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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새로운 씨의 시작
<창세기 4:25~5:32>
“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1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5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6 셋은 일백 오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 칠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8 그가 구백 십 이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9 에노스는 구십세에 게난을 낳았고 10 게난을 낳은 후 팔백 십 오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1 그가 구백 오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12 게난은 칠십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 사십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4 그가 구백 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15 마할랄렐은 육십 오세에 야렛을 낳았고 16 야렛을 낳은 후 팔백 삼십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 그가 팔백 구십 오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18 야렛은 일백 육십 이세에 에녹을 낳았고 19 에녹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0 그가 구백 육십 이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21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3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 칠세에 라멕을 낳았고 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 팔십 이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 그는 구백 육십 구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28 라멕은 일백 팔십 이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 라멕이 노아를 낳은 후 오백 구십 오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31 그는 칠백 칠십 칠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32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다음의 결과는 가인과 아벨이었다. 이것은 인간 속에 선악을 아는 지식을 결과가 가인과 아벨을 낳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새로운 족보가 시작되는데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아담 자손의 족보를 말할 때 가인과 아벨은 빼고 셋이 들어가게 된다. 아담 다음에 셋 순서로 간다.
여기서 왜 가인과 아벨은 빼버린 것인가?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그 결과는 끝나야 된다는 뜻이다. 계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어떤 경륜의 계획 안에 없고 제외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사람들이 거기에 있으니까 그 문제는 하나님의 경륜 밖에 있는 문제이다. 우리 인간들 속에 들어있는 그 문제이다.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이 다시 씨를 주었다고 했으니까 씨 문제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창조에서도 맨 처음에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주었다고 시작했는데, 씨가 어떤 씨냐에 따라서 결국 어떤 열매를 맺을 것인가, 어떤 결과를 맺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니까 씨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쉽게 말하면 씨를 지금 바꾸는 것이다. 가인과 아벨을 낳을 수밖에 없는 씨에서 씨를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셋으로 이어지는 씨를 낳은 것이다.
이 ‘셋’이라는 의미는 ‘정하여졌다’는 의미라고 한다. ‘지정된 것이다’는 뜻이다. 가인은 ‘획득한다’는 말이고, 아벨은 ‘숨’이라는 뜻이고, 셋은 ‘지정됐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이루시는데 있어서는 지정된 운명, 정해진 운명을 가지고 일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을 지으실 때도 사람은 이미 지정된 존재이다. 우리가 지정된 것을 가지고 활용할 수는 있지만 그 지정된 것을 바꿀 수는 없다. 알고 보면 정해진 존재이다.
우리가 정해졌다는 것을 알고 보면 인생은 아주 쉬워진다. 길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 가기가 쉽다. 그런데 길이 여러 개 있으면 쉬울 것 같지만 훨씬 어렵다. 사람들이 왜 인생을 사는 것이 복잡하고 번민에 쌓이는가? 길이 많기 때문이다. 길이 외길이고 한 길이면 번민할 것이 전혀 없다.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사람은 사람에게 정해진 운명을 알면 인생은 아주 쉽게 되고, 그 정해진 것을 모르면 자기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된다. 정해진 것을 알고 나면 자기 한계와 분수를 아는 사람이 되게 되고, 자기 분수를 아는 사람이 세상에서도 지혜로운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을 보면 자기 분수를 모르는 사람이다. 자기는 항상 1,000원밖에 없으면서도 10,000원이 있는 것처럼 잘못 착각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살 때 분수를 모르니까 혼란스럽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자기 분수를 알면 아주 쉽다. 인생이 이것이구나를 알면 아주 쉽다.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석가모니는 생로병사의 고리를 풀어보려고 해결해보려고 출발했을 것이다. 오리무중 같은 복잡하고 모르는 세계를 찾아보려고 출발한 자리이고, 예수님은 그 정해진 운명을 발견했기 때문에 더 이상 방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도 석가모니처럼 캄캄한 곳을 헤매어서 무엇인가를 찾을 것인가, 생로병사의 고리를 어떻게 풀 것인가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내게 보여주신 대로 정해진 것을 내가 발견하고 그 안에서 살 것인가? 이 문제이다.
