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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morning 36! '흐르는 강물처럼‘
쫄따구들 놀고 있는 판에 거물이 글을 올리니 이거 영~ 글 올리기도 송구스럽고 또 한편 반갑기도 하고 아무튼 좋습니다^^~ 글 쓰기 한 수 배우는 좋은 기회로 알고 기대하겠습니다. 낼은 장맛비예보가 있어서인지 후텁지근한게 날씨 영 안 좋습니다. 요즘은 이성의 시대가 가고 감성의 시대가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창의적인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라는 표현도 자주 듣습니다. 갈수록 우리 같은 아나로그세대는 시대적응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예전엔 들어보지도 못했던 메르스 때문에 이번 달 들어서는 한 주간 한주간이 마치 살얼음판을 내 딛듯 조심조심 건너가는 기분입니다. 매일 아침 출근 때마다 정문에서 들이대는 체온감지기 때문에 잠깐씩 긴장도 했습니다. 늘 하던 얘기대로 ‘흐르는 강물처럼’입니다. 오늘은 멕시코얘깁니다. 보다보면 프란시스카(Francisca)라는 멕시코여인도 언젠가는 등장 할 겁니다. 이번은 아니고 다음 다음입니다^^~ 아무튼 이번 기회에 저와 함께 멕시코를 좀 더 알아 보십시오. Have a good time!
'흐르는 강물처럼' - 멕시코 이야기(1)-
멕시코(Mexico)
위치 : 북아메리카 남 서안
면적 : 197만 3000㎢(한반도의9배, 남한의 20배)
인구 : 1억2000십만명(2014) )
수도 : 멕시코씨티
정체 : 연방공화제
공용어 : 에스파냐어(스페인어)
통화 : 페소(Peso) 환율 : 1Peso=110원(2014)
1인당 국민총생산 : USD.10,000$(2015)
나라꽃 : 달리아
멕시코 이야기를 들어가며
젊은이는 미래를 그리며 살고 나이가 들면 과거를 회상하며 산다던가, 가끔씩은 지난 세월을 더듬어 그때 있었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생각이 들 때 가있다. 나는 1999년8월30일 부터 2001년9월20일까지 2년여를 멕시코의 동부지역 멕시코 만에 닿아있는 땀피꼬(Tampico)라는 조그만 도시에서 SK건설이 수행ㄹ한 멕시코석유공사(PEMEX)의 정유공장 신축 및 증설 프로젝트에서 일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때, 틈만 있으면 멕시코의 이곳 저곳을 여행했으며 또한 멕시코에 관한 책들을 즐겨 읽었다. 멕시코는 참으로 매혹의 나라였다. 나는 여행할 때마다 내 족적을 기록했고 그러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 기록들을 정리한 멕시코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내가 무슨 글 쓰는 재주가 있겠는가. 그저 오래되어 빛 바래고 희미한 기록을 더듬거리며 생각나는 대로 긁적거려 볼 뿐이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멕시코에 대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이 자경 지음) 와 “아스텍 제국 그 영광과 몰락”(저자:세르주 그뤼진스키(Serge Gruzinski))과 그 밖에 여러 신문 잡지에서 스크랩한 멕시코관련 기사를 인용해서 요약해 적었음을 밝힌다.
제1장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 요약
1905년(光武9) 4월4일, 4년만 일하면 큰 돈을 벌어 금의환향할 수 있다는 꿈에 부푼 취업 이민자들은 제물포항구를 출발해 멕시코로 향하는 영국기선 일포드(S.S.ILFORD)호 에 몸을 실었다. 대부분 남자들은 상투머리에 갓을 쓴 바지저고리 차림이었고 여자들도 치마저고리 차림이었다. 그들 1,033명 가운데는 일반농민과 노동자들 외에 대한제국 시절의 구식군대 퇴역군인 200명을 비롯해 소수의 양반계급과 무당, 내시(3명) 들도 섞여 있었다. 각자 목적은 다르지만 대한제국의 신민으로 살아가는 일이 여의치 않아 이역만리로 떠나는 이들이다. 1,033명의 인적구성은 남자 702명, 여자 135명, 아동 196명이며, 이 가운데 독신은 196명, 가족 이민은 257가구로 가족 이민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한인들의 이주 경로는, - 제물포를 출발해서 41일간 태평양을 항해 한 끝에 → 5월15일, 한국으로부터 이역만리 멀리 반대편 태평양 연안에 접해있는 멕시코의 최남단 도시 살리나 크루스(Salina Cruz.북위 16도)에 밤이 깊어 도착해서 그곳 들판에서 하룻밤을 잤다. 그러고 이튿날 아침에 → 화물기차를 타고 한나절 만에 멕시코만의 남쪽 관문인 베라쿠루스주(州)의 코앗사 코알코스(Coatza Coalos)로, 여기서 배를 타고 → 이틀 밤과 한 나절이 걸려 멕시코만을 따라 유카탄의 동북단 항구인 프로그레소(Progreso, 북위 22도)로, 다시 → 기차를 타고 유카탄의 수도 메리다(Merida).로, 이렇게 5일 동안 이동을 했고, 메리다 에서 25개 이상의 에네켄농장, 황무지 개간현장, 시멘트 원료의 채광장 등으로 분산되었다.
