), 한나의 노래에서(삼상 2:6), 욥의 고백에서(19:25-27), 다윗의 노래에서(시 16:9-11), 예언자들의 예언에서(사 26:19 ; 겔 37:1-10) 우리는 부활 사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에는 부활 사상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으며, 있기는 있되 매우 희미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희미한 부활과 영생의 사상을 확실히 드러내 주는 것이 주님의 부활입니다. 주님의 부활에서 모든 것이 확실하게 됩니다.
주님의 육체 부활
우리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은 현세에로 다시 복귀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세에로 복귀하는 자는 반드시 다시 죽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죽었습니다. 회당장야이로의 딸도 죽었습니다. 본문의 나사로도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다시 죽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부활은 엄밀히 말해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은 영생으로 직결되는 부활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구약의 모든 성도들의 영생을 위한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 주님이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는 순간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27:51-53)고 했습니다. 여기 부활한 성도들은 물론 구약시대의 성도들입니다. 전설에는 욥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들은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을 예표로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려 많은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후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
스웨덴의 노벨상 작가 “라게르크비스트”가 쓴 “바라바”를 보면, 민란을 꾸민 도적 바라바(막 15:7)가 자신을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서 근심스럽게 바라보는 장면이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 사나이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강한 의문을 품고 고뇌하던 바라바는 자신을 위해 죽으신 그분이 인류의 메시야임을 마침내 깨닫게 되고, 당시 로마 방화사건에 스스로 연루되어 그도 예수님처럼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됩니다.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영적 부채감에 기꺼이 주님 가신 길을 자초한 바라바는 십자가 고난 너머에 있는 부활의 영광을 보았던 것입니다. 탁월한 작가의 상상력은 복음서에 극히 제한적으로 기록된 한 죄인의 전말을 극화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곧 “바라바”임을 고백하게 합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헬라인들은 영적 지식을 가지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구원은 율법으로도, 영적 지식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율법은 거룩한 것이나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그것을 지킬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며, 인간의 영육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기적을 체험
부활은 종말론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반면에 현세적인 의미도 분명히 있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는 과정에서 우리는 부활의 현세적인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부활의 기적을 우리의 생활에서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나사로의 부활과 같은 기적적인 은혜와 축복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의 주님으로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환난 때에 주님을 찾아야
나사로가 죽을병이 들었을 때 사람을 보내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요11:3)라고 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그 가정에서는 주님을 찾았습니다. 주님의 심방을 요청했습니다. 어려울 때 주님을 찾을 마음이 있다면, 그러한 신앙이 있다면 부활의 권능이 가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항상 주님의 사랑을 받아야
예수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가자”(5-6)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나사로의 가족들을 본래 사랑하셨습니다.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를 본래 사랑하셨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상시에도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나사로의 가정과 가족들은 주님의 사랑을 받도록 생활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위해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였습니다. 마르다는 주님 평생에 음식대접을 가장 잘 한 자 중의 하나였습니다. 나사로는 주님과 친구로 지냈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날에는 반드시 자기들의 집으로 영접하여 사랑을 듬뿍 쏟은 자들이었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믿어야
나사로는 이미 무덤에 있은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마르다가 주님을 만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라고 했습니다. 마르다는 주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마르다는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라고 말했습니다. 마르다의 신앙은 “사람은 이미 늦었다 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은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는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의
장애물을 제거해야
우리 주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 으로 가셔서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무덤 문인 “돌을 옮겨 놓으라”(39)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덤문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그것을 치우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여기서 실패합니다. 내가 할 일과 주님이 하실 일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주여 믿사옵니다. 다 맡아서 하시옵소서”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끝맺는 말
부활의 주님을 믿으면 지나온 일들이 전화위복이 됩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으면 현재의 일들이 복으로 바뀝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으면 앞으로 될 일들이 복으로 닥아옵니다.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서양에서 토끼는 눈을 뜨고 자는 동물이어서 밤(어두움)을 이긴 부활의 상징적인 동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부활절이 되면 어린 양이나 토끼 모양의 과자를 만들어 이웃과 나누기도 한다고 합니다.