사람들은 믿음의 세계도 자기가 개척해 나가는 어떤 무한한 세계라고 생각하기가 참 쉽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역시 그렇다. 그런데 내가 살아보니 결국은 발견되는 것이었다. 없는 것을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을 내가 발견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 된다고 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되게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이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와 하나인 것 같이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 것이라고 했다. 발견할 것이라는 말이다. 지금은 너희가 모르지만 그날에는 발견할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주님과 나 사이는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이미 있는 것을 알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이미 있는 것, 이미 정해진 것을 아는 것이 지혜라는 것이지 내가 어떤 것을 새로 만들어서 진리를 만들 수가 없다.
하나님의 세계는 셋으로부터 다시 시작되는데, 이 세계의 절대적인 원칙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는 정해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안의 사람은 정해져 있다. 우리가 새로운 계보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계획 속에 있는 것이니까 내가 그분의 계획 안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방황한 일이 없다. 30세까지 무엇을 했는지 모른다. 성경에 보면 어렸을 때 성전에 갔다거나 애기 때 애굽에 내려갔다는 것 외는 기록된 것이 없다. 아버지가 목수였으니까 집에서 목수 일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고 다른 아이들과 같이 자랐을 것이다. 똑같은 사람이었으므로 아무것도 다른 것이 없다. 구도의 어떤 길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삶을 살게 되었는가? 그것은 자기를 위해서 드리는 제물을 통해서 거기서 자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인생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왜 그는 십자가를 자기 운명으로 알고 갔는가? 제단에서 본 것이다. 구약의 제단은 신약의 십자가이다. 그 제단의 제물들이 자기의 뜻과는 상관없지만 주인의 필요에 의해 주인에게 드려진다는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로 내 뜻대로 내가 나온 것도 아니고 내 뜻대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결국은 나를 지으신 자의 뜻에 따라 만들어졌고, 지으신 자의 목적대로 쓰여지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정하여졌다는 뜻이다. 이것을 알면 인생은 아주 간단하고 단순하다.
우리가 예수 안에 오면 그분을 알게 되면 구도의 방황이 끝나게 된다. 어디서 무엇을 찾아본다든지 만들어본다든지 하는 모든 노력이 끝나게 되고 내 삶은 고속도로처럼 정해졌다. 그 길로 갈 수밖에 없고 또 그 길로 가는 것만이 안전하고 또 그 길로 가는 것만이 소망이 있는 길임이 아주 명백하게 보이게 된다. 옛날에 내가 충주에 있을 때 여고생 2명이 와서 음성이라는 곳에 어느 권사님이 예언을 잘한다고 거기에 가보겠다고 했다. 무엇 때문에 가보려고 하느냐고 하니 미래와 장래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간다고 하여 가보나 마나 뻔한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내 인생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런 곳에 안 간다고 했다. 내가 예수 안에 정하여져 있으니까 내가 예수 운명 외 더 있을 것이 있겠는가. 예수 이외 다른 것이 없으니까 갈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여학생들이 그 말을 듣고 갔는지 안 갔는지는 모르겠다. 옛날에 나도 그런 것이 많이 궁금했다. 혹시 누가 그런 것을 알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점쟁이를 찾아가지는 않았지만 예언자가 있다면 물어봐서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고 싶었다. 그런데 내게 정해진 길을 알고 나니까 그럴 필요가 전혀 없어지게 되었다.
내 운명은 예수 안에 정해져 있는 것이다. 사실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인류가 예수 안에 정해졌다. 그것을 모르는 것뿐이다. 어떤 사람도 예외가 없다. 지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사실은 그 운명은 예수 안에 정해져 있다. 그것을 단지 모를 뿐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당신은 예수 안에 결정된 사람임을 전하는 것이다. 당신이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지 정해져 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셋 안에서 태어났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아멘하면 자기 인생이 보이는 것이고, 그것을 듣고 모르면 어디로 갈지 모르니까 인생이 캄캄한 것이다. 무엇을 찾아 헤맬지 모르는 것이다.
절에 있을 때 스님의 생활을 보니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정결하게 한 다음 인경 종을 산사에서 아주 약한 소리부터 치기 시작하여 한참 울려 퍼지게 친다. 그러면 온 산에 소리가 퍼진다. 그리고 아침식사를 하고 나면 참선을 한다. 1시간이건 2시간이건 3시간이건 자기가 할 때까지 참선을 하는데 처음에는 염주를 빨리 돌린다. 그것은 생각이 많다는 것이다. 뒤로 가면 염주 돌리는 속도가 느려진다. 천천히 하는데 어느 순간에 가면 꾸벅꾸벅 졸고 있다. 염불 삼매경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매일 반복하는데 그렇게 하고 나면 기분이 만면희색하고 좋아한다. 그러면서 내면의 기쁨을 추구하고 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 성불을 못하셨으니 어찌하시겠느냐고 물으니까 인도환생(人道還生)하기를 소원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뭔가 암담하다는 생각을 했다.