41일간의 태평양 항해 중 심한 뱃멀미와 영양실조로 3명이 죽어 바다에 수장됐고 또 배에서 1명의 신생아가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 아이는 바로 최병덕(催秉德/ Jose Sanchez Pac(호세 산체스 팍))이었다고 한다. 그는 1950년대 중반에 대한인국민회 산하 묵경(멕시코시티)지방 회의 마지막 회장을 역임했으며 한-멕 국교 수립이후 새로 설립된 멕시코한인회장을 맡은 인물로 1973년에 이민후예로서 유일하게 자전적인 이민사 ≪(僑胞歷說)≫(Memorias De La vida y obra de los Coreanos en Mexico)을 출판하기도 했다. 4년 동안의 계약 노동이었지만 부채노예라는 특이한 농노 이민이었고 당시만 해도 가장 먼 지역으로 떠났으며 국교나 인적왕래가 전혀 없던 낯선 라틴문화권 인데다 가장 더운 지역으로 떠났던 그들은 이민사기극의 희생물이 돼 4년 동안이나 노예생활을 해야 했고 계약만료일인 1909년 5월 12일에 풀려났으나 간교한 부채노예제의 술책으로 한동안 농장에 묶인 경우도 많았었다. 그것은 농장에서 결혼한 원주민 부인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농장에서 얻은 부가 소득 물 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어서 4년이 빨리 가서 귀국할 날이 오기만 학수고대하며 온갖 고통을 견뎠던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고종황제의 폐위소식도 몰랐을 만큼 거의 4년 동안을 바깥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생활을 했고 노예의 수렁에서 벗어난 후 가장 서럽게 운 것은 한일합방이 됐다는 비보를 들었을 때였다.
1909년 5월 노동계약에서 간신히 풀려난 한인들이었으나 그러나 그들은 돌아갈 조국이 없어졌으니 그 참담한 절망감은 오죽했으랴. 돌아갈 뱃삯을 저축하며 여자들은 또르띠야(Tortilla/옥수수가루 전병)에 소금만 쳐서 먹었던 그들이었다. 돌아갈 조국이 없어진 한인들의 대부분은 그대로 다시 그 지옥 같았던 에네켄농장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고 일부는 다른 노동현장으로 또는 자유업으로 전향하기도 했다. 말이 자유업이지 이들이 주로 생존을 위해 한 일은 우리가 어릴 때 많이 보아왔던 “양은 냄비나 깨진 독 때우세요. 옅고 일부는 시계점포나 잡화상에서 종업원으로 일했다. 1921년 288명이 쿠바로 제2의 이민을 떠나 인구증가의 분산을 초래했으나 1996년 현재 한인후예는 5대째로 이어지고 있으며 멕시코에 살고 있는 한인후예의 인구는 2만 명 정도이며 세대수로는 4천 여 세대로 보고 있다. 조국이 해방된 후 오직 20가구(70명)만 귀국선에 올랐을 뿐 남은 자들은 모두 남의 땅과 남의 하늘을 떠도는 고혼이 되어버렸다. 한인이민 1세들은 동족 혼을 고집하며 “이 나라 사람(현지인)과는 결혼하지 말라”고 유언까지 할 정도로 피의 순수성을 원했으나 멕시코가 혼혈사회라는 배경 외에 소수 한인 집단이라는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현지 배우자를 받아드릴 수밖에 없어 혼혈속도가 계속 빨라져 4세 5세에 와서는 100퍼센트 혼혈족이 되었다. 내가 근무하던 도시 땀피코(Tampico)근처에도 이민3세인 할머니 두 분이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 자손은 많은데 가난한 교포로 알려져서 매월 말이면 한국 근로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전달하곤 했다. 나는 기회가 안돼서 방문을 못했지만 다녀온 사람들의 얘기에 의하면, 영락없는 한국인으로 아리랑을 알고 김치를 담가먹는다 했다.