각국의 부활절 풍속 !
네델란드 !
성 토요일 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촛불 행열을 갖고 함께 노래하며 춤을 추며 보냅니다. 아이들은 성주간동안 집집마다 다니며 계란을 얻어 모읍니다. 대부분 가정에서는 아름답게 장식한 부활 화환을 문앞에 달아 둡니다. 또 집안은 노란 봄 꽃들로 장식하고 부활 달걀을 정원에 있는 나무에 달아 놓기도 합니다.
스페인 !
전국 각지에서 성 금요일에 수난 행열을 거행합니다. 행진을 하는 동안 그리스도의 마지막 한 주간의 행적을 재현해 보입니다. 부활절이 되면 성모 마리아께 꽃을 봉헌하는 프레이드를 벌입니다. 또 투우경기전에 길거리에 소를 풀어서 경기장으로 몰아 넣는 풍습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부활 음식으로 달걀과 돼지 등심, 여러 가지 고기를 넣고 구운 오르나소 빵 등이 있습니다. 또 흔히 볼 수 있는 카스텔라는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에서 먹던 부활 빵입니다.
콜롬비아 !
콜롬비아에서는 부활절에 바닷가 지역 등에서 카니발 때와 비슷하게 평소음식 보다 특별히 단 음식을 마련하고 거북이과 고기들을 준비하기도 합니다.
아일랜드 !
부활절 아침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해돋이를 보게 합니다.
유럽각국 !
행운과 성공을 의미하는 도ㅐ지고기,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빵이나 과자를 먹습니다. 밀가루와 달걀들을 반죽해 어린 모양으로 빚어 오븐에 구워내 승리의 깃발을 꽂고 부활기간동안 나눠 먹습니다.
이탈리아 !
부활절에 식품점 등에서는 초코렛 계란을 만들어 아이들 선물용으로 판매합니다. ‘콜롬바 빠스꾸알레’라는 케익도 부활절의 음식입니다.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모양의 빵인데 부활절에만 먹는 방입니다. 삶은 계란을 넣은 빵, 어떤 지방에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의미에서 양고기를 먹기도 합니다. 부활절 휴가로 성 수요일부터 부활절 다음 월요일까지 지내는 사람들은 다음 월요일을 ‘천사의 월요일’이라고 하여 가족 친구들끼리 소풍을 가는 날로 지내기도 합니다.
폴란드 !
‘물에 젖은 월요일(Lany Poniedzialek)’을 지킵니다. 부활절 다음 월요일, 젊은 남자들이 젊은 여자에게 물을 끼얹거나, 물총을 쏘는 정통을 말합니다. 친한 사람 뿐 아니라 아무나 보이는 대로 젖게 만들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들어가기 전부터 봄이 오기전에 물을 뿌리면 질병이 물러간다는 풍습이었는데 지금은 ‘세례’라는 의미가 더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프랑스 !
성 금요일부터 부활절까지 성당의 종이 울리지 않습니다. 교회의 종이 로마로 날아간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부활절 아침 일찍 종이 날아 가는 것을 보기 위해 달려 나갑니다. 이때 부모들은 초콜릿달걀을 숨기고, 돌아 온 아이들은 초콜릿달걀을 찾아 다닙니다. 저녁에는 훈제된 어린 양고기를 먹으며, 아이들은 왕관 모양의 빵과 부활달걀을 만들기를 즐긴다고 합니다.
핀란드 !
부활절 이전에 아이들은 작은 화분에 독보리를 심습니다. 푸르른 새순은 봄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전통적으로 부활풍습은 달걀과 관련되어 있으며, 특히 달걀 숨기고 찾는 놀이가 인가라고 합니다. 또 부활절 아침엔 춤추는 태양이라는 시간을 가집니다(이상은 주로 카톨릭 국가에서 이루어지는 행사이기도 합니다) (이상 한글-라틴,라틴-한글 사전)
기린꽃이 아름답게 피는 것처럼
부할의 능력이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