뭔가를 찾고 있는 것이다. 평안을 찾고 있는 것인데, 아무리 평안을 찾는다 해도 관념적인 것이다. 자기에게 사건이 생기면 현실에 들어오면 그 관념적인 것이 사건을 해결할 수 없다. 산 속에 앉아서 참선할 때는 된다. 불교 경전들을 보니까 부처님의 세계 안에 있는 어떤 것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전부 인간의 심성 속에 내면에 잠재하는 어떤 세계들을 묘사해 놓았다. 알고 보면 전부 다 관념의 세계이다. 현실적인 세계가 아니다. 거기서 평안을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고 안정을 찾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참된 안정은 어디에 있는가? 내 길이 정해졌다는 것이 보일 때 안정이 있다. 자기 속에서 답답하게 찾아서 그 안에 있는 염화시중의 미소를 찾으려고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정해졌으면 편해진다. 사형수도 미결수로 있을 때는 바짝 마른다고 한다. 그런데 사형이 확정되고 나면 살이 찐다고 한다. 정해져버리니까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한다. 그때 가서 성경을 보는 사람도 있고, 말씀 듣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사람은 자기 운명을 알면 편안해진다. 그런데 굳이 사람은 그 운명을 부인하려고 한다. 하나님이 정해놓았다는 이것을 부인하려고 하기 때문에 번민이 생기는 것이다. 팔만번뇌를 그 운명을 인정하지 않고 가라앉히려고 생각하니까 얼마나 그것이 어렵겠는가. 10년을 해서 가라앉았는지는 모르겠다. 가령 성철스님은 10년을 해서 다 가라앉았겠는가? 만약 가라앉았지만 세상에 나와 다른 사람과 살면 그것이 될 것인가? 아주 의문이다. 혼자 산 속에 있으면 문제가 없다. 둘이 같이 살아보면 왜 문제가 없겠는가.
인격의 최종적인 점검은 교회 안에 있다. 연합 안에 있다. 창세기 2장에서 보면 한 사람을 창조해서 두 사람과 연합하게 만들었다. 남자를 만들고 여자를 만들어 연합하게 만들었다는 이 말은 결국 우리 인간의 완성은 개인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사회의 연합으로 완성된다. 내가 아무리 도를 닦아서 사람이 됐다 해도 다른 사람과 같이 살아보아야 안다. 살아보아서 살 수 있는지 없는지, 또 다른 사람의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지 안 되는지가 문제가 되는 것이지 자기 혼자 산 속에 앉아 있는데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밥해주는 사람 있고 옷 해주는 사람 있고 자식 걱정도 없고 아무것도 걱정될 것이 없다. 관념 속에서는 편안하다. 그러나 당장 현실 속에 내려오면 안 된다.
참된 평안은 우리가 셋의 족보 안으로 들어와야 된다. 5장에서 보면 이 셋의 족보가 노아까지 온다. 아담에서 노아까지 10대를 간다. 노아라는 이름은 위로와 안식이라는 뜻이다. 그 씨에서 그 열매가 나오는 것이다. 중간에 여러 과정이 있지만 그 씨는 결국은 과정을 거쳐서 열매를 맺는다. 왜 노아라는 사람이 나오는가? 위로와 안식이라는 결론이 왜 나오는가? 그것은 셋으로부터 다시 시작했기 때문이다. 셋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은 것은 절대로 노아가 나올 수 없다. 이것은 우리 인간 세계를 이런 묘한 방법으로 묘사해놓은 것을 알 수 있다. 10대라는 말은 완전하다는 뜻이다. 이 10대 동안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식 낳고 죽었다. 전부 다 똑같은 삶을 살았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보아도 다 똑같이 출생하여 자식 낳고 죽는 것이다. 그 안에 사업도 하고 별 것을 다 하지만 결국 쓸 일이 없는 것이다. 무슨 사업을 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는 하나도 가치가 없고, 기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출생하여 자식 낳고 죽었다는 것밖에 기록할 것이 없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 인생 속에서 에녹이라는 사람이 나오게 된다. 이 에녹이라는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이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는 그를 취했다는 말인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이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했는데, 에녹만 죽었다는 말이 없다. 이것은 이 사람이라고 해서 육신적으로 본다면 왜 죽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죽음이 종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취해 간 것이 마지막이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이 취해 간 것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셋에서 나온 것이다. 비록 다른 사람은 낳고 죽고 낳고 죽었지만 그 중에 한 사람이 나왔는데 그 사람이 에녹이다.