제2장 태양과 선인장의 나라 멕시코
멕시코는 선인장과 사막, 솜브레로라는 챙이 넓은 맥고모자로 상징되는 태양과 고원의 나라다. 실제 국토의 70%가 해발 460m이상 고지대다. 기원전부터 중앙멕시코 고원지대에는 고도로 발달한 문명들이 태동하여 개화했다가 소멸됐다. 하나의 문명이 사라지면 그 폐허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이 생겨나기를 거듭한 끝에 멕시코 최후의 아즈텍문명이 탄생한다. 마야문명에 이어 번창한 아즈텍문명은, 1518년 스페인의 꾸보총독 벨라스께스가 멕시코를 정복하기 위해 파견한 600여명의 군대와 18필의 말 그리고 수 문의 대포를 끌고온 스페인의 젊은장군 에르난 꼬르테스에게 정복됨으로서 찬란한 시절을 접었다. 인구 3천5백만의 대제국이 불과 6백여 명의 낭인집단에 의해 멸망한 것이다. 1519년, 스페인의 에르난 꼬르테스(Hernan Cortes)에 의한 멕시코 정복은 역사와 전설의 가장 독특한 만남이었다. 1519년 2월 10일, 코르테스는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먼저 쿠바를 침공해 함락시켰다. 그 뒤 에르난 꼬르테스는 약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멕시코만 베라크루즈에 상륙한다.
그 당시 멕시코에는 아즈테카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으며 아즈테카의 수도는 테노치티틀란(지금의 멕시코시티)이었다. 이 당시 아즈테카인들은 동방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줄 신(神)이 온다는 전설을 믿고 있었으며 스페인의 백인병사들이 나타나자 멕시코인 들은 이들을 그 전설속의 신으로 생각했다. 꼬르테스가 멕시코에 상륙한 1519년은, 묘하게도 아스테카의 역(曆)이 정한 52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그들의 신(神), - 케트살코아틀(Quetzalcoatl)의 귀환 날짜와도 일치했던 것이다. 케트살코아틀, 즉 깃털 달린 뱀이 다른 신들과 같이 돌아온 것이 아닌가.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먼 옛날 깃털달린 뱀이 떠났던 동쪽으로부터 온, 철옷을 입고, 턱수염을 기르고, 피부가 하얀 이상한 사람들, 멕시코에서는 아무도 본 적이 없는 말(馬)을 소유한 사람들, 혹시 그들은 그들이 기다리던 신(神), 케트살코아틀이 아닐까? 아스텍의 황제 목테수마는 그렇게 믿었다. 그 비극적인 오인이 역사의 한 장을 뒤바꿔 놓았고, 인구 3천5백만의 대제국이 불과 6백여 명의 백인병사들에 의해 멸망한 세계사의 미스터리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 된 것이다.
멕시코를 정복한 꼬르테스의 충실한 동료이자 역사가였던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Bernal Diaz del Castillo)가 기록으로 남긴 이야기다. 결국 멕시코는 동방에서 자기들을 구원해줄 신이 온다는 자기들 전설속의신을 스페인 백인병사로 오인한 일차적 비극과 스페인병사에의해서 멕시코에 퍼트려진 각종 전염병에 의해서 멸망하고 말았다. 그 당시 스페인 병사들이 멕시코에 퍼트린 신종전염병의 맹위는 참으로 대단했다. 1519년 꼬르테스가 멕시코해안에 상륙했을 때 아즈테카인들은 스페인병사들을 동방에서 온 자기들 전설속의 신으로 오인하고 처음에는 환대했으나 곧 자신들이 속았음을 알게 됐고 격렬히 저항한다. 형세가 불리해지자 꼬르테스는 아즈테카의수도 테노치티틀란으로부터 탈출하게 된다. 전열을 재정비한 그가 그 이듬해인1520년 아즈테카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다시 침공하여 함락시키는데 이때의 일등공신이 천연두 바이러스였다. 꼬르테스가 테노치티틀란을 침공하면서 데려온 쿠바노예들이 천연두를 퍼트린 것이다. 1년 이상 유행하면서 묘하게도 원주민들만 골라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 무서운 괴질은 용맹하던 아즈테카 병사들의 사기를 완전히 꺽어놓은것이다. 꼬르테스가 최종승리를 거뒀을 때는 아즈테카의 황제를 포함하여 주민 30만 명 의 절반이상이 괴질로 사망하고 없었다. 1518년에서 1531년 사이에 아메리카 원주민의 약3분의1이 천연두 때문에 목숨을 잃었고 연이어 홍역이 맹위를 떨치면서 살아남은 인구의 3분의2를 또다시 죽음으로 이끌었다. 홍역의 뒤를 이어 유행한 발진티푸스로 사망한 멕시코인은 1600년까지 200만 명이 넘었다.
아즈테카인 들은 자기 자신들의 비극적인 오인과 구대륙으로부터 유입된 바이러스와 풍토병으로인 해 멸망했으나 그들도 로마제국과 비슷한 시기에 화려한 문명의 전성기를 구가해온 민족이었다. 그리고 그 화려한 문명들은 소멸과 생성을 되풀이 하면서 스페인 정복 시대까지 면면히 전승되어왔던것이다. 그 문명과 관계 깊은 두 도시가 있는데 하나는 “신의도시‘ 테오티우아칸이며 다른 하나는 몇세기후에 발달한 툴라이다.