우리 집에 강아지가 있는데 얼룩 바둑이다. 여러 배 새끼를 낳았는데 딱 어미 개처럼 생긴 새끼는 잘 나오지 않고 조금씩 틀린다. 어미 개처럼 생긴 새끼를 낳고 싶은데 안 된다. 그래도 그 씨이기 때문에 그 족보 속에서 그와 같은 새끼가 나온다. 우리 집에 와서 보면 알겠지만 대구에 있는 어미 개와 제일 많이 닮았다. 그 씨에서 그 열매가 나오게 된다. 중간에 닮지 않은 것이 많이 나왔다. 3~4배에서 15마리 정도 낳은 셈인데 그중에 아주 비슷하게 생긴 것은 두 마리 정도밖에 안 된다. 그렇지만 그 씨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지 다른 씨 같으면 그 종자가 나올 수가 없다.
셋이라고 하는 이 자리에서 에녹이 나오게 되고, 그 마지막 결론은 노아라는 사람이 나오게 된다. 위로와 안식이라는 사람이 나오게 된다. 씨가 제일 중요하다. 우리가 거듭난다고 할 때 믿음으로 거듭난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런데 거듭나는 것은 씨가 있어야 거듭난다. 베드로 전서에 보면 우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고 썩지 아니할 씨로 되었다고 했다.
어떤 씨가 있어야 거듭나는 것이다. 썩지 아니할 씨로 거듭났다.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가 거듭난다.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 말씀은 무엇일까? 그것은 로고스(logos)인데, 로고스(logos)라는 개념은 추상적이다. 그리고 희랍 철학의 개념이니까 다분히 어떤 원리와 진리의 개념이 더 많다. 단어가 그것밖에 없어서 로고스(logos)라는 말을 썼는데, 중국 사람들은 ‘도’라고 번역을 했다. 중국 사람들의 도라는 개념에는 인격이 없다. 생명이 없다. 이치일 뿐이다. 로고스(logos)도 희랍 사람들에게는 ‘도’처럼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살아있는 씨이고, 살아있는 말씀이다. 살아있으려면 생명이 있어야 된다. 살아있는 생명 안에 만일 로고스(logos)가 있다면 그것은 인격이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추상적인 어떤 진리나 추상적인 말씀으로 거듭난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한 인격에 대해서 우리가 거듭났다는 것이다. 어떤 인격에 의해서 우리가 거듭났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달라지게 된다.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된다는 말씀을 하실 때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거듭나는 그런 방식으로 만일 거듭난다면 니고데모가 갈 이유가 없다. 그렇게 하려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니고데모는 왜 돌아갔는가? 그것은 자기에게 말하는 그 사람으로 거듭나야 되기 때문에 간 것이다. 마지막에 보면 그렇다. 처음에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여, 사람들은 물은 무엇이고 성령은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순복음 식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또 침례로 거듭나야 된다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
더 읽어 가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그 말은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것을 통해서 영생을 얻게 한다는 말이다. 그 씨로, 민수기에 보면 광야에서 뱀을 쳐다보니까 살았다는 것과 같이 십자가에 달린 한 생명을 한 인격을 바라봄으로 거듭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니고데모 같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천주교로 말하면 추기경 급에 해당되는 사람이다. 70인 공회원의 한 사람이니까 유태인 종교의 최고 지도자 급에 속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이제 갓 30세 정도밖에 되지 않은 젊은 청년이고 이름도 없고 직위도 없는 사람이 자기의 씨가 되어서 다시 나야된다는 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간 것이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존경하기는 했다. 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은 그로 말미암아 거듭날 수는 없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후에도 다시 와서 장례를 치러준 사람이다. 유성처럼 예수님 주변을 빙빙 돌다가 간 사람이다.
무엇으로 거듭나야 되는가? 씨로 거듭나야 된다.
여기서 셋을 주었는데 아브라함 시대를 다시 가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은 씨다. 아브라함을 우리가 보통 생각할 때 믿음의 조상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신 이유는 씨를 주기 위함이다. 씨와 땅이다. 씨가 바로 이삭이다.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후사라 칭할 것이라고 했다. 그 이삭이 씨가 된 것이 이스라엘이다. 이스마엘을 씨로 할 것인가, 이삭을 씨로 할 것인가에서 이삭을 씨로 해서 나온 것이 이스라엘이고, 이스마엘을 씨로 해서 나온 것이 아랍이다. 씨의 문제이다. 그 씨 하나를 낳기 위해서 100살이 넘는 그 과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씨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씨 하나가 잘못되면 농사가 다 잘못되는 것이다.
여기서 씨로 다시 시작하여 이것이 11장에 가면, 다시 모세가 되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다른 씨를 또 주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왔다는 것은 또 다른 씨를 말한다. 같은 씨는 씨이지만 씨라는 원리는 같지만 더 차원이 높은 씨,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씨다. 이삭이라는 씨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만들 수 있는 씨였다면, 예수라는 그 씨는 교회를 만들 수 있는 씨다. 하나님 백성을 만들 수 있는 씨다. 그렇게 씨가 바꾸어진 것이다.
셋이라고 하는 씨! 이 씨의 내용이 정해졌다. 그 정해졌다는 그 자리에서 내 인생이 출발하게 되면 내 인생은 셋의 계열 가운데 들어가게 되고 그 속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과정을 거치겠지만 낳고 죽고 하는 과정을 많이 거치겠지만 셋에서 이 씨에서 에녹이 나오게 되고 그리고 노아가 나오게 된다. 겨자 씨 하나를 심어놓았더니 나무가 됐던 식으로 셋이라는 씨가 들어옴으로써 내 인생에 에녹과 노아가 생긴 것이다.
정해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인생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 내 인생이 정해졌음을, 모든 인류의 운명이 정해졌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아는 것이 간단한 것 같지만 이 한 마디가 내 전 인생을 지배한다. 다른 것이 전혀 다 필요 없어지게 된다. 옛날에 C.C.C.에 있을 때만 해도 사업적인 소망이나 욕망이나 의욕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내 운명이 어디에 정해졌는지를 알고 나니까 다른 것은 다 부수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유일하게 가야 될 길과 내가 열매 맺을 길이 바로 이 자리임이 알아지면서 내 인생이 평정해졌다. 조용해지게 되었다. 원래 성격이 시끄럽지 않은 성격인데 속은 시끄럽다. 내가 분주하고 시끄러우니까 내 주변이 시끄럽게 되는 것이다. 내가 교단에 있을 때 4년 동안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때는 저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다고 생각했는데 뒤로 와서 생각해보니 시끄러운 것은 나 때문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있으면 어디를 가든지 시끄러워진다. 어떤 사람이 있으면 시끄러웠던 곳도 조용해지고, 어떤 사람이 있으면 조용하던 곳도 시끄러워진다. 여러분도 교회 목사님을 모셔보아서 알 것이다. 어떤 목사님이 오시면 조용하던 교회도 시끄러워질 수도 있고, 어떤 목사님이 오시면 시끄럽던 곳도 조용해진다. 다 사람 때문이다. 내가 뭔가 안정이 되어있지 않으면 중심이 되는 사람이 안정되어 있지 않으면 온 집안이 다 시끄러워진다. 만일 가장이 안정이 되어있지 않으면 집안이 시끄럽다. 교회 목사가 안정되어 있지 않으면 교회가 시끄럽다. 대통령이 안정되어 있지 않으면 나라가 시끄럽다. 전부 그렇다.
어디에서 우리가 안정을 얻을 것인가? 그것은 셋이라는 자리에서 정하여졌다는 자리에서 내 인생은 여기에 딱 정하여져 있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거기에 딱 정하여졌고, 그것 이외에는 인생이라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쉽게 말하면 불교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다 축생이다. 짐승과 똑같다. 오직 유일하게 다른 것이 있다면 내가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 유일하게 다른 점이다. 이 유일한 다른 점이 너무나 우리 인생을 존귀하게 다룬다. 이것을 우리가 만일 잃어버린다면 우리 인생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을 만일 내가 무시한다면 내 인생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를 버린 것은 그들의 가장 존귀한 것을 버려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껍데기만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껍데기를 계속 고수하고 있다. 구약시대에는 껍데기라도 보존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었다. 왜냐하면 아직 그 씨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씨가 다 나와 버린 콩깍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이스라엘이다. 그래서 너무너무 비참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돼버렸다. 자기들에게 주어진 길이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결국은 예수를 보고도 그 사람을 버려버렸다. 그것이 자기들의 운명이고, 그것이 자기들의 셋이었고, 이삭이었고, 자기들의 씨였는데, 그 씨를 거부해 버렸다. 세상 속에서 세상 것을 추구하려고 하니 자기들의 운명은 그렇게 못되고, 갖고 싶은 것은 세상이다 보니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래서 유태인들이 가는 곳마다 세상이 시끄럽다.