툴라는 멕시코시티 북서쪽 약 90km지점에 지금도 그 폐허가 남아있다. 툴라의 툴텍족(Toltecs)은 문명을 물질적으로, 기술적으로 또한 지성적으로 정제(精製)한 민족이다. 이들은 많은 신을 섬겼는데 그중에서도 주신은 케트살코아틀, 즉, 깃털달린 뱀’이었다. 그리고 같은 이름의 사제가 예식을 주관하며 툴라를 지배했다. 이후 툴텍족은 북쪽에서 몰려드는 야만족과 더 이상 융화할 수 없어서 툴라를 떠났다. 이들 중 일부는 멕시코 계곡으로, 또 다른 부류는 푸에블라 계곡이나 마야 문명의 세력권인 유카탄반도로 옮아갔다. '선인장에 앉아 뱀을 삼키는 독수리의 땅을 찾으라. 내가 너희를 이 세상 모든 것의 왕이 되게 할 것이다.’라는 예언을 믿고 2백 년 동안 약속의 땅을 찾아 멕시코 고원을 유랑한 아즈텍인은 14세기 말 멕시코계곡 호수에 도달했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은 마침내 선인장 위에 독수리가 앉은 땅을 찾게 된다. 스페인의 꼬르테스에게 멸망한 아즈텍인들은 바로 이 멕시코계곡에 살았던 부족들이다.
1521년 스페인의 식민지로 전락한 멕시코는 이후 300년 동안 정복자의 식민통치에 별다른 저항을 보이지 않고 순종하며 살아왔다. 그러던 멕시코는 1810년 9월 미구엘 이달고(Miguel Hidalgo)신부가 토지분배와 스페인지배의 종막을 요구하는 '돌로레스의 부르짖음(Grito de Dolores)'이란 선언문을 선포하면서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시작하게된다. 1821년 빈센트 게레로(Vicente Guerrero)가 이끄는 독립투쟁으로 코르도바 협정을 통해 의회가 구성되었고 마침내 스페인으로부퍼 독립한다. 독립한 후로도 멕시코는 오랫동안 군벌독재에 시달리며 혼돈의 시기를 보낸다. 그 와중에 1845년에는 미국과의 전쟁으로 유타, 텍사스, 네바다, 캘리포니아, 뉴멕시코와 콜로라도 등 영토의 절반이상을 잃게 되었고,
1858년에는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간의 내전까지 발생한다. 1910년 멕시코혁명이 일어났고다시 혼란의 시대를 거쳐서 1917년 신 헌법을 공포한다. 1929년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가 국민혁명당(PNR)을 창당했고 이는 곧 제도혁명당(PRI)으로 바뀌어 이후 2000년까지 71년간 집권해왔다. 1968년 라틴아메리카 국가론 처음 올림픽을 개최, 중남미의 기적으로 불렸지만 1976년 대규모유전 발견이후 공공투자 증대를 통한 성장전략을 펴다가 1982년 모라토리엄사태를 맞고 1987년과 1994년 재차 외환위기를 겪었다. 2000년7월 야당인 국민행동당(PAN)의 비센테 폭스가 대선에서 승리하므로서 71년 만에 멕시코는 정권교체를 이뤘다. 일단 정권을 바꾸는데 는 성공했지만 취임한지 3년이 지난 지금 예전보다 나아진게 없다는 불만의 소리가 높다는 보도는, 공약으로 내세운 빈부격차및 실업해소,부정부패및 범죄 척결,빈곤추방,교육개혁중 어느 것 한 가지도 쉬운일이 아니기때문일것이다. 인구는 약 1억명, 1인당 국민소득은 5천달러 수준이다. 멕시코는 남미국가 중 우리나라의 최대 교역 상대국이며 우리나라는 대멕시코 투자에 있어 아시아 지역에서 일본 다음으로 2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양국의 교역규모는 한국-중남미 모든 국가간의 교역량을 합친 것 보다 3배나 많은 20억달러에 이르지만 양국간 자유무역협정[自由貿易協定/FTA(Free Trade Agreement)]은 아직 체결되지 않은 상태이다. 양국 무역에 있어 자유무역협정이라는 법적인 틀이 마련된다면 양국간 교역량은 더욱 증대될 것이다. 1990년 멕시코는 노벨문학상수상자를 냈으며 수상자인 옥따비오 빠스(Octavio Paz)는 멕시코인의 특성으로 불리는 "마초(남자다움)"에 대해 "예측할 수 없는 힘"이라고 말했다. 과연 멕시코가 “예측할 수 없는 힘”을 바탕으로 그들 모두가 꿈꿔온 위대한 국가로 거듭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