히틀러가 왜 600만 유태인을 죽였겠는가? 이유가 다 있다. 히틀러 입장에서는 유태인들 때문에 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했다고 생각했다. 독일과 연합한 나라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원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원수가 이기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독일이 패망하도록 유도를 했다. 히틀러가 분명히 전쟁터에서는 승리했는데 후방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패전하고 돌아오면서 하사관인지 중사였던 히틀러가 이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하였고, 그 원인이 유태인에게 있다고 생각하여 유태인을 말살시키려고 했다고 한다. 유태인들은 헛된 목적을 가지고 그것이 자기들의 운명인줄 알고 하다보니까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것이다. 지금도 팔레스타인이 마찬가지이다. 자기들에게 영원하게 준 기업은 저 팔레스타인 땅이 아니다. 자기들의 기업은 하나님 나라이다. 이 땅위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다. 다른 나라를 섬겨 다른 나라에게 복을 주는 나라라는 것이 자기들의 정해진 길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저 사람들은 세상에 평화를 줄 것인데, 저 땅덩어리가 자기들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싸움이 안 날 수가 없다. 우리가 지금 만주에 가서 우리 땅이라고 하면 싸움이 안 나겠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특이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없는데, 저것을 보면서 우리 인생이 자기에게 정해진 길을 모르면 아무리 택함 받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저렇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더군다나 택함 받았기 때문에 더 그럴지도 모른다. 택함 받은 사람일수록 길은 더 좁다. 사실은 좁을수록 더 영광스러운 길이었다. 그것을 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길이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의 길에 가서 방해를 하고 남의 집에 가서 자기들 것으로 만들려고 하니까 세상이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자기 것을 자기가 가져도 시끄러운 세상에서 남의 것을 취하려고 하니까 얼마나 시끄러워지겠는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몫은 제사장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세상을 섬겨서 하나님을 나타내어 하나님을 공급하는 이것이 이스라엘의 사명이다. 정해진 운명이다. 그 길을 떠났기 때문에 남의 것을 훔치는 사람으로 남을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이 되게 되었다.
다른 씨를 주셨다. 우리 인생 안에 다른 씨이신 그리스도가 온다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우리가 바꾸어지려면 다른 씨가 와야 된다. 씨 없이는 있는 것을 가지고 아무리 바꾸어도 다시 그것이다. 똘감을 가지고 별 것을 다해보아도 다시 똘감이다. 씨를 바꾸어야 한다. 감의 씨를 바꾸어야지 그 감은 그대로 놔두고 비료도 주고 거름도 주면 똘감이 더 많이 열리지 그렇다고 해서 똘감이 단감 되지는 않는다.
이것을 바울의 말 대로 하면 자르고 접붙인다고 이야기했다. 여기 말로 하면 다른 셋을 주었다. 요한의 말 대로 하면 우리에게 다른 생명을 주었다. 거듭나게 한다고 표현한다. 원리는 다 똑같다. 접붙인다는 것이나 거듭나다는 것이나 다른 씨를 주었다는 것이나 다 똑같다. 우리 안에 다른 씨가 접붙여지든지 우리 안에 다른 씨가 심어지든지 우리 안에 다른 것이 들어오든지 좌우간 무엇이 들어와서 내 인생을 평안케 하게 된다.
타락 안에서 회복의 길! 첫 번째 길은 다른 씨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첫 번째 길이다. 그리고 첫 번째 길인 다른 씨의 내용은 인생은 이미 정해져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다른 씨의 세계로 우리가 입문하는 길이다.
다른 씨! 이것이 아담은 셋을 낳고 셋은 에녹을 낳고 에녹은 노아를 낳는 계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비록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갖고 하나님의 경륜 밖으로 밀려났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다른 씨를 주셔서 우리에게 다른 소망을 갖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 망할 수밖에 없고 끊어질 수밖에 없고 버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새로운 씨를 주신 것을 감사하고 이 새로운 씨의 소망을 우리에게 에녹을 통해서 노아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길 안에서 우리 인생을 발견하고 우리가 이 길을 통해서 주님 운명을 보게 